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라이온 가드: 리턴 오브 더 로아
- 감독
- 호위 파킨스
- 제작년도
- 2015
- 출연
- 맥스 찰스, 롭 로우, 가브리엘 유니온, 카리 페이튼, 제프 버넷, 캐빈 숀, 어니 사벨라
태양계 궤도를 도는 에베레스트 크기만한 새로운 혜성을 발견한 천문학과 박사 과정의 케이트(제니퍼 로렌스). 다른 동료들의 열렬한 축하를 받는 가운데 지도교수인 민디 박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궤도 계산을 하다 거의 100%에 가까운 확률로 6개월 안에 지구와 충돌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부딪치는 순간 종말이 펼쳐질 게 명백한 상황이기에 케이트와 민디 박사는 NASA에 보고하는데 이때 정부 관계자들이 극비리에 개입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익숙한 SF 재난 블록버스터를 떠올릴 법하지만, < 돈 룩 업 >은 그 쉽고 흔한 길을 걷지 않는다. 이 영화는 혜성 충돌의 고전적인 마스터피스 <세계가 충돌할 때>나 < 지구의 대참사 >도, 할리우드 스케일의 위력을 담은 < 아마겟돈 >이나 < 딥 임팩트 >도, 운명적인 < 너의 이름은 >이나 로맨틱 코미디의 < 세상 끝까지 21일 >도, 그리고 암울한 아트하우스의 < 멜랑콜리아 >도 보여주지 않았던 세태 풍자에 집중한다. 무능한 정부는 정치 스캔들에서 벗어나 중간 선거에 이기기 위해 혈안이 돼있고, 언론은 심각한 분위기를 피해 가십으로만 소비하려 한다. 여기에 이익에만 눈이 먼 기업과 전문가들의 경고를 외면하고 기만하는 대중들이 가세하며 환장의 대(大)콜라보를 이룬다. SNL 작가 출신으로 윌 페럴과 함께 많은 코미디를 작업한 아담 맥케이 감독은 기후 환경 문제와 막장의 끝을 달린 트럼프 정부 그리고 제작과정 중 실시간으로 터진 코로나 상황을 혜성에 빗대 마치 실제 인류의 대위기 앞에서 벌어질 법해 정말로 무서워(!)지는 블랙 코미디를 완성해냈다. 제니퍼 로렌스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메릴 스트립, 조나 힐, 마크 라일런스, 케이트 블란쳇, 타일러 페리, 티모시 살라메, 론 펄만, 아리아나 그란데, 키드 쿠디, 히메시 파텔 등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하며, <돈 룩 업>은 넷플릭스에서 성공의 지표로 뽑는 “공개된 지 28일 동안 가장 많이 본 영화” 중 < 레드 노티스 >에 이어 역대 2위를 차지했다. 비판의 대상이 다소 편향적이라는 지적과 반복적이고 단선적인 플롯과 고압적인 자세가 불편하다는 반응도 있는 등 호불호가 갈렸지만, 2021년 오스카를 비롯해 각종 연말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각본상 등 후보에 오르며 완성도에서 호평을 얻었으며, 현재 미국 사회가 가진 문제점과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극찬도 받았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한심한 작태를 풍자하는데 주력한 작품이지만, 이 극도로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웃음과 재미, 감동을 이끌어내는 건 바로 적당한 거리두기를 통해 나름 객관성을 유지하는 니콜라스 브리텔의 명민한 음악 덕분이다. 니콜라스 브리텔 배리 젠킨스의 < 문라이트 >와 <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 >으로 오스카를 비롯한 각종 시상식 음악상 후보에 오르며 단숨에 주목을 받은 니콜라스 브리텔은 1980년대생 할리우드 영화음악가들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이력을 쌓고 있는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다. 뉴욕의 유대 가정에서 자란 브리텔은 피아노에서 발군의 실력을 드러내며 고교 시절 줄리어드 음대의 프리 칼리지 프로그램을 이수했으나, 왜 인간이 음악에 매료될까에 궁금증을 느껴 하버드 심리학과에 지원할 정도로 괴짜이자 수재였다. 