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동반자
- 감독
- 게리 플레더
- 제작년도
- 1994
- 출연
- 캐서린 해롤드, 브루스 그린우드, 탈리아 발삼, 브라이언 제임스, 졸리 피셔
한국영화의 '퀴어함'이 장르나 소재, 영화사적 순간 등에 반영되는 양상을 분석합니다. 1931년 《동아일보》(4.14.)와 《조선일보》(4.15.)에 조선영화제작연맹의 제작발표회 기사가 실렸다. 당해 4월 8일에 일어난 홍옥임과 김용주의 철도동반자살 사건을 기반으로 영화를 제작하겠다는 소식이었다. 기사에는 <명일의 여성>이라는 제목뿐 아니라 출연과 제작진도 함께 발표되었다. 감독 및 각본 홍개명 , 각색 김서정, 촬영 한창섭 , 진행 홍찬 , 출연 나웅 · 윤봉춘 · 김연실 · 임운학 등이 제작 동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두 젊은 여성이 자살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 지 이제 막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었음에도 한두 달 내에 제작에 착수할 것이며 야심 차게 상해로 수출할 것이라는 계획까지 세웠으나 관련된 후속 보도는 이어지지 않았다. 홍옥임, 김용주 철도동반자살 사건 관련 《조선일보》 기사(1931.4.10.) 당시 식민지 조선의 영화계를 보면 1923년 윤백남 의 < 월하의 맹서 >가 개봉된 이후 본격화된 조선의 영화제작이 점차 그 수를 늘려가고 있던 중이었다. 특히 1926년 < 아리랑 >(나운규, 1926)의 전국적인 흥행으로 1927년에는 무려 14편의 영화가 제작되었고, MGM이나 파라마운트와의 특약 계약을 통해 영화를 수입하는 회사도 세워져 외화배급이 원활해졌다. 영화와 관련된 담론 역시 활발해져 농민과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을 구현한 영화를 옹호한 카프와 작품성이나 상업성에 주안을 둔 그룹이 논쟁을 벌였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무식한 광견(狂犬)’, ‘무지한 필님충(film蟲))’으로 날선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그리고 1930년대에 이르면 세계 영화계는 발성영화의 시대에 진입하고 극장은 신기술을 도입할 새로운 자본과 혁신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명일의 여성> 제작발표 기사가 났던 1931년에는 조선 총독부의 검열이 체계화되고 경제상황이 안 좋아지면서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1 』) 개봉되고 제작된 조선영화는 그 수가 대폭 줄었다. 영화창작을 향한 열망은 여전해서 <명일의 여성>처럼 제작발표를 했지만 실제로는 아예 제작에 들어가지 못했거나 완성되지 못한 영화 목록이 꽤 길었다. 한국 퀴어 영화의 역사 쓰기를 고려할 때 <명일의 여성>은 흥미로운 위치에 있다. 이 영화는 아마도 제작조차 들어가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만들어진 적 없는 ‘허구의 영화’다. 하지만 제작되었다면 첫 번째 레즈비언 영화로 불렸을 수도 있는 영화다. <명일의 여성>은 그런 면에서 허구의 기원, 기원 없는 기원이다. 그러나 이 허구야말로 늘 퀴어 역사와 존재에게는 실재의 또 다른 말이 아닌가? 존재하면서도 부정당하거나 가짜와 위장으로 의심받는 섹슈얼리티, 정체성 그리고 수행. 심지어 스크린 위에 가시화될 때도 마치 없는 것이나 오점처럼 지워지는 역사들. <명일의 여성>은 시간을 특정할 수 없다. 백퍼센트 제작이 안 되었다고 확신할 수 없는 영화, 그래서 영원히 제작 ‘중’인 영화. 과거의 사건이지만 지속적으로 현재일 수밖에 없으며 어딘가에서 비틀어지고 왜곡된(pervert) 씨를 뿌리는 시간 속에 있는 영화. 어제의 시간 속에 있으면서 오늘일 수밖에 없는 영화다. 과거라는 시간(1931년)에 단단히 묶여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현재와 미래로 열려 있을 수밖에 없는 기이한 시간의 모양을 갖는다(“시간의 구속Time Binds”이란 용어는 엘리자베스 프리먼[2010]의 저작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과거는 희뿌옇고 부실하고 오염되어 있으며, 현재와 미래는 부재 중이다. 