동부 저 멀리
- 감독
- 데이비드 W. 그리피스
- 제작년도
- 1920
- 출연
- 릴리안 기쉬, 리차드 바델메스, 로웰 셔만
사진: " 플로우 ", IMDb 한국영화로는 두 편을 골랐다. 이란희 의 < 3학년 2학기 >(2024)는 < 다음 소희 >(정주리, 2022)와 겹치는 영역을 다루지만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르다. 멜로드라마는 최소화되었고 아마도 지속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차분한 일상성이 들어온다. 무엇보다 이처럼 일상의 노동과 그 환경에 이만큼 깊은 관심을 가지는 영화는 오래간만이다. 윤가은 의 < 세계의 주인 >(2025)을 통해 자주 다뤄진 특정 소재와 주제를 다루는 단호하고 명쾌한 방식은 놀랍고 새로우며 아름답다. < 씨너스: 죄인들 >(라이언 쿠글러, 2025)과 <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폴 토마스 앤더슨, 2025)는 올해의 할리우드 영화들이다. 지금 이 시대에 고전적인 할리우드의 재료와 스타일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고 할까. < 내 말 좀 들어줘 >(마이크 리, 2024)는 마이크 리의 방법론이 아직도 새롭고 강렬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올해는 프랑스 영화가 두 편인데 < 여름의 랑데부 >(발렌틴 카디크, 2025)에서 우린 에릭 로메르에서 시작된 전통이 로메르의 영역을 넘어 발전하고 확장되는 과정을 보게 된다. < 미세리코르디아 >(알랭 기로디, 2024)는 아마도 올해의 코미디인 것 같다. 사악하게 어처구니없지만 그러면서도 연민과 사랑에 대해 깊이 탐구하는. 그리고 <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파얄 카파디아, 2024)이 그려보이는 뭄바이는 영화가 도시를 그리는 가장 완벽한 도구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증명해 보인다. 애니메이션을 두 개 골랐다. 너무 처참해서 오히려 우스꽝스럽고, 너무 작정하고 못생겨서 오히려 사랑스러운 < 달팽이의 회고록 >(아담 엘리어트, 2024)과 바로 오늘 다룰 < 플로우 >(긴츠 질발로디스, 2024)다. 사진: " 플로우 ", 네이버 영화 <플로우>를 고른 데에는 개인적 이유가 있다. 작년에 나는 같이 살던 고양이 한 마리를 떠나보냈다. 사적인 이야기는 될 수 있는 한 하지 않으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내 고양이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한다. 그 때문에 <플로우>를 처음 보았을 때 내 개인적인 경험은 영화의 감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 영화가 드림웍스의 < 장화 신은 고양이 >(크리스 밀러, 2011)처럼 의인화된 고양이를 다룬 작품이라면 그만큼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만든 긴츠 질발로디스는 그 길을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큐멘터리처럼 사실적인 고양이를 그렸느냐. 그러지도 않았다. 이 영화의 이름 없는 고양이는 그사이의 가느다란 길을 걷는다. 담벼락 위를 산책하는 진짜 고양이처럼. 질발로디스가 창조한 세계는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곳이다. 인간들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들이 만든 것들은 크게 부서지지 않은 채 남아있다. 고양이가 사는 집에는 그곳에 살았던 인간들이 만든 것 같은 고양이 조각상과 스케치가 있다. 마치 마리 셀레스트호의 사라진 선원들처럼 인간들은 그냥 이유도 없이 갑자기 존재하기를 멈춘 것 같다. 등장하는 동물들도 이상하다. 고양이와 래브라도 리트리버가 같이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캐피바라, 여우원숭이, 뱀잡이수리가 같은 공간에 있다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곳을 우리가 사는 지구와 비슷하지만 다른 곳이라고 퉁 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세계의 물리적 실제성을 계속 의심하게 된다. 이곳은 실재하는 공간보다는 애묘가의 몽상처럼 보인다. 아마도 이곳은 인터넷 사람들이 고양이별이라고 부르는 곳인지도 모른다. 이 정도면 감독의 개인 경험을 의심하게 되는데, 정작 감독은 개를 기른다. 하지만 고양이와 살았던 경험이 있고 그 경험이 영화의 정서적 흐름에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 사진: " 플로우 ", 네이버 영화 이야기는 단순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엔 대사가 없기 때문에. 텅 빈 집에 살던 고양이가 갑자기 홍수와 마주친다. 고양이는 물을 피해 달아나고 그러다가 빈 보트 위에 올라탄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다른 동물들이 한 마리씩 보트 위에 오른다. 그들은 말이 통하지 않고 타고난 습성도 다르다. 하지만 살아남으려면 같이 어울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동물들이 나오는 고전적인 틀의 동화이다. 영화는 동물을 의인화한 수많은 동화에서 논리와 구조를 가져오고 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동물들은 모두 지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 키를 잡고 보트를 조종하고 윤리적 딜레마를 경험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먹이사슬이 교묘하게 탈색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잡아먹히는 동물들은 물고기밖에 없고 그들에겐 포유류나 조류의 생기가 제거되어 있다. 이 영화가 그리는 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다. 이 정도면 너무 쉽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작 영화의 묘사는 거기에 맞추어져 있지 않다. 여전히 영화에 나오는 동물들은 수상쩍을 정도로 사실적이다. 자연 상태에서 캐피바라나 뱀잡이수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고양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럴싸하다. 동작이나 행동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표정이 그렇다. 이렇게 정교하게 고양이 표정을 살린 애니메이션 영화를 전에 본 적이 있나 싶다. 스크린 위에서 이런 이야기와 이런 묘사와 결합되면 관객들은 아주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사진: "Peullou( 좌 , 우 )", IMDb 홍수 이야기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노아의 방주를 다룬 성서 이야기, 지구 온난화에 대한 경고. 하지만 이 두 주제는 이 영화와 완전히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구약의 홍수는 인간에 대한 신의 처벌이다. 하지만 홍수가 시작되었을 때 이미 인간은 사라지고 없다. 지구 온난화에 대한 경고로 보더라도 아귀가 맞지 않는데, 이 세계는 온난화를 촉진했을 기계 문명이 그리 많이 보이지 않는다. 이 목가적 폐허와 환경 문제를 연결해 해석을 시도하면 여러모로 무리수를 두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 세계에서 그냥 일상일까? 이 홍수가 첫 번째가 아니라는 암시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영화 속 동물들은 주기적인 홍수를 경험하며 살아온 것 같지도 않다. 이 영화의 월드 빌딩을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는 어느 단계에서 이상해진다. 결국 모든 게 애묘가의 꿈이라는 게 가장 그럴싸한 답이다. 영화를 연달아 보다 보면 이 세상을 해석하고 의미를 찾으려는 모든 시도가 그리 큰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우선 이 세계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어떻게 우리가 아름다움에 시비를 걸 수 있겠는가. 둘째로, 이 영화를 이루는 다른 존재들에 대한 연민, 동정, 이해 그리고 이에 바탕을 둔 친절함과 연대는 세상의 이해와 무관하게 존재한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친절하기 위해 굳이 세계의 숨은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주의 명령 없이 선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 사진: " Peullou ", IMDb 듀나(영화평론가) l SF 작가이고 영화 컬럼니스트다. 영화 관련 저서로는 『가능한 꿈의 공간들』(2015), 『옛날 영화,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2022), 『여자 주인공만 모른다』(2019), 『남자 주인공에겐 없다』(2020) 등이 있다.
