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보
- 감독
- 김하영
- 제작년도
- 2022
- 출연
- 홍지인, 이담희, 정주연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사진 클릭 시 유튜브 인터뷰 영상으로 이동) 1895년에 개관한 극장 1895년에 개관한 애관극장은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극장이자 130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한국 근대 문화예술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조선 말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영화·공연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장소란 점에서 애관극장의 연혁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1895년, 인천의 사업가인 정치국이 애관극장의 전사인 협률사를 설립했다. 협률사는 서울 정동에 지어진 동명의 공연장인 협률사보다 7년, 종로의 영화관인 단성사보다 12년 앞선 시기에 세워진 극장이다. 정치국은 현재의 애관극장 터에 벽돌 건물을 쌓아 올렸고 협률사를 <박첨지> <흥부놀부전>과 같은 인형극부터 창극, 신파연극, 남사당패 등의 공연을 올리는 공연장이자 영화관으로서 활용했다. 이곳을 중심 무대로 활동했던 배우 서일성은 한국은 물론 일본, 중국에서까지 명성이 자자했으며 그를 중심으로 구성된 ‘7면 구락부’는 우리나라 연극사에 한 획을 그은 극작가 진우촌과 함세덕 그리고 연출가 정암을 배출했다. 애관극장 역사를 전시하고 있는 통로 1911년, 협률사는 개항장 인천의 이미지에 맞춰 잠시 축항사로 이름을 바꿨다가 1921년경에 애관으로 개명했다. 이때부터 애관은 연극과 영화의 상설관으로 탈바꿈했다. 그로 인해 한동안 애관극장 부근의 경동거리는 ‘시네마 천국’과 다름없었다. 1927년 애관극장은 관객 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르네상스식 건축물로 증축됐으며 이 건물에서 1930년, 인천 최초로 발성영화인 <야구시대>가 상영되었다. 1935년에는 애관극장의 한 해 입장객이 총 15만 명을 돌파하는 기록을 남겼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고 인천상륙작전 때 함포사격으로 인해 인천의 경동 일대가 폐허가 됐다. 경동에 위치한 애관극장 또한 피해를 입었다. 사람들은 극장이 무너진 자리에 임시 건물을 올려 영화를 계속 상영했고, 1960년 새롭게 지어진 건물이 지금의 애관극장이다. 1972년에는 현 애관극장 대표인 탁경란 씨의 부친 탁상덕 전 대표가 애관극장을 인수했다. 1989년에는 인천 최초로, 그리고 전국에서 네 번째로 70mm 상영관이 개관했다. 이는 현재 애관극장의 1관이다. 1관은 영화 상영관인 동시에 나훈아, 하춘화 등 유명한 가수들이 돌아가며 공연을 펼친 무대였다. 당시 애관극장에 걸린 공연과 영화를 보고 박정자, 한명숙, 최불암, 전무송 등의 가수와 배우들이 꿈을 키웠다. 2000년에는 현 애관극장 대표인 탁경란 씨가 극장을 인수했다. 탁경란 대표는 멀티플렉스 극장에 대항할 목적으로 2004년 5개관으로 증축했다. 접근성이 좋은 극장 동인천역에서 신포역 방향으로 15분 정도 걸어 내려간 뒤 개항로로 좌회전해 올라가면 좌측에 파란색과 노란색의 구조물이 번갈아 놓인 애관극장이 나타난다. 애관극장의 본관 입구로 들어서면 1관과 휴게실, 작은 매점 등이 차례로 눈에 들어온다. 애관극장은 본관과 신관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본관에는 1관, 신관에는 2~5관이 위치한다. 특히 1관은 공연장처럼 1, 2층으로 나뉘어 있으며 스크린 아래에 큰 무대까지 마련되어 있는데 한때 공연장으로도 활용됐던 애관극장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본관과 신관은 긴 복도를 통해 이어져 있다. 해당 복도에는 애관극장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연표, 신문 기사, 포스터, 사진 등의 자료가 걸려있다. 한때 오락기가 놓여있던 신관의 휴게 공간도 현재는 오락기를 빼고 그 자리에 극장 관련 자료를 걸어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1,2층으로 구성된 애관 1관 내부 1895년 인천 중구 개항로에 신설된 애관극장은 계속 같은 곳에 터를 잡고 있다. 극장 근처엔 인일여자고등학교, 제물포고등학교, 송도중학교,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등 총 6개의 학교가 있으며 극장의 오른편에 인천중구청, 차이나타운, 동인천역부터 답동사거리까지 길게 뻗은 동인천 지하상가가 위치한다. 애관극장은 접근성이 좋은 극장이다. 동인천역과 인천역, 신포역에 둘러싸인 모양새인데 1호선 동인천역과 분당선 신포역에선 극장까지 도보로 10분, 1호선 동인천역에선 버스로 10분밖에 소요되지 않는다. 또한 840m 떨어진 곳에 인천항이 있어 애관극장 옥상에 오르면 바다를 볼 수 있다. 항구 근처에 자리한 경동은 오래전부터 인천의 문화적 중심지였다. 교통의 요지이자 답동성당, 능인사 등의 종교 시설도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유동 인구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인형극장, 동인천극장, 동방극장, 키네마 등 한때 동인천 일대에 19개의 독립예술극장이 자리했던 것은 그런 연유에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전부 문을 닫고 애관극장과 미림극장만이 남아있는 상태다. 미림극장은 애관극장에서 약 70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한국영화사의 과거와 현재가 오롯이 기록된 공간으로서, 애관극장은 128년째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보존을 위한 움직임 2017년, 애관극장에 관한 다큐멘터리 <보는 것을 사랑한다>(2021)를 촬영할 당시 윤기형 감독이 탁경란 대표를 인터뷰하면서 극장의 매각 소식을 전해 들었고, 유동현 굿모닝인천 전 편집장이 관련 칼럼을 게재하면서 애관극장의 경영난 소식이 처음 알려졌다. 인천 시민들과 인천시의 움직임으로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코로나 팬데믹을 맞이하면서 2021년 애관극장의 매각 가능성이 다시금 거론됐다. 극장을 지키기 위한 일환으로 지난 2022년 4월 18일, 탁경란 애관극장 대표, 박남춘 전 인천광역시장, 이원석 인천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 애사모(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시민모임) 이희환 대표가 모여 ‘애관극장 보존 및 활용을 위한 상호 협약’을 맺었다. 하나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후 인천광역시장이 바뀌었고 애관극장의 향후 향방에 관해선 현재 명확히 정해진 바가 없다. "We ♥ 애관"이 적힌 현수막. 현수막에는 애관의 공공매입과 공공적 활용을 후원하는 개인 및 단체의 이름이 적혀있다 공간 및 운영개요 1. 위치: 인천 중구 개항로 63-2 2. 설립일: 1895년 3. 대표자: 탁경란 4. 규모: 264.4m² (스크린 크기 1관 16.4*7m, 2관 7.5*3.2m, 3관 8.5*3.5m, 4관 6.7*3.8m, 5관 6.3*3.3m) 5. 극장 구성: 총 5개관 (좌석수 1관 403석, 2관 114석, 3관 112석, 4관 98석, 5관 81석) 6. 운영시간: 평일 10:00~23:00 금토 9:00~23:00 (금, 토 심야 상영 있을 경우 9:00~2:00) 7. 