어쩌면 우리는 <명일의 여성>에서 허구의 세계 중에서 가장 유명한 ‘(어디에도 없는 곳이자 결코 규정되지 않아 끊임없이 규정이 필요한)유토피아’를 조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허구’라는 방법론으로 퀴어의 역사를 쓴다면 어떤 역사를 쓸 수 있을지 생각해 봐야 한다. 먼저 ‘허구’는 그저 공상이 아니라 공통세계에 공존하는 틀을 만들 수 있는 도구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 흥미로운 영화의 ‘허구’에 어떤 현실감, 수용가능성, 개연성을 불어넣어줄 수 있을까? 먼저 두 범주로 나눠 질문들을 던져 보자. 조건의 질문들과 상상의 질문들. - 조건의 질문들 : 당시 비극적인 자살사건이 일어난 지 겨우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서 어떻게 이렇게나 빠르게 동인을 모아 제작발표를 할 수 있었을까? 더불어 영화가 (아마도) 제작을 할 수 없거나 완료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젊은 여성의 동성애 소재는 신선함, 대중성, 이국성을 갖는 매혹적인 영화 소재였을 것이다. 당시 엘리트들에게 고등교육을 받은 신여성들 간의 동성애는 이질적이고 새롭지만 거부감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신문칼럼이나 잡지는 여성 동성애 ‘유행’을 자세히 소개하면서도(1930년대 잡지 <별건곤>의 ‘여류명사’들의 동성연애기 투고기사) 제대로 된 남성을 만나기 이전의 소녀들의 일시적 실험이나 정사 없는 플라토닉한 사랑으로 한정되기 때문에 가부장제 이성애에 위협을 주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남성 엘리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항문성교를 한다고 알려진 남성 동성애자들이었다(《동아일보》 1932.3.17.). 더군다나 이 영화는 당시 젊은 세대의 연애관과 결혼관을 비판적으로 냉정하게 바라볼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반드시 두 여성의 시점에서 서사가 구성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홍옥임(21세)은 당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 홍석후의 딸이자 음악가 홍난파 의 조카였으며, 김용주(17세)는 종로 덕흥서림 사장 김동진의 딸이자 비행사 심종익의 아내였다. 스스로도 엘리트 교육을 받은 신여성인 동시에 조선 최고 엘리트 집안이었기 때문에 세간의 입에 오르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도 연인관계에 있던 노동계급의 젊은 여성들의 철도동반자살 사건이 있었지만 해당 사건은 워낙 유명한 집안이었던 만큼 더 큰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박차민정의 『조선의 퀴어』(2018) 참고). 또한 상해 수출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은 이 주제가 그만큼 해외에서도 수용될 만한 소재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소재의 대중적 매력만으로 영화를 완성하기에는 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자본이 가장 큰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혹은 동인들 간에 이견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제복의 처녀Mädchen in Uniform>(1931) 중 한편 독일의 유명 레즈비언 영화 <제복의 처녀Mädchen in Uniform>(1931)가 같은 해 독일에서 개봉되었다는 것은 우연이지만 조선영화가 세계적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성작가인 크리스타 윈슬로가 쓴 극본 <어제와 오늘>을 여성 감독 레티오네 사강이 연출한 <제복의 처녀>는 1933년 3월에 조선에도 개봉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변사 박창원의 녹음으로 1936년 12월 영화해설 음반이 발매되었으며, 일본에서는 1934년 《키네마 준보》에서 최고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당시 언론은 영화의 인기에 여학교 학생들을 ‘제복의 처녀’라 부르기도 했다. - 상상의 질문들 : 실제로 이 영화가 모종의 이유로 제목을 바꿔 해당 영화인지 알 수 없게 제작되었는데 개봉을 할 수 없어 프린트의 일부가 상해 어딘가에 있을 가능성은 없을까? : 당시 <명일의 여성>의 출연 및 제작 동인(이름을 올리지 않은 이들을 포함)에 퀴어는 없었을까? 