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돌이 개
- 감독
- 챠이밍량
- 제작년도
- 2013
- 출연
- 이강생, 시앙-치 첸
<무소주>(2024) 중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금강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차이밍량은 2012년부터 <행자(行者)> 연작을 찍기 시작했다. 장소만 달려졌을 뿐 내용은 모두 동일하다. 리캉성이 붉은색 가사를 입고 약간 고개를 숙인 다음 한 손은 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들어 불가의 공(空)을 표시하고 다른 한 손은 내린 채 펼친 다음, 혹은 마찬가지로 원을 만들어서, 천천히 걷는다. 맥락과 배경, 그리고 거기에 대한 해설을 달 수 있겠지만 영화에서 보는 건 그게 전부이다. 차이밍량은 2013년 < 떠돌이 개 >를 찍은 다음 더 이상 극영화를 찍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언젠가부터 점점 차이밍량의 영화에서 극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부분들이 희박해져 갔다. 그는 < 안녕, 용문객잔 >(2003)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이미 모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행자> 연작을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무대에서 시작되었다. 2011년 타이베이 국립극장에서 300석 규모의 무대에서의 공연을 제안받았다. 세 명의 배우를 무대에 불러 각자의 모노드라마를 올릴 계획이었다. 세 명은 양구이메이, 루이징, 그리고 리캉성이었다. 리캉성에게는 일인삼역을 부탁했는데, 리캉성 본인과, 차이밍량의 아버지, 그리고 현장(玄奘)법사였다. 현장법사는 당나라 시대의 승려이다. 불교 교리를 연구하려고 했지만, 그때 중국에는 불교 경전이 없었다. 그래서 경전을 구하기 위해 천축국(지금의 인도)으로 길을 떠났다. 627년의 일이다. 둔황을 거쳐 천축국에서 불경을 얻은 다음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으로 돌아온 것은 645년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그 여정을 명나라 시대에 신괴소설(神怪小說)로 쓴 오승은 작가의 『서유기』이다. 삼장법사와 세 명의 제자,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과 함께 그들을 기다리는 온갖 요괴와 난관을 헤쳐 나가는 모험극. 하지만 무대에서 리캉성은 무얼 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사각형으로 된 무대 끝 선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차이밍량은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무대에서 한 번 공연한 다음에 사라져 버리는 게 너무 안타까워 그걸 기록하고 싶어졌다. 이 말을 다시 한 번 옮기겠다. <행자>는 영화로 만들어지기 위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기록하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모래>(2018) 중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하지만 무대에서 이미 한 것을 카메라 앞에서 반복하지 않았다. 차이밍량은 리캉성에게 붉은 가사(袈裟)를 입히고 길거리로 데려 나갔다. <무색>(2012)이라는 제목의 첫 번째 <행자>는 2012년 타이베이의 야시장(夜市場)에서 걸었다. 아주 느리게 걸었다. 이 해에 세 편의 <행자>를 더 찍었다. 처음에는 상영시간이 짧았지만, 점점 더 길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덟 번째 <행자> 연작인 <모래>(2018)에서 처음으로 1시간 상영시간을 넘어섰다. 아무 사건도 없고, 아무 이야기도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 대사도 없다. 리캉성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언제나처럼 붉은 가사를 입고 한 손으로 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들고 다른 손을 내린 채 맨발로 몹시 천천히, 아주 느리게, 마치 멈춘 것 같은 속도로 걷는다. 하지만 길거리로 나가자 구체적인 문제와 만나야만 했다. 기후의 가혹한 조건. 환경이 요구하는 한계. 한여름 뜨거운 햇빛으로 달궈지다시피 한 말레이시아 쿠칭의 아스팔트 위를 맨발로 걸었고(다섯 번째 <행자>인 <물 위 걷기>) 추운 한겨울 밤에도 도쿄의 길거리도 맨발로 걸었다(여섯 번째 <행자>인 < 무무면(無無眠, No No Sleep) >). 그래서 차이밍량은 모든 테이크를 단 한 번만 찍었고, 리캉성은 같은 장소에서 두 번 걷지 않았다. <행자>는 정신적인 여정이지만 육체적인 기록이다. < 곳 >(2022), < 무소주 > 중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열 번째 <행자>인 < 무소주(無所住, Abiding Nowhere) >(2024)에서 리캉성은 미국 워싱턴 DC를 걷는다. 