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들
- 감독
- 조문진
- 제작년도
- 1970
- 출연
- 최무룡, 윤정희, 신성일, 문희, 황정순
김수용 감독은 1965년에 아동영화 < 저 하늘에도 슬픔이 >로 그해 방화 흥행 1위를 기록하고, 청룡영화상에서 감독상과 작품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곧 이어 개봉한 < 갯마을 >은 평단의 호평과 함께 흥행도 성공하고, 서울시문화상을 비롯하여 여러 영화상에서 감독상과 작품상을 수상했다. 그 전까지 코미디와 멜로를 주로 만들던 김수용은 1965년 성공에 자신감을 얻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계속해서 시도하게 된다. 일명 ‘문예영화’의 시대는 김수용과 함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당시 문예영화는 예술성이 높고 격조가 있다고 인식된 데에다 소설이나 연극으로 인지도가 높아 관객에게 호소하기가 좋은 장점이 있었다. 김수용이 가장 왕성한 창작열을 보여준 1967년은 문예영화의 해이기도 하다. 이 해에 문예영화는 전체 한국영화 제작편수의 20%에 달했고, 대중에게 예술영화로 유통되었던 문예영화가 대중성도 있다는 것을 <갯마을>로 확인한 김수용은 1967년 한 해에만 10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1966년부터 우수영화를 선정하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외화 쿼터를 지급하는 제도가 문예영화의 붐을 이끈 측면이 있지만, 당시 문예영화 현상에는 수익성이라는 요소도 무시할 수 없다. 한해 10편이라는 한국영화 사상 신화적 기록의 시작은 1967년 1월에 개봉한 < 만선 >이다. 그런데 한해 10편이 그저 그런 작품들의 나열이 아니라는 점이 김수용 신화에서 더욱 놀라운 점이다. < 산불 >, < 빙점 >, < 안개 >, < 까치소리 >로 이어지는 스토리의 완결성에 중점을 둔 김수용 문예영화가 한 해에 만들어졌다. 김수용 영화세계에게 1965년이 전환과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1967년은 방향설정과 완숙기라고 볼 수 있다. <만선>과 <안개>는 그런 점에서 김수용 영화세계의 두 방향타를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바로 농어촌 리얼리즘과 도시 모더니즘, 두 개의 방향이다. <만선>은 천승세 작가가 1964년에 발표한 희곡을 원작으로 한다. 이 작품은 발표 당시 자연과 대결하는 한 어민 가족의 굳건한 의지와 비극적 삶을 사실적으로 그린 자연주의 연극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 <만선>은 어부 곰치가 장남과 막내아들에 이어 딸마저 자살해버리면서 세 자녀를 한꺼번에 잃고, 아내까지 정신이상이 되어가는 것을 마주하고 바다로 사라져 버리는 참담한 가족 비극을 각색하면서 엔딩을 바뀌었다. 영화에서는 딸 슬슬이( 남정임 분)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포문을 열고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 목소리는 일련의 사건 이후 바다를 떠나지 않고 일상으로 되돌아간 심경을 전한다. 이로 인해 숙명과 도전, 집착과 벗어남이라는 큰 주제적 갈등 요소가 모호하게 정의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여러 형태의 대립 요소들을 가지고 인간사회의 상징적 축소판으로서 섬마을을 묘사한다. 박정희정권의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끝나고 민정 2기가 시작되는 시점이 1967년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영화 내부로 가지고 와서 살펴보면, 젊음과 방황이 있는 청춘영화 유행이 서서히 저물고 다시 피해의식과 자기연민에 빠진 신파적 감성으로 무장한 멜로드라마들이 60년대 중후반부터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조국근대화라는 떠들썩한 국가적 이벤트에서 밀려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 느끼는 절망감은 과거로 회귀하는 보다 보수적인 양태를 취했다. 