퀴어적 관계나 정체성을 가진 제작진이 포함되었다는 상상 속에서 <명일의 여성>을 갖고 ‘영화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 영화가 실종되었거나 완료되지 못한 이유를 추리해볼 수 있지 않을까? < 반도의 봄 >(이병일, 1941)의 1930년대 버전이 될 것이다. 조선의 영화현실 뿐 아니라 당시 젊은 여성 동성애자들에 대한 성적 억압과 다른 여러 불만들(가부장제, 교육, 계급, 식민지적 억압 등)을 교차해 서사화할 수 있다. : 조선영화가 1930년대 이미 여성 동성애 소재로 트랜스내셔널하게 연결되었던 역사와 현재 식민지 조선 혹은 경성이라는 시공간이 종종 퀴어화 되는 것에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 청연 >(윤종찬, 2005), <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이해영, 2014), < 아가씨 >(박찬욱, 2016), < 유령 >(이해영, 2022). <명일의 여성>처럼 시간의 구속을 가진 퀴어화된 영화들을 어떻게 봐야할까? 나는 이 모든 질문에 답할 수도, 답하려는 욕망도 없다. 단지, 시간의 구속에 얽혀 실종되고 왜곡되고 흐릿한 퀴어 영화들의 파편 더미들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그리고 경성 퀴어로 시작해보고자 한다. (계속)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이해영, 2014) 중 조혜영(영화평론가) l 영화적 순간들을 공유하고자 글을 쓴다. 영상문화 기획연구 단체 '프로젝트38' 연구원, 『원본 없는 판타지』(2020), Mediating Gender in Post-Authoritarian South Korea (2024) 등 공동 집필.
< 지옥만세 >는 십대 소녀 나미(오우리)와 선우(방효린)의 로드무비다. 학교폭력 피해자인 둘은 사는 게 지옥 같다. 가족도 자신들의 고통을 알아주지 않는다. 힘들다고 토로해봤자 약해빠졌다거나 너보다 더 힘든 동생을 배려하라는 말을 들을 뿐이다. 결국 학교 폭력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한 둘은 지옥 같은 현실을 탈출하기 위해 동반자살을 기도한다. 몇 번이나 자살에 실패했던 나미는 선우의 도움을 받고, 선우도 나미의 뒤를 따르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자살기도 중 나미는 따돌림을 주도했던 채린(정이주)이 서울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복수를 위해 선우와 함께 서울로 향한다. 학교폭력, 자살기도, 납치와 그루밍, 사이비 종교집단 등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영화는 반전처럼 경쾌하고 엉뚱하며 발랄한 톤을 갖고 있다. 초성만 쓰면서 가볍게 주고받는 문자, 싸이키델릭한 록 스타일의 음악, 뮤직 비디오 같은 회상 몽타주씬들은 그러한 톤을 뒷받침한다. 그렇다고 앞의 나열된 소재를 표피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나미와 선우의 예상을 엇나가는 반응과 엉뚱한 선택들은 십대 소녀들이 자신의 고통의 기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일관되게 해결책을 찾는 것이 불가능한 현실을 입체적으로 제시한다. 지옥 같은 현실이 압도해 올 때 이성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은 왜 자신들이 따돌림을 당하고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언제 어떻게 이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같은 처지에 있는 서로가 있고, 그렇기에 두 소녀는 지옥에 살면서도 생동감이 넘칠 수 있다. 자살에 성공할 방법을 역동적으로 고민하고 시도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들을 이해해 주는 사람 하나 없는 둘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들이 처한 파국의 풍경은 자살 장소로 대변된다. 나미와 선우가 사는 곳은 온천 관광지로 유명했던 수안보이다. 한때 인산인해를 이루던 관광지는 그 영광을 잃어 점차 쇠락했다. 