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여인
- 감독
- 비토리오 데 시카
- 제작년도
- 1960
- 출연
- 소피아 로렌, 장 뽈 벨몽도, 카를로 닌치, 푸펠라 마지오, 엠마 바론, 안토넬라 델라 포르타, 프랑코 발투치, 토니 칼리오, 루시아노 피고찌, 라프 발로네, 엘레오노라 브라운, 안드리아 체치, 브루스 실티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어떤 장면을 선택하고 버려야 하는지는 언제나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다. 장면마다 미묘하게 다른 표현과 뉘앙스가 영화 전체에 무슨 효과를 가져올지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튀르키예의 여성감독 펠린 에스메르의 2017년 작품인 < 유용한 것 >에 이끌린 것은 이런 이유와 맞닿아 있다. ‘유용한 것’이라는 제목은 과거에 시인이자 변호사로 일하는 주인공 라우라의 삶의 태도에 걸쳐 있는 실존적 질문을 가리키지만, 범위를 넓혀 생각해본다면 필연적으로 무언가를 선별하고 삭제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영화 작업에 대한 지시적인 자문(自問)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영화적 경험에 있어 무엇이 유용한 것이고 무용한지 규정하는 기준은 분명치 않다(하나의 기준이 아니라 복수형의 기준과 판단이 있다는 식으로 회피하기란 쉽지만, 장면은 언제나 하나의 오케이컷만을 요구한다). 어떤 장면은 의미와 상징을 과시하지만, 어떤 장면은 선뜻 유용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쓸모없는 요소들로 잊을 수 없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반대로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순간들로만 이루어진 장면에도 관객이 받아들이는 쓸모와 의미는 불쑥 생성되어 영화적 경험에 남겨진다. 영화는 무의미와 의미가 끊임없이 긴장을 이루며 충돌하는 장소다. 영화 주변을 맴도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그 확신 없는 장소에서 모든 순간 결정을 거듭해야 하는 조건 앞에서 흥분을 느끼거나 불안에 몸서리쳐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감독의 전작인 <연극>과 <망루>를 인상적으로 보았지만, 그것 말고는 별다른 정보 없이 보게 된 작품이었다. 시작하자마자 영화에 사로잡혔다. 일견 산만하게 느껴지는 첫 장면에서부터 영화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하기 위해 기차역에 도착한 변호사 라일라의 예기치 않은 여행을 다루는 이 영화는, 플랫폼 문 앞에서 결혼사진을 찍는 커플을 보여주는 데서 시작한다. 잠시 뒤에 문밖에서 서성이는 라일라의 모습이 보이고 카메라는 화면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움직이는 라일라를 담아내기 위해 그녀의 걸음에 맞춰 좌우로 이동한다.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들려오는 화면 바깥의 목소리는 라일라의 복합적인 성격을 말해준다(“그녀는 낭만적이고, 내향적이었으며, 조금은 사회성이 부족했다”). 짧지 않은 롱테이크로 구성된 첫 장면은 중심적인 영역에서 또 다른 영역으로 시각적/청각적 차원의 초점을 계속해서 움직인다. 이 영화에서 롱테이크의 지속은 하나의 움직임에서 다른 움직임을 불러들이고 여러 가지의 활동을 결합하는 형식이다. 그것은 영화의 화면을 지속적으로 변형하고, 한 인물의 내면을 다른 사람의 얼굴과 대면케 한다. 망설이듯 우왕좌왕하던 라일라가 문을 열고 나선다. 그녀가 문을 열고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데서 시작하는 이 영화는 그러므로 화면을 개방하는 다양한 시도들로 구성되어 있다. 라일라는 고개를 돌려 결혼사진을 촬영 중인 커플을 바라본다. 이 순간에 그녀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커플뿐만이 아니라 우연히 그들 옆에서 촬영에 필요한 액자를 들어주던 카난이라는 어린 여성이라는 것을 인지하기는 어렵지만, 다음 장면에 카난의 아버지가 라일라에게 혼자 오디션을 보러 간 어린 딸을 돌봐달라고 부탁하면서 두 사람은 여행의 경로에서 만나게 된다. 