아홉 번째 <행자>인 <곳(何處, Where)>(2022)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아농 홍앙시가 등장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만나지 못하고 각자의 일을 각자 한다. 부사(副詞)로서의 각자(各自). 서로 따로따로. 어떤 일? 리캉성은 쉬지 않고 걷고, 아농은 외출하고 돌아와서 면을 끓인 다음 먹는다. 그 둘은 무슨 사이일까. 전주에서 만난 차이밍량은 내게 비밀을 알려주었다. (올해 전주영화제에서 차이밍량 <행자> 전작 회고전을 했고, 차이밍량은 전주에 방문했다. 이때 긴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다. “언지무(言之無)―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 나는 이를 추구한다”, 《필로》 38호, 2024 May_June.) “<행자> 연작 일부분은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 예를 들면 내가 어릴 적에 읽은 『서유기』에 나오는 요괴 같은 개념들을 몰래 넣기도 합니다. 당신에게 알려줄 수는 있지만, 관객들에게 내 생각을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습니다. 확실한 건 <행자> 연작을 찍을 때는 어떤 방법을 통해 표현할지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파리에서 찍은 <곳> 속의 아농은 거미 요괴를 닮았습니다. 그가 리캉성, 그러니까 행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요괴를 닮았습니다. 내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들이 들어있습니다.” 하지만 차이밍량은 거기까지만 비밀을 알려주었다. <무소주>에서 아농이 요괴인지 그렇다면 어떤 요괴인지, 거기까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무소주> 중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무소주>의 마지막 장면에서 석양이 저물어가는 물가를 리캉성이 걷는다. 그때 해가 저물어가면서 물 위로 반사광이 피어오른다. 구태여 비유를 빌리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사바세계(娑婆世界)를 건너서 극락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그때 노래가 흐른다. ‘了悟心性究竟之上師祈請文’. 문자 그대로 옮기면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스승들의 기도’이다. 이 노래가 들릴 때 리캉성은 마치 긴 여정을 마치는 것만 같다. 차이밍량은 베를린 영화제에서 이 열 번째 <행자>가 연작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고 했다. 추신 _ 전주영화제에서 차이밍량에게 열한 번째 <행자>를 제안했고, 차이밍량은 다음 <행자>를 전주에서 찍을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다. 이것이 새로운 <행자> 연작의 첫 번째 영화가 될지, 아니면 열한 번째 <행자>일지, 그도 아니면 번외편이 될지, 또는 에필로그가 될지, 아무것도 정해진 바 없다고 했다. 나는 두근거리면서 기다리는 중이다.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연재를 시작한지 2년이 되었고 완성은 커녕 시작도 제대로 못한 오디오 비주얼 에세이를 마무리 지을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보다 더 쏜살 같은 건 우리 자신이며 한국영화고 시네마 그 자체다. 사실 시간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다. 우리는 시간을 볼 방법이 없다. 움직이는 초침을 보거나 스마트폰의 숫자를 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와 세계를 관찰할 수 있다. 첫 연재 분에서 금정연과 나는 서교동의 콜마인이라는 카페에서 대화를 나눴다. 연재를 위한 기획회의 자리였다. 그리고 지금 카페 콜마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카페 직원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고 폐업했으며 그 자리엔 오버트라는 이름의 다른 카페가 들어섰다. 그 사이 니콜라스 케이지가 부활의 신호탄을 알린 영화 < 미친 능력 >이 개봉했고(졸작) 최동훈의 야심작 < 외계+인 1부 >가 개봉했고(ㅠㅠ) 장 뤽 고다르와 장 마리 스트라우브가 죽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고 서울 아파트 집값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루나코인의 권도형은 도망자가 됐으며 일론 머스크가 트위터를 샀고 윤석열이 해외 순방을 다니고 문재인이 추천한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한 친구에 의하면 문재인과 윤석열은 오바마와 트럼프의 거울쌍이다. 우리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그림자처럼 질질 끌고 다닌다. 