이제 이곳은 문 닫은 대중목욕탕들로 가득하다. 더 이상 사람들이 찾지 않는 버려진 대중목욕탕은 자살하기에 좋은 장소다. 엄마에게 들켜 자살에 실패하곤 했던 나미는 선우의 도움으로 진짜 자살에 성공하기 직전까지 간다. 하지만 자꾸 자살 도구를 트집 잡고 왕따 주동자인 채린의 소식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미의 태도는 그가 정말로 죽기를 원하는 건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죽을 만큼 괴로워하고 있으며, 이 상황을 해결하고 싶지만 방법을 몰라 무력감에 놓여 있을 뿐이다. 선우에게 유서를 건네며 “그냥 아무 우체통에다 넣어줘. 운명처럼 어디든 닿겠지”라고 말하는 나미 대사는 죽음과 어울리지 않게 낭만적이고 낙관적이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 종로에 도착한 나미와 선우는 어이없을 정도의 우연으로 채린과 마주친다. 무작정 종로를 헤매자던 나미의 전략이 성공에 이르게 된다. 잘나가던 채린의 아버지 사업은 부도가 났고 엄마는 사이비 종교에 빠져 ‘낙원’이라 불리는 해외의 종교 집단 거주지로 떠나버렸다. 홀로 남은 채린은 엄마를 따라가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나미와 선우는 채린의 얼굴에 ‘기스’를 내어 살아있는 지옥을 맞보게 해주기로 결심하지만 채린은 이미 가해자가 아닌 회개자의 얼굴로 그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채린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있다며 나미와 선우에게 용서를 빈다. 나미는 채린이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흔들리지만, 선우는 채린이 여전히 종교 집단에서 함께 살며 낙원을 가기 위해 경쟁하는 아이들 안에서 ‘여왕벌’ 노릇을 하며 따돌림을 조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따돌림을 가능하게 해주는 건 겉으로는 다정다감해 보이는 명호(박성훈)다. 명호는 사이비 종교 교주인 목사가 교도소에 수감된 뒤 조직을 이끌어 가고 있다. ‘낙원’으로 가려면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 ‘피해자에게 받는 용서’의 점수가 가장 높기 때문에 채린은 이 점수를 받기 위해 나미와 선우에게 자신을 용서해 구원해달라고 애걸한다. 영화는 어떤 존재와 사건이든 하나의 얼굴만 갖고 있지 않음을 강조한다. 채린은 학교 폭력 가해자이지만 동시에 부모에게 버림받았으며 종교집단의 납치폭력과 그루밍을 당한 피해자이기도 하다. 나미는 가해자 집단의 우두머리였던 채린과의 관계에 있어선 피해자이지만 가해자 무리에 속해 선우를 향한 괴롭힘에 동조하고 외면해왔다는 점에선 가해자이다. 선우는 피해자이고 다른 피해자를 잘 알아차리며 보호하려는 태도를 취하지만 나미에게 복수하기 위해 나미 엄마 식당에 대한 악플을 올렸다는 점에선 가해자이다. 나미와 선우는 피해자이지만 마냥 착하거나 약한 자들은 아니다. 취약한 상황에서 이상한 신념에 빠진 이들과 달리 나미와 선우는 그들의 친절함에 고마워하면서도 경계심을 놓지 않는다. 둘은 채린을 향한 복수의 여정에서 자신들뿐만 아니라 채린을 구해 나올 정도로 용기 있는 이들이다. 또한 나미는 선우와의 관계에서 회개했다는 채린에게 더 동일시하며 그의 위선을 알아채지 못해 선우에게 상처준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할 정도로 자신을 성찰하는 힘을 갖고 있다. 이때서야 영화는 회상 장면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던 피해자와 가해자의 얼굴을 똑바로 보여준다. 영화의 오프닝은 ‘황구라’라고 불리는 아이의 생일을 축하하는 또래 무리들이 촬영한 것 같은 친밀한 카메라를 시뮬레이션 한다. 하지만 생일을 맞은 아이와 함께 즐겁게 장난치는 것처럼 보였던 장면은 곧 지옥으로 변한다. 이 영상이 사실은 학교폭력 피해자를 괴롭히는 영상 푸티지라는 것이 밝혀진다. 피해자인 아이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고 얼굴에 케이크를 맞고 괴로워하는 뒷모습만을 비춘다. 한 아이가 쓰러진 아이를 동정어린 시선으로 보지만 곧 무리의 부름에 그를 버리고 가버린다. 선우가 채린에게 연민을 보이고 공감하는 나미에게 실망할 때 나미의 회상 속에서 이 오프닝 장면이 다시 반복된다. 이번에는 피해자 아이와 동정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배신하고 가버린 아이의 얼굴이 모두 정확히 보인다. 