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루의 여행
- 감독
- 강지영
- 제작년도
- 2019
영화는 인연이다. 영화의 경계가 얇아지고 구분이 모호해지는 요즘 부쩍 그런 생각에 자주 잠긴다. 어떤 영화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매번 다른 얼굴로 찾아온다. 2023년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 괴물 >이 그랬다. 나는 이 영화를 칸영화제에서 한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시 한번, 국내 개봉 뒤 마지막으로 한번, 총 세 번에 걸쳐 극장에서 만났다. 공교롭게 <괴물>은 하나의 사건을 세 가지 관점으로 재구성하는 이야기다. 안팎으로 묘한 인연과 기시감에 사로 잡힌다. 하나의 사실이 어떤 경로를 경유하여 나에게 당도하는가. 영화는 결과를 산출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에 이르는 과정을 구태여 복기하는, 비유하자면 지나간 길의 얼룩을 다시 더듬어 본다. 같은 사실을 보고도 다르게 기억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괴물>은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영화였지만 여러 번 보면서 빠져들었던 건 나에게 당도하는 사실들의 미묘한 차이들을 비교하는 즐거움 때문이었다. 이미 수 많은 평자들의 빼어난 분석들이 다 완료된 지금, 이 영화를 새삼 되돌아보며 딱 맞춰지지 않았던 부분들에 대해 복기해보고자 한다. 이것은 분석이라기 보다는 인상의 차이를 비교하는 쪽에 가깝다. 다시 말해 영화 안팎의 (개인적인) 경험과 불순물들이 함께 섞여 들어간 기억의 기록이다. 세 번의 만남, 두 가지 감상, 하나의 얼룩 칸에서 처음 마주했을 때 <괴물>은 대수롭지 않은 영화였다. 전작 < 브로커 >에 대한 실망감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였는데, 경쟁작 중 제일 먼저 상영한다는 걸 알고 난 뒤 그저 그런 범작일 거라 판단했다. 대부분 초반에 상영되는 경쟁작들은 신인의 작품이나 수상권에서 먼 경우가 있는지라 멋대로 판단하고 영화의 최초 시사를 보지 않았다. 함께 간 다른 기자가 보고 온 뒤 영화에 대한 흥분과 열기를 전해주었고 뒤늦게 표를 구해 극장에 갔다. <괴물>은 나의 무지와 편견에서 비롯된 오해를 여지없이 부수어 주었고 뒤늦은 부끄러움이 찾아왔다. 여기까진 평범한 반성의 이야기. 정작 의아했던 건 영화에 대한 기자들의 평가가 대체로 좋지 않았다는 점이다. 상당 수 평자들이 ‘고레에다의 새로운 드라마와 안정된 연출’정도로 박한 평가를 내렸다. 박한 평가의 가장 큰 이유는 이미 많이 본 소재와 구성이라는 점이었다. 형식적으로는 구로자와 아키라의 < 라쇼몽 >의 영향 아래 놓인 영화라는 단편적인 인상이 지배적이었고, 내용적으로는 작년에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던 루카스 돈트 감독의 < 클로즈 >와 종종 비교되기도 했다. 요약하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는 흥미롭긴 하지만 (그가 늘 그랬듯이) 무난하고 깔끔한 결과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평이었다. 영화를 막 보고 나온 뒤 심장이 두근거리던 입장에선 얼핏 이해가 가면서도 납득은 되지 않는 반응이었다. 올해 칸영화제의 수상 결과는 대체로 고개를 끄덕일만한 것이었는데, 무엇보다 <괴물>의 각본상을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이 영화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연출’보다는 사카모토 유지의 ‘이야기’가 도드라진다. 사카모토 유지는 이 영화가 본인의 경험에서 출발한 이야기라고 여러 번 밝혔다. “차를 타고 집에 가는 길에 겪었던 일이다. 신호가 빨간불이어서 멈췄는데 내 앞에 트럭이 한대 있었다. 그런데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뀌었는데도 한참을 꼼짝하지 않는 거다. 이상해서 경적을 몇번 울렸다. 잠시 뒤 트럭이 움직이고 나서야 휠체어에 탄 사람이 건널목을 건너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트럭은 그 사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던 것뿐이었다. 그때 사정도 모르고 경적을 누른 게 내내 마음에 남았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내가 알지 못한 채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었다가 깨닫게 되는 이야기를 쓰겠다고 결심했다.”(씨네21 1433호, 괴물> 각본가 사카모토 유지 인터뷰 ‘어쩌면 진실은 이야기 바깥에’ 중) 범상하지만 그래서 더 소중한 통찰. 영화를 향한 상찬도 딱 그정도에 그쳤던 것 같다. 찜찜한 의문을 뒤로 한 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시 만난 영화는 전혀 다른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개인적인 인상으로 작년 부산에서 가장 뜨거웠던 영화 중 하나는 <괴물>이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아역 배우들이 내한한 게 열기를 달구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미나토와 요리 역을 맡은 쿠로카와 소야, 히이라기 히나타 배우는 의도를 초과하는 존재감을 스크린에 새겨 넣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놀라운 마법(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재능)은 어린 아이들을 카메라에 담는 방식에 있다. 그의 카메라는 사실의 일부분을 무난한 방식으로 담아내는 다큐멘터리의 시선을 따르지만 그가 포착하는 대상은 현실에 없을 정도로 눈부시게 빛난다. 단지 예쁘고 잘생겼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시절에만 허락된 반짝임을 찾아내고 원석 그 자체의 생동감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방식은 재능과 감각이라는 헐렁하고 추상적인 단어 이외로는 표현할 길이 없다. 마침 올해 부산에 < 아무도 모른다 >의 야기라 유야 배우가 <간니발> 홍보 차 방문해 있었기 때문에 묘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올해 부산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많은 설명을 쏟아냈다. 몇몇 멘트들은 배우들과 함께 하는 자리이기에 더욱 의미 있는 발언들도 있었다. 다시 본 <괴물>이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의도를 초과하는 장면들이었다. 소년들이 사실 어떤 관계였고 어떤 마음으로 서로를 마주했는지, 이야기의 전모를 알고 난 뒤 다시 보는 어른들의 시점은 어딘가 절박하고 애처롭다. 진실을 오해했기 때문이 아니다. 애초에 여기에 진실 따윈 없다. 