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시간의 일탈
- 감독
- 이숭환
- 제작년도
- 2012
- 출연
- ㅇㅇㅇ
2019년 대구사회복지영화제 중 상영 전 작품 소개 왜 대구에서 영화글을 쓰나요? 그 소박하면서도 긴 여정 2025년 가을, 대구·경북에서 지난 10여 년간 나온 100여 편의 영화를 소개하는 책을 한 권 출간했다. 그저 몇 년 동안 꾸준히 기록해 온 글 모음일 뿐인데, 이런 유형의 작업은 최초라는 소릴 여기저기에서 듣는 중이다. ‘지역’에서 영화 관련 글을 쓰고 활동한다는 소개를 하면, 대개 접하는 반응은 두 갈래로 나뉘게 마련이다. 1) ‘얼마나 수고(혹은 고생) 많으냐’, 2) ‘거기에서 어떻게 (제대로) 활동하느냐’다. 둘의 온도는 차이가 크지만, 배경은 거의 다르지 않다. ‘지역’에서 영화를 논하기 어렵다는 전제다. 영화 평론집을 내고 ‘작가’란 어색한 호칭을 종종 듣지만, 평론가를 지망한 적은 딱히 없었다. 영화와 무관한 일을 하며 받는 업무 스트레스를 풀고자 영화제에 종종 다니던 게 조금 유별난 점이란 정도? 그러다 조금씩 지역의 독립·예술영화 극장과 소규모 상영회에도 간간이 다니게 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불쑥 상영회를 열어보겠다는 꿈이 생겼다. 그렇게 모든 재앙(?)이 출발한다. 상영회를 열며 소소한 영욕을 쌓아간다. 관련 활동을 이어가니 주변에서 알아차리게 된다. 영화를 매개로 한 교육이나 사업 기획이 생업에 침투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공사 구분이 허물어지자 화근은 종잡을 수 없이 커진다. 마침내 영화제를 열어보자는 제안이 나오고, 실무를 떠맡게 된다. 그렇게 2010년, 대구사회복지영화제가 시작된다. 영화제 자원활동가도 한 번 하지 않고 졸지에 영화제를 책임지게 된 셈이다. 이후 10년간 좌충우돌 행각이 이어졌다. 저서 『경계의 영화: 대구영화라는 낯선 풍경』(2025, 대구경북영화영상사회적협동조합) 소 뒷걸음질 치다 쥐잡기? 어쩌면 필연을 가장한 우연 영화제 관객으로 다녔을 뿐, 실무는 관람과는 차원이 달랐다. 작품을 발굴하고, 상영작을 수급한 다음 행사를 차질 없이 진행하기 위해 온갖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관객의 다양한 수요를 예측하고 대응하는 건 물론, 정산과 평가까지 마쳐야 행사 하나가 끝난다. 온갖 사건 사고를 겪으며 경험과 교훈을 얻었다. 무엇보다 영화를 선별하는 안목이 얼기설기 형성되어갔다. 작지만 내실 있는 영화제를 꾸린다는 건, 실무적으로 경험이 축적되는 것과 함께, 무엇보다 자신만의 선구안이 형성되기에 가능한 일이다. 해당 영화제가 지향하는 가치, 공유하고 싶은 주제가 (영화제가 상정하는) 관객과 접점을 형성하기 위해선, 개별 ‘취향’과는 구별되는 ‘지향’이 필수다. 영화제를 통해 프로그래머의 가치와 덕목을 어렴풋이 깨우쳐 나갔다. (좌) 2019년 대구사회복지영화제 중 단편2 섹션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우) 2018년 전태일 노동영화제 중 < 사수 >(김설해, 정종민, 조영은, 2018)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며칠에 불과한 영화제 동안 소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뻔하다. 여건의 한계로 미처 소개하지 못한 작품이 잔뜩 쌓이게 마련이다. 추가 상영을 향한 갈증은 별도의 상영회로, 사전 제작 지원으로 자연스럽게 향한다. 물론 새로운 도전이니 풀어야 할 과제가 수북하다. 용케 고비를 넘기며 소박한 성과를 이룰 때마다 욕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지역 영화제는 서울과 비교해 너무도 취약한 다양한 영화와, 이를 매개로 한 프로그램에 목마른 지역 관객에게 부족하게나마 극장의 대체재로 기능한다. 그 특성을 깨닫는 순간, 무형의 책임이 어깨에 내려앉는다. 우리 지역에 반드시 그 존재를 알리고 싶어 하는 작품은 무엇일까? 턱없이 부족한 자원과 기회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 우선순위를 정하는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최적화 모델을 찾기 위한 계산과 순수한 열망이 끝없이 충돌하며 개인의 욕망과 지역 영화문화의 공공성이 외줄타기를 거듭했다. 맨땅에 헤딩하기로 얻는 찰나의 행복, 일상의 갈증 지속 가능한 영화제를 내실 있게 꾸리고, 여력 닿는 한 온갖 명목으로 공동체 상영회를 기획하고, 영화제 프로그래머란 직함으로 여기저기 영화를 소개하는 자리에 나가거나 글을 기고하게 된다. 자연스러운 순서다. 이름을 걸고 적합한 작품을 추천해 기대 효과를 충족해야 한다. 다양한 수요가 예상치 못하게 불쑥 제기되더라도 늘 열과 성을 다해 의뢰에 응대할 때만 후일을 기약할 수 있다. 어느새 업계 관계자(!)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그에 걸맞은 책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할 일은 점점 늘었다. 물론 대부분은 누가 강요한 게 아니다. 그래도 하면 좋을 듯하거나 필요할 일이란 생각에 자발적으로 벌인 일이다. 그러니 잘 안 풀려도 하소연하거나 누굴 원망할 수 없다. 그러나 못내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찰나의 보람과 일상의 고민이 쌓여만 갔다. 그러다 2020년 코로나19가 터졌다. 영화제나 상영회를 지속하기가 어려워졌다. 설상가상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오랜 입원 기간 동안 아무것도 할 게 없었다. 외출도 면회도 통제된 가운데, 다행히 와이파이는 잘 터졌다. 노트북을 켜고 영화를 본다. 하지만 허전함은 여전했다. 영화를 소개하고 나누는 재미가 없었던 탓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렇게 본격적으로 영화에 관한 글쓰기를 시작했다. 영화제 일을 하면서 조금씩 글을 쓰긴 했지만, 대개 작품 소개를 위한 한정된 분량과 용도에 그쳤다. 긴 글을 쓸 여력도 없고, 쓴다고 해도 게재할 지면이 지역엔 딱히 없었던 탓이다. 영화를 소개하는 건 글보다는 상영 기획으로, 혹은 종종 들어오는 방송 프로그램으로 수행해 왔다. 외부 조건의 극단적 변화로 그 경로가 변경되어야 할 상황이 닥치자, 자연스레 영화글 쓰기로 중심이 이동된 셈이다. 그러다 보니 그냥 쓰고 싶은 작품에 관한 글쓰기가 아닌, 보다 선택과 집중에 의한 작업을 구상하게 된다. 일단 다양한 영화를 소개해야 하는데, 마침 코로나19로 인해 얼어붙은 극장가엔 역설적으로 저예산-다양성-독립-예술영화 소개가 상대적으로 늘어나던 참이다. 재개봉 붐도 일었다. 다양한 영화가 어려움을 뚫고 극장에 걸리는데, 정작 이런 영화들의 정보를 접하긴 무척 어렵다. 자연히 (재)개봉 독립·예술영화 작품 소개 글을 기고하게 된다. 