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쥐
- 감독
- 나운규
- 제작년도
- 1927
- 출연
- 신일선, 주삼손, 윤봉춘, 나운규, 김보신
전택이 (田澤二) 선생은 영화도 다섯 편이나 연출했지만 감독보다는 배우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1958년부터 출연 짬짬이 제작을 하며 메가폰을 잡았으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신파극 <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를 리메이크한 첫 연출작 < 애정무한 >(1958)부터 마지막 작품 < 홍도야 울지 마라 >(1965)까지 그 연장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택이라면, 나이 많은 사람들은 < 망나니비사 >( 김성민 )의 참수인이나 < 춘향전 >( 이규환 , 이상 1955)의 방자 역을 기억하겠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오히려 뒤늦게 발굴된 광복 전의 < 집 없는 천사 >(1941), < 사랑과 맹세 >(1944)의 엿장수나 화물차 운전기사 역할을 더 가깝게 느낄지도 모른다. 나는 전 선생으로부터 들은 몇 가지 얘기를 잊을 수가 없다. 그가 1998년 3월 2일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 그로부터 1년 전과 3년 전 두 차례가 된다. 처음은 그가 사는 충무로아파트(13평) 부근의 어느 다방이었고 그다음은 배우 김일해 선생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찍는 자리였다. 셋이 함께였다. 장충단공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먼발치에서나마 그를 처음 본 것은 1957년 대학 2학년 때였다. 영화인들이 자주 들르던 서울 명동의 나일구 다방이었다. 배우인 아내(노경희)와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그 때 받은 인상은 매우 깐깐하고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전 선생은 80대 중반에 들어선 말년에도 몸단장에 신경을 쓰고 기억력이 또렷했다. 쇳소리가 나기는 했으나 언어 구사도 정상이었다. 영화계에는 1935년 같은 해에 출발했으나 네 살 위인 김일해 선생에게 깍듯이 ‘형님’이라 부르며 스스럼없이 대했다. 노령이라 몸이 불편한 데다 말이 어눌한 그가 기억이 흐려 말을 더듬을 때는 언성을 높여 바로잡아주곤 했다. 아무튼 그때 전 선생이 들려준 회고담에 따르면, 나운규의 < 아리랑 >(1926)은 7권. 45분 정도의 분량으로 1권이 900~1000자(尺)였다고 한다. 영사기는 수동으로 1초당 1자반 정도 돌아갔는데, <아리랑>의 경우는 18~20코마로 돌려 속도에 따라 50분이 넘을 때도 있었다. 주제가 가운데 ‘풍년이 왔네’라는 대목이 ‘좋은 세상’ 곧 ‘독립’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돼 의심을 받기도 했다. 그는 폐병으로 기력이 떨어져 수염도 깎지 못한 채 연출한 나운규 의 < 강 건너 마을 >(1935)로 데뷔하여 < 아리랑 3편 >에 출연하고 <불가사리>의 주인공으로 내정됐으나 < 오몽녀 >(1936)로 기획이 바뀌는 바람에 좌절되고 말았다며 아쉬워했다. < 아리랑 >과 < 풍운아 >(1926), < 들쥐 > < 금붕어 >(1927)를 제작한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사주 요도 도라조(淀虎藏)에 대해서는 경성촬영소를 운영한 와케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조차 무시하지 못한 존재였다고 언급했다. 그가 조선키네마에 앞서 본정(충무로)에 개업한 모자점 ‘요도야(淀屋)’는 아내가 경영했는데, 요도는 아라시 조즈로(嵐寬之郞, 본명 아라시 조사브로) 주연의 연극을 유치하여 황금좌에서 공연한 적이 있다고 새로운 사실을 들려주었다.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을 설립하기 2년 전이었다. 연극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운규 에게 발탁되어 < 칠번통 소사건 > < 무화과 > < 강 건너 마을 >(이상 1935), < 아리랑 3편 >(1936) 등에 출연하며 가까워진 여배우 현방란 (玄芳蘭)의 그 뒤 행방에 대해서도 알게 해주었다. 나운규가 임종할 때까지 병상을 지킨 현방란은 장례식 때 참석한 전라도 출신인 애인 전씨(全氏)와 두 달 만에 살림을 차리고 아들까지 낳았다. 말년에는 치매증세를 보여 청량리 정신병원에 입원했는데, 아들과 수양딸이 찾아와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 일흔 살이었다. 1995년의 일이다. 전 선생은 나운규의 여성관계에 대해서도 털어놓았다. 그중 하나가 1925년 극단 취성좌와 조선악극단을 거쳐 뒷날 한형모 감독의 < 청춘쌍곡선 >(1956)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지방열 (池芳烈)의 부인 강보금 과 관련된 얘기다. 