다시 말하면, 계층상승의 길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느끼는 소외감과 박탈감이 대중문화에서 연민과 우울의 형태로 표현되는 신파적 감수성의 전면화로 나타나는 것이다. 영화는 어촌마을을 배경으로 아무리 고생해봤자 평생 빚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이를 숙명으로 받아들인 곰치( 김승호 분)가 다시 바다로 나갔다가 아들 도삼( 남궁원 분)을 잃어버리고, 연쇄적으로 비극을 맞이하는 곰치 가족 구성원의 욕망과 좌절을 그린다. 만선으로 돌아와도 선주( 변기종 분)는 과거의 빚을 이유로 몫을 나눠주지 않는다. 곰치의 딸 슬슬이는 어부를 천직으로 알고 성실히 살아가는 연철( 신영균 분)과 사랑하는 사이인데, 여기에 뭍으로 나가 큰돈을 벌어 온 범쇠( 박노식 분)가 끼어든다. 출산한지 얼마 되지 않은 곰치 아내 구포댁( 주증녀 분)은 늘 육지로 나가길 간청했지만 남편의 고집 때문에 물러섰다. 그녀는 장남이 사망하자 아직 갓난아기인 막내아들을 배에 띄워 뭍으로 보내려고 하고, 곰치는 아기를 구하려다가 바다에 빠지고 만다. 아버지와 두 형제,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어머니마저 미쳐버린 상황에서 어촌마을을 지키는 자는 슬슬이뿐이다. 하지만 가난한 어촌마을에서 이런 비극을 마주하는 이는 슬슬이만이 아닐 것이다. 이겨낼 수 없는 좌절의 연속에서도 인물들에게 다시 살아갈 희망이 있을까. 어머니의 품처럼 다시 고요해진 바다를 칭송하는 슬슬이의 목소리에는 체념이 가득하다. 아들들이 사라진 어촌마을에 남은 어머니와 딸, 그리고 인간이 자연에 맞설 수 없음을 경고하는 무당의 모습이 프레임에 채워지는데, 일상으로 다시 복귀한 이들의 광경은 숭고함을 전하며 진한 여운을 남긴다. 인간과 자연의 대결, 빈부간의 갈등, 숙명을 받아들이려는 자와 이겨내려는 자의 갈등 등 묵직한 갈등들이 극단적인 사건들과 함께 펼쳐지다가 서둘러 평화로운 엔딩으로 향하는 것은 조금 갑작스럽게 느껴지지만, 당대의 박탈감과 절망감을 생각하자면 이해가 된다. 바다의 생명력을 자양분으로 다시 일어서는 것 말고 이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사랑이 가득한 어머니에서 두 아들을 잃고 미쳐버린 여인을 연기한 주증녀는 이 영화로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그리고 김수용의 또 다른 걸작인 <산불>로 청룡상 여우주연상을 한 해에 수상했다. 영화는 바다를 벗어날 수도,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던 이들의 서글픈 기록이다. 그리고 이들의 고단한 순간의 풍경은 조국 근대화라는 절체절명의 대의 아래 숨죽이고 있어야 했던 수많은 민초들에게 보내는 연민의 그림이다. >> 만선 고화질 VOD 보러가기 <<
[사진] 영화 <물망초>에서 주증녀 남편 유지 이은 <조국의 어머니> 주증녀는 1950년대를 눈앞에 둔 1949년 3월 윤대룡 감독의 <조국의 어머니>로 스크린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 독립운동을 하던 남편이 일본 헌병에 체포돼 모진 고문으로 죽자 아내가 그 유지를 이어 싸우다가 광복을 맞게 되는, 이른바 이 시기의 특징인 항일 영화이다. 잇따라 황정순, 주선태, 황해, 최남현, 이민 등 신인이 몇 달 사이에 쏟아져 나온다. 이렇게 이름을 알린 주증녀는 16밀리로 찍은 최초의 천연색 극영화 <여성일기>(홍성기, 1949)에 이어 <여인애사>(신경균, 1950), <흥부와 놀부><이경선, 1950) 두 편에 출연한다. [사진] <여성일기> 현장 사진(앞열 왼쪽이 주증녀, 오른쪽이 황정순) 하지만 6.25 전란 후 주증녀가 다시 활동을 재개한 것은 전쟁으로 헤어졌던 연인이 재회하는 김성민 감독의 <애원(哀怨)의 향토>(1954)부터였다. 잇따라 <자유전선>(김홍, 1955), <인생역마차>(김성민, 1956), <애인>(홍성기, 1956), <처와 애인>(김성민, 1957), <실낙원의 별>(홍성기, 1957), <청실홍실>(정일택, 1957), <인생화보>(이창근, 1957), <별아 내가슴에>(홍성기, 1958), <실낙원의 별 후편)(홍성기, 1958), <모녀>(최훈, 1958), <별만이 아는 비밀>(이선경, 1958), <마도의 향불>(신경균, 1958) 등 11편에 기용된다. 대부분이 당시 작고한 김내성의 「애인」, 「실낙원의 별」 류의 인기 통속소설과 방송극을 원작으로 한 것이었다. [사진] <실낙원의 별> 스틸 사진(중앙이 노경희, 우측이 김동원) ‘국산 갱스터 ’(「영화주평」. 