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개질
- 감독
- 윤은혜
- 제작년도
- 2012
- 출연
- 이상희
영화가 시작되고 30분쯤 지나면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이미지들이 나타난다. 얕은 부감으로 촬영한 것뿐인 대화 신이다. 이 신은 카메라와 대상 간의 거리 감각을 왜곡하는 것을 목표로 찍혔는데 두 인물의 대화를 보여주기 위함인지 카메라는 처음에 시계 반대 방향으로 패닝하다가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카메라의 회전 방향은 불규칙하게 흘러간다. 이 신이 낯설어 보인다면 연출자 에두아르도 윌리엄스가 360도 VR 카메라, 즉 중앙에서 바깥쪽으로 방사되는 여덟 개의 렌즈를 사용하여 영상을 촬영하는 구형 카메라로 촬영했기 때문이다. VR 카메라의 특성과 작업방식 덕분에 윌리엄스는 후반 작업을 할 때 신의 구도를 설정할 수 있었다. 이는 촬영할 때와 다른 형태로 장면을 구성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지의 형태와 질감, 조형에 있어 실험을 멈추지 않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신가 윌리엄스는 10년 간의 커리어 동안 노마드와 같은 여정을 통해 다양한 테크놀로지를 도입해 왔다. 디지털과 셀룰로이드 포맷(16mm)을 혼합하여 촬영한 < 인류의 상승 >(The Human Surge, 2016), 고프로(GoPro) 360으로 촬영하여 < 인류의 상승 3 >로 진화하는 단초를 제공한 초현실적인 질감의 단편영화 <파르시>(Parsi, 2019), 내시경 카메라를 내장 기관 속으로 삽입하여 인체 해부도를 그려낸 <매우 긴 지아이에프>(A Very Long GIF, 2023)까지, 하나같이 영화 표현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시도들이다. 글로벌 환경 아래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불안한 젊은이들의 행적을 연결한 <인류의 상승>과 마찬가지로, <인류의 상승 3>는 페루, 스리랑카, 대만에서 정처없이 떠도는 청년들의 삽화를 뜨개질한다. 중심 서사랄 것이 없는 이 영화는 국가, 캐릭터, 대화의 사이에서 방황하는데, 1편의 네트워크 내러티브 구조를 완전히 유동적인 스타일로 재구성하여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자유로움을 선사한다. 전 지구적인 수준에서 인간이 어떻게 연결되어 살아가는지에 대한 놀이의 영화를 발명하였던 윌리엄스는 걷고, 말하고, 시시덕거리는 십대들의 목적 없는 여행이 호수와 평원, 언덕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마술적인 시청각 조형술을 통해 연출한다. 야심이 없어 보이는 그의 인물들과 달리 윌리엄스의 예술적 야망은 원대하지만 결코 거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더 자연스럽고, 더 가벼우며, 더 장난스러운 느낌을 주는 등장인물들은 마치 웜홀을 통과한 것처럼 그들 각자의 거처에서 튀어나와 시공간을 초월하여 지구의 친구들과 함께한다. 표랑하는 존재의 상태와 연결을 시각화하기 위해 다수의 상황은 화면 안과 화면 바깥에서 동시에 펼쳐지거나,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쇼트 또는 매치 커트, 쇼트-리버스 쇼트 편집 따위의 영화적 관습을 회피하면서 몰입형 스토리텔링에 도달하는 시퀀스들을 제시한다. 롤 플레잉 게임(RPG)이나 가상현실 영상에서처럼 360도 기술의 한계를 넘어 이미지에 기묘한 단절과 불일치를 만들어내는 순간들이 곳곳에 있다. 물결과 같은 파장 효과, 형상의 굴절, 비디오 스트리밍이 지연될 때를 연상시키는 이미지의 흐름, 리듬이 개입하는 순간들이다. 이러한 재현의 불완전함은 영화의 분위기를 해치거나 파노라마적인 풍경 쇼트의 흐름을 방해하기보다는 비현실적인 정지 상태, 즉 육체와 우주가 만나고 인간과 풍경이 합치되는 듯한 초월의 느낌을 자아낸다. 동시대 영화감독들과 달리 윌리엄스의 모든 작업은 이론의 틀에 얽매이기보다는 감각적인 호기심에 이끌려 진행되어왔다. <인류의 상승 3>에 나오는 인물들은 1편에서처럼 그들이 거주하는 장소에 갇히지 않는다. 