어떤 시간은 언어로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내가 이곳에서 통과한 시간들이 그랬다. 내가 가진 언어의 한계로는 도저히 써낼 수 없는 것. 거대하고, 두렵고, 지저분하고, 복잡한 동시에, 달고, 기특하고, 사랑스러운 순간들을 만끽했다. 고로, 나는 특별한 목적보다는 기억의 흐름을 충실히 따라 첫여름의 제작 과정을 기록한다. 여전히 전부 소화해낼 수 없는 감각을 안고, 순간을 돌아본다. < 첫여름 >(2025)은 여성 노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국영화아카데미(KAFA)에서 연출을 공부하며 만들었던 졸업작품이기도 하다. 졸업작품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잘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여자들의 이야기에 허기를 느꼈다.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은 나의 중추이다. 나는 자라면서 여자들이, 나아가 사회의 정상성에 어긋나는 존재들이 따갑고 납작한 사회에서 어떻게 투쟁하고 생존하는지 보고 겪었다. 축적된 분노와 우울은 나를 움직이게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사회에 균열을 내고 싶은 갈망이 맺혔고, 그 창구가 내게는 영화였다. 자연스레, 졸업작품으로 불편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문득 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의 할머니는 얄밉고 이기적이었다. 우리 둘은 잠깐 동거를 했었는데 할머니는 내게 어떠한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매일 마스크팩을 하시면서도 나에게 한 장을 나눠주지 않았었으니까. 그러다 어느 날 대학 과제로 할머니를 인터뷰하게 됐다. 그녀의 연애담을 들었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당신이 춤을 출 때 누구보다 신이 나고, 음악을 힘껏 사랑하는지를, 그리고 그 남자와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자신다워지는지를 서툴게 표현하시던 얼굴이 선명하다. 삶이 바빠 할머니를 잊었다. 아코디언이 너무 갖고 싶었지만 비싸 사지 못한다고 했던 할머니를, 애인 소식을 듣지 못해 앓던 할머니를 어린 나는 그토록 쉽게 잊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그녀의 49재에서 불경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가 마치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카바레 음악처럼 들렸다. 고개를 드니, 넓은 대웅전 마루에서 누구보다 자유로이 춤을 추는 할머니가 보였다. 한동안 나는 그 장면에 사로잡혔고, 기필코 이를 영화에 담아내 갖겠다고 결심했다. ‘관객들이 노인이 아닌 한 여자와 동행했다고 느낄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 이 다짐 하나를 손에 쥐고 <첫여름>을 쓰기 시작했다. 대웅전 주변에 앉은 영순(허진) <첫여름> 초고는 지금의 완고와 완연히 다르다. 초고는 손녀의 시점에서 어딘가 평범하지 않은 할머니 영순을 이해하게 되는 전개였다. 심지어 삼대가 만두도 빚었었다. 학수도 살아있었다! 어찌 됐든 초고는 실화와 훨씬 가까웠고, 지금의 영화 톤보다 안정적이고 온화했다. 거칠게 쓴 초고를 학교에 들고 갔을 때, 반응이 좋아 어리둥절했다. 수많은 물음표들을 훑기도 전에 나는 졸업작품을 함께 할 학우들과 본격적인 프리 프로덕션을 시작해야 했다. 곧이어 언어로는 절대 서술할 수 없는 고통, 재난 같은 고역의 시기가 찾아왔다. 시나리오가 써지지 않았다. 탈고를 가져가면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초고보다 나은 고를 쓸 수가 없었다. 이동을 잘 하지 않는 내가 어떻게든 환기를 해보겠다며 이리저리 싸돌아다니며 시나리오를 썼다. 동기를 따라 한답시고 스터디카페까지 도달한 나는 밤새 홀로 앉아 텅 빈 모니터를 바라봤다. 아침 8시였다. 여전히 모니터도, 머리도 텅- 비어 있었다. 노트북 자판 위로 눈물이 뚝뚝 맺혔다. 그 고통은 공포였다. 나에겐 시나리오와 나를 보고 모여준 팀원들이 있었다. 그들의 기대를 꺾지 않는 연출자가 되고 싶었다. 내가 쓰고 결정을 내려야 다른 팀원들이 움직일 수가 있었다. 그 이상으로 나를 공포에 내몰았던 존재는 할머니였다. 학교 수업의 일환인 시나리오 크리틱에서 나는 단언했다. “내 졸업영화를 본 누군가가 ‘할머니 팔아먹은 영화’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부끄럽지 않은 영화를 만들겠다.” 할머니의 존재는 몸집이 점점 커지더니 나를 꾸짖었다. 너 따위가 한 사람의 존엄하고 아득한 삶을 꾸며내려고 하다니. 네게 어떤 자격이 있다고. 감히 이야기를 쓸 수 없었다. 모든 게 다 위선이고 거짓 같았다. 나는 고작 누군가의 삶을 담보 잡아 이야기를 쓰는 사람인가. 자괴감이 해일처럼 나를 쓸고 해쳤다. 시간은 내 멱살을 잡아끌어 초고는 어느새 완고 비스름한 것이 되어있었다. 다행히 어느 정도 무난한 평가를 받았다. 그럼에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나를 돌아보게 했다. 할머니는 여전히 내 숨을 엄하게 짓눌렀다. 잡념과 눈물이 차올라 무엇을 해도 해소되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교수님을 찾아갔다. 허겁지겁 정리되지 않은 말과 추잡한 감정들을 와르르 쏟아냈다. 교수님은 잠자코 들어주셨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불쑥 한 문장이 튀어나왔다. “사실 전 제가 쓴 시나리오가 너무 불편해요.” 불편한 시나리오를 쓰고 싶었다. 그러나 초고의 불편함은 내가 의도한 것과 정반대의 것이었다. 난 그걸 견딜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 새로운 고를 써 내려갔다. 손녀 석윤이 아닌 영순이 오롯이 주인공인 시나리오였다. 시나리오 속 인물들이 드디어 사람같이 숨을 쉬고 근육을 움직였다. 오랜만에 단잠을 잤다. 가뿐했다. 신비한 경험이었다. 초고를 쓰며 나는 손녀의 시선으로 영순의 삶을 그렸다. 20대 여성이 보고 싶은 노인 여성 캐릭터를 만들었다. 