입장료: 조조, 경로 5,000원, 학생 7,000원, 일반 8,000원 8. 공간 구성: 상영관 5관, 매점 1개, 휴게실 3개 (1관 휴게실 50석, 2~3관 휴게실 26석) 인터뷰: 윤기형 감독(<보는 것을 사랑한다> 연출) 윤기형 감독 조현나 _자기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윤기형 _안녕하세요. 저는 윤기형 감독입니다. 인천에서 태어났고요. 얼마 전에 <보는 것을 사랑한다>(2021)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습니다. 조현나 _<보는 것을 사랑한다>는 어떻게 만들게 되셨나요? 윤기형 _애관극장이 1895년에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극장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더라고요. 최초의 극장인데 왜 이렇게 사람들이 잘 모를까. 그래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고 결심했고 5년 정도 극장에 관해 공부하고 관련 자료들을 준비하며 만들었습니다. 조현나 _애관극장에 관한 자료 중 기억에 남는 것들이 있으신가요? 윤기형 _개항장에서 서울로 가는 길이 지금의 극장 바로 위였어요. 다른 길이 없었고 서울로 가려면 무조건 이 도로로 가야 했기 때문에 그 길목에 극장이 설립됐어요. 당시 개항장 쪽은 일본인 마을, 지금 차이나타운이 위치한 곳엔 중국인 마을, 여기는 조선인 마을이 있어서 이곳에 조선인이 극장을 세운 거였죠. 1928년 <별건곤>이라는 대중잡지에 이 외리에 관한 묘사가 재미있게 돼 있는데요. “쨍쨍거리는 불당소리, 땡땡거리는 성당 소리와 기생의 장구 소리, 그리고 극장에서 관객들을 모으는 악대의 소리가 어우러진 곳이 이쪽 외리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옆에 능인사라고 절이 있거든요. 또 옆에 답동성당이 있고요. 그리고 인천 중구 용동 일대엔 기생집들이 많았습니다. 여기에 또 극장이 있었고. 극장에서는 관객들을 모으려고 밥을 팔고 했거든요. 불당과 성당과 기생집과 극장이 한 거리에 어우러져 당시의 모습이 굉장히 재밌게 묘사가 됐던 거죠. 조현나 _애관극장은 인천 신포역과 동인천역 사이에 있고 근처에 학교나 상가도 많습니다. 인천의 번화가에 자리한다는 점으로 인해 생긴 특성도 있을까요? 윤기형 _동인천역, 신포동, 경동 이쪽이 인천의 명동이었죠. 현재는 옮겼지만 전엔 초등학교부터 중·고등학교 10여 개가 근처에 다 몰려 있었어요. 그러니까 늘 사람이 바글바글했죠. 인천에 70mm 상영관을 설립한 극장도 애관극장이 최초입니다. 서울에서 좌석제를 실시할 때 인천은 아직 좌석제를 실시하지 않았었거든요. 관객들이 하도 많아서 자리를 잡으려고 영화 끝나기 5분 전에 극장에 들어가고 그랬어요. 간신히 자리를 잡고 보면 이제 영화 결말을 두 번 보는 관객도 있었죠. 그 정도로 어마어마했어요. 서서 보는 관객들이 앉아서 보는 관객의 두 배는 됐으니까요. 애관극장 4, 5관 영사실과 조상열 영사기사 조현나 _애관극장의 실내 시설에 관해서도 취재를 진행하셨습니다. 어떤 점이 인상적이던가요? 윤기형 _지금의 극장은 1950년대에 실추된 뒤, 1960년에 새로 지어진 거거든요. 옛 극장의 흔적이 사라진 게 좀 아쉬워요. 여기 영사실에 옛날 35~70mm 겸용 영사기가 있어요. 영사 기사님께서 아직 잘 돌아간다고 한번 보여주셨거든요. 디지털 영사기 옆에 옛날 아날로그 영사기가 있으니까 그런 점도 되게 신기했죠. 애관극장 1관 영사실에 보존되어 있는 필름 영사기 조현나 _다큐멘터리를 위해 100여 명 정도를 인터뷰하셨죠. 애관극장에 관한 추억이 있거나 애관극장에서 영감을 받아 꿈을 키운 영화인들이 영화에 등장하는데요. 어떤 분들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셨는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윤기형 _박정자 선생님은 어릴 때 극장 근처에 사셨고, 당시 극장에서 공연을 보며 감동 받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리고 한명숙 선생님은 인천의 태양 악극단에서 활동하며 첫 데뷔 무대를 애관극장에서 올리셨죠. 전무송 선생님은 애관극장에서 간판 그리는 일을 하셨다고 하셔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조현나 _관객의 경우 주로 어떤 분들이 애관극장을 찾으시던가요. 윤기형 _젊은 사람들은 드물고 저같이 추억이 있거나 저보다 나이 드신 분들이 주로 오시죠. 제 아이가 여기에 왔을 때 극장에 대한 느낌을 들어보니 '매우 낡았다, 오고 싶지 않다, 여기서 영화를 보고 싶지 않다'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조현나 _인천 시민들에게 애관극장은 어떤 공간인가요? 윤기형 _제 나이 또래의 인천 시민들에게 애관극장은 당연히 한 번쯤은 와봤던 극장입니다. 안 와볼 수가 없는 극장입니다. 저 역시도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 연애 시절, 결혼 후에도 와서 엄청나게 많은 영화를 봤으니까요. 그러니까 인천 시민이라면 마음 속에 애관극장에 관한 추억이나 사연 하나씩은 무조건 있다고 보면 돼요. 조현나 _애관극장 말고 미림극장도 같이 취재를 하셨잖아요. 두 극장의 특성은 어떻게 다른가요? 윤기형 _애관극장은 최초의 극장이고 미림 극장은 1957년도 전쟁 이후에 생긴 극장입니다. 전쟁 후에 극장들이 동네마다 들어섰는데 그때 송현동에 들어선 게 평화극장이고, 1958년에 평화극장의 이름이 바뀌어서 미림극장이 됐습니다. 미림극장도 잠시 폐관했다가 '추억극장 미림'으로 재개관했으니까 그런 걸 따지고 보면 대단한 극장이죠. 애관극장 1관 로비 전경 조현나 _탁경란 대표 취재를 하면서 애관극장의 매각 소식을 접했고, 유동현 굿모닝인천 전 편집장이 관련 칼럼을 쓰면서 해당 내용이 대대적으로 알려졌죠. 이후로 극장을 돕기 위한 활동이 다양하게 이루어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윤기형 _코로나19를 겪으면서 극장 관객이 점점 줄어드니 경영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었죠. 애사모(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시민모임)가 결성이 돼서 많은 분들이 애관극장을 살리고자 했고 인천시에서도 협상에 나섰습니다. 현재로선 인천시가 극장을 매입해 기증하는 방법이 가장 최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현나 _그밖에 애관극장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엇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윤기형 _가장 좋은 건 관객들이 많이 찾아주는 거죠. 근데 젊은 사람들은 극장에서 영화를 잘 안 보려고 하고, 나이 드신 분들이 추억 삼아 오시니까 그런 것들이 안타까운 거죠. 조현나 _애관극장은 어떤 의미를 지닌 그장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요? 윤기형 _유일무이입니다. 다른 극장이랑 비교할 수가 없어요. 고일 선생님의 <인천석금>이라는 책 그리고 최성연 선생님의 <개항과 양관역정>이라는 책에서 '1894년~1895년 청일전쟁 때 정치국이 벽돌로 극장 협률사를 지었다'는 문구를 확인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애관극장의 기원을 알 수가 있습니다. 축항사, 애관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정말 놀라운 극장입니다. 조현나 _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윤기형 _아직 애관극장이 오랜 역사가 있는 최초의 극장인 걸 모르시는 분들도 많아요. 