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들
- 감독
- 조문진
- 제작년도
- 1970
- 출연
- 최무룡, 윤정희, 신성일, 문희, 황정순
이야기는 현실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 속에서 일부만 골라낸 이야기를 영화라고 한다면, 미처 이야기가 되지 못한 나머지 기억들은 기록영상 컬렉션 곳곳에 심드렁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되는대로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나를 웃음거리 정도로 다루지 말아주세요.” [1] 제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세상에 정말 필요한 건 진짜로 연대하고 있다는 느낌이라는 거예요. 스타든, 노동자든, 흑인이든, 유대인이든, 아랍인이든,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 부디 저를 웃음거리로 다루지 말아주세요. 이런 제 신념과 함께 인터뷰 기사를 마무리해 주세요. Steinem, Gloria. Marilyn . New York: H. Holt, 1986, 23. * 마릴린 먼로가 사망 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이 마지막 부탁은 무시됐다. 죽음은 그 자체로 한 인간의 발언권을 몰수하는 사건이다. 죽음의 강을 건넌 사람의 생애를 함부로 규정짓는 것은 자칫 폭력이 될 수 있다. 1926년에 태어나 1962년에 사망한 한 미국인, 노마 진 모텐슨(Norma Jeane Mortenson)과 같이 혼란스러운 생을 살았던 이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도 이 정도는 말할 수 있다. 그녀는 타고난 스타였다. 그녀는 시대를 초월하는 아름다움을 지녔다. 그녀는 일생 내내 유·무형의 성적 폭력에 시달렸고 순탄치 않은 개인사를 겪었다. 그리고 그녀의 언행은 자주 모순적이고 불안정했다. 이 마지막 인상은, ‘시대의 아이콘’이라는 연막에 그녀의 본 모습이 가려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늘상 ‘배우’로서의 자신을 강조했지만 일반적인 연기론과는 다르거나 불분명했다. 성적 매력을 부각시키는 배역 위주로 맡기는 소속 영화사에는 항의하면서도 자신의 아름다움에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에는 행복해 했다. 오히려 유명인사나 거물과 적잖은 염문을 뿌렸으니, 정서적으로 불안하다거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성적 매력을 이용했다는 세간의 평을 듣기에도 충분했다. 그런데, 그녀를 배우 ‘마릴린 먼로’가 아니라 ‘노마 진 모텐슨’이라는 한 사람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는 오해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그녀는 배우라는 탈출구를 통해 자신을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하는 관객들을 갈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외적 아름다움을 포함한 자신의 ‘전체’를 보고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어느 순간에는 ‘밤에는 샤넬 No. 5를 입고 자요’라는 발언이 의도적으로 성적 상상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었을지, 아니면 정말 본인 말대로 피부가 민감해서 옷을 걸치지 않고 잔다는 의미였을지조차 헷갈리게 된다. 영화산업과 언론이 만들어낸 신화적인 이미지가 무려 60년 이상 재생산되고 있다. 이걸 걷어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물며, 본인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하는 상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신혼여행 중 도피한 여배우 6.25전쟁이 끝나고 고작 반 년이 지난 1954년 2월 16일, 서울 여의도공항에 C-54 수송기가 도착하고 마릴린 먼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군위문협회(USO, United Service Organizations)가 해외 파병 미군을 대상으로 한 캠프 쇼(Camp Show) 공연에 출연하기 위해 왔다고 하지만, 이때의 기획은 다소 즉흥적이고 특별했다. 당시 마릴린 먼로는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 (Joseph Paul DiMaggio)와 결혼하고 일본의 도쿄, 오사카 등지에서 신혼여행 중이었다. 이 결혼생활은 해가 가기 전에 고통스러운 파경 으로 치달을 것이었고, 신혼여행 중에도 이미 그 전조가 보였다. 조 디마지오는 신혼여행 중에도 일본 야구팀과의 공식 일정을 진행했고, 마릴린 먼로는 한국의 최전선에 근무하고 있는 미군들을 위해 위문공연을 하기로 결정한다. 신혼여행 출발 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거나 비행기 안에서 제의를 받았다거나 일본에서 전격적으로 결정했다는 등의 여러 설이 있지만 모두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2] 다만, 한국에서의 모든 공연에서 그녀는 보라색 칵테일 드레스 한 벌을 입고 무대에 섰는데, ‘원래 파티장에서 입으려고 가져온 것이고 이것이 무대에서 입을 수 있는 유일한 옷이었다’고 밝힌 것으로 보아 최종 결정 자체는 긴급하게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1954년 2월 1일, 도쿄 제국호텔 기자회견장에서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 부부 출처: 111-SC-452331, National Archives 마릴린 먼로는 2월 16일 여의도공항에 도착한 순간부터 19일까지 3박 4일동안 미군 기지 십여 군데를 순회하며 부대 내 야외 가설무대에서 위문공연을 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2관에서 수집한 기록영상 중에는 미군 촬영병들이 이때의 마릴린 먼로의 모습을 기록한 푸티지가 3점 있다. 이 영상들은 현재 < 미국 NA II 기록영상 컬렉션 (4) > [3] 을 통해 공개되고 있는데, 모두 흑백으로 촬영됐고, 특별한 경우 외에는 음향을 함께 녹음하지 않는 군 기록영상의 특성상 군인들의 환호성과 마릴린 먼로의 음성이 담겨 있지는 않다. 원 소장처에서는 모두 “MARILYN MONROE SHOWS, K-2 AND K-16, KOREA”라는 동일한 제목으로 관리되고 있었는데, 이를 자료원 컬렉션에서는 <1954년 2월, 마릴린 먼로 내한 - 미군부대 순회공연> (A), (B), (C) [4] 로 구분했다. (이하, <영상 A>, <영상 B>, <영상 C>로 지칭하겠다.) 이 부부의 결혼은 ‘세기의 결혼’으로 일컬을 만했다. 결혼과 신혼여행도 평범하지는 않아서 화제성이 충분했다. 하지만 의외로 국내는 물론이고 미국의 신문보도에서도 이 순회공연의 전 일정이 빠짐없이 명시된 기사는 찾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마릴린 먼로 헌정 사이트나 각종 블로그의 내용들은 서로 일치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출처도 분명하지 않다. 그런 면에서 슬레이트 정보와 부대마크가 포함된 기록영상들은 귀중한 근거가 된다. 다만, 이 영상들에는 당시의 몇몇 일정이 빠져 있고 시간 순서대로 묶여 있는 것도 아니라서 정리가 필요하다. 이 영상들과 당대 신문기사를 종합해 마릴린 먼로의 일자별 방문지 순서를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 2월 16일(화) : 여의도 K-16 비행장 도착, 미 제1해병사단 제1보병연대(첫 공연) [5] , 미 제7보병사단 ◦ 2월 17일(수) : 미 제3보병사단, 제40보병사단 제160보병연대, 제24보병사단, 제25보병사단 [6] ◦ 2월 18일(목) : 미 제2보병사단, 제45보병사단 [7] ◦ 2월 19일(금) : 대구 K-2 공군기지(마지막 공연) 이렇게 확인된 일정만 봐도 4일 동안 총 9군데의 미군 부대를 방문했다. 