노인을 전시하고 대상화한다는 감각을, 그 숨 막히는 불쾌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건 이 이야기의 출발을 배신하는 일이었다. 타인의 삶을 가볍게 다루는 순간, 그걸 본능적으로 아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나였다. 그 죗값은 고스란히 작가에게 돌아간다. 다음 날, 나는 할머니 영순이 주인공인 새로운 고를 A고, 손녀 석윤이 주인공인 이전 고를 B고라고 이름 붙여 팀원들에게 갔다. A고는 등장인물조차 정리가 안 된, 침 냄새가 나는 갓난아기 같았고, B고는 더 이상 돌볼 게 없는 장성한 자식 같았다. 촬영까지 딱 한 달 남은 시점이었다. 웃기게도 나는 흔들렸다. AB고 대첩은 정확히 반반으로 파가 갈릴 정도로 팽팽했다. 프리 프로덕션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라, 어느 시점에는 다 큰 자식을 독립시켜 안락하게 노후 준비나 하고 싶은 유혹을 버리지 못했다. 나는 선택을 유보하고, 불확실성의 무게를 가늠하고자 발버둥 쳤다. 팀원들은 굳건히 내 선택을 기다려주었다. 안전한 길을 두고 도박을 하고 싶다는 연출자에게, ‘네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후회 없이 하라며 독려하고,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내어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A고를 택했다. 나는 할머니 영순의 마음이, 그녀의 세계가 궁금해 <첫여름>을 썼다. 태초부터 주인공은 정해져있었다. 우리 영화의 쟁점은 ‘노인’이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영순은 극중 70대였다. 70대 배우를 찾아야만 했다. 세월을 연기로 속일 수는 없었다. 게다가 노인 배우는 일할 수 있는 시간이 확연히 제한된다. 당연하다. 노인 배우는 배우이자 노인, 즉 사회적 약자이기도 하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현장에서, 시간을 한정하고 노인 배우가 안전히 연기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로케이션도, 이동도 적지 않았다. 나아가, 노년기 삶을 가깝고 정직하게 담아내야 했다. 사려 깊고 섬세한 동료들, 그리고 영리한 준비와 현장이 필요했다. 영화를 만들어본 경험이 많지 않지만, 연출자로서 영화를 만드는 일은 ‘하나의 작은 세계를 구축하는 일’과 같았다. 상상도 못할 만큼 커다란 품과 열정을 필요로 한다. 현장은 재난과 축제가 동시에 일어나는 무시무시한 곳이기도 하다. 연출자는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민하게 타인을 관찰해야 한다. 나의 한계를 채워줄 귀인을 알아보아야 하고, 계속해서 도움과 소통을 청해야 한다. 나같이 느리고 서툰 연출자에게 <첫여름> 팀은 든든한 버팀목이자 행운이었다. 확신이 없어도 현장에 가고 보는 대책 없는 나의 버릇은 그대로였다. 안 그래도 난도가 있는 프로덕션이었다. 맨땅이 얼마나 단단한지 두들기지도 않고 무식하게 머리만 박았다. 나는 끝까지 엔딩을 정하지 못한 채 촬영을 진행했었다. 나도, 팀원들도 만족할 만한 엔딩을 쓰지 못했다. 이상했다. 첫 장면은 머릿속에서 재현될 만큼 확연했는데, 영순을 어떻게 보내줘야 할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첫여름> 촬영 현장 더불어, 나는 콘티에 약한 연출이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뚜렷하지만, 이를 장면화하는 일에 대한 기술이 부족하다. 카메라나 사운드에 대한 이해도 다른 동기들보다 없었다. 그런데도 지독하게 욕심을 부린다. 나와 김시진 촬영감독은 우리 둘 모두 만족하지 못한다면, 절대 콘티를 그리지 않았다. <첫여름>에서는 사찰에서 영순이 춤추는 씬이 공백이었다. 콘티는 있기야 했지만 사실상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내가 연출자로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일 촬영 계획표가 변동되며, 휠체어 씬과 사찰 씬을 다 소화해야 하는 날. 결국 휠체어 씬의 반 이상을 찍지 못한 채 사찰로 이동하면서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사찰 입구로 진입하고 있었다. 사찰에서의 춤 씬을 설계하고 설득할 유일한 기회는 허무하게 끝났다. 녹음의 그림자를 멍하니 바라보며 무책임한 나를 증오했다. 스태프들이 밥도 먹지 못한 채 분주하게 몸을 움직였다. 고요하고 우아한 자연 속에 고장 난 내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해가 지면 사찰에 다시는 못 온다. 한복을 입고 휠체어를 직접 다 끌며 열연하셨던 허진 선생님은 지칠 대로 지쳐 계셨다. 나는 춤을 포기할까, 순간 망설였다. 그런 나 스스로가 오싹했다. 사찰에서 영순이 춤을 추는 모습 하나를 보기 위해 달려가던 이야기였다. 어떻게든 찍어내야 했다. 허진 선생님 또한 즉흥적으로 춤을 추는 감정에 대해 다른 해석들을 주셨다. 어느 지점에는 춤을 추는 감정이 당신에게 다가오지 않아 어려워하셨다. 배우도, 콘티도, 시간도 모두 내게 허락되지 않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이를 악물고 찍었다. 이 씬을 찍지 않으면 이 영화는 모든 의미를 잃는다. 이 작품 하나를 위해 모인 수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은 버티고, 설득하고, 성실히 시간을 붙잡는 일뿐이었다. 스스로 분노가 치밀었다. 가장 중요한 씬을 왜 이런 식으로 방치했을까. 허탈했다. 그런데, 테이크를 갈수록 내가 그렸던 할머니의 얼굴이 허진 선생님 위로 살며시 드리워졌다. 선생님의 몸짓을 보고 마음에 미약한 움직임이 일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할머니의 49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 무언가가 만들어지고 있구나. 사찰 씬이 나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망가지고 있었음에도, 알 수 있었다. 그제서야 알싸한 가을 냄새가 코에 맴돌았다. 