애관극장에 많이들 오셔서 좋아하는 영화도 보고 애관극장이 이런 역사를 갖고 있는 극장이구나 같이 알아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인터뷰: 이희환 교수(인천대학교, 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시민모임 대표) 이희환 교수 조현나 _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이희환 _저는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의 학술연구교수로 연구 활동하고 있는 이희환이라고 합니다. 조현나 _애관극장에 관해 오랜 시간 연구를 이어오셨는데요. 이를 토대로 애관극장의 변천사 그리고 역사에 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희환 _사실은 개항장이 제일 먼저 생긴 곳이 바로 인천이거든요. 또 조선인이 극장을 만든 것도 인천이 최초이고 그것이 바로 애관극장의 전신이었던 협률사라는 극장입니다. 협률사라는 극장은 청일전쟁 전후에 만들어졌다는 회고록이 남아있습니다. 1900년대 넘어가면서 여러 가지 운영상의 어려움을 겪다가 처음에 극장을 만들었던 정치국이라는 사람이 매각을 하면서 축항사로 이름이 바뀝니다. 거기서 이제 일본에서 유입돼 들어오는 신파 연극이 공연됐던 장소가 되는 거죠. 축항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신파 공연장으로 많이 활성화됐던 이 극장은 1910년대로 넘어가면서 일본의 무단 통치 속에서 많이 위축됩니다. 1920년대 새로운 인수자에 의해 지금의 애관이라는 이름이 극장명으로 사용되고, 애관극장이 조선 식민주의 시대에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문화시설로 자리를 잡습니다. 이때 영화의 전신인 활동사진도 상영하고 때로는 학생들의 학예회, 정치적인 집회도 열리고 공간을 변형해 권투 시합도 하고 무용 발표회도 하고, 복합 문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식민지 시대 내내 담당했던 극장인 셈이죠. 그래서 애관극장이야말로 살아있는 인천 근대 문화의 자부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식민지 시대에 인천의 문화, 조선인의 문화를 일구는데 중요한 근거지가 됐던 곳이 바로 애관극장입니다. 1945년부터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50년까지도 굉장히 많은 공연들이 여기서 펼쳐졌습니다. 전쟁 때 일부 피해를 받기도 했습니다마는, 1960년대 이후에는 극장도 새로 신축해서 더 확장되고 영화의 전성기를 거치면서 풍성한 시기를 거쳐 온 것 같습니다. 로비에 전시된 애관극장 연표 사진 조현나 _최초 애관극장이 경동의 현재 자리에 건물을 올리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희환 _애관극장 앞의 길이 인천 개항장에서 서울로 가는 육로였어요. 그리고 일본 조계와 조선인 조계의 경계가 바로 극장 앞의 도로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그런데 일본이 전관 조계지역에 극장을 만들었고 정치국이라는 사업가가 ‘극장이 흥행이 되겠구나’라는 사업적 발상에서 시작해 조선인 조계에다 극장을 만든 겁니다. 이 거리를 사리재라고 하는데, 사리재는 일제시대에도 조선인 상권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일본 상권과 연결되어 있는 조선의 상권 지역에 극장이 만들어진 것이 의미가 있고, 1899년에 경인선이 만들어지고 전철역과 그렇게 멀지 않은 지역에 극장이 위치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극장 바로 앞에 프랑스 성당도 있고 또 길 건너에는 미국의 감리 교회가 있고, 그러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장소에 극장이 만들어진 것이라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조현나 _애관극장이 한국 영화사, 한국 극장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하시나요? 이희환 _조선인이 만든 최초의 극장으로서 전통 연희 공연을 시작으로 근대 공연장, 근대 영화관으로 바뀌어 간 극장, 식민지 시대 우리 극장의 역사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극장이 애관극장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본인들이 1883년 인천을 개항시킨 다음에 인천을 교두보로 삼아서 경성으로 진출하려는 목적 하에 자기들의 극장 문화를 가져왔는데, 이것에 맞서서 조선인이 조선인 극장을 만들었다는 게 아주 실험적이면서도 획기적인 역사의 한 장면이 아닌가 합니다. 근대 문화를 만들어 나가려고 했던 그 움직임이 애관극장의 전신인 협률사로부터 시작해 126년이 넘는 역사가 끊기지 않고, 지금까지도 이 단관극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굉장히 소중하고 귀중한 역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애관극장 2관 내부 조현나 _과거의 애관극장은 여러 공연을 올리고 다양한 영화를 상영할 만큼 번영했지만, 현재는 운영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교수님께선 현재 애사모(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시민모임)의 대표를 맡고 계시기도 한데, 애관극장을 위해 모임 차원에서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이희환 _애관극장이 멀티플렉스 극장에 밀려서 복합상영관 형태를 만든 것까지는 지켜봤지만, 자주 오진 못했죠. 그런데 4년 전쯤 갑자기 매각 소식이 들려왔어요. 그렇게 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시민모임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저희가 나서기도 하고 또 인천시도 나서서 사정을 알아보면서 상황이 가라앉았었는데, 2021년 3월에 코로나19 팬데믹 영향을 받아서 더 이상 못 견디겠다는 소식이 전해졌죠. 다시 2차 애사모 모임을 갖고 기자회견도 하면서 나서게 됐고요. 이번엔 극장주 개인에게 손해 보면서까지 이 극장의 역사를 유지하라고 해서는 안 되겠다, 인천시가 나서는 방법밖에 없겠다고 주장하면서 인천시와 민관협의체도 구성하고 협의를 계속 벌여왔죠. 그래서 이번 4월 즈음에 박남춘 전 인천광역시장님과 탁경란 애관극장 대표, 이원석 인천영상위원회 위원장과 모여서 애관극장이 역사를 이어나가도록 서로서로 역할을 분담해서 노력하자는 협약을 체결했습니다. 조현나 _마지막 인사 부탁드립니다. 이희환 _바뀐 시장님께서 꼭 애관극장을 인처의 소중한 문화공간으로, 공공 공간으로, 역사의 자부심을 지닌 공간으로 발전시켜 나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시민들도 애관을 더 많이 찾아주시고, 영화 관람과 더불어 근대 문화를 느낄 수 있는 명소로 애관극장이 거듭났으면 좋겠습니다. 필자: 조현나(씨네21) 사진촬영: 최성열(씨네21) 인터뷰 일자: 2022년 6월 24일
