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비 순찰대
- 제작년도
- 1999
- 출연
- 이정은, 김옥경, 김윤미, 기경옥, 김희선
영화 너머의 포스트-시네마를 가늠하면서, 여전히 남아있는 영화의 흔적도 제시합니다. ※ 본문에 삽입된 각주를 별도 페이지( 링크 )로 정리했습니다. 위 링크에 연결된 각주 페이지를 본 페이지와 나란히 놓아두고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이 글은 2000년 겨울, 언젠가 영화로 만들기 위해 써두었던 글을 2024년 겨울에 수정한 글이다. 과거, 문자로 남겨진 이 미완성 영화를, 현재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읽고 듣고 보며, 미래의 눈과 귀로 만들어지길 희망하였다. 이 가능성을 하나의 ‘포스트-시네마’ *주1 로 꿈꾸며 이전 글을 다시 손보고 주석을 추가하였다. ‘이 이야기는 밤이 스스로 그 문을 여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라는 문장으로 이 글을 시작한다면, 어쩌면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본 것 같다는 인상을 줄 것이다. “이 작고 보잘것없는 나라의 강과 산들을 둘러보셨으면 이제 부디 돌아가 주십시오. 그래야 모든 백성이 마음을 놓을 것입니다.” 1866년, 조선을 찾아온 이유를 그에게 물으니, 그는 ‘며칠 후에 있을 월식을 관찰하러 왔을 뿐’이라고 답했다. *주2 1958년, 그 *주3 는 다시 조선을 방문한다. 그는 시대에 취해 있지 않은 유예된 순간들을 좋아했다. 그는 지나가며 마주친 얼굴들, 기적들, 감각들, 구석들을 낯설고도 낯익은 시선으로 새겼다. 낯선 존재를 낯익은 감각으로, 낯익은 존재를 낯선 감각으로- 그는 파편적 순간 속 길 가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취약한 슬픔을 바라보았다. 나의 슬픔과 같은 너의 슬픔이 있는지. 너의 슬픔과 같은 나의 슬픔이 있는지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눈부신 어둠 속에서 월식을 관찰하던 그에게 ‘어떻게 어두운 곳에서도 잘 볼 수 있는지’ 묻자, ‘빛나는 해와 그 빛을 반영하는 달이 만들어내는 어둠의 시간을 찾아보라’라는 말을 나에게 남겼다. 그리하여 나는 2019년 겨울, 어둠 속의 월식이 아닌 밝음 속의 일식을 찾아 스리랑카의 동쪽 해안 도시 트링코말리(Trincomalee)로 떠났다. 이 여정은 그의 시선에 대한 나의 답장이다. 그의 편지 *주4 는 ‘인간의 얼굴과 선한 고양이는 태양이며 달’이라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나의 편지는 조선이라는 낯선 땅에서 그를 향해 돌아보던 하나의 얼굴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마주친 낯선 궤적을 사라져가는 우리의 언어로 담는다. 우리의 언어는 지진 통신(seismic communication)이다. 그중 영화는 움직이는 빛의 그림자로 태어났다. *주5 하지만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로 인해 영화는 빛을 내장하기 시작했다. 이제 영화는 더 이상 어둠 속에서 섬광을 더듬지 않는다. 그림자 없는 빛으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우리의 시선은 어떻게 희망과 절망을 엮어 어떤 기억을 다시 쓰고 있을까? 우리의 이야기는 밤이 스스로 그 문을 여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도둑맞은 편지 속 이야기다. 트링코말리의 한 작은 마을, 이곳에서 우리는 2004년 12월 26일 *주6 에 일어난 금환일식을 추적한다. 어둠 나라에서 파견된 불개가 이번에는 태양을 삼켜보지만, 너무 뜨거워 다시 뱉어낸다. 일식의 그림자는 15년 후 같은 날 *주7 이곳을 휩쓴 지진 해일을 기억하며 노래 ‘카메라 옵스큐라 Camera Obscura’를 부른다. 해와 달이 나뭇잎을 연주하며 지구에 떨구는 이 노래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카말 알-딘 알-파리시(Kamal al-Din al-Farisi), 이븐 알-하이삼의 『광학의 서』 개정판 Kitab Tanqih al-Manazi (The Revision of Ibn al-Haytham's Optics) 필사본, 1309. “이것은 시각이 작동하는 원리- 수천 년 전 까마귀가 본 것을 중국에서 묵자(墨子) *주8 가 메기가 본 것을 그리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주9 가 두꺼비가 본 것을 아랍에서 이븐 알 하이삼(Ibn al-Haytham) *주10 이 기록하였네” 까마귀는 쉬운 희망과 값싼 절망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노래한다. 메기는 후퇴하여 돌아온 곳을 새로운 곳으로 만들며 다시 나아가기 위해 노래한다. 