이 여자가 배우가 되고 싶어 나운규가 묵는 개성여관까지 찾아왔는데 어느새 서로 눈이 맞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지방열이 그들이 묵는 여관을 찾아와 각목을 휘두르는 일이 벌어졌다. 마침 이 자리에 있었던 전 선생이 일본도로 위협하여 나운규를 보호한 덕에 봉변을 피할 수 있었다는 일화였다. 전 선생은 이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몸을 사리지 않는 직선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만큼 다혈질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뒷날 아내 노경희 가 < 인생역마차 >(1956)에 출연했을 때의 일이다. 영화에서 신문기자와 암흑가 보스로 1인 2역을 한 이향과 입술을 포개는 키스신을 연기했는데, 그는 자신이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양해 없이 키스신을 연기했다며 이향 을 찾아 충무로의 다방과 단골술집, 영화사를 찾아 나섰다. 어쨌거나 전택이 선생은 나운규 감독이 연출한 17편 가운데 열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말년의 작품 < 강 건너 마을 >로 영화계에 이름을 얹게 된다. 술장사를 하는 여자에게 빠져 남의 돈을 훔쳐 도망가는 농촌 청년 용수 역이었다. 이로써 그는 신일선 , 이금룡 , 윤봉춘 , 전옥 , 김연실 , 유신방 등을 배출한 나운규 문하의 막내 격으로 합류하게 된다. 이후 < 청춘부대 >(1938)를 비롯한 < 성황당 >( 방한준 ), < 국경 >( 최인규 , 1939), < 망루의 결사대 >(이마이 다다시, 1943), < 출격명령 >( 홍성기 , 1954), < 실락원의 별 >(홍성기, 1957), < 돈 >( 김소동 , 1958) 등 114편에 출연하고 1966년 이봉래 감독의 < 무정가 1번지 >를 끝으로 촬영 현장을 떠나게 된다. 그에게 돌아온 배역들은 주연보다 조연이 많았으나 대부분 활달하고 경쾌한 것이었다.
영화에 관해 글을 쓸 땐, 사적인 이야기로 지면을 채우는 것을 많이 주저하는 편이다. 영화 글을 읽는 사람들의 동기는 대체로 글쓴이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그 글이 다루는 영화에 대한 관심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번만큼은 시작하기에 앞서 이 글이 쓰이게 된 배경을 잠깐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작년 연말까지만 해도 난 한국에서 이런저런 글을 쓰고, 작은 규모의 영화 잡지를 만들며 백수와 직업인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던 상태였다. 하지만 대학원 진학을 몇 달 앞두고 마침 뉴욕에 계신 먼 친척분의 집이 비게 되었고, 뉴욕행 비행기의 항공권보다 서울의 여섯 달 치 월세가 더 비싸단 이유만으로 예정보다 조금 빨리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딱히 이곳에 친구가 있던 것도 아니어서, 한국에 수입되지 않은 영화들의 DVD나 블루레이를 구해 보거나, 링컨센터 필름 소사이어티(Film Society of Lincoln Center), 필름 포럼(Film Forum), IFC 센터(IFC Center) 등을 다니며 소일하던 중 한국영상자료원으로부터 ‘뉴욕에서 할 수 있는 시네필 적인 경험’에 대해 써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게 되었고, 이곳에서 새롭게 경험한 것들을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무심코 청탁을 수락하게 되었다. 처음엔 집필 과정이 순탄할 것만 같았다. 장 뤽 고다르가 < 언어와의 작별 >(2014)에서 3D 기술을 활용해 단순한 오버랩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이미지의 중첩을 선보임으로써 영화 몽타주의 영역을 확장하였지만, 한국에서는 부산국제영화제나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은 몇몇 운 좋은 관객들만이 그 순간을 목격할 수밖에 없던 것과는 달리, 뉴욕의 시네필들은 맨해튼의 IFC 센터에서 비교적 오렛동안 매일같이 영화사의 새로운 도약을 지켜볼 수 있었다는 아쉬운 이야기부터, GV가 예정되어 있지 않더라도 회고전 내내 자신의 영화가 상영될 때마다 극장을 찾아 모든 관객의 질문에 성심껏 답하며 크리스 마르케, 알랭 레네, 프랑수아 트뤼포 등과의 일화를 들려준 아녜스 바르다의 이야기라든지, 크라이테리언의 노력 끝에 4K 복원된 사티야지트 레이의 < 길의 노래 >(1955)를 다른 도시의 시네필들보다 먼저 만나볼 수 있었던 것 등등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글을 시작하고 나니 ‘과연 내가 뉴욕에서 경험한 것들이 한국에 있었을 때에 비해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이곳에서 그저 영화를 보았을 뿐이고, 좋은 영화를 만나고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경험은 부산에서 십대를 보내고, 서울에서 이십대를 보내는 동안에도 내가 늘 해오던 것이기 때문이다. 