지역에서 영화 잡상인이 존재할 이유 다음으로 상영 활동을 수행하며 알게 된 지역 영화인과 그들의 작업을 알리고 싶었다. 역시 주기적으로 리뷰를 작성한다. 영화 애호가가 아닌 평범한 이들에게 일상과 영화가 연결되는 접점을 만들고자 예전부터 틈틈이 작성하던 교육 목적 기고도 꾸준히 잇는다. 어느새 해야 할 몫은 감당하기 힘들 만큼 불어났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정체성에 혼란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인정받기 위해 십여 년 넘게 분투해 왔건만, 정작 본업은 지지부진한데 부업이 활발해진 격이라 그렇다. 그렇게 어쩌다 시작한 정기적 집필 작업은 크게 세 경로로 집중되어갔다. 가변적인 글쓰기 실험으로 인스타그램에 영화 단평을 별도로 올렸다. 단평은 정식 기고의 초벌 스케치 역할과 더불어, 지면 게시용으론 애매한 분량이나 비중의 작품도 공개적으로 소개하는 우회로로 상정했다. 그저 많이 보고 능력껏 쓰는 것에서 출발해, 일정한 방향과 목적의식을 갖고 작품을 소개하는 공적 경로를 좌표로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조건반사처럼 끊임없이 지금도 글을 작성하는 중이다. 그 과정이 반복되며 일종의 축적을 낳는다. 기존의 오프라인 상영을 통해 형성해 온 독립·예술영화계 네트워크를 다른 각도로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된 셈이다. 필자가 인스타그램에 게시한 리뷰 피드(< 밸브를 잠근다 >, < 입문반 >) 그런 실용성 말고 이런 글쓰기 활동이 지역 영화 (창작 및 관람) 환경에 어떤 순기능을 수행하고 있을까? 그저 자기만족에 불과한, 혹은 남들이 상대적으로 덜 다루는 희소성에 주목한 데 불과할까? 해당 질문은 지금도 수시로 머릿속을 맴돈다. 혹시 이 고민에 답을 얻기 위해 지역 영화 관련 활동을 계속하는 건 아닐까 싶을 만큼. 그러나 조금씩 몇 년간 꾸준히 수행하던 지역 영화 글쓰기의 쓸모가 발견되기 시작했다. 지난 몇 년간 한국 독립영화에서 ‘지역 영화’는 꾸준히 호명과 소환을 거듭해 왔다. 주요 영화제에서 여러 이름으로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에 주로 포진한 영화학과 중심)에 대비되는 로컬 작품 위주 부문을 신설하고, 지역별 독립영화제에서도 해당 분야 비중이 대폭 늘어났다. 영상 제작 환경의 긍정적인 변화와 교육/지원기관의 증가로 지역에서 제작되는 영화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 안에 무수한 다양성과 가능성이 내재해 있다. 하지만 여전히 유력 영화제에서 호명되고 수상하지 않는 한, 절대다수의 지역 영화는 소리 소문 없이 잊히기 일쑤다. 물론 이는 수도권 지역에도 적용되지만, 바늘귀의 크기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문제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지역 영화생태계’란 수식어가 종종 등장하지만, 정작 제대로 된 심도 있는 논의는 찾기 힘들다. 대개 개별 지역마다 (변화된 창작 환경에 따라 대폭 증가한) 창작자는 꼭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소수나마 복합상영관에 걸리는 상업영화에 만족하지 못하는 관객층, 그들에 의지하며 능력껏 다양한 작품과 기획을 선보이려는 상영 공간 및 집단이 존재한다. 지역 영화제/독립·예술영화관/(근래 확산되는) 상영회 개최그룹 등이다. 이들을 묶어 흔히 생태계로 호칭한다. 지역 영화 창작자와 독립·예술영화 관객이 별개가 아니라면 그 자체로 작은 영화 공동체가 될 수 있으리란 기대가 싹틀 법하다. 그러나 가야 할 길에는 난제가 숱하다. 우선 관객 입장에선 반드시 지역 영화를 관람할 이유랄 게 없다. 세상에 봐야 할 영화가 얼마나 많은데, 정보도 찾기 힘든 낯선 영화까지 챙겨야 한다는 말인가. 그러다 보니 지역에서 만든 영화가 평가받는 거의 유일한 기준은 (외부의 알려진) 영화제 진출과 수상 경력으로 제한된다. 자기 동네에서 만들어진 영화가 돌고 돌아 역수입이 되어야 비로소 인식 대상이 되는 것이다. 지역 영화의 매력이자 개성이라면, 다양한 고유의 소재와 배경, 지역 사회와 문화에 주목한 특유의 색깔일 텐데 정작 그나마 소개될 기회를 얻는 경로는 그 특색과 동떨어지기 쉬운 셈이다. 이런 오류를 보완하는 데 지역 사회 내에 공존하며, 영화생태계 일부로 소속감을 지닌 평론/평론가의 존재는 필수적인 윤활유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2023년 반짝다큐페스티벌 중 섹션4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작은 변화의 가능성과 함께 엄습하는 숙제들 지역에서 왕성히 활동하는 인터넷 대안언론 《뉴스민》에 제안해 ‘무비053’이란 이름의 칼럼을 열었다. 2주마다 꼬박꼬박 대구(경북) 지역 작가와 배경의 영화를 소개하는 코너다. 2022년 3월부터 기고를 개시한 해당 칼럼이 훗날 『경계의 영화: 대구영화라는 낯선 풍경』(2025)의 산파가 된 셈이다. 몇 년 전부터 틈틈이 비정기 기고는 진행했지만, 본격적인 지역 영화글을 집필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하지만 글쓴이에게 일어난 변화는 작지 않다. 지역에서 영화 관련 글을 쓴다는 건 단순히 글쓰기로만 끝나지 않는 일이다. 일단 영화를 찾아봐야만 한다. 대부분 지역에서 제작되는 작품이 단편이다 보니 오프라인 상영을 찾아다녀야 한다. 그나마 대구는 근래 비교적 활발하게 작품 창작이 일어나고 있기에 작품 숫자는 적지 않은 편이나, 지역별 편차에 따라 애초 작품 수급 자체가 힘든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일상적인 상영 공간이 부재하니 한 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볼 기약이 없다. 그런 상황이라면 창작자에게 별도 연락을 취해 과정을 밟아야만 한다. 그런 수소문을 통해 멀찍이 거리를 두던 지역의 영화인들과 대면하고 교섭(?)을 치르게 된다. 해당 과정을 반복하며 정보를 취합하고 평론 글을 게재하면 창작자의 반응을 기다리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작업에 대한 피드백을 거의 경험할 기회가 적다 보니 글쓴이가 기대하던 교류를 얻기란 지극히 드물다. 그저 자신의 작업에 누군가 반응을 남겼다는 사실 자체로 기뻐하거나, 혹은 오탈자 지적이나 창작 의도에 부합하는 글을 암묵적으로 바란다는 확인이 대다수 반응을 이룬다. 이럴 땐 맥이 빠지지만, 결국엔 양측 모두 훈련과 적응이 필요한 사안이긴 하다. 『경계의 영화: 대구영화라는 낯선 풍경』 관련 대화형 행사 (좌) 2025년 부산다큐필름페스티벌 중 토크 포럼 / (우) 2025년 안동중앙아트시네마 내 북콘서트 안면을 트고 인사하게 되면 새롭고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하는데, ‘팔이 안으로 굽지 않느냐는’ 의심이다. 