두꺼비는 동굴 신화 속 그늘 아래 은총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노래한다. 게임의 규칙 1. 세 개의 산(山) 정상을 오랫동안 응시하며 바라본다. 2. 눈을 감는다. 겜마 프리시우스(Gemma Frisius), 천문학과 기하학 광선(De radio astronomico et geometrico), 1545. - 그 순간 색이 반전되고, 하늘은 어두워지며, 그림자의 그림자가 나타난다. *주11 어둠이 실종된 밤 - 구석과 구석 사이에서 우리는 귀 기울여 침묵을 끌어안는다. 새로운 것을 능숙하게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관점을 서툴게 취하며- 적정 거리를 찾기 위해 시선의 속도를 끊임없이 바꿔가며- 빛으로 시든 눈을 드러나는 어둠으로 씻는다. 우리는 절망과 희망을 엮고 찰나의 시간 축을 빌어 겹쳐진 실천적 기억 속 마주친 얼굴들, 기적들, 감각들, 구석들을 낯설고도 낯익은 시선으로 새긴다. 낯선 존재를 낯익은 감각으로 낯익은 존재를 낯선 감각으로- 코다(Coda) - 네 개의 벽 안에서 *주12 조용하고 소박한 작은 방, 뚫을 수 없는 그림자, 응답 없는 그림자; 깊은 생각, 슬픈 노래; 뛰는 마음 속 소중한 희망 순간 순간의 고요한 비행; 먼 행복에 대한 움직임 없는 시선 많은 의심과 많은 인내심 여기, 나의 밤, 고독의 밤 우리의 이야기는 밤이 스스로 그 문을 여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도둑맞은 편지 속 이야기다. 덤프리스 지역 역사 박물관 카메라 옵스큐라 광고 홍보물 (사진: Museum Crush ) 스코틀랜드의 작은 마을 덤프리스(Dumfries), 1836년 덤프리스와 맥스웰타운 천문학 협회 (Dumfries and Maxwelltown Astronomical Society)는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건물인 풍차를 개조하여 핼리 혜성(Halley's Comet)을 관측하기 위한 망원경과 카메라 옵스큐라를 설치하였다. *주13 우리는 이 오래된 어둠의 공간 안에서 실종된 밤을 탐색한다. 어두울수록 이미지가 선명하게 보이는 이곳에서 우리는 물구나무를 서고 내부의 바깥쪽과 외부의 안쪽을 바라본다. 우리는 파편적 순간 속 길 가는 사람으로서 취약한 슬픔들을 바라본다. 순간 순간의 고요한 비행 가운데, 나의 슬픔과 같은 너의 슬픔이 있는지. 너의 슬픔과 같은 나의 슬픔이 있는지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우주의 구멍 아닌 구멍 지각할 수 없는 기묘한 천체 - 블랙홀로 만들어진 카메라 옵스큐라 우리는 이곳에서 블랙홀 *주14 의 그림자를 겹쳐가며 그 적정 속도와 거리를 찾는다. 어둠이 더 이상 빛을 증언하지 않는 이 위태로운 시대를 말하지 않고 말하며, 보지 않고 바라본다. 우리는 조용하고 소박한 이 작은 방 에서 우리의 회환을 감광제와 섞고 톱밥을 가득 채워 박제한다. 사건의 지평선 속 기억이 유일한 언어가 되는 이곳에서 우리는 공명하는 순간들을 현상한다. ‘너희가 눈멀었다 하면 죄가 없으려니와, 지금 너희가 본다고 말하므로 너희 죄가 남아 있느니라’ *주15 라는 외침에 조응하며- 우리가 오랫동안 마음 속 깊이 새긴 기억조차 떠도는 섬망의 언어인 것을 기억하며- 광기로부터 반성적 성찰을 건져내 지나간 그림자의 반영을 이어 붙이며 - 언젠가 그는 행복이라 부르던 순간을 화산재로 짠 장막으로 덮으며 말했다. ‘그들이 여기에서 행복을 볼 수 없다면 적어도 어둠을 볼 것’ *주16 이라고- 그리하여 우리는 비균질적인 이미지의 표면 위에 어둠을 함께 밝힌다. 우리의 밤은 이 암흑의 빛 속에서 후퇴한 그림자의 목소리를 말없이 조절한다. 우리의 지각이 후퇴하고 탈선하고 겹쳐질 때 이 어둠 속 구멍 이면에는 어떤 잔상이 있을까? 우리는 이 유예된 그림자에 여전히 같은 감각을 적용할 수 있을까? 이 병렬하고 교차하는 시간은 우리의 취약한 기억을 다시 쓸 수 있을까? 겸허하면서도 눈부신 시선들 사이를 우리는 어떻게 함께 걸어갈 수 있을까? 이 여정의 끝에는 우정이 있다. 나머지는 침묵이다. *주17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경계는 없지만 한계가 있는 끝은 없지만 유한한 - 밤이 스스로 그 문을 연다. 어둠과 침묵 속 다정한 밤 - 그 운동과 정지 사이 현전과 부재 사이 도둑맞은 우리의 편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필자 제공, 2019년 12월 29일 금환일식, 트링코말리 *** 주1. ‘포스트-시네마’는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필름 매체 자체의 본성을 탐구하며 기술 장치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선형적으로 살펴보며 이야기할 수 있다. 문화 산업으로 생산된 경제 상품으로서의 가치, 혹은 권력의 정치적 작동 수단으로 도구화된 역사를 추적하는 것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도 가능하겠다. 