싱글맘 사오리(안도 사쿠라)와 담임 선생 호리(나가야마 에이타)의 시점에서 재구성된 이야기 역시 각각의 진실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진실찾기의 추리에 매달리는 대신 매 순간 장면에 맺히는 시점의 가능성에 공을 들인다. 한 마디로 모두 진심으로 절박하다. <괴물>의 다중시점은 카메라의 본질적인 한계를 증명한다. 진실은 없다. 우리가 목격하는 건 사실의 조각일 뿐이다. 정확히 진실이란 이야기 바깥 혹은 사건과 사건 사이에 깃드는 가능성에 가깝다. 때문에 눈앞에 보이는 사실이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인정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괴물>은 그 소년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이야기의 전체 그림이 무엇인지를 추리하는 이야기의 구성에 홀리지 않고 각각의 인물들이 순간에 집중한다. 어떤 이야기인지 전체 꼴을 알고 있음에도, 아니 알고 있기에 각 인물들이 느꼈을 절박한 감정들이 더욱 진심으로 다가온다. 진창에서 미나토를 찾아서 함께 걸어오는 장면에서 사오리, 아니 안도 사쿠라의 몸짓은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 전체를 초과한다. 미나토와 사오리가 나란히 선 뒤 걷는 이 장면은 지금 포착되고 있는 것에 온 힘을 쏟는다. 매 순간의 진실들을 포착하는 시선. 그렇기에 우리는 역설적으로 시선의 한계를 인지한다. 부분을 전체로 호도하지 않을 수 있는 태도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 순간 <괴물>은 사카모토 유지의 이야기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시선으로 무게추를 이동한다. 아니 애초에 영화는 그 자리에 헐거운 장면들을 느슨하게 꽂아둔 채 있을 뿐, 이동한 건 내 마음이다. 두 번째 본 <괴물>은 결국 어떤 자리에서든 사람에 초점을 맞추는 고레에다의 시선의 영화였다. 나를 되돌아보고 너를 상상하는 시간 마지막으로 2023년 끝자락, 겨울 한복판에서 <괴물>을 다시 본다. 다시 말하지만 정교한 이야기나 안정감 있는 구성, 빼어난 연기는 이미 설계도 수준으로 자세히 해설되어 있다. 이 글은 미처 닦아내지 못한, 어쩌면 영영 닦이지 않을 내 마음 속 얼룩에 대한 묘사다. 칸에서 영화를 보자마자 동료와 의견이 갈린 지점은 엔딩에 대한 해석이었다. 동료는 마지막 장면이 소년들의 완벽한 순간을 그리는 플래시백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나는 소년들의 죽음 이후를 보여준다고 받아들였다. 폭우 이후 미나토와 요리는 함께 세상을 떠났고, 우리가 보고 있는 건 두 사람만의 낙원으로 떠난 모습이다. 의도 했건, 무지했던 현실은 두 소년을 여러 방식으로 밀어냈고 두 사람만의 아지트를 찾아낸 소년들의 시간은 거기서 멈췄다,고 생각했다.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던 날 엄마 사오리와 호리 선생이 아지트를 발견하는 장면과 이어지는 비가 갠 장면의 연결 방식, 날이 갠 바깥으로 뛰어나가는 소년들을 잡아주는 희뿌연 장면의 톤까지 명백히 사후세계를 묘사한다고 받아들였다. 왜 소년들을 죽여야만 했는지를 묻는다면 다양한 답변도 가능할 것이다. 왜 끝을 비극으로 마무리했어야만 했는지를 묻는다고 해도 설명할 논리들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를 세 번째 다시 본 날, 그것이 죽음과 이별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이 이야기가 누가 괴물인지 찾거나 책임을 묻기 위한 진실 찾기 게임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까지 기억에 남는 건 변해가는 아들을 보는 어머니의 절박한 얼굴, 상황이 왜 이렇게 됐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선생님의 황망한 얼굴, 세상 해맑게 서로를 마주보는 소년들의 화사한 얼굴이다. 그리고 마치 이야기의 벽을 깨는 듯한, 세상 바깥에서 들려오는 듯한 트럼펫 소리와 교장 선생님의 헤아리기 힘든 얼굴. 이것들을 어떤 순서로 어떻게 연결할지는 결국 스크린 앞에 앉은 내 몫이다. 문득 아직도 이야기의 빵부스러기를 찾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세 번을 마주한 뒤에야 손을 털고 일어나 스스로를 돌아본다. 영화가 진실의 씨앗을 심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하다. 1년에 걸친 만남 끝에 어느덧 거울이 된 영화 <괴물>을 마주하며 이야기 바깥, 프레임 바깥, 나의 바깥을 그려본다. 2024년 <괴물>을 되돌아보며 너를 상상하는 힘이 얼마나 귀한지 새삼 실감한다. 비가 갠 뒤 뽀샤시하고 포근해 보이는 소년들의 낙원, 그곳에서의 힘찬 뜀박질을 뒤로 한채 극장 바깥으로 나선다. 아직 겨울이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한국과 일본은 국교를 정상화하게 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국민적 합의에 기반한 외교 정책은 부재했고 식민지배의 역사적 책임은 온전히 제기되지도 못한 채 ‘경제난 해결’이라는 미명으로 ‘경제협력자금’ 3억 달러에 협상은 서둘러 종결되었다. 미국 중심의 동아시아-태평양 냉전 질서 아래서 종용된 화해였고 굴복이었다. 그 결과 국민적 반발은 극에 달했고, 1964년 4월에는 박정희 정권을 탄생시킨 ‘민족적 민주주의’가 기만적인 구호였음을 폭로하는 ‘화형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6.3 학생운동으로 확대된 시민적 저항은 결국 위수령과 계엄령이 발동되면서 진압되었는데, 협정이 체결된 7차 한일회담은 그와 같은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열린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한일협정은 ‘굴욕외교’, ‘구걸협상’으로 표상되었다. 식민지 역사를 안고 있는 민족이 가질법한 분노와 울분이 투영된 현실인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속에는 신(新) 식민지적 종속 관계를 예기하는 모종의 불안과 두려움도 함께 섞여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봐야 할 지점은 일본에 대한 한국사회의 지배적인 정서가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잉여, 혹은 복합적이고 양가적인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공식적인 민족 서사의 문법과 달리 대중문화를 매개로 사적영역에서 작동하는 일본에 대한 정서는 ‘어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기도 했다. 식민지 역사를 안고 있는 민족의 근본적인 비극은 헤게모니를 지닌 식민국의 문화적 감성을 향수(享受/鄕愁)하게 된다는 데 있는지도 모르겠다. 시장은 이러한 대중의 부인된(disavowed) 욕망을 기민하게 포착해냈다. 