이는 여전히 저울에 올라오는 쟁점이기도 하다. 작품에 대한 상세 정보 취득이 수월해지는 만큼, 그에 비례해 중심 잡기라는 난제가 동시에 닥친다. 지역 영화를 둘러싼 일종의 ‘온정주의’에 관한 입장은 극명하게 나뉜다. 누군가는 당연한 일이라며 여러 제약을 극복해 완성된 지역 작품을 ‘동료’적인 시각에서 다루는 게 틀린 게 아니라 말하지만, 누군가는 그러한 근접성이 공정한 비평과 동떨어진 것이라 비판한다. 정답은 늘 그 중간 어딘가에서 형성된다. 글을 쓸 때마다 성배를 찾는 불가능한 모험을 거듭해야 한다는 뜻이다. 글을 쓰는 행위는 송고했다고 바로 끝나지 않는다. 해당 작품이 웬만큼 외부에서 소개되지 않았다면, 대부분은 필자의 글이 유일한 ‘공식’ 평론으로 남는 경우가 태반이다. 즉, 해당 작품 관련 검색 가능한 ‘정전’이 되는 셈이다. 이는 아주 살짝 보람인 동시에 큰 부담으로 자리한다. 작품이 온당하게 평가받고 소개될 수 있도록, 일종의 A/S 과정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다. 작품이 추가로 상영 기회를 얻게 지원하는 임무도 부여된다. 영화의 의미와 가치, 효용을 글을 쓰면서 포착한 데 기반해 가능한 선에서 추천하고 제안하는 과정이 글을 쓰는 동시에 부가된다. 지역별 영화생태계에서 비평의 자리를 찾기 위해 일련의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일부 작가의 작업을 일종의 ‘작가론’으로 작성하는 경로에 진입한다. 단편 위주로 작업하는 지역 창작자에겐 쉽게 접하기 힘든 기회인 도시에, 평론 관점에서도 창작자의 출발점부터 연속적으로 작업을 관찰하고 포착할 수 있는 드문 계기이기도 하다. 그런 계기를 통해 드물게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서는 창작자를 지켜보는 건 ‘발견’의 기쁨이 되곤 한다. 여기까지 언급하면 한국 독립영화의 ‘블루 오션’으로 간주할 만하지만, 실제로 지역 영화 글쓰기는 외롭고 험난한 길이다. 우선 공개 지면이 거의 부재하다. 물론 서울 등 수도권에서 활동하는 평론 영역에서도 지면 축소는 공통된 화두겠지만, 지역은 몇 곱절 더 심각하다. 일단 영화 평론을 전문적으로 실어주는 매체 자체가 드물다. 일간지나 공중파 방송 역시 전문 코너가 부재한 데다, 온라인 미디어 또한 전문 지면을 유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글쓴이 역시 라디오 프로그램에 간헐적으로 출연하는 것 외엔 안정적인 미디어 지면을 확보하는 데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었다. 사실상 자기가 글을 올릴 지면을 새로 만들어야만 가능한 셈이다. (좌) 2019년 대구MBC 프로그램 <문화극장 조조할인> 중 코너 ‘작은 영화관’ 녹화 현장 (우) 2023년 KBS2 라디오 프로그램 <음악과 음악 사이> 중 코너 ‘이 영화 어때요’ 생방송 현장 물론 없던 지면을 창조하다시피 하니, 중앙 미디어에 비교하면 노력과 봉사의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다. 지면을 유지하는 것도 감사한 일인 경우가 허다한 탓이다. ‘박리다매’로 승부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고료를 받고 평론을 싣는다는 기준을 설득하는 자체부터 쉽지 않다. ‘무료’로는 원고를 싣지 않는다는 원칙을 꺼내며 욕먹을 각오를 해야 할 판이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글을 쓸 수도 없다. 하지만 제대로 쓰고 싶은 만큼 전문성을 추구하는 데에도 한계가 뚜렷하다. 해당 매체 독자층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보다 좀 더 핵심적인 화두가 있는데, 애초 지역을 기반으로 영화 평론을 수행하는 동업자 겸 경쟁자 집단이 부재한 데 기인하는 문제다. 원래 고민하던 목적의식, 지역 영화에 대한 다양한 비평을 통한 ‘기대 효과’가 온전히 구현될 수 없다는 구조적 한계는 대구·경북은 물론 거의 모든 ‘지역’에서 공통된 난제다. 동료를 만들고 싶어도 찾기란 쉽지 않다. 아무래도 협업이 당연한 영화 창작 과정이나 상영 활동과 달리, 기본적으로 개인 작업인 특성 때문이다. 아울러 관심사와 여타 조건이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공동 작업은 더욱 고난도로 변한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일단 지역에서 전문화된 글쓰기를 상시 과제로 삼는 필자 찾기가 1차 관문, 지역 영화에 관심을 가진 이가 희소한 게 2차 관문, 조건 다 맞아도 일감이 없는 지역에서 해당 활동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게 3차 관문이다. 그야말로 ‘좁은 문’이다. 그룹을 구성해 ‘선의의 경쟁’을 일상에서 수행하지 않는다면 지역에 절실한 다양한 결의 비평 문화 조성은 암초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생태계 순환 과정에서 창작 집단에 자극을 주고 긴장을 유지하려면 넘어야 할 벽이기도 하다. (좌) 2022년 안동중앙아트시네마 내 영화비평 강좌 ‘영화 보기의 미학’ 프로그램 소개 (우) 2022년 인디플러스 포항 내 강의 ‘독립영화의 감상과 비평’ 지역 영화 예산 복원을 넘어서 지속 가능한 생태계 형성까지 2023년, 몇 년간 조금씩 조성해 왔던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역 영화 창작 및 영화문화 관련 예산이 전액 삭감된 후, 현재까지 관련 예산은 복원되지 못한 상태다. 자연스럽게 지역 영화 관련 지원 및 정책 초점은 해당 사안으로 귀결되는 실정이다. 물론 (개별 지역이 아닌 전체) 총액 12억이란 별것 아니게 보이는 지원 예산을 참 알뜰하게 써가며 여러 항목에 골고루 종잣돈이 되온 게 증명되기에, 본 예산은 복구를 넘어 대폭 확대되더라도 전혀 낭비가 아니다. 문제는 몇 년째 이 문제로 지역 영화에 대한 모든 담론이 환원된다는 점이다. 일단 ‘지역 영화(창작과 문화)’ 정책 수립의 초점과 방향이 확립되어야 한다. 현재 정부의 영화정책은 여전히 20세기에 형성된 ‘수출산업’에 방점이 찍혀 있다. 한국 독립·예술영화는 그런 시각 아래 철저하게 상업영화의 ‘(산업)예비군’으로만 사고해 온 게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 관점에서 언젠가부터 독립영화와 창작자마저 마치 국가대표팀 선발하듯 국내외 주요 영화제 진출과 수상 중심으로 서열화되는 실정이다. 그런 일방적 기준에 의한다면, 지역 영화는 2군도 아닌 3군 이하로 취급될 뿐이다. 당연히 관심을 호소해봐야 헛수고일 따름이다. 이런 난맥상을 돌파하려면 발상의 전환이 필수다. ‘산업’ 중심주의를 돌파하지 않으면 결국엔 지역 영화는 유령처럼 떠돌 뿐, 실체를 갖출 수 없다. 