그들은 다른 목적지로 향하지만, 생각지 않게 같은 곳을 경유하고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다. 별다른 말 없이 헤어진 두 사람이 다시 마주치고 대화를 나누는 곳은 야간열차의 내부에서다. 여러 형태의 문으로 형성된 다양한 ‘틈’의 장소다. 라일라는 한밤의 창문을 거울처럼 관찰하면서,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는 카난과 맞닥뜨린다. 창문의 반영과 문틈의 개방은 그렇게 서로 다른 얼굴들을 만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특별한 순간은 야간열차의 식당칸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초반부의 장면에 있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던 라일라와 카난의 옆자리로 우연히 두 여인이 합석하게 된다. 화면에는 라일라와 카난의 대화와 더불어, 합석한 두 여인의 몸짓이 붙잡힌다. 카난이 전화를 받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자, 대화는 테이블에 남겨진 세 사람의 이야기로 전환된다. 라일라는 합석한 이들과 맥주를 마시면서, 연인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고, 기차 칸 뒤편에서 심각한 얼굴로 통화하는 카난에게 시선을 던진다. 보고 듣고 만지고 먹는 일상의 감각들이 통일성 없이 쏟아지는 순간이다. 서로 다른 몸짓과 목소리가 연쇄적으로 발생하면서 이전까지 진행되던 대화가 중단되고 타인의 반응이 화면 내부로 침범하는 것이다. 쓸모 있고 유용한 인물과 대화를 중심에 두고 그 밖의 나머지 것들을 배제하는 구성이 아니라 중심과 주변을 산만하게 뒤섞고 얼굴과 말의 위계를 배척하는 방식이다. 어쩌면 다큐멘터리의 방법을 픽션에 가져온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에스메르는 다큐멘터리로 경력을 시작한 작가이고 주목할 만한 작업인 <연극>은 농촌에 사는 아홉 명의 여자들이 자기 삶에서 가져온 소재로 연극무대를 준비하는 과정을 다룬 작품이었다. 에스메르가 그리는 삶은 다성적이고 소란스러운 목소리들의 권리로 구성되어 있다. 열차가 전하는 매혹은 내부와 외부를 통과하며 무작위로 형성되는 만남에 있다. 누군가 자리를 비우고, 누군가는 우연히 도착하는 장소다. 그런 장소에서라면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무용하거나 비밀스러운 말을 주고받는 낯선 친밀함을 형성할 수 있다. 그것은 영화관에 가는 행위와도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라일라와 카난이 탑승한 야간열차는 이따금 이런저런 이유로 불이 꺼진다. 사람들은 어둠 속에 잠기고 창밖의 풍경과 눈앞에 있는 상대방의 얼굴만이 간신히 보인다. 그런 공간적 조건에서 카난은 처음 만난 라일라에게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배우를 꿈꾸는 지망생이자 간호사인 그녀는 친구를 대신해 죽음을 원하는 남자의 조력 자살을 도와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바로 이런 면모로 인해 <유용한 것>은 의도치 않게 코로나 이후 시기의 영화의 유용함을 생각하게 하는 작업이면서, 고다르의 죽음 이후에 삶의 유용성을 고려하는 영화가 되기도 한다). 그녀의 아버지조차 알지 못했을 카난의 비밀을 듣게 된 라일라의 여행에는 예상치 못한 방향과 성질이 덧붙는다. 그들의 여행은 밤에 속해 있다. 밤의 어둠이 드리운 내밀한 무대는 한시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진다. 인물 뒤편의 유리창 너머로는 아름다운 밤거리의 풍경이 지나가고 있다. 이 시간이 지나간다면, 라일라는 자살을 택하는 남자(그는 라일라와 만나 그녀가 쓴 시집의 독자라는 사실을 고백한다)와 대화를 나누고, 오랜만에 재회한 동창들과 기나긴 말을 주고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밤의 야간열차에서 속삭여지는 말과 다른 성질의 대화이다. 영화가 묘사하는 열차의 풍경들에서 이런 우연한 마주침과 내밀한 대화는 사라져가고 있다. 크리스티안의 펫졸트의 < 트랜짓 >의 마르세유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게오로그는 상처 입은 동승객이 고통 끝에 죽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다. 