지옥에서 보낸 한철 올해 많은 주목을 받았던 다큐멘터리는 시리아 내전, 그 중에서도 알레포 봉쇄작전을 아이를 둔 엄마의 시선과 극적인 스토리로 담아내며 큰 화제를 모았던 < 사마에게 >(와드 알-카테아브 , 에드워드 왓츠, 2019)와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담은 < 카불, 바람에 흔들리는 도시 >(아부자르 아미니, 2018)일 것이다. 중동의 석유와 패권을 노리는 강대국들의 복잡한 셈법과 종교적 갈등이 겹치면서 늘 혼돈과 부침을 겪고 있는 지역이지만, 특히 미국과 소련(러시아)의 대립, 그리고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의 득세로 혼전의 양상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시차를 두고 유사한 진행과정을 거쳐온 시리아와 아프가니스탄의 최근 상황을 다룬 두 편의 다큐멘터리가 주목을 받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카불, 바람에 흔들리는 도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아프가니스탄 출신 감독이 연출한 아프간에 대한 다큐멘터리라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아프가니스탄의 현대사에서 1979년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특히 1979년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오랜 혼돈의 중동역사에서도 중요한 변곡점이 되는 해로 기록된다. 79년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중동정세와 정치적 격변의 시발점이 되는데, 당시 미국이 중동의 교두보로 삼고 있던 이란의 친미정권이 혁명으로 무너지자 중동의 패권을 노리던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미국과 소련의 대결이 시작된다. 하지만 소련에 맞선 이슬람 무장세력 ‘무자헤딘’의 전면적 항전으로 10년 동안 전쟁을 치르게 되고, 이 기간 동안 소련에 맞서는 탈레반을 비롯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미국이 무기와 자금을 지원했다가 이후 이 세력들과 적으로 만나면서 다시 맞서게 된다는 역사의 아이러니는 잘 알려진 사실. 당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이슬람 원리주의와 무장투쟁의 확산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1996년부터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기도 했는데, 역사적으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강대국들의 침략을 겪어온 아프가니스탄은 19세기 영국과의 전쟁에 이어 소련, 그리고 미국으로 이어지는 강대국들의 침략과 항전으로 늘 부침을 겪어왔다. <카불, 바람에 흔들리는 도시>이 보여주는 카불은 총성과 포탄으로 가득한 지옥도가 아니다. 자살폭탄의 위협이 상존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늘 가까이 있는 곳이지만 사람들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는 일상을 살아간다. 영화에는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우선 낡은 버스를 몰며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버스운전사 아사드. 할부로 버스를 구매한 아사드는 고장 난 버스를 수리하기 위해 낡은 부품을 구하러 다니고 여기저기 돈을 빌리는 처지. 빨리 버스운전으로 돈을 벌어 할부금을 갚아야 하는 처지지만 고장 난 버스를 수리할 제대로 된 부품을 구매할 자금이 없는 사면초가의 상황에서도 여전히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는 낙천적인 성격이기도 하다. 살아오는 동안 10% 정도가 평화로운 시절이었다고 말하는 아사드에게 자살폭탄과 전쟁보다 더 위협적인 건 생활고. 하지만 적당히 비열하고 잔머리를 굴리는 아사드의 면모는 아내에게 숨겨둔 돈이 없는지 떠보고 친정으로부터 돈을 구해올 수 없는지 은근히 강요하는 장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특히 영화의 중반, 중도금을 지불하지 못하자 버스를 돌려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일부러 버스엔진을 망가뜨렸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영화의 압권으로,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여전한 인간적인 욕망과 이해타산을 잘 보여주는 인간미 넘치는 장면이다.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카불을 떠나야 하는 아버지로부터 가장의 역할을 떠안게 되는 소년 아프신과 동생. 일상이 된 전쟁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소년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2018년 화제를 모았던 <멀리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와 공유하는 정서가 있다. < 멀리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시몬 레렝 빌몽, 2017)는 2014년 크림반도를 둘러싼 영토분쟁이 촉발한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친러 성향의 분리주의자들이 벌인 내전의 주전장이 되었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총성과 폭발음 속에서 살아가는 소년들의 일상과 공포를 다룬 영화. 공간은 다르지만 소년들이 감내해야 하는 일상의 공포와 척박한 현실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절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지 말 것’과 ‘꼭 나무에 물을 줄 것’을 당부하고 떠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하는 아프신은 동생과 놀아주고 아버지를 대신해 사회봉사에 참여하고, 어머니를 대신해 시장에 나가 설탕을 사오곤 한다. 그래서 클로즈업으로 담아내는 어린 아프신 형제의 꿈과 공포에 대한 독백은 더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영화의 마지막. 자연의 순환을 따라, 겨울이 다가오고 내린 눈은 카불을 뒤덮는다. 결국 버스를 고치지 못한 아사드는 버스 안내원이 되었고, 아프신과 동생은 지붕에 쌓인 눈을 치운다. 그렇게 또 한 계절이 지나가고 그들은 여전히 일상을 살아갈 것이다. 영화는 늘 존재하는 자살폭탄과 위험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고 폭력적이거나 자극적인 장면을 전혀 담아내지 않는다. 다만 2016년 발생한 ‘데 마장 광장 자살테러사건’으로 인한 피해자들의 무덤과 그들에 대한 친구들과 가족들의 기억이 간간히 언급될 뿐이다. 최근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있는 아프간 내부의 상황을 2015년부터 카메라에 담던 감독은 2016년 ‘데 마장 광장 자살테러사건’을 목격한 후, 폭력적인 장면을 영화에 담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중국계로 네덜란드에서 활동중인 프로듀서 지아 자오와 팀을 이루며 제작초반단계부터 주목을 받았던 프로젝트로,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로부터 제작 초반단계에서 지원을 받았고 이후 유럽에서도 상당한 관심과 제작지원을 받으며 완성되었다. 2018년 11월 2018년 암스테르담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개막작으로 공개되었다.