『한국일보』, 1956.09.16) 를 지향한 <인생역마차>는 신문기자와 암흑가의 두목(이향, 1인2역) 사이에서 사랑을 선택해야 하는 비운의 여성을 보여 주는가 하면, <처와 애인>에서는 월남한 남편의 외면 속에 참고 견뎌야 하는 실향민의 비애를, <실낙원의 별>과 <실낙원의 별 후편>에서는 애독자(노경희)와 사랑에 빠진 인기 작가 아내(옥영)의 좌절과 반전의 삶을, <청실홍실>과 <별만이 아는 비밀>에서는 전쟁미망인과 딸의 행복을 위해 참고 견디는 애틋한 모성애를 각기 표출해 낸다. 주증녀는 특히 <실낙원의 별>의 호연으로 보다 더 좋은 의미의 대중성을 갖게 되었다. (유동준, 「영화로 보는 실낙원의 별」, 『경향신문』, 1957.09.28.). [사진] <청실홍실>의 한 장면, 좌측은 영화배우 엄앵란(사진제공 김종원) 그 이후 <낭만열차>(박상호, 1959), <그 여자는 행복했던가>(송국, 1959), <아내>(김묵, 1959) 등 주로 여성 멜로물에 출연했으나 자신이 제작한 <그 여자는 행복했던가>(기획 허영)의 흥행 실패와 잇따른 언론계 종사자와의 스캔들로 인해 이미지에 타격을 입게 된다. 그러나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 <고려장>(1963)에 이어 김수용 감독의 <만선>(1967)과 <산불>(1967) 등 1960년대의 출연작에 이르면서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상투적인 내용과 도식적인 인물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작품 선택에 변화가 온 것이다. 재봉틀 일로 가계를 도우며 두 자녀와 가정부의 유혹에 빠진 남편(김진규)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하녀>의 아내, 잘못된 효행의 악습에 따라 산채로 버려져야할 운명에 처한 <고려장>의 할머니, 바다에 나간 두 아들을 잃고, 실성해버린 <만선>의 어머니(곰치 아내), 마을에 숨어들어온 인민군 탈영자를 사이에 두고 다른 과부와 성적 비밀을 공유해야 하는 <산불>의 과부 점례 등 다양한 캐릭터가 그런 예이다. 이 같은 질적 성취는 결국 제5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산불)과 제11회 부일영화상 여우주연상(산불), 그리고 제6회 대종상 여우조연상(만선) 등 세 개의 큰 상을 받게 되는 경사로 나타난다. [사진] <하녀>의 한 장면 [사진] <고려장>의 한 장면 여덟 살 연극소녀에서 은막의 유망주로 강렬한 눈매와 우수의 그늘을 드리운 독특한 마스크로 팬들에게 사랑받은 주증녀는 1925년 2월10일 함경남도 영흥군 엄기면 덕하리에서 태어났다. 부농의 무남독녀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함남여고를 졸업하자 동경하던 극단 고협(高協)에 들어갔다. 1943년 열여덟 살 때였다. 그녀가 처음 무대에 선 것은 <무영탑>(연출 유치진)의 단역인 시녀 구슬아기 역이었다. 이후 <청춘의 윤리>, <맹진사댁 경사> 등 연극에 출연하며 연기력을 다졌다. 이 무렵 그녀는 극단 예원좌(藝苑座)에서 고협(高協)으로 옮겨온 배우 허영(許影)과 눈이 맞아 혼인하고, 대건사(大建社)의 직속극단 청탑(1946년 11월23일~)의 첫 연극 <보검>(3막4장)에 김승호, 허영 등과 함께 출연했다. (『자유신문』, 1946.11,09) 조용하고 섬세하면서도 선이 뚜렷한 그녀의 연기는 보는 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이런 그의 재능은 얼마 못가 새 얼굴을 찾는 윤대룡 감독에 의해 발견된다. 허영 외에 손전과 권일천이 공연한 <조국의 어머니>였다. [사진] <만선>의 한 장면(사진제공 김종원) 이렇게 은막에 진출한 주증녀는 1950년대까지 ‘잘 나가는 배우’로, 60년대 이후에는 ‘연기파 배우’로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다. 그 사이 신변에도 변화가 있었다. 허영과 헤어지고 가십에 오르내리던 언론계 종사자 윤호중과 재혼한 것이다. 하지만 70년대 초반부터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정상적인 연기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1974년 검객영화 <철면객>(이형표, 장청천)에 출연할 무렵이었다. 종합 진단 결과 뇌종양이었다. 