기억에 의존한 일부 블로그 글, 예를 들어 마지막 날 대구 전에 춘천 공연이 있었다든지 하는 것들을 신뢰한다면, 18일과 19일에 각각 최소 2~3군데의 일정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촬영된 부대들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18일까지는 군사분계선을 따라 최전선 부대들을 방문했다고 볼 수 있다. 신문기사들은 공연이 있었던 장소를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서부 전방’(‘Western Front, Korea’), ‘중부 전방’(‘Central Front, Korea’), 그리고 마지막 날인 19일 제45보병사단 기사에서 ‘동부 전방’(‘Eastern Front, Korea’)으로 보도하고 있다. 따라서 마릴린 먼로와 공연팀들은 서울을 기점으로 경기 북부와 강원도의 전방 부대들을 동쪽으로 순회한 후 마지막 날 대구를 비롯한 후방 주요기지를 방문한 뒤 일본으로 귀환했다고 볼 수 있다. 신문보도에 따르면 가는 곳마다 적게는 6,000여 명에서 많게는 13,000여 명의 군인들이 몰려들었다. 17일까지 이틀 동안 집계된 관객수를 6만명 으로 보도한 기사가 있고, 대략 19일까지 총 관객수를 10만여 명 이상으로 추산하는 견해가 일반적인 듯 하다. 영상들은 주로 마릴린 먼로에 초점을 두고 촬영됐지만 다른 전반적인 정보도 함께 담고 있다. 마릴린 먼로는 서울에 도착할 때와 대구 비행장으로 갈 때만 수송기를 탔고, 부대에서 부대로 이동할 때는 군용 헬리콥터를 탔다. 이 위문공연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보이는 밴드 ‘Anything Goes’ 일원들, 남편 조 디마지오의 동료 야구인의 아내 진 오둘(Jean O’ Doul), 그 외에 매니저 역할을 한 장교로 추정되는 인물이 늘 마릴린 먼로와 함께 이동했다. 따라서 이 인원들과 악기까지 감안하면 헬리콥터도 최소 3기가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대마다 사단장급이 나와서 일행을 영접했고 도착 장소에서 한동안 포토타임을 가졌다. 공연은 보통 밴드원들이 노래, 연주, 만담 등으로 분위기를 띄운 후 마릴린 먼로가 등장해 노래를 몇 곡 부르고 군인들과 포토타임을 가지는 식으로 진행됐던 것 같다. 마릴린을 데려와라! - 신경쇠약 직전의 군인들이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 마릴린 먼로는 1953년 한 해 동안 출연한 영화 세 편이 모두 흥행하면서 떠오르는 스타로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영화배우 데뷔 이전에 누드모델로 활동했고, 당시 군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핀업걸(Pin-up Girl) [8] 중 하나였다. 대중문화 접근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졌을 한국의 미군들에게 마릴린 먼로는 영화배우라기보다는 핀업걸로 익숙했고, 사진에서 보던 모델이 현실에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흥분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9] (왼쪽) 미 제1해병항공단 비행대대 “Devil Cats”, 퀀셋 안 벽에 가득 ‘핀업’된 여성 모델과 배우 사진들 출처: 127-GR-223-A345138 , Box 32, Folder 223, National Archives. (오른쪽) 1953년 2월 14일, 미 제9군단 항공관측부대 간이비행장 관제소에서 통신 중인 병사. 창에 ‘핀업’된 여성 사진. 출처: 111-LC-31969, National Archives / 열람: < 미국 NA II 기록영상 컬렉션 (4) > 중 <AERIAL PHOTO MISSION, IX CORPS, KOREA (2)> 2분 40초 지점 하지만 여의도공항에 마중 나온 군인들의 뜨거운 열기는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비정상적인 수준이었다. 이때의 미군 병사들은 물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먼 다른 나라에 와서 3년간 전장을 경험했다. 특히 전방 부대들은 정전 후 7개월이 지난 시점에도 귀환하지 못하고 군사분계선 이남의 방비태세를 정비하거나 잔존하는 전쟁 재발의 위협에 대응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생존의 불안감과 오랫동안 누적된 피로감, 고국의 민간 사회와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이들의 전반적인 정서였을 것이다. [10]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USO가 발족하고 캠프 쇼를 기획했던 것도 바로 파병 군인들의 이런 정서를 달래 사기를 진작하고자 하는 것이었고, 6.25전쟁 중에도 캠프 쇼가 수차례 열렸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렇더라도 마릴린 먼로에 대한 이들의 반응은 한국 땅을 밟은 다른 ‘레전드’급 연예인들 이상이었는데, 그만큼 이때의 미군들이 지쳐 있었고 절실히 귀환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왼쪽) 1954년 2월 18일, 제2보병사단 공연 후 자신이 담겼을 것으로 추정되는 포스터에 사인을 해 주는 모습 (<영상 C>, 3분 58초 지점) (오른쪽) 저마다 카메라를 들고 즐거워하는 제2보병사단 군인들 (<영상 C>, 21초 지점) 한 군인은 너무 당황해서 카메라 렌즈 뚜껑 벗기는 것을 잊었다. 먼로가 뚜껑을 열어주며 말했다. “자기야, 그거 벗기는거 잊었어.” 한국 전역 군부대 PX에서는 필름이 모두 매진되었고 제7보병사단 공연에서는 플래시가 너무 많이 터져, 한 기자가 "공산군들은 제7보병사단이 야간 기동 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보도했을 정도였다. "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끊임없이 터지는 플래시 불빛에 하늘이 계속 환했다." [11] 1954년 2월 16일, 제7보병사단. 무대 조명을 세팅하는 모습(왼쪽, <영상 A> 3분 44초 지점)과 공연 중 플래시가 터진 순간(오른쪽, <영상 A> 4분 29초 지점) 영상에서 비춰진 마릴린 먼로는 여신처럼 군림하는 스타가 아니라 군인들과 팔짱을 끼고 대화를 나누는 ‘친구’였다. 마중 나와 기념사진을 찍은 장교보다는 사병들이 카메라에 추억을 담을 수 있도록 충분히 시간을 내어 주었다. 그녀는 영하의 날씨에도 얇은 어깨끈만 있는 칵테일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올라 헌신적으로 공연을 펼쳤다. 비나 진눈깨비가 온다고 하여 공연을 취소하거나 연기하지 않고 예정대로 진행했다. 제40보병사단에서는 비와 추위로 잠시 무대 뒤로 들어가기도 했지만 이내 다시 나와 공연을 이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 39도의 고열로 앓아누운 것은 이때 무리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12] 지친 병사들은 이토록 친밀하고 친절한 모습으로부터 아마도 위로 또는 이해받고 있다는 감정 비슷한 것을 느꼈을 것이다. 한편 마릴린 먼로가 군용항공점퍼를 입고 헬리콥터나 전차, 지프 등에 올라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은 병사들에게 긴 긴장상태가 끝날 날이 머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줬으리라 생각한다. [13] 한국에서 군인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하러 갔을 때, 그녀는 영하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1만 3천 명의 미군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진심으로 놀라고 감동했습니다. 