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들
- 감독
- 이소희
- 제작년도
- 2016
한국영상자료원 수장고에 있는 무궁무진한 자료 중에는 얼핏 사소해 보이지만 ‘비장한’’ 가치를 품은 원석들이 있습니다. 그런 원석을 골라내고 잘 다듬기 위해! 아키비스트들은 오늘도 여러 단서를 모아 추적에 나섭니다. 하찮아 보이는 자료가 역사적 의의를 지닌 원석 으로 발굴되기까지, 자료의 맥락을 추적하는 KOFA 추리반장 의 세계를 들여다봅니다. 익히 봐온 < 오발탄 >(유현목, 1961) 포스터. 제일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은 포스터 상단, 입 주위를 손으로 감싸고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배우 김진규 의 얼굴과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억누르고 있는 듯한 배우 최무룡 의 표정이다. 그런 후 천천히 시선을 옮기면, 포스터 왼쪽으로 수영복을 입은 배우 김혜정 의 전신이 보인다. 곰곰이 생각하면, 포스터 속 김혜정의 모습은 다소 의아하다. 영화에서 김혜정이 이런 모습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처음엔 이 포스터를 대수롭지 않게 보았다. 포스터 속 김혜정의 모습도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포스터를 그다지 주의 깊이 보지 않았던 탓도 있다. 만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더라도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을 것 같다. 영화에 없는 장면일지언정 이걸로 관객을 모을 수만 있다면, 포스터는 그 자체로 소임을 다 한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포스터 속의 이 장면을 기대하며 극장을 들어섰는데 기대한 장면이 안 나오기로서니, 일단 집계된 관객 수는 물론이고 관객이 지불한 영화 값은 되돌릴 수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뻔뻔하게 만들어내는 AI 시대의 함정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상도덕에 어긋나는 일을 벌일 만큼의 과감함이 과연 그 옛날에 있었을지 의심했어야 했다. 이상하리만치 이상하지도 대수롭지도 않던 이 포스터가 불현듯 의아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 ”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런 일련의 사진들을 접한 때부터였다. (좌) DST702647_01 / (우) DST702648_01 사진에는 ① 배우 김혜정과 감독 유현목 , 촬영기사 김학성 이 등장한다. 아마도 셋이 함께 참여한 작품과 관련된 사진일 것이다. 사진 아래에는 ② “1960.8” 이라는 숫자가 찍혀 있는데 이는 사진이 촬영된 날짜로, 해당 시기에 촬영 중인 작품과 관련된 사진일 것이다. 또한 ③ 김혜정이 수영복을 입고 있어 , 이 작품에는 김혜정이 수영복을 입고 등장하는 장면이 있을 것이다. 자, 이제부터는 이 단서들을 가지고 사진과 관련된 영화가 무엇인지 추적해야 한다. 먼저 ①과 ②의 단서로, 이 사진들이 영화 <오발탄>과 관련된 것이라는 추론을 쉽게 내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당대의 신문 기사들이 이 같은 추론에 강력한 근거로 작용했다. 1960년 4월, 여러 신문 기사는 유현목(감독)과 김학성(촬영), 김성춘 (조명 및 제작)이 동인제 방식으로 <오발탄> 촬영에 곧 들어갈 예정이라고 보도했고, 같은 해 6월에는 영화가 촬영 중이며 배우들이 무보수로 출연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영화가 드디어 완성돼 1961년 초에 개봉될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당대의 기사를 종합하면, 영화 <오발탄>은 1960년 4월 무렵부터 12월까지 촬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사진들은 그들이 <오발탄>을 한창 촬영하고 있던 때에 찍은 사진 이 분명하다. 그런데 문제는 ③에 있었다. 영화 <오발탄>에서 김혜정(극 중 영호의 애인이자 영화배우인 미리 역)이 수영복을 입은 모습은 좀처럼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사진들을 처음 본 순간, 아주 잠깐이나마 이런 가설을 세워 보기도 했다. ‘이 사진은 그들이 <오발탄>을 한창 촬영 중일 때 찍은 것이기는 하지만, 촬영 현장에서 찍은 것은 아니지 않을까? 8월이라는 한여름, 때가 때인 만큼 어쩌면 촬영 중에 잠시 짬을 내 피서를 갔던 것은 아닐까?’ 그러다 문득 주의 깊이 보지 않았던 포스터를 다시 보게 되었고, 거기에 그려진 김혜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1961년 2월과 3월, <오발탄> 개봉을 예고하는 신문 광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사진 속 김혜정이 입은 수영복의 무늬가 포스터와 신문 광고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까지 확인되었다. 이 사진들이 두말할 나위 없이 <오발탄> 촬영 현장 사진 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하지만 여기서 추리를 마쳐서는 안 된다. 아키비스트의 추리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이 사진들이 <오발탄> 촬영 현장이라는 것은 영화 <오발탄>에 미리가 등장하는 수영장 신이 있었다는 것을 일러준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오발탄> 영상에 해당 장면이 없다는 것은 이 장면이 어떤 이유에서든 삭제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쯤에서 다음의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해 볼 수 있다. 첫째, 지금은 확인할 수 없는 <오발탄>의 수영장 신은 무슨 내용이었으며, 둘째, 이 장면은 언제 무슨 이유로 삭제되었을까? 