미코 레베레자의 <노 데이터 플랜>에서 기차 내부의 이민자들은 얼굴을 숨기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목소리로만 나타나고 있다. 카말 알자파리의 <암피옥서스는 멀어요>에서 기차는 도착하지 않고 사람들은 모두 대기실에서 잠들어 있을 뿐이다. 열차는 정치적 망명의 얼룩진 기록으로, 불법 체류자들과 난민들의 피로한 기억이 새겨진 장소로 재편되고 있다. 풍경을 바라보고 지나간 시간을 반추하는 장소의 기능은 희미해진다. 그것은 코로나 시기를 통과한 영화관의 곤경과 유사한 맥락을 갖는다는 점에서, 우리를 다시 영화의 장소라는 문제와 만나게 한다. <유용한 것>에서 변모하는 여행자의 ‘무용한’ 상태는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삶과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건네는 조건이 된다. 그런 얼굴과 목소리를 담아내는 것이야말로 여행하는 영화가 제안하는 삶의 조건일 것이다. 의도를 갖지 않는 무작위에 의한 만남 속에서 영화는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만남을 전제하는 장소들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어디서 영화를 나타나게 할 수 있을까?
1. 대사 “구로사와 기요시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감독이라면 에릭 로메르는 흉내를 내보고 싶은 감독이라고 할까? 영화를 구상할 때 대사를 많이 쓰는 식으로 하다 보니 이것이 나의 약점이라 생각했는데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보면서 이런 식이라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진행된 봉준호 감독과의 대화에서 하마구치 류스케는 자신의 영화와 에릭 로메르의 연관성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의 가장 특징이 대화 장면이 많고 대화 장면이 영화의 핵심을 이룬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언급이다. 하마구치의 스타일을 각인시킨 < 해피 아워 >부터 < 드라이브 마이 카 >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화는 대화 장면을 빼놓고 성립하기 어렵다. < 우연과 상상 >은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단편영화 셋을 묶은 옴니버스 영화인데, 전체가 일종의 대화극으로 이뤄져 있다. 둘의 긴 대화를 어떻게 끌고 가는지, 그들의 말에 어떤 숨은 의미가 있는지 촉각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다. 그들은 모두 무엇인가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을 숨기면서 때론 진실을 때론 거짓말을 한다. 봉준호는 하마구치 영화의 대사가 “무언가를 설명하는 대신 마음의 풍경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하마구치 류스케도 에릭 로메르 영화에서 대사가 설명이 아니라 캐릭터를 보여주는 장치라는 점에 주목했다며 봉준호의 언급에 동의했다. 여기서 하마구치가 대화 장면을 만드는 방식에 관해서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단순히 대사의 양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우연과 상상>의 첫번째 에피소드에서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두 여자를 보자. 자신이 사랑에 빠졌음을 수줍게 고백하는 여자와 사랑에 빠진 친구에게 진심 어린 축하를 하다 그 대상이 자신의 옛 남자친구임을 알게 되는 여자 사이에 작은 틈이 갈라진다. 이어 여자는 자신의 옛 남자친구를 찾아가 사라진 감정과 남아있는 감정 사이에 위험한 줄다리기를 한다. 대사들은 그들이 언제 어떻게 만났고 어쩌다 헤어졌는지 같은 명백한 정보를 주는 대신 그들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게 만든다. 