군인들이 끊임없이 그녀를 부르자, 그녀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추위를 무릅쓰고 어깨끈 없는 드레스 [14] 와 샌들을 신고 무대에 섰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사람들에게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라고 회상했습니다. Steinem, Gloria. Marilyn . New York: H. Holt, 1986, 20. 병사들은 이렇게 억눌렸던 욕구가 해소되고 위로 받는 감정을 폭동에 가까운 격렬한 호응으로 표출했던 것 같다. 영상에 누락됐지만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공연 중에는 무대로 달려들려는 군인들 때문에 안전상의 이유로 공연이 일시 중단되는 상황이 있었다. [15] 이어 가장 격렬했다고 알려진 2월 18일 제45보병사단 공연에서는, 약 6,000명의 군인들이 마릴린 먼로의 차례를 기다리지 못해 앞 순서 공연자들에게 ‘마릴린을 데려와라!(Bring on Marilyn!)’라며 야유를 하고 돌을 던졌다. 결국 마릴린 먼로가 예정보다 일찍 등장하자 이들이 일제히 무대로 달려드는 통에 한 군인이 부상을 당해 구급차에 실려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16] 이런 해프닝들도 있었지만 현장에 있었던 군인들은 한결같이 회고록이나 구술을 통해 이때를 좋은 추억으로 회고하며 특히 마릴린 먼로에 대해서는 ‘최고로 멋진 여성이었다’, ‘여배우지만 겸손해서 놀랐다’ 등 좋은 인상으로 기억하고 있다. 영상에 드러나는 이때의 마릴린 먼로는 ‘추억보정’이라고 하기엔 유별나게 헌신적이었다. 한마디로 스타성과 진정성이 함께 폭발한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54년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야외 무대 ‘Grenadier Palace’ 공연 : 진눈깨비에 가까운 비가 내리자 마이크를 손으로 닦아주는 관계자(위, <영상 A> 7분 7초 시점). 결국 잠시 퇴장했다가 다시 나오는 마릴린 먼로(아래, <영상 A> 7분 21초 시점) (왼쪽) 1954년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공연장에 가득 찬 군인들(<영상 B> 1분 24초 지점) (오른쪽) 1954년 2월 17일, 제25보병사단 공연 장면. 추위에 입김이 나오는 모습 (<영상 C>, 5분 48초 지점) (왼쪽) 1954년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패튼 전차를 타고 퍼레이드하며 공연장으로 이동하는 마릴린 먼로 (<영상 B> 50초 지점) (오른쪽) 1954년 2월 16일, 여의도 비행장에서 첫 공연장으로 향하기 위해 헬리콥터로 옮겨탄 모습. 이 순간에도 다리를 내밀고 포즈를 잡는 모습 (<영상 B> 5분 19초 지점) 마릴린 먼로의 다시 없을 순간 이번에는 마릴린 먼로의 입장에서 바라보자. 이 순간 마릴린 먼로가 미국의 배우이자 엔터테이너로서 국가를 위해 충성한 군인들을 위해 본분을 다 한 것이었다면 ‘프로’로서 존경할 만하다. 하지만 그녀의 때로는 지적이고 때로는 충동적인 발언들, 그녀에 관한 여러 전기들을 보면 그렇게 단순하게만 볼 일은 아니다. 이런 시각은 어떨까? 그녀의 모든 발언은 늘 오해를 살 만 했다. 진심이 립 서비스로 받아들여지거나 화제성을 노린 발언으로 곡해되기 딱 좋은 유형의 사람이었다. 여의도공항에 도착해서 수백명의 군인들을 보고 한 유명한 발언, “내 평생 이렇게 많은 남자를 본 적이 없어요. 남편도 왔으면 좋았으련만.”은 자신의 관능적인 이미지를 활용한 의도적 발언으로 보이기 쉽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이번 여행은 여러모로 제 커리어의 정점이에요.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제가 영화 스타라고 느꼈어요.”라고 말한 것도 스타의 의례적인 발언처럼 들린다. 하지만 공적인 발언에 소심하게 내면의 결핍을 드러내곤 하던 그녀의 성향에 주목한다면 모두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녀가 지인들에게 한, 좀 더 내밀한 발언을 들어보자. “스타라고 느껴본 적이 없었어요.” 그녀는 미국으로 귀환한 후 자신의 무용 선생인 로테 고슬라르(Lotte Goslar)에게 말했다. “정말 진심으로, 한국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그 많은 젊은 친구들이 웃으며 나를 보는 것을 내려다보는 것이 너무 좋았어요. 내가 필요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17] “7만여 명의 군인들이 내 앞에서 목이 터져라 환호하는데...” 먼로는 각본가이자 감독인 벤 헤크트(Ben Hecht)에게 말했다. “...그저 행복뿐이었어요. 집에 온 느낌처럼 .”(“I only felt happy. I felt at home.) [18] 1954년 2월 17일, 제3보병사단에서 군인들과 즐거운 한 때. 다친 오른손 엄지손가락은 신혼여행 출발 때부터 남편의 폭행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19] (<영상 B>, 31초 지점) 이렇듯 가장 뜨거운 대중적 인기를 모으고 있는 여배우이면서도 관심과 애정을 갈구했던 28살의 젊은 마릴린 먼로에게는 어쩔 수 없이 혼란스럽고 비극적인 앞날이 겹쳐 보인다. 극단적 상황 속에서 지칠 대로 지쳐 있던 군인들이 보인 맹목적이면서 순수해 보일 정도의 격렬한 애정표현은 역설적으로 마릴린 먼로의 결핍된 정서를 보듬어 줬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적어도 기록영상에서는 성욕이든, 갈증이든, 관심이든 뭐든, 구분하기 어려운 혼란과 결핍상태에 놓여 있던 같은 처지의 군인들과 여배우가 이 짧은 며칠동안 서로를 위로했다고 느껴진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은 영상 중 한 슬레이트에서 ‘Marilyn Monroe + ME’라는 문구를 보고 촬영자가 벅차는 마음으로 ‘마릴린 먼로와 나(ME)’라고 적었을 것이라고 넘겨 짚었다. 지금이야 그럴 리 없다, 이것이 군 오락(Military Entertainment)과 같은 다른 용어의 약어일 것이다, 등으로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 정도로 영상 속에서 군인들과 여배우의 소위 ‘케미’는 끈끈해 보인다. (왼쪽) 1954년 2월 16일, 제7보병사단의 탈의실 또는 대기실 입구에서. ‘마릴린, 총검사단의 연인(SWEETHEART of the BAYONET DIVISION).’ (<영상 A>, 3분 27초 지점) (오른쪽) 1954년 2월 17일, 제3보병사단. 슬레이트, ‘Marilyn + ME’ (<영상 A>, 16초 지점) 1954년 2월 17일, 제3보병사단 무대에서. (왼쪽: <영상 A> 1분 25초 지점. 오른쪽: <영상 A> 1분 15초 지점) 1954년 2월 18일, 제2보병사단 무대 ‘Bulldozer Bowl’에서. (각각 <영상 C> 4분 1초, 3분 41초 지점) 그리고 여배우들의 인생선이 교차한 순간 마릴린 먼로의 이 역사적인 내한공연은 한국어 콘텐츠에서 보통 다음의 두 가지 꼭지로 소비된다. ‘세상에, 마릴린 먼로가 한국에 왔었다고?’ 아니면 ‘마릴린 먼로가 최은희 와 만났던 것 알아?’. 사실 두 나라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 여배우들의 만남에 대해서는 어떤 맥락도 찾기 어렵다. 심지어 국내 신문에서도 딱히 보도된 기사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 만남은 일정 마지막 날인 19일, 대구 동촌비행장(K-2 공군기지)에서 이뤄졌다. 이 순간은 <영상 A>에 기록돼 있는데, 이로부터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이 영상은 슬레이트 외에는 매우 어둡게 찍혀서 처음에는 인물이 잘 식별되지 않았다. 보통 이런 경우는 아무리 조명 부족 등의 여건을 감안하더라도 실제로 새벽이나 늦은 저녁 등 어두운 시간대에 찍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럴 때 시간대를 반영하면서도 내용이 잘 식별되고 현실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색상을 보정하는 것이 바로 기록영상 색보정의 핵심이다. 