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로 멋진 남자
- 감독
- 김응천
- 제작년도
- 1971
- 출연
- 신성일, 윤정희, 방인자, 김희갑, 여운계, 황정순, 황인철, 이승렬, 조춘, 문미봉, 조덕성, 이철, 유일수, 황민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란희 감독의 첫 장편영화 < 휴가 >(2020)의 주인공은 집단정리해고 무효소송을 진행하며 5년째 천막 농성장을 지키고 있는 노조원 재복(이봉하)이다. 해고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한 많은 영화들이 갈등이 극적으로 폭발하는 투쟁 현장이나 최종 판결이 나기까지의 지난한 시간에 집중해 온 것과 달리, <휴가>는 5년을 끌며 진행된 재판에서 결국 패소하고 난 이후의 시간을 담는다. 재복과 함께 노조를 만들고 농성장을 지켜왔던 영석(서광택) 그리고 만용(황정용)은 허망, 좌절, 분노, 원망, 야속, 피로, 무력을 겪는다. 이미 고공투쟁까지 하며 극한의 상황까지 가봤던 이들은 눈에 보이는 뚜렷한 성과도 얻지 못한 채 법적 절차가 끝난 상황에서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황망해 한다. 그래서 천막에 모여 앉아 밥을 먹던 그들은 서로를 탓하기 시작한다. 이란희 감독은 무력한 분란의 대화 속에서 오히려 복직투쟁의 노동을 일일이 드러낸다. 노조를 만들고, 전단지를 뿌리고, 연대투쟁을 하고, 여러 결정을 내리기 위해 무수한 회의를 하고, 문서작업을 하고, 고공투쟁을 하고, 재판을 준비하고, 천막을 지키고, 밥을 하는 등 투쟁에는 무수한 노동이 있다. 특히 재복은 앞에 나서는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알뜰살뜰한 성격에 맞게 매일 식사를 준비하고 동료들의 건강을 챙기는 등 농성장의 살림을 맡아왔다. 투쟁현장에서의 재복의 돌봄노동은 반복적으로 묘사되던 중년 남성 해고노동자의 전형성을 깨트리는 것이기도 하다. 서로 다툰 후에도 여전히 무얼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셋은 투쟁 5년 만에 처음으로 ‘휴가’를 갖기로 한다. 그들은 ‘휴가의 시간’을 만듦으로써 역설적으로 그들이 했던 투쟁이 고된 노동이었음을 그리고 그 안에서 각자가 맡아온 고유의 역할이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휴가의 시간은 이후의 시간도 이전의 시간도 아니다. 어쨌든 패소로 한 단락이 만들어진 ‘선인가구’ 투쟁의 역사에서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한 것처럼 “옛 것은 죽는데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 않는” 위기의 시간이고 그렇기에 마침내 사유가 가능한 시간이기도 하다. 투쟁을 계속 이어나갈지 아니면 접을지, 이어나간다면 무엇을 이루기 위해 투쟁을 하는지, 투쟁에서 그동안 해온 수많은 노고는 무엇을 변화시켰는지, 재복에게 함께 해온 동료들은 어떤 의미인지, 일과 노동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가족들의 생계와 일상은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 그동안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멈춰놨던 질문들이 틈새의 시간에서 한꺼번에 쏟아진다. 이 휴가와 질문은 재복이 최종적으로 농성장을 아예 떠나는 파국을 야기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갈등 끝에 복직투쟁을 포기하는 건 ‘현실성’이라는 이름 아래 많은 영화들이 선택해왔던 결말이기도 하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성과가 중요한 요즘 시대에 특별한 동기나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 재복이 돌아온다는 건, 언뜻 개연성 떨어지는 ‘이상적’이거나 ‘미련한’ 결말처럼 보일 수 있으니 말이다. 실제로 <휴가>는 투쟁을 그만둘 충분히 납득 가능한 동기인 가족을 등장시킨다. 농성장을 나와 집으로 향한 재복은 그동안 돌보지 못했던 딸들을 챙기기 시작한다. 5년 동안 부모의 돌봄 없이 스스로 커온 딸들에게 재복의 갑작스러운 돌봄은 어색함을 넘어서 때늦은 간섭과 잔소리가 된다. 