지역의 인재는 재능을 꽃피우기 위해 서울로 향하면 되고, 지역의 관객은 복합상영관 객석을 채우는 머릿수로만 족할 뿐인데 지역 영화에 유의미한 관심이 향할 리 없다. 기껏 기존 예산이 복구된다 해도 그저 시혜적인 상징에 불과할 테다. 지역 영화(창작과 문화)를 진흥하려면 우선 서울을 제외한 지역 공통 현황과 함께 차별화된 지역별 특징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순히 영화문화 측면을 뛰어넘어 한국사회 고질병인 ‘서울 공화국’ 문제와 직결된다. 즉 지역 균형발전, 지방분권 쟁점과 같은 궤로 놓고 접근해야 할 사안이다. 그렇게 발상을 전환한다면, 독립·예술영화 접근 기회의 균등은 곧 비수도권 주민들의 문화복지 권리 일부가 된다. 물론 그저 최신 상업영화 대작 관람 기회를 넘어, 다양한 영화문화 접근권으로 향해야 유의미할 것이다. 지역 영화에 관한 글쓰기는 그저 개별 창작물에 관한 평론으로 그치지 않는다. 해당 작품이 꼭 영화제를 거쳐 인정받지 않더라도 지역 내에서 충분한 함의와 가치를 갖는다면 이를 포착해 소개하는 기능을 통해 지역 영화문화 형성의 일부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글을 쓰는 데 그치지 않고, 상영 활동 등 2차, 3차 소개 기회를 넓히는 파급력을 상정하며 글을 쓰게 된다는 의미이다. 얼핏 피곤하거나 과도한 확장으로 받아들여질 주장이다. 그러나 지역 영화를 평론한다는 건 글쓰기로만 국한하기에 애초에 불가능한 과제다. 일종의 능동적 ‘수용’ 활동이자 순환계 내에서 끝없는 운동을 거듭하되 ‘미토콘드리아’처럼 일정 간격을 유지해야 한다. 그렇게 ‘지역화’한 영화 평론은 예산과 지원 대책에만 갇히지 않는 지역 영화문화 형성의 일부로 역할을 얻는다. 물론 ‘가지 않은 길’이기에 정답은 누구도 모른다. 다만 기존 독립·예술영화 비평 모델과 비교하면 보다 사회학적 접근, 현장 참여에 주목하는 형태를 지니리라 예상해 본다. 일단 떠나지 않고 지역 사회 쟁점과 배경을 숙지한 상태로 작품의 의미를 해석하고 발굴해 접속하는 과제를 수행하는 수밖에 없다. 개인을 넘어 집단으로, 생산자와 소비자의 이분법을 넘어 공생하는 영화생태계로 접근하는 과정에서 지역 영화 글쓰기는 고유의 형상과 임무를 찾게 될 테다. 지금은 일단 씨를 뿌리며 경작에 나설 시간이다. 2019년 대구MBC 프로그램 <문화극장 조조할인> 중 코너 ‘작은 영화관’ 녹화 현장 * 사진 전체: 필자 본인 제공 김상목(스크리닝 메이커) l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영화제와 상영회 기획부터 매체 기고, 라디오, 텔레비전, 교육 강연 등 들어오는 일 마다하지 않고 즐겁게 지역에서 다양한 영화를 소개하며 활동 중. 저서 『경계의 영화: 대구영화라는 낯선 풍경』(2025), 공저 『이것은 카메라입니다』(2022) 집필.
<장손> 중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1. 곰곰이 뜯어보면 ‘비평, 안녕하십니까’란 질문은 오묘하다. 비평(critic)이 위기(crisis)를 전제로 한다는 통설에 근거하자면, 비평이란 그 성질상 한사코 안녕(安寧)할 수 없는 것이거나, 최소한 안녕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 태평한 시기일지라도 비평가는 위기를 발견하고, 때로는 그것을 인식의 표면에 올리고자 위기를 조장해야 한다. 통념과 상식의 범주에 포착되지 않는 요소를 끝내 사유의 영역으로 회수해내는 일—그곳에 비평가의 덕목과 기쁨이 있다. 물론 이러한 덕목을 실천하고 기쁨을 누리는 비평가도 안녕하기는 어렵다. 상식과의 불화를 견지하면서 평안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안녕한 비평’은 존재할 수 없고(안녕하면 비평이 아니다) ‘안녕한 비평가’는 소속감을 불안으로 받아들이고, 불화에서 안정감을 찾는 사람들의 희귀한 기질을 갖춰야 한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어느 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내 존재의 밑바닥을 이루고 있는 것은 잊음(oubli)이다. 나는 잊기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잊음이다.” *주1 ) 비평가는 탄탄대로를 지척에 두고도 굳이 외줄을 탄다. 탄탄대로처럼 보이지만 실은 앞길이 끊어져 있다고 말하며. 그러므로 마땅히 안녕할 수 없는 비평(가)에게 주어지는 ‘비평, 안녕하십니까’란 질문은 이렇게 읽힌다. ‘비평, 설마 안녕히……하고 계신 건 아니죠?’ 내게 비평가란(등단 등의 제도를 통해 부여되는 자격이 결코 아니고) 비평의 기능을 준비하고 수행하는 사람의 총칭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부끄러울 정도로 조금만 비평가다. 그렇지만 질문은 언제나 정확한 시간에 도착한다. 그러니 질문을 핑계 삼아 외줄에 올라보자. 다시 한 번, 김현은 이렇게 쓴 적 있다. “나는 항상 옳다고 말하는 사람과 나는 항상 잘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앞의 사람은 투사고 뒤의 사람은 종교인·예술인이다. 나는 항상 옳다고 말하는 사람의 자부심 없이는 싸울 수 없고, 나는 항상 잘못한다고 사유하는 사람의 원죄성 없이는 느낄 수 없다.” *주2 비평가는 투사와 예술인의 세계를 오가고, 부지런히 샛길을 만든다. 잠깐, 자부심의 시간이다. 그렇지만 나는 부끄럽기에 아주 멀리 우회하고 감추고 파편화할 것이다. 2. 이두용 의 < 장남 >(1984)은 고향이 수몰지구로 선정되어 노부모가 자식들이 살고 있는 서울로 상경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장남( 신성일 )을 중심으로 담은 극영화다. 오즈 야스지로의 < 동경 이야기 >(1953)처럼 처음 장남의 집에 모셔진 노부모는 도시화된 생활과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여 집터로 사둔 변두리에 잠시 머물고 결국 노인에게 불편한 아파트로 옮겨진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제주도로 장남이 출장을 간 사이 노모는 아파트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틀니를 전달하지도, 임종을 지키지도 못한 장남이 도착한 건 엘리베이터에 실을 수도 없어 관이 ‘짐짝’처럼 곤돌라로 내려지고 있는 때였다. (상) 아파트로 이주한 노부모와 노모의 관이 내려지는 광경을 바라보는 장남 (하) 공중전화에 두고 간 수첩을 전달받는 장남 이렇게 글줄로 옮기니 장남이 적극적으로 불효를 저지른 것 같지만, 장남은 결코 지탄받을 정도의 불효자가 아니다. 그는 다만 ‘잘 잊는 사람’일 뿐이다. <장남> 그리고 이두용의 탁월함은, 이 성격을 구축하는 표현법에 있다. 5분, 장남이 공중전화에서 막내에게 전화를 하고/다음 이용객이 장남이 수첩을 두고 갔다고 불러/수첩을 전해주는 장면이 있다. 