내가 만약 확신을 가지고 배우와 스태프들을 설득했었다면 그날 사찰 씬 촬영은 달라졌을 수 있겠다. 그 장면을 편집할 때마다 나는 현장의 나로 돌아갔다. 모두를 불안하게 하는 나를 묵묵히 지켜보다 겨우 기억에서 빠져나왔다. 뭐가 됐든 나는 동료와 배우를 설득해내지 못한 연출자였다. 자책에서 벗어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확신과 솔직함의 줄다리기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 연출자로서 얼마나 중요한지 배울 수 있었다. 사찰 앞, 춤을 추는 영순 허진 선생님과의 작업은 연애와 같았다. 나는 프리 기간 거의 매주 부산-서울을 통근하며 그녀의 집 앞까지 찾아갔다. 당일치기로 다녀온 적도 많았다. 그녀와 처음 대본 리딩을 하고 팀원들에게 긴 글을 썼다. 확신을 잘 갖지 못하는 내게 확신을 준 배우였다. 나는 분명 허진 선생님에서 우리 할머니를 보았다. 허진 선생님은 톡- 쏘는 청귤 같았다. 작고 푸른데, 시면서도 달고, 균일하지 못하고 예측할 수 없으면서도, 이해 가능하고 사랑스러웠다. 새침하고 외로운 여자지만, 사랑받고 싶어 하셨고, 사랑하고 싶어 하셨다. 그녀는 그 시절을 버텨낸 여성들이 문신처럼 가진 흉터를 가졌다. 그게 우리 할머니를 닮아 괜스레 마음이 저렸다. 영순은 더 이상 우리 할머니가 아니었고, 나는 그 굴레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그럼에도 허진 선생님과 우리 할머니가 닮은 것을 거부하지 않도록 했다. 나의 전략은 허진 선생님이 그녀 자신으로 연기해도, 영순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 즉, 허진과 영순의 경계를 허무는 일이었다. 선생님을 끈질기게 관찰하고, 그녀가 살아온 삶을 깊숙이 이해하는 일이 초짜 감독인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우리는 그렇게 웃고 떠들고 싸우고 지치고 애정하며 관계를 쌓았다. <첫여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많았다. 노인을 20대 여성이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오판은 아니었다. 나는 나와 전혀 다른 생애주기를 살아낸 한 여자가 되어 말을 하고, 감정을 서술해야 했다. 내 시나리오의 빈칸들은 내가 진정으로 영순의 신체와 일상을 이해할 수 없음에서 비롯됐다. 별 수를 다 써봐도 영순이 어떻게 섹스를 하는지, 아침에는 어떤 컨디션인지, 긴 길을 걷는다는 의미가 그녀에게 무엇인지, 느껴지지 않았다. 영화는 보통 컷 사인과 동시에 현실로 돌아간다. 배우는 연기를 멈추고, 다시 자신이 된다. 그러나 허진 선생님은 달랐다. 나는 5회차 촬영 내내 영순이 된 허진을, 허진이 된 영순을 봤다. 빈칸들은 허진 선생님으로 인해 메꿔졌다. 허진 선생님 손등에 난 검버섯 하나와 주름 한 겹이 꾸며낸 대사 몇 줄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선배는 선배라는 이름을 가진 이유가 있었고, 나는 신이 나 그 세월을 훔쳤다. 허진 선생님의 몸짓과 숨소리는 내가 연출해낸 것이 아니다. <첫여름> 촬영 중 허진 배우와 허가영 감독 영화 속 영순의 대사, “그놈이 만져주면 동하더라.”는 원래 “그놈이 만져주면 젖어.”였다. 카바레에서 영순과 덕희( 김미향 )는 요실금으로 인해 기저귀를 주고받았었다. <첫여름>을 쓰면서 절대로 지우고 싶지 않았던 장면과 대사였다. 그러나, 허진 선생님과 리딩을 한 첫날, 선생님은 바로 이 대사와 장면을 빼자고 제안하셨다. 노인에 대한 해석이 너무 가볍게 보일 수 있다는 이유였다. 우리는 기싸움을 했고, 나는 벼랑에 매달려 애원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국 허진 선생님의 말을 따랐다. 그만큼 허진 선생님 또한 다른 부분들을 내게 선뜻 양보해 주셨다. 아직까지도 그것이 나의 타협일 수도 있었겠다는 자책이 맴돈다. 그러나, <첫여름>은 배우에게 기대 살을 붙이는 영화였다. 치열하게 설득한 후, 기꺼이 배우를 믿었기에 완성할 수 있었던 영화였다. 젊은 내가 노년 여성의 삶을 다루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세계였기에, 말투 하나, 몸의 반응 하나까지 막막했다. 그래서 나는 많은 노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실제로 카바레를 무작정 찾아가 춤을 즐기는 분들과 가까워져 그분들을 영화의 단역으로 모시기도 했다. 카바레에서 동료들과 맥주를 까마시고 그 공간이 가진 온도와 냄새를 살갗으로 느꼈던 순간들, 그곳에서 맴도는 언어와 소문들을 훔치고, 노인들과 함께 춤췄던 순간들을 <첫여름>을 만들어가며 가장 사랑했다. 노인은 욕망하는 주체이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노년 여성의 욕망을 지우고, 외면하고, 혐오한다. 소위 춤바람, 노망이라고 일컬어지는 노인들의 움직임은 분명한 역동을 가진다. 속절없이 늙어버린 신체와 삶 안에서도 그들은 끝없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이를 통해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렇게 그들은 살아간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여자일 수 있고, 남자일 수 있고, 결국 ‘인간’일 수 있다는 그 사실에 기대어 존재를 긍정한다. 나는 할머니와의 대화에서, 카바레에서 만난 노인들의 흘린 땀에서, 그 몸부림과 사랑에서 노인들이 만들어간 문화와 생존을 보았다. 특히, 영화 속 여성의 욕망은 종종 극단적으로 다뤄진다. 억눌리거나, 폭발하거나. 하지만 그사이에는 다양한 결이 있다. 나의 외할머니 역시 사랑을 하고, 춤을 췄지만, 동시에 고된 시집살이를 견뎠다. 그 복잡하고 다층적인 면모에서 ‘영순’이라는 인물이 탄생했다. <첫여름> 편집 기간은 쉽지 않았다. 나는 원체 편집을 못한다. 속옷가게 씬 편집할 때는 손도 못 대고 벙쪄 있던 기억이 있다. <첫여름>을 사랑했기에, 현장이 눈앞에서 재생되고 후회가 몰려왔다. 지금의 <첫여름>은 처음 그렸던 <첫여름>과 닮고도 많이 달랐다. 이 영화는 더 지저분하고 사람 냄새가 그윽한 영화이길 바랐는데, 내가 더 갔어야 했는데, 밀어붙여야 했는데. 그 실망이 나를 주저앉혔다. 그러나 <첫여름>이 담아낸 영순의 얼굴은 그런 나를 일으켜 세웠다. 