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회
- 감독
- 후쿠모토 칸
- 제작년도
- 1997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어떤 장면을 선택하고 버려야 하는지는 언제나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다. 장면마다 미묘하게 다른 표현과 뉘앙스가 영화 전체에 무슨 효과를 가져올지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튀르키예의 여성감독 펠린 에스메르의 2017년 작품인 < 유용한 것 >에 이끌린 것은 이런 이유와 맞닿아 있다. ‘유용한 것’이라는 제목은 과거에 시인이자 변호사로 일하는 주인공 라우라의 삶의 태도에 걸쳐 있는 실존적 질문을 가리키지만, 범위를 넓혀 생각해본다면 필연적으로 무언가를 선별하고 삭제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영화 작업에 대한 지시적인 자문(自問)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영화적 경험에 있어 무엇이 유용한 것이고 무용한지 규정하는 기준은 분명치 않다(하나의 기준이 아니라 복수형의 기준과 판단이 있다는 식으로 회피하기란 쉽지만, 장면은 언제나 하나의 오케이컷만을 요구한다). 어떤 장면은 의미와 상징을 과시하지만, 어떤 장면은 선뜻 유용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쓸모없는 요소들로 잊을 수 없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반대로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순간들로만 이루어진 장면에도 관객이 받아들이는 쓸모와 의미는 불쑥 생성되어 영화적 경험에 남겨진다. 영화는 무의미와 의미가 끊임없이 긴장을 이루며 충돌하는 장소다. 영화 주변을 맴도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그 확신 없는 장소에서 모든 순간 결정을 거듭해야 하는 조건 앞에서 흥분을 느끼거나 불안에 몸서리쳐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감독의 전작인 <연극>과 <망루>를 인상적으로 보았지만, 그것 말고는 별다른 정보 없이 보게 된 작품이었다. 시작하자마자 영화에 사로잡혔다. 일견 산만하게 느껴지는 첫 장면에서부터 영화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하기 위해 기차역에 도착한 변호사 라일라의 예기치 않은 여행을 다루는 이 영화는, 플랫폼 문 앞에서 결혼사진을 찍는 커플을 보여주는 데서 시작한다. 잠시 뒤에 문밖에서 서성이는 라일라의 모습이 보이고 카메라는 화면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움직이는 라일라를 담아내기 위해 그녀의 걸음에 맞춰 좌우로 이동한다.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들려오는 화면 바깥의 목소리는 라일라의 복합적인 성격을 말해준다(“그녀는 낭만적이고, 내향적이었으며, 조금은 사회성이 부족했다”). 짧지 않은 롱테이크로 구성된 첫 장면은 중심적인 영역에서 또 다른 영역으로 시각적/청각적 차원의 초점을 계속해서 움직인다. 이 영화에서 롱테이크의 지속은 하나의 움직임에서 다른 움직임을 불러들이고 여러 가지의 활동을 결합하는 형식이다. 그것은 영화의 화면을 지속적으로 변형하고, 한 인물의 내면을 다른 사람의 얼굴과 대면케 한다. 망설이듯 우왕좌왕하던 라일라가 문을 열고 나선다. 그녀가 문을 열고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데서 시작하는 이 영화는 그러므로 화면을 개방하는 다양한 시도들로 구성되어 있다. 라일라는 고개를 돌려 결혼사진을 촬영 중인 커플을 바라본다. 이 순간에 그녀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커플뿐만이 아니라 우연히 그들 옆에서 촬영에 필요한 액자를 들어주던 카난이라는 어린 여성이라는 것을 인지하기는 어렵지만, 다음 장면에 카난의 아버지가 라일라에게 혼자 오디션을 보러 간 어린 딸을 돌봐달라고 부탁하면서 두 사람은 여행의 경로에서 만나게 된다. 그들은 다른 목적지로 향하지만, 생각지 않게 같은 곳을 경유하고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다. 별다른 말 없이 헤어진 두 사람이 다시 마주치고 대화를 나누는 곳은 야간열차의 내부에서다. 여러 형태의 문으로 형성된 다양한 ‘틈’의 장소다. 라일라는 한밤의 창문을 거울처럼 관찰하면서,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는 카난과 맞닥뜨린다. 창문의 반영과 문틈의 개방은 그렇게 서로 다른 얼굴들을 만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특별한 순간은 야간열차의 식당칸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초반부의 장면에 있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던 라일라와 카난의 옆자리로 우연히 두 여인이 합석하게 된다. 