거주의 장소로부터 해방된 이들은 여러 장소를 순간 이동하며 이동의 경로를 추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교차한다. 느슨하게 떠돌고 표류하는 놀이의 분위기뿐 아니라 오류, 예측 불가능성, 탈 중심성 등은 전작으로부터 이어진다. 극적이고 변덕스러운 날씨 속에서 명상적인 여정을 통해 안정된 개념에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는 스토리가 어디로 향할 것인지를 예측할 수 없다. 러닝타임 내내 저들은 꿈, 환각, 이미 보았거나 앞으로 보게 될 것들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하며, 한 신 안에서 두 가지 언어의 교환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광경과 소리, 말들이 누적되면 단일한 타임라인으로 내러티브를 통합하려는 시도는 부질없어진다. 표면의 물리적 연속성에도 불구하고 신들은 확장된 공간에서 이를 통합하는 능력에 끊임없이 도전한다. 윌리엄스가 제시하는 이미지의 경로들은 한눈에 보지 못하는 무한한 수의 잠재적 경로에 대한 인식을 활성화한다. 우리들 앞에 놓인 상황을 실재라고 가정하면, 잠재된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는 가상을 실재와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상승 3>를 보는 것은 실재 현실과 가상 현실이 하나의 이미지 안에 공존하는 전례 없는 체험이 된다. 에두아르도 윌리엄스는 제한적인 아트하우스 관객들의 취향에 맞춰 노정된 예술영화의 상투형을 탐구하는 것에 만족하는 감독이 아니다. 그의 야심은 광대하며, 심지어 <인류의 상승 3>에서 시네마의 존재론적 가소성(可塑性)을 시험한다. 영화가 비디오 게임과 닮아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그 증거 중 하나이다. 게임 속 인물은 전통적인 캐릭터라기보다는 여러 장소들을 이동하는 ‘아바타’에 가깝다. 그러나 비디오 게임의 미학에 부분적으로 관여하는 것처럼 보이는 윌리엄스의 미학은 특정 기술과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기술이 미학의 본질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인류의 상승 3>는 ‘가상’이라고 부르는 효과가 가상현실의 기술적 작동에 국한될 수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영화 제작의 고정된 프레임을 해체하려 한다. 점점 더 세계화되는 세상에서 ‘연결’에 대한 감각과 마찬가지로 매체들의 경계와 기원, 쓰임, 효과도 고정된 것이 아니다. ‘이미지를 믿는 감독과 현실을 믿는 감독’이라는 앙드레 바쟁의 이분법에 윌리엄스는 도전한다. 그는 카메라가 실제 세계와 마주하는 순간에 영화의 본질이 있다고 믿는 ‘존재론’의 전제를 붕괴 직전까지 밀어부친다. 열대우림의 울창한 숲속을 탐사하는 한 장면에서, 인물들이 큰 나무 주위에 모여 있을 때 카메라는 인간 피사체를 떠나 윙윙거리는 곤충을 따라가며 몇 초 동안 이 생물체의 클로즈업을 담는다. 촬영의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대신 윌리엄스는 곤충을 발견하고 사후에 프레임에 담는 대안을 구상했다. 윌리엄스의 방법론은 촬영의 순간 카메라가 현실에 임하였고 함께 존재했는가, 라고 하는 실존적인 계율에 의문을 던진다. <인류의 상승 3>의 마지막 부분에서 윌리엄스는 명료한 설명을 제공한다. 원숭이가 천천히 프레임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가 물속으로 떨어지는 기나긴 쇼트를 촬영할 때, 카메라는 피사체에서 서서히 멀어지면서 360도 회전한다. 회전 속도가 빨라지면서 여덟 개의 렌즈 이음새가 이미지를 만화경처럼 흐릿하게 표현한다. 이미지가 확대 및 축소됨에 따라 픽셀화되고, 이미지와 현실의 구분이 디지털 노이즈의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진다. 이 반역적인 이미지들의 안무가 끝나갈 즈음 번개가 번쩍하며 페루의 작은 산 정상으로 순간 이동한다. 공상과학의 영역으로 발을 디디는 것처럼 보이는 이 클라이맥스 신에서는 일곱 명의 십대 청년들이 산을 오르면서 이야기하는데, 360도 VR 이미지가 삼중으로 왜곡된다. 