이 글에서는 ‘포스트-시네마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포스트-시네마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영화의 원형으로 돌아가 다가올 ‘포스트-시네마’의 가능성을 은유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주2. 앙리 쥐베르, 「조선 원정기」,《세계 일주(Le Tour du Monde)》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의 군인 앙리 쥐베르(M.H Zuber)는 사관으로 강화도 원정에 출정하였다. 그는 임무를 수행하며 조선의 정치적 상황과 문화 및 풍습을 소개하는 글과 그림을 남겼고, 그 기록은 1873년 프랑스 여행 전문 주간지 《세계 일주(Le Tour du Monde)》에 「조선 원정기(Une expédition en Corée)」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주3. 프랑스의 사진작가이자 영화감독인 크리스 마커(Chris Marker)는 1958년 프랑스 대표단으로 북한을 방문하였다. 다음 해 그는 이때 남긴 사진과 글을 엮어 사진집 『한국인(Coréennes)』을 쇠이유(Seuil)출판사를 통해 발간하였다. 한국에는 눈빛 출판사가 1989년 「북녘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진집을 번역 출간하였다. 주4. 크리스 마커는 ‘고양이 G에게 보내는 편지’를 사진집 『한국인(Coréennes)』 마지막에 실었다. 주5. 움직이고 변하는 그림자로서의 영화; 끊임없이 여러 존재를 변증법적으로 비추고 반영하는 영화. 고유한 각자의 이야기 직물을 짜고, 풀고, 다시 짜기를 반복하는 영화. 우리 안의 타자를 위한 빈 공간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영화. 복수의 힘과 규칙이 복합적으로 배치되는 사회적 혼합물로서의 영화. 움직이는 시적 감각과 사유가 다양한 생태계를 이루는 가변적 구성물로서의 영화. 주6. 2004년 12월 26일 인도양에서 진도 9.0 지진에 의해 발생한 쓰나미는 총 12개국에 전례 없는 사상자를 낸 인류 역사상 최악의 쓰나미다. 사망자 숫자만 약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주7. 2019년 12월 26일 오전 8시 10분부터 11시 26분까지 스리랑카에서 금환일식이 관측되었다. 달이 태양의 중심을 완전히 가리지만, 달의 그림자가 태양보다 작아 태양의 가장자리가 원형 빛으로 남는 불의 고리는 9시 38분부터 2분 43분 동안 진행되었다. 이 글에서는 두 사건의 시점을 교차하여 이야기한다. 주8. 기원전 400년경 중국의 철학자 묵자는 빛이 바늘구멍을 통해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면 바깥에 있는 대상의 반전된 이미지가 어두운 방 안에 만들어지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것은 카메라 옵스큐라의 핀홀 현상(Pinhole effect)을 최초로 기록한 역사로 여겨진다. 주9. 기원전 350년경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식 때 나뭇잎의 겹쳐진 틈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으로 인해 핀홀 현상이 관찰된다고 기록하였다. 주10. 기원후 935년경 태어난 아랍의 물리학자 이븐 알 하이삼은 현대 광학의 아버지이다. 세계 최초로 카메라 옵스큐라를 만들어 일식을 관찰하고, 다양한 실험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11. 『한국인(Coréennes)』의 여섯 번째 장 「아홉 뮤즈」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썼다. 주12.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odest Mussorgsky)의 연가곡 ‘태양 없이(Song cycle Sunless, 1874)’의 첫 번째 곡 ‘네 개의 벽 안에서(Within Four Walls)’를 인용하였다. 주13. 스코틀랜드 덤프리스 지역 역사 박물관에는 1836년 이래로 지금까지 작동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카메라 옵스큐라가 있다. 처음에는 천문학 협회의 연구용으로 사용되었지만, 1851년부터는 박물관의 카메라 옵스큐라를 모든 사람에게 개방하였다. 주14. 1997년 크리스 마커는 『한국인(Coréennes)』을 재발간할 때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들어간 후기를 추가한다. "알렉산더 메드베드킨(Alexander Medvedkin)에게 헌정한 영화에서 그는 이 강력한 이미지를 사용한다. 