이미 두 딸은 가난과 부모 없는 삶에 지칠 대로 지쳐있다. 특히 자신도 미성년이면서 동생을 돌보는 역할까지 해야 했던 큰 딸 현희(김정연)는 재복에게 농성장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재차 다그친다. 재복은 대학에 수시 합격한 큰 딸의 예치금 30만원을 구하기 위해 친구에게 돈을 빌리려 하지만 거절당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재복이 애초부터 승산 없는 싸움을 시작했다며 그가 해온 투쟁의 가치를 무화하고 조롱한다. 재복은 결국 친구 우진이 매니저로 있는 수제가구 공방에서 휴가 기간 동안 일을 하게 된다. 재복은 다시 일을 시작하며 노동의 기쁨과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매니저인 우진은 정확한 작업 지시도 없이 재복을 다른 직원인 준영에게 떠맡긴다. 그러나 준영은 매사 심드렁하고 자기 일만 할뿐 재복을 도와줄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초반에 실수를 하던 재복은 머지않아 일의 감각을 찾게 된다. 그가 꼼꼼하게 나무를 자르고 칠을 하고 사용한 장비들을 정성스럽게 닦아놓는 장면에서 일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재복은 무엇보다 돈을 벌어 가장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데서 큰 기쁨을 느낀다. 현희의 예치금을 마련하고 둘째 딸 현빈(이승주)에게는 원하던 패딩점퍼를 선물해준다. 맛있는 반찬을 만들어 함께 저녁밥도 먹는다. 그러나 재복은 또한 오랜만에 일상을 찾은 일터에서 오늘날의 불안정한 각개전투의 노동현장과 착취를 목격하게 된다. 재복이 공방에서 일을 할 수 있었던 건 원래 일하던 이주 노동자가 비자 때문에 한국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재복의 사수인 20대 초반의 준영(김아석)은 완전히 고립된 삶을 살고 있다. 준영은 혼자서 일하고, 혼자서 밥 먹고, 아파도 혼자서 견딘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누구의 도움을 받아본 적 없는 준영은 다른 누군가와 함께 하거나 도움을 주고받는 방법 자체를 모르는 이처럼 보인다. 준영은, 타인으로 인해 손해를 보고 싶지 않듯이 자신도 타인에게 폐가 되지 않는, 최소한의 선을 지키는 생존 방법을 터득한 듯하다. 재복은 매번 준영에게 ‘도와줄까?’ ‘점심 먹으러 가냐?’고 묻지만 그는 괜찮다고 말하거나 그의 말을 아예 차단한다. 준영이 하루 종일 끼고 있는 무선 이어폰은 생존하기 위해 외부와의 교류를 차단하고 ‘혼자’를 선택한 이의 장치다. ‘혼자’의 고립된 삶은 그가 선택한 것이라기보다는 함께 살아가고 살아남는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받아들인 방법일 뿐이다. 재복은 먼저 살아본 어른으로서, 그리고 복직투쟁을 겪은 노동자 선배로서 함께 일하는 법을 알려준다. 도시락을 싸와서 밥을 같이 먹고 나무 널판지가 떨어져 준영이 부상을 입자 떨어트린 휴대폰을 집까지 가져다주고 저녁을 같이 먹고 냉장고를 채워주고 보일러를 고쳐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산재신청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정보를 알려준다. 재복이 준영의 산재신청을 도와주고 친구인 우진에게도 산재신청을 해주라고 강력하게 요구할 수 있었던 건 그가 노조를 만들고 복직투쟁을 하면서 노동자로서 성장해온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투쟁은 그가 제대로 된 어른이 될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기존의 권력관계를 바꿔보려 하거나 승패 이외의 가치를 경험해 본적이 없는 준영은 일을 하다 다치게 된 것을 모두 자기 탓으로 돌린다. 심지어는 매니저인 우진이 차로 병원을 데려다주고 다리가 다 낳으면 직장으로 돌아오라고 한 것만으로도 고맙고 미안한 일이라고 말한다. 재복은 “맨날 당하고만 살 거냐”고 재차 말하지만 준영은 “아저씨, 저 그런 거 안 해요”라고 말한다. 