슬래쉬(/)를 기준으로 세 컷으로 이뤄진 이 장면은, 장남이 ‘잘 잊는 사람’임을 보여주려는 의도(intention)를 드러낼 정도로 강조되어 있지만, 몰입을 저해할 만큼 웅변조는 아니다. 이 장면을 계기로 시작된 ‘잘 잊는 사람’이란 성향이 연속되며 결말이 엄습해온다. 장남의 유실물이 점점 중대해진다. 그는 아내와의 결혼기념일을 잊고, 어머니의 틀니를 해주는 것을 잊고, (어머니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는 말을 했음에도) 결국에는 어머니의 다가오는 죽음을 잊는다. 그 제목만으로 <장남>과 ‘ 각각의 영화사 ’를 상상하게 하는 < 장손 >(오정민, 2023)은 여러모로 다른 영화다. 노부모가 장남을 찾아오는 게 아니라, 상경한 손자가 가족이 사는 대구의 고향 집으로 내려온다. 장남과 달리 장손 김성진( 강승호 )은 자동차를 몰지 않는다( 임권택 은 언젠가 영화평론가 정성일 에게 “남자가 말이오, 나이가 들어서 늙으면 안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운전밖에 없어요”라고 말한 적 있다. 남성성과 운전). 그리고 무엇보다 장남은 가족의 무게를 지려고 한다. 그렇지만 장손은 가족의 무게를 지려고 하지 않는다. 장손은 조부모의 영정사진을 찍는 일을 회피하고, 할머니의 장례식장으로도 곧잘 들어오지 않으며, 병실 바로 앞에서도 고모부의 얼굴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창밖의 햇볕에서도 눈을 돌리듯, 가족의 문제를 외면(外面)한다. 고모부를 보지 못하고 병실 앞에 앉은 성진 물론 <장남>의 잦은 망각도 무의식적 외면의 욕구가 가족주의에 검열된 결과로 충분히 바라볼 수 있다. 다만 무의식적 외면의 욕구가 가족주의라는 검열과 부딪칠 때마다 쌓였던 에너지는 노모의 죽음과 함께 슬픔으로 폭발하고 관객에게 전이된다. 그리하여 이두용 영화에 내재한 미묘한 냉엄함과 별개로, <장남>은 가족주의의 메시지로 귀결된다. *주3 이와 달리 가족의 무게를 결단코 외면하지만 (지극히 특권적이고 결단코 반항한다고 보기는 어려운, 그러므로 단언컨대 성진은 그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핵심적 구동원리인 ‘장자우선주의’의 수혜자인 덕에 가족주의의 전(全) 과정을 익히 알 수 있는 성진의 특권적 시야로 인해 <장손>은 건조한 케이스 스터디로 귀결된다. <장남>과 <장손>의 이 차이는 흥미롭다. 그렇지만 지금 남겨둘 질문은 하나다. 어쩌다 장손은 외면을 하게 되었는가? 3. 유산(heritage)은 벽이다. 외면하고 도망치려 할수록, 그 벽은 점점 더 커지고 결국에는 모두를 병들게 한다. 이 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법은 단 하나다. 그것을 정확히 대면하는 것. 나는 여기에 관한 최량의 우화를 하나 알고 있다. 남재일 : 당신의 영화는 매우 공격적이고 신랄하게 발언한다. 지금 ‘아버지’라고 표현한 부분일 수도 있겠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공격하고 싶은 건가? 임상수 : 나는 모든 권위 혹은 권위주의를 철저하게 경멸한다. < 그때 그사람들 >(2005)을 본 사람들은 임상수가 이렇게까지 존경심이 없다는 데 당혹해한다. 좌파와 진보적인 사람들까지도. 그런 걸 보면 나는 묘한 쾌감을 느낀다. 경멸하고 싶다고 해서 갑자기 경멸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조롱하고 싶다고 해서 갑자기 조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뿌리 깊은 속성부터 아무런 존경심이 없다. 그 근원은 내 부친이다. 그는 존경심이 없었던 사람이다. 그는 출세하지 못한 사람이 출세한 사람에 대해 가지는 질투가 있었지만, 나는 한 세대를 겪고 나오면서, 그 질투를 정확하게 걸러냈다. 그의 경멸만을 물려받았다. 경멸하려면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요만큼도 존경할 거리가 없는 사람들이 허투루 존경받고 있다는 치명적인 사실 말이다. (강조-인용자) ‘남한’을 구축했다고 할 만한 최대의 유산인 박정희를 경멸하기 위해 임상수 는 사실을 대면해야 한다고 말한다. 동시에 임상수는 박정희를 거의 촌부로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 해직기자이자 영화평론가였던 아버지 임영(林英)의 덕이며, 심지어는 “어떤 점에서는 아버지가 이 영화의 공동창작자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층위는 다소 다르지만) 유산의 성격이다. (박정희라는) 유산은 강력하다. 그렇지만 정확히 대면하면 그것을 경멸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버지-임영이라는) 유산은 강력하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주4 한국의 영화에도 많은 유산이 있다. 나는 이 유산의 영향 아래 살고 있다. 유산은 일종의 물과 어항이다. 나는 그 안에 살기에(물) 제한된다(어항). 제한하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으면 평안함을 누릴 수 있지만, 의심이 시작되면 참을 수 없이 답답해진다. 이 답답함을 외면(外面)하는 것이 ‘안녕’한 선택이다. 그리고 ‘안녕’을 위한 외면도 반복된다면 평안함을 누릴 수 있다. 다시 한 번, 비평은 어항의 ‘바깥’을 향한 몸짓이다. 그 몸짓의 방법과 정도는 가지각색일 수 있다. 어항 속의 물고기들과 사이좋게 지내면서 지느러미로 어항을 가늠하고 빈틈을 탐색할 수도 있고, 눈알이 빠지도록 대가리를 어항에 처박을 수도 있다. 한국의 영화사를 돌아보면 많은 비평은 어항을 새로이 만드는 일에 참여해왔다. 초기의 비평은 세계영화에 비해 기반과 역사가 빈천한 ‘한국영화’의 위신(prestige)을 위해 투쟁했고, 1990~2000년대 ‘뜻밖의 연합(Unexpected Alliances)’ *주5 이 이뤄진 시기의 비평은 ‘스크린쿼터 운동’을 문화제국주의에 대립하는 첨예한 전선으로 잡고 독립과 인디(indie)의 기반이 되는 제도와 기금의 조성에 헌신했다. 이들의 투쟁과 헌신이 얼마나 상례적이었고 유효했는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검토가 필요하지만, 제도는 분명 중요한 비평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 비평의 결과로 만들어진 제도가 오늘날 영화에서의 유산이다. 나는 2010년대 중반부터 영화 비평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리고 기억컨대, 2010년대의 영화계는 제도 비평의 활기가 가득했다. 