지금 그들의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이야기의 결말도 예상할 수 없다. 세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두 여인의 대화 역시 진실과 거짓이 밀고 당기는 가운데 현재 두 여인의 삶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비슷한 맥락이다. 같은 학교를 다닌 친구였다는 잘못된 정보에 기반한 둘의 대화는 오해를 정정하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시작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스쳐갔던 과거가 아니라 현재 그들의 삶이 마음에 만들어놓은 무늬들이고 대화는 그들의 쓸쓸함, 외로움, 허전함을 온전히 드러낸다. 말이 캐릭터를 성립시키는 사례는 <우연과 상상>의 두번째 에피소드에도 있다. 에로틱한 소설을 낭독하는 여자와 그녀의 목소리에 마음을 빼앗긴 남자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은 폭발 직전까지 고양되지만 상상할 법한 성적 행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엔 그저 말이 있을 뿐이고 목소리가 있을 뿐이다. 말의 강력함은 어떤 노출도 없이, 비견할 데 없이 강렬한 에로티시즘을 형상화한다. 때로 하마구치의 대사는 사람의 폐부를 느닷없이 찌르고 들어오는 비수가 된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죽은 아내와 섹스를 했을 거라 의심하는 남자에게 어떤 말을 듣는 순간을 보자. 주인공 가후쿠는 섹스를 하면서 이야기를 하는 습관을 지녔던 아내가 자신에게만 들려줬다고 믿었던 이야기를 아내의 숨겨둔 애인에게 듣게 된다. 그것도 자신이 몰랐던 후속 이야기까지. 차 안에서 이뤄지는 이 대화 장면은 가후쿠에게 칼로 베이는 듯한 아픔을 준다. 영화가 가후쿠의 리액션 같은 것을 강조하지 않는데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가후쿠가 아내의 외도를 눈 앞에서 목격했을 때 느꼈던 놀라움과 비교가 안되는 충격이 대사를 통해 전해진다. 이것이 가후쿠가 그토록 대면하기 두려워해왔던 진실이다. 하마구치 영화의 대화 장면을 볼 때마다 마음을 졸이는 이유는 인물의 내면에서 어떤 진실이 드러났다 사라지는 마법이 계속 일어나기 때문이다. 때로 무시무시한 형상으로, 때로 요염한 모습으로 하마구치 영화의 매혹이 생겨나는 지점이다. 흔히 좋은 영화는 말로 설명하는 영화가 아니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을 ‘대사가 많은 영화는 좋지 않다’는 일반론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보다 간접적인 표현이 더 영화적이라는 통념과 달리 하마구치의 영화는 많은 대사가 오가는 대목에서 ‘영화적’이 된다. <우연과 상상>의 세 에피소드에서 디테일로 가득 찬 대화 장면 없이 인과 관계의 액션과 리액션만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TV 드라마와 다를 게 없다. 에릭 로메르나 하마구치에겐 대사가 곧 영화다. 2. 연기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박유림, 진대연, 안휘태 등 한국 배우 몇 명이 출연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그들에게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 실제 영화를 준비하면서 <드라이브 마이 카>에 나오는 연기 연습 장면처럼 시나리오 읽은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출연 배우들이 모두 한 공간에 둘러앉아 대사를 읽어가는 것인데 영화에서처럼 감정을 빼고 읽다가 일정한 궤도에 돌입한 뒤에 감정을 넣는 방식으로 진행했다고 한다. 하마구치의 영화처럼 대사가 많은 작품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하마구치의 연기 연출론이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연기를 어떻게 연출하는가에 관해 그가 쓴 책이 조만간 출간될 예정이라 한다). 하마구치는 대사를 온전히 배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이런 방식을 사용한다고 말한다. 