임원식 감독의 대표작은 일제감정기에 순교한 주기철 목사에 관한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77)일 것이다. 임원식 감독이 연출, 제작한 작품 중 두 편이 상영중지를 당했는데 그 중 한 편이 이 작품이다. 이 영화는 명보극장 개봉 당일 중앙정보부의 지시로 간판이 내려졌는데 당시 옥중에 있던 사회운동가 문익환 목사를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그는 이에 항의해 중앙정보부 남산 대공분실에 갇히기도 했다. (사진1) 임원식 감독이 대표작으로 뽑은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의 포스터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은 개봉 전 문공부 우수영화로 선정되어 제작사인 합동영화사는 포상으로 외화수입쿼터를 받았다. 임원식 감독은 그 전해에 새마을정신을 구현한 영화 <어머니>(1976)를 연출해 대종상 작품상을 수상한 바 있다. 황해도 월남민 출신인 그는 남한에 대한 첫 인상으로 ‘육탄 10용사’의 용맹함을 꼽을 정도로 애국심 투철한 인물이었음에도 당시 정부의 강박증적인 검열 관행은 피할 수 없었다. 해방정국과 월남, 한국전쟁을 거치며 성장했고 한국영화의 황금기에 감독으로 데뷔해, 70,80년대 검열로 위기를 겪고 파산해서 재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인생은 줄곧 아이러니하고 우연적인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그런 사건들은 때로는 예기치 않은 실패로, 때로는 뜻밖의 행운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임원식 감독은 1932년 생으로 황해도 평산군 세곡면 누천리에서 태어났다. 구한말 의병 출신인 부친 슬하의 3남 2녀 중 막내로 자랐고, 곡창지대의 부농이었던 집안 덕에 일제 강점기는 큰 고통 없이 보낸다. 하지만 해방 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그의 가족은 월남을 결심한다. 먼저 월남한 서북청년단 특공대장인 큰 형님의 도움으로 1946년 12월 24일 38선을 넘어 서울 회현동 적산가옥에 자리 잡는다. 서울에 정착하기 위해 그는 얼마간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의약품을 열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거리에서 장사를 하며 가족의 생계를 도왔고 경제적 안정을 찾을 무렵 서울 성도중학교에 입학한다. (사진2) 1948년 경 서울 성도중학교(현재 용문고등학교) 3학년 시절의 임원식 감독 (사진3) 임원식 감독은 서울 성도중학교 시절 학도호국단 간부로 지냈다. 학도호국단 제복을 입고 있고 찍은 사진 중 오른쪽이 임원식 감독이다. (사진4) 학도호국단 제복을 입고 야외훈련 중인 임원식 감독의 모습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전쟁 초기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해 서울에 잔류하게 된다. 징집연령이었던 그는 집에서 숨어 지내다 배고픔 때문에 결국 인민의용군에 입대한다. 하지만 전선으로 배치되기 직전 탈출해 누나와 함께 전주로 피난한다. 9.28 수복 직후 피난지 전주에서 임호 라는 예명으로 학도의용군에 지원한다. (사진5) 1950년 학도의용군 서북지구대가 전주에 주둔하던 당시 단체사진이다. 아래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임원식 감독이다. (사진6) 1950년 학도의용군 특공위원회 위원장과 함께 찍은 것으로 오른쪽이 당시 특공위원회 특공대장으로 있던 임원식 감독이다. 그리고 학도의용군과 함께 대구로 이동한 후 전선에 배치되기를 기다리다, 대구에서 홀로 국민방위군에 입대한다. (사진7, 8) 1950년 19살의 앳된 나이에 국민방위군 즉 자신보다 나이 많은 민간인으로 구성된 대원 2천명을 인솔해 도보로 경남 사천에서 한산섬으로 이동시키는 임무를 맡았을 때이다. 완장을 차고 있는 이가 임원식 감독이다. 국민방위군에서 그는 대원 2천명을 경남 사천에서 한산도로 도보로 이동시키는 임무를 맡았고 다시 대구에서 벨기에 부대의 보급부대로 종군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240명의 부대원과 240개의 지게를 기차에 싣고 대구를 출발, 고랑포에 도착해 벨기에 부대에 합류한다. (사진9) 1951년 임원식 감독이 한국전쟁 당시 국민방위군 18중대 CTC부대 중대장으로써 함께 종군했던 29영국 여단 벨기에 부대의 군복으로 환복해 입은 모습이다. 이제 그는 국민방위군 18중대 CTC부대 중대장으로 벨기에 부대와 함께 전방에서 종군한다. 그는 고지에서 전투 중인 벨기에군에게 총탄을 조달하기 위해 지게에 총탄을 싣고 고지를 오르내리는 민간인 보급부대를 이끌었다. (사진10) 1951년 한국전쟁기 벨기에 부대 군복에 파이프를 물고 있는 임원식 감독의 모습이다. 10대 후반의 앳된 얼굴이다. (사진11) 벨기에 부대와 배구를 하던 네트 너머로 천막으로 된 막사가 보인다. 오른쪽이 임원식 감독이고 왼쪽은 함께 종군한 국민방위군 18중대 취사병이다. 국민방위군은 벨기에군이 제공하는 부식과 벨기에 군인들이 주는 팁이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전쟁은 길어지고 전투도 생활이 되어가자 국민방위군은 주둔지 주변의 주저 않은 집터를 뒤져 주인 잃은 쓸 만한 물건들을 내다 팔고 때로는 피난민들이 버리고 간 농작물을 거두어 팔아가며 생존을 이어갔다. 위험을 무릅쓰고 군인으로 위장한 뒤 외인부대가 있는 전방까지 들어온 양공주들 또한 그가 목격한 전쟁의 참혹한 일상이다. 전방에서 목숨을 걸고 외인부대와 함께 종군하는 국민방위군 부대원들은 적절한 대우와 보수가 주어지지 않자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원들의 불만에 공감한 중대장 임원식은 대구로 내려와 국민방위군 본부, 육군본부를 다니며 국민방위군의 권리와 보상에 대해 묻고 따졌지만 어느 하나 시원한 답을 주지 않았다. 소득 없이 부대로 복귀하기 직전 우연히 대구의 우체국에서 연락이 두절되었던 아버지를 만나 가족의 소재를 알게 된다. 그는 10대 후반의 어린나이에 겪은 전쟁을 통해 성장해갔다.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다양한 생존의 형태들을 목격하며, 요령 있게 살아 나가는 방법을 배우며 성숙해갔다. 