현재 남아 있는 <오발탄> 영상에서 삭제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미리의 수영장 신이 무슨 내용이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영화 시나리오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해답은 의외로 쉽게 찾아졌다. 유현목 감독의 부인, 박근자 작가가 한국영상자료원에 기증한 “ 영화감독 유현목 연출 자료 컬렉션 ”에서 말이다. 이 컬렉션에는 여러 판본의 <오발탄> 시나리오가 포함돼 있는데, 그중 「<오발탄> 대사대본(녹음대본)」(이하 ‘녹음대본’, 관리번호 DCKN002163_01)에 문제의 이 장면이 남아 있었다. 「<오발탄> 대사대본(녹음대본)」(관리번호 DCKN002163_01), 68~69쪽. (여우 미리를 회견하는 기자군. 계단을 내려오든 미리, 얼굴을 가리며) 미리: 아… (머리를 숙이며) 감사합니다. 바쁘신데도 불구하시고 이러한 기회를 베풀어 주신 여러분의 앞날에 행복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기자들과 회견하는 미리) 기자: ⓔ 예술에 대해서 좀… 견해를 듣고 싶은데요. 미리: 예술이 뭐냐구요, 어려운 질문이군요. 마치 인생이 뭐냐고 캐묻는 질문처럼… 기자A: 어려우실 줄 압니다만 간단히 요약해 말씀하시면… 미리: 우리들 인생이 최대한으로 즐길 수 있는 꿈결! 기자A: 아주 명답이었습니다. (녹음기가 돌아간다) … 그런데 현대 과학이 우리들 꿈에 미치는 영향이란 무엇일까요? 미리: 특히 전 어린 시절에 별을 좋아했어요. 저 반짝이는 어린 별을 타고 은하수를 건너 하늘나라에 가 봤으면… 그런데 오늘날 그 어린 별마저 권태로운 이 땅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과학의 소리를 들었을 때 난 막 울고만 싶었어요. 기자 A: 미스 고의 그 울고만 싶어지는 감정 속에 저이들도 한몫 끼고 싶습니다. 하하하하… (수영장 조약대에서 선수들이 다이빙한다. 풀에서 나오는 수영복의 미리, 기자들이 몰려든다) 기자 A: 다음은 연애와 결혼에 대해서 좀… 미리: 적어도 현대 여성이라면 그런 질문에 답변치 않을 거예요. 기자 A: 왜 그럴까요? 수영장에서 스타 배우인 미리가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장면이다. 녹음대본에서 이 장면은 미리의 주선으로 배우가 될 기회를 뿌리치고 은행강도를 계획 중인 영호(최무룡)가 경식( 윤일봉 )이 잠적했다는 소식을 듣는 장면과 설희( 문혜란 )의 아파트 관리인에게서 간밤에 설희가 추락사했다는 소식을 듣는 장면 사이에 위치한다. 그래서 이 장면은 자신에게 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스타가 된 미리와 그런 기회를 박차고 절망 속에서 그릇된 길로 들어서는 영호의 모습을 대비시키는 장치가 된다. 또한 이 장면은 미리가 생각하는 예술 그리고 그것이 추구하는 ‘꿈결’이 현실과 모순되는 환상에 지나지 않음을 역설함으로써 동시대 예술의 역할에 대한 감독의 견해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도 작동한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언제 그리고 왜 삭제되었을까? 혹시 유교적 도덕관에 입각해 풍기문란을 우려한 검열관이 삭제를 지시한 것일까? <오발탄>의 검열 서류를 찾아봐야 할 시점이다. <오발탄>을 제작한 대한영화제작주식회사(대표 김성춘)는 1961년 2월 9일, 문교부에 영화 상영 신고서를 제출했다. 이에 대해 문교부는 2월 15일, <오발탄> 상영을 허가하면서도 “개천 하수도에서 어린이를 업은 여인이 목매단 장면”이 잔인하므로 삭제할 것을 지시했다. 아마도 제작사는 이를 받아들여 해당 장면을 삭제하고 4월 13일부터 서울의 국제극장 에서 상영을 시작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 장면 외에 검열에서 삭제 지시된 장면은 더 이상 없다. 물론 영화 <오발탄>의 시련은 익히 알려진 것처럼, 개봉(4월 13일) 다음날부터 시작됐다. 4월 14일, 문교부 문화국 예술과는 내무부 치안국장과 법무부 검찰국장에게 <오발탄>에 관한 재심의 의견을 물었다. 이에 대해 내무부 치안국은 4월 19일과 5월 28일, “공산주의 선전 색채가 농후하여 반공 국시에 위배되며 사회적인 악영향이 심하다”라는 의견을 문교부에 보냈고, 결국 <오발탄>은 재심의를 거쳐 7월 20일, 국내 상영 보류 결정을 통보받았다. 제작사는 그 후 수차례 재심의를 신청했지만, 번번이 기각되었다. 그러다 1963년 7월, 공보부 영화과는 <오발탄>에 대한 국내외 긍정적인 여론을 반영해 마침내 상영 보류를 해제했다. 단, 극 중 노모( 노재신 )가 “가자!”라고 외치는 대사와 화면을 삭제하고 미군이 명숙을 희롱하는 장면을 단축하는 조건이었다(관련 내용은 “ 유현목 검열자료 컬렉션 ” 내 <오발탄> 심의서류 참조). 그런데 여기에서도 미리의 수영장 신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런 점에서 수영장 신은 검열로 삭제된 것이 아님 이 분명하다. 극중 노모가 “가자”를 외치는 장면 당국의 검열로 인한 삭제가 아니라면, 혹시 감독의 연출적 판단이었을까? 촬영을 했으나 편집 과정에서 불필요한 장면으로 판단해 거둬내는 일은 사실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이 가설 역시 곧바로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잠정적인 추정이기는 하나, 미리의 수영장 신이 남아 있는 <오발탄> 녹음대본은 제작사가 1963년 당국에 재심의를 진정하면서 작성된 것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제작자 김성춘은 1963년 6월 11일에 공보부와 중앙정보부에 진정서를 제출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노모가 ‘가자’라는 헛소리하는 구절이 대중에게 오해될 우려가 있어 그 구절을 ‘저 푸른 벌판의 양 떼를 따라가자’라는 내용으로 간결 명확히 하여 인간의 평화스러운 유토피아를 그리워하는 본심을 강조”하는 등의 수정 부분을 열거하며 상영 허가를 간청하고 있다. 그런데 이 녹음대본에는 김성춘이 진정서에서 밝힌 수정 방향과 일치하는 다음의 대사가 등장한다. “얘야 가자! 