거리의 가판대를 메운 ‘왜색잡지’와 다방에서 들려오는 일본 대중가요는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일본을 우선 알고 거기에 대처할 민족적 주체성 확립해야 한다”는 논리는 “노도처럼 밀려들어와 우리의 말초신경을 간지럽히는” 1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 금기와 선망이 착종된 양가감정의 표현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영화계에서는 한일친선과 문화교류 문제가 적극적으로 논의된다. 물론, 일본영화 수입과 한일 합작영화에 기대를 거는 측은 외국영화 수입업자들이었다. 방화제작자들은 일본과의 합작영화는 미끼일 뿐이며, 이를 통해 일본 자본이 국내 영화제작계에 유입되면 한국영화는 일본의 영화산업에 종속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했다. 한편, 정책당국의 입장에서는 한일협정에 비판적인 국민감정을 억누르기 위해서라도 민족주의 정서에 기대어 일본대중문화에 대한 통제를 강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1965년에 내려진 <동백 아가씨> 방송금지 조치는 단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수입업자의 입장에서는 일본영화 수입이 개방되면 그로부터 발생하는 이익이 분명했기에 자신들의 뜻을 인적교류에서부터 단계적으로 관철시키고자 했다. <잊지 못할 모정(Typhon sur Nagasaki, 1957)>를 수입 배급했던 세기상사는 누구보다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행위 주체였다. ‘한국영화’ 최초로 일본배우가 캐스팅되어 논란이 되었던 <총독의 딸>(1965)은 세기상사가 제작한 영화로 제작단계에서부터 공보부와 마찰을 빚었다. 세기상사는 공보부의 승인 없이 단독으로 촬영을 진행했고, 결국 영화는 상영금지 처분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이 있다고 하여 정책당국이 일본문화를 전적으로 배척할 수는 없었다. 일본과의 수교를 맺은 박정희 정부로서는 자유아시아의 우방이자 이웃으로서 일본과의 친선과 우호를 강조해야 했기에 한편으로는 교류의 방식과 정도를 제시해야 했다 2 . 이와 같이 일관된 원칙이 작동될 수 없는 틈으로 일본영화계와의 교류를 시도하려는 기획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는데, 제작의 측면에서는 일본과의 인적 교류와 로케이션 촬영을 확대해나갔다면, 외화수입의 측면에서는 일본인 배우가 출연한 서구 영화를 수입 상영함으로써 일본을 금지하는 제도적 기준을 완화시키려 노력했다. 일본영화에 대한 문화적 금기의 핵심은 배우였다. “제작신고에는 일본에서 필요한 장면만 찍겠다”고 로케이션 촬영 승인을 받은 뒤 현지에서 일본 배우를 출연시킴에 따라 촬영중지를 통보 받은 <고안>(최무룡, 1966) 3 의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당시의 공보부의 입장은 “로케와 일본인의 기술지도는 무방하나 일본배우의 출연은 아직 허가할 수 없다” 4 는 것이었다. 일본 배우의 출연은 외국영화를 수입하는 데도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1965년 MGM에서 제작한 <8월15야(夜)의 찻집(The Teahouse Of The August Moon, 1956)>의 경우,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에 출연하여 국제적인 인지를 얻은 교 마치코(京マチ子)를 비롯하여 다수의 일본 배우가 출연한다는 이유로 수입추천을 승인 받지 못했다. 이후 세기상사는 진정서를 제출하며 지속적인 민원을 통해 수입 및 상영 허가를 취득하게 된다. <잊지 못할 모정>의 경우도 이와 유사한 경우인데, 심의 서류에는 세기상사가 자신들의 기획을 관철시키기 위해 한일수교의 논리와 검열행정의 내적인 일관성 그리고 상영보류에 따른 경제적 피해를 거론하여 행정당국을 압박하는 정황들이 담겨 있다. 사실, 이브 샴피(Yves Ciampi)가 연출한 <잊지 못할 모정>은 1957년에 제작된 영화로 나가사키의 조선소에서 일하는 선박 기사 말샤크(Jean Marais)와 노리코(기시 게이코, 岸 惠子) 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어 왜색시비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세기상사는 1964년 9월 영화를 수입한 뒤 1966년에 상영 허가 신청을 접수한다. 1966년 시점에서 외화 수입과 상영 과정은 크게 1. 외국영화 수입추천허가 절차, 2. 상영허가 승인 절차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하에서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소장 중인 <잊지 못할 모정>의 심의 서류를 중심으로 수입과 상영 과정을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1. 외국영화수입추천허가 1962년 1월 영화법이 제정되면서 영화업자는 외국영화를 수입‧상영하기 위해서 공보부에 ‘외국영화 수입추천허가 신청서’를 제출한 뒤 승인을 얻어야 했다. 영화 시장에서 외국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았고, 이들 영화가 야기하는 사상과 풍속의 문제 또한 컸기에 영화검열 행정에서 외화수입을 통제, 관리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1956년 문교부에서 영화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우수영화 포상제도로 외국영화수입 쿼터를 배정하면서 정부는 보다 효율적으로 외화 관리를 할 수 있었는데, 5.16 이후 검열권한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영화법이 제정되면서 외국영화에 대한 ‘수입추천허가절차’가 신설되었다 5 . 이는 수입된 외화가 상영되지 못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라는 의미가 있으나 수입업자들은 사전검열의 형태로 ‘수입추천허가’를 받아야 했다 6 . 수입추천을 받기 위해 영화수업업체는 영화 제명 및 원제, 제작주체, 필름종별 및 규격, 권수, 판권대금과 같은 영화에 대한 제반 정보를 담은 ‘허가신청서’를 비롯하여, 영화의 원문 대본 1통과 국문 대본 3통, 그리고 수입면장 및 기타 요청 서류들을 구비하여 공보부에 제출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행정적 절차가 제한과 통제에만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외국영화 수입과정은 외환관리법을 비롯하여 통관절차에 따른 관계 법령을 준수해야 했기에, 공보부는 상공부, 서울세관, 외환은행과 긴밀히 협력하며 통상에 필요한 절차를 일원화하여 진행할 필요가 있었다. 검열이라는 제도적 장치가 근본적으로 통치 합리성을 제고하려는 국가 이성의 산물인 만큼, 개별 텍스트에 대한 검열과정은 일반 행정업무와 긴밀히 연동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수입추천단계와 관련된 서류들은 아래와 같다. 1) 외국영화 수입추천 허가신청서 제출(1964.9.10.) <잊지 못할 모정> 수입추천 허가신청서 영화 <잊지 못할 모정>의 수입사인 세기상사는 1964년 9월 10일 공보부에게 영화수입추천 허가를 위한 신청서를 제출한다. 