그리고 감악산 전투 등 치열한 고지전을 치르고 난 뒤 국민방위군이 해체되는 시기에 가족들이 피난 중이던 제주도로 내려간다. 제주도로 내려온 그는 오현고등학교에 입학해 평범한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돌아간다. (사진12) 1952년 제주도 피난 시기, 오현고등학교 재학 중 교복을 입고 제주도의 돌담위에 올라가 있는 임원식 감독이다. (사진13) 제주도 피난 시기, 오현고등학교 재학 중 부산으로 수학여행 가 찍은 사진으로 평범한 고등학생의 생활을 보여준다. (사진14) 제주도 오현고등학교에서도 임원식 감독은 자연스럽게 학도호국단 간부로 활동했다. 학도호국단 대대장 복장을 한 임원식 감독으로 배경으로 보이는 초가지붕들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이때 그는 제주도 육군훈련소 군예대로 내려와 있던 문화예술인들이 주체가 되어 학생들을 대상으로 벌인 연극경연대회에 참여하며 연극에 눈을 뜨게 된다. (사진15, 16) 한국전쟁기 제주도에 주둔했던 군예대가 주최한 학생연극경연대회에서 남자 학교에 배당되었던 <붉은 기 땅에 떨어지다>라는 연극의 한 장면이다. 임원식 감독은 제주도의 오현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상경해 고등학교 시절의 연극경험을 살려 서라벌예술대학 2학년으로 편입한다. (사진17) 1954년 남산 후암동 교사 시절 서라벌예술대학 본관 앞에서 찍은 연극영화과 학생들의 단체사진이다. 두 번째 줄에 서 있는 인물 중 왼쪽에서 두 번째가 임원식 감독이고, 앉아있는 인물 중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연출가 김규대, 두 번째 줄에 서 있는 인물 중 왼쪽에서 세 번째가 무용가 은방초, 앉아있는 인물 중 왼쪽에서 첫 번째가 촬영감독 전조명이다. (사진18) 8.15 해방 기념 시가행진에 참여한 서라벌예술대학 사진으로 임원식 감독은 이때도 서라벌예대 학도호국단 대대장이었다. 서라벌예술대학 시절에는 대학연극경연대회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연출가 김규대 선생을 필두로 학생들과 함께 실험극단 창조극회, 원방각, 청협을 만들어 활동했다. (사진19, 20)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 재학 시절 대학연극경연대회 참여 작 유치진의 <통곡>에 출연한 임원식 감독의 모습이다. (사진21) 1960년 극단 원방각의 연극 입센의 <유령> 공연모습이다. (사진22) 학생들이 주축이었던 젊은 극단인 창조극회의 멤버들이다. 아랫줄 왼쪽부터 임원식 감독, 황용하 감독, 성우 남성우, 연극배우 조광일, 윗줄 왼쪽부터 촬영감독 전조명, 연극배우 김광도, 연극연출가 장순환, 사진에는 없는 배우 김보애까지 더해져 창조극회가 탄생했다. 그러나 창조극회를 기성극단 청협으로 만들려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서라벌예대 재학시절 제주도 출신 여성과 이미 결혼했던 임원식 감독은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HLKY 기독교방송에서 성우와 연출자로 활동했고 이광래 선생의 추천으로 육군본부 정훈감실로 옮겨가 대북방송을 하기도 했다. 이 시기 극단과 방송에서는 임무황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국방부 정훈국에서 제작한 김수용 감독의 군영화인 <윤 일등병>(1957)에 출연하기도 했다. (사진23) 김수용 감독의 <윤 일등병>(1957)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임원식 감독(미개봉 추정) 영화계로의 진출을 꾀하던 그는 일본 교포 출신인 유진식 감독의 <불멸의 성좌>(1959)와 <대원군과 민비>(1959)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하게 된다. 유진식 감독이 일본으로 돌아가자 그는 김수용 감독의 조감독으로 <연애전선>(1960), <부부독본>(1961)의 작품에 참여했다. 그리고 신필름에서 제작하는 <돌아온 사나이>(김수용, 1960)의 조감독으로 참여하게 된다. <돌아온 사나이>에는 4.19 당시의 거리 장면이 등장하는데, 실제 신상옥 감독이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서 시위하는 군중을 촬영한 장면을 영화에 사용한 것이다. (사진24) <돌아온 사나이>(김수용, 1960) 촬영 당시, 4.19로 인해 촬영이 중단됐을 때 신필름이 있던 광화문 동아빌딩 옥상에서 스태프들이 시위현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장면이다. 오른쪽부터 편집기사 오성환, 그 옆이 임원식 감독, 왼쪽 첫 번째가 배우 정동일이다. <돌아온 사나이>의 조감독이었던 그가 스웨덴 대사의 집에서 촬영한 가든파티 장면 준비를 탁월하게 해내자 신상옥 감독은 그를 스카웃한다. 신필름에 입사하게 된 그는 신상옥 감독을 도와 신필름이 다작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데 일조한다. 신필름에서 여러 번의 감독 데뷔 기회가 있었으나 1965년 개봉한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임원식·나봉한)가 그의 데뷔작이 된다. (사진25)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임원식·나봉한, 1960)의 촬영장소였던 경복궁에서 민비를 연기한 최은희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사실 임원식 감독의 초기 연출작 중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품은 <숙부인>(1966)이다. (사진26) <숙부인>(임원식, 1966) 포스터 당시 신필름의 제휴극장이었던 명보극장에 걸기로 한 영화에 문제가 생겨, 신필름에서는 열하루 만에 누군가가 작품을 완성해야 했다. 이때 임원식 감독이 <숙부인>을 9일 만에 완성시켜 검열을 받고 무사히 개봉 한 것이다. 신필름은 당시 전속 감독의 월급이 15만원이었는데 <숙부인>을 단시간에 무사히 완성하자 보너스로 15만원을 더 받았다고 한다. (사진27) <숙부인> 촬영현장의 임원식 감독 이후 그는 쇼브라더스와 신필름의 합작영화 <대폭군>(1966)의 연출을 위해 홍콩으로 건너간다. <대폭군>의 로케이션 촬영은 한국에서, 세트촬영은 중국에서 이뤄졌다. (사진28) 1966년 <대폭군>의 촬영을 위해 홍콩에 갔던 시기 쇼브라더스가 초대한 식사 자리이다. 