화면에는 라일라와 카난의 대화와 더불어, 합석한 두 여인의 몸짓이 붙잡힌다. 카난이 전화를 받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자, 대화는 테이블에 남겨진 세 사람의 이야기로 전환된다. 라일라는 합석한 이들과 맥주를 마시면서, 연인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고, 기차 칸 뒤편에서 심각한 얼굴로 통화하는 카난에게 시선을 던진다. 보고 듣고 만지고 먹는 일상의 감각들이 통일성 없이 쏟아지는 순간이다. 서로 다른 몸짓과 목소리가 연쇄적으로 발생하면서 이전까지 진행되던 대화가 중단되고 타인의 반응이 화면 내부로 침범하는 것이다. 쓸모 있고 유용한 인물과 대화를 중심에 두고 그 밖의 나머지 것들을 배제하는 구성이 아니라 중심과 주변을 산만하게 뒤섞고 얼굴과 말의 위계를 배척하는 방식이다. 어쩌면 다큐멘터리의 방법을 픽션에 가져온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에스메르는 다큐멘터리로 경력을 시작한 작가이고 주목할 만한 작업인 <연극>은 농촌에 사는 아홉 명의 여자들이 자기 삶에서 가져온 소재로 연극무대를 준비하는 과정을 다룬 작품이었다. 에스메르가 그리는 삶은 다성적이고 소란스러운 목소리들의 권리로 구성되어 있다. 열차가 전하는 매혹은 내부와 외부를 통과하며 무작위로 형성되는 만남에 있다. 누군가 자리를 비우고, 누군가는 우연히 도착하는 장소다. 그런 장소에서라면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무용하거나 비밀스러운 말을 주고받는 낯선 친밀함을 형성할 수 있다. 그것은 영화관에 가는 행위와도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라일라와 카난이 탑승한 야간열차는 이따금 이런저런 이유로 불이 꺼진다. 사람들은 어둠 속에 잠기고 창밖의 풍경과 눈앞에 있는 상대방의 얼굴만이 간신히 보인다. 그런 공간적 조건에서 카난은 처음 만난 라일라에게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배우를 꿈꾸는 지망생이자 간호사인 그녀는 친구를 대신해 죽음을 원하는 남자의 조력 자살을 도와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바로 이런 면모로 인해 <유용한 것>은 의도치 않게 코로나 이후 시기의 영화의 유용함을 생각하게 하는 작업이면서, 고다르의 죽음 이후에 삶의 유용성을 고려하는 영화가 되기도 한다). 그녀의 아버지조차 알지 못했을 카난의 비밀을 듣게 된 라일라의 여행에는 예상치 못한 방향과 성질이 덧붙는다. 그들의 여행은 밤에 속해 있다. 밤의 어둠이 드리운 내밀한 무대는 한시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진다. 인물 뒤편의 유리창 너머로는 아름다운 밤거리의 풍경이 지나가고 있다. 이 시간이 지나간다면, 라일라는 자살을 택하는 남자(그는 라일라와 만나 그녀가 쓴 시집의 독자라는 사실을 고백한다)와 대화를 나누고, 오랜만에 재회한 동창들과 기나긴 말을 주고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밤의 야간열차에서 속삭여지는 말과 다른 성질의 대화이다. 영화가 묘사하는 열차의 풍경들에서 이런 우연한 마주침과 내밀한 대화는 사라져가고 있다. 크리스티안의 펫졸트의 < 트랜짓 >의 마르세유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게오로그는 상처 입은 동승객이 고통 끝에 죽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다. 미코 레베레자의 <노 데이터 플랜>에서 기차 내부의 이민자들은 얼굴을 숨기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목소리로만 나타나고 있다. 카말 알자파리의 <암피옥서스는 멀어요>에서 기차는 도착하지 않고 사람들은 모두 대기실에서 잠들어 있을 뿐이다. 열차는 정치적 망명의 얼룩진 기록으로, 불법 체류자들과 난민들의 피로한 기억이 새겨진 장소로 재편되고 있다. 풍경을 바라보고 지나간 시간을 반추하는 장소의 기능은 희미해진다. 그것은 코로나 시기를 통과한 영화관의 곤경과 유사한 맥락을 갖는다는 점에서, 우리를 다시 영화의 장소라는 문제와 만나게 한다. <유용한 것>에서 변모하는 여행자의 ‘무용한’ 상태는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삶과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건네는 조건이 된다. 그런 얼굴과 목소리를 담아내는 것이야말로 여행하는 영화가 제안하는 삶의 조건일 것이다. 의도를 갖지 않는 무작위에 의한 만남 속에서 영화는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만남을 전제하는 장소들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어디서 영화를 나타나게 할 수 있을까?