수술을 포기한 채 스스로 육체를 갉아먹는 고통 속에서 약물 치료만 계속했다. 다만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열일곱 살 큰 딸이 치는 피아노 소리를 듣는 일이었다. “추석이 며칠 안 남았구나. 추석빔을 마련해야 할 텐데…” 유족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주증녀는 1980년 9월18일 동트는 새벽 6시30분 남편과 1남 1녀, 정들여 가꾼 정원의 나무와 마지막 작품 <청색시대>(1976, 정인엽) 등 3백여 편의 영화를 남기고 25년에 이르는 연기생활을 마쳤다. 당시 56세였다. “예술인마을에 정착한지 벌써 5년이 돼간다. 시골도 아닌 서울의 주택가에 무슨 마을이냐고 하겠지만 기실 이 마을이란 어휘에 나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정감과 향수를 느끼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어쩌면 유일한 안식처가 될지도 모르는 이곳 예술인마을- 이름처럼 황토색 짙은 옛날의 마을은 아닐지라도 서울에서 유일한 ‘마을’이라는 희소가치가 있다.” 이는 주증녀가 뇌종양을 앓을 무렵 영화진흥공사 발행 월간 《영화》(1974년 5월호)에 발표한 수필 「예술인마을 우거기(寓居記)」의 한 대목이다. *
불량소녀 역할로 변신 시도 이후 조미령은 <자유결혼>(이병일, 1958), <여사장>(한형모, 1959), <십대의 반항>(김기영, 1959), <장마루촌의 이발사>(최훈, 1959), <이름 없는 별들>(김강윤, 1959), <이별의 종착역>(박영환, 1960), <박서방>(강대진, 1960), <지상의 비극>(박종호, 1960), <마부>(강대진, 1961), <에밀레종>(홍성기, 1961), <골목안 풍경>(박종호, 1962), <견습부부>(이봉래, 1962), <원효대사>(장일호, 1962), <인목대비>(안현철, 1962), <아빠 안녕>(최훈, 1963), <로맨스가족>(최영철, 1963), <혈맥>(김수용, 1963), <신식할머니>(백호빈, 1964), <홀어머니>(홍은원, 1964) <비무장지대>(박상호, 1965), <주홍 스카트>(이봉래, 1965), <사랑보다 강한 것>(이규웅, 1966), <나운규의 일생>(최무룡, 1966), <역마>(김강윤, 1967), <안방마님>(고영남, 1967), <로맨스 마마>(최인현, 1968), <몽땅 드릴까요>(유현목,1968), <춘원 이광수>(최인현, 1969), <두 아들 2>(조문진, 1981) 등에 출연했다. [사진] <신식 할머니>(백호빈, 1964)에서 조미령 <아들의 심판>(1960, 안현철)에서는 기생(황정순)의 딸로, <원효대사>(62, 장일호)에서는 원효(최무룡)를 따르는 아사다로, <에밀레종>에서는 명종의 완성을 기원하며 백일기도를 드리는 참마루(김진규)의 아내로 출연했다. 그러나 그녀는 <십대의 반항>(1959)을 전후하여 배역의 변화를 꾀한다. 숏커트의 헤어스타일로 건달과 사귀는 뒷골목의 불량소녀(필녀)에서 영문 주간지 『타임』을 읽고 가족들에게 성문제를 스스럼없이 말하는 <신식 할머니>(1963)의 노인으로, ‘여존남비’를 앞세워 전통적인 삶을 거부하는 여성잡지의 독신 <여사장>(1959) 요안나로 나타난다. [사진] <여사장>(한형모, 1959)에 출연한 조미령, 왼쪽은 상대역인 배우 이수련 이울러 그녀는 이지적이기보다는 백치미를 추구한 작품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졸지에 맹진사댁 규수를 대신하여 꽃가마를 타게 된 <시집가는 날>의 대리 신부는 물론, 남편에게 얻어맞고 친정으로 쫓겨 온 <마부>의 벙어리 맏딸(옥례), 재취를 미끼로 구두쇠 영감(김승호)의 전대를 훔치고 도망간 <혈맥>(김수용, 1963)의 벙어리 여인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사진] <혈맥>(김수용, 1963)에서 조미령, 오른쪽은 배우 김승호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조미령은 현대적인 양장보다는 가냘픈 선의 맵시가 드러나는 전통적인 한복 차림이 더욱 돋보인다는 점이다. 학업마저 포기한 여덟 살 소녀의 도전 조제순(趙濟順)이 본명인 조미령은 1929년 2월 4일 경남 마산 출신이다. 일설에는 서울 효자동 태생인 것으로 알려졌다. 여덟 살 때 연극 팬인 언니의 권유로 동양극장의 전속 극단 ‘청춘좌’에 들어가 <임자 없는 자식들>(1937)로 첫 발을 디뎠다. 김승호의 연극 데뷔작이기도 하다. 