일정한 시간과 노력이 합쳐질 때 뭔가를 이뤄내는 순간이 도래한다. <해피 아워>에서 사람이나 사물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작업처럼 연기에도 그런 최선의 지점이 존재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공원 리허설 장면을 보자. 가후쿠는 물론 함께 연습을 했던 모든 배우들이 함께 ‘뭔가 달라진 연기’를 경험한다. 연기에 대한 가후쿠의 이론이 하마구치와 유사한 것이라면 <드라이브 마이 카>는 영화에 대한 영화, 연기에 관한 영화로도 읽힌다. 가후쿠의 이론은 현실의 사람들과 교감을 하면서 더 발전한다. 윤수가 자신의 아내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가후쿠는 윤수의 아내인 배우 윤아로부터 배우들한테도 칭찬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듣는다. 가후쿠도, 배우들도, 미사키도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여는 시작점이다. 공원 리허설 장면과 같은 마법이 정확히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과 반복된 연습과 적절한 자극이 합쳐졌을 때 그런 순간이 온다. 심지어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언어로 말하는 배우들 사이에도 진심 어린 교감이 이뤄진다. 영화에서 가후쿠는 연극 <바냐 아저씨>의 주인공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내면과 너무 가까워서 대면하기 두려워한다. 그가 연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미사키와 함께 홋카이도까지 갔다 오는 것이다. 미사키가 갖고 있는 죄책감의 근원을 함께 발견함으로써 자신도 내면의 어두움과 마주할 용기를 얻는다. 원작자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을 빌리면 타인을 통해 자신의 밑바닥을 들여다 보는 과정인 것이다. 미사키를 통해 가후쿠는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바냐 아저씨>와 정면 대결을 한다. 가후쿠의 여정은 연기와 현실이 하나가 되는 여정이기도 하다. 삶도 연기처럼 숙성의 시간을 지나 마음의 문을 여는 계기가 생기면 예상치 못한 어떤 순간에 기적 같은 순간을 만들어낸다. 3. 비밀 <드라이브 마이 카>는 내내 외면하다 마침내 자신을 정면으로 들여보는 남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워하던 배역에 도전하는 배우의 얘기이기도 하고 아내에 대한 죄책감을 떨치지 못한 남자가 자신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얘기이기도 하다. 문제는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라’고 누가 가르쳐준다고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엔 연습과 시간이 필요하다. 하마구치의 연기론은 어느 정도 삶에 적용해도 좋은 원칙이다. 대사를 연습하는 사람처럼 남의 대사를 듣고 정확한 타이밍에 자기 대사를 내뱉고, 처음엔 그냥 하던 것을 나중엔 감정을 넣어 하고 마침내 사람들 사이에 교감이 이뤄지는 마법 같은 순간이 생겨난다. 여기엔 말할 준비 못지 않게 들을 준비가 됐는가가 중요하다. 상대가 말할 준비가 될 때까지 지켜봐 주고 기다려주는 것. 하마구치는 <드라이브 마이 카>의 중심에 ‘관심’이라는 주제가 있다고 말한다. “이전에는 알 수 없던 것들을 작은 관심을 가지면서 통한다고 느끼게 되는 것처럼 <드라이브 마이 카>를 통해 관심의 힘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가후쿠와 미사키가 서로의 마음을 여는 과정은 관심에 관한 감독의 생각이 실현되는 과정이다. 하마구치는 이처럼 삶의 비밀스런 양상을 드러내는 영화를 만든다. <우연과 상상>에서 우연이 어떻게 우리 삶의 모습을 바꿔 놓는지 보여준 데 이어 <드라이브 마이 카>에선 묻어놓은 과거, 억눌린 욕망, 피하고픈 죄책감 같은 것들이 삶에 새겨놓은 흔적들을 보여준다. 영화 속 대화를 통해 짐작하게 되는 비밀의 조각들, 수면 위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진실의 파편들이 어느 순간 거대한 벽화가 되어 두 눈을 사로잡는다. 하마구치가 그려내는 ‘마음의 풍경’이다.