신청인은 한국영화주식회사 대표이사 유성엽이며, 한국영화업자협회를 경유(1964.9.14.)하여 공보부의 승인을 받았다.(1964,9.15.) 신청서에는 영화의 제작 정보만이 아니라 종별(천연색, 와이드스크린)과 규격(35mm, 12권, 3편) 및 판권대금(US $4,000)까지 기록되어 있으며, 영화필름과 원문 대본 1통(번역문 포함), 국문 대본 3통 그리고 수입면장 및 기타자료를 첨부했음을 알 수 있다. 기타자료에는 리버티상사와 체결한 계약서 사본과 영문으로 된 전신(cable), 그리고 외화수입쿼터 배정서와 각서가 이 포함된 것으로 확인된다. 전신을 통해서는 계약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는데, 한국에서 통용되는 라이센스 기한은 10년이며 신용장 개설 은행 정보를 비롯한 결제 기한(1964.9.30.)이 명시되어 있다. 공보부에서 외환은행 기관장에게 보낸 배정서에는 외화수입권을 배정받은 대한영화주식회사의 외화수입업무를 세기상사가 대행한다는 점이 명시되어 있다. <잊지 못할 모정> 수입 추천 신청 단계에서 세기상사가 제출한 각서 수입추천 단계에서 눈에 띄는 것이 각서인데, 총 두 종류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세기상사 대표이사 이기동의 이름으로 공보부에 보내는 것으로서, 각서에는 “영화의 왜색 및 감독의 사상관계나 기타 귀부의 심사 기준에 저촉되는 경우에는 하시든지”(언제든지) 공보부의 지시대로 따르겠다 내용을 담고 있다. 수기로 작성된 다른 종류의 각서는 모두 2통인데, 모두 한국영화주식회사 대표이사의 이름으로 작성된 것으로서, “필름이 도착 즉시 실사고사를 받을 것”이며 “고사규정에 저촉되거나 상영이 불허가 되는 경우에는” “신용장 개설을 비롯한 제반 책임을 본인이 부담”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후 상영 허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참조해볼 때, 책임을 소재를 정하는 각서가 강력한 구속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기타자료에는 수기로 작성한 영화 해설과 스토리가 포함되어 있다. 동일한 양식의 서류가 3부인 점을 미루어보아, 외화수입 절차를 담당하는 주무부처인 상공부와 서울세관 그리고 외환은행에게 각각 보낸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에 대한 개략적인 정보를 담은 해설인데,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일찍이 <악의 결산>으로 발란서의 제일선 감독으로 각광을 받은 바 있는 “이브 샴피” 감독이 처음으로 시도한 동양색체가 짙은 감명 깊은 명화 이다. 이 영화제작을 위해 제작기간 2년, 구상에 3년, 광대한 오픈 세트 등 영화사상 공전의 스케일의 획기적 거작이다. 특기할 것은 일본 나가사키시를 방불케 하는 광대한 오픈세트를 건조했다는 사실이다. 출연인 너무나 유명한 불란서의 일급 배우 “장 마레-”와 상대역인 세기의 미녀 “다니엘 다류-”, 조연엔 일본의 인기 여우 “기시 게이코”가 각각 출연하여 초연을 보여주고 있다. (강조는 인용자) 영화가 일본의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일본인 여성과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에서 드러나는 ‘일본색체’는 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수입사는 이를 “동양색체”로 설명하고 있는데,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나가사키’도 사실 “일본 나가사키를 방불케 하는 광대한 오픈 세트”라는 점을 강조하며 이 영화가 프랑스 감독과 배우가 주축을 이룬 작품임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수입대행사인 세기상사는 서류심사만으로 수입 추천을 승인해야 하는 행정절차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영화 <잊지 못할 모정> 수입추천 통지 본 영화는 불란서 파테시네마 델라필름사가 1956년도 제작한 작품으로서 선박소에 근무하는 우수한 청년 기사 말사크는 친구의 소개로 '노리'라는 처녀를 알게 되어 사랑하는 중 우연히 그의 옛 애인 후란스와즈가 나타나 고민하게 된다. 말사크는 후란스와즈를 잊기 위해 출장을 떠난다. 돌아오는 날 밤, 나가사끼엔 심한 태풍이 불어 ‘노리’를 염려하며 그녀를 찾았으나 건물에 깔려 이미 숨을 거두고 이러한 사실을 본 후란스와즈는 그를 단념하고 나가사끼를 떠난다는 내용. (강조 및 밑줄은 인용자) 영화사에서 제출한 자료를 토대로 공보부에서는 유관 부처로 협조 공문을 보내는데, 참고 항목으로 부기된 내용에서는 영화에서 기시 게이코가 분한 노리코의 이름이 ‘노리’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세기상사가 제출한 자료에 근거한 것인데, ‘노리코’의 이름을 ‘노리’로 명명함으로써 왜색 시비를 비켜가고자 했음을 추론해볼 수 있다. 관계기관에 수입추천 서류를 발송한 다음날인 1964년 10월 2일, 공보부에서는 한국영화주식회사 유성엽 앞으로 ‘외국영화 수입추천’ 건에 대해 관계 기관에서 추천을 하였다는 공문을 보낸다. 본편에 대한 수입추천 허가승인 절차가 완료된 후, 1964년 12월 11일 대한영화사는 예고편 통관을 위한 품의서를 공보부에 제출한다. 예고편은 총 10권으로 한 편당 1권임을 감안해볼 때, 10편의 예고편이 들어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공보부는 12월 22일자로 서울세관에 협조공문을 제출하면서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수입추천 허가절차가 마무리된다. 2. 상영허가 승인 절차 1966년 1월 6일, 세기영화사는 수입한 영화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상영허가신청서를 제출한다. 영화가 수입된 절차가 완료된 시기가 1964년 12월 22일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영화가 수입된 지 1년이 지난 시점까지 상영허가는 신청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추론컨대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일협정을 둘러싼 시민적 저항이 극에 달했기에 상황의 변화를 지켜봤던 것이라 생각된다. 아니면 한일국교 정상화를 위한 협정 체결이 기정사실화된 시점에서 일본영화 수입개방에 대한 정부의 태도를 가늠해보고자 논란이 될 만한 영화를 수입했던 것일 수도 있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간에, 영화 수입을 주도한 것은 한국영화주식회사라기보다 세기상사라 할 수 있는데, 실질적으로 상영허가신청서를 제출하기에 앞서 세기상사는 12월 9일자로 외국영화 수입추천 명의변경 신청서를 양도증 사본과 함께 공보부에 제출한다. 이로써 세기상사는 수입대행업무가 아닌 영화를 수입, 배급하는 주체가 된 것이다. 그런데 상영허가를 둘러싸고 공보부와 세기상사는 마찰을 빚게 된다. 공보부의 입장에서는 한일협정에 비판적인 민족주의 정서가 반정부적인 방향으로 표출되는 데 대한 부담감으로 영화 상영을 보류할 필요성이 있었다. 