학부 시절 내내 힙합 연주그룹에서 키보드 주자로 활동하며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 심취했고, 자신의 하버드 심리학과 동기였던 배우 나탈리 포트만이 처음 연출한 단편 <EVE>에서 그의 소품 “Forgotten Waltz No.2”가 쓰이며 영화음악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이후 포트만이 참여한 < 뉴욕 아이 러브 유 >의 한 꼭지를 비롯해, 각종 다큐멘터리에 참여하며 음악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럼에도 브리텔은 본격적으로 음악을 업으로 삼지 않고 월스트리트에서 잘 나가는 해지펀드 매니저이자 외환 딜러로 활동했는데, 그가 결국 다시 음악으로 마음을 돌리게 된 계기가 된 건 < 노예 12년 >에 참여하면서부터다. 스티브 맥퀸 감독의 부탁으로 한스 짐머가 <노예 12년>의 스코어를 맡았지만 영화 전반에 삽입될 소스 음악들에 대해선 다소 부담을 느끼고 있던 터라 새로 외부 음악가를 수혈했는데, 그게 바로 니콜라스 브리텔이었다. 그는 전혀 녹음된 바 없고, 제대로 전승되지도 못한, 잃어버린 노예들의 음악을 위해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실제 유행하던 스타일에 맞춰 철저한 고증 끝에 새롭게 만들어 빌보드 매거진으로부터 “<노예 12년> 음악의 비밀병기”란 극찬을 받았다. 금융권 출신답게 브리텔은 비즈니스적인 관점에서 제작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단편 영화에 제작으로 참여하기도 했으며(그게 바로 데이미언 셔젤의 < 위플래쉬 >였다!), 후에 이 영화가 장편화되며 음악에서 일부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확고히 영화음악가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건 앞서 언급한 배리 젠킨스와 아담 맥케이와 함께 한 일련의 작품들이 성공한 덕분이 크다. < 빅쇼트 > 때 브리텔의 대본에 적힌 전문적인 금융(음악이 아니라!)업계 용어 메모에 놀라 아담 맥케이가 반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사실 그의 음악이 가진 매력은 대단히 놀랍다. 이미 <빅쇼트>와 < 바이스 >를 통해 복잡하고 민감한 경제와 정치 생태계를 깔끔하고 명료하게 음악적으로 정리한 바 있는 니콜라스 브리텔은 이번 <돈 룩 업>에서도 멸망을 앞둔 경박한 사회적 혼란과 진실이 잘못된 정보 앞에 덮이는 아이러니, 무능한 정부를 비꼬는 다양하고 세련된 스코어들을 들려준다. 신랄한 풍자와 날 선 묘사들로 불쾌해질 수 있는 영화의 공격성을 최대한 무마하고, 널뛰는 코미디와 진지한 드라마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는 여러 고민 끝에 혼란이 절정에 달했던 2차 세계대전 시기 유행한 업 템포의 빅밴드 사운드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이를 메인 테마의 색채로 잡는다. 광기와 혼돈을 묘사하면서 멸망이라는 실존적인 문제 앞의 우울함과 슬픔을 내재해야 하고, 동시에 코미디 음악으로서 희극적인 면모도 갖춰야 하기에 복잡하고 미묘한 톤을 유지해야 하는데, 브리텔은 절규하듯 울부짖는 브라스섹션에서 절묘한 부조리의 묘미를 찾았다. 그래서 주인공들이 필사적으로 혜성 충돌을 경고할 때마다 빅밴드 사운드는 더 처절하게 조증 기조를 발하고, 격렬하고 활력 넘치는 사운드는 이들이 무기력하게 실패할 때마다 공허하게 울려 퍼지며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뒷받침해준다. 또한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 X’와 스티브 잡스의 ‘애플’, 그리고 마크 저커버그의 ‘페이스북’ 사이 어딘가에 위치할 영화 속 대기업 BASH의 다양한 징글(방송이나 광고, 벨소리에서 쓰이는 짧은 곡)을 배치해 공허한 낙관론과 가짜 희망주의를 조롱하며 음악적 효과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니콜라스 브리텔은 이를 위해 영화 속에 나오는 모든 핸드폰 벨소리와 기업 프레젠테이션 속 영상, 방송 시그널과 CF 음악들을 일일이 작업했다. 여기에 영웅적인 블록버스터 사운드(물론 이마저도 비웃기 위해 사용되었다!)나 휴머니즘에 입각한 정통적인 할리우드 스코어까지 활용하며 음악적 재미와 감동을 선사한다. 장르적인 방식뿐만 아니라 악기에서도 베이스, 드럼, 트럼펫 그리고 색소폰 트리오 등의 빅밴드나 전통적인 오케스트라는 물론, 밴조와 만돌린, 토이 피아노, 첼레스타, 파르피사 오르간, 차임벨, 힙합 비트를 포함한 각종 일렉트릭 효과까지 특이하고 독특한 종류를 혼합해 유희적이고 절충된 사운드스케이프를 펼쳐 보인다. 