혹자는 이들의 제도 비평을 두고 지면(紙面)을 요구하는 퍼포먼스라고 저열한 힐난을 했지만, 내가 아는 한 제도 비평에 열을 올렸던 비평가 중 영화계에서 안정된 지면을 얻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제도 비평은 실질적으로 유효한 행정의 변화로 이어지지도 않았고, 제기한 논점을 두고 각계각층의 목소리를 듣는 회담이 열린 적도 없다. 솔직한 토론이 이루어질 경우 자신들의 지적 기반과 역사적 모순이 노정될 게 두려웠던 것일까? 비아냥거리고 싶은 마음을 최대한 억누르고 말하자면, 영화계는 제도 비평을 수용하고 처리할 수 있는 실질적 역량을 갖추지 못한 것 같다. (비판을 지면의 요구로 해석하는 사람이나, 비판의 실질이 아니라 태도를 사사건건 따지고 드는 사람들은 영화를 문화가 아니라 산업으로 보고 자리를 지키는 것에만 혈안이 된 게 아닐까? 그들은 종종 이렇게 무의식적인 고백을 한다. “이런 비판에는 동업자 정신이 결여되어있어……” 재원의 전부가 국가지원금인 경우에도……) 어쨌거나 그때의 비평가들은 대개 미술이나 문예 계열의 지면으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2020년 COVID-19로 인한 팬데믹(Pandemic)이 도래했다. 2010년대가 핵심적으로 겨냥한 유산이 ‘뜻밖의 연합’이 창안한 제도였다면, 이러한 역사적 우연은 지극히 공교롭게 느껴진다. 초기의 비평이 세계영화에 대해 한국영화의 위신을 추구한 배경은 당대 영화의 미디어 환경이 단관극장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같은 맥락에서 ‘뜻밖의 연합’ 시기의 비평이 세계영화에 대해 한국영화와 독립영화의 ‘다양성’을 ‘보장받길’ 원한 배경은 당대 영화의 미디어 환경이 멀티플렉스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다수의 상영관에서 한국의 영화를 확실히 몇 자리 확보하고자 하는. 그리고 팬데믹은 정확히 멀티플렉스에 치명적인 위기를 몰고 왔고,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리하여 2010년대의 제도 비평을 지금 보면 어딘가 예언적인 게 있다. 그때 지적된 다양한 문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산적해 있고 심화되었다. 그렇지만 학습의 효과일까. 오늘날 영화 비평은 더는 제도를 문제 삼지 않기로 한 것처럼 보인다. (어차피 내 대가리만 깨지고 말 텐데?) 그리고 전국적으로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는 ‘마이크로시네마’가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 같다. (여담이지만 《씨네21》이 서로 너무도 이질적인 집단을 묶고 이들을 ‘마이크로시네마’라는 새로운 환경으로 제시했지만, 그 요체인 소규모-(비)공식-영화보기 모임은 당연한 말이지만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최근의 ‘마이크로시네마’가 새로운 현상인 것은 이 기획에 비평가가 다수 참여하고 있고, 과거와 달리 (위법성의 소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한 홍보로 호객을 한다는 점일 테다) 그 실질은 제도 비평과 아무 관계 없다고 실소할 사람이 더 많을 것 같다. 구조적으로도 팬데믹 시기에 강화된 OTT라는 미디어 환경이 영화를 초과공급하고 있기에 강력한 큐레이팅 기능을 요구하는 수요를 포착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역사의 시야에서 2010년대의 제도 비평과 2020년대의 마이크로시네마가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 나만의 착각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혹은 착각일지라도, 이 착각이 적잖이 생산적일 거라고 자신한다. 이러한 착각을 지속하자면(사실 비평가는 착각의 대가 아니겠는가?) 나는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포스트 2010년대’를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영화 제도가 비판을 수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새로운 유통과 인정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판단, 혹은 제도화 없는 비판이 내파(implosion)와 외파(explosion)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토대로 시작한 참호공사. 어항과 금붕어의 비유를 계속 들자면, 전자는 작지만 작은 어항을 새로이 만들자는 것이고, 후자는 어항을 부술 수 있을 때까지 머리를 단단하게 만들자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어쩌다보니, 제안받은 원고의 매수와 주제를 모두 훌쩍 초과했기에, 이쯤에서 서둘러 마무리해보자. 나는 비평이란 그 성질상 위태롭고 불쾌하고 불건전할 때 적절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나는 다시 어항에 대가리를 처박는 사람들이 보고 싶다. 2010년대에 예견되었듯, 멀티플렉스는 머지않아 시장에 의해 자동조절 될 것이고 줄어드는 관객에 따라 영화에 부착된 사회적 기능도 점차 희미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비평적 실천이 아니라, 제도 비평의 계절이 다시금 오기를 바란다. 그러니 (이제, 감히 대명사를 바꿔 보자) 우리의 ‘제도 비평’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것이 나의 근심이자 고민이다. 나는 성진-장손이 택시를 돌려 다시 집으로 가길 바란다. 그것이 그의 몸과 정신을 찢어놓는 결과를 낳을지라도, ‘2010년대 재방문’이 너무 늦지 않기를. “장자의 무용지용에 대한 퉁명스러운 반론: ‘그래 그렇게 오래 살아 뭐하자는 게요, 제기랄.’” *주6 *** 주1. 김현, 『행복한 책읽기』, 문학과지성사, 1993, 128쪽. 주2. 위의 책, 168쪽. 주3.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건대, 영화의 결말이 가족주의인 것이 영화의 질을 훼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주4. 고백하자면 나는 초기의 (영화적, 문화적) 세계관을 남재일 선생님의 말과 글에서 전수받았다. 유산은 강력하다…… 주5. 포스트 권위주의 사회에서 영화산업과 국가, 그리고 독립영화가 어떻게 예기치 않게 연합을 이뤘는지를 설명하는 동명의 저서(박영아, 2014)의 제목. 주6. 위의 책, 156쪽. 금동현(영화평론가) l 「상상되는 것인 동시에 그 잉여」(2024), 『하녀: 하녀 따위에 흥미를 가져요?』(2024) 등을 집필했다. 대구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의 매거진 《삼삼오오》를 기획하고 있다.