전투기 편대가 하늘을 가르며 날아간다. 화면을 횡으로 가로지르며 나아가는 비행기의 놀라운 속도감은 꼬리의 연기로 배가된다. 자욱한 운해가 화면을 송두리째 채우고 있다. 은빛 동체의 전투기들 저 아래로 지상은 까마득하게 검붉은 지형으로 보인다. 동체에 선명히 찍혀 있는 ‘R(epublic).O(f).K(orea). AIR FORCE’. ‘대한민국 공군’의 위용을 자랑하며 세 대씩 삼각편대를 구성한 9대의 비행기가 화면의 전방으로 날아 들어와, 가로질러 후방으로 빠져나갈 때 속도감은 최고조에 달하고, 공기와의 마찰음 사운드가 이를 청각적으로 확장시킨다. 그 위에 울려 퍼지는 주제가.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이 경쾌한 행진곡풍의 주제가는 곧 대한민국 공군의 공식 군가로 채택될 터이다. < 빨간 마후라 >의 오프닝 시퀀스는 이 영화가 성취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이 순간의 신상옥의 야심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성공한 색채 공중촬영”, “속도감 있고 박력 넘치는” 화면이라는 1964년 당시 <빨간 마후라>에 부여되었던 평가는 정말로 이 영화의 모든 것으로 보인다. 신상옥 은 한국 전쟁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영화에서 전혀 새로운 공중촬영을 위해 그가 쓸 수 있는 모든 가용자원을 동원한 것 같다(참고로 공군을 소재로 한 최초의 한국영화는 1954년 홍성기 가 감독한 영화 < 출격명령 >이다. 한 여자를 사랑하는 두 공군 파일럿이라는 삼각관계의 멜로드라마와 전우애를 그리고 있는 이 영화에서 공중촬영은 아직 시도되지 못하고 있었다.) 공군의 전면적인 지원으로 공중촬영을 달성해내고 있는 이 영화는 당시 일반적인 영화 한 편당 사용되던 필름 양의 무려 4배에 해당하는 8만 자를 사용하였으며(이중 절반이 생소한 공중촬영의 ‘시험’ 촬영에 소용되었다), 특별히 10배 줌 렌즈가 사용되었고, 고속촬영을 위해 당시 우리나라에는 없던 고속촬영기를 빌려왔다. 이로써 < 성춘향 >(1961) 이래 컬러 시네마스코프라는 당대의 영화적 세계표준시를 성공적으로 시험하고 있던 이 테크놀로지스트는 비행기라는 대상이 보여주는 속도와 높이를 화면에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과연 <빨간 마후라>가 선사하는 것은 칼라 시네마스코프 공중촬영이 만들어낸 압도적인 시각적 쾌감이다. 화면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비행기의 아찔한 활공. 그것들은 종종 급강하하며 폭탄을 투척하고 다시 떠오르는데, 정찰기에 부착된 카메라로 촬영된 이 장면들은 비행기-카메라와 대상인 전투기의 속도라는 이중의 움직임-속도 속에서 놀라운 쾌감을 선사한다. 속도와 높이를 탑재한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의 사물들이란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인다. 지상의 대공포가 하늘을 향하여 포탄을 발사하지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은 간단하게 지상의 사람과 사물들을 제압한다. 덧붙이자면 신상옥은 한국전에서 한국 공군의 활약상을 그려내는 이 영화에서 소위 역사적 고증이라고 할 만한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영화의 전투기는 F-86이고, 클라이막스에서는 미그기와의 공중전이 감행된다. 실제로 F-86 제트기는 한국전 당시 미공군의 주력 전투기였으며(한국 공군의 주력은 P-51 머스탱. F-86은 전쟁 이후 3년이 지나서 한국 공군에 도입되었다), 한국 공군의 인적 물적 자원하에서 공중전은 불가능했다. 참고로 고지전으로 상징되는 지상의 지리한 공방전과 별개로 한국전에서 미군은 전쟁 초기부터 단 한 번도 제공권을 상실한 적이 없었다. 승패의 불확정, 휴전으로 잠정 종결된 이 전쟁을 다루는 할리우드 영화의 대부분이 미공군을 주된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일정 부분 이로부터 기인한다. 