반면 세기상사의 입장에서는 공보부의 수입추천허가에 의해 수입된 영화를 공보부가 상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절차의 합리성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는 판단이 가능했다. 다음은 4차에 걸친 상영허가 신청과정을 재구성한 것이다. 1) 제1차 시도 (1) 외국영화 상영허가 신청서 제출(1966.1.6.) 1966년 1월 6일 세기상사는 공보부에 <잊지 못할 모정> 상영허가 신청서를 제출한다. 해당 서류에는 수입신청허가 시와 동일하게 영화에 대한 제반 정보와 영화필름, 대본 및 별첨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시세완납증명서를 비롯하여 필름 입고증, 문화영화수속필증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이 시기는 1966년 12월 2차 영화법 개정이 이루어지기 이전 시점이어서 62년 영화법의 시행령을 따르는데, 문화영화수속필증은 일반 극영화 상영 시 문화영화의 의무상영 조항에 따른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볼 필요가 있는 점은 <고래>라는 제명의 문화영화의 제작사가 세기상사주식회사라는 사실이다. 실질적으로 문화영화는 정부가 제공하는 공보영화 차원을 넘어 계몽성을 핵심적인 속성으로 갖춘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아우르는 역사적 개념인데, 문화영화의 의무상영이 제도화되면서 문화영화를 제작하는 민간회사가 생겨나기도 했다 7 . (2) 외국영화 상영허가 보류(1966.1.11.) <잊지 못할 모정> 상영허가 신청에 대한 보류 통보 서류 발신: 공보부 장관 수신: 세기상사주식회사 우기동 제목: 외국영화상영허가 신청에 대한 보류통보 위하가 66.1.10자로 제출한 외국영화 <잊지 못할 모정>의 상영허가 신청은 동 영화를 심사 결과 당부 방침에 의하여 상영허가가 보류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끝. 부내 참고: 본 영화는 왜색이 농후한 영화임 . 세기상사는 상영허가 신청 당시 연소자 관람 신청서도 함께 제출했는데, 이를 통해 볼 때, 수입 추천까지 받은 영화가 상영보류 통보를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3) 중앙정보부에서의 재심의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의견 통보 검열서류에는 없지만, 1월 11일자로 상영보류를 통보받은 세기영화사는 재심을 청구한 것으로 보인다. 위 서류에서 알 수 있듯이, 1966년 1월 29일 중앙정보부에서는 “65년 1월 12일(66년의 오기)”자로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해 재심을 진행하였다. 중앙정보부가 심의에 참여하여 의견서를 보내는 경우는 일반적인 절차는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즉, 공보부가 당시의 정세를 고려하여 정무적인 판단을 내림에 있어 중앙정보부의 의견을 요청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4) 외국영화 상영보류 최종 통보(1966.3.28.) 중앙정보부는 해당 영화가 “보안상 지장이 없음으로 공보부 장관이 적의 판단 조치”할 것을 주문하는데, 공보부에서는 1966년 3월 28일자로 세기상사에게 다시 한 번 상영보류 통보를 내린다. 이유는 1차와 동일하다. 2) 제2차 시도 (1) 진정서 제출(1966.3.29.) <잊지 못할 모정> 수입 관련 세기상사가 공보부 장관에게 보낸 진정서 첫 페이지 진정서 수신: 공보부장관 귀하/ 제목: 진정서 귀부의 1966년 3월 28일 자 공보영 1733.2~2959에 의한 외국영화 상영허가신청에 대한 불허가 통보는 감사히 복송하였읍니다. 취송(就悚) 본건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귀부의 정책상 이유로 당분간 허가할 수 없다는 통보취지에 대하여는 폐사(弊社)로서도 타의 없이 충분히 이해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폐사로서 본건 "잊지 못할 모정"에 관하여 국내상영예정하에 (1) 서기 1964년 10월 2일 자로 귀부의 수입추천을 받고 (2) 동시에 신용장을 개설하고 (3) 서기 1966년 1월 6일 자로 통관절차를 필하여 서기 1966년 1월 10일 자로 귀부에 상영허가신청에 이르기까지 막중한 자금을 투입하여 동 필름은 완전 국내물품으로 되어 있는 즉 상영치 않으면 안 될 불가피한 고충에 직면하고 있는 실상 을 보살펴 주시고 더욱 본건과 견연(牽連)지어서 기왕 국내에서 상영한 바 있는 소위 왜색영화의 경우를 대조적인 면에서 돌이켜보시더라도 국교정상화 이전에 있어 한 때 한일 간의 격앙된 국민감정에 아무런 자극됨이 없이 (1) <흑선>, <전장과 영원히>, <8.15의 찻집>, <해병에 동경에 가다>, <벽안의 나비 부인>, <카이강의 다리>, <원한의 도곡리 철교> 등을 상영한 선례 를 상기하시와 보살펴주시고, 특히 본건 "잊지 못할 모정"의 경우는 문화교류의 성과면에서 보더라도 음악 및 미술과 문학 등이 불란서의 문화적 지반을 기조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2차 대전 당시 원자폭탄 세례를 받은 일본 장기(인용자: 나가사키) 등을 배경으로 하여 본 영화를 제작함에 이른 불일 간 국민감정의 순화는 목하 한일 국교정상화가 실현된 차제에 있어 무형의 정책적 PR에 도움이 되는 좋은 하나의 선도적 동인이 됨에 족할 것이며 , 더욱 한일국교 정상화의 당면한 중요 과정에 비추어보더라도 한일 간 문화교류의 계단적인(인용자: 단계적인의 오기) 일책으로써 이상 진정들인 수단에 정황을 현찰하시와 본건 영화 "잊지 못할 모정"이 상영되도록 허가하여 주시압기 바라옵고 자이 진정서를 올리나이다. 세기상사주식회사 대표이사 우기동 (강조 및 밑줄은 인용자) 2번에 걸친 상영보류 통보를 받은 세기상사는 대표이사의 이름으로 공보부 장관에게 진정서를 제출한다. 진정의 핵심은 공보부가 고시한 행정 절차에 따라 수입추천을 받아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었고, 일본인이 출연하거나 참여한 영화가 상영된 선례가 이미 있고, 국교 정상화가 실현된 시점에 해당 영화가 정책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홍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외국영화 상영허가 진정에 대한 회신(1966.4.4.) 공보부는 1966년 3월 30일자로 제출된 진정서에 대해서 1966년 3월 28일에 통보한 바와 같이 당분간 허가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간략하게 통보한다. 세기상사가 상영불허가 판단의 불합리성을 조목조목 짚은 것과 대조적으로, 공보부에서는 별다른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 당분간 허락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한 것이다. 3) 제3차 시도 (1) 외국영화 산영허가 신청 사유서(1966.8.4.) 