< 기프실 >은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오랜 주제였으며 근래에는 다양한 미학적 접근을 통해 문제시되고 있는, 장소 박탈과 기억 투쟁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4대강 사업의 일환으로 영주댐 건설이 결정되고 감독의 할머니가 살아온 마을 ‘기프실’은 수몰 지구에 포함되었다. 공사가 시작되고 감독은 더 이상 생명을 일구지 말라고 경작금지안내판이 붙은 기프실에서의 삶을 쫓는다. 상실이 예정된 이 마을에는 시간이 축적되어 있다. 삶의 역사를 담은 공간은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으로서 생의 리듬을 관할하고 관계를 축적한다. 영화는 터전이 되어주는 공간의 의미를 잘 기억하고, 이를 통해 장소 잃은 삶을 질문하기 위한 기록이다. 마을에서는 이런저런 의례가 열린다. 영주댐 착공식이나 자전거 대회같이 관에서 주관하는 행사에는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며 지역의 일을 유용하는 국회의원의 연설이 울려 퍼진다. 반면 곧 폐교되는 평은 초등학교 총동창회 운동회에서는 대선배 졸업생 할아버지가 오랜 추억을 돌이키며 연설을 하고 마지막 초등학생들이 단상에 선다. 운동회는 이제 사라질 마을이 한동네 사람들 공통의 기억을 만드는 곳임을 상기시키는 의식이기도 하다. 한편 할머니의 장례식은 가족의 기억을 갱신하는 동시에 감독이 간직하고 있는 오랜 기억을 불러들인다. 감독은 내레이션을 통해 내밀한 마음을 고백하고, 할머니를 쫓는 그 마음은 마을의 죽음에 대한 불안과도 닿는다. 그 불안은 내가 어떤 존재를 붙잡지 못하고 영원히 상실하는 일에 대한 것이다. 첫 번째 의례에서 우리는 이해관계에 따라서 이용되는 경박하거나 낯선 공간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두 의례인 운동회와 장례식에서는 마을 공동의 기억과 한 개인의 기억이 교차하는 터전을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에 기록되는 마지막 의례는 오랜 홈비디오에 담겨 있는 신년 잔치다. 이 홈비디오에서 집의 앞마당에는 웃음을 나누는 가족과 건강한 할머니가 있다. 할머니와 마당을 잃은 가족이 할머니의 장례식 이후로 또다시 모여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기프실의 기록은 가족사에서 출발하지만, 국가권력에 의해 파괴되는 현장을 보고하고 그곳과 직접 관계를 맺어나간다. 또 감독의 내레이션은 개인에게 고유한 경험과 감정의 영역에서 마을을 상실하는 문제에 접근한다. 사적 다큐나 에세이, 또는 퍼포먼스 등 사회적 기억이 자리하고 있는 여러 층위를 드러내고자 하는 근래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미학적 시도들을 오가면서 <기프실>의 기억은 점점 단단해진다. 영화에서 기억되는 장소란 우선 모이고 쌓이는 곳이다. 터전을 잃는다는 것은 가족의 장소를 잃는 일이며 사람 사이 관계와 역사 지속의 중심을 잃는 일이다. 터전을 잃는다는 것은 삶을 경작하고 수확할 집을 잃는 일이다. 할머니가 무당새로 집에 돌아왔다고 생각하는 엄마를 따라 감독의 의식은 돌아올 검푸른 무당새의 날갯짓과 기프실을 떠올린다. 생전에 자주 서던 거울 앞에 한동안 머무는 무당새를 보면서 감독의 어머니는 연신 새가 곱다고 이야기하는데, 그 고운 무당새는 철거된 집과 이윽고 잠기게 될 마을 앞에서 머물 곳을 잃고 헤맬 것이다. 그런데 영화에는 감독과 노미 할머니의 관계가 관통하고 있다. 노미 할머니와 감독이 누워서 함께 TV를 보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언뜻 의아하게 느껴지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구체적인 정보를 전하거나 이야기의 전개를 이끌지 않기 때문이다. 그 장면은 우리가 쉽게 의미화하기 힘든 집에서의 시간을 담고 있다. 한 공간을 나누는 삶이란 왕왕 별일 없이 흐르는 시간을 공유한다. 이 장면에 앞서 면서기 집 할머니와의 인터뷰 중에도 의아한 장면이 삽입되어 있다. 할머니만을 담던 화면 중간에 들어오는 그것은 인터뷰 중인 감독을 비롯하여 카메라가 세팅된 전체 모습을 한 화면에 담고 있는 풀숏이다. 꼭 필요한지 묻게 되는 이러한 장면들에는 공통적으로 감독이 스크린에 있고, 그것은 할머니와의 거리를 드러낸다. 