준영에게 ‘그런 거’는 애초부터 이길 수 없는 일을 하는, 손해 보는 짓이다. 재복은 ‘휴가’의 시간에 복직투쟁을 통해 그렇게 돌아가고 싶었던 일상, 즉 일터로 돌아오지만, 그는 거꾸로 일상에서 노동착취와 투쟁의 현장을 목격한다. 영화는 2층에 있는 공방 창문에서 건너편 1층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는 준영을 내려다보는 재복을 보여준다. ‘어디 가냐?’는 재복의 말에 대답도 없이 나가던 준영이 겨우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는 장면은 이후 다시 동일한 시점으로 반복된다. 준영이 다치고 현장실습을 나온 직업계 고등학교 학생 민재(박재형) 역시 준영과 마찬가지로 점심시간에 혼자 슬쩍 나가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사먹는다. 카메라는 재복의 시점으로 준영을 바라보던 것과 마찬가지 각도로 그런 민재를 2층 창문에서 바라본다. 무선 이어폰과 편의점 컵라면으로 압축되는 젊은 세대의 노동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재복의 큰 딸 현희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복직투쟁을 하는 노동자로서 당사자인 재복은 휴가를 통해 일상에서 오늘날의 노동현장을 목격한다. 재복은 휴가를 통해 일상과 투쟁현장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그는 또한 농성장에서 하던 돌봄 노동을 일상에서 반복한다. 자신의 집과 준영의 집 모두에서 냉장고를 청소하고, 음식물을 채우고, 반찬을 하고, 밥을 차려 같이 나눠 먹는다. 투쟁은 한편으로 주위를 살피는 목격이고 돌봄이다. 그의 일상은 투쟁의 노동으로 채워진다. 재복은 휴가 기간 동안 만용의 전화를 받지 않으며 농성장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다는 암시를 주기도 하지만, 결국 우진의 취직 제안을 물리치고 농성장으로 돌아간다. 열흘의 휴가가 끝난 후 그는 갖가지 반찬을 해서 반은 딸들을 위한 냉장고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반은 농성장에 들고 갈 가방에 싼다. 영화는 재복이 집의 문을 닫고 나가 농성장으로 돌아오는 길을 정성들여 보여준다. 준영은 재복의 설득에 회사에서 치료비를 받게 되었지만, 재복이 민재까지 돌볼 수는 없다. 재복은 대신 자신의 농성장으로 돌아간다. 자신의 투쟁은 다른 노동현장의 투쟁으로 이어져 있다. 재복은 자신만 잘 살기보다는 함께 잘 살기를 선택한다. 그 길은 어둡고 불안할 수 있지만 그는 돌봐야할 동료가 있다. 그의 농성장에도 그가 목격해야 할 이들이 있다. 재복은 농성장에 걸린 투쟁기간을 알리는 표지판 ‘1893일째’에서 3을 4로 바꿔 놓으며 투쟁의 일상을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고공투쟁에 들어간 영석에게 그가 좋아하는 소시지 볶음과 반찬을 올려 보낸다. 위를 올려다보는 재복의 시점은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던 아이들을 내려다보던 시점과 중첩된다. 영화는 묵묵하고 담담하게 재복의 목격과 성찰의 시간을 지켜보고, 그가 돌아오는 길, 즉 함께 살기를 선택하는 그 길이 오히려 현실이고 사실성에 근거한 것이라 말하며, 해고노동자의 존엄과 품위를 보여준다. 재복은 그렇게 농성장에 돌아와 ‘휴가’라는 시간을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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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당신이라면 이래도 살겠어요?” 이것은 남편을 잃고 어린 아들과 남편 고향에 살러 왔다가 아들마저 유괴로 잃는 여자의 이야기, < 밀양 >( 이창동 , 2007)의 카피 문구였다. 수난이 많았던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우리는 종종 이 질문과 마주친다. 