우미관은 1912년부터 1959년까지 서울 관철동에 존속했던 영화관으로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인 관객들에게 가장 친숙한 장소였다. 일본인 하야시다 긴지로(林田金次郞)와 시바타 미요지(紫田三代治)가 동업하여 1912년 12월 11일 관철동 89번지에 건립한 우미관은 수용 인원 1,000명 규모의 2층 벽돌 건물로, 조선인 상권의 중심지였던 종로2가 큰길에서 관철동으로 들어가는 골목에 위치했다. 우미관의 설립자 하야시다 긴지로는 청일전쟁 당시 조선에 건너온 어용상인이었다. 잡화 판매를 비롯해 석탄 판매업, 고리대금업 등으로 부를 일군 대표적인 상업 자본가로 경인 지역을 중심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하야시다상점(林田商店)을 경영했다. 한편 동업자 시바타 미요지는 청계천 모전교 부근 무교동에 처음으로 목욕탕을 세운 인물이었다. 일찍부터 조선으로 건너와 조선인들을 상대로 사업을 영위해서였는지, 비슷한 시기 건립된 다른 영화관과 달리 조선인 관객을 대상으로 활동사진관으로 운영하는데 두 사람은 거부감이 없었다. 1912년 당시 조선인 관객은, 지만관(志滿館)이라는 이름으로 필름을 상영했던 원각사나 유광관(有光館)이라는 이름으로 영화를 상영했던 장안사와 같은 연극장에서 특별 프로그램 형태로 활동사진을 접했다. 물론 최초의 활동사진상설관으로 알려진 경성고등연예관을 통해서도 영화 관람했다. 그러나 경성고등연예관은 조선인 관객과 일본인 관객을 함께 받아 민족간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당시 경성고등연예관에서는 조선인 변사와 일본인 변사가 번갈아 등장하여 영화의 줄거리를 설명한 후 영화를 상영했는데, 이러한 방식은 짧은 길이의 영화에는 유용했지만 장편영화에는 통용되지 않았다. 영화 중간에 설명하는 중설(中說)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장편영화의 경우 관객들은 영화의 내용을 정확히 알 수 없었고 자연스레 불만이 터져 나왔다. 따라서 1912년 설립된 대정관과 1913년 설립된 황금관은 애초 일본인 관객만을 대상으로 한 일본인 상설관으로서 운영되었으며, 1912년 설립된 우미관은 조선인 변사만을 두어 오로지 조선인 관객만을 대상으로 한 조선인 상설관으로서 운영되었다. [자료] 우미관 신축 낙성 개관 광고(《조선신문(朝鮮新聞)》, 1912.12.11.) 조선인 극장으로서 우미관이 전성기를 맞이한 시절은 1910년대 중반, 유니버설 영화를 독점적으로 상영하던 때였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독일에서 들여오던 생필름의 수입이 중단되고 파테사를 비롯하여 프랑스에서 수입되던 영화의 수도 현저히 줄면서 필름 가격이 폭등했다. 반면 1915년 미국의 유니버설사가 할리우드에 세계 최대 규모의 스튜디오인 유니버설시티를 짓고 영화를 양산, 세계 시장을 향해 대규모 수출을 시작했다. 1916년 무렵 영국의 필름 마켓에서는 미국영화가 무려 90%를 차지할 정도로 큰 위력을 떨쳤는데, 특히 유니버설의 필름들은 영국의 필름 마켓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태평양 건너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이때 폭풍처럼 미국산 필름의 인기를 몰고 온 것이 바로 ‘시리얼’(serial)이라 불리는 연속영화였다. 연속영화는 주로 모험과 사랑을 소재로 한 액션 영화들을 일컫는데, 1910년대 중반부터 1920년대 중반까지 전 세계 영화 흥행의 중심을 차지했던 장르다. 일반적으로 2권 분량의 에피소드가 1편을 이루며 대략 15편으로 완료되는데, 하나의 에피소드가 완료될 때마다 다음 편 이야기를 암시하는 장면으로 끝내는 소위 ‘클리프행어 효과’가 관객들로 하여금 상설관을 지속적으로 찾게 만들었다. 조선에 처음 소개된 유니버설의 연속영화는 1916년 6월 10일 황금관 신축 이전을 기념하여 상영된 <명금>(The Broken Coin, 1915)이었다. 프란시스 포드(Francos Ford)가 만든 이 작품은 1915년 일본에서 상영되어 이미 큰 인기를 얻은바, 일년 뒤 조선에 소개될 때는 일본인 극장인 황금관 말고도 조선인 극장인 우미관에서 상영되어 공전의 히트를 거뒀다. 한편 <명금>을 배급하던 유니버설사는, 1916년 7월 이전에 제작하여 이미 수입업자들에게 판매한 필름들을 제외한 모든 신작 필름에 대하여 유니버설의 일본 법인이라 할 수 있는 하리마(播磨)-유니버설(훗날 유니버설 동경지점)을 통해 임대 계약을 체결한 후에라야 상영 가능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한다. 유니버설의 정책이 필름을 판매에서 특약관 임대 형식으로 바뀐 것이다. 이 조치는 유니버설의 다양한 작품들을 배급할 수 있게 하여 유니버설 영화로 대표되는 할리우드 영화의 영향력을 크게 확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자료] 우미관이 유니버설사와 특약 계약을 맺었다는 내용의 광고(《매일신보》, 1916.12.17) 장편영화 1편을 상영하는 요즘과 달리, 당시의 상설관은 여러 편의 짧은 영화를 묶어 상영하는 방식이 주를 이뤘다. 오늘날의 TV 편성처럼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묶어 3시간 정도 분량이 되는 프로그램 하나를 만들었는데, 대정관이나 황금관과 같은 일본인 상설관은 서양영화와 더불어 일본의 구파, 신파영화를 섞어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그러나 조선인 상설관인 우미관은 일본영화를 상영하지 않고 오로지 서양영화로만 프로그램을 짰기 때문에, 유니버설과 특약관 계약을 맺고 유니버설 영화를 본격 상영하는 편이 훨씬 유리했다. 이런 이유로 우미관은 1916년 12월 유니버설과 특약을 체결하고 조선에서 유니버설영화를 독점 상영하게 된다. 그 결과 유니버설의 연속영화들 외에도 ‘블루 버드’(The Blue Bird)니 ‘레드 페더’(Red Feather)니 하는 브랜드의 장편 영화들이 우미관을 통해 소개될 수 있었다. 우미관에서 유니버설의 연속영화를 상영하던 즈음 가장 큰 인기를 끈 변사가 서상호였다. 그는 굵다란 목소리로 웅변조의 설명을 했는데, 막간에는 무대에 나와 가랑이 사이에 자전거 클랙슨을 끼우고 ‘뿡뿡’ 소리를 내며 이른바 ‘뿡뿡이 춤’을 추었다. 그러다 한때는 혁신선미단(革新鮮美團)이라는 신파극단에 가입해 신파배우로도 활동했다. 유니버설의 영화가 조선인 관객들의 인기를 끌면서 서상호를 위시한 우미관의 변사들이 스타가 되었다. 그리하여 단성사가 활동사진관으로 재탄생한 1918년 이후에는 변사들이 각 상설관의 흥행을 결정짓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서상호 같은 인기 변사는 각 상설관이 주목하는 최고의 스카우트 대상이었다. 