인류 역사상 우리와 같은 세대는 없었습니다... 마치 천문학에서의 ‘검은 별들’과 같아요. 제 삶은 이런 블랙홀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운 좋게도 블랙홀 반대편에서 폭탄을 맞을 수 있었던 우리는 블랙홀의 실패의 깊이를 무시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몰랐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주15. 요한복음 9장 41절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주16. 1983년 크리스 마커의 영화 < 태양 없이 Sans Soleil (Sunless) > 속 문장을 다시 썼다. 주17. 크리스 마커의 ‘고양이 G에게 보내는 편지’ 속 문장을 인용하였다. 임고은(영화감독, 시각예술가) l 영화를 둘러싼 시선의 주체와 객체, 과거와 현재, 진실과 허구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엮어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드는 가능성을 탐구해왔다. 최근에는 야생을 회복하기 위한 시적인 언어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 몰두하고 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란 1965년 디즈니가 테마파크 건설을 위한 플로리다주 올랜도 부동산 매입계획에 붙인 가칭이다. 그렇게 지어진 디즈니월드는 여전히 성업 중이지만 가족 단위 투숙객을 겨냥한 인근 저렴한 모텔들은 2008년 경기침체 이후 극빈층의 임시거주지로 용도가 변경됐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형편이라 안정된 주거를 확보하지 못하고 남의 집에 얹혀살거나, 차에서 먹고 자거나, 모텔에 주 단위로 투숙하는 소위 ‘숨은 홈리스’(Hidden Homeless) 현상이다. 숀 베이커 감독의 < 플로리다 프로젝트 >는 192번 국도 주변 퇴락한 모텔 매직 캐슬을 로케이션으로 삼아, 디즈니 월드 지척에 살면서도 디즈니 월드와 가장 멀리 떨어진 세계에 속하는 여섯 살 소녀 무니(브루클린 프린스)와 친구들의 여름을 지켜본다. 아직 10대 티를 벗지 못한 엄마 핼리(브리아 비네트)는 하루 38달러의 방값과 다음 끼니가 어디서 나올지 모르는 처지다. 그러나 말썽쟁이 무니에게 알록달록한 모텔 동네와 기념품 가게들은 신나는 놀이터고 교육의 부재는 무한한 자유다. 소녀는 관광객에게 잔돈을 얻어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일이 하나도 슬프지 않다. 엄마끼리 친구인 아래층 스쿠티(크리스토퍼 리베라), 이웃 퓨처랜드 모텔에 새로 이사 온 잰시(발레리아 코토)와 삼총사를 이룬 무니는 어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부류의 꼬마다. 자동차 창에 침 뱉기 게임을 하고,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구역에 들어가 두꺼비 집을 내리고, 일광욕하는 아줌마를 놀리며 뛰어논다. 말할 나위 없이 한 발 떨어져 보면 아이들의 일상은 위험투성이다. 국도에는 자동차가 질주하고, 수풀에서는 악어가 나올지도 모르고, 공사가 중단된 주택단지에선 뭐가 떨어질지 모른다. 수상한 취향의 뜨내기 아저씨가 노는 아이들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도 한다. 무니의 매일은 여름 캠프처럼 즐겁지만, 엄마 핼리는 생계를 점점 위험한 방법에 의지하게 되고 이는 여름의 파국으로 이어진다. 보호자들이 돈을 버는 사이 본의 아니게 모텔 아이들의 안위를 챙기는 역할을 맡은 사람은 매직 캐슬의 관리인 바비(윌렘 데포)다. 관광 모텔이 빈민 레지던스로 변하면서 모텔 매니저인 그는 업무 내역에도 없는 ‘생활주임’ 노릇을 한다. 투숙객들은 그에게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의지한다. 숀 베이커 감독은 이 사내를 가부장적 시혜자로 만들지 않는다. 모텔 주인의 피고용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명백히 인식하면서도 무니 모녀가 최악의 상태에 떨어질까 반사적으로 경계하는 바비는 수호천사도 선한 사마리아인도 아니고 그저 다른 인간의 곤경에 감응하는 인간이다. 모녀를 염려하지만 도울 길이 무망하다는 점에서 그는 관객의 대리자이기도 하다. < 플로리다 프로젝트 >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 중 하나는 부산한 일과를 마친 그가 어스름을 바라보며 담배에 불을 붙일 때 찾아온다. 바비가 첫 연기를 작은 한숨처럼 내쉬자 모텔 복도 외부 등이 일제히 들어오는 순간은, 이 남자가 ‘매직 캐슬’을 지키는 소박한 마법사임을 말하는 매직 아워다. 바비는 관객의 대리자일 뿐 아니라, 사회 주변부에서 겨우 생존을 이어가는 인물들을 이야기하는 영화에서 감독이 택한 윤리적 포지션도 암시한다. 