피해자는 선우이고 버리고 가버린 아이는 나미다. 피해자든 가해자든 그 얼굴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더불어 나미는 자신이 선우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외면했음을 깨닫는다. 이 장면은 피해자든 가해자든 다양하고 복잡한 얼굴을 갖고 있다고 해서 한 얼굴이 다른 얼굴로 상쇄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역설한다. 채린이 피해자의 얼굴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가 갖고 있는 가해자의 얼굴이 사라지거나 면죄 받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채린이 가길 바라는 낙원은 이미 지옥이 된지 오래일 것이다. 명호가 돌보고 이끄는 아이들 공동체도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를 돌보는 따뜻한 분위기에 선행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낙원행 티켓을 타기 위한 생존게임에 불과하다. 명호는 친절하고 관대한 젊은 종교 지도자처럼 보이지만 그 스스로 사기공모 범죄자이며 사기 피해자이다. 지옥과 낙원은 동전의 양면이다. 나미와 선우의 여행은 어쩌면 고립된 이상향으로서의 낙원은 부재하고 도처에 지옥의 면모가 있기에 지옥탈출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정이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선 지옥 역시 낙원의 일면이 잠재해 있을 수 있다. 고통을 알아봐 준 서로가 있다면 조금은 지옥을 견딜 수도 있을지 모른다. 친절해 보였던 어른들의 광기와 납치폭력에서 탈출하고 명호의 자살을 실제로 목격한 후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꽂혀 있던 ‘낙원’ 엽서는 꽤 직접적인 은유가 된다. 현실은 바뀌지 않은 채 여지없이 돌아오자마자 괴롭힘을 당한다. 이번에는 서로가 있고 더 이상 죽고 싶어 하지 않으며, 가해자들을 무서워하지 않을 용기가 생겼다는 차이가 있다. 극복, 해방, 낙원 이런 것은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방과 낙원은 곧 지옥이 될 것이기에. 죽지 않기 위해선 지옥을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가볍게 인정하며 “오키 오키”라고 답할 수 있는 태도, 적어도 죽지 말고 “지옥을 견뎌내는” 마음이 필요하다. 자기들만의 ‘수학여행’을 마치고 서로의 집으로 향하는 엔딩씬에서 나미는 자전거를 타고 멀어져 가는 선우를 응시한다. 망원렌즈 촬영으로 거리와 초점이 왜곡된 쇼트에서 얼마 안가 선우의 뒷모습은 포커스가 나가 흐릿해지다 못해 빛 속으로 사라질 것처럼 보인다. 나미는 선우의 생존을 확인이라도 해보듯 다급하게 부른다. 가해자들이 별칭으로 부르던 ‘황구라’가 아닌 ‘선우’라고 분명하게 부른다. 포커스가 나가 있기 때문에 선우가 나미의 부름을 들었는지, 그가 되돌아오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선우는 그의 부름에 응답하며 되돌아온다. 드디어 초점이 맞춰져 선명하게 마주하게 된 선우의 얼굴 클로즈업에 나미는 웃으며 “웰컴 백 투 더 헬, X발”이라 말한다. 다시 각자의 집으로 가는 나미와 선우의 얼굴 클로즈업이 교차한다. 오늘은 그의 이름을 불러 지옥을 살아내고 있음을,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 실제 사건 2018년 1월 13일 토요일, 오전 8시 7분. 핸드폰에 긴급재난문자가 울린다. “하와이로 향하는 탄도미사일 위협 발생. 즉시 대피소를 찾으세요. 이것은 훈련이 아닙니다.” 1.4백만 하와이 시민은 임박한 죽음의 공포를 맞닥드리고 공황상태에 빠졌다. 떨어져있던 가족과 친구를 찾고, 대피소로 들어가려는 사람들로 도시는 혼란 그 자체였다. 하와이 주정부는 13분 뒤 트위터에 미사일 위협이 없다고 발표했지만 소셜미디어를 쓰지 않는 이들에게 정정 내용이 전달되기까지 시간이 거렸고, 앞선 문자와 트위터 중 무엇이 가짜뉴스인지 분간되지 않는 순간이 흘렀다. 최초 재난문자 전송 38분 뒤 주비상관리국은 정정내용을 다시 문자로 전송했다. 