일견 스코어만 듣고 있으면 짧은 큐들에, 워낙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두서없이 펼쳐져 응집력이 떨어져 보일 수 있지만, 영화 내에서 각각 장면마다 강력하게 작용하며 존재감을 발휘한다. 또한 영화 내에선 니콜라스 브리텔이 공동으로 참여한 두 곡의 노래도 흘러나오는데, 극중 커플로 나오는 아리아나 그란데와 키드 쿠디가 영화 중반 소행성과 충돌을 경고하기 위해 콘서트장에서 부르는 “Just Look Up”과 동면에서 깨어나 새로운 세상에 진입하게 된 지구인들의 쿠키를 담은 엔드크레딧에 흐르는 “Second Nature”다. 아리아나 그란데와 키드 쿠디의 듀엣송으로 전통적인 사랑 노래처럼 시작하는 “Just Look Up”은 후반 2절에 이르러서 무지한 대중들의 계몽을 일깨우는 과격한 가사로 영화의 조롱 강도를 더한다. 아름다운 파워 발라드에 이질적인 가사가 던지는 격차야말로 이 노래의 백미로, 2021년 강력한 오스카 주제가상 후보였지만 아쉽게 탈락하고 말았다. “Second Nature”는 브리텔과 인디 밴드 본 이베어의 리더인 저스틴 버논이 함께 만든 곡으로, 혜성 충돌 후 모든 것이 사라진 세상에서 먹먹해진 감성과 풍자로 쓰린 속을 다스리기에 좋은 몽환적인 포크송이다. 권력과 재력으로 새로운 세상에 이주한 이들을 위한 노래가 아닌, 현시점에 지구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올바른 선택과 희망에 대해 화두를 던지는 응원가이자 송가라 할 수 있다. 코로나 시기 비장의 OST 중 하나였던 <돈 룩 업>으로 자신의 세 번째 오스카 음악상 후보에 지명된 니콜라스 브리텔은 아담 맥케이와 함께 HBO에서 4시즌까지 방영된 드라마 <섹세션>과 디즈니 플러스의 새로운 스타워즈 시리즈 < 안도르 >를 통해 안방 데뷔에도 성공했으며, 24년 배리 젠킨스와 새롭게 도전하는 라이온 킹의 실사화 속편이자 프리퀄인 <무파사: 더 라이언 킹>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Track List 1. "Just Look Up" by Ariana Grande & Kid Cudi 2. Discovery 3. Ephemeris 4. On Hold 5. The Call 6. C-5 Galaxy 7. Don't Look Up (Main Title Theme) 8. BASH Corporate Ident ("Liif") 9. Hyperobject Approaches 10. My Boyfriend Broke Up With Me 11. The Arrest 12. It's A Strange Glorious World 13. The Launch 14. The BASH Presentation 15. Kate Goes Home 16. FEMA-BASH Commercial 17. Arrival At The Hangar 18. There Is A Comet 19. The Comet Appears 20. The Prayer For Stuff 21. The BASH Launch 22. Twenty-Four Drones Is Enough 23. It All Comes Down To This 24. Thanksgiving (Overture To Logic And Knowledge) 25. The End? 26. Memento Mori 27. Don't Look Up (End Credits Suite) 28. Logic Waltz In B Major (Bonus Track) 29. Don't Look Up (Main Title Suite; Bonus Track) 30. Ode To Science (Bonus Track) 31. "Second Nature" by Bon Iver
그야말로 ‘디즈니 세상’이다. 올해 7월까지 한국 극장가 흥행 성적을 들여다보자면 절로 그런 생각이 든다. 십여 년 전부터 전 세계 극장가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마블 스튜디오의 수퍼 히어로 영화 대부분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이름을 달고 전 세계에 배급된다. (디즈니는 2009년 12월 마블 엔터테인먼트를 사들였고, 특히 마블의 영화 제작사인 마블 스튜디오는 2015년 8월부터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직속 산하에 두고 있다). 해마다 이 영화들 한두 편이 국내 극장가에서 크게 흥행 몰이를 하는 건 더 이상 놀랄 일도 아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디즈니가 배급한 마블의 수퍼 히어로 영화’ < 캡틴 마블 >(3월 6일 개봉)과 < 어벤져스: 엔드게임 >(4월 24일 개봉)이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서 8월 2일 집계한 결과, 각각 580만 명과 1392만 명의 관객을 모으며, 7월 24일까지 집계한 수치에서 올해 흥행 순위 2위와 6위를 차지했다. 