세기상사는 공보부의 보류 통보를 일단 수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일본 동보가 제작한 작품으로 특히 감독 및 기타 기술진영 전원이 일본인으로 구성되어 제작된 동경 올림픽 영화가 상영허가”를 받게 되자 세기상사는 다시금 상영허가를 신청한다. 반려 이유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인이 등장한다는 이유로 영화 상영허가를 보류했다면, ‘동경 올림픽 영화’ 또한 개봉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2) 외국영화 상영허가 진정에 대한 회신(1966.9.12.) 공보부는 별다른 이유 없이 다시금 진정 내용에 대해 불가 통보를 한다. 다만, 달라진 점은 “당부정책 상” 허가할 수 없다는 부분을 수정하여 “당부정책이 변경될 때가지 당분간”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다는 점이다. 즉, 영화 상영 허가를 보류한 것은 기관의 정책적 일관성에 의해서라기보다 당시의 정무적 상황을 고려한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판단은 세기상사의 입장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4) 제4차 시도 (1) 외국영화 상영허가 신청서 두 번의 진정이 묵살되지 세기상사는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상영허가를 다시금 신청하게 된다. 서류상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서류 작성일은 1966년 8월 3일이나, 이를 접수한 시점은 9월 14일이라는 사실이다. 즉, 두 번째 진정을 통해 해법을 찾으려 했던 시도가 어그러지자 행정 당국의 비일관적인 처사를 비판하는 ‘신청사유서’와 함께 상영허가 절차를 새롭게 밟음으로써 공보부를 압박하는 전략으로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2) 외국영화 상영허가 신청에 대한 회신(1966.10.10.) <잊지 못할 모정> 수입에 대한 방침을 밝힌 공보부 내부 메모 반복된 진정과 신청사유서를 통해 공보부의 행정적 실책을 지목함으로써 공보부는 그에 대한 해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렸다. 1966년 10월 10일자로 세기상사로 통보된 상영허가 보류 판정은 이전과는 달리 그 이유가 상세히 부가되어 있다. 판정이 핵심 이유를 요약한 메모의 내용을 보면 해당 영화가 “불란서 제작이라고 하나 일본 가요(歌謠), 민속(民俗), 무용(舞踊) 등이 처음서 끝까지 강하게 나타나 일부분을 삭제(削除)할 수도 없는 영화이므로 한일 영화교류가 시작(始作)될 때까지 상영 허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5) 제5차 시도 1966년 12월 20일, 세기상사는 다시금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상영허가 신청서를 제출한다. 해당 서류 또한 앞서와 동일하게 8월 3일에 작성된 것이지만, 접수는 4개월 뒤인 12월 20일이 이루어졌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으나, 세기상사는 별도의 진정서나 사유서 없이 영화의 상영허가를 신청하는데, 공보부에서는 아무런 이유 없이 이를 승인한다. 공보부의 <잊지 못할 모정> 상영 허가 통보 서류 결국 5번째 상영허가 신청을 낸 끝에 공보부에서는 해당 영화에 대한 상영허가를 통보한다. 그러나 내부결재 문서에는 국내상영이 무방하다고 판단한 근거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단지 해당 영화의 줄거리만을 요약해놓았다. 다만 실사 검열을 통해 화면 6개처, 녹음 9개처를 삭제할 것을 명령했는데, 이를 통해 유추해본다면 공보부가 문제 삼았던 ‘왜색시비’는 정책 당국의 입장에서는 정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당 영화가 프랑스에서 제작되었던 만큼 일본에 대한 서구의 이국적 취향을 충족시킬 요소들이 과도하여 왜색이 매우 짙을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침내 세기상사는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켜 영화를 개봉하였는데, 심의 서류를 토대로 이를 재구성해 볼 때 검열 당국과 시장 주체들 사이의 권력 관계가 일방적으로 작동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 「민족의 자주성(4) - 영화, 음악」, 《경향신문》, 1965.12.22. 2. 이화진, 「‘65년 체제’의 시각 정치와 <총독의 딸>」, 『한국근대문학연구』 18(1), 2017, 282-283쪽. - 이 논문은 한일협정이 체결된 ‘65년 체제’ 아래서 일본을 특정한 방식으로 (비)가시화하는 시각장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극장에 상영된 적도 없이 영화사의 서술로부터 배제된 <총독의 딸>의 제작 과정과 심의 단계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3. 서울방송국 연속극 <동경 나그네>의 영화화한 작품으로 최무룡이 제작 및 감독을 맡았으나, 결국 촬영이 무산되어 많은 빚을 지게 된다. 그 여파로 최무룡은 김지미와 이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4. 「TBC의 〈동경 나그네〉 일본 현지 촬영 중지령」, 《중앙일보》 1966.12.03. 5. 우수영화 제작에 대한 포상으로 외국영화수입쿼터 배분과 영화법 개정에 대한 논의는 조준형, 「지배하는 국가와 교활한 시장」, 이순진, 이승희 편, 『한국영화와 민주주의』, 선인, 2011, 311-346쪽 참조. 6. 수입추천허가신청 단계에서 제한을 두는 경우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심의 서류 해제」(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를 참조할 것. 7. 1960년대 문화영화의 존재방식에 대해서는 조준형, 「문화영화의 제도화 과정: 1960~70년대 영화법과 관련 정책 변화를 중심으로」,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지워진 한국영화사 – 문화영화의 안과 밖』, 한국영상자료원, 2014, 75~114쪽 참조.