어서들 짐을 싸고 나서렴! 저 양 떼를 따라가야지. 모두들 모두들 푸른 곳으로 가는데 얘야 어서들 가자!(녹음대본 76쪽)” 이 점에서 <오발탄> 녹음대본은 1963년 재검열 진정을 위해 영화를 재편집하는 과정에서 작성된 판본일 수 있는데, 여기에 수영장 신이 있다는 것은 1963년까지도 해당 장면이 영화에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임을, 따라서 감독의 연출적 판단만으로 삭제된 게 아니었을 것임 을 방증한다. 당국의 검열에 의한 것도, 감독의 연출적 판단에 의한 것도 아니라면, 어쩌면 이는 영화 프린트가 여러 목적으로 복사, 복제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보는 것이 좀 더 합당할 듯하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현재 감상할 수 있는 영화 <오발탄>은 1963년 11월에 개최된 제7회 샌프란시스코영화제를 위해 영어 자막을 입힌 후 1975년 영화진흥공사가 주최한 ‘광복 30주년 기념 한국영화 감상회’를 위해 복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프린트를 원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1] 그러하기에 <오발탄> 녹음대본에는 존재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영화 판본에는 부재한 미리의 수영장 신은 1963년 샌프란시스코영화제 출품용 프린트가 만들어지는 과정, 혹은 1975년 ‘광복 30주년 기념 한국영화 감상회’를 위해 그것이 또다시 복제되는 과정(이때의 <오발탄> 상영은 결국 무산되었다)에서 삭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해당 장면이 삭제된 이유가 무엇인지, 그러한 삭제를 결정하기까지 연출자 유현목의 의도가 얼마만큼 반영되었는지는 여전히 미제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 [1] 김기호, 「<오발탄> 디지털 복원 과정에 대해」, 한국영상자료원, 『<오발탄> 블루레이 소책자』, 2016.
어떤 시간은 언어로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내가 이곳에서 통과한 시간들이 그랬다. 내가 가진 언어의 한계로는 도저히 써낼 수 없는 것. 거대하고, 두렵고, 지저분하고, 복잡한 동시에, 달고, 기특하고, 사랑스러운 순간들을 만끽했다. 고로, 나는 특별한 목적보다는 기억의 흐름을 충실히 따라 첫여름의 제작 과정을 기록한다. 여전히 전부 소화해낼 수 없는 감각을 안고, 순간을 돌아본다. < 첫여름 >(2025)은 여성 노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국영화아카데미(KAFA)에서 연출을 공부하며 만들었던 졸업작품이기도 하다. 졸업작품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잘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여자들의 이야기에 허기를 느꼈다.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은 나의 중추이다. 나는 자라면서 여자들이, 나아가 사회의 정상성에 어긋나는 존재들이 따갑고 납작한 사회에서 어떻게 투쟁하고 생존하는지 보고 겪었다. 축적된 분노와 우울은 나를 움직이게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사회에 균열을 내고 싶은 갈망이 맺혔고, 그 창구가 내게는 영화였다. 자연스레, 졸업작품으로 불편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문득 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의 할머니는 얄밉고 이기적이었다. 우리 둘은 잠깐 동거를 했었는데 할머니는 내게 어떠한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매일 마스크팩을 하시면서도 나에게 한 장을 나눠주지 않았었으니까. 그러다 어느 날 대학 과제로 할머니를 인터뷰하게 됐다. 그녀의 연애담을 들었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당신이 춤을 출 때 누구보다 신이 나고, 음악을 힘껏 사랑하는지를, 그리고 그 남자와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자신다워지는지를 서툴게 표현하시던 얼굴이 선명하다. 삶이 바빠 할머니를 잊었다. 아코디언이 너무 갖고 싶었지만 비싸 사지 못한다고 했던 할머니를, 애인 소식을 듣지 못해 앓던 할머니를 어린 나는 그토록 쉽게 잊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그녀의 49재에서 불경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가 마치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카바레 음악처럼 들렸다. 고개를 드니, 넓은 대웅전 마루에서 누구보다 자유로이 춤을 추는 할머니가 보였다. 한동안 나는 그 장면에 사로잡혔고, 기필코 이를 영화에 담아내 갖겠다고 결심했다. ‘관객들이 노인이 아닌 한 여자와 동행했다고 느낄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 이 다짐 하나를 손에 쥐고 <첫여름>을 쓰기 시작했다. 대웅전 주변에 앉은 영순(허진) <첫여름> 초고는 지금의 완고와 완연히 다르다. 초고는 손녀의 시점에서 어딘가 평범하지 않은 할머니 영순을 이해하게 되는 전개였다. 심지어 삼대가 만두도 빚었었다. 학수도 살아있었다! 어찌 됐든 초고는 실화와 훨씬 가까웠고, 지금의 영화 톤보다 안정적이고 온화했다. 거칠게 쓴 초고를 학교에 들고 갔을 때, 반응이 좋아 어리둥절했다. 수많은 물음표들을 훑기도 전에 나는 졸업작품을 함께 할 학우들과 본격적인 프리 프로덕션을 시작해야 했다. 곧이어 언어로는 절대 서술할 수 없는 고통, 재난 같은 고역의 시기가 찾아왔다. 시나리오가 써지지 않았다. 탈고를 가져가면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초고보다 나은 고를 쓸 수가 없었다. 이동을 잘 하지 않는 내가 어떻게든 환기를 해보겠다며 이리저리 싸돌아다니며 시나리오를 썼다. 