우선 미국 영화에서 거의 재현되지 않는 극빈층 아웃사이더의 삶과 그들의 생활공간, 그들이 매일의 빵을 얻는 지하경제는 숀 베이커 감독이 줄곧 이끌리는 소재다. 2012년 작 < 스탈렛 >은 샌 페르난도 밸리의 백인 포르노 배우가 노년의 여성과 맺는 우정 이야기였고 바로 전작 < 탠저린 >은 매춘으로 먹고사는 트랜스우먼 친구 둘의 크리스마스이브를 그렸다. 이와 같은 소재에 접근하면서 숀 베이커 감독은 외부자로서 취하기 쉬운 분노나 동정의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내려다보지 않고 옆자리를 지키며 그들의 삶에 내재한 아름다움과 어두움을 그대로 파악하고자 한다. 궁핍한 삶에서 방점은 궁핍이 아니라 궁핍이라는 조건을 수반한 삶에 있어야 한다고 숀 베이커의 영화는 믿는다. 예컨대 < 플로리다 프로젝트 >의 도입부에는 무니가 침을 뱉은 차의 주인이 따지러 오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내키지 않는 투로 무니의 손목을 끌고 간 엄마 핼리는 피해자 아주머니와 벌 받는 아이들을 구경하다가 아주머니도 처지가 딱해진 딸 대신 손자를 키우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담배를 나눠 피는 두 여자 사이에는 어느새 미묘한 유대감이 형성된다. < 플로리다 프로젝트 >는 “이 아이들을 보라!”는 계고의 메시지와 거리가 멀다. 숀 베이커의 시나리오와 카메라는 가난한 어린이의 가난에 집중하는 대신, 아이를 아이답게 만드는 환희와 활력을 놓치지 않는다. 동시에 그들의 객관적 궁지도 직시한다. 이 과정에서 어떤 극 중 개인도 천사와 악마로 만들지 않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선한 의도와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절망을 착취하는 수많은 영화들이 입증한 바 있다. 핼리는 누가 봐도 훌륭한 엄마가 아니다. 부분적으로 무책임하며, 어리석은 선택도 한다. 관광객들에게 물건을 팔려고 어린 딸과 함께 호객하고, 매춘을 위한 프로필 사진 촬영을 딸과의 놀이로 만들어버리는 핼리의 행동은 충분히 우려스럽다. 그녀가 딸에게 선물하는 사치는, 좀 더 고급스런 모텔의 아침 뷔페에서 누리는 도둑 포식이다. 숀 베이커 감독은 핼리를 변호하지 않으나 이 캐릭터를 판정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핼리를 한심해 하면서도, 이 어린 엄마가 무니에게 최고의 친구이며 무니를 온 세상과도 바꾸지 않으리라는 점을 확신할 수 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이 왔을 때 우리는 사필귀정이라는 안도감과 모녀가 헤어지는 일은 옳지 않다는 감정 사이에서 흔들린다. 영화의 최선은 때로 관객 안에 진정한 갈등을 심는 것이다. 전작 < 탠저린 >을 아이폰 5S로 스크린에 손색없이 아름답게 촬영해 화제를 모았던 숀 베이커는 ‘아이폰 감독’으로 세상에 기억되는 일을 방지라도 하듯 < 플로리다 프로젝트 >를 35밀리 필름으로 찍었다. 카를로스 레이가다스 감독의 < 사일런트 라이트 > < 포스트 테네브라스 럭스 >를 촬영한 알렉시스 사베가 카메라를 담당했다. 실제 로케이션에서 촬영된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프레임은 연보라와 오렌지, 플로리다의 환한 푸른색으로 가득하다. 혹자는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시각적 아름다움을 현실의 어둠과 배치되는 컬러의 역설에서 찾겠으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숀 베이커는 그의 인물들이 살아가는 장소의 공기를 주민의 눈으로 포착할 줄 안다. 저예산 영화 다섯 편을 만들며 세트 없이 인물의 생활공간에서 영화적 긴장을 발견해 온 경험은 그의 커다란 자산이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많은 숏은 성인의 허리께에 오는 아이들의 눈높이로, 순진한 흥분과 거기에 무심한 세상의 압도적 사이즈를 전한다. 그러나 숀 베이커는 특정 스타일에 고착하는 감독은 아니다. 존재감이 엷고 기동성 높은 스마트폰 촬영으로 비전문 배우의 거침없는 연기를 따라잡고 부추겼던 <탠저린>과 대조적으로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주의 깊은 블로킹과 프레이밍이 만들어 낸 숏으로 지지된다. 어린 배우들로부터 의도한 결과를 끌어내는 데에 실용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뇌관인 무니 역 브루클린 프린스의 연기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널리 회자될 터라 여기서는 말을 아끼기로 한다.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공개된 후 프린스와 자주 비교되는 대상은 최연소 오스카 여우주연상에 후보 지명됐던 <비스트>(2012)의 크반자네 왈리스인데 왈리스가 아이로서 존재를 그대로 카메라 앞에 드러내는 연기를 했다면 브루클린 프린스의 그것은 타고 난 배우의 철저히 리허설 된 연기다. 