이 시간동안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골프장에 있었고, 정부 고위 관계자들은 미본토를 겨냥한 미사일 공격 발생시 대응 계획을 지난 30년간 시험해보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밝히기도 했다. 윌리엄 페리 전 미국방장관은 트위터에 “실수로 인한 핵전쟁 위험성은 가설이 아니다. 사고는 과거에도 일어났고 인간은 또다시 실수를 할 것이다. 단순 실수가 수백만명의 목숨을 위험에 빠트리지 않도록 더욱 철저하게 점검하고 확인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남겼다. # VR 다큐 <당신이 깨어난 아침(세상의 끝까지)> (이하, <당신이 깨어난 아침>) < 당신이 깨어난 아침 >은 4년 전 하와이를 혼돈 속에 몰아넣은 정부의 가짜 탄도미사일 경보 사건을 다룬 VR 다큐이다. 총 3장으로 나누어진 38분 길이의 디지털 이미지 작업으로 실제 인물들의 인터뷰 목소리와 나레이션이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1장 ‘피신하라(Take Over)’는 사건 당일 아침 유난히 아름답던 하와이 하늘부터 지옥같은 공포에 이르기까지의 순간을 몇 인물의 구체적인 증언으로 담았다. 일터에 가기 전 평온하게 준비를 하던 안지 앤더슨(Angie Anderson)은 핸드폰 알람 소리에 평소처럼 홍수주의보인줄 알고 별생각없이 화면을 보곤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브루스 알린(Bruce Allyn)은 이 문자가 사실일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지난달 섬전체에서 실시한 대피훈련을 기억하며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는 서늘함을 마주한다. 하와이 출신으로 프린스턴대학에서 핵에 관련된 연구를 하는 타마라 패턴(Tamara Lilinoe Patton)은 이날 아침 도서관에서 친구들의 겁에 질린 메시지를 연쇄적으로 받으며 마지막일지 모를 사랑의 답변을 보낸다. 실제로 미사일이 발사된거라면 15분 정도밖에 시간이 없고, 평균 크기의 핵이 폭발한다고해도 호노룰루 전체가 시작부터 흔들리고 섬 전체가 유해물질로 뒤덮일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를 등에 업고 피신처에 겨우 도달한 한 남자는 “여긴 자리가 없으니 다른 데로 가세요!” 라고 소리지르는 군중의 민낯을 마주하고 주위를 둘러보지만 모든 것이 너무도 평화로운 상황이 이상했다. 태평양의 주요 군 핵심시설로 가득한 하와이에서 피신이라는 게 가능한지 의문을 가진 작가도 등장한다. 이들은 의심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과연 무엇인지. 권력을 가진 정치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피신하라”는 말만 내놓는 것이 대안인지 의문을 가진 젊은 여성은 말 그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어 기도를 하며 바다 한가운데로 노를 저어 간다. 2장 ‘종말의 기계(The Doomsday Machine)’는 문자 발송 직후부터 긴급신고번호로 접수된 문의전화 녹음기록을 공개해 공적 권한을 지닌 이들에게도 정보가 도달하지 않았고 시민들에게 어떤 조언도 제시하지 못한 상황을 드러냈다. 공기관들이 침묵으로 일관하던 38분간, 시민들은 자신의 안전을 책임진다고 믿었던 정부기관에서는 어떤 답도 얻을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소셜미디어로 향한다. 각자의 처지와 정보를 교환하고 개인의 결정으로 대처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인터뷰가 이어진다. 또한 지구 위에 존재하는 14,000개의 핵무기가 지구를 몇번이나 파괴할 수 있는지 전문가들의 견해를 취재했다. “가만히 앉아서 죽을 준비를 하라”던 교사의 지시에 부모의 위안이 필요했던 소녀, 이 속에서 살아남더라도 뱃 속의 아이에게 어떤 세상을 보여줄 수 있는지 걱정하던 임산부의 증언은 시스템의 실패로 인류가 집단적 죽음을 경험한 사건으로 이 날을 기록하고 있다. 3장 ‘쿨레아나(Kuleana)’ 는 책임이라는 뜻을 가진 하와이어로 사건이 종료된 시점부터 그 이후의 변화를 담고있다. “미사일 경고는 잘못된 문자였다” 라는 정정보도에도 사람들의 혼돈은 한동안 지속됐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지만 그 사건 이후 어떤 것도 똑같지 않았다”라는 시민들의 목소리에는 “그저 앉아서 언제일지 모를 죽음을 기다리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타고 나왔다. 