여기서 기술의 효용성은 그 차이와 특성보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일 뿐이다. 예측할 수 없는 카메라 움직임으로 인해 때때로 3D 이미지와 2D 평면 사이의 접점이 노출되는데, 이는 윌리엄스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일 수도 있다. 5분 정도 지속하는 이 신들의 연결에서 줄기차게 움직이는 카메라는 정글을 촬영하기 위해 제자리에 고정된 직후 나무를 지나서 프레임 상단에 위치한 들쭉날쭉한 교차점에 초점을 맞춘 다음 그 주위를 회전하여 어지럽고 만화경 같은 효과를 만들어내는 쇼트를 이어 안개에 휩싸인 경사로를 따라 산 정상으로 향하는 단체 하이킹을 완전히 다른 세상처럼 시각화한다. 각각의 장소들, 그들 장소의 이동은 비현실적이고 기괴하며 외계의 공간 감각을 자아내는데 현실적인 공간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디지털 오아시스, 불안정하고 끊임없이 뒤집히는 공간으로 느껴진다. 하늘과 땅은 구부러지고 왜곡된다. 얼굴과 몸은 줄무늬로 분해될 것처럼 보이고, 중력조차도 선택적이 되어 일부 사람들은 붕붕 뜨거나 공중제비를 돌기도 한다. 순간, 리얼리즘의 흔적은 모두 사라져버린다. 놀이의 공간으로 순식간에 변형되는 이 기이한 언덕의 퍼포먼스는 스크린을 변위된 촉각의 영역으로 바꾸어 관객들이 자신의 신체를 새로운 감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하려는 윌리엄스의 목표와 맞닿는다. <인류의 상승 3>은 평범한 이미지를 다른 방식으로 본다는 아이디어에 기초한 새로운 유형의 영화이다. 영상을 보면서 발견한 것들은 새로운 장소, 낯선 장소, 현실보다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장소의 인상을 주는데 이미지의 질감뿐만 아니라 다양한 촬영 상황에서 이러한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것은 경이롭다. 비디오 게임을 배신하는 기괴한 시각적 기법과 모호한 주제와 철학적 레토릭으로 가득 찬 이 영화는 지루함과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현대영화에 대한 기대를 거스르는 창작 방법을 활용하여 새로운 네트워크가 세상과 인간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그려낸다. 에두아르도 윌리엄스의 담대한 실험은 영화 이미지의 해체, 세계화에 대한 탐구, 다성적 테크놀로지의 공존이 만들어내는 비디오 아트를 하나로 녹여 버그에 비견할만한 시네마 쿠테타를 기도(企圖)하고 있다.
복장전환(cross-dressing) 영화는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1960년대에 정점을 찍는다. 복장전환 영화는 당대 성별성의 역동적 변화에 대한 신경증적 반응이자 퀴어적 놀이터로 작동했다. 이들 영화는 크게 남장여자와 여장남자 컨셉으로 나눌 수 있는데, 대체로 전자는 진지한 사극에서, 후자는 그보다는 가벼운 코미디에서 발전한다. < 별 >(1961)과 < 십오야(의 복수) >(1969) 그리고 보다 최근에는 < 미인도 >(2008)와 < 도리화가 >(2015)처럼 남장여자 사극은 가부장제 비판과 남성동성애의 서브코드를 수반한다. 과거를 시대배경으로 하는 사극의 특성상 강력한 가부장제 체제에서 여성의 사회적 활동과 역할은 극도로 제약되고 여성 주인공은 남장을 하고 남성동성사회에 침투할 설득력을 얻는다. 특히 1960년대 남장여자 사극의 주인공은 남성성의 과시와 영웅적 모험을 스펙터클화하기 위해 무사로 성장하는 서사가 두드러졌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십오야(의 복수)>가 대표적이다. 적대적인 두 가문에서 동시에 태어난 남녀 아이가, 남아선호를 이유로 뒤바뀌고 여자아이는 상대방 가문의 아들로 키워져 복수의 칼을 간다. 이 과정에서 뒤바뀐 두 남녀는 사랑을 느끼지만, 남장여자인 매화(남정임)가 마지막에 남자의 부모가 자신의 친부모라는 비밀을 알고 나서도 살해를 감행하자 각자의 길을 떠난다. 성별뿐만 아니라 복수의 대상까지 전환된 상태에서 남아있는 감정을 해소하지 않은 채 끝나는 결말은 두 주인공과 관객 모두를 혼란과 당혹 속에 빠트린다. 