동료들이 뉴욕의 시네마테크들에서 내가 만났던 영화들과 영화인들에 대해 부러움을 표할 때, 나는 한국영상자료원이나 서울아트시네마, 영화의 전당에 앉아 있는 그들을 부러워했다. 밝은 햇빛 혹은 현란한 네온사인이 내미는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깜깜한 어둠 속에 틀어박혀 영화를 보는 것을 선호하는, 어느 프랑스인의 묘사에 의하면 ‘시네마테크의 들쥐들’ 같은 시네필들이 하는 경험이란 결국 어떤 도시에 체류 중인가의 문제가 아닌 어떤 극장을 찾았는가의 문제에 의해 좌우되며, 그것들 사이에 우열 관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 맨해튼 >(1979)을 극장에서 본다면, 그곳이 맨해튼의 필름 포럼이 아니라 상암동의 한국영상자료원이라고 할지라도 당신은 한 시간 반 남짓 우디 앨런의 시선으로 바라본 1970년대의 맨해튼에 있는 것이다. 극장 문이 닫히고 나서 영사기가 돌아가기 시작하기 전까지의 짧은 어둠 속에서 관객들은 이전까지 자신이 속해 있던 세상과 격리되어 곧 상영될 영화의 감독이 설계한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서기 때문이다. 영화에 의해 재구성되고 재창조된 공간은 그곳이 세트였든 아니면 실제 장소였든 간에, 분명 존재하기에 필름에 착상되어 이미지로 재연되었지만, 막상 그것이 촬영된 실제 장소와는 다른 성질을 띠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그렇기에 찰나의 암전 후 영화가 상영되는 세상의 모든 영화관은 엄밀히 말해 일종의 무국적 지대이며, 그 속의 시네필들은 이를테면 국적은 물론 시간과 공간의 경계마저 초월한 그 영역을 유랑하는 초국적의 시민들인 셈이다. 그들이 이미 극장에 들어선 순간 그들에게 자신이 위치한 물리적인 좌표는 무의미할 뿐이다, 유일하게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영화를 보고 있다는 것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네필이 도시 간을 이동하며 여행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서로 다른 장면에서 울고 웃는 타 문화권의 관객들 속에 둘러싸여 있는 체험은 때때로 그들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되기도 하며, 다른 도시를 방문해 그간 영화 속에서 보았던 모습과 실제 장소를 비교해보는 것은 그 영화가 그 도시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것을 영화적 공간으로 구성한 방식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더불어 여행자로서 시네필은 유명한 관광 명소뿐만이 아니라, 일반 관광객들이라면 무심결에 지나칠 법한 곳들에서도 그 장소에 덧입혀진 서사에 기대 감흥을 느낄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킹콩의 사랑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더라도 엠파이어 스테이츠 빌딩의 풍경에서 감흥을 느끼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 이터널 선샤인 >(2004)을 보지 않은 채로 몬타우크에서 감흥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물리 법칙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앞서 나열한 것들과 같은 시네필적 경험을 모든 장소에서, 모든 영화와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필연적으로 각자 다른 영화를 만나며, 내가 만나지 못한 영화를 만날 누군가를 끊임없이 부러워하는 것을 멈출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영화의 곁을 지킨다면, 그래도 영화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형태인지 점차 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앞선 시네필들이 단지 영화를 만들고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서로 다른 경험을 한 시네필들이 서로에게 ‘저는 이 영화를 이렇게 보았습니다.’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부치듯이 쓴 조각들이 모여 감히 혼자서는 완성하지 못할 영화의 지도가 그려지기 시작하고, 그 지도를 보며 후대의 시네필들이 다음엔 어떤 영화를 찾아갈 것인지를 결정하며 새로 써나간 편지들이 모여 이뤄진 것이 어쩌면 시네필의 역사이자, 영화 비평의 역사이며, 영화사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아직은 조금 서투르고 정리가 안 되긴 했지만, 그리고 엉뚱하긴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 그 무엇보다 내가 뉴욕에서 겪은 시네필적인 경험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