동기를 따라 한답시고 스터디카페까지 도달한 나는 밤새 홀로 앉아 텅 빈 모니터를 바라봤다. 아침 8시였다. 여전히 모니터도, 머리도 텅- 비어 있었다. 노트북 자판 위로 눈물이 뚝뚝 맺혔다. 그 고통은 공포였다. 나에겐 시나리오와 나를 보고 모여준 팀원들이 있었다. 그들의 기대를 꺾지 않는 연출자가 되고 싶었다. 내가 쓰고 결정을 내려야 다른 팀원들이 움직일 수가 있었다. 그 이상으로 나를 공포에 내몰았던 존재는 할머니였다. 학교 수업의 일환인 시나리오 크리틱에서 나는 단언했다. “내 졸업영화를 본 누군가가 ‘할머니 팔아먹은 영화’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부끄럽지 않은 영화를 만들겠다.” 할머니의 존재는 몸집이 점점 커지더니 나를 꾸짖었다. 너 따위가 한 사람의 존엄하고 아득한 삶을 꾸며내려고 하다니. 네게 어떤 자격이 있다고. 감히 이야기를 쓸 수 없었다. 모든 게 다 위선이고 거짓 같았다. 나는 고작 누군가의 삶을 담보 잡아 이야기를 쓰는 사람인가. 자괴감이 해일처럼 나를 쓸고 해쳤다. 시간은 내 멱살을 잡아끌어 초고는 어느새 완고 비스름한 것이 되어있었다. 다행히 어느 정도 무난한 평가를 받았다. 그럼에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나를 돌아보게 했다. 할머니는 여전히 내 숨을 엄하게 짓눌렀다. 잡념과 눈물이 차올라 무엇을 해도 해소되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교수님을 찾아갔다. 허겁지겁 정리되지 않은 말과 추잡한 감정들을 와르르 쏟아냈다. 교수님은 잠자코 들어주셨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불쑥 한 문장이 튀어나왔다. “사실 전 제가 쓴 시나리오가 너무 불편해요.” 불편한 시나리오를 쓰고 싶었다. 그러나 초고의 불편함은 내가 의도한 것과 정반대의 것이었다. 난 그걸 견딜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 새로운 고를 써 내려갔다. 손녀 석윤이 아닌 영순이 오롯이 주인공인 시나리오였다. 시나리오 속 인물들이 드디어 사람같이 숨을 쉬고 근육을 움직였다. 오랜만에 단잠을 잤다. 가뿐했다. 신비한 경험이었다. 초고를 쓰며 나는 손녀의 시선으로 영순의 삶을 그렸다. 20대 여성이 보고 싶은 노인 여성 캐릭터를 만들었다. 노인을 전시하고 대상화한다는 감각을, 그 숨 막히는 불쾌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건 이 이야기의 출발을 배신하는 일이었다. 타인의 삶을 가볍게 다루는 순간, 그걸 본능적으로 아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나였다. 그 죗값은 고스란히 작가에게 돌아간다. 다음 날, 나는 할머니 영순이 주인공인 새로운 고를 A고, 손녀 석윤이 주인공인 이전 고를 B고라고 이름 붙여 팀원들에게 갔다. A고는 등장인물조차 정리가 안 된, 침 냄새가 나는 갓난아기 같았고, B고는 더 이상 돌볼 게 없는 장성한 자식 같았다. 촬영까지 딱 한 달 남은 시점이었다. 웃기게도 나는 흔들렸다. AB고 대첩은 정확히 반반으로 파가 갈릴 정도로 팽팽했다. 프리 프로덕션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라, 어느 시점에는 다 큰 자식을 독립시켜 안락하게 노후 준비나 하고 싶은 유혹을 버리지 못했다. 나는 선택을 유보하고, 불확실성의 무게를 가늠하고자 발버둥 쳤다. 팀원들은 굳건히 내 선택을 기다려주었다. 안전한 길을 두고 도박을 하고 싶다는 연출자에게, ‘네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후회 없이 하라며 독려하고,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내어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A고를 택했다. 나는 할머니 영순의 마음이, 그녀의 세계가 궁금해 <첫여름>을 썼다. 태초부터 주인공은 정해져있었다. 우리 영화의 쟁점은 ‘노인’이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영순은 극중 70대였다. 70대 배우를 찾아야만 했다. 세월을 연기로 속일 수는 없었다. 게다가 노인 배우는 일할 수 있는 시간이 확연히 제한된다. 당연하다. 노인 배우는 배우이자 노인, 즉 사회적 약자이기도 하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현장에서, 시간을 한정하고 노인 배우가 안전히 연기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로케이션도, 이동도 적지 않았다. 나아가, 노년기 삶을 가깝고 정직하게 담아내야 했다. 사려 깊고 섬세한 동료들, 그리고 영리한 준비와 현장이 필요했다. 영화를 만들어본 경험이 많지 않지만, 연출자로서 영화를 만드는 일은 ‘하나의 작은 세계를 구축하는 일’과 같았다. 상상도 못할 만큼 커다란 품과 열정을 필요로 한다. 현장은 재난과 축제가 동시에 일어나는 무시무시한 곳이기도 하다. 연출자는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민하게 타인을 관찰해야 한다. 나의 한계를 채워줄 귀인을 알아보아야 하고, 계속해서 도움과 소통을 청해야 한다. 나같이 느리고 서툰 연출자에게 <첫여름> 팀은 든든한 버팀목이자 행운이었다. 확신이 없어도 현장에 가고 보는 대책 없는 나의 버릇은 그대로였다. 안 그래도 난도가 있는 프로덕션이었다. 맨땅이 얼마나 단단한지 두들기지도 않고 무식하게 머리만 박았다. 나는 끝까지 엔딩을 정하지 못한 채 촬영을 진행했었다. 나도, 팀원들도 만족할 만한 엔딩을 쓰지 못했다. 이상했다. 첫 장면은 머릿속에서 재현될 만큼 확연했는데, 영순을 어떻게 보내줘야 할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첫여름> 촬영 현장 더불어, 나는 콘티에 약한 연출이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뚜렷하지만, 이를 장면화하는 일에 대한 기술이 부족하다. 카메라나 사운드에 대한 이해도 다른 동기들보다 없었다. 그런데도 지독하게 욕심을 부린다. 나와 김시진 촬영감독은 우리 둘 모두 만족하지 못한다면, 절대 콘티를 그리지 않았다. <첫여름>에서는 사찰에서 영순이 춤추는 씬이 공백이었다. 