매화는 그녀가 남자가 아닐 거라는 다른 남성들의 끊임없는 의심 속에서도 그리고 근친살해라는 도덕적 문제에도 끝내 남자의 자리를 고집한다. 마치 그녀의 목표는 사랑하는 남자도, 가문의 복수도 아닌 남성성의 획득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매화는 대부분의 장면에서 남장을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에게 특히 로맨스의 대상인 거목(남진)에게, 그가 진짜 남자인지를 의심받으며 패싱에 자주 실패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매화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그녀의 당황하는 표정과 여성스러운 외모를 스펙터클화한다. 즉 매화는 이성애 로맨스 대상으로서 그녀의 여성성을 해칠 정도로 남장이 충분치 않다. 여기서 타인의 의심스러운 시선에 남장이 벗겨지는 순간의 취약함의 노출과 여성성이 교묘하게 결합된다. 그녀의 남장은 지워지지 않는 강력하고 진정한 여성성을 강조하는 데 이용된다. 이렇게 대부분의 남장여자 사극이 ‘남성동성애’라는 방해물을 ‘극복’하고 최종적으로는 진정한 이성애적 결합을 목표로 달려가긴 하지만, 시각적으로 남성동성애적 환상이 순간적으로 무대화된다는 면에서 그리고 <십오야>처럼 자신의 남성성을 고집하는 서사처럼 퀴어적 실천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지정성별이 남성인 주인공이 여장하는 영화는 동시대를 배경으로 한 코미디 장르가 주를 이루며, 여성으로 패싱될 때 전환된 욕망, 관계, 직업유지 등을 생활밀착형 에피소드로 상세하게 묘사한다. 남자들이 여장하는 가장 주된 이유는 직업이나 생계다. < 남자는 안 팔려 >, < 내 것이 더 좋아 >, < 남자와 기생 >, < 신입사원 얄개 >, < 치마 입은 남자 >의 주인공은 모두 남자로서 직업을 찾거나 거주지를 찾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해 여장을 한다. 이 영화들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이뤄지던 1960년대 도시는 여자들이 살기에 더 좋은 장소라고 주장한다. 영화에서도 묘사되다시피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여성 일자리가 증가했지만 주로 제조공장, 식모, 비서, 판매원, 공연, 미용, 버스 안내양, 성판매 등의 특정 직업에 국한되었다. 노동조건이 좋지 않아서 남성이 꺼리는 직업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직업에서는 남성이 지배적이었다. 그럼에도 여장남자 영화의 남자 주인공들은 자신이 취직을 못 하는 것을 여성의 탓으로 돌리고, 도시의 젊은 여성을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 침입자로 묘사한다. 산업 시스템이 변하고 도시의 구성이 달라질 때, 성 역할도 변할 수밖에 없다. 도시화가 촉진되면서 전통적 남성 주체성은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여장남자 코미디는 남성들이 자신의 남성성이 비난받는 이유를 여성에게서 찾을 수 있는 서사를 제공해 주는 동시에 근대 도시에 더 적합한 유연하고 '여성적인' 새로운 남성성을 연습할 수 있는 쿠션이 되어 준다. 변화에 대한 부적응 그 자체와 적응을 위한 고투로 인해 발생하는 고단함은 기존 규범에서 벗어난 신체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발생시킨다. 한편 여장남자 코미디는 근대화된 도시에서 여성의 노동시장의 진입에 대한 남성들의 두려움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그것을 조정하고 협상하려는 정도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 영화들은 여장남자 주인공의 좌충우돌 해프닝을 통해 여성의 직업 세계에서 일어나는 갖은 차별과 혐오를 폭로하고, ‘여성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세밀하게 묘사한다. 또한 < 여자가 더 좋아 >나 < 남자는 절개 여자는 배짱 >, < 내 것이 더 좋아 >, < 남자와 기생 >, < 치마 입은 남자 >처럼 여장남자들은 이미 주류 남성들과는 이질적인 ‘여성적인’ 남성이다. 