즉, 공군 표상 속에서 이 전쟁의 이미지는 승리로 어필될 수 있었다. 1964년의 시점에 보여지는, 한국전 당시 F-86을 타고 지상 폭격과 공중전을 치러내는 대한민국 공군이라는 이 ‘소망적’ 형상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명백해 보인다. 그것은 한국전 당시 미공군이 수행하던 역할을 한국 공군으로 치환시킴으로써, 강력한 (동시에) 현대적인 대한민국의 남성성을 과시한다. 그런데, 이 명백한 표상 전략은 한국 전쟁영화라는 맥락 속에서 조금 더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전에서 미군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전략은 1961년 < 5인의 해병 >(김기덕)이 한국전쟁을 다룬 최초의 전쟁영화로 자리매김한 이래 한국 전쟁영화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문법으로 제시되었다. 외부의 적에 대항하여 오롯이 한국군의 힘으로 내부를 지켜내는 이 문법을 통하여 한국 전쟁영화는 전쟁영화의 본원적인 정치성을 노골적으로 활성화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적과 동지를 가르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슈미트) 위에서 어떻게 내부의 공동체를 창출시킬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된 한편, 이 공동체를 위해 죽어간 자들의 희생을 상기시킴으로써 구체적이고 심정적인 결속으로 나아가는 애도의 공동체 형성과 관련되어 있다. 요컨대 <빨간 마후라> 이전의 두 편의 성공적인 한국 전쟁영화 <5인의 해병>과 < 돌아오지 않는 해병 >은 ‘한국군’과 ‘희생’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를 통하여 대한민국이 어떻게 한국전쟁을 이 정치공동체의 원천적 장소로서 내러티브화하는가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전쟁을 한국군‘만’의 전쟁으로 부각시킬 때, 현재의 이 국가가 이들의 죽음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대한민국이라는 정치체를 공고히 하고자 할 때 여기에는 당연한 말이지만, 필연적인 딜레마가 발생한다. 이 전쟁이 ‘내전’인 한에 있어서 제기되는 적의 이중성과 관련된 문제. 그러니까 이 적은 적이자 또한 ‘형제’이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바로 이 문제와 직면했다. 인민군의 양민학살 ‘이후’로부터 시작하는 (그럼으로 인민군의 형상을 비껴가며 시작하는) 이 영화는 적의 자리에 중국군을 둠으로써 내전이 야기하는 심리적 딜레마를 해소하고자 한다. 산등성이를 가득 메운 중국군이 나팔을 불고 꽹과리를 치며 벌판으로 밀려 내려온다. 롱 숏의 사이즈는 이들을 절대다수의 숫자로만 인식하도록 만든다. 참호 속 아군의 맹렬한 사격으로 달려오는 적들은 번번히 쓰러지지만 저 숫자를 당해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여기에서 감지되는 것은 보병적 전투의 무력감이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죽음들은 <5인의 해병>의 희생 서사를 반복하며, 동일한 공동체의 활성화에 기여하지만 저 쉴 새 없이 밀려들어오는 적을 상대로 한 전투의 무력감은 <5인의 해병>과 달리 이 희생에 기초한 그 어떤 승리의 예감도 봉쇄시키고 있는 것 같다. 어떻게 이를 상쇄시킬 것인가? 1964년의 <빨간 마후라>는 이 순간 한국 전쟁영화가 봉착한 문제에 대한 아마도 가장 ‘탁월한’ 답변으로 보인다. 앞질러 말하자면 그것은 오로지 이 영화가 공군의 영화, 폭격기 조종사의 시점을 도입함으로써 가능해졌다. 보병의 무력감은 지상을 향한 공중에서의 폭격이라는 절대적인 위치의 비대칭성을 통하여 상쇄된다. 비행기가 점유하는 고공의, 속도를 동반한 시선. 이 속도와 높이 속에서 보병적 감각의 무력감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 속도와 높이는 필연적으로 사람과 사물의 고유성의 상실이라고 할만한 것을 동반하는 것이다. 