1980년대 초중반 한국영화계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있었다. 국가의 학살을 시민의 항쟁으로 맞섰지만 그 결과는 한국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순간을 만들어냈다. 공수부대원들이 자행한 학살의 이미지는 ‘한국전쟁’의 참혹한 현장과 겹쳐지는, 아니 이를 훨씬 능가하는 잔인함으로 기억되었다. 박정희의 18년 체제가 무너진 그 자리, 다시 쿠데타로 들어선 신군부가 바로 그 배후였다. 곧이어 그들은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을 날조해 국민을 우롱했다. 한국의 극우 독재체제는 이렇게 연장되었다. 한국사회의 1980년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좌절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80년대 전반 영화계는 1970년대의 사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유신 정권이 구축한 통제 정책이 승계되었고, 한국영화는 외화 수입쿼터의 대체물로 취급받았다. 당국은 한국영화 제작편수를 100편 내외로 설정하고, 등록된 20개의 제작사가 각 4편 이상을 의무적으로 채우도록 했다(1981년도 영화시책 기준). 그리고 2편 이상의 ‘우수영화’를 제작할 때마다 또는 대종상에서 최우수·우수작품상을 수상하면 외화 수입쿼터 1편을 부여했다. 1980년부터 1984년까지 한국영화 제작편수는 91, 87, 97, 91, 81편으로 100편을 넘기지 못했다. 1980년대는 단관 개봉으로 상징되는 전통적인 영화문화가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 시점이다. 1980년 12월부터 방영된 컬러 방송으로 컬러TV가 빠르게 보급되었고, 비디오 매체의 인기가 극장 흥행을 잠식해갔다. 1984년 VTR 보급 대수가 50만 대를 넘었다는 기록에서 볼 수 있듯 1980년대는 ‘안방극장’이 제대로 힘을 받기 시작한 때다. 할리우드 영화산업이 그랬듯, 한국의 극장가 역시 대형영화와 저예산영화로 생존책을 모색했다. 전자는 70mm 외화의 리바이벌 상영, 후자는 괴기·무협·코미디 장르였다.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우울했던 시기, 임권택은 가장 잘나가는 감독 중 한 명이었다. 1970년대의 그는, 제작자에게는 우수영화를 안겨주는, 영화진흥공사에는 국책영화를 척척 만들어주는 감독이었다. 여러 영화학자에 의해 한국 ‘분단영화’의 기원으로 평가 받는 < 짝코 > 역시 기획의 외관상으로는 당국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반공영화였다. 이는 1980년 관제 영화제인 19회 대종상에서 우수반공영화상을 받았고, 1981년 20회 대종상에서 반공영화부문 특별상을 재차 받은 것으로 증명된다. 제20회 대종상영화제부터 우수반공영화상을 특별부문으로 변경해, 최우수반공영화상에도 외화 수입쿼터 1편을 부여하기로 했는데, < 짝코 >는 1981년에야 상영되는 바람에 그 첫 수상작이 되었다. 한국영화의 개봉 여부는 관심도 없던 시기였다. 정치사회적 혼란과 한국영화의 불황이 극에 달한 이때, 임권택 감독과 송길한 작가는 왜 <짝코>를 만들려고 했을까. 실제 영화는 어떤 계기로 기획되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을까. 직업 감독에서 작가주의 감독으로 1934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임권택 은 어린 시절 부친과 삼촌의 좌익 활동으로 그 역시 고초를 겪었다. 중학교 1학년 때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중3 때 집을 떠나 부산에서 군화 장사를 했다고 한다. 1956년 정창화 감독의 도제로 영화계에 입문, 20대 후반인 1962년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로 감독 데뷔해 주로 사극과 액션, 전쟁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 많을 때는 한 해 7~8편을 만드는 직업 감독으로 다작의 시기를 거쳤다. 그가 장르영화의 대가로 완성된 시기일 것이다. 영화 인생의 전환점이 된 작품은 52번째 연출작 < 잡초 >(1973)다. 이 작품을 계기로 작가적 자의식을 영화에 투영하기 시작했다. 정성일 평론가와 인터뷰하면서 그가 한 말을 옮기면 “< 잡초 >가 내 삶에 애정을 갖기 시작한 영화라면, < 왕십리 >(1976)는 내 살고 있는 땅을 사랑하기 시작한 영화”다. 1970년대 중반 한국영화계는 이장호 , 하길종 등 ‘영상시대’ 감독들이 새로운 한국영화를 내놓기 시작했다. 이 시기 “이제부터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구석에 몰린 느낌”을 받았다던 임권택의 회고에서,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이냐라는 뼈아픈 고민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그는 < 족보 >(1978), < 짝코 >, < 만다라 >(1981), < 안개마을 >(1982), < 길소뜸 >(1985) 등 작가주의 감독 임권택으로 평가되는 일련의 작품을 내놓기 시작한다. 그의 삶이 반영된 한국적인 주제를 놓고 치열하게 ‘한국’영화를 찾아가던 시기인 것이다. < 서편제 >(1993)의 한국영화 사상 최초의 100만 흥행 성공, < 취화선 >(2002)의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 등으로 세계적인 감독 반열에 올랐다. 2015년 102번째 작품 < 화장 >을 연출했다. ‘반공영화’가 아닌 ‘분단영화’ 작가 송길한 과 임권택 이 < 짝코 >의 영화화를 위해 의기투합하게 된 이유는 바로 시대적 배경과 자기 성찰에 있었다. 그들이 이 영화의 기획에 착수한 때는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좌절로 끝나고 신군부가 권력을 찬탈한 시점이다. ‘서울의 봄’의 대학생 시위대들이 그리고 광주의 시민들이 ‘빨갱이’로 둔갑되었다. 임권택에게 1980년은 “혼란기에 빠져든다고 해서 놀라기에는 너무 많은 혼란의 시대를 살아온” 자신을 반추할 수 있었던 때다. 그는 송길한 작가와 기존의 국책 반공영화를 벗어나고자 마음먹고, 좌익 빨치산의 이야기를 통해 좌우 이데올로기의 비극을 정면으로 다루고자 했다. 둘은 한 달 동안 여관방에 틀어박혀, 종군작가 김중희 의 단편소설을 거의 새로운 이야기로 확장시킨다. 영화는 전투경찰 송기열( 최윤석 )과 빨치산 부대 대장 짝코( 김희라 )의 30년에 걸친 비극을 세련된 플래시백으로 오가며, 열강의 대리전이었던 한국전쟁이 어떻게 개인들을 파멸시키는지 보여준다. 송기열은 평생을 바쳐 짝코를 추적하지만 결국 둘은 오갈 데 없는 부랑아들이 모이는 갱생원에서 만나게 된다. 이미 노인이 된 둘의 비극은 갱생원에서도 계속된다. 송기열은 무장공비 이력의 죗값을 받게 하기 위해 짝코를 데리고 나가려 하고, 짝코는 수은을 먹여 송기열을 죽이려 한다. 영화 마지막, 결국 송기열은 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짝코와 함께 갱생원을 탈출한다. 하지만 이미 사회는 경찰들조차 무장공비가 무슨 말인지 모르는 시대가 되었다. 임권택은 영화를 통해 송 경사와 짝코가 국가의 꼭두각시였고, 더 나아가 한국전쟁 시기 남한과 북한은 열강들의 장기알에 불과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시나리오와 영화 본편을 대상으로 한 두 번의 검열을 통해 그의 직접적인 발언은 삭제되었다. 바로 다음의 두 장면이다. 6·25 특집 TV 프로그램에서 패널로 출연한 한 미국인 교수가 한국전쟁이 열강들의 국지전 시험장에 불과했다고 말하는 장면, 그리고 갱생원을 도망 나온 송기열과 짝코를 만난 경찰이 망실공비가 뭐냐고 물어보는 장면으로,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영화에는 검열의 흔적만 남아있다. 전자의 경우 TV에서 6·25 프로그램이 잠깐 나온 후 이를 본 짝코가 송기열에게 “저 사람들 말이 진짜라면 말이시… 나나 거그나 불쌍한 사람들이여”라고 말하는 장면만 남았고, 후자는 “망실공비?”라는 대사는 지워진 채 경찰의 입 모양만 남았다. 