콘티는 있기야 했지만 사실상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내가 연출자로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일 촬영 계획표가 변동되며, 휠체어 씬과 사찰 씬을 다 소화해야 하는 날. 결국 휠체어 씬의 반 이상을 찍지 못한 채 사찰로 이동하면서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사찰 입구로 진입하고 있었다. 사찰에서의 춤 씬을 설계하고 설득할 유일한 기회는 허무하게 끝났다. 녹음의 그림자를 멍하니 바라보며 무책임한 나를 증오했다. 스태프들이 밥도 먹지 못한 채 분주하게 몸을 움직였다. 고요하고 우아한 자연 속에 고장 난 내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해가 지면 사찰에 다시는 못 온다. 한복을 입고 휠체어를 직접 다 끌며 열연하셨던 허진 선생님은 지칠 대로 지쳐 계셨다. 나는 춤을 포기할까, 순간 망설였다. 그런 나 스스로가 오싹했다. 사찰에서 영순이 춤을 추는 모습 하나를 보기 위해 달려가던 이야기였다. 어떻게든 찍어내야 했다. 허진 선생님 또한 즉흥적으로 춤을 추는 감정에 대해 다른 해석들을 주셨다. 어느 지점에는 춤을 추는 감정이 당신에게 다가오지 않아 어려워하셨다. 배우도, 콘티도, 시간도 모두 내게 허락되지 않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이를 악물고 찍었다. 이 씬을 찍지 않으면 이 영화는 모든 의미를 잃는다. 이 작품 하나를 위해 모인 수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은 버티고, 설득하고, 성실히 시간을 붙잡는 일뿐이었다. 스스로 분노가 치밀었다. 가장 중요한 씬을 왜 이런 식으로 방치했을까. 허탈했다. 그런데, 테이크를 갈수록 내가 그렸던 할머니의 얼굴이 허진 선생님 위로 살며시 드리워졌다. 선생님의 몸짓을 보고 마음에 미약한 움직임이 일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할머니의 49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 무언가가 만들어지고 있구나. 사찰 씬이 나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망가지고 있었음에도, 알 수 있었다. 그제서야 알싸한 가을 냄새가 코에 맴돌았다. 내가 만약 확신을 가지고 배우와 스태프들을 설득했었다면 그날 사찰 씬 촬영은 달라졌을 수 있겠다. 그 장면을 편집할 때마다 나는 현장의 나로 돌아갔다. 모두를 불안하게 하는 나를 묵묵히 지켜보다 겨우 기억에서 빠져나왔다. 뭐가 됐든 나는 동료와 배우를 설득해내지 못한 연출자였다. 자책에서 벗어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확신과 솔직함의 줄다리기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 연출자로서 얼마나 중요한지 배울 수 있었다. 사찰 앞, 춤을 추는 영순 허진 선생님과의 작업은 연애와 같았다. 나는 프리 기간 거의 매주 부산-서울을 통근하며 그녀의 집 앞까지 찾아갔다. 당일치기로 다녀온 적도 많았다. 그녀와 처음 대본 리딩을 하고 팀원들에게 긴 글을 썼다. 확신을 잘 갖지 못하는 내게 확신을 준 배우였다. 나는 분명 허진 선생님에서 우리 할머니를 보았다. 허진 선생님은 톡- 쏘는 청귤 같았다. 작고 푸른데, 시면서도 달고, 균일하지 못하고 예측할 수 없으면서도, 이해 가능하고 사랑스러웠다. 새침하고 외로운 여자지만, 사랑받고 싶어 하셨고, 사랑하고 싶어 하셨다. 그녀는 그 시절을 버텨낸 여성들이 문신처럼 가진 흉터를 가졌다. 그게 우리 할머니를 닮아 괜스레 마음이 저렸다. 영순은 더 이상 우리 할머니가 아니었고, 나는 그 굴레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그럼에도 허진 선생님과 우리 할머니가 닮은 것을 거부하지 않도록 했다. 나의 전략은 허진 선생님이 그녀 자신으로 연기해도, 영순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 즉, 허진과 영순의 경계를 허무는 일이었다. 선생님을 끈질기게 관찰하고, 그녀가 살아온 삶을 깊숙이 이해하는 일이 초짜 감독인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우리는 그렇게 웃고 떠들고 싸우고 지치고 애정하며 관계를 쌓았다. <첫여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많았다. 노인을 20대 여성이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오판은 아니었다. 나는 나와 전혀 다른 생애주기를 살아낸 한 여자가 되어 말을 하고, 감정을 서술해야 했다. 내 시나리오의 빈칸들은 내가 진정으로 영순의 신체와 일상을 이해할 수 없음에서 비롯됐다. 별 수를 다 써봐도 영순이 어떻게 섹스를 하는지, 아침에는 어떤 컨디션인지, 긴 길을 걷는다는 의미가 그녀에게 무엇인지, 느껴지지 않았다. 영화는 보통 컷 사인과 동시에 현실로 돌아간다. 배우는 연기를 멈추고, 다시 자신이 된다. 그러나 허진 선생님은 달랐다. 나는 5회차 촬영 내내 영순이 된 허진을, 허진이 된 영순을 봤다. 빈칸들은 허진 선생님으로 인해 메꿔졌다. 허진 선생님 손등에 난 검버섯 하나와 주름 한 겹이 꾸며낸 대사 몇 줄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선배는 선배라는 이름을 가진 이유가 있었고, 나는 신이 나 그 세월을 훔쳤다. 허진 선생님의 몸짓과 숨소리는 내가 연출해낸 것이 아니다. <첫여름> 촬영 중 허진 배우와 허가영 감독 영화 속 영순의 대사, “그놈이 만져주면 동하더라.”는 원래 “그놈이 만져주면 젖어.”였다. 카바레에서 영순과 덕희( 김미향 )는 요실금으로 인해 기저귀를 주고받았었다. <첫여름>을 쓰면서 절대로 지우고 싶지 않았던 장면과 대사였다. 그러나, 허진 선생님과 리딩을 한 첫날, 선생님은 바로 이 대사와 장면을 빼자고 제안하셨다. 노인에 대한 해석이 너무 가볍게 보일 수 있다는 이유였다. 우리는 기싸움을 했고, 나는 벼랑에 매달려 애원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국 허진 선생님의 말을 따랐다. 그만큼 허진 선생님 또한 다른 부분들을 내게 선뜻 양보해 주셨다. 아직까지도 그것이 나의 타협일 수도 있었겠다는 자책이 맴돈다. 그러나, <첫여름>은 배우에게 기대 살을 붙이는 영화였다. 