이 이야기는 로맨스 영화가 아니라 한 여성의 주체성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 노인들이 삶의 마지막 궤적에서 춤을 추고, 사랑하고, 관계를 맺어가는 그 움직임은 아름답고도 인간적이라는 것. 이는 우리가 이야기로서 마주할만한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 사랑, 섹스 그리고 삶은 누군가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 나와 이 작품을 함께 만들어간 배우들과 동료들이 굳건하고 세밀하게 만들어낸 토대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이 이야기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그리고 이 작품이 가진 생명을 다시 직시하고 믿으며 <첫여름>을 만들었다. 칸영화제에서 내 영화가 아주 먼 곳에서 온 관객들을 만나고, 선명히 상영되고, 수상했던 기억을 가끔 꺼내어본다. <첫여름>이 영화가 되고, 사랑을 받으며 칸국제영화제에 초청이 되면서 내 삶은 질주하듯 전복됐다. 그 변화가 생생한데도 불구하고, 그날의 감정은 거대하고 짙어 지금도 소화하는 과정에 있는 듯만 하다. 시상식 때 1등으로 내 이름이 호명되었던 순간은 특히 그렇다. 수상 발표가 나자마자 동료들 모두가 놀라서 울기 시작했고, 나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로 수상 소감을 발표하러 무대에 올랐다. 심사위원 중에 내가 깊이 존경하는 마렌 아데(Maren Ade) 감독이 있어 벅차고 떨렸다. 영어로 더듬더듬 소감을 말한 뒤 동료들 곁으로 도망치듯 돌아갔다. 칸국제영화제 라 시네프 섹션 수상 현장 그저 신기했다. 칸영화제는 영화인들에게 꿈의 무대인 만큼 눈이 부셨다. 쿠엔틴 타란티노랑 같은 공간에서 영화를 보고, 거리를 지나다니는 엠마 스톤을 봤다. 한편으론 영화제가 지나치게 화려해 상처받은 순간도 있었다. 종종 영화제가 너무나도 눈이 부셔 내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았다. 낮은 곳의 이야기에 주목하며 박수를 보내면서도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이 모든 문화적 자본을 누리고 소비하는 자리라는 점에서 모순을 느꼈다. 영화학교 학생들이 모이는 라 시네프 섹션에서 전 세계 각지에서 영화를 만드는 또래 감독들을 만났다. 우리는 서로가 만든 영화를 비교하고, 만져보고, 느끼며 신났다. 그들과 소통하며 동시대의 영화인들이 가지는 시선을 봤고 큰 자극을 얻었다. 무엇보다 기쁜 건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무수한 얼굴의 관객을 만나는 일이었다. 상영 전 발표를 해야 해서 앞줄에 앉아 영화를 관람했는데, 관객들이 영순의 표정과 마음을 따라가며 신나게 웃고 격하게 울어주었다. 나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가닿아 감정을 일으키고, 우리가 공동체가 되어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그 귀한 감각을 만끽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관객의 얼굴을 지켜보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상영이 끝나자 관객들이 다가와 소감을 말해주었다. <첫여름>은 그 많은 관객들 하나하나를 만나 그보다도 더 거대한 이야기로 뻗어나가고, 새로운 생명을 얻어나갔다. 이 날 것의 반응들과 감정들을 지켜볼 수 있어, 나는 참으로 복 받은 연출자였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노인 관객들이 ‘삶의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라며 고마움을 전했을 때는, 내가 왜 창작자로서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되새길 수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나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사회와 연결되고, 인간과 대화하고 싶어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다. 영화는 솔직하고 아름다운 예술이다. 내가 그곳에서 사랑했던 진실을 잊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쓰고 영화를 만들고 싶다. <첫여름>과 함께 내가 자라날 수 있었다. 연출자로서 이토록 가득해 넘쳐흐르던 첫여름이었다. 허가영(영화감독) l 솔직한 영화를 만들고, 필요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 < 너를 심을 땅 >(2025), <첫여름>(2025) 연출·각본. * 촬영 현장 및 일부 스틸: 필자 본인 제공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인 구술사' 시리즈를 바탕으로, 자료가 없어 실체를 알기 어렵던 사건과 인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인의 입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전달합니다. 취향에 맞는 영화라는 것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불쑥 나타나기도 한다. 이미 정전으로 기록된 작품 목록의 외부를 끊임없이 훑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지영 감독의 이력에서 데뷔작인 <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 >(1982)나 대표작으로 꼽히는 < 남부군 >(1990), < 하얀전쟁 >(1992)을 아는 사람들은 많아도, < 산배암 >(1988)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당대의 영화평론가들이 이 영화를 다음과 같이 보았다. “이 작품 <산배암>의 광고 문안이나 포스터를 보면, 바로 그런 류의 한탕 영화라는 짐작을 하게끔 만든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면 그러한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이유는 이 영화가 오히려 ‘벗기기’와 ‘지방 장사’가 기피하는 사회현실의 반영과 약간의 정치의식마저 담고 있기 때문 이다. 