그들은 다른 남성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고, 자신을 스펙터클화 하는 신체적 퍼포먼스에 능하며, 요리와 뜨개질을 좋아하고, 성적으로 여성에게 위협적이지 않고 잘 어울린다. 여장한 이후에는 실제로 ‘독특한’ ‘본 적 없는’ ‘다른 여자와는 다른’ 여자로 남자의 인기를 독차지 한다. 여장남자에 대한 다른 남자들의 성적 접근은 대부분 성폭력에 해당하지만 말이다. <내 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9)는 앞서 말한 주제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가장 직접적으로 퀴어적 관계를 가시화하는 영화다. 고향을 떠나 상경한 성춘(서영춘)은 기차역에서 우연히 만난 봉수(구봉서)의 집에 얹혀살면서 그의 아내 노릇을 한다. 봉수는 헤어진 전 아내의 체구가 성춘과 비슷하다며 이미 내재해 있는 그의 여성성을 발견한다. 우리는 봉수의 전 ‘아내’가 여성인지 남성인지, 시스젠더인지 트랜스젠더인지, 혹은 크로스드레서인지 알 수 없다. 낯선 성춘을 거리낌 없이 집으로 데려오는 봉수의 태도나, 체격이 비슷했음을 강조하는 것을 봤을 때 봉수의 전 파트너 역시 ‘남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성춘은 주인집에 들키지 않기 위해 완벽한 ‘아내’ 역할을 하려 노력한다. 그러던 중 봉수는 그들의 집 건너편에 레즈비언 커플인 강자(이금희)와 분임(고은아)이 살고 있다고 알려준다. 성춘은 남성적인 ‘바지씨’ 강자와 여성적인 ‘치마씨’ 분임을 관찰하며 ‘아내’ 역할을 수행한다. 봉수와 성춘에게 이 레즈비언 커플은 전통적 성역할을 모범적으로 제시해주는 좋은 예이다. 이 영화는 오프닝부터 여성성은 ‘구성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오프닝에 등장하는 눈, 입술, 코의 클로즈업은 주류 카메라가 여성성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준다. 시골에서 올라온 성춘의 무지를 드러내기 위해 삽입한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서울에 올라와 쇼윈도우 너머에 있는 마네킹을 처음 본 성춘은 ‘고운 여자가 갇혀 있다’고 착각한다. 여성성이라 것이 프레임, 즉 무대에서 수행되는 것이라는 것을 성춘의 순진함을 이용해 형식화한다. 또한 봉수와 성춘이 함께 데이트를 나간 장면에서 둘은 영화관을 지나가는데 간판에 구봉서와 서영춘이 주연한 ‘내 것이 더 좋아’라는 제목의 영화가 걸려 있다. 이 영화는 끊임없이 프레임 속의 프레임, 영화 속의 영화를 통해 젠더, 특히 여성성이 수행적이고 구성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만든다. 이중 가장 중요한 프레임은 바로 강자와 분임이 사는 집의 창문이다. 봉수는 성춘이 다른 아내들과 달리 애교가 없다고 타박하고 성춘은 건너편 창문을 통해 분임의 얼굴표정, 제스처, 분임이 강자에게 하는 ‘애교’를 모방하고 학습한다. 성춘은 분임이 강자에게 회사에 잘 다녀오라고 키스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출근하는 봉수에게 키스를 해준다. 성춘과 분임이 동일하게 가수를 꿈꾸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퍼포먼스가 강조되는 가수라는 꿈은 분임의 여성성도 자연스러운 것이라기보다는 사회가 요구하는 성 역할을 수행하고 노력한 결과라는 것을 드러낸다. 성춘이 옆집 창문에서 보이는 분임의 제스처와 움직임을 자세히 관찰하고 따라할 때, 창틀로 프레이밍된 그리고 무대화된 여성성의 수행은 정확히 이중적으로 영화적인 것이 된다. 창문은 젠더의 표정을 드러내는 ‘얼굴’이 된다. 분임을 보는 성춘과 성춘을 보는 관객. ‘여성적인 남자’가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성을 학습하고 장착하는 과정은 충분히 퀴어적이다. 하지만 다른 복장전환 영화들처럼 이 영화도 성춘의 여장을 벗겨내고 이성애 관계로 짝을 교정하면서 퀴어적 실천과 욕망을 봉합하려 한다. 결말에서 성춘은 분임과, 봉수는 강자와 새롭게 맺어지게 된다. 하지만 이 새로운 짝짓기는 이성애적 결합이나 ‘규범적 정상성’으로 보기에 매우 의심스럽다. 