치열하게 설득한 후, 기꺼이 배우를 믿었기에 완성할 수 있었던 영화였다. 젊은 내가 노년 여성의 삶을 다루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세계였기에, 말투 하나, 몸의 반응 하나까지 막막했다. 그래서 나는 많은 노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실제로 카바레를 무작정 찾아가 춤을 즐기는 분들과 가까워져 그분들을 영화의 단역으로 모시기도 했다. 카바레에서 동료들과 맥주를 까마시고 그 공간이 가진 온도와 냄새를 살갗으로 느꼈던 순간들, 그곳에서 맴도는 언어와 소문들을 훔치고, 노인들과 함께 춤췄던 순간들을 <첫여름>을 만들어가며 가장 사랑했다. 노인은 욕망하는 주체이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노년 여성의 욕망을 지우고, 외면하고, 혐오한다. 소위 춤바람, 노망이라고 일컬어지는 노인들의 움직임은 분명한 역동을 가진다. 속절없이 늙어버린 신체와 삶 안에서도 그들은 끝없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이를 통해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렇게 그들은 살아간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여자일 수 있고, 남자일 수 있고, 결국 ‘인간’일 수 있다는 그 사실에 기대어 존재를 긍정한다. 나는 할머니와의 대화에서, 카바레에서 만난 노인들의 흘린 땀에서, 그 몸부림과 사랑에서 노인들이 만들어간 문화와 생존을 보았다. 특히, 영화 속 여성의 욕망은 종종 극단적으로 다뤄진다. 억눌리거나, 폭발하거나. 하지만 그사이에는 다양한 결이 있다. 나의 외할머니 역시 사랑을 하고, 춤을 췄지만, 동시에 고된 시집살이를 견뎠다. 그 복잡하고 다층적인 면모에서 ‘영순’이라는 인물이 탄생했다. <첫여름> 편집 기간은 쉽지 않았다. 나는 원체 편집을 못한다. 속옷가게 씬 편집할 때는 손도 못 대고 벙쪄 있던 기억이 있다. <첫여름>을 사랑했기에, 현장이 눈앞에서 재생되고 후회가 몰려왔다. 지금의 <첫여름>은 처음 그렸던 <첫여름>과 닮고도 많이 달랐다. 이 영화는 더 지저분하고 사람 냄새가 그윽한 영화이길 바랐는데, 내가 더 갔어야 했는데, 밀어붙여야 했는데. 그 실망이 나를 주저앉혔다. 그러나 <첫여름>이 담아낸 영순의 얼굴은 그런 나를 일으켜 세웠다. 이 이야기는 로맨스 영화가 아니라 한 여성의 주체성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 노인들이 삶의 마지막 궤적에서 춤을 추고, 사랑하고, 관계를 맺어가는 그 움직임은 아름답고도 인간적이라는 것. 이는 우리가 이야기로서 마주할만한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 사랑, 섹스 그리고 삶은 누군가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 나와 이 작품을 함께 만들어간 배우들과 동료들이 굳건하고 세밀하게 만들어낸 토대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이 이야기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그리고 이 작품이 가진 생명을 다시 직시하고 믿으며 <첫여름>을 만들었다. 칸영화제에서 내 영화가 아주 먼 곳에서 온 관객들을 만나고, 선명히 상영되고, 수상했던 기억을 가끔 꺼내어본다. <첫여름>이 영화가 되고, 사랑을 받으며 칸국제영화제에 초청이 되면서 내 삶은 질주하듯 전복됐다. 그 변화가 생생한데도 불구하고, 그날의 감정은 거대하고 짙어 지금도 소화하는 과정에 있는 듯만 하다. 시상식 때 1등으로 내 이름이 호명되었던 순간은 특히 그렇다. 수상 발표가 나자마자 동료들 모두가 놀라서 울기 시작했고, 나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로 수상 소감을 발표하러 무대에 올랐다. 심사위원 중에 내가 깊이 존경하는 마렌 아데(Maren Ade) 감독이 있어 벅차고 떨렸다. 영어로 더듬더듬 소감을 말한 뒤 동료들 곁으로 도망치듯 돌아갔다. 칸국제영화제 라 시네프 섹션 수상 현장 그저 신기했다. 칸영화제는 영화인들에게 꿈의 무대인 만큼 눈이 부셨다. 쿠엔틴 타란티노랑 같은 공간에서 영화를 보고, 거리를 지나다니는 엠마 스톤을 봤다. 한편으론 영화제가 지나치게 화려해 상처받은 순간도 있었다. 종종 영화제가 너무나도 눈이 부셔 내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았다. 낮은 곳의 이야기에 주목하며 박수를 보내면서도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이 모든 문화적 자본을 누리고 소비하는 자리라는 점에서 모순을 느꼈다. 영화학교 학생들이 모이는 라 시네프 섹션에서 전 세계 각지에서 영화를 만드는 또래 감독들을 만났다. 우리는 서로가 만든 영화를 비교하고, 만져보고, 느끼며 신났다. 그들과 소통하며 동시대의 영화인들이 가지는 시선을 봤고 큰 자극을 얻었다. 무엇보다 기쁜 건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무수한 얼굴의 관객을 만나는 일이었다. 상영 전 발표를 해야 해서 앞줄에 앉아 영화를 관람했는데, 관객들이 영순의 표정과 마음을 따라가며 신나게 웃고 격하게 울어주었다. 나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가닿아 감정을 일으키고, 우리가 공동체가 되어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그 귀한 감각을 만끽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관객의 얼굴을 지켜보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상영이 끝나자 관객들이 다가와 소감을 말해주었다. <첫여름>은 그 많은 관객들 하나하나를 만나 그보다도 더 거대한 이야기로 뻗어나가고, 새로운 생명을 얻어나갔다. 