완전히 다르지만 완전히 같은 존재, 현실이 아니지만 현실인 곳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아가 픽션처럼, 이미지의 세계 속에서 우리를 조종하고 예견하고 습격한다. 2022년이 끝나가는 지금, 극장에 걸려있는 한국 영화는 < 압꾸정 >, < 데시벨 >, < 올빼미 >, < 인생은 아름다워 >, < 동감 >, < 우수 > 등이다. 내 주변에 이 영화들을 본 사람은 없고 보러갈 사람도 없다. 한국 영화는 괴멸한 것처럼 보이지만(내 주변에서) 잠시 그렇게 보일 뿐인지도 모른다. 며칠 전 청룡영화상에서 박찬욱의 < 헤어질 결심 >이 상을 독차지한 것을 생각해보라. 1960년대 TV의 습격으로 사망선고를 받은 영화는 십년 후 블록버스터 군단으로 세계 문화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러니 OTT도 게임도 두려워할 것 없다. 전 세대의 거장들이 죽었다는 사실에 우울해할 것도 없다. 그보다 더한 거인들도 일찍이 명을 다했지만 영화는 끄덕하지 않았다. 영화는 영웅들의 놀이터가 아니다. 영화는… 영화는……. 지그프린트 지린스키는 과거의 영화를 임대업으로 간주했다. 영화의 본질은 돈을 받고 2시간 동안 특정 공간의 좌석을 대여해주는 것이다. 그에 반해 TV는 사람들이 기계를 소유할 수 있다는데 방점이 찍힌다. 그러므로 TV는 가구이며 인테리어 업종이다. 디지털 이후에는 문학적인 텍스트에만 해당했던 선택적인 명령과 속도, 중단 가능성, 반복에의 의지, 표시와 보관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영화 그 자체가 소유되고 이용되기 시작했다. 시청각의 서적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우상 파괴의 도구로 미디어 이론만큼 유용한 게 없다. 이러한 관점은 경주마처럼 작품 그 자체에만 몰두하는 경향을, 과도한 감정 이입을 막아준다. 극장이 중심인 영화가 임대업이라는 생각으로 돌아가보자. 그렇게 생각하면 OTT가 기승을 부려도 시네마와는 상관이 없다. 사람들은 신체의 부동성을 강제하는 임대 공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극장에 간다. 나윤이 아버지인 금정연씨와 정원이 아버지인 오한기씨가 극장에 갈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TV용 영화가 큰 의미없이 사라진 이유도 여기 있고 OTT 콘텐츠의 질이 떨어지는 이유도 여기 있다. OTT는 개별 콘텐츠가 아닌 리스트의 문제다. 개별 작품은 빨리 감기나 건너 뛰기로 감상하면 된다. 중요한 건 내가 영원히 보지 않더라도 무엇을 볼 가능성이 있느냐다. 선택되지 않은 잠재성, 가능세계가 OTT의 우주를 이룬다. 우리는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하지 않은 것을 소유한다. 반면 극장은 지금 당장 행동하고 선택할 것을 요구한다. 서두르지 않으면 용산 아이맥스는 매진되고 영화는 내려갈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의 시간성에서 중요한 건 러닝타임이 아니라 상영 기간이다. 영화는 점점 더 이벤트화 되고 이 이벤트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OTT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닌자처럼 통장에서 구독료를 가져가게 허락만 해준다면 가능세계는 언제나 당신의 곁에서 당신의 존재론적 불안을 잠재워준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넷플릭스를 보며 시간을 때울 수 있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언젠가 < 수리남 >을 볼 것이다. 언제 볼진 모르겠지만… 그러므로 종말은 없다. 시네마에는 새로운 시작 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원했던 방향이 아닐지라도, 우리가 미디어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미디어가 우리를 사용하는 것이므로. 금정연은 말했다. 한국 사람이 한국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 한국영화가 한국 사람을 만든다고. 영화 이전의 나는 목적도 의미도 불분명한 떠돌이 개에 불과하지만 영화 이후에야 비로소 K정연이 될 수 있었다고, 그게 바로 존 포드가 말한 픽쳐의 의미라고 말이다.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내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2005년, 정성일은 씨네21에 신설된 코너 《전영객잔》에 들어갈 글을 청탁받으면서 당시 편집장인 남동철에게 “꼭 영화에 관한 평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첨언을 들었다. 남동철은 “이제 영화비평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말을 전영객잔의 소개에 덧붙인다. 정성일은 2005년에 쓴 이 글을 2010년에 책으로 묶으면서 5년 동안 상황이 어떻게 후퇴했는지 돌아본다고 쓴다. 아마 영화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봤을 그의 책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의 첫 꼭지에 실린 글이다. 