커플 스와핑이라는 실천과 이성애적 교정을 통해 오히려 동성애적 함의가 더 짙어졌다는 점에서 그렇다. 분임은 성춘을 여자로 알면서 좋아하게 되었다. 또한 성춘은 부부란 모름지기 아들 딸 낳고 살아야 한다며 ‘정상성’을 강조하고 공원에서 분임에게 해코지 하는 남자들을 물리치며 자신의 ‘규범적 남성성’을 과시한다. 하지만 분임을 괴롭힌 남자들은 성춘이 돈을 주고 산 사람들이다. 이 장면은 남성성 역시 수행되고 구성됨을 강조할 뿐이다. 한편 봉수와 강자는 더 이상 고분고분하지 않은 ‘아내들’ 욕을 하며 친해지게 된다. 봉수는 수염 많은 집사람보다 피부도 부드러운 강자가 더 마음에 든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강자도 성춘처럼 봉수와 이어지기 위해 치마를 입고 귀걸이를 하며 자신의 여성성을 찾으려 하지만 이 역시 여장을 한 부치처럼 보일 뿐이다. 결국 강자는 봉수의 집에서, 성춘은 분임의 집에서 함께 산다. 마지막에 영화는 두 집의 창문을 번갈아 보여주며 끝난다. 표면적으로 보기에 규범적 정상성을 되찾은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의 창문을 통해 여전히 서로를 모사하고 구성하며 초월해 나가는 방식으로 젠더(적 관계)가 구성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또한 동일하게 남성성을 수행하는 봉수와 강자, 여성성을 수행하는 성춘과 분임은 어느 커플보다도 더 동성애적이다.
박찬욱 , 봉준호 세대 이후 ‘현대영화’란 정의에 부합하는 한국영화들이 점점 드물어지고 있다는 불만이 심화 되던 차에, 아주 오랜만에 적절한 사례가 될만한 영화를 극장에서 보았다. 배우 정진영 의 연출 데뷔작 < 사라진 시간 >(2019)이었다. 듣자 하니 네티즌들에게 무자비한 평점 테러를 당하고 있다던데 이 영화가 그런 악의의 폭풍을 견디고 비평적으로 온당한 평가를 받기를 바란다. <사라진 시간>은 납득할 만한 이야기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지는 대담한 영화이다. 이 영화의 긴 서두와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이야기 사이에는 어떤 논리적 접점도 없다. 조진웅 이 연기하는 형사 형구는 마을 사람들이 전부 연루된 듯 보이는 의문의 화재 사고를 수사하다가 마을회관에서 벌어진 잔치에 억지로 참석해 만취상태에서 깨어난 후 자기를 다른 사람으로 대하는 마을 사람들을 보고 얼이 빠진다. 스포일러라 더 이상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사실 스포일러라 할 것도 없는 게 이 영화의 스토리에는 ‘왜’, ‘어떻게’를 설명하는 인과관계의 세목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소설처럼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다른 존재가 되어있더라는 설정으로 그냥 죽 밀고 나간다. 그러니 어떤 관객들이 이 영화를 미워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이야기로 위로와 감동을 받고 싶었는데 물 없이 고구마를 먹는 것처럼 체증을 느끼게 하는 설정과 구성이라고 느끼는 게 당연하다. 반면 이야기의 논리보다는 이야기의 전제 자체를 받아들인 나같은 관객은 <사라진 시간>을 무리 없이 받아들일 것이다. (허풍이 아니다. 이 영화를 꼭 봐야 한다고 내게 추천한 영화인들이 있었다.) 형사 형구 역의 조진웅을 비롯해 영화 속 마을 사람들로 나온 대다수 배우들이 근래 한국영화에서 가장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 이 영화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납득하기 힘든 설정의 이야기를 납득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영화 속에서 형구가 자신은 형사이지 선생이 아니라고 아무리 항변해도 옆집 이웃 해균( 전해균 )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게 무슨 말씀이냐며 답답해한다. 상황을 되돌리기 위해 끔찍한 사고를 쳐도 그 사고는 실재하지 않고 꿈처럼 지나간다. 형구가 막연히 바라는 것처럼 관객은 이 모든 것이 형구의 악몽이기를 바란다. 