색보정 후에 비로소 마릴린 먼로 양 옆에 나란히 서서 카메라를 보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영화배우 최은희, 연극배우 백성희 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사진으로 널리 알려진 바로 그 장면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잘못 퍼져 있는 대표적인 정보 중 하나를 확실히 검증할 수 있게 됐다. 이 대구 장면은 이따금 잘못 안내되는 것처럼 최은희 등이 마릴린 먼로의 ‘입국’을 환영하기 위해 마중 나온 장면이 아니라, 마지막 일정을 앞두고 대구에 도착한 마릴린 먼로를 맞이하러 온, 크게 보면 수일 동안의 공연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환송의 의미로 나온 장면이다. 심지어는 이 장면의 장소를 여의도공항으로 오인하는 내용도 은근히 많이 보인다. 아마도 마릴린 먼로가 군 수송기에서 내리는 모습이 담겨 있어서 이 모든 오해가 시작됐을 듯 하다. 하지만 여러 소스를 교차 검증하고 전체 맥락을 살펴보면 사실이 명확해진다. 1954년 2월 19일, 대구 K-2 공군기지에서. 슬레이트(<영상 A> 4분 35초 지점) 및 세 배우가 함께 한 모습(<영상 A> 5분 18초 지점) 영상에서 마릴린 먼로는 군용기에서 내려와 카메라를 든 수많은 헌병에 둘러싸여 환대를 받는다. 그러고는 환영 인파에 포함돼 있던 두 배우를 만나 함께 팔짱을 끼고 촬영 시간을 가진다. 이때 관계자로 보이는 한국인 중년 남성이 둘 보이는데, 이중 하나가 마릴린 먼로에게 무어라 말하자 ‘Thank you’라고 말하는 입모양이 보인다. 아마도 한국의 두 배우가 마중 나왔다는 설명을 들었을 듯하다. 이 남성들의 존재로 인해 이 만남이 배우들의 의사보다는 어떤 이유로 기획된 것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일정 내내 처음 보는 군인들과 놀랍도록 친밀한 모습을 보였던 그녀도 이 순간에는 딱히 긴 대화를 나누지 않고 데면데면한 모습을 보인다. 이 짧은 장면 이후는 그녀가 주변의 전투기 날개에 올라 원래 그렇듯이 포즈를 취하며 카메라 촬영에 응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 시기의 백성희 배우에 대해서는 의미 있는 정보를 찾을 수 없지만, 최은희 배우는 이때 자신의 여섯 번째 출연작인 신상옥 감독의 < 코리아 >(1954) 촬영이 끝났거나 막바지 단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코리아>는 신상옥 감독의 두 번째 작품으로서, 한국의 각 명승지와 관련된 고사를 극화하여 엮은 문화영화였다. 신상옥 감독은 이 영화를 1952년부터 제작에 착수해 1954년 5월 1월에 개봉하게 되는데, 이때의 인연으로 1954년에 최은희와 결혼한다. 해방 공간에서 신예 영화인으로 주목받던 최은희는 전쟁기를 거치며 여러 가지 사건으로 배우로서의 경력과 개인사 모두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코리아>는 신상옥, 최은희 부부에게 앞으로 펼쳐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영화같은 인생 역정의 출발점이었다. 마릴린 먼로와의 뜬금없는 만남에 대해 구체적인 맥락이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둘의 인생 역정에서 꽤나 비슷한 시기에 조우했다는 생각은 든다. *** [1] 마릴린 먼로의 마지막 인터뷰 중 발언이다. 원어로는 “ Please don’t make me a joke. ”로서,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으나 선정적 이미지나 가십거리로 자신을 단순화하고 규정해 온 언론과 대중에 대한 마지막 호소로 읽힌다. [2] Liesl Bradner (2026. 2. 18), When Marilyn Monroe Interrupted Her Honeymoon to Go to Korea , HistoryNet Retrieved from https://www.historynet.com/when-marilyn-monroe-interrupted-her-honeymoon-to-go-to-korea/ [3] 컬렉션 사이트의 검색 필터 중 ‘미군위문협회(USO)’를 선택하면 이 영상들이 조회된다. [4] 원 소장처의 local ID로 구분하면, (A)는 111-LC-35128, (B)는 111-LC-35129, (C)는 111-LC-35130이다. [5] 제1해병사단 방문 장면은 영상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신문보도 와 스틸사진들이 존재한다. [6] 제24보병사단 방문 장면은 영상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신문보도 됐다. 24, 25보병사단의 방문 순서는 알 수 없다. [7] 제45보병사단 방문 장면은 영상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신문보도 됐다. [8] 핀업걸(Pin-up girl)은 매력적인 여성을 촬영한 사진이나 여성을 묘사한 일러스트레이션 또는 이를 활용한 잡지나 달력 등을 말하며, 주로 벽에 핀으로 고정하고 감상하던 것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제2차 세계대전기부터 군인들을 중심으로 유행했으며, 이후에도 남성 중심의 작업장 등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마릴린 먼로는 미군 기관지 Stars & Stripes 에서 선정한 ‘1951년 미스 치즈케이크’(치즈케이크는 핀업걸의 은어임)였다. [9] 남성 중심의 군대에서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하는 문화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나,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 아키비스트가 실존하는 과거의 기록과 현상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윤색할 수는 없다. 이 글은 ‘바람직함’에 대한 논고가 아니라 시대적 맥락 속에서 미군과 마릴린 먼로가 어떤 결핍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서로를 어떻게 바라봤는가에 대해 주목한 것임을 밝힌다. [10] 미 육군의 TV시리즈 The Big PIcture 중 < USO - Where ever We Go >는 USO의 탄생 배경과 취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군인이 자신이 속했던 민간사회(old civilian)와의 연결을 유지하는 것이 사기를 위해 중요한 것임을 미군 당국도 알고 있습니다”, “USO는 고향의 사람들이 당신을 잊지 않았으며 신경쓰고 있다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군인과 민간의 삶을 연결지어 주는 곳입니다.” [11] Liesl Bradner, 앞의 글 [12] The Daily Record . (Dunn, NC), Feb. 23 1954. [13] 필자 개인의 인상이 포함됐으며 어쩌면 ‘군인과 꽃’ 클리셰를 바라보는 시각과 유사한 안이한 해석일 수도 있다. [14] 정확히 말하면 끈 없는 드레스(strapless dress)는 아니다. 얇은 끈의 드레스를 수사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15] The Daily Record . (Dunn, NC), Feb. 17 1954. [16] The Key West citizen . (Key West, FL), Feb. 18 1954. [17] Liesl Bradner, 앞의 글 [18] Liesl Bradner, 앞의 글 [19] Spoto, Donald. 2001. Marilyn Monroe: The Biography . New York: Cooper Square Press. Originally published New York: Harper Collins, 1993. p.262.