필자는 이 작품이 중견 정지영 감독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요즘 나온 영화 중 장선우 감독의 < 성공시대 >와 더불어 사회성 영화로 퍽 드물게 성공한 예에 속한다고 보았다.” - 정재형, “[영화평] 한국영화가 좋아지고 있다는 증거, 정지영 감독의 <산배암>”, 《스크린》 1988년 10월호(통권56호), 284쪽. “4년여의 긴 공백 끝에 만든 < 거리의 악사 >는 검열로 인해 부분적인 사회묘사마저 생략됨으로써 평범한 멜로드라마로 평가될 수밖에 없었으며 화제작이었던 < 위기의 여자 >는 과다한 나눠찍기에 의한 편집이 거슬리는 1930년대 할리우드의 여성관객용 멜로드라마의 재판이었다. 1988년에 만들어진 두 편의 영화 < 여자가 숨는 숲 >과 <산배암>은 정지영 감독의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최악의 작품이었다. 정신분석학적 접근과 계급의식이 배제된 이 두 편의 여성 심리를 다룬 영화들은 충무로의 장르영화에 불과하다 .” - 전양준, “젊은 평론가가 본 한국 영화감독 10인 (5) 정지영”, 《한겨레》, 1990년 7월 1일자 11면 기사. 음? 어떻게 이렇게 상반된 평가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위의 글이 <산배암>의 사회현실 반영과 정치의식(이 글의 뒤에서 이를 계급의식이라고 보충한다)을 높게 평가하고 있는 반면, 아래의 글은 ‘계급의식이 배제된’ 영화로, 심지어 정지영 감독 작품 중 최악의 영화로 평가한다. 당연히 하나의 영화에 대한 평가는 보는 이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같은 지점에 대해 전혀 다르게 보는 경우는 흔치 않다. 도대체 <산배암>은 어떤 영화인가? 탄실이는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뱀도 잡고 벌레도 잡는 이 구역의 최상위 포식자이자 순박한 산골소녀이다. 그러나 집은 가난하고 산골에는 일자리도 마땅치 않기에 탄실이는 소개를 받아 부잣집으로 들어간다. 마을 사람들은 떠나는 탄실의 뒤에서 ‘식모살이’를 가게 되었다고 수군대고, 일을 소개해 준 사람은 펄쩍 뛰며 ‘건강이 안 좋은 부잣집 사모님을 돌봐주는 일’이라고 정정해준다. 실제로 탄실이가 도착한 부잣집은 이미 나이 든 식모가 일을 봐주고 있으며, 탄실에게는 사모님의 휠체어를 밀어주거나, 목욕을 시켜주는 정도의 일이 주어진다. 오히려 사모님은 자신의 비싼 옷을 탄실에게 주며 앞으로 자신의 것은 모두 탄실의 것이기도 하다는 다정한(?) 말도 해준다. 하지만 이들의 평화로운 나날을 깨뜨리는 인물이 나타나니 이 집의 주인인 사장님이다. 사장님은 수상한 여자로부터 반복적으로 걸려오는 전화를 피하고, 사모님은 자꾸만 사장님과 탄실 둘만 방에 남을 기회를 만들려고 한다. 그렇다. 탄실이는 사실 불구가 된 사모님을 대신하여 씨받이가 되기 위해 이 집에 온 것이다. 이 영화가 개봉하기 1년 전에 < 씨받이 >(임권택, 1986)가 국내 각종 영화상을 휩쓸었을 뿐만 아니라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강수연 이 여우주연상을 탄 이후라 이러한 소재가 그다지 낯설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아, 또 뻔한 이야기겠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 영화의 진짜 묘미는 이 다음에 있다. 탄실은 결국 아기를 빼앗기고 집에서 쫓겨난다. 이런 상황에서 탄실은 무엇을 원할까? 복수? 우리의 탄실이는 이래 봬도 산골에서 뱀도 잡고 벌레도 잡고 놀던 건강한 소녀이다. 그녀는 복수에서 더 나아가 이 집의 최상위 포식자가 되고자 하고, 그 과정이 영화 속에서 반전에 반전을 더하며 펼쳐진다. ‘산배암’이 된 탄실이는 독으로 상대를 단박에 물어 죽이는 것이 아니라 시커멓게 똬리를 틀고 들어앉아 천천히 숨통을 조이며 이 집안에 가장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나머지는 영화를 통해 직접 확인하도록 하자. 그래도 명색이 ‘구술로 푸는 한국영화사 미스터리’가 아닌가. 구술에 대한 이야기 한 마디 하지 않은 채 끝을 낼 수는 없다. 그럼 이제 한 집안을 집어삼키려는 ‘산배암’보다 더욱 어둡고 음습하고, 찝찝한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여러분 이 영화 한 번만 봐주세요 정지영과 1988년 정지영 감독은 여러모로 1988년 한 해 동안, ‘뱀’과 인연이 많았다. <산배암>은 8월 27일 코리아극장에서 개봉했다. 그리고 한 달 뒤, 미국 직배영화 < 위험한 정사 >(아드리안 린, 1987)가 한창 상영되고 있던 신영극장과 코리아극장에 영화감독 장길수 와 조감독 최진식 이 뱀을 풀며 소란을 피웠고, 이로 인해 두 사람은 업무방해혐의로 체포했다. (“미영화 직배 반대 시위 두 영화감독 즉심 넘겨”, 《동아일보》, 1988년 9월 27일자 14면 기사) 사건이 그렇게 끝나는 건가 싶었는데, 1년 뒤인 1989년 9월 4일 정지영 감독은 포항에서 <남부군> 촬영 도중 경찰에 체포되었다. 혐의는 코리아극장과 신영극장에 뱀을 집어넣도록 사주했다는 것이다. 나머지 이야기는 정지영 감독에게 직접 들어보자. UIP 직배반대시위 (사진: 부산시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정: 매일 코리아극장하고 신영극장 양쪽에, 그때 미국영화 직배가 상영될 때니까. 남: <위험한 정사>. 정: 어어. 그래 양쪽에 가서 매일 데모를 하면서 저녁에 들어와서 회의를 하고 헤어지고, 매일을! 그랬어요. (중략) 그런데 그렇게 데모를 할… 그때 88올림픽을 앞두고 어느 구역 안에서는 일체의 시위가 금지돼 있었다구. 근데 그거를 우리는 무시하고 한 거거든? 근데 신문에 안 나. (웃음) 신문에 단신으로 “영화인들이 이렇게 데모하고 있다” 나오고. (중략) 그래 그것이 쌓이다가 사람들이 지쳐가고 그러니까 누가 뱀 얘길 꺼낸 거지. “언제까지 이렇게 싸울 거냐” 정부에서 무슨 반응이라도, ‘자, 보자. 왜 그러냐. 너네들 만나나 보자’ 이런 반응도 없고. 기자들이 와서 취재도 안 하고. “이거 어떡할 거냐.” 그래서 누군가가 “이거 사고 치지 않으면 신문에 안 납니다.” (웃음) 그래서 “사고를 어떻게 치냐” 그랬더니, “사고를 곱게 치는 법이 하나 있다. 지금 <위험한 정사>를 하고 있는 극장에 뱀을 놓으면은… 물론 독 없는 뱀을 놓으면은, 사람들은 놀라겠지만 그걸로 크게 신문에 나면 극장은 며칠간 문을 닫고, 그럼 그건 사고다. 