제목은 “영화비평에 대한 근심과 다시 시작한다는 것.” 이제 영화비평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재밌는 말이다. 어느 시대에나 어느 분야에나 반복되는 후렴구이기 떄문이다. 이제 문학비평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제 시를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제 전시를 진지하게... 이제 브릿팝을 진지하게… 하지만 그렇다고 이 후렴구가 언제나 동일한 의미를 갖는 건 아니다. 문학비평의 경우에는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많은 시대가 분명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영화는? 영화에 대한 담론, 영화 글이 진지하게 소비되고 이야기된 시기는 언제일까? 그런 시대가 있었나. 만약에 있었다면 그것은 영화에 대해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남동철이 한탄한 바로 그 시절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제 아무도 안 읽어! 라고 말할 수 있을 때는 아직 누군가 관심을 가지고 있고 책을 읽고 분노하고 절망할 때라는 것이다. 정말 아무도 읽지 않는다면 정말 아무도 읽지 않는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그때는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2005년에 글을 쓴 정성일은 왜 영화비평에 관한 해묵은 수사에 동의한 걸까. 그는 이렇게 쓴다. “위대한 영화를 쓸 때 우리는 위대한 생각을 해야한다. 마찬가지로 하찮은 영화를 쓸 때 우리는 하찮아진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위대함과 하찮음을 점점 구분하지 못한다. 혹은 하찮은 영화 앞에서 자기만 위대한 척한다. 눈이 멀어 갈 때 점점 희미하게 보이는 것을 보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기만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영화비평을 읽는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비평이나 리뷰를 쓰긴 쓰고 읽긴 읽는데 거기에 더 이상 가치가 없다는 사실, 좋음과 나쁨을 구분하지 못하고 기준과 권위가 사라지고 하찮음이 위대함으로 둔갑한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내가 종종 농담 삼아 어둠의 정성일이라고 칭하는 임재철 역시(두 분 모두에게 심심한 사과를) 금정연과 내게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했다. 지금은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시대라고, 영화도 아닌 걸 영화라고 한다고 말이다(인용은 정확하지 않음). 그러면서 그가 우리에게 건네준 책은 V. F. 퍼킨스의 「영화로서의 영화」(1972)였다. 영국의 영화비평가 빅터 퍼킨스의 유일한 단행본인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책은 영화를 판단하는 데 있어 필요한 기준(표준)criteria을 제시하려고 한다.” 그러나 정성일, 임재철 두 선생님의 훌륭함과 무관하게 나와 정연씨가 하려고 했던 것은 그와 정반대의 것이었다. 처음 작가로 활동할 때부터 그랬고 영자원 연재를 시작하고 한국영화에 대한 오디오 비주얼 에세이를 만들기로 결심한 순간에도 그랬다. 우리는 기준을 제시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것이 단지 교란, 전복, 위반, 철폐와 같은 의미가 아니라 기준과 규칙, 권위, 규범 이후에도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개별의 특수성들이 특수성인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공통의 무언가를 실현할 수 있는 세계를 원했다. 취향, 상호존중 따위로 퉁 쳐지는 것이 아닌, 새로운 영화경험. 쑨거에 따르면 1950년대 말 미국 지리학자들 사이에서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각 지역의 독특한 상태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지, 모든 지역이 공유하는 지리적 특징을 수집해야하는지 여부였다. 이 논쟁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불러왔다. “특수성의 상태로 재현된 대상이 일반적 규칙으로 다듬어지거나 추상화되지 않은 채 여러 사람을 연결하는 고리가 될 수 있을까요?” 이때 리처드 하트숀은 유사성에 대해 인습과 다른 정의를 내리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가 정의하는 유사성은 “서로 비슷한 지엽적인 부분을 쳐낸 후 남은 주요 차이”였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유사성은 “서로 비슷한 성질”인데, 유사성이 바로 차이라니 이게 무슨 말일까. 어떻게 특수성들 속의 차이가 우리를 연결하는 보편적 고리가 될 수 있을까. 