김수용 감독은 1965년에 아동영화 < 저 하늘에도 슬픔이 >로 그해 방화 흥행 1위를 기록하고, 청룡영화상에서 감독상과 작품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곧 이어 개봉한 < 갯마을 >은 평단의 호평과 함께 흥행도 성공하고, 서울시문화상을 비롯하여 여러 영화상에서 감독상과 작품상을 수상했다. 그 전까지 코미디와 멜로를 주로 만들던 김수용은 1965년 성공에 자신감을 얻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계속해서 시도하게 된다. 일명 ‘문예영화’의 시대는 김수용과 함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당시 문예영화는 예술성이 높고 격조가 있다고 인식된 데에다 소설이나 연극으로 인지도가 높아 관객에게 호소하기가 좋은 장점이 있었다. 김수용이 가장 왕성한 창작열을 보여준 1967년은 문예영화의 해이기도 하다. 이 해에 문예영화는 전체 한국영화 제작편수의 20%에 달했고, 대중에게 예술영화로 유통되었던 문예영화가 대중성도 있다는 것을 <갯마을>로 확인한 김수용은 1967년 한 해에만 10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1966년부터 우수영화를 선정하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외화 쿼터를 지급하는 제도가 문예영화의 붐을 이끈 측면이 있지만, 당시 문예영화 현상에는 수익성이라는 요소도 무시할 수 없다. 한해 10편이라는 한국영화 사상 신화적 기록의 시작은 1967년 1월에 개봉한 < 만선 >이다. 그런데 한해 10편이 그저 그런 작품들의 나열이 아니라는 점이 김수용 신화에서 더욱 놀라운 점이다. < 산불 >, < 빙점 >, < 안개 >, < 까치소리 >로 이어지는 스토리의 완결성에 중점을 둔 김수용 문예영화가 한 해에 만들어졌다. 김수용 영화세계에게 1965년이 전환과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1967년은 방향설정과 완숙기라고 볼 수 있다. <만선>과 <안개>는 그런 점에서 김수용 영화세계의 두 방향타를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바로 농어촌 리얼리즘과 도시 모더니즘, 두 개의 방향이다. <만선>은 천승세 작가가 1964년에 발표한 희곡을 원작으로 한다. 이 작품은 발표 당시 자연과 대결하는 한 어민 가족의 굳건한 의지와 비극적 삶을 사실적으로 그린 자연주의 연극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 <만선>은 어부 곰치가 장남과 막내아들에 이어 딸마저 자살해버리면서 세 자녀를 한꺼번에 잃고, 아내까지 정신이상이 되어가는 것을 마주하고 바다로 사라져 버리는 참담한 가족 비극을 각색하면서 엔딩을 바뀌었다. 영화에서는 딸 슬슬이( 남정임 분)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포문을 열고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 목소리는 일련의 사건 이후 바다를 떠나지 않고 일상으로 되돌아간 심경을 전한다. 이로 인해 숙명과 도전, 집착과 벗어남이라는 큰 주제적 갈등 요소가 모호하게 정의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여러 형태의 대립 요소들을 가지고 인간사회의 상징적 축소판으로서 섬마을을 묘사한다. 박정희정권의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끝나고 민정 2기가 시작되는 시점이 1967년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영화 내부로 가지고 와서 살펴보면, 젊음과 방황이 있는 청춘영화 유행이 서서히 저물고 다시 피해의식과 자기연민에 빠진 신파적 감성으로 무장한 멜로드라마들이 60년대 중후반부터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조국근대화라는 떠들썩한 국가적 이벤트에서 밀려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 느끼는 절망감은 과거로 회귀하는 보다 보수적인 양태를 취했다. 다시 말하면, 계층상승의 길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느끼는 소외감과 박탈감이 대중문화에서 연민과 우울의 형태로 표현되는 신파적 감수성의 전면화로 나타나는 것이다. 영화는 어촌마을을 배경으로 아무리 고생해봤자 평생 빚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이를 숙명으로 받아들인 곰치( 김승호 분)가 다시 바다로 나갔다가 아들 도삼( 남궁원 분)을 잃어버리고, 연쇄적으로 비극을 맞이하는 곰치 가족 구성원의 욕망과 좌절을 그린다. 만선으로 돌아와도 선주( 변기종 분)는 과거의 빚을 이유로 몫을 나눠주지 않는다. 곰치의 딸 슬슬이는 어부를 천직으로 알고 성실히 살아가는 연철( 신영균 분)과 사랑하는 사이인데, 여기에 뭍으로 나가 큰돈을 벌어 온 범쇠( 박노식 분)가 끼어든다. 출산한지 얼마 되지 않은 곰치 아내 구포댁( 주증녀 분)은 늘 육지로 나가길 간청했지만 남편의 고집 때문에 물러섰다. 그녀는 장남이 사망하자 아직 갓난아기인 막내아들을 배에 띄워 뭍으로 보내려고 하고, 곰치는 아기를 구하려다가 바다에 빠지고 만다. 아버지와 두 형제,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어머니마저 미쳐버린 상황에서 어촌마을을 지키는 자는 슬슬이뿐이다. 하지만 가난한 어촌마을에서 이런 비극을 마주하는 이는 슬슬이만이 아닐 것이다. 이겨낼 수 없는 좌절의 연속에서도 인물들에게 다시 살아갈 희망이 있을까. 어머니의 품처럼 다시 고요해진 바다를 칭송하는 슬슬이의 목소리에는 체념이 가득하다. 아들들이 사라진 어촌마을에 남은 어머니와 딸, 그리고 인간이 자연에 맞설 수 없음을 경고하는 무당의 모습이 프레임에 채워지는데, 일상으로 다시 복귀한 이들의 광경은 숭고함을 전하며 진한 여운을 남긴다. 인간과 자연의 대결, 빈부간의 갈등, 숙명을 받아들이려는 자와 이겨내려는 자의 갈등 등 묵직한 갈등들이 극단적인 사건들과 함께 펼쳐지다가 서둘러 평화로운 엔딩으로 향하는 것은 조금 갑작스럽게 느껴지지만, 당대의 박탈감과 절망감을 생각하자면 이해가 된다. 바다의 생명력을 자양분으로 다시 일어서는 것 말고 이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사랑이 가득한 어머니에서 두 아들을 잃고 미쳐버린 여인을 연기한 주증녀는 이 영화로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그리고 김수용의 또 다른 걸작인 <산불>로 청룡상 여우주연상을 한 해에 수상했다. 영화는 바다를 벗어날 수도,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던 이들의 서글픈 기록이다. 그리고 이들의 고단한 순간의 풍경은 조국 근대화라는 절체절명의 대의 아래 숨죽이고 있어야 했던 수많은 민초들에게 보내는 연민의 그림이다. >> 만선 고화질 VOD 보러가기 <<