올해 디즈니의 맹위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5월 23일 개봉해 53일 만에 ‘천만 영화’에 등극한 <알라딘>과 7월 17일 개봉과 함께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며 14일만에 관객 400만명을 돌파한 <라이온 킹> 역시 디즈니의 이름으로 배급된 ‘디즈니 영화’다. 더욱이 이 두 작품은 2010년대 들어 디즈니가 박차를 가하고 있는 ‘애니메이션 실사화 프로젝트’의 산물이다. ‘애니메이션의 명가’로 명성을 쌓은 스튜디오답게 디즈니는 < 신데렐라 >(2015) < 정글북 >(2016) < 미녀와 야수 >(2017) <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 >(2018) 등에 이어, 올해 <알라딘>과 <라이온 킹>을 거쳐, 2020년에 <뮬란>, 이후 <인어공주> <피노키오>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등, 디즈니의 고전 애니메이션을 실사로 리메이크하는 작품의 제작 계획을 빽빽이 늘어놓고 있다. 주목할 것은, 그중에서도 올해 개봉한 <덤보>, <알라딘>과 <라이온 킹>이 한국 관객으로부터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2017년 개봉해 국내 극장가에서 관객 513만 명을 기록한 <미녀와 야수>도 빼놓을 수 없다. <신데렐라>(71만 명) <정글북>(253만 명)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49만 명), <덤보>(34만 명)의 흥행 성적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온 킹>이 국내 관객에게 폭발적인 사랑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 프로젝트가 리메이크하는 애니메이션 중에서도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온 킹>은, 디즈니가 1990년대에 발표한 작품이다. ‘디즈니 르네상스’, 그러니까 디즈니가 고전적인 이야기를 완성도 높은 애니메이션 영화로 만들어 평단의 박수를 받는 동시에 전 세계 극장가에서 높은 흥행 수익을 올렸던 시기 말이다. ‘아름다운 동화의 나라’라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디즈니’의 브랜드 가치를 굳건히 한 때이기도 하다. 더욱이 이때는 국내 비디오 시장이 활성화됐던 때다.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온 킹>을 극장에서 보지 못했어도 비디오로 몇 번이고 돌려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애니메이션은 디즈니’라는 공식, 아래 어릴 적부터 이 영화들을 수없이 보고 자란 세대가 지금의 20~30대다. 더군다나 이 세 작품 모두 뮤지컬 형식의 애니메이션이다. 장면장면이 아름다운 노래와, 그와 하나 되는 환상적인 이미지로 기억되는. 올해 개봉한 실사영화 <알라딘>을 볼 때 깨달았다. 이 영화가 일깨우고 있는 건 ‘세대의 기억’이라는 걸.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첫 노래 ‘아라비안 나이트’가 흘러나오는 순간, 이 영화가 재미있는지 없는지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는데도, 내 안의 어떤 기억이 깨어나 영화와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기분이었다. 어릴 적 보고 또 봤던 애니메이션의 기억, 그러면서 빠져든 노래와 뮤지컬 장면에 대한 기억, ‘램프의 요정 지니를 만나면 난 어떤 소원을 빌면 좋을까’ 밤새 고민했던 기억…. 한 세대의 공통된 기억, 그것도 눈과 귀가 함께 기억하는 즐거운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것만큼 강력한 문화적 경험은 없다. 