이 날 것의 반응들과 감정들을 지켜볼 수 있어, 나는 참으로 복 받은 연출자였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노인 관객들이 ‘삶의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라며 고마움을 전했을 때는, 내가 왜 창작자로서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되새길 수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나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사회와 연결되고, 인간과 대화하고 싶어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다. 영화는 솔직하고 아름다운 예술이다. 내가 그곳에서 사랑했던 진실을 잊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쓰고 영화를 만들고 싶다. <첫여름>과 함께 내가 자라날 수 있었다. 연출자로서 이토록 가득해 넘쳐흐르던 첫여름이었다. 허가영(영화감독) l 솔직한 영화를 만들고, 필요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 < 너를 심을 땅 >(2025), <첫여름>(2025) 연출·각본. * 촬영 현장 및 일부 스틸: 필자 본인 제공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토끼가 부러워. 고민이 없거든. 자기라는 것이 없고 그저 토끼라는 것밖에 몰라.” - < 바보사냥 >(김기영, 1984) 중 토끼를 부러워하는 세 남녀가 토끼섬을 찾아 떠나고 있다. 이게 웬 깜찍한 발상인가 싶은데 실상은 꽤 심오하다. 세 주인공 중 두 남자 강식( 배규빈 )과 홍익( 김병학 )은 정신병동에서 이제 막 탈출한 사람들이고, 한 여자 석호( 엄심정 ) 역시 만만찮게 특이하여 통상적 대화가 잘 안 통하는 인간이다. 여하튼 세 사람이 왜 토끼섬을 찾느냐 하면 그곳이 이들의 이상적인 대안 세계인 탓이다. 강식은 공해 공포증으로 인해 인간의 손이 닿은 모든 음식을 거부하고 완연한 원시의 자연 사회를 원한다. 그 방법이라 하니 무인도에 벌과 토끼만 풀어 놓고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생태계를 자생시킨단 것이다. 사회에 살면서 자살 강박에 시달리던 홍익은 강식을 따라 토끼섬을 쫓고, 탄광 마을에서 아버지를 잃은 석호도 둘을 따라나선다. 이 괴기한 여정과 인물들의 특이함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영화평론가란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영화기자로서 영화평론가란 분들을 자주 만난다. 아마 대한민국의 모든 직업 중에 영화평론가들과 가장 자주 이야기하고 만나는 직무이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그래서 ‘비평, 안녕하십니까’에 연재를 청탁받았나 싶기도 하다. 청탁을 덥석 물어버리고 “영화비평가의 일상과 생각을 공유”하고 싶다는 ‘비평, 안녕하십니까’의 기획 의도를 들은 뒤엔 꽤 놀라버렸다. 지난해 12월 무렵인가에 영화평론가들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기획해 본 적 있는 탓이다. 평소 자주 만나는 영화평론가께 이 다큐멘터리의 시놉시스를 얘기하자마자 “그런 걸 왜 만들어요···”라며 아주 작은 반발을 듣긴 했으나 지금도 그 꿈엔 변함이 없다. 그들의 일상이 개인적으로 너무 궁금하다거나 그들에게 기막힌 사연이 있어 보여서는 아니다. 자고로 영화는 재밌어야 하는데 그들의 일상을 찍는다면 분명히 재밌는 무언가가 나올 것 같단 확신이 있었을 뿐이다. 영화평론가들이라 하여 모두가 항시 재밌는 사람이라는 등 완전한 공통점을 갖고 있진 않다. 모든 편의점 점주님이 똑같은 사람은 아니듯 모든 영화평론가를 하나로 묶기는 다소 어렵다. 굳이 공통점을 도출해 보자면 대개 자차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는 정도일까. 그들이 <바보사냥>의 강식처럼 극심한 공해 공포증에 시달려서는 아닐 것이고, ‘비평, 안녕하십니까’에서 박예지 , 이광호 평론가가 먼저 밝혔듯 다소간의 현실적인 생활상에 결부한 문제일 순 있겠다. 또 굳이 찾아보자면 수상할 정도로 카톡 답장이 느리고 전화를 안 받는단 정도일까. 특히 원고 마감에 관한 연락이라면 더욱더···. 또 영화평론가들은 각자의 의견이나 취향에 꽤 강고한 편이다. 겉으론 조용조용, 다소 유순해 보이며 실제로 아주 친절하신 평론가조차도 맘속의 칼을 갈아 글 쓸 때가 많다. 놀랄 때가 잦다. 이 강고함에서 평론가 개인 간의 지극한 차이가 나타나고, 이것이 바로 진정 재밌는 지점이다. 이를테면 치킨집에서 간단한 술자리를 가졌다고 칠 때 평론가 A는 절대 닭고기를 먹지 않는다며 양배추샐러드만 우걱우걱 먹고 평론가 B는 무조건 바삭한 게 좋다며 치킨의 껍질만 뜯어 먹는다. 당황한 영화기자 한 명은 결국 닭의 맨살만 먹게 된다. 눈치를 보던 B가 “기자님 이거 맛있으니까 드셔보세요”라며 치킨 껍질을 주섬주섬 건네준다. 그래서 잘 받아먹고 맛있다고 대답하면 막상 상대가 실망해 버리는, 그런 신묘한 일을 종종 겪어본 적이 있다. “그런 걸 왜 만들어요···”라니.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나. 물론 실화를 바탕으로 퍽 과장한 우화이지만 이 우의의 골자야말로 영화평론가란 업의 중요 조건을 설명하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왼쪽부터 강식(배규빈), 석호(엄심정), 홍익(김병학) 1970~80년대를 거쳐온 유명 시네필 한 분(평론가 C)의 주위로 젊은 영화평론가 몇몇이 모인 자리에 있던 적이 있다. C 선생님은 영화평론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강고한 ‘베팅’임을 역설하셨다. 특정 영화에 대한 지지와 비판을 확고히 해야만 한다는 의미다. 자신이 틀렸다면 판돈을 모두 잃을 결사의 각오로 임해야 한다. 한번 닭고기를 안 먹기로 했다면 아무리 입에 집어넣어도 안 먹어야 한다. 살면서 처음 듣는 의견이 아닌 데다가, 독립 영화잡지를 출판했을 때 영화 저널리즘의 본질은 비판과 발굴 두 개뿐이라고 말하고 다닌 전적도 있기에 아주 신선한 논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평소 존경하던 선생님의 말씀으로 들었을 땐 감상이 남달랐다. 원래 알고도 안 하는 것이 가장 나쁜 법이다. 혼자 반성하던 때와 직접 혼났을 때의 차이가 극명했고, 이 ‘베팅론’의 현재적 가능성을 속으로 남몰래 타진해 보기도 했다. 이 가능성의 타진이 혼자만의 고민은 아닌 듯싶다. 