전후 마땅한 일거리가 부족했던 시기 우연히 시작하게 된 조명 일은 그저 공연이 있을 때나 돈을 받는 불안정한 일자리였지만 영화가 번성하면서 그의 인생은 달라졌고 영화와 광고를 넘나들며 종횡무진 활동하는 천직이 되었다. 그는 1930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지주계급이던 부모님 슬하에서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해방 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설 무렵, 집안이 몰락하고 가족들마저 뿔뿔이 흩어졌다. 어렵게 어머니와 생활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북진하는 연합군이 평북을 점령할 당시 그는 치안대에 가담하여 전쟁 속의 전쟁을 겪었다. 전세가 바뀌고 연합군이 남하하던 때에, 그는 어머니와 헤어지게 되었다. "내일 아침에 들어오면 되니 먼저 가라"는 말이 어머니와의 안타까운 마지막 순간이 되었다. 월남하여 가족을 잃은 그가 처가 식구들을 각별히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피난길에 우연히 형을 만나 함께 남하하던 중 연고가 없는 두 형제에게 미군 부대의 노무자로 차출되는 행운이 찾아온다. 미군부대에서의 안전한 생활과 넘쳐나는 물자는 그들에게 커다란 매혹이었고 계속 머무르고 싶은 곳이었다. 그러나 휴전이 이루어진 후 미군부대에 더 이상 있을 수 없게 되자 사회로 나와 일을 찾아야 했고, 그러던 중 주변의 추천으로 시공관의 조명을 담당하고 있던 서영훈을 만나게 되면서 조명 일을 시작하게 된다. <뇌우>와 같은 무대연극이나 무용공연 등의 조명을 담당했는데 1950년대 중반의 조명 사정은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두 개의 탄소봉으로 플러스 마이너스 전극효과를 내 방전시키며 빛을 방사하는 카본아크라이트를 사용했는데 손으로 탄소봉의 거리를 적절하게 유지시키는 게 관건이었다. 심지어 시력에 좋지 않아 젤라틴을 씌우고 작업해야돼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상태에서 감으로만 작업해야 했다. 박진수: 무대조명이라는 것이, 아크라이트라는 것이 뭐이냐면 스포트 쏘는 거 있잖아. 카봉을 태우는 거야. 카봉을 이제 손으로 태워요, 양쪽으로 불을 합선시켜서 태우는 거야. 손으로 조절해가지고. 옛날에는 영사기에도 전부 다 아크로 태웠다고. 이제 그것이 발전이 되면서 전구로 다 바뀌었지. 1 승압효과를 내는 디머는 소금을 탄 물독 속으로 철판을 담궈 사용했다. 삼각형으로 된 철판에 전극을 연결해 서서히 담궜다 뺐다 하며 밝아지고 어두워지는 조명효과를 냈던 것이다. 박진수: 데이꼬가 뭐냐면 승압기, 10볼트에서 100까지 올리는 거야. 이것이 그때 당시 기계가 없었다고. 이걸 뭘로 하느냐. 소금물을 이만한 큰 독에다가 소금물을 탄다고. 소금물을 막 타고 좀 조그맣게 철판을, 구리 철판을 요렇게 잘라요. 요렇게해서 삼각형으로 해개지고 이걸 전기에다가 마이나스 프라스를 두 개를 만들어 가지고 싹 넣게 되면 10볼트에서 100볼트로 올라가는 거야. 하나는 담궈놓고, 마이나스 플라스니까. 플라스도 담궈야되니까. 담그면서 천천히 넣게 되면 천천히 밝아지는 거지. 빨리 담그게 되면 확 올라가니까. 영화에서도 이걸 썼어요. 영화에서도 아침, 새벽에서 아침 넘어오는 과정이라든가 또 해가 진다는 과정을 이걸 많이 썼다고. 그런 식으로 지금은 하래도 못 할 거야. 2 1950년대 중반 영화가 흥하게 되자 어두운 실내에서 벗어나 야외로 나가자는 생각에 서영훈과 함께 영화조명, 기술계의 원로인 김성춘의 문하로 들어가게 된다. 김홍 감독의 1955년 작 <자유전선>(김홍, 1955)의 조명보로 처음 영화작업에 참여한 후 <포화속의 십자가>(이용민, 1956) 등 연이어 김성춘에게 들어오는 작품에 참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화계에 눌러앉게 되었다. 물론 엄격한 김성춘의 조수로 버텨내는 게 힘들어 때로 짐을 싸기도 했지만 꾸준한 노력을 통해 김성춘의 제1조수로,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 조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박진수: 그게(영화 <자유전선>) 얼마 걸렸냐면 한 6개월 걸렸어. 군사영환데 화천인가 가서 했는데. 거기서 그 작품이 한 작품 끝났어. 그 다음에 한 게 <포화속의 십자가>라는 군사영화를 지리산, 지리산에서 <포화속의 십자가>란 영화를 가지고 남원으로 내려갔다고. 이용민 감독, 촬영기사가 임병호 씨 조명은 김성춘 씨가 해서 우리가 다 내려갔는데 그때만 해도 멤버가 굉장했지. 내려가서 한 달, 두 달, 두 달 반 동안 해도 작품이 못 끝났어요. 하다보니까 돈들이 떨어져 개지고 작품이 중단이 됐어. 그래서 중간에 서울로 다 올라왔다고, 카메라 다 잽혀놓고서. 올라왔다가 한 7, 8개월 있었나? 그러다 또 내려간다 이거야. 남원서 내려가가지고 그 작품을 완성시켜 개지고 올라왔지. 남원에서 <피아골>(이강천, 1955)하고 우리가 <포화속의 십자가>를 했어. 지리산에서. 그 지리산에는 그때만 해도 빨치산들이 많았다고. 그러니까 우리 촬영을 나가게 되면은 경찰들이 호위를 했어요. 그 정도로 그때 당시 위험했어요, 빨치산이. 3 [사진 1] 영화 <포화속의 십자가>(이용민, 1956)의 한 장면 당시 견고한 도제체제로 인해 1950년대 후반 김성춘 조명감독의 작품을 도맡아 했지만 좀처럼 조명기사로 데뷔하기는 힘들었다. 