찬란한 상상력에 빛나는 애니메이션을 감쪽같은 실사 영상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기술력, 달라진 시대를 반영하는 재치 넘치는 각색 등, 새로운 <알라딘>의 즐길거리를 더 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알라딘> <미녀와 야수> <라이온 킹>이 한국 관객에게 사랑받은 가장 큰 이유는, 20~30대 이상 관객들에게 ‘세대의 기억’을 생생히 돌이키고 그걸 새로이 할 장을 마련해 줬다는 데 있다고 확신한다. 진정 놀라운 것은, 1990년대 ‘디즈니 르네상스’가 일군 ‘세대의 기억’이 20여 년의 세월을 넘어, 지금 진행되고 있는 ‘애니메이션 실사화 프로젝트’를 통해 보다 젊은 세대로 계속 전승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관객이 실사 버전의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온 킹>에 열광하고, 그 노래를 따라 부른 경험은 수십 년 뒤 ‘디즈니 월드’의 또 어떤 자산이 될 것인가. 조금 다른 예로, 십 수 년 뒤 디즈니가, 개봉 당시 세계적인 흥행기록과 함께 수록곡 ‘렛 잇 고’ 열풍을 일으킨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2013)의 실사 버전을 만든다고 상상해 보자. 또 어떤 진풍경이 일어날지 눈에 선하지 않은가. 세대의 기억을 창조하고, 그것을 새 시대에 맞게 새롭게 계승하고, 그 유산을 바탕으로 무너지지 않는 왕국의 영토를 확장해 가는 디즈니의 전략이 이쯤 되면 영리하다 못해 무시무시하게 느껴질 정도다. 마블의 슈퍼 히어로 영화가, 히어로마다 각기 다른 개성을 부여하고, 그들을 때로는 개별 시리즈로 헤치고, 때로는 ‘어벤져스’ 시리즈로 한데 모으는 전술로 그 세계를 매력적으로 확장하는 전략 역시 감탄스럽기 그지없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면 디즈니는, 이 시대의 가장 크고 강력한 영화적 기억을 일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이러한데, 앞으로도 그 자리를 내어놓지 않겠다고 벌써부터 탄탄한 기초 공사를 다지는 치밀함까지. 감탄을 넘어 그 치밀함이 무섭기까지 한 ‘시네마 수퍼 히어로’다. 말 그대로 ‘디즈니 왕국’이다.
라이브 클럽 ‘그레이하운드’에서 내달 무대에 설 뮤지션의 오디션을 갖는 중이다. 사장으로 보이는 사람은 무대 앞에 여유롭게 앉아 있고, 바텐더이자 덩치로 보이는 남자는 다소 성마른 표정으로 바 너머의 사람들을 관찰한다. 휑뎅그렁한 플로어에는 몇몇 뮤지션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섰다. 그러다 모던락을 연주하는 밴드가 연주를 시작한다. 그들이 떠나고 다시 무대는 조용해진다. 내공을 겨루기 전 실력을 가늠하려는 걸까, 무대 주변은 흡사 고수들이 무협을 겨루는 객잔을 방불케 한다. < 라이브 클럽 그레이하운드 >라는 제목으로 먼저 소개된, <라이브하드>의 ‘겨울 편’의 풍경은 그러하다. ‘머저리클럽’의 두 멤버와 그들의 친구가 이야기의 중심에 놓여 있으나, 영화는 오디션 무대에 선 뮤지션들의 연주에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모던락에 이어 헤비메탈이 무대를 뒤흔들고, 여성 재즈 듀오가 퓨전의 아름다움을 펼치는가 하면, 흑인 블루스 연주자가 기타 연주와 노래로 흑인의 영혼을 전한다. 마침내 등장한 머저리클럽이 펑크를 연주하지만 그들의 무대는 실패의 판정을 받고 만다. 그들의 아픔을 느끼기도 전에, 뒤늦게 나타난 플라밍고 기타 연주자가 의자에 앉는다. 그렇게, 황량했던 무대는 점차 음악의 전시장으로 변한다. 흑백의 이미지 위로 색채를 입히는 것은 음악의 색깔들이다. 어지간한 음악 프로그램보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음악을 듣는 맛이 눈길을 끄는 영화인 셈이다. <라이브하드>의 ‘겨울 편’은 제천영화제에서 단편으로 앞서 소개된 바 있고, 황욱 감독은 앞과 뒤에 ‘늦가을 편’과 ‘봄 편’을 덧붙여 부천영화제의 장편 섹션에 초대받았다. 만들어진 시기가 다른 만큼 오리지널 단편과 새로 추가된 파트는 촬영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어두운 지하의 공간에서 주로 촬영된 겨울 편이 인물 가까이 긴밀하게 접근한다면, 늦가을 편과 봄 편의보다 넓은 앵글은 느슨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오디션과 해프닝의 기록에 가까운 겨울 편과 비교해, 인물의 배경이 추가된 장편 버전이 오밀조밀한 이야기의 구조를 갖춘 것은 물론이다. 덕규(크리스 라이온 분)는 멀리 한국에 와 블루스를 연주하려고 했으나 그에게 요구되는 건 인기 있는 힙합이다. 겉보기에 그는 흑인이기 때문이다. 