송경원 씨네21 편집장은 팟캐스트 ‘ 조용한 생활 ’을 통해 말했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것의 완성도에 주목하는 시네마의 시대는 지났고,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 사이의 해석 과정이 가장 중요”해졌단 것이다. 강덕구 평론가를 필두로 모인 팟캐스트 ‘ 회랑 ’에서도 엇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제는 어떤 영화나 예술을 대하는 원본성의 경험이 자기 자신에게만 남아있다. 내가 느낀 경험만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이고 이러한 배경에서 모든 비평가의 글은 점차 에세이로 변할 것”이란 맥락이다. 요컨대 이광호 평론가의 말처럼 “취향은 이제 가능성의 벡터를 상실”했다. 타인에게 자신의 영화적 취향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이 취향을 글과 이론으로 견고하게 정제해 특정 영화를 정전으로 수출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워진 시대다. 그러나 위와 같은 한계를 거꾸로 매달아 바라볼 수도 있겠다. 영화평론가들의 자아란 C 선생님의 말씀처럼 여전히, 심지어 더욱더 비대해질 필요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객관적으로 남을 설득하기가 아주 무용한 상황일 때, 본인의 생각과 세상의 여론이 서로를 너그러이 흡수할 수 없을 때야말로, 모호한 타협을 요구하기보단 외려 세상을 매질하는 비평적 태도를 견지해야 할 수도 있겠단 뜻이다. 누군가를 크게 해치는 일만 아니라면야 지나치게 그리고 그럴듯하게 자기 말만 하는 강식과 홍익과 석호들의 비평적 에세이가 읽고 싶달까. 천국과 지옥이 한꺼번에 있는 곳 이쯤에서 <바보사냥>의 두 남자를 재론할 수 있을 법한데, 두 남자의 기행이 전술한 비평적 태도와 매우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강식과 홍익은 토끼섬에 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돈벌이에 매진한다. 한 번은 포장마차를 열었는데 식자재 거래처가 병아리를 참새라고 속이며 납품한 일을 알게 된다. 거래처 사장이 “요즘 시대에 어떻게 참새를 잡냐?”라며 다들 이렇게 장사한다고 넌지시 설득하지만, 삐약거리는 병아리의 목을 차마 비틀 수 없던 둘은 “병아리를 죽일 바엔 병원에 다시 들어가자!”라며 포장마차를 부수고 만다. 이 상황이 머릿속에서 변주돼 반가운 모습으로 재생된다. 요즘은 이런 게 영화라며 속삭이는 남들의 목소리가 들려 왔을 때, 버럭 화내며 극장에나 다시 들어가자고 외치는 불통 영화평론가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이다. 두 남자의 돈벌이는 더 비극적인 상황을 마주하기도 한다. 소에게 억지로 물을 가득 먹인 뒤 한껏 매질하여 소의 살이 불게 만들어야 한다. 도축할 때 고깃값을 더 받기 위해서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둘의 질문에 작업 현장의 선배가 “이게 기술이고 예술이야!”라며 일갈하고, 소의 눈망울을 보며 부모님을 떠올린 홍익은 ‘어머니 죄송합니다. 당장 저녁 먹을 돈이 없어 두들깁니다.’라며 속으로 한탄한다. 어디에선가 본 상황 같다. 영화란 늘 기술과 예술의 경계에서 몸체를 불려야 하는 매체이며 필연적으로 양쪽의 미움을 살 수밖에 없다. 그 간극 속의 영화평론가들은 저녁 먹을 돈을 위해서 타자를 흠씬 두들겨 성미에 맞지 않는 글을 써야 할 상황에 들어서기도 한다. 그러면서 고해하듯이 뇌까리지 않을까. ‘시네마여 죄송합니다. 전 오늘 몇만 원의 고료를 위해 싫어하는 영화를 무난하다고 썼습니다···’ 포장마차를 부수고 매질해야 하는 송아지를 바라보다가, 탄광에 다다른 강식과 홍익 강식과 홍익은 병아리의 경우와 비슷하게 결국 소의 매질을 그만둔다. 대신 소를 때리라고 시킨 사람들을 흠씬 두들겨 팬 뒤에 탄광 마을에 가서 광부 일을 시작한다. 그들이 들어간 어두운 무저갱은 흡사 극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탄광 마을의 한 아저씨가 이곳을 “천국과 지옥이 한꺼번에 있는 신비”의 공간이라 말하는데 이 선언이 신묘할 정도로 극장의 비유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비단 물리적 극장이 아닐지라도 영화광 각자가 뿌리내린 영화의 공간, 그곳이 독립예술영화관이든 골방의 컴퓨터 앞이든 멀티플렉스든 시네마테크든 비밀스러운 그들만의 온라인 커뮤니티이든 간에 그 어둠의 장소는 영화평론가들에겐 천국이자 지옥이 되기 마련이다. 이곳은 자신의 영화적 취향을 만끽하며 그것을 글로 재생산할 수 있는 유토피아이자, 자신이 좋아하는 바를 끊임없이 세상에 설명하며 끊임없이 거부당해야 하는 디스토피아이기도 한 것이다. “토끼가 부러워. 고민이 없거든. 자기라는 것이 없고 그저 토끼라는 것밖에 몰라”라는 석호의 귀여운 싫증엔 다음과 같은 홍익의 맞장구가 이어졌다. “그에 반해 사람은 자기의식이 있고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아니까 한없이 불행하군.” 그렇다. 영화를 향한 자기의식이 너무도 뚜렷하여 되려 불행을 마주하는 족속, 다시 비유하자면 억지로라도 닭의 살이 아니라 껍질만을 원해야 하는 사람들, 하여 자유로운 토끼를 은근히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이 속성이 바로 영화평론가들의 주요 조건이자 가장 뚜렷한 공통점일 듯하다. 이 모순 속의 긴장에서 번지는 찌릿함을 다들 끊기 어려워한단 것 역시 비슷할 테다. <바보사냥>의 결말, 잦은 고초에도 홍익은 결국 토끼섬을 찾아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선다. 이 항해는 과연 타의 없이 자아와 자생만이 존재하는 곳을 향해 간 구원의 발로일까, 혹은 그저 타의에 떠밀려 도망치는 자의 흔들흔들 피난길일까. 둘 중 무엇이 됐든 우리도 결국은 섬으로 가야 하는 것일까. 토끼가 부럽다. 이우빈(영화기자) l 친구가 없어서 영화 보러 다닌 1997년생. 《 씨네21 》 기자. 2023년 《 쿨투라 》 영화평론 신인상. 독립 영화잡지 《 섭씨 233 》 편집장. 비평 웹진 《 코아르 》 필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