시선의 위치는 너무나 높고, 너무나 빨라서 저 아래 있는 사물들은, 사람들은 거의 분간되지 않는다. 사물들과 사람들이 그 개별성을 상실할 때, 그것이 그저 추상적인 덩어리로 인식될 때 감정은 얼마나 이입될 수 있는가? 당신은 그를, 혹은 그녀를 분간할 수 있는가? 그 혹은 그녀의 얼굴을, 몸을 볼 수 있는가? 만약 볼 수 없다면 당신에게 그 혹은 그녀의 존재란 무엇인가? 그것은 의미를 갖는가, 혹은 그저 무의미한 덩어리에 불과할 뿐인가? 오늘 ‘괴뢰군’이 숨어있는 자신의 고향을 폭격한 조종사는 폭격을 당한 자들 중에 당신의 친척이, 아는 자들이 있지는 않겠는가, 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모르죠, 있었는지도.” <빨간 마후라>가 내전이 야기한 그 어떤 심리적 얼룩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조종사의 대답은 그 어떤 과장도 없이 솔직하고 담백한 것이다. 그의 위치에서 지상의 얼굴들이란 이미 식별 불가능하다. 이 순간 적의 얼굴을 둘러싼 딜레마는 원천적으로 해소된다. 그리고 곧이어 조종사는 이 냉담함을 통해 더 높은 사명으로 가닿는다. “그러나 저는 슬퍼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슬퍼하기 전에 이 비극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찌 되든 싸움에 이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빨간 마후라>는 한국전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그 어떤 영화보다 밝고 명랑하다. 슬픔도, 탄식도, 체념도 없는 이 세계는 누군가의 언급처럼 거의 ‘찬란’해 보일 지경이다. 그것은 ‘모르죠’라는 저 언급이 보여주고 있는바, 얼굴, 개별성, 구체성의 상실을 대가로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구현해낸 스펙터클의 핵심일 것이다. 이 영화는 한국전쟁이 내전인 한에 있어서 가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심리적 부하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영화이다. 그것은 오직 하늘을 나는 자의 시선을 획득함으로써 가능해졌다. 이 시선은 조망하는 시선이자, 편재하는 시선이다. 비행기에 몸을 실은 자는 빠른 속도와 높이를 획득한다. 높이 속에서 사물들과 사람들의 개별성은 사라지고 그것은 그저 지형이 된다. 속도 속에서 사물들과 사람들은 빠르게, 거의 순식간에 뒤로 밀려가며 사라진다. 비행기에서의 시선은 근본적으로 ‘무정한’ 시선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이 시선을 획득한 순간 이 영화는 1960년대의 한국 전쟁영화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냉전 아시아의 문화장이라고 할만한 곳에서 통용가능한 이미지-상품으로 기능하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빨간 마후라>는 대만에서 거의 붐이라 할만한 현상을 만들어냈고(신상옥에 따르면 대만 국책영화를 이끌었던 장개석의 아들 장경국은 그에게 이런 영화를 한 편 만들어줄 수 없겠느냐고 제안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홍콩, 싱가폴, 태국 등지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둬들였으며, 일본 극장(쇼치쿠 계열)에서 정식으로 개봉한 첫 번째 한국영화로 기록되었다. 1960년대 중반 한국영화가 이룩해낸 공중전 스펙터클의 기념비적 이미지는 냉전 아시아에서 통용되는 시각적 보편성의 한 전형이 되었다. 이 지점이 <빨간 마후라>가 우리에게 던지는 마지막 질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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