이런 영악한 속성이 스스로를 세상의 주인공으로 믿고 화려한 ‘퍼포먼스’를 벌이는 무니라는 소녀의 성격과 조화롭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내내 관객을 이끌고 무니의 세상을 기웃거리고 뛰어다니던 < 플로리다 프로젝트 >는 마지막에 이르러, 마치 지금껏 한 번도 달리지 않았던 것처럼 달려나간다. 질주인지 비상인지 구분하기 힘든 이미지 앞에 떨면서 나는 딱 한 가지만 잊지 않으려고 했다. 예술이 세계를, 예술가가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는 동료 인간을 염려하고 사랑하는 좋은 방법을 아는 영화를 방금 봤다는 사실을.
“요즘 우리나라에 웨스턴 붐이 일고 있잖아. 야 일본에 < 요짐보 >라는 죽여주는 영화가 있는데 이런 느낌적인 느낌으로다가 대충하나 만들어 볼텨?” 이탈리아의 어떤 영화제작자는 두 패의 악인들이 대립하는 어느 장소에 홀연히 나타난, 선인인지 악인인지 하여간 건달 같은 작자가 문제를 해결하고 멋지게 사라지는 이 이야기에 무척 끌린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세르지오 코부치라는 감독을 불러들여 시나리오도 없이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완전한 무명배우였던 프랑코 네로를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고, 관을 끌고 다니는 남자, 깜짝 등장하는 무기, 황당하도록 화끈한 결말 등 당대의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들과 함께 장르의 클리셰라고 불릴 만큼 후대에 반복되는 요소들을 정립했던 이 영화는 1966년에 제작된 < 쟝고 > 다. 최근 쿠엔틴 타란티노는 이 장르를 아예 통째로 떠다가 본인 나름의 방식으로 아름답게 재해석해 < 쟝고 : 분노의 추격자 >를 만들기도 했다. < 쟝고 >(1966)와 < 삿갓 쓴 장고 >(1985) 그리고 시간이 흘러 1985년. 동북아시아의 조그만 나라, 영화 강국이라고는 부르기는 아직 어려웠던 한 나라에 이 비슷한 생각을 한 제작자가 또 있었다. 그는 많은 연출 경험으로 충무로에서 잔뼈가 굵은 한 감독을 기용했다. 이미 34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또 반 이상의 각본을 직접 쓴 사람이었다. < 대근이가 왔소 > < 특명 8호 > < 맨발로 왔다 > 같은 다수의 다찌마리 영화로 액션 연출에 경험이 많았고 < A*P*E 킹콩의 대역습 > 같은 영화로 미국과 공동작업 경험마저 있어 글로벌 인재로 손색이 없었다. 최영철 감독은 자작 시나리오로 배우를 캐스팅했고, 영화는 공개되었다. 천인공노할 사기꾼들을 정의로운 두 사내가 쳐부순다는 내용의 < 삿갓 쓴 장고 >는 대충 이렇게 제작되지 않았을까? 삐용삐용B무비의 마지막 원고를 어떤 영화로 해야 할지 나름대로 고민했다. 사실 이 분야가 그다지 많은 관심을 받는 것도 아니고 찾는 사람도 별로 없어서겠지만, 영상자료원 내에서도 볼 수 없는 영화가 정말 많았다. 필름으로는 존재하지만 다른 포맷으로는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 한녀 >나 < 관속의 드라큐라 > 같은 영화를 꼭 다루고 싶었다. 앞으로 더 나아지리라 믿는다.) 결국 고민은 마지막 회이니, B스러운 재미가 있으면서도 괜찮은 영화를 소개할 것이냐, 아니면 그냥 갈 데까지 간 영화를 소개할 것이냐 하는 원초적인 질문으로 수렴되었다. < 삿갓 쓴 장고 >는 후자에 포함하는 영화다. 몇 편의 허탈한 영화를 놓고 고민을 하였으나 이만한 것은 없었다. <삿갓 쓴 장고>와 함께 최종후보까지 올라간 < 햄버거 쟈니 >는 주인공 쟈니 윤 의 카리스마가 김인문-한무의 협공을 이기지 못해 탈락하였다. 장고와 소림사의 만남 영화가 시작되면 한 사내가 관을 끌고 나타난다. 승마 부츠와 청바지를 입은, 그리고 판초를 걸치고 카우보이모자를 쓴 그는 터덜터덜 밤길을 걷고 있다. 그때, 반대편에서 한 사내가 또! 관을 끌고 나타난다. 뭔가 비슷한 듯한 복장이지만 삿갓을 쓰고 거적때기를 어깨에 얹은, 비닐 장화를 신은 사내. 이 둘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나눈다. 삿갓: 너 뭐야. 빨갱이가 아니면 신분을 밝혀 신분을. 카우보이모자: 내 이름은... 장고. 성은 장 씨고 이름은 높을 고자여. 그러니께 장하고도 고. 이제 알았능가. 근데 넌 뭐여. 삿갓: 난 소림사다. 성은 소씨고 이름은 임할 림에 스승 사. 고로 소 하고도 림사. 소림사. 장고( 김인문 )와 소림사( 이승현 )의 첫 만남이다. 음악이나 문학, 그리고 영화도 마찬가지로 ‘시간’이 창작과 감상에 모두 작용하는 예술들이 있다. 