한국연예주식회사에서 주로 작업한 임병호 촬영기사의 아이디어로 김성춘이 배상해야 할 전구값 100만 원 대신 그가 작품을 맡는 것으로 협상하여 1959년 김화랑 감독의 <태양의 거리>로 조명기사 데뷔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 한국연예주식회사와 극동흥업에서 함께 작업하게 된 김기덕, 변인집과 연출, 촬영, 조명 팀을 이뤄 충무로에서 소문난 팀으로 활동하게 된다. [사진 2] 영화 <태양의 거리>(민경식, 1952)의 한 장면 기사로 데뷔한 뒤 한국연예주식회사가 제작하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조명을 맡으며 실력을 인정받아가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1960년 4.19가 나기 직전 임화수가 삼성촬영소를 인수하고 외국의 스튜디오를 참고하여 영화사를 확장한 뒤 전속제도를 두려던 시기에 그 또한 당시 최고의 조건으로 임화수와 전속계약을 하게 된다. 박진수: 나한테 제일 좋은 찬스가 한번 찾아왔드랬다고. 그때 임화수가 화양동에 삼성촬영소라는 것을 샀어, 인수맡았어. 그래서 임화수 씨가 한번 오라그래서 갔더니 ‘앞으로 거기에 대한 조명을 너 다 책임지고 너 나하고 전속계약을 맺자.’ 이래개지고 전속계약을 거의 맺었어. 한 달에 월급 얼마, 조수 얼마, 삼성촬영소에 들어오는 작품은 니가 다 맡아서 하고 라이트 관리를 니가 다 해달라. 이런 식으로 해서 나하고 전속계약을 맺었다고. 마쳤는데 마치고 나서 얼마 안 있어서 4.19가 터진 거야. 계약금 내가 그때 돈 100만 원을 받아 가지고 두 작품에 작품 당 30만 원씩 하고 그 기자재 40만 원을 해서 100만 원을 딱 받았다고. 4월 18일 날에. 그때 내가 얼만큼 좋았냐면 내 한달 월급이 40만 원씩 책정을 했다고. 40만 원이면 지금 돈 한 4천만 원 가까이 될 거야. 엄청 컸다고. 딱 받자마자 동대문 창신동의 한일은행인가 그랬을거야. 거길 가서 그걸 찾았어. 그때 당시에 임화수 당좌수표는 현찰 보증수표하고 똑같아요. 가서 100만 원 딱 찾아가지고 이제 집에 왔어. 그 다음날. 그러니까 4.19가 터지니까 당좌수표 정지가 돼놨어. 4 임화수가 몰락하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그는 한국연예주식회사의 멤버들이 참여한 극동흥업으로 옮겨가 극동흥업의 전속 조명기사로 일하게 된다. 극동흥업의 첫 작품 <이복형제>(김화랑, 1961)에 참여했을 때는 제작비가 없어 흥행한 뒤 갚는 식으로 진행했는데 다행히 흥행에 성공했고 연이은 작품들의 성과도 좋았다. 박진수: 극동에서 세 작품 짼가 네 작품 짼가 김기덕 감독이 하는 <5인의 해병>(김기덕, 1961)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고. 김포에 마석이라는데 해병사령부가 있었는데 거기 가서 <5인의 해병>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찍었어요. 모심을 때 드갔다가 한 6개월 이상 걸렸나봐. 모 벼갈이 할 때 나왔어. <5인의 해병>을 종결 했는데 그것이 히트를 쳤잖아. <5인의 해병>이 히트를 처가지고 돈을 좀 번 거야. 그러니까 극동은 하기만 하면 돈 버는 거야. [사진 3] 영화 <5인의 해병>(김기덕, 1961)의 한 장면 그러다 한번은 <노란 샤쓰입은 사나이>(엄심호, 1962) 그거를 계획을 했는데 주연을 한명숙 씨를 가수를 주연을 쓰자. 며칠 찍고 나서 라슈를 딱 보니까 얼굴이 아니야. 이거 갈아야 된다. 그 논란이 많았어요. 차태진 씨는 "안된다 이건 갈아야 된다." 그러고 우리 스탭들은 "그냥 찍자." 그래서 찍었잖아요. 연기력은 아주 없어요. 타이틀이 노래로서는 히트 쳤기 때문에 그걸 만드는 건데. 그것도 하니까 흥행이 잘됐다고. 5 [사진 4] 영화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엄심호, 1962)의 포스터 극동에서 김기덕 감독과 변인집 촬영감독과 함께 충무로에서 부러워하는 단짝이었던 그는 극동과 체인을 맺은 조선일보의 아카데미극장 사람들과 교류하며 친선을 맺기도 했다. 박진수: 조선일보사에서 아카데미극장을 지은게 있다고 광화문에다가. 극동에서 하는 작품은 전부 다 아카데미에다 붙이기로 체인을 맺었다고. 그 당시에 조선일보 사, 아카데미 사장이 방우영 씨라고 거기다 붙이면 잘되는 거예요. 나중에 극동하고 아카데미하고 자매결연 맺어서 한 달에 한 번씩 모임 갖고 술 먹으러도 많이 대니고 낚시도 같이 다니고. 극동이 돈을 많이 벌었어. 6 연이어 작품들이 흥행에 성공하자 극동영화사의 차태진 대표는 무리한 도전을 감행해 영화사를 위험에 빠뜨렸다. 박진수: 극동영화사 차태진 씨가 대만을 갔다오더니 “야 지금 심상복 서커스단이 중국에서 보니까 뭐 곰이 트럼펫으로 노란 샤쓰를 부른다.” 뭐 하여튼 그런 희한한 걸 보고 와 가지고 그걸 수입한다 그거야, 한국에다. 우리는 말렸다고 전부 다. …(중략)… 들여왔는데 그게 이제 동물들이 코끼리, 곰 뭐 이런 동물들이 많으니까 이제 배로 싣고 와서 부산에서 하역을 하는 과정에서 코끼리 한 마리가 빠져죽었어. …(중략)… 창경원에다가 서커스단을 했다고. 했는데 그때 당시에 망하게 되려니깐 장충체육관에서 아이스쇼가 들어왔어. 그거하고 딱 맞붙은거야. 손님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거야. …(중략)… 동물 사육해야지 그 사람들 먹여야지. 돈이 부지기수로 들어가는데 못 당하는 거야. 그때 당시에, 그 낭중에 차태진 씨 사모님이 얘기하기를 “처음에 영화할 땐 돈을 주체를 못 하도록 벌었는데 심상복 서커스단 들어와서 다 망하기 시작했다.” 돈을 댈 수가 없는 거야 낭중에. 중간에 손들어버렸어. 심상복 서커스단이 제작자가 망하니까 중국에 갈 돈이 없는 거야. 그래서 동물을 다 팔고 겨우 차비 해서 자기네 나라로 갔어. 7 극동흥업을 떠나려던 김기덕 감독, 변인집 촬영감독과 그는 차태진 대표의 간곡한 부탁으로 영화사에 남아 극동흥업을 재기시킨다. 박진수: 청춘물 하기 시작했다고 청춘물. 뭐했냐면 <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이니 <떠날 때는 말없이>(김기덕, 1964)니. 작품들이 많이 있잖아요, 청춘물이. 청춘물 했다하면 히트치는거야. 아카데미 극장에 붙이고 그랬는데. 망했다가 다시 나와 가지고 또 이제 일을 또 많이 하니까 돈을 많이 벌었어. 8 [사진 5] 영화 <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의 한 장면 [사진 6] 영화 <떠날 때는 말없이>(김기덕, 1964)의 한 장면 재기에 성공한 극동흥업은 김기덕 감독 외에 유현목, 이형표, 정진우, 임권택, 강민호 등 많은 감독들에게 작품을 의뢰했고 이 작품들의 조명은 거의 다 그가 맡아 책임졌다. 