그리고 이 질문을 가지고 한국영화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 이 생명 다하도록 >( 신상옥 , 1960)을 만나게 된다. ‘이 생명 다하도록’이라는 제목 자체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60년에 개봉한 영화 <이 생명 다하도록>은 한운사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이 소설은 한운사의 첫 장편소설이었는데 ‘방송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라디오에서 낭독되면서 유명해졌다. 한국전쟁 이후 라디오가 가장 대중적인 매체로 부상하면서 방송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었다. <청실홍실>로 시작된 라디오 드라마 붐은 방송극 원작의 영화화를 견인했고 이러한 현상은 1960년대 한국영화 붐에 촉매 역할을 했다. 그 중 하나가 한운사의 <이 생명 다하도록>이었다. 이 소설은 박격포탄 파편에 맞아 하반신이 마비되고 전란을 거치며 두 딸마저 잃은 김기인 대령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는데, 김 대령을 간호하며 그 옆을 지킨 부인의 일기 형식으로 되어 있다. 한국전쟁으로 과부만 30여만 명이 발생했음에도 여성들이 목소리를 낼 통로가 없던 상황에서 과부나 진배없는 기구한 여성 화자의 고백은 대중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일기의 고백체는 라디오에서 낭송되기에도 적합한 것이었다. ‘방송소설’의 인기 덕에 이 이야기는 영화화가 결정되었고, 개봉 시기에 맞춰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으며 1) , 한운사는 인기 방송작가로, 신상옥 감독은 신필름 시대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다. 이 영화는 “이 한편의 영화를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모든 전몰장병과 상이용사, 그리고 그 유가족 앞에 삼가 바친다.”는 헌사로 시작한다. 시작부터 전후 재건의 이념과 논리를 강력하게 보여주는 셈이다. 그리고 바로 1949년 태백산 토벌 작전 중에 김 대위( 김진규 )가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는 장면이 제시된다. 둘째 아이를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내 ‘선경 엄마’ (최은희 )는 의사에게 남편의 목숨만이라도 살려 달라 애원한다. 담당의사가 ‘그나마 생명이라도 살리는 것이 인도적이냐, 그냥 죽이는 것이 인도적이냐?’고 고민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영화는 김 대위가 성기능을 상실했고 이로 인해 부부의 삶이 위태로울 것임을 말해준다. 이후 영화는 부부 갈등을 축으로 하는 멜로드라마로 전개되는데 한국전쟁은 그 갈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장애인 남편과 슬하에 두 아이를 둔 주부로서의 삶만으로도 고달픈데 전쟁이 일어나자 선경 엄마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것은 물론 적치를 피해 군인 남편을 피난시키고 그에게 삶의 동기도 부여해야 하는 사명까지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영화는 부부 갈등을 넘어 전후 재건의 문제로 확장되며 1950년대 말의 현실에 보다 적극적으로 연루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동시기에 많이 나왔던 과부를 주인공으로 하는 멜로드라마의 계보에 놓이면서도 다른 영화들보다 ‘정치적’ 색채를 강하게 띤다. 120회에 걸쳐 낭독되었던 소설이 109분의 영화로 만들어지는 데 따른 축약과 변용은 이 영화가 지닌 정치성의 좌표를 드러낸다. 소설은 일기 형식이므로 시간 순에 따라 전개되면서도 수도육군병원 시대, 서울대학부속병원시대, 천호동시대, 남한산성시대, 서울 수복, 대구 피난시대, 부산 피난시대, 환도 이후로 공간 별로 나뉘어 서술된다. 따라서 원작은 한국전쟁 발발 이전부터 한국전쟁의 전개, 그리고 전후 복구의 과정을 소상하게 들려주며 한국전쟁에 대한 르포르타주의 성격을 지닌다. 영화에서는 ‘수도육군병원―피난지 부산―환도’로 압축되며, 사건 또한 삭제되거나 축약되는데 그러면서 멜로드라마로서의 애정 갈등에 초점이 놓인다. 