좋고 나쁨, 옳음과 그름을 구분하고 분별하지 않는 기준이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얼마전에 만난 강보원은 내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요즘 심심해서 Dbpia에서 금정연과 정지돈이 과거에 쓴 글을 보는데요, 아니 이 사람들이 자꾸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있더라구요. 거기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이미 다 지난 일이지만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이러는 거죠. 아니, 자꾸 그러지마, 그걸 왜 열어, 이사람들아.” 글쎄, 그걸 왜 열까. 하지만 중요한 건 이 말을 하는 강보원이 웃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올해는 나에게 충만한 한 해였다. 무엇보다도 오랜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단지 영화를 보았다는 뜻이 아니라 정말 그 영화를 만든 사람들을 만났다는 뜻이다. 그리고 왕빙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가까스로 완성할 수 있었다. 지난해와 달리 올해 나의 영화를 고르면서 순식간에 16편의 제목을 썼지만 규칙에 따라 아쉽게도 6편의 영화를 명단에서 제외시켜야 했다. 만일 내일 다시 고른다면 이 중 몇 편의 영화가 빠지고 그중 몇 편의 영화가 들어갈지도 모른다. 언제나 그렇지만 나는 이 명단을 만들기 위해서 어떤 배려도 하지 않았으면 어떤 균형도 잡을 생각이 없었다. 그냥 지금 떠오르는 대로 그저 내 두뇌 속의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명단을 차례로 적어나갔다. 차라리 이 명단은 베스트 10이라고 부르는 대신 ‘나의 몹시 사적인 동시상영관’이라고 부르는 편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들의 목록에서 내가 말하고 싶은 영화는 < 무무면 >이다. 이 영화가 올해의 나의 (단 한 편의) 영화는 아니다. 그러므로 오해하지 말아 주었으면 고맙겠다. 하지만 올해 이 영화를 가장 오랫동안 끈질기게 생각한 것은 사실이다. 나는 올해 차이밍량의 < 행자 行者(Walker) > 연작을 일거에 볼 기회가 있었으며, 또한 그가 이 영화를 확장시켜 무대에서 진행한 <삼장법사>를 눈앞에서 볼 기회가 있었으며, 게다가 8개월의 시간 차이를 두고 두 번에 걸쳐서 만나 그의 작업에 대해서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행자> 연작은 (차이밍량의 영화 작업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 떠돌이 개 >를 본 다음 아주 우연히 유튜브에서 보게 되었다. 이 작품을 여기서 보게 되었다고 말하자 무슨 말에도 친절한 차이밍량이 갑자기 안색이 어두워지면서 가장 나쁜 방법을 선택했다고 거의 나무라듯이 내게 말했다. 그런 다음 약간 덧붙였다. “이 영화는 극장에서 보아야만 해요. 이 영화를 일상생활 바깥에서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반문했다. “당신은 영화를 이제 버린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차이밍량은 파안대소를 하면서 대답했다. “아니요. 그건 잘못된 소문입니다. 아마 내 이야기를 들은 기자가 부주의했음이 틀림없어요. 나는 단지 상업영화들이 배급하는 방식을 더 이상 선택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그건 정말 다행한 일입니다.” < 행자 >는 단순하다. 당나라 승려 삼장법사가 천축에 가서 불경을 가져오기 위해 여행을 한다는 데서 모티브를 가져와 이강생이 낡고 남루한 승복을 입고 그저 천천히 홍콩의 침사추이를, 프랑스의 마르세유 거리를, 커다란 한지 위를, 얕게 깔려있는 물 위를, 동경의 밤거리를 아주 느리게, 천천히, 때로는 멈춘 듯이 걸어간다. 여기에는 다른 어떤 이야기도 없다. 물론 이 작업에 대해서 매우 복잡한 이론을 열거할 수 있다. 여기서는 그러고 싶지 않다. 만일 그러다가 내가 여기서 가져본 어떤 마술적인 기분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감돌기 때문이다. <행자> 연작은 매우 가냘픈 작업이다. 어딘가를 잘못 건드리면 순식간에 부서져 버릴 것만 같다. 대신 내가 느껴본 것을 말하고 싶다. 맨 처음 보았을 때는 두 가지를 의식하게 된다. 거의 슬로우 모션처럼 걸어가면서 다른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걸어가는 보행 사이에서 서로 다른 속도가 마치 두 개의 세계처럼 느껴진다. 이강생은 거의 멈춘 것처럼 걸어가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강생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풍경에로 눈을 돌리게 된다. 하지만 카메라가 거의 멈춰있기 때문에 이제 풍경 위로 흘러가는 날씨의 조건을 보기 시작한다. 거기 떨어지는 햇빛, 혹은 지나가는 구름. 이강생은 구름이 지나가는 것보다 더 느리게 걸어가기 때문에 그의 걸음 위로 구름이 지나가면서 때로 햇빛을 가렸다가 다시 화창한 날씨를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그때 우리가 보는 것은 더도 덜도 아닌 시간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시간을 이야기했고, 또 많은 예술가들이 시간 속에서 작업을 해왔다. 