정부는 미사일 경보 오발령의 원인으로 주정부 비상관리국 직원이 작업 교대 중 경보 시스템을 점검하다가 버튼을 잘못 누르며 생긴 개인의 실수였다고 밝혔다. 관련자에게 책임을 물으며 사건은 종료됐다. 시민들은 “잘잘못을 묻고, 적과 아군을 나누고, 누군가를 해고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며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위험과, 시스템이 실패할 수 있다는 불안함을 가지고 살기보다 다른 대안을 원했다. 그리고 그 답은 기존의 사회작동 방식이 아닌 과거 하와이 선주민들의 지혜에 귀를 기울여 점점 개별화되는 사회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 공동체로 살아가는 방법을 되찾고 보편적 인간성을 회복해야 가능하다는 목소리로 퍼진다. 타마라 패턴(Tamara Lilinoe Patton)의 증언 장면 트레일러 보기: On The Morning You Wake (To the End of the World) | Meta Quest # VR다큐 미학의 발전 가능성 <당신이 깨어난 아침>의 특이점은 다큐멘터리임에도 불구하고 이미지를 통해 리얼리즘을 추구하려는 목표가 없다는 것이다. 이 작업은 2장에 등장한 추억의 가족 비디오를 제외하고는 실제 촬영한 영상을 사용하지 않는다. 현실 이미지를 옮기기보다 디지털 이미지로 당시 일어난 상황을 묘사한다. 이는 다큐멘터리가 실제 현장의 이미지를 드러내며 힘을 발휘하는 것과는 정 반대의 방법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이미지의 힘을 포기한 것이냐면 오히려 그 반대이다. 제작진은 표현방식 전략을 이 사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두 가지, 핵(이미지)과 목소리(사운드)로 세웠다. 핸드폰이라는 매체 덕분에 무언가를 알리고, 남겨두기 위한 현실 기록으로서 이미지가 익숙한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는 새로운 이미지는 일상에서 보던 것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 <당신이 깨어난 아침>은 기록 영상과는 반대로 현실을 전제로 하되 디지털 이미지를 사용한다. 이야기를 해설하는 이미지도 모두 움직임에 반응하는 입자처럼 최소화해서 그 외 공간을 비우는 방식으로 관객에게 현실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하와이 미사일 오보의 주요 쟁점인 ‘핵'과 그 여파를 이미지화한 그래픽, 모래처럼 산산히 부서지고 날아가는 세계, 하와이 섬의 모습 등을 디지털 애니메이션으로 구성했다. 명백히 인위적인 것임을 선언하는 이 작품의 시각 표현방식은 관객에게 거짓말 같은 실제에 대한 현실 인식을 강력하게 권고한다. 그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지만(허구) 사람들에게는 실제 일어난 일(현실)이었고, 삶에 강력한 충격을 주었다는 사실을 표현하기에 ‘가상 현실'이라는 단어가 적합해보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제작진은 미사일로 인해 핵폭발이 일어났다면 산산히 부서졌을 세계를 묘사의 한 방법으로 취했다. ‘만약’ 위험 경고가 사실이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증언과 사람들의 공간을 조각내 무너지게 하고 다시 구축하는 방식으로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세계의 가능성을 일깨운다. 관객에게 가상 현실을 경험하게 해서 ‘정부'의 메시지라는 권위가 우리가 보는 이미지보다 더 허구적이었다는 것을 환기시키고, 언제든 다시 이런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을 깨치게 하고, 영상이 끝나도 우리의 현실이 여전히 헤드셋 밖에 남아있다고 알리는 장치로 이 디지털 이미지는 작동한다. 이러한 재현 이미지의 인위성에도 불구하고 이 작업에서 다큐멘터리의 진정성을 느끼게 하는 강력한 힘은 실제 사람들의 목소리이다.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목소리는 음질에 관계없이 일어난 일에 대한 객관적 상황을 제시하고, 이들의 목소리에서 여전히 느껴지는 세상의 끝을 마주한 당일의 감정이 불안하거나, 화를 내거나, 다급하게 온전히 전달되고 있다. 