삭제되거나 축약된 부분이 주로 전쟁의 실상에 대한 세부적인 목격담이나 현실 비판이라면, 확장과 변용이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부분은 선경 엄마와 미스터 조의 인연이다. 원작에서 선경 엄마가 미스터 조를 만나는 것은 대구 국제시장이고, 부산에서는 ‘양부인’이 된 여고 동창을 만난다. 대구 피난시대는 전체 분량의 9분의 1에 불과하다. 그리고 자살하면서 선영 엄마에게 유산을 남기고 가는 것은 부산에서 만난 동창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미스터 조를 부산 국제시장에서 만나고, 그와의 우정이 부부관계의 핵심 장애가 된다. 그러면서 미스터 조의 여동생 영선이 ‘양부인’인 것으로 변용된다. 원작에서는 미스터 조와의 인연과 양부인의 자살은 별개의 사건이므로 상관이 없는 것과 달라지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영화에서 영선이 자살하는 데에 오빠인 미스터 조( 남궁원 )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영선( 정성숙 )은 여관방에서 선경을 돌보아주던 친절한 여성으로 오빠를 만나기 전까지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오빠를 만나고 그가 양부인이 되었다고 비난하자 자살하고 만다. 그녀는 유서에서 “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떳떳할 줄 알았는데, 오빠를 보고나서 ‘똑바로’ 보게 되었다.”라며, “뒷골목에서 ‘떳떳이’ 살지 못할 운명”이기에 죽는다고 이유를 밝힌다. ‘똑바로’, ‘떳떳이’라는 부사는 오빠라는 존재 자체가 요구하는 기준이다. 가부장적 규범을 따르자면 부모가 없는 상황에서 오빠는 여동생을 지킬 의무가 있었지만 전쟁은 그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살아남기 위해 타락한 여동생은 ‘썩어빠진 변명’이라는 오빠의 비난 앞에서 모든 책임을 자신이 온전히 질 수밖에 없다. 미스터 조 남매의 행동은 무력이 전면화되는 전쟁을 겪으며 전통적인 가부장적 윤리는 무너졌음에도 오히려 그 규범은 강하게 요구되고 결과적으로 그 수행의 책임은 여성에게 돌려지는 부조리를 보여준다. 이는 현모양처의 도리로서 ‘남성 능력을 잃은 남편’을 지키기 위해 공적인 영역에 끌려나오고 사회적 노동까지 전담해야 하는 선경 엄마의 모순된 처지와도 겹친다. 더 문제적인 것은 결국 영선이 죽으면서 남긴 돈으로 김 대위는 전쟁과부를 위한 시설을 운영하게 됨으로써 재기한다는 점이다. 영선의 죽음은 < 쌀 >(1963)에서 오빠(신영균)의 사업을 위해 여동생 영란이 술집 여자가 되었지만 사업이 완수된 이후에 슬그머니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나, 상이군인(남궁원)은 5.16을 통해 복귀하는 데 반해 첫 장면에서 그를 타일렀던 술집 여자들은 서사에서 사라지는 것과도 같다. < 로맨스그레이 >(1963)에서 바걸인 만자(최은희)와 보영(조미령)이 근대화의 역군인 젊은이(신영균)를 위해 부산행 기차를 타고 떠나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2) 그러나 죽거나 떠나야했던 여성들과 달리 선경 엄마는 상이군인 남편에게 꼭 필요한 존재이므로 ‘성생활’을 포기하고 남편을 선택함으로써 환도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전쟁으로 인해 남성 인력은 부족해졌으나 재건은 꼭 해야 하는 전후 상황에서 여성에게 요구되었던 헌신의 이념과 논리를 잘 보여준다. 이 영화는 1959년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1960년 7월에 개봉하였다. 이 기간은 민주화에 대한 시민의 요구가 폭발했던 4.19를 가로지른다. 그런데 이 영화는 5.16 이후의 경제 근대화에 보다 어울리는 이념과 논리를 담고 있다. 그리고 방송소설에 이어서 이 영화 또한 크게 흥행했다는 것은 그러한 이념과 논리의 지향점이 대중의 기대지평과 조응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렇게 볼 때 이 영화는 1960년대의 역사적 전개에 대한 징후로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것이 이 영화에서 처음 드러난 것은 아니다. 