기자들이 안 다룰 수가 없다, 왜 그렇게 됐는가를. 그걸 해야 된다.” 이렇게 주장을 하는데, 그 주장을 한 사람은 옛날에 그런 사건이 있었대요, 충무로에. 어느 극장에 뱀을 넣어서 며칠 뭐 ‘일주일간의 휴관을 했다’ 이런 게 있었대. (136~137쪽) ‘뱀 얘기’를 제안한 사람의 “어느 극장에 뱀을 넣어서 휴관을 했다”라는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이 사건도 매우 재미있으니, 이야기가 나온 김에 살펴보고 가면 좋을 듯하다. 1958년, 충무로 극장 주변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깡패끼리 백주에 집단폭행이 일어나더니 그 보복을 하기 위하여 극장 관람석에다 뱀까지 집어넣어 관객들이 한때 혼란을 일으키고 다시 복수전을 전개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중략)… 지난번 29일 낮 11시경 세기극장 주변의 주도권을 빼앗으려고 극장 주변에 모였던 소위 명동파와 종로파 간에 패싸움이 벌어져서 …(중략)… 2일 밤에는 세기극장 관람석에다 뱀 두 마리를 집어넣어 관객들이 일대혼란을 일으킨 일이 있으나 이 뱀은 어느 파에서 집어넣은 것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한다. - “새로 개관한 세기극장에 뱀 소동”, 《조선일보》, 1958년 6월 5일자 2면 기사. 이전에 “ 한국영화 야인시대 ”에서 한 번 다룬 적이 있지만, 1958년에는 임화수 로 대표되는 종로파와 이화룡 으로 대표되는 명동파를 통하지 않고는 극장의 운영이 불가능했다. 이정재라는 든든한 뒷배를 갖고 있던 명동파는 틈만 나면 종로파와 세력 다툼을 벌였는데, 여기에 영화계에 갓 뛰어든 세기상사의 ‘세기극장’이 애꿎게 세력 결투의 장이 된 것이다. 사실 이 시기 명동을 중심으로 한 영화산업의 흐름은 조용히 충무로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건달 세력들이 자리를 잡고 있던 명동도, 종로도 아닌 ‘충무로’에 사업가 출신의 영화제작자(수입업자)들이 새로운 터전으로 잡고 모여들면서 시작되었다. 최근 진행하고 있는 신창영화사의 전석진 대표의 구술을 살짝 스포하자면, ‘화성영화사(이화룡)-한흥영화사( 최관두 )-대원영화사( 원선 )-한성영화사( 정진모 )’는 명동을 중심으로 하는 ‘명동파’의 대표들이었다. 이들은 각각의 회사인 듯 보이지만 하나의 쩐주를 통해 굴러가는 한 덩어리였다고 한다. 이를 깨고 나오기 시작한 것이 무역을 통해 크게 성장한 기업가들이었다. 세기상사가 그랬고, 이우석 이 영화계에 뛰어든 것도 이 시기였고(아직 동아수출공사는 설립 전이다), 불이무역이나 동양영화사와 같은 영화사들이 모두 무역업으로 시작해 충무로에 극장을 세우고 영화계로 들어왔다. 이 이야기는 그 나름으로 크고 재미있는 얘기니까 이쯤에서 접어야겠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다루어볼 것이다. 아무튼 저 ‘뱀 소동’의 이면에는 이러한 충무로 vs 명동의 세력 다툼이 배경에 있었다는 사실만 알아두자. 직배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극장에 ‘뱀을 넣자’라고 제안한 사람은 무려 30년 전에 있었던 사건을 기억해내고 의견을 낸 것인데, 이는 다시 말해 그가 1988년 직배저지투쟁이 벌어지고 있던 당시 영화계 원로의 위치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한 번만 더 스포를 하자면, 역시 올해 진행하고 있는 주제사의 구술자인 정병각 감독은 이 시기 직배저지투쟁과 스크린쿼터사수투쟁을 떠올리며, “원로영화인들의 참여가 매우 활발했다”라고 회고했다. 당시 영화계에서 원로영화인들은 딱히 일거리를 찾지 못해 그 지위가 매우 약해진 상황이었는데, ‘직배’라는 거대한 적을 앞에 두고 자신들의 역할이 생긴 것에 내심 새로운 활력을 얻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직배저지투쟁이나 이후 이어진 스크린쿼터사수투쟁과 영화진흥법 투쟁은 겉으로 보기에는 ‘미국영화 직배’라는 외부 세력과의 투쟁인 동시에 기존 충무로 세력과 새로 유입된 충무로 신진 인력들 사이의 세력 투쟁 또한 내재하고 있었다. 세력 다툼엔 역시 ‘뱀’이 등장하기 마련인가보다. 뱀은 사라졌지만… 다시 1988년으로 돌아오자. 저 뱀 제안을 듣고 회의가 진행 중이던 장내에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정지영 감독은 공식적으로는 저 의견에 반대 의사를 표했다. 정: 내가 말은 나왔지만 이것은 공식화 되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여러분들이 박수를 쳤지만은 이것이 실현될 수는 없는 겁니다. 우리가 그런 사고를 어떻게 칩니까. 일단 이건 없던 걸로 합니다. 회의록에도 지웁니다.” 이렇게 하고 헤어지고난 다음에 그 아이디어를 제안했던 사람을 불렀어, 내가. “어떻게 뱀을 넣냐?” (모두 웃음) “뱀을 어떻게 넣냐. 누가 넣냐, 도대체?” “아니 이거 사람 사서 넣으면 되는 거지 우리가 어떻게 넣냐” “그러면 뱀은 어디?” “아이, 청계천 가면 뱀 많다.” (웃음) 그래서 그 사람을 통해 시켜서 청계천 가서 꽃뱀 사 가지고, 사람 사 가지고 뱀을 넣었지. 그러나 ‘뱀들은 극장 안에 있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차갑고 거친 시멘트 위에서 독이 올라 몽글몽글 자기들끼리 엉킨 채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라고 한다( 2022년 주제사 1권 <김형종> 2차 구술채록문 , 90~91쪽 참조). 결국 뱀의 출현은 다소간의 소요를 일으키기는 했지만, 대세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한 채 조용히 지나가는 듯했다. 그리고 그사이 싸움의 방향이 바뀌었다. 영화인들은 ‘직배’가 영화산업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외교의 문제이기 때문에 저항을 한들 그 거대한 흐름 자체는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직배저지’가 아닌 ‘스크린쿼터사수’와 ‘영화진흥법 제정’ 운동을 펼쳐나갔다. 그런데 앞서도 말한 대로, 이 사건은 1년 후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남부군> 촬영 현장. 