박진수: 60년도 초에 극동 시작서부터 계속 일을 1년에 뭐 거의 한 10여 작품씩 했으니까. 9 극동흥업에서 많은 감독들의 다양한 장르영화들의 조명을 맡았지만 그 중 1967년 김기덕 감독의 특수촬영 영화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는 특히 인상에 남는 작품이자 조명 장비가 열악했던 당시 환경에서 그에게 도전이 된 영화였다.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반의 조명 기자재 상황은 김성춘이 1942년 일본 아라시간주로 프로덕션에서 수입해 온 조명기, 북한영화촬영소에서 노획해 국방부 영화과에서 보유하고 있던 커다란 소련제 조명기와 1956년 아세아재단에서 원조해준 50키로 조명기, 손수 만들어 사용하던 수제 조명기가 전부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1963년 <아낌없이 주련다>(유현목, 1962)로 대종상 조명상을 수상하고 일본에서 열린 아세아영화제에 참석한 뒤 일본 대영촬영소에서 조명연수를 받게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신기자재였던 시네킹 조명기를 들여오게 된다. 광량을 10배나 증폭시킬 수 있는 시네킹 조명기의 도입은 획기적이었다. 영화계에 조명기자재의 부피를 줄이는 동시에 광량을 높이는 것은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인력과 발전기에 대한 부담도 줄고 특히 로케이션 밤 촬영에서의 어려움을 확실히 줄여줄 수 있는 것이었다. 조명감독들은 필요한 조명기를 직접 제작하는 방식으로라도 조명기를 충당했어야만 했다. 그런 연유로 화영공작소라는 수공업적 방식의 공작소가 조명인들에게 항상 회자되는 친숙한 이름이 되었다. 화영공작소의 대표였던 김종철도 김성춘의 문하에서 조명조수로 일하던 시절의 이력을 바탕으로 조명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조명제작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 또한 많은 양의 조명을 이곳에서 주문하여 제작하였다. <대괴수 용가리>에는 많은 양의 조명을 주문 제작했어야만 했다. <대괴수 용가리>는 특수촬영물로 미니어처세트를 이용하였고 고속촬영을 통해 느린 화면을 만들어야 했다. 고속촬영을 위해 카메라의 회전수가 증가하는 만큼 더 많은 광량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당시 세트장에 들어와 있는 전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많은 양의 조명을 만들어야 했다. 결국 실내촬영에서도 발전차를 동원하여 근근이 여러 달에 걸쳐 촬영을 마쳤다고 한다. 특수촬영과 미술에 관계된 일본의 스탭들이 초청되어 제작을 도왔고 처음 시도하는 고속회전촬영 조명에 대해 그는 일본 스탭들의 자문을 빌어 작품에 참여하였다. <대괴수 용가리>는 그를 포함해 국내 영화인들이 특수촬영과 미술에 대한 기술을 전수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사진 7] 영화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의 한 장면 [사진 8] 영화 <대괴수 용가리>의 미니어처 촬영 현장 그는 1972년 영화계를 잠시 떠나게 된다. 영화가 사양길에 접어든 시기였기에 그는 당시 새롭게 부상하는 매체였던 컬러텔레비전에 대한 학습과 훈련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장인인 조택원 선생의 도움으로 1974년 일본의 후지 텔레비전에서 컬러 조명에 관한 연수를 받는다. 박진수는 연수를 마친 뒤 한국으로 돌아와 방송국에 들어가려 했으나 그것이 여의치 않았고, 결국 신상옥 감독의 권유로 다시 영화계로 복귀하게 된다. 그러나 1979년은 이미 영화산업이 점점 쇠퇴해가는 시기였기 때문에 후배의 권유로 MBC 광고제작사업부에서 광고 조명 담당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고, 이후 광고조명 독립사업체를 운영하다 은퇴할 때까지 광고계에 적을 두게 된다. 그는 같은 조명이지만 영화는 그림자를 아름답게 표현해야 하는 예술이고 광고는 그림자를 지워 보이지 않게 만들어야 하는 상반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무대와 영화, 텔레비전, 광고 등 다양한 매체를 모두 경험한 그는 매체를 가리지 않고 모든 조명을 담당할 수 있다며 자신의 실력을 자부한다. 1995년에 그는 한국영화조명감독협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1년 동안 회장으로 지내며 왕성한 활동과 성과를 만들어냈다. 어렵게 협회의 사무실을 얻고 후배들의 일본 기술연수를 진행했으며 1996년 조명아카데미를 설립해 후학들을 양성할 수 있는 기초를 만들어 놓았다. 평생을 조명과 함께해 온 그는 영화와 조명의 관계를 그림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감독이 화폭을 만들어놓고 촬영기사가 그 화폭을 담는 역할을 한다면 조명기사는 빛으로 화폭에 붓질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이런 조명의 중요성을 설파하고자 그는 후진 양성을 위해 기술연수를 추진하고 전문교육기관을 만드는 역할에 열정적으로 매진하였고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조명기사로서 다양한 매체를 섭렵하고 화려한 이력을 지닌 그는, 지금은 일선에서 은퇴하였 지만 '기술자는 정년이 없다'는 말로 영화조명에 대한 의지와 미련을 남겼다. 1) 배수경⋅박진수, 「박진수-조명」, 『한국영화사 구술총서04 한국영화의 르네상스3: 한국영화를 말한다』, 한국영상자료원, 2007, 181쪽. 2) 위의 책, 181쪽. 3) 위의 책, 184~5쪽. 4) 위의 책, 189~190쪽. 5) 위의 책, 199쪽. 6) 위의 책, 200쪽. 7) 위의 책, 200~201쪽. 8) 위의 책, 202쪽. 9) 위의 책, 20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