신상옥 영화가 1958년 < 어느 여대생의 고백 > 이후 < 악야 >(1952)나 < 지옥화 >(1958) 유의 전위적인 경향에서 벗어나 전후 재건과 경제 근대화에 필요한 계몽 논리를 멜로드라마에 녹여내어 감성적으로 설득하는 노선을 선택하고 그것이 연이어 대중적 성공을 거두면서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와 같이 시대적 요청을 선취했기에 신상옥 감독은 < 상록수 >(1961), <쌀>(1963)로 이어지는 영화를 먼저 만들 수 있었고 1960년대 내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1) 한운사, 『이 생명 다하도록』, 삼한출판사, 1960.6. 2) 박유희, 『한국영화 표상의 지도』, 책과함께, 2019, p.35. >> 이 생명 다하도록 VOD 보러가기 <<
침체 속에 거둔 70년대 이후의 수확 1970년대 이후의 양상은 1960년대와 비교할 때 양이나 질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무엇보다 두드러진 점은 황정순이 <팔도강산>(배석인, 1967) 류의 국책영화에 기용되면서 그동안 호흡을 맞춰온 김승호 대신 희극배우 김희갑이 그 자리를 메웠다는 사실이다. <저것이 서울의 하늘이다>(김수용, 1970), <내일의 팔도강산>(강대철, 1971) <아름다운 팔도강산>(강혁, 1971), <우리의 팔도강산>(장일호, 1972) 등이 그런 예다. 노부부가 일본에 사는 아들의 초청을 받아 엑스포70 세계박람회를 관람(<저것이 서울의 하늘이다>)하거나, 전국 각지에 있는 자식들을 찾아 유람 여행하는 동안 변화된 한국의 발전상을 에피소드에 끼워 보여주는 형식이었다. 이렇게 달라진 제작 환경 아래서 황정순은 1970년대에 비극적인 수절의 이면을 그린 <홍살문>(변장호, 1972) 등 60여 편에 출연했다. 60년대에 비해 절반가량 줄어든 실적이다. 속편 등 유사 기획으로 작품성보다는 흥행 위주의 영화가 대세인 가운데 아들을 국가대표 골게터로 키웠으나 신장염을 앓게 되자 콩팥까지 이식해 주는 <어머니의 영광>(김기, 1973)의 생선장수, 벙어리 청소부 아들과 4남 2녀의 손자, 손녀들까지 돌보는 <슬픔이 파도를 넘을 때>(조문진, 1978)의 헌신적인 할머니, 동족상잔의 비극 앞에서 불목의 위기를 화해로 풀어내는 <장마>(유현목, 1979)의 외할머니 등 여러 형태의 모성애를 보여 주었다. 이 가운데 연기력이 가장 돋보인 것이 유현목 감독의 <장마>였다. 화면을 줄곧 적시는 지루한 장맛비 속에 외손자와 나누는 콩깍지의 교감, 설움조차도 발효시킨 푸념 조의 독백은 선율처럼 느끼게 했다. 황정순 최고의 연기라 할 수 있다. [사진] 영화 <장마>에서 황정순과 김신재(오른쪽) 1980년대 이후의 출연작은 <피막>(이두용, 1980), <겨울로 가는 마차>(정소영, 1981), <여자의 함정>(이경태, 1982), <가고파>(곽정환, 1984), <88 짝궁들>(서윤모, 1984), <장남>(이두용, 1984) 등 10여 편에 지나지 않는다. 이 가운데 이두용 감독의 <피막>과 <장남>에서의 연기가 관심을 끈다. <피막>에서는 장손이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자 무당을 불러 굿을 하게 하는 강인한 노마님의 모습이, <장남>은 핵가족시대 노인의 소외감이 묻어나는 표정연기가 일품이었다. [사진] 영화 <장남>의 한 장면. 오른쪽은 배우 김일해 황정순은 이렇게 연극무대에서 다듬은 특유의 발성과 응집력을 무기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 <열녀문>(신상옥, 1962)으로 대표되는 한은진과 쌍벽을 이루며 1960년대 전후의 한국영화계에 대들보 역할을 했다. ‘탱크’라는 말을 들으며 다진 연기력 황정순은 1925년 8월 20일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에서 난산 끝에 10남매 중 일곱 번째 막내딸로 태어났다. 산모는 몸이 약한 마흔이 넘은 고령자였다. 딸이 백일이 지나 건강을 되찾자 황씨 일가는 시흥을 떠나 외가가 있는 인천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데 정순이 세 살 때, 바다로 나간 아버지가 익사체가 되어 돌아오는 큰 일이 벌어졌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남긴 채무까지 짊어지고 험한 품팔이 일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어렵게 들어간 인천 박문여자중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정순은 이 무렵 프랑스작가 모리스 르블랑의 탐정소설 <아르센 뤼팡>에 빠졌다. 