앞서도 몇 번 말했듯, ‘시작’은 그 미메시스의 시간에 진입하는 관문이므로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라 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이 영화의 이렇듯 다짜고짜 전라도 사투리로 한자 풀이를 하며 관객을 인도한다. 이들이 통성명하는 계기도 엉뚱하다. 그냥 지나가고 있는 장고에게 소림사는 토마토인지 핏덩어리인지 뭔지 모를 것을 집어던진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소림사는 그때 마네킹을 해체하고 있었다. 어쨌든 화가 난 두 사람은 통성명 이후 시비가 붙는다. 장고: 근디 내가 니놈의 관상을 보니께 영락없는 쾡이여 쾡이! 명심보감에 대장부는 당용인이언정 무위인소용이니라 하였거늘... 소림사: 대장부는 마땅히 남을 용서할지언정 남의 용서를 받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 이 말이지? 장고: 허! 소림사: 너도 글깨나 아는 모양인데 내가 딴 건 몰라도 명심보감 하나만은 줄줄 외고 있지. 후후 장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공부해서 남 주는 거 아니니께 참말로 다행일세. 하지만 네놈은 푸줏간 신세도 되지 못하는 쾡이 신세여 쾡이! 소림사: 니놈은 너구리 신세고 너구리! 장고: 너구...!? 명심보감 웬 뜬금없는 명심보감 타령이며 쾡이, 너구리 타령인지 알 수가 없다. 아무리 이들의 싸움을 이해해보려 해도, 영화 시작 5분 내에 펼쳐진 일이라 물리적인 시간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된다. 뒤에 어떤 전사가 나오느냐? 그런 거 없다. 그냥... 싸운다. 게다가 이놈의 명심보감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 등장하는데 이들의 삶의 지침 같은 것이려니 하고 그냥 넘어가 보도록 노력을 해보자. 하지만 가슴 한 켠에 늘 육법전서를 넣어놓고 언제든 꺼내어 읽는 장고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조금 이상하다. 물론 시골에서 경찰시험 공부를 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것이라는 이유는 있다. 경찰 시험공부를 하는 것과 육법전서를 늘 품에 담고 다니는 것이 무슨 상관인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30살의 장고는(당시 김인문 씨 나이 46세) 그렇게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정신을 좀 차려야겠다. 간략한 내용은 이렇다. 경찰이 되어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서울로 상경한 장고. 서울에서의 생활비 마련을 위해 관 같이 생긴 궤짝에 새끼돼지 수십 마리를 데리고 왔으나, 악당 두꺼비(한무) 일파의 사기에 당해 모든 것을 잃고 만다. 한 편 장고와 비슷한 사연을 가지고 교통경찰이 되기 위해 관 같이 생긴 궤짝에 강아지를 잔뜩 데리고 올라온 소림사 역시 두꺼비 일파에게 걸려 모든 것을 잃고 만다. 그들은 우연히 만나 시비가 붙었던 탓에, 서로가 상황이 이렇게 만들었다 생각하고 만나기만 하면 싸운다. 그러던 중 장고는 무일푼인 상황이라 한 레스토랑에 웨이터로 취직을 하고, 두꺼비 일당을 찾아 복수할 것을 다짐한다. 우연히 부모의 원수가 두꺼비 일파와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된 장고는 그들을 추적하던 도중 필름을 입수하게 된다. 이것은 국제 마약상의 루트를 정리한 필름이었다. 한편 소림사 역시 일자리를 찾던 도중 우연히 장고가 일하는 레스토랑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어 함께 일하며 조금씩 서로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그러나 두꺼비는 소림사에게 접근하여 필름을 훔쳐오면 많은 돈을 주겠다고 유혹하게 되고 소림사는 제안을 거부하지 못하는데... 머릿속에서 내용을 끼워 맞추어 정리하긴 했지만,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그들이 끌고 다니는 관 속에는 새끼 돼지들과 강아지가 들어 있었고, 장고는 육법전서를 들고 다닌다. 소림사는 부모님이 뺑소니로 돌아가셔서 교통경찰이 꿈이다. 그러나 공부 밑천이었던 강아지를 두꺼비에게 다 뺏기고 ‘세계교통정리 선수권대회에 출전해서 챔피언도 따먹으려 했던 꿈’이 좌절되어 절망한다. (이게 내가 정리해서 쓴 것이 아니라 영화에 등장하는 대사다. ‘뺑소니 없는 명랑 교통질서 확립’이라는 대사는 내가 웃기려고 쓴 거로 생각할 것 같아 아예 뺐다.) 만약에 장고가 칼이라도 맞았는데 그 자리에 육법전서가 있어서 목숨을 구했다던가, 소림사가 교통정리 스킬을 발휘해 위험에서 벗어난다든가 하는 에피소드가 있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그런 거 없다. 이들이 아는 건 명심보감 뿐이다. 자꾸 장고와 소림사 얘기만 하니까 악당들은 좀 악당다운가 보다 싶으실 수도 있는데, 그럴 리가 없다. 