이는 “망실공비도 몰라”라며 송기열이 애처롭게 반응하는 대사에서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임권택은 흔적만 남기는 방식으로 검열에 순응했다. 하지만 영화의 본질적 메시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훗날 인터뷰에서 그는 이 대목의 아쉬움을 표했지만, 도리어 지금의 우리는 장르영화 그리고 국책영화로 단련된 그의 내공을 짐작하게 만든다. 앞서 언급한바, 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두 해 연속 반공영화상을 휩쓸며 국책 반공영화로서 인정받았다. 개인의 비극을 쫓아가는 정교한 플래시백 영화는 송기열과 짝코의 장장 30년에 걸친 비극적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정교하게 구축된 플래시백을 활용한다. 어쩌면 < 짝코 >는 태생적으로 서구의 영화 문법인 플래시백이 한국영화만의 그것으로 훌륭하게 수용된 첫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김기영 의 < 이어도 >(1977)에서의 플래시백이, < 시민 케인 > (1941)와 < 라쇼몽 >(1950)의 그것에서 출발해 그만의 스타일로 뒤틀어진 것이라면, <짝코>의 플래시백은 고전적 의미에서 관객을 배려하면서도 임권택 이 하려는 이야기, 그리고 메시지와 훌륭하게 조응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크게 8번 정도 플래시백을 사용한다. 송길한과 임권택이 공들여 배치한 플래시백은, 송기열의 입장에서, 짝코의 입장에서, 때로는 송기열이 짝코를 초대해 함께 진입하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각자의 경험에서 이야기가 반복되며, 플래시백의 대미를 장식한다. 좌우익의 비극적 대립을 상징하는 두 인물의 이야기가 하나로 만나는 순간, 우리는 분단국가라는 현재를 상기해야만 할 것이다. 8번의 플래시백은 꼼꼼히 살펴볼 가치가 충분하다. 송기열은 갱생원에서 짝코를 발견했지만 그를 데리고 탈출할 형편이 아니다. 합숙소에서 연속극을 보던 송기열은 첫 번째 플래시백으로 들어간다. 전투경찰로 활약해 마을에서 인정받고 가정도 행복하던 시기다. 그날 밤 송기열은 짝코의 침상으로 가 두 번째 플래시백으로 이끈다. 송 경사가 짝코를 생포하지만 그를 놓치고 마는, 둘의 공통된 기억이다. 세 번째는 송기열을 죽이기 위해 거울 뒷면에서 수은을 긁어내는 짝코의 것이다. 지리산에서 수은 가루를 먹고 자살하려는 점순( 방희 )을 말린 뒤 송 경사에게 체포되기까지의 이야기다. 네 번째 플래시백은 다시 송기열의 것이다. 짝코의 고향집에서 그를 놓치고 불법 총기 소지로 경찰서에 잡혀갔다가, 지서장이 된 복만을 때리고 감옥까지 다녀온다. 불운은 연달아 닥친다고, 고향에 돌아오니 아들마저 죽었다. 다섯 번째 플래시백은 송기열이 짝코에게 자신을 파면한 상사에게 같이 가자고 말하는 장면에서 들어간다. 네 번째 회상의 앞 이야기로, 아내까지 자살하게 된 송기열의 비극에 짝코를 동참시킨 것이다. 합숙소의 장기자랑 장면, 짝코의 시점에서 여섯 번째 플래시백이 시작된다. 속초에서 그와 화숙( 김정란 )의 도화경이 마치 판소리 소리꾼의 ‘아니리’처럼 펼쳐진다. 이를 듣던 송기열의 시점에서 그가 화숙을 찾아간 뒷이야기가 일곱 번째 회상으로 펼쳐진다. 계속되는 장기자랑, 송기열은 다리가 부러지게 된 사연을 들려준다. 마지막 여덟 번째 플래시백이다. 그는 짝코가 탄 기차를 쫓다가 택시가 전복되어 다리마저 불구가 되었다. 이후 부랑아가 된 송기열은 여인숙에 들어갔다가, 옆방에서 쥐약을 먹고 자살하려는 짝코와 점순을 발견한다. 갱생원의 변소간에서 짝코가 송기열에게 그날 밤 점순의 안부를 물으며, 다시 짝코의 시점에서 여덟 번째 플래시백이 시작된다. 점순을 사창가에서 만나 둘이 자살하기까지의 이야기다. 이처럼 30년을 쫓고 도망친 둘의 이야기가 합쳐지며 영화는 마지막을 향한다. 짝코를 생포한 송 경사 “한국 사람이 아니고는 만들 수 없는 영화”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1」에서 정성일 의 평가처럼, < 짝코 >는 1980년대 이후 임권택 영화의 원형임에 분명하다. 그가 장르영화를 통해 축적한 스타일이 만들려는 주제, 하고 싶은 이야기에 걸맞게 활용되기 시작했다. 예컨대 그간 갈고닦은 전쟁 신의 연출은 잠깐 등장해도 존재감과 만만치 않은 의미를 발산한다. 짝코와 임신한 점순이 토벌대의 총탄을 피해 도망가는 장면이 그렇다. 화면에 슬로모션이 걸리면서 등장하는 김영동 의 국악은 그 조합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개인의 비극을 더 넓은 차원으로 환기시키는 데 일조한다. 임권택이 “국악을 체계적으로 끌어안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영화부터다. 영화의 가장 마지막, 송기열과 짝코는 고향에 가기 위해 기차에 올라탄다. 과연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짝코는 숨을 거두고 송기열은 희미하게 웃는다. 사실 이 장면은 결국 그들이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육신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것을 보여준다. 송기열은 아주 짧은 회상으로 아내와 아들과의 단란했던 시절을 떠올릴 뿐이다. 송길한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에는 이 장면이 호남선이 아닌 원주행 기차를 타고 아예 반대로 가는 것으로, 심의 대본에는 부산행 기차를 잘못 타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영화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다는 듯 시나리오의 정보를 배제한다. 점순과 짝코가 도망가는 장면에서 김영동의 국악이 흐른다. 1980년대 전반의 대표 장르 국풍 ’81을 위시로 전두환 군사정권은 섹스·스크린·스포츠로 국민을 우민화하는 ‘3S 정책’을 펼쳤다. 당연히 에로티시즘에 대해서는 검열이 느슨해졌고 기다렸다는 듯 1980년대를 장식하는 에로티시즘영화가 쏟아져 나왔다. 1981년부터 등장한 소극장 그리고 대여용 비디오의 붐이 에로영화의 기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1982년 넉 달 동안의 장기상영으로 31만 관객을 동원한 < 애마부인 >은 1980년대 에로영화의 어떤 상징이 되었다. 성적 스펙터클의 수위는 점차 높아졌고, 에로 장르는 현대 도시를 배경으로 한 것뿐만 아니라 ‘토속에로’라는 별칭을 얻으며 시대극과도 결합했다. 에로영화 일변도의 피로감 때문이었을까. 그 반대편에는 다양한 결의 멜로드라마가 관객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할리우드 화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한국영화 특유의 ‘신파적’ 멜로드라마를 극복한, 어떤 의미에서는 멜로드라마라는 틀을 빌려 사회에 대해 발언하는 영화들이 그것이다. 이때 < 바람 불어 좋은 날 >( 이장호 , 1980)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한 배창호 가, 당대 관을 사로잡는 세련된 화법의 멜로드라마로 충무로의 성공 신화를 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