이 사진의 뒷면에는 ‘이 장면을 찍고 밤에 서울로 연행 당함’이라는 메모가 적혀있다. (사진: 정지영 기증) 정: 그러다가 어느 날 포항에서 촬영을 하고 있는데 형사들이 갑자기 와 가지고 나를 연행해 갔지. 여기서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있는 건데, 내가 한참 촬영을 하는데 형사들이 왔다고. 계곡 위에서 찍고 있는데 형사들이 계곡까지 올라왔어요. 올라와 가지고 “왠일이냐?”고 그랬더니 “감독님, 서울로 올라가셔야 되겠는데요” 그래. “아니 서울은 왜 갑자기 올라가느냐?”고 내가 그랬더니 신문을 딱 주는데 보니까 거기에 ‘정지영 감독 구속’으로 돼 있어. 나는 여기서 지금 촬영을 하고 있는데 《조선일보》에 ‘정지영 감독 구속’ (1989년 9월 3일자 15면 기사-편집자 주) 그래서 “이게 무슨 소리냐?” 그랬더니 “아 글쎄 말입니다” 그래. “근데 왜 나를 연행해 가냐?” 그랬더니… 재밌다고, 이게. “아니 여기 구속으로 돼 있는데 감독님 여기 있으면 안 되지 않습니까.” 말이 돼? 그렇게 한심한 시대였다는 거지, 말하자면. (웃음) 그러니까 신문에 ‘구속’으로 돼 있으니까 나는 구속돼 있어야 된다는 얘기 아니야? 신문의 오보를 내가 몸으로 실현해 주라는 거 아니야, 그건? (웃음) 남: 아, 그러면 그거는 어디서 정보를 미리 제공받아서 나온 기사가 아니라 오보가 난 거였던 거네요? 정: 오보를 일부러 쓴 거지. 나를 잡아오려고 일부러 오보를 낸 거지 . 물론 본인을 잡기 위해 일부러 오보를 냈다는 것은 정지영의 추측이다. 그러나 오보를 실현시키기 위한 구속이든, 구속을 위해 일부러 정보를 흘린 것이든 둘 다 어이가 없는 이유이고,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정지영 감독은 1989년 <남부군> 촬영 도중 체포되어 UIP영화 상영 극장에 뱀을 풀어 영업을 방해한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구치소에서 석방된 날, 정지영 감독(2열 좌2)과 정회철 감독(2열 우2)의 모습 (정지영 기증) 어쨌든 시작은 이렇게 과격하고 무모했지만, 이후 투쟁은 대학가에서 문화운동을 주도하던 새로운 세대의 합류로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그렇다고 1980년대 후반의 ‘직배저지투쟁’이 완전 실패라고는 볼 수 없다. 정지영은 이 시기 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스스로 평가를 내렸다. 정: 우리가 이 운동을 통해서 ‘우리 영화는 우리가 살려야지 누가 보호해 주는 게 아니다’란 생각을 한 거지. 왜냐면은 직배저지투쟁할 때 극장 앞에서 막 데모를 할 때 관객들이 표를 사 가지고 들어가요. 영화인들이 와서 데모 하고 있는데 표 사 가지고 들어가. 누군가가 이제 “관객 여러분, 이거 직배영화입니다. 영화 구경하지 마세요!” 그랬을 때 뭐라고 대답을 들었냐면, “당신들이 영화 잘 만들어 봐. 우리가 한국영화 보지 왜 미국영화 보겠어, 이 사람들아. 영화나 똑바로 만들어!” 그러고 들어갔다구. 그만큼 한국영화가 관객들한테 우습게 보였을 때란 말이지. 그것이 나한테 자극을 줬는데 다른 사람한테 자극을 안 줬겠어? ‘우리한테 책임이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드는 거지. 그래서 그런 것들이 모두 자극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 운동이 모든 영화인들에게 (사이) 용기도 만들어 주고. 또 열심히 해야겠다는 어떤 자세를, 사명감 이런 걸 만들어 주지 않았겠는가. 나는 직배운동이나 스크린쿼터투쟁이나 검열 투쟁 이런 것들이 그냥 ‘표현의 자유 문제를 우리가 지적한다’ 이런 차원이 아니고, 그 운동 자체가 영화인들 개개인에게 ‘우리가 우리 영화를 잘 만들어야 사랑을 받을 수 있어’ 이런 어떤 사명감 같은 걸 심어주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해요. 2023년 『1980년대 한국영화: ‘서울의 봄’부터 코리안 뉴웨이브까지』 중 ‘구술로 보는 1980년대 한국영화’ 챕터를 쓸 때도, 이 ‘뱀 소동’은 무조건 넣는다는 일념으로 글을 구성했었다. 개인적으로 이 ‘극장에 나타난 뱀’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이 상당히 무모하긴 하지만, 한편으로 굉장한 시대적 위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디아나 존스 >가 상영 중인 극장에 뱀을 풀었으면 완전 4D 체험이 가능했을 텐데’ 같은 상상을 해보면 정말 재미있지 않은가!). 한국 영화시장을 집어삼키기 위해 (질적으로나 물량적으로 한국영화와 비교도 되지 않는) 미국영화들이 물밀듯 밀려들어올 때, 한국의 영화인들은 뱀을 내세워 이를 물리치려 했다. 마치 거대한 폭풍 앞에 부채 한 장을 들고 서 있는 형세였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다시 <산배암>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제 이야기를 마무리해볼까 한다. 정지영 감독(우3)과 <산배암> 출연 배우들. (《스크린》 기증) 위 사진 속 집과 마당은 묘하게 < 기생충 >(봉준호, 2019)를 떠올리게 한다. 사실 <산배암>과 <기생충>은 ‘계급’과 ‘계단’이라는 모티프에서 매우 유사함을 갖고 있다. 1988년 도덕적으로 타락한 상류층 가정에 들어간 순진한 산골소녀는 자신이 가진 건강한 생명력까지도 착취하려는 이들에게 ‘산배암’이 되어 저항했다. 그리고 지금 30여 년의 시간이 흐르는 사이, 계급에 대한 인식은 ‘뱀’에서 ‘기생충’으로 바뀌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언제든 자신이 받는 억압에 대해 ‘뱀’으로 돌변해 상대를 위협할 수 있었던 이들이, 이제는 숙주에게 붙어 사는 기생충이 되었다. 기생충은 숙주가 없이는 살 수 없다. 더럽고 치사하지만 숙주에게 붙어 그 체계 안에서 피와 고름 같은 것을 먹으며 살아남든가, 아니면 공멸하는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생존방식은 제3의 길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든다. 오늘날의 한국영화 안에, 그리고 극장 안에 다시 ‘뱀’이 나타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