다시말해 <당신이 깨어난 아침>은 청각이 제공하는 강렬한 사실과 감정을 기초로 당시 상황을 디지털 이미지라는 가시적 형태로 표상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 디지털 이미지 대신 실제 장면이 들어갔다면, 2D 영화였다면, <당신이 깨어난 아침>이 지금의 결과물과 같은 영향력을 주었을까? # 재난을 재현하는 매체와 이미지 사실을 증명하는 것보다, 리얼리즘 보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이 작품은 관객이 받아들일 작품의 영향력을 답으로 고려할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운동에 동참하세요" 문구가 드러내듯 평화와 비핵화 캠페인에 대한 선명한 의도를 지닌 작업이다. 그러나 <당신이 깨어난 아침>은 전쟁이나 재난의 참혹함을 전시하여 관객에게 충격효과를 통해 마음을 움직이는 대신 스스로 질문하게하는 방식을 택했다. 제작진이 선택한 디지털 이미지 활용이라는 전략은 촬영할 수 없었던 지점을 시각화해주는 수단이자, 거짓말 같은 사건을 보도함에 있어 인위성이라는 한계를 오히려 현실 자각의 도구로(거짓말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났어요. 당신에게도 이 허구가 사실이 될 수 있습니다.), 다큐멘터리의 미학의 새로운 표현 양식으로 사용한 사례였다. 이 작업은 다른 층위의 질문을 연결한다. (하와이 원주민의 지혜가 답이 될 수 있는가하는 순진한 결말은 내용에 대한 것이고, 매체에 대한 논의가 아니기에 여기서는 제외하겠다.) VR 매체 자체가 지닌 기술이 재난과 같은 사건을 다룰때 이미지의 윤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2D 영화처럼 타인의 이야기로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닌 VR이 강조해온 몰입을 통한 “현재성"과 “경험”이 내 이야기로 느끼게 해준다면 윤리적 문제는 없는 것일까. 그러나 누군가의 절망과 재난을 가상 체험한다는 것이 가능키나 한 걸까? 또한 사람들의 처참한 모습을 “어떻게” 보여주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답으로 디지털 이미지가 해결책이 될 수 있는가? <당신이 깨어난 아침>의 경우는 VR로 그 가능성을 선보였다. 왜냐하면 재난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느낀 공포는 실제였기에 ‘가상 현실'이라는 매체를 통과하는 이야기를 제작진이 선택했기 때문이다. 또한 영리하게도 참혹함을 전시하지 않고 들려주는 방식으로 재난의 공포를 관객에게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물론, 오래된 논쟁인 재난의 이야기가 아름다워도 되는가 하는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 마무리하며 영화사의 주요한 변화는 본질적으로 기술적인 것이었다. 때론 예술가들의 미학적 측면이 기질을 발휘한 순간들이 있지만 진보의 동반자로서 영화를 이끈 데에는 기술을 사업으로 활용한 이들이 있었다. 관객의 지지와 거부가 영화사의 진행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고 상업적 생존 능력에 따라 영화는 발달되어 왔다. VR이 배급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3D 꼴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VR이 꼭 영화가 되어야 하는가? 재간의 산물로 남지 않더라도, 특정한 이야기에 맞는 매체로 ‘새로운 시각화 수단’으로 존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남는다. 어떤 이야기는 영화에, 어떤 이야기는 시리즈로 나누어 가는 것이 더 어울리듯 어떤 이야기는 VR에 맞는 것도 있을 터이다. 그리고 그 것이 이미지의 윤리적 문제 모두를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특정' 이야기에는 적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사사로운 리스트가 완벽한 영화를 뽑는 것이 아니듯 내게는 이 작품이 다큐 미학의 새로운 형식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과 이미지 매체의 윤리성에 대한 논의를 이어갈 수 있는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