서있는 왼쪽 끝 남자는 쇼브라더스의 엄준 감독이고 그 아래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엄준 감독의 부인이자 주연 배우인 리리화이다. 가운데는 묘장왕 역을 한 김승호가 앉아있고 서 있는 남자들은 오른쪽부터 장군역을 맡은 배우 성소민, 임원식 감독, 최경옥 감독이다. 앉아있는 오른쪽 끝 여자는 배우 고선애이다. 나머지는 쇼브라더스의 여배우들이다. (사진29) <대폭군>(1966)의 홍콩 촬영장의 모습으로 감독의자에 앉아 있는 그의 뒤편에 안경을 쓴 이가 홍콩 측 프로듀서 미스터 주이다. 그 옆으로 미첼카메라를 잡고 있는 홍콩촬영감독과 조수가 보인다. 연출자가 신상옥 감독이 아니라는 이유로 홍콩 스태프들의 파업이 있었지만 신상옥 감독이 홍콩에 들려 무마시키고 임원식 감독이 스태프들과의 갈등을 극복하며 <대폭군>을 완성한다. (사진30) <대폭군>(1966)의 홍콩 촬영장에서 홍콩 여배우 리리화와 세트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의 배경에 있는 다리모형은 세트로, 한국의 팔당에서 찍은 강 장면에 이 다리를 합성하기 위해 무척 정교하게 촬영해야만 했다. 촬영현장에서의 갈등도 극복해야 하고, 대규모 촬영에 특수촬영까지 해야 하는 부담 속에서도 비자 갱신을 위해 들른 대만에서 <나는 매국노>(1966)까지 연출한다. 1년여를 홍콩의 쇼브라더스에서 머물며 대규모 합작영화를 연출한 것보다 그에게 의미 있는 것은 쇼브라더스의 라이브러리와 편집실에서 당시 유행하던 일본의 검객 영화들을 보며 연구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국내에 돌아와 <풍랑객>(1968), <영>(1968), <맹수>(1969) 등을 연출하며 검술액션영화의 유행을 이끌게 된다. 독고성을 주인공으로 한 검객 영화 <영>은 사무라이액션과 <장고>(세르지오 코부치, 1966)같은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를 참고해 만든 작품으로 평단에서는 비현실적이고 만화 같다는 혹평을 받았지만 큰 인기를 끌게 된다. (사진31) <영>(1968)에서 요동 실향민 마을에 등장한 주인공 영(독고성)의 모습이다. (사진32) <영>(1968)에서 마적단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마을 주민들의 모습이다. (사진33, 34) <영>(1968)에서 독고성에게 연기지도를 하고 있는 임원식 감독의 모습이다. 그는 후속작으로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남정임을 협객으로 출연시킨 <풍랑객>을 직접 제작하려고 했으나 신상옥 감독의 설득으로 제작을 양보하게 된다. (사진35) <풍랑객>(1968)에서 남정임에게 연기지도를 하고 있는 모습인데 그는 남정임에게 액션시범을 보이다 다리가 부러져 보름간 촬영이 중단되기도 했다. 충무로에서 액션을 바탕으로 한 장르영화의 연출력을 인정받은 임원식 감독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에는 신필름 파견 감독으로 대양영화사와 세기상사에서 여러 작품을 연출한다. 제작자 한갑진의 요청으로 대양영화사에서 액션영화 <심야의 대결>(1969)과 액션사극 <의적 홍길동>(1969)을 연출했고 세기상사에서는 오수미 주연의 멜로드라마 <벌거벗은 태양>(1970)을 시작으로 검술액션사극 <민비와 마검>(1970), 공포영화 <춘색한녀>(1971), <설야의 여곡성>(1972), 에로틱사극 <대감신랑>(1971), 액션영화 <분노의 세얼굴>(1972) 등을 연출한다. (사진36) <설야의 여곡성>(1972)의 촬영현장으로 분장을 한 신인 여주인공 윤세희의 모습이 보인다. 윤세희는 당시 유명한 워커힐 카지노 딜러 출신으로 세기상사의 국쾌남 사장이 발굴한 배우이다. 1970년대 중반 임원식 감독은 신필름에서 충무로로 나와 프리랜서 감독으로 활동을 시작하는데, 그가 선택한 첫 작품은 삼영필름의 우수영화인 <아리랑>(임원식, 1974)이다. (사진37) <아리랑>(1974)의 촬영현장으로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이가 임원식 감독이다. 제작비 절감을 위해 테크니스코프로 촬영되었다. 그는 나운규 감독의 원작을 동아일보 해직기자인 장윤환과 시나리오 작가 장천호 형제가 야심차게 각색한 각본을 보고 반해 이 작품을 선택했다. 참의원 출신 부호의 아들 영진이 영화 <아리랑>을 보고 감화되어 광화문에서 만세운동을 벌이자 일본 경찰이 그를 박해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원작을 왜곡했고 선동적이라는 이유로 문공부 시나리오 사전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다. 제작기간이 늘어지자 제작사는 원작대로 각본을 수정하도록 권했고 제작비가 들지 않는 방향으로 영화가 만들어지길 바랬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임원식 감독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못한데다 테크니스코프로 촬영되어 그에게 아쉬운 작품으로 남게 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우수영화로 선정되어 삼영필름은 외화수입쿼터를 받게 된다. 임원식 감독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한국교구에서 안수를 받은 장로였다. 어느날 이사례 여사가 찾아와 이기풍 목사의 일대기를 다룬 <순교보>라는 영화의 연출을 그에게 의뢰한다. 그러나 그는 유신 초기, 사회운동을 활발하게 벌이던 기독교계를 예의주시하는 정부의 분위기를 고려해 교회전도용 영화로 만들자 설득해 이 작품을 16미리로 연출한다. 이 영화는 후에 그가 종교영화로 재기하는데 교두보가 된다. 1975년에는 몇몇 영화계 인사들과 함께 새마을연수원 지도자교육을 받는다. 이신명, 변장호, 최하원, 고영남, 임권택 감독 등이 임원식 감독과 함께 새마을연수원에 입소했다. 연수원에서 교육받는 동안은 술, 담배를 끊어야 했기에 고영남과 임권택 감독은 금단현상 때문에 퇴소한다. 새마을연수원의 교육내용에 감동받은 임원식 감독은 정부에서 영화계에 의뢰한 새마을영화의 연출자로 선택된다. 이때 받은 교육을 바탕으로 상이군인에게 시집온 여성이 아이를 키우며 자주적으로 마을을 재건한다는 내용의 영화 <어머니>(1976)를 감독협회 기획, 합동영화 제작으로 연출하게 된다. (사진38) 새마을영화 <어머니>(1976)의 한 장면이다. 상이군인(이순재)에게 시집 온 여성(윤연경)이 아이를 키우며 자주적으로 마을을 재건한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관객수 10만이 넘으면 홈런이라고 여기던 시절 16만이 넘는 관객이 들어 흥행에도 성공하고 15회 대종상에서 최우수작품상을 포함해 3개 부문의 상을 수상한다. 