차이밍량은 시간을 다룬다기보다는 그것을 음미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는 오래전부터 시간 안에서, 곁에서, 사이에서, 뒤에서 영화를 어디에 놓아야 할지를 고심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영화 안에 시간을 놓아두고 싶어 한다. < 떠돌이 개 >는 그의 영화에서 하나의 끝이 아니라 시작의 자리에 가져다 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 영화는 마치 자신의 제목처럼 영화관이 아닌 다른 장소를 찾아 떠돌아다녔다. 나는 이 영화를 전혀 다른 장소에서 세 번 보았다. 세 번째는 광주 한복판의 전남도청 강당에서 한밤중에 보았다. 올해 광주 예술극장 개관행사 중의 하나였다. 이 장소의 역사적 의미를 당신에게 다시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강당은 이미 어두웠고 여기저기에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차이밍량은 마치 보물찾기 하듯이 일일이 나를 데리고 다니며 소개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 장소가 지닌 1980년 5월 그날의 의미에 대해서 차이밍량에게 설명했을 때 자신도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런 다음 덧붙였다. “그분들(의 영혼) 중의 누군가 오늘 밤에 이 영화를 보러 와 주셨으면 좋겠군요” 그 말을 듣고 문득 강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차이밍량은 가볍게 안아 주었다. <떠돌이 개>는 더 많이 이야기되어야 한다. < 행자 >를 시작하기 위한 이 위대한 거절. 마치 이 영화는 내게 허우 샤오시엔에게서 <남국재견> 같은 결단으로 다가왔다. 예술가들에게서 두 번째 데뷔작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차이밍량은 왜 그럴 필요가 생겨난 것일까. 두 번째를 말할 차례이다. 내게는 이게 더 중요하다. 홍콩에서 진행된 < 행자 >는 이 작업이 영화 안에서 진행된 퍼포먼스인지 반대로 퍼포먼스를 영화가 기록한 것인지 쉽게 분간하기 힘들었다. 물론 차이밍량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게 찍었다. 이런 종류의 작업을 미술이 했을 때 나는 언제나 실망했고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차이밍량은 어디 서 있어야 할지 잘 알고 있었고, 얼마나 멀리 있어야 할지 잘 알고 있었으며, 언제 시작해서 언제 멈춰야 할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 무무면 >에서는 새로운 단계가 도입되었다. 갑자기 카메라는 이강생을 내버려두고 전철에 올라탄 다음 창문 바깥을 우두커니 바라본다. 심야에 달리는 이 전철 바깥으로 풍경이 하염없이 흘러간다. 나는 이 역의 출발역과 도착역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지상철인 이 열차는 하염없이 흘러가는 풍경을 보여줄 뿐이다. 카메라는 창문과 정확하게 수평을 이루기 때문에 전철 안의 어떤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어둠 속에 잠겨있는 도시는 어떤 지표도 노출하지 않고 그저 어둠과 불빛의 풍경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지나쳐갈 뿐이다. 이걸 바라보다가 문득 영화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찍은 영화를 이미 이전에 본 적이 있다. 오귀스트와 루이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 대부분 영화사 책은 <기차의 도착>과 <공장에서의 퇴근>만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뤼미에르 형제의 다른 영화를 보지 않는다. 뤼미에르 형제의 전작을 본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만든 영화를 잠시 동안 파리에 머물 때 시네마테크에서 하루 종일 볼 기회가 있었다. 그때 그 영화들이 보여준 것은 모든 대상들은 이미지로 지각되고 모든 이미지는 대상의 감흥을 불러일으킨다는 배움이었다. 영화의 문법이 잃어버린 것은 그 배움이다. 21세기가 되었을 때 일부의 예술가들이 그것을 다시 불러일으키기 위해 애를 썼다. 차이밍량은 그 대열에 합류하고 있는 중이다. 일시적이긴 하지만 나는 그것을 뤼미에르 효과(Lumiere-effect)라고 부르는 중이다. 영화에서 유일한 진실은 영화 스스로 활동한다는 사실이다. 그때 그 활동은 영화의 시간이며 생명이다. 나는 점점 더 두 개념 중에서 후자에 이끌린다. 무엇이 영화에 생명을 부여하는가. 어쩌면 이 열 편의 영화들은 그 질문에 대한 각자의 방식의 대답일 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이 열 편의 영화는 좌표의 의미이며 표류하고 있는 내게 등대선들이다. 그들이 비춰주는 빛. 그 가냘픈 빛. 하지만 그 빛이 없으면 어떻게 내가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