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븐
- 감독
- 리셀 솔베그
- 제작년도
- 1996
- 출연
- 버트 레이놀즈, 매트 바타글리아, 크리스타 알렌, 데이비드 애크로이드, 리차드 갠트, 안젤라 해리, 월터 올케위츠, 매디슨 매슨, 킴 체이스, 크리스토퍼 메이어, 찰스 왈하임, 마이클 사드, 찰스 워커, 피터 새버드
올해 리스트에 오른 영화 중 가장 개인적으로 와 닿았던 작품은 홍성은의 < 혼자 사는 사람들 >이다. 단지 내가 본 영화는 감독이 일반 관객들이 본 영화와 조금 다른 작품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무래도 나는 주인공 진아가 누리는 삶의 방식이 교정되어야 할 사회문제라고 느끼지 않았으니까. 올해는 될 수 있는 한 아카데미상 후보들을 리스트에 올리지 않으려 했지만 샤카 킹의 <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 >가 가진 역사의 무게와 원초적인 비극성을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 스파이의 아내 >도 처참한 실제 역사를 담고 있는 작품이지만 고전 멜로드라마와 첩보물을 거쳐 펼치는 정교하고 장르 유희는 다른 의미로 매혹적이었다. 이어지는 세 편은 판타지와 SF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 메모리아 >가 SF, 그 중에서도 말이 되는 부류에 속한다고 하면 많이들 안 믿을 텐데, 사실이다. 여전히 벽의 페인트가 말라가는 걸 지켜보게 강요하는 거 같은 아트하우스영화 특유의 고집이 눈에 뜨이긴 하지만 보편적인 의미에서 재미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셀린 시아마의 < 쁘띠(뜨) 마망 >은 얼핏 보면 소박한 시간여행 판타지처럼 보이는 설정을 통해 삼대에 걸친 여자들의 관계를 새로운 평등성을 통해 다시 들여다 본 독특한 작품으로, 이 리스트에 오른 영화 중 내가 가장 많이 반복해 볼 영화가 될 것 같다. 데이비드 로어리의 < 그린 나이트 >는 아서왕 전설의 A24스러운 재해석으로, 아마 이 리스트의 영화들 중 ‘예술하는’ 것으로 <메모리아>와 경쟁할 수 있는 작품일 텐데, 그렇다고 해서 아서왕 전설의 아이돌을 시치미 뚝 떼고 잔인하게 놀려먹는 사디즘의 즐거움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나머지 영화는 모두 호러다. 단지 앞의 세 편은 장르호러를 의도한 작품은 아니다. 조지 A. 로메로의 < 놀이공원 >은 개신교 계열 단체의 주문을 받아 제작된 교육영화지만, 유명한 동네 사람이라고 해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만든 사람에게 이런 영화를 맡기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 영화가 출구 없는 악몽으로 그리는 노년의 삶은 심지어 좀비떼보다 무섭다. 에마 셀리그먼의 < 시바 베이비 >는 유대계 전통 장례식이라는, 우리에게 낯선 행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막 졸업을 앞둔 여자 대학생의 주변에서 일가친척들이 만들어내는 시공간의 뒤틀림과 이 과정 중 발생하는 폐소공포증은 친숙하기 짝이 없다. 임신 주제의 영화가 바디 호러로 흐르는 건 흔하지만, 남궁선의 < 십개월의 미래 >는 여기에 임산부에 대한 한국사회의 덜떨어진 편견과 억압이 더해져서 <에일리언>보다 서너배는 더 무섭다. 대한민국의 출산율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어대는 인간들은 < 시계태엽 오렌지 >에 나오는 세뇌장치에 묶어놓고 이해가 될 때까지 이 영화를 반복 감상시켜야 한다. 슬프게도 그들 상당수는 시체가 될 때까지 의자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정곡을 찌르는 예술작품이라도 모든 사람들을 이해시키지는 못한다. 이제 한 편 남았다. 사실은 세 편이다. 리 자니악의 < 피어 스트리트: 1666 >은 < 피어 스트리트: 1994 >, < 피어 스트리트: 1978 >로 이어지는 삼부작의 마지막편으로, 이 세 영화를 분리해 감상하는 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넷플릭스는 이 영화들을 일주일에 한 편 간격으로 틀었는데, 그 때문에 이 작품을 보는 행위는 8,90년대에 유행했던 미국 미니시리즈의 ‘텔레비전 이벤트’ 감상과 비슷해졌다. 