그 후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77)를 합동영화사에서 연출한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순교한 주기철 목사를 다룬 종교영화로 이 작품은 문화공보부의 우수영화로 선정되어 합동영화사는 외화수입쿼터를 받는다. 그러나 개봉 당일 중앙정보부에 의해 상영중지가 내려진다. 상영중지에 항의하는 임원식 감독은 남산 정보부에 갇히는 고초를 겪었지만, <저 높은 곳을 향하여>가 유신시대에 탄압받고 있던 종교지도자를 떠올려 민심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중앙정보부의 설득에 그는 결국 상영중지를 받아들인다. (사진39) 주기철 목사의 순교를 다룬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77)의 촬영 현장이다. 977년 상영중지를 당했으나 1981년 재개봉되어 그해 한국영화 관객동원 3위를 기록한 작품이다. 1981년 이 작품의 해금이 풀려 재개봉되자 20만 1천명의 관객이 들어 그해 한국영화 관객동원 3위를 차지한다. 그 덕에 1982년에 그는 영화인협회에서 흥행영화 감독들에게 주는 할리우드 연수여행 포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77년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의 개봉이 중지되고 고초를 겪다보니 그의 작품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합동영화사에 들어가 전무이사 겸 기획실장으로 5편의 작품을 기획했고, 2년 뒤에는 화풍흥업의 기획실장으로 4편의 작품을 기획하며 영화계활동을 이어갔다. 1980년에는 김태수 대표의 제안으로 태창흥업의 사장에 취임하게 된다. 외화는 김태수 대표가 맡고 한국영화는 임원식 감독이 책임지는 구조였다. 중견영화사인 태창흥업의 사장으로 처음 제작한 영화는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였던 조용필을 주인공으로 한 <그 사랑 한이 되어>(이형표, 1980)이다. (사진40) 임원식 감독이 태창흥업 사장으로 취임한 뒤 처음으로 제작한 작품 <그 사랑 한이 되어>(이형표, 1980)의 포스터이다. 일류 배우의 개런티가 2백만 원이던 시절 그는 조용필에게 5백만 원의 출연료와 추가로 2백만 원의 작곡료를 주고 캐스팅해 화제가 되었다. 그는 과도한 개런티로 영화인들의 빈축을 사 영화인협회에서 제명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작 전에 이미 제작비의 두 배가 넘는 지방 투자자들의 투자금이 몰려들었고 완성 후 흥행에도 성공해 큰 수익을 가져다 준 작품이다. 두 번째 제작 작품은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이다. 첫 제작 작품의 상업적 성공 이후 인권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그는 『기름밥』이라는 논픽션 단편에서 영감을 받아 버스안내양의 실상에 대한 각본을 작가 김승옥에게 맡긴다. 무사히 잘 완성되고 문공부 우수영화로 선정되었으나 이 작품은 개봉 후 위기를 맞게 된다. (사진41) 임원식 감독이 태창흥업에서 두 번째로 제작한 작품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의 한 장면이다. 자동차노조와 한국노총의 상영중지 요청이 제기된 것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삥땅검사, 알몸수색, 운전기사와 안내양의 부적절한 관계, 노조를 어용화해 묘사한 점 등이 운수노동자들의 인격을 모독했다는 이유였다. 결국 이 작품은 상영 7일 만에 자진해서 간판을 내리게 된다. 영화계에는 이 사건에 대해 노동부와 문공부가 노동자들의 상영중지 여론을 종용했다는 의혹이 떠돌았고 영화인들은 소재선택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4군데 장면을 자르고 1군데 장면을 재촬영해 공연윤리위원회의 검열을 다시 받은 후 1982년 6월에 재개봉을 했지만 흥행은 요원했다. 결국 임원식 감독은 지방 흥행사들의 이어진 손해배상 소송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고 재기불능 상태로 제주도로 낙향하게 된다. 제주도에서 영화계와는 거리를 두고 지내던 중, 그는 교계에서 만든 종교영화제작소로부터 선교영화 연출을 제안 받는다. 그가 연출한 선교영화는 곧 교인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게 되고 그 즈음 비디오문화가 확산되어 그가 제작한 종교영화 비디오테이프 판매 또한 급증했다. 1990년대 중반 케이블텔레비전이 등장하던 때에는, 기독교방송국의 초대 전무이사 겸 방송본부장을 역임하게 된다. 그리고 방송국을 퇴직하고 난 뒤 1999년부터 8년 동안 20대, 21대 영화감독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춘사영화제를 재개하고 스크린쿼터 투쟁을 벌이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갔고 이러한 활동을 인정받아 2001년에는 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사진42) 1999년부터 8년간 한국영화감독협회 제20, 21대 회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의 임원식 감독 모습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제주도에서 지내며 제주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을 지냈고 제주 4.3항쟁에 관한 현기영의 소설을 영화화 하는 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 임원식 감독의 구술은 어린시절 고향인 사리원의 풍경, 청소년기 월남민으로 한국사회에 적응해갔던 경험, 한국전쟁기 국민방위군으로 종군한 경험, 학창시절 학도호국단 활동 등 한국현대사의 다양한 면을 살필 수 있는 경험들로 가득하다. 또한 영화계에 입문한 뒤에는 거대 영화 기업 신필름의 체계와 쇠락, 한홍합작영화 경험, 유신시기 영화검열의 폐해 등에 관해 의미 있는 증언이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