신출귀몰하는 괴도신사의 이야기다. 그러나 열네 살 때 서울로 수학여행을 갔다가 본 ‘타잔’ 영화가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 황정순은 어느새 배우지망생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서울에 사는 사촌 언니(황금순)를 믿고 가출한 후 동양극장의 전속극단 ‘청춘좌’로 찾아갔다. 무턱대고 졸라 얻어낸 것이 대사 없이 처녀들 사이에 끼어 낄낄거리며 지나가는 <산송장>의 행인 역이었다. 1940년이었다. 그동안 딸의 ‘광대 짓’을 극구 말리던 노모도 제물에 지쳤는지 묵인했다. 그 사이 2차세계대전이 터졌다. 극단 ‘호화선’(1941년)의 연구생으로 들어갔으나 얼마 못가 해체되는 불운을 겪었다. 해방 후에는 중앙방송국 전속 성우(1945년)가 되었다. 그녀의 본격적인 활동은 6.25 직전 극단 ‘신협’의 <뇌우(雷雨)> 공연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이렇게 물꼬를 튼 연극 활동은 6,25 때 대구로 피란 온 ‘신협’의 <자명고>(1951. 1, 대구)와 <햄릿>(1951. 9, 대구), <맥베드>(1951. 10, 마산) 등에 출연하며 자리를 잡아갔다. 뒤이어 <은장도>(1953, 시공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5, 시공관) 등의 무대에 섰고, 56년에는 중앙국립극단 전속 단원이 되었다. 이즈음에 출연한 작품이 제1회 공연작 <원술랑>과 제2회 공연작 <뇌우(雷雨)>였다. 두 연극 모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5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당시 서울 인구가 150만명(1955년 기준)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대단한 성공이었다. 그는 두 연극에서 김유신 장군의 아내 지소 부인과, 노씨 집안의 하녀로 들어간 사봉 역을 맡았다. 특히 젊은 나이로 노파 역까지 소화한 <원술랑>의 지소 부인 역은 관객들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햄릿>(1957, 시공관) 등 여러 작품에서 공연한 바 있는 김동원은 몸을 아끼지 않은 그녀의 열정을 보고 단원들은 ‘탱크’라는 별명을 붙였다 (김동원, 『미수의 커튼콜』 2003, 태학사, 188쪽) 고 했다. 황정순이 1949년 영화 <파시>에 출연한 후 6년 동안 스크린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 시기 그녀는 이미 신접살림을 하는 새댁이었다. 1953년 3년의 열애 끝에 의사 이영복과 결혼했다. 이와 함께 이날 한꺼번에 두 딸과 아들 하나를 얻었다. 스물일곱 살 때였다. 하지만 결혼 30년 만에 남편이 먼저 가버렸다. 그의 연기를 받쳐준 것은 무대 경험을 통해 축적한 발성법과 육체언어로 인식한 연기동작, 투철한 직업의식에 따른 작품해석과 성격분석이었다. 이례적으로 현대적인 풍모와 카리스마를 보여준 <육체의 고백>의 서구적인 ‘밤의 여왕’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삶의 질곡과 모진 풍상을 겪은 억척스런 아내이거나 엄격하면서도 인자한 어머니, 가난하지만 건강하게 살아가는 서민적인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사진] <육체의 고백>(조긍하, 1964)에서 황정순 황정순은 영화계에서 은퇴한 후 2006년 여배우로서는 처음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됐으나 이후 발병한 치매로 고생하다가 2014년 2월 17일 아흔 살의 나이로 400여 편의 영화를 남기고 46년에 이르는 영화의 삶을 거두었다. * 연도별 출연 편수는 통계에서 빠진 부분이 있을 것으로 판단돼 증가될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