머저리클럽의 베이스 주자인 철( 이재호 분)은 노래를 부르고 싶지만, 베이스나 잘 치라는 말을 듣는다. 사실 그는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한다. 머저리클럽의 리더인 임재(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자취를 감추었고, 남은 멤버인 철과 섭(갈치 분)은 그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은정( 공민정 분)은 임재를 사랑하는데 그는 매번 다른 여자와 놀아난다. 여자들이 떠나면 그가 언제나 다시 자신의 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그녀는 스스로를 위로한다. 음악에 관한 영화였던 ‘겨울 편’은 ‘가을’과 ‘봄’ 편을 얻으면서 가난하고 쓸쓸한 청춘의 이야기로 화한다. 황욱 감독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가 결합된 스타일의 영화를 만든다. 그가 그것을 의도한 것인지 앞으로도 그런 스타일을 유지할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지금까지 소개한 두 편의 영화 - < 개 >(2015)와 < 라이브하드 >의 스타일은 그러하다. 한국에서 근래 발표된 음악영화들이 대부분 다큐멘터리였던 상황에서 <라이브하드>의 형식은 괜히 낯설다. 두 편의 필모를 가진 감독답지 않게 황욱은 배우들의 연기 연출에 단연 뛰어난 실력을 보인다. 뮤지션인 사람과 뮤지션이 아닌 사람, 배우인 사람과 비전문 배우인 사람이 뒤섞여 있으면 영화가 뒤뚱거리기 마련인데, <라이브하드>는 그런 단점 따위는 없다는 양 자유롭다. 뮤지션들의 연주 부분과 이야기를 맡은 배우들의 부분이 매끄럽게 연결돼 단순한 영화 너머로 일상의 한순간을 완성한다. 전작 <개>가 마치 사건 르포를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듯이, <라이브하드>는 가난한 뮤지션들이 처했음 직한 상황에 세세한 마음을 쓴다. 그것으로 현실감을 득한다. 그게 전부다. 그들을 대변하겠다고 목청을 높이거나 그들을 위로하는 척하는 태도가 없는 점이야말로 이 영화의 위대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라이브하드>는 차가운 현실을 차갑게 그린 영화일까. 차가운 현실을 차갑게 그린 영화는 적지 않다. 거꾸로, 차가운 현실을 따뜻하게 포장한 영화는 더 많다. <라이브하드>는 좀 이상한 영화다. 차가운 현실을 애써 포장하지 않아 뮤지션의 하루를 절감하게 하면서도 마냥 우울하지는 않다. 차가운 방에 작은 스토브를 켜놓아 온기를 나누는 느낌이랄까. 천사처럼 한 남자가 그들 곁에서 계속 춤을 추며 기운을 북돋우기 때문일까. 세 번째 이 영화를 보면서 어렴풋이 그 답을 알 것 같았다. 영화에서 뮤지션과 친구들은 각자 거울을 바라본다. 헤비메탈 밴드의 리더는 화장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묶는다. 덕규는 정신을 가다듬으려는 듯이 거울 앞에서 얼굴을 씻는다. 철은 현실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거울을 바라보는 습관이 있다. 은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앞에는 그들 자신밖에 없다, 당연히. 그렇다면 <라이브하드>는 그들의 자화상을 그리는 영화일까? 자화상을 그리는 것은 화가들이나 할 짓이다. 뮤지션들은 자화상을 그리는 게 아니라 무대 앞의 관객을 바라보며 연주를 해야 한다. <라이브하드>에서 관객에 해당하는 사람은 클럽 ‘라이브 와이어’의 사장이다. 카메라는 문득, 기타를 들고 포크를 부르는 여자 싱어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포착한다. 그는 분명 무대를 바라보고 있으나 그의 눈길은 어딘가 다른 곳을 응시한다. 홀로 객석을 지키는 남자인 그의 눈길은 현실의 슬픔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 관객은 혼자 남았고, 뮤지션은 그를 보며 슬픔을 연주한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며 슬픔을 위로하는 존재다. 그게 작은 불씨를 만든다. 그 불씨를 간직한 사람이라면 <라이브하드>의 마지막 장면에 초대받을 자격이 있다. <해피투게더 독립영화> 상영작: 2018.9.29.(토) 17:00 시네마테크KOFA 2관(G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