오프닝과 엔딩 장면에서도 감독은 기프실의 기록에 등장한다. 감독은 계속 <기프실> 안으로 들어오려고 한다. 감독은 멀리 바라본 기프실의 풍경에서 시작해 마주 보며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는 인터뷰를 거쳐 시간을 나누는 관계에 이르렀다. 마을에 쌓인 삶이란 이렇게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친밀한 관계를 품고 있다. 감독은 베이고 절단되어 모래가 흘러내리는 산의 모습처럼 사라져가는 마을 및 개발의 풍경과 대립하여 삶의 장소를 다시 자신의 관계 속에서 복원하고 기록한다. 영화의 에필로그에서 감독은 장소를 박탈당한 후의 할머니들을 따라간다. 그리고 영화는 경작이 계속되고 있음을 증언한다. 기억은 단절되거나 멈추지 않았다. 땅은 댐에 갇혀버렸지만, 기억을 간직한 손길과 발걸음은 안 좋은 토질에서도 험한 비탈길에서도 다시금 경작을 시작하고 있다. 땅에 쐐기 박혔던 경작금지안내판은 이러한 움직임을 통해 뿌리 뽑히고, 영화는 상실감 대신 기억의 투쟁을 껴안는다. 이 경작을 응원하는 감독의 퍼포먼스는 기프실과 감독의 거리를 더욱 밀착시킨다. 함께 살아가는 땅을 일구고자 하는 영화의 의지가 앞으로 경작해가야 할 우리의 미래에 기억의 싹을 심고 있다.
하얀 피부에 내성적이고 예쁘장한 명이. 그리고 구릿빛 피부의 호쾌한 미남자 선호. 두 사람은 동창회에서 재회한다. 명이는 내성적인 성격에 잘 어울리지 못하고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데 선호가 따라 나온다. 그런데 명이를 바라보는 선호의 눈이 예사롭지 않다. 담뱃불을 붙여주는 명이에게 닿을 듯이 접근하는 선호. 왠지 보는 관객의 마음까지 심쿵하게 만든다. 순정만화 풍의 아름다운 그림체, 섬세한 연출. 국내 최고의 BL이라는 말을 들으며 DVD 출시를 앞두고 있는 작품. 바로 6화까지 공개된 웹 애니메이션 < 과호흡 >이다. 네이버 TV에 공개된 웹 애니메이션 < 과호흡 >은 공개 즉시 폭발적인 호응을 얻으며 12만 뷰에 이르는 재생수를 기록했다. 이는 작가가 따로 공개한 유튜브와 합산되지 않은 숫자로 최근 발표된 국내 단편으로서는 이례적인 현상이다. 원래 브로맨스, BL 작품은 여성들의 영역이라 남성 독자들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일반 남성 독자인 나 역시 그간 접했던 브로맨스, 이른바 야오이 작품으로는 작품성이 우수하면서 야오이 성격은 많이 약하다는 만화 ‘뉴욕 뉴욕(라가와 마리모)’을 읽은 것이 전부였다. 그런 나에게도 < 과호흡 >은 재미있게 다가왔다. BL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설정과 아름다운 영상, 그리고 수위 높은 러브씬을 무기로 넓은 스펙트럼의 관객들에게 재미를 선사하는 중이다. 이 작품이 웹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으로 공개된 것도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웹 애니메이션은 TV 애니메이션과 다르게 보통 개인이나 소규모 창작자에 의해 연재의 개념으로 웹상에 발표된다. 최근 웹 애니메이션은 여러 가지 대안으로 시도되고 있는데, 오래전 인기를 모았던 <엽기토끼>나 <5인용>과 같은 작품이 한국 웹 애니메이션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해외에서는 유튜브에서 연재 중인 <사이먼 캣>과 같은 작품이 유명하다. TV애니메이션이 주로 유아용만을 생산하고 극장용 또한 큰 규모의 제작비 때문에 현실 반영이 느리며 성인 관객과의 소통이 어려운 것이 지금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의 현실이다. 웹툰은 여러 장르에서 두터운 시장을 가지고 청소년과 성인을 아우르는 폭 넓은 독자들과 소통하며 많은 작가들이 활동하고 있다. 그러한 점을 고려하여 많은 애니메이션 관련 업계는 성인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으로 웹 애니메이션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 과호흡 >이 그러한 관심을 현실적인 수입으로 이끌어내는 첫 작품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