물론 이 영화가 그렇게 시시하고 안이한 결말을 내릴 리가 없다. 이 영화는 인과적 논리로 접수되지 않는 이 상황을 마침내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형구의 선택에 기대어 관객의 마음을 가라앉히려 한 다음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듯이 체념한 형구의 내면에 딱지로 가라앉은 상처와 그 딱지들이 더덕더덕 쌓여 얻어진 고통에의 이입 능력을 조용히 묘사한다. 이상한 마을에 와서 이상한 사건을 겪기 전에 형구는 자기 주관이 강하고 마음 먹은 것이 있으면 우격다짐으로라도 관철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다소 다혈질의 형사였다. 그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버릇이 있는데 옆에 사람이 있어도 속에 있는 말을 혼잣말로 풀어내곤 한다. 그의 부인은 그런 그의 혼잣말 습관을 타박하면서 당신과 있으면 가끔 나는 없는 사람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박봉이지만 긍지를 갖고 임하는 형사라는 직업을 배경에 두고 형구는 뭐든 판단하고 집행하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유형의 인간이지만 자신의 아파트 단지에서 주차를 하다가 실수로 옆 차를 받은 다음, 이튿날 출근하다가 자신이 받은 차의 앞유리에 끼워둔 휴대폰 번호 메모가 여전히 그대로인 걸 보고 슬며시 그걸 회수하는 그렇고 그런 윤리감각의 소유자이다. 나중에 자기 정체가 바뀐 후에 형구는 자기가 거둔 그 쪽지의 휴대폰 번호를 보고 그 번호로 전화를 걸어 보지만 의당 자신이어야 할 그 휴대폰 임자는 응답하지 않으며 없는 번호라는 메시지만 들려온다. 타인을 수사하고 판단하는 인간이었던 형구는 자신의 정체를 회의하고 주변 세상의 진실에 대해서도 확신하지 못하는 완벽한 카오스의 상태에 빠져든다. 이 끔찍하게 부재하는 의의 앞에서 역설적으로 형구는 늘 깨어 있어야 하며 관성적인 과거의 자아와 결별해야 한다. 그는 예민하게 세상에 반응한다. 후반부의 한 장면에서 스스로 고백하는 것처럼 죽음에의 충동에 시달리면서도 어떻게든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려 애쓴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 속의 선한 본성과 만난다. 그는 자신의 절망을 스스로 응시하며 동시에 타인들이 감추고 있는 절망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영화 말미에 자신에게 뜨개질을 가르쳤다고 주장하는 젊은 여인을 만났을 때 그가 보여주는 무심한 듯 경계를 두지 않는 응대법은 조진웅의 뛰어난 연기 덕분에 (이 영화에서의 조진웅의 연기는 그의 필모그라피에서도 두드러진 것으로 남을 것이다. 극적인 수식을 통하지 않고도 가닿을 수 있는 경지의 인물을 보여준다.) 타인과의 진정한 공감은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한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우리는 이 영화의 이야기를 납득할 수 있는가. 나는 그럴 수 있다고 본다. 이 세상은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 것들 투성이지만 우리는 대개 우리가 믿는 대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산다. 이 세상이 우리의 합리적 이성으로 조직된 것이라는 믿음에 반하는 것은 셀 수 없이 많지만 우리는 그걸 인정하는데 따르는 우리의 불안을 위로하는 수단으로 더욱 더 안전하고 철저한 인과적 논리의 이야기에 매달린다. <사라진 시간>은 대담한 방식으로 그런 우리의 가냘픈 기대를 깨트린다. 그 대신 굳이 판타지나 꿈의 논리를 빌려오지 않으면서도 다른 세계와의 이상한 접촉을 통해 무너짐으로써 재생하는 자아를 느끼게 한다. 내가 곧 주인공이라는 동일화의 경험을 안겨주는 이야기에 속한 영화들과 달리, 이 영화처럼 친구의 입장에서 주인공을 지켜보며 공감하게 하는 것도 해방감을 준다. 이야기의 독재에서 벗어난 시청각적 경험의 확장은 모던 시네마의 오랜 이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