『한국연예대감』(1962, 성영문화사) 등 일부 인쇄물에는 중학교를 중퇴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학교 문턱을 밟아본 적이 없다. (「비약을 꿈꾸는 여우 조미령, 그는 왜 은퇴를 결심하게 되었나」, 『한국일보』, 1958.11.02) 여덟 살 때 이미 극단(청춘좌)에 들어가 동양극장 후반기의 최대 히트작 <어머니의 힘>(1943, 이서구 원작)에 출연하는 등 해방이 될 때까지 11년 동안 무대생활을 한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조미령은 그 뒤 <해연(갈매기)>(1948)으로 영화계에 첫 발을 디뎠으나 6.25전쟁과 결혼으로 화면에 얼굴을 비치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 대신 변기종이 주도한 상록극회(1951)와 자유극회(1953) 등 연극 단체에서 활약했다. 서울 신당동에 신접살림을 마련하고 두 남매를 키우는 일에만 매달리던 조미령이 <춘향전>으로 다시 카메라 앞에 선 것은 <해연> 이후 5년 만이었다. 남편이 전주(錢主)를 끌어들여 만든 이 영화는 적지 않은 일화를 남겼다. 그 가운데 하나가 조미령의 실신소동이다. 여배우 숙소에 밥을 지어 나르던 중년의 아낙네에 의해 처음 알려진 이 소동은 의처증이 있는 이철혁이 아내가 남주인공인 이민과 심상치 않는 관계로 의심한 데서 비롯되었다. 화가 난 그가 집어 던진 목침이 조미령의 뒷머리에 맞아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것이다. 다행히 숙소에 있던 석금성(월매 역) 등 배우의 간호로 한참 뒤에야 깨어날 수 있었다. (이규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 60년(49)] 난산」, 『중앙일보』, 1980.02.20.) [사진] <춘향전>(이규환, 1955)의 한 장면, 왼쪽은 이도령을 맡은 상대 배우 이민 그런 남편이 그로부터 3년이 채 안된 1958년 3월 16일 밤 갑자기 심장마비로 숨졌다. 당시 46세였다. (「문화소식, 이철혁씨 급서」, 『서울신문』, 1958.03.19) 장례는 20일 아침 열시부터 ‘영화인동지장’(장의위원장 안종화)으로 고인의 자택인 신당동 앞마당에서 거행되었다. (「내외문화단신, 영화인 동지장으로」, 『한국일보』, 1958.03.20) 남편을 잃은 충격으로 영화출연을 삼가던 조미령이 다시 활동을 재개한 것은 김화랑 감독의 코미디 <사람팔자 알 수 없다>(1958)를 전후한 시기였다. 잇따라 중매결혼을 반대하고 자유결혼을 구가하는 <자유결혼>(1958, 이병일)의 셋째 딸 역을 맡아 종전과 다른 활달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진] <자유결혼>(이병일, 1958)의 한 장면, 오른쪽은 배우 박암 사생활이나 대인관계에서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하다는 말을 들어온 조미령은 남편이 죽은 지 4년이 채 안 돼 하와이 이민 2세 최동원과 결혼(1962년)하고 69년 미국으로 떠났다. 그녀 역시 김소영, 김신재 등 선배배우와 마찬가지로 말년을 타국에서 보내야 했다. 처음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다가 브로드웨이의 연극을 볼 수 있는 뉴욕으로 옮겨 10여년을 지내고 1988년 아들딸이 사는 하와이로 건너가 토산품점을 경영했다. 하와이 민속박물관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대지 2천 4백여 평, 건평 1백 12평 규모의 큰 가게였다. 그 사이 ‘영화의 날’(1991년 10월) 행사와 1958년 첫 개봉이후 11년 만에 다시 리바이벌하는 하한수 감독의 <눈 나리는 밤>(1969), 조문진 감독의 <두 아들 2>(1981)에 출연하기 위해 잠시 귀국하기도 했다. 조미령은 무성영화시대에 처음 나온 일본인 하야카와 고슈 감독의 <춘향전>(1923)과 발성영화시대를 연 문예봉 주연의 <춘향전>(1935)에 이어 한국 독립 후 최초로 만든 <춘향전>(1955)의 히로인으로 주목을 받았으나 필름이 보존되지 않아 후대의 최은희(성춘향, 1961)만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하지만 조미령은 분명 해방 후 60년대 초까지 선배인 최은희, 후배 김지미와 더불어 삼각구도를 이루며 한국영화의 중흥에 이바지한 소중한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