악당 중간보스 두꺼비도 사연이 있다. 시골에서 상경해 돈을 벌어 금의환향해 두 동생들과 행복하게 살려 했지만 ‘여자 좋아하다가’ 결국 악의 길로 빠져든 안타까운 인물인 것이다.(이것도 대사를 통해 스스로 도출한 결론이다.) 게다가 그는 나쁜 짓을 하고 다니면서도 조직원들과 함께 ‘두꺼비 합창단’을 만들어 언젠가는 가수로 데뷔하고 싶은 꿈이 있다. 그와 함께하는 부하인 빈대, 벼룩, 모기, 파리 등등이 합창단의 멤버다. 그는 아지트에서 부하들과 함께 ‘두란두란’(아마도 80년대 보이그룹으로 유명했던 ‘듀란듀란’을 지칭하는 모양이다.)을 들으며 미래의 자기 모습을 그리곤 한다. 구수한 사투리 이 정도만 설명해도 이게 뭐야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데, 가장 충격적인 연출은 아직 말도 안 꺼냈다. 장고는 악당들의 끊임없는 음모와 협박에 필름을 돌려주기로 한다. 두꺼비 조직의 보스 김달성( 김기주 )은 해변가에 가면 외국인 여자가 한 명 있을 것이니 그녀에게 필름을 주고 전달했다는 표식으로 장미를 받아오라고 말한다. 해변으로 간 장고, 과연 금발의 외국 여인이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서 있다. 할 일이 있어 오기는 했지만 외국인은 어색한지라 “헤...헬로” 하고 말을 거니, 그 외국인 여인은 “아따 이제 왔능가. 싸게싸게 필름 내놓더라고!” 라며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대꾸한다. 이에 놀란 장고가 아니 어째서 사투리를... 하고 묻자 금발의 백인 여성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야 내 고향이 전라동께 그라지. 어여 필름이나 내놔야?”라며 구수하게 말을 한다. 로버트 할리도 있는데 이게 무슨 문제이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악당의 함정이었다. 가까스로 아수라장을 빠져나온 장고는 결국 그와의 마지막 대결을 준비하게 되는데. 엿장수 가위 최종 보스 김달성과 장고의 대결은 영화 역사상 가장 성의 없는 대결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싶다. 김달성은 웬일인지 미국식 카우보이 복장을 하고 나타나 장고를 위협한다. 그를 위협하는 무기는 총? 아니다. 칼? 그것도 아니다. 그럼 하다못해 야구방망이? 역시 아니다. 엿장수 가위다. 이유? 없다. 왜 두꺼비파 최종보스 김달성이 살상무기로 엿장수 가위를 사용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나마 이에 맞서는 장고의 밥주걱은 대사로 처리를 해주고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림사는 영화 중간에 악당 패거리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면서 ‘엄마의 유물’이라고 쓰여 있는 빨랫방망이를 선보인다.) 김달성: 아니 밥주걱? 장고: 그래 너는 악당 베르나도 산초가 아니라 국산 놀부니께!! 김달성: 놀부...?? 장고: 그래 놀부가 싫으면 어서 이 오동나무 코트를 입어! 끌고 온 관을 가리키며 ‘오동나무 코트’를 입으라 불호령을 내리는 장고의 굽히지 않는 모습에 응원을 하고 있자니 조금 머리가 아파오는데, 대결을 마치고 부모님 운운하며 앞으로 착실하게 살라고 일장연설 하는 장고의 뒤로 구슬프게 흐르는 ‘어머님 은혜’를 듣고 있으면 결국 효도해야겠다는 마음이 차오르며 결국 다른 생각은 모두 잊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후다닥 스크린에 차오르는 엔딩 크레딧. 이상하게 슬픈 크레딧이다. 몇 번을 돌려봐도, 감독 이름이 안 나온다... 한국에도 ‘알란 스미시’ 같은 이름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알란 스미시’는 미국에서 제작자의 간섭 혹은 스태프와의 불화 등 영화가 의도대로 제작되지 않아 연출자가 자신의 이름을 올리기 거부할 때 대신 올리는 이름이다. 대표작으로는 < 헬레이저4 >가 있다.) Directed by Alan Smithee 최영철 감독의 필모그라피는 주로 액션영화에 치중되어 있다. 간간이 다른 장르의 영화를 연출하곤 했는데, 이번에 소개한 < 삿갓 쓴 장고 >를 포함해 , < 백백교 >와 같은 괴작들이 있다. 특히 < A*P*E 킹콩의 대역습 >은 이 분야에서 국내외 모두 알아주는 작품이라 굳이 소개하지 않았을 정도다. 그래도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나쁘지 않은 흥행성적으로 꾸준히 영화를 찍어왔던 감독인데, 사업 파트너의 배신으로 수익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92년 이후 작품 활동이 중단되었다니 가슴 아픈 일이다. 김인문 이승현 한무 감독: 최영철 각본: 최영철 개봉극장: 명보(서울) 관람인원: 573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