1910년대 전성기를 보낸 우미관은 1918년 설립된 단성사와 1923년 설립된 조선극장과 경쟁하며 삼파전을 벌이던 중, 1924년 5월 발생한 실화로 건물 전체가 전소된다. 같은 해 12월 신축되기는 하였으나 시설이나 프로그램 경쟁력이 다른 극장들보다 떨어져 조선인 관객을 독점하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대신 파격적으로 전석 10전이라는 싼 관람료를 책정, 1930년대 중반에는 조선에서 가장 많은 관객을 수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관객에 비해 화장실의 규모가 작고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아 서울에서 가장 지저분한 장소의 대명사가 된다. 시설이 형편없다 보니, 1943년 조선흥행엽합회가 영화관의 시설을 기준으로 등급을 나누고 책정된 가격 이하로만 요금을 받기로 했을 때, 우미관은 전체 11개 등급 중에서 6~7급 정도를 받았다. 1~4급까지는 개봉관, 5~10급은 재개봉관, 11급은 문화영화관으로 크게 구분되던 당시의 기준에서, 명치좌와 동보영화극장, 성보영화극장이 1급을 받았으며 동보중앙극장, 희락관, 대륙극장이 5급을, 우미관, 낭화관, 신부관이 6~7급이었다. 서울의 영화관이 1류극장-2류극장-3류극장으로 구분됐 때 우미관은 3류극장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서양영화만 상영하던 우미관이지만 '활동사진영화취체규칙'이 제정된 1934년 이후로는 일본영화를 주로 상영하게 된다. '활동사진영화취체규칙'으로 상설관에 일본영화 의무 상영이 강제되자, 재정이 어렵던 우미관으로서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일본영화로 프로그램을 채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시기 우미관은 경성촬영소 및 경성극장을 운영하던 와케지마 슈지로가 맡아 경영했다. 경성촬영소를 설립하여 조선영화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던 와케지마는 조선인 상설관 운영도 고려하여 우미관을 임대했는데, 경성촬영소에서 제작한 <아리랑 고개>(홍개명, 1935) 같은 작품이 우미관에서 개봉되었다. 우미관은 오랫동안 종로의 조선인 흥행가를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우미관이 건립되자 조선인 관객들은 관철동 골목으로 모여 들었고 미로 같은 관철동 골목은 환락가가 되었다. 1920년대 3류 영화관으로 전락하면서 우미관은 저가의 입장료로 관객을 유인하며 명맥을 유지했다. 이때도 역시 우미관 주변은 사람들로 넘쳤으며 밤낮없이 흥청거렸다.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몰려 있던 그곳은 변사 서상호뿐만 아니라 김두한으로 대표되는 조선인 깡패들 혹은 그들을 소재로 한 활극영화의 주요 무대로도 기억된다. 해방 후, 전쟁 후까지도 관철동 골목을 지키던 우미관은 아쉽게도 1959년 화재로 사라졌다. 이후 화신백화점 옆에 우미관이란 이름의 영화관이 신축되지만, 새로운 우미관은 1982년까지 운영되다가 경영난으로 역시 폐관되었다. 참고문헌 한상언, 「구보씨, 우미관 영화 보러 갈래요?」, 『구보학보』 17호, 2017, 9~40쪽.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159~171쪽. * [사진](상단). 우미관을 세운 하야시다 긴지로와 그가 경영하던 하야시다 상점의 모습(『경성부지권(京城府之卷)』, 京城府) [자료] 《매일신보》, 1916.12.17[사진2 참고] 十二月 十四日 브터 / 特別大寫眞 / 泰西大々活劇 야구이 全五卷 今也 歐洲戰乱 의 結果 日本 에셔 輸入 ᄂᆞᆫ 「 후이룸 」 은 米國 이 獨有 ᄒᆞᆯ 이라 . 此時 ᄅᆞᆷ 當 야 本館 은 米國 에 在 活動寫眞 의 有一無二 大會社 인 「 유니바사루 」 社 ( 資本金 五億萬圓 으로 米國 의 活動寫眞 「 후이룸 」 製造會社 十七社 를 合倂 고 彼 名寶 와 黑箱 等 을 製造 會社) 東洋總代理店 된 東京 「 유니바 - 사루 , 하리마 」 商會 와 早速 히 特約 을 締結 고 本日 로 爲始 야 全部 同社 의 封切 寫眞 을 上場 ᄒᆞᆷ은 他館 에 類例 가 無 고 本館 이 獨有 ᄒᆞᆯ 이오니 此 가 全 혀 觀客 諸賢 의 平素 愛願 야 주신 結果 로셔 其 感謝 ᄒᆞᆷ을 一筆 難記 로소이다 . 仰乞伏望 노니 倍舊 愛護 샤 續 々 來觀之榮 을 賜 심을 伏望々々 나이다 . 謹白 [자료] 《매일신보》, 1943.07.03. 1 級 ( 封切館) 八十錢 으로 / 今日 부터 映畵常設館 入場料 를 引上 영화상설관의 입장 요금이 二 일부터 올낫다 . 조선흥행연합회 ( 朝鮮興行聯合會 ) 에서는 오래전부터 영화상설관의 입장 요금을 올릴려고 당국에 신청 중이든 바 二 일부 관보로써 개정 요금이 고시되엿다 . 그 내용을 보면 조선 안에 잇는 영화관을 최고 一 급으로부터 최저 十一 급 지 구별하야 그 입장 요금도 최고 一 급 八十 전으로부터 대걔 五 전씩 차이를 두고 최저 十一 급 二十五 전 지 현재보다 三 할 三 부가량 빗싸게 결정하엿다 . 一 급 八十 전 / 二 급 七十五 전 / 三 급 七十 전 / 四 급 六十五 전 / 五 급 六十 전 / 六 급 五十五 전 / 七 급 五十 전 / 八 급 四十五 전 / 九 급 三十五 전 / 十 급 三十 전 / 十一 급 二十五 전 그런데 四 급 지는 봉절관 ( 封切館 ) 으로 하고 五 급부터 十 급 지는 재상영 ( 再上映 ) 상설관으로하엿스며 十一 급은 문화영화 『 뉴 - 스 』 영화 등의 상설관으로 하엿다 . 이 『 급 』 을 결정하는 것은 각 도의 사정에 의하야 결정되는 것인데 경성의 예를 들면 명치좌 ( 明治座 ) 동보 ( 東寶 ) 영화극장 , 성보 ( 城寶 ) 영화극장 등은 一 급 ( 八十 전 ) 에 속하고 동보중앙극장 ( 中央劇場 ) 히락관 ( 喜樂館 ) 성남극장 ( 城南劇場 ) 대륙극장 ( 大陸 ) 등은 五 급 ( 六十 전 ) 우미관 ( 優美館 ) 낭화관 ( 浪花館 ) 신부좌 ( 新富座 ) 등은 六 급 내지 七 급에 속한다 . 이번 결정된 요금은 영화를 흥행할 의 요금으로서 최고 요금이므로 영화에 한하여서는 이상은 더 못 밧기로 되엿다 . 입장료에는 세금과 관남료 지 전부 포함되여 잇는데 세금은 전액의 一 활 五 부를 차지하고 잇다 . 즉 八十 전은 그 중 十 전이 세금이고 七十五 전은 九 전 六十五 전은 八 전이 세금인데 『 뉴 - 쓰 』 나 문화영화관의 입장료 ( 二十五 전 ) 에는 세금이 붓지 안는 현역 군인 ( 하사관 이하 ) 과 七 세 이상 十四 세 미만의 소인은 그 입장료의 반액을 밧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