어차피 극장을 통한 적 없는 작품이니 세 영화를 그냥 한 편의 미니시리즈로 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원래 의도는 한 달 간격으로 개봉되는 극장용 영화 시리즈였다고 하지만. 예고편만 보면 큰 기대가 안 생긴다. 그냥 예쁘장한 틴에이저들과 연쇄살인마를 한군데 모아놓고 다양한 방식으로 죽은 시체들을 쌓는 놀이를 하는 복고풍의 슬래셔 영화인가? 틀린 설명은 아니다. 그리고 첫 편의 도입부를 보면 좋지 않은 의미로 어리둥절해진다. 잘 만들긴 했는데, 굳이 저렇게까지 성실하게 웨스 크레이븐의 < 스크림 > 도입부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을까? 심지어 <스크림>은 이미 메타 호러인데 여기에 새 레이어를 얹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설정과 맥락을 설명해보자. <피어 스트리트> 시리즈의 원작은 어린이 대상 호러물인 <구스범스> 시리즈의 R.L. 스타인이 청소년 대상으로 쓴 동명 호러 시리즈다. 셰이드사이드라는 가상의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주인공들은 책마다 바뀌며 폭력의 강도는 <구스범스>보다 높다고 한다. 자니악의 시리즈는 셰이드사이드라는 마을, 피어와 구드라는 가문명을 가져왔지만 이야기 자체는 오리지널이다. 셰이드사이드에 대응하는 부촌인 서니베일 역시 시리즈의 창작이다. 서니베일은 <버피> 시리즈의 무대인 서니데일을 연상시키는 이름인데, <버피> 역시 <스크림>만큼이나 이 시리즈에 뚜렷한 발톱자국을 남긴 작품이다. 둘 다 기존장르를 재해석하고 비트는 메타 호러에 속해있기도 하고. 시리즈의 주인공인 디나는 <스크림>보다는 <버피>에 가까운 인물이다. 셰이드사이드 고등학교의 밴드 멤버이고 동성애자, 흑백혼혈이다. 당연히 자신도, 도시전설에 미친 동생 조시도, 마약쟁이인 불량청소년 친구들도 모두 아웃사이더다. 여자친구 샘이 재혼한 엄마를 따라 부촌인 서니베일로 갔기 때문에 디나의 삶은 더 끔찍해졌다. 그런데 전설의 마녀 사라 피어의 저주에 걸린 것처럼 보이는 평범한 사람들이 살인마로 변신하고, 디나 일당은 이들에게 쫓기게 된다. 일단 <피어 스트리트 파트: 1994>를 다 보면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도입부는 여전히 <스크림>을 지나치게 흉내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통적으로 보이는 슬래셔의 스토리를 따라가는 동안에도 이 영화가 어떤 게임을 하고 있는지 완전히 감이 오지 않는다. 영화가 삼부작을 염두에 두고 구성되어 있어서 독립된 영화의 무게중심이 관객들의 예상과는 다른 위치에 놓여있고 그 때문에 늘 기대와는 어긋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다. 폭력의 정도와 살생부의 선정도 예측하기 어렵다. 다음 편의 예고도 예측에 별 도움을 주지 않는다. 영화들이 계속 과거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피어 스트리트: 1978>로 시리즈가 이어지면서 영화의 계산이 드러난다. <피어 스트리트>는 ‘진지하다’. 이 영화가 모델로 삼은 <스크림>과 7,80년대 슬래셔 장르의 관계를 보자. <스크림>의 영화광들에게 슬래셔 영화의 살인은 게으른 창작자들이 반복되는 클리셰들을 갖고 만든 어처구니 없고 대충 공허한 이야기의 일부로, 이들을 모방한 영화 속 연쇄살인 역시 잔인무도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얄팍한 게임이다. 하지만 자니악은 비슷한 구성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는 시리즈 영화를 만들면서 이 허구와 현실 사이의 벽을 치워버린다. <피어 스트리트: 1994>에서 일어난 사건 일부를 설명하는 <피어 스트리트: 1978>의 사건은 여름 캠프와 연쇄살인마가 나오는 익숙한 슬래셔 영화의 공식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피어 스트리트: 1994>의 우주에서 실제로 일어났다. 그리고 우리가 <피어 스트리트: 1994>를 통해 이미 연쇄살인마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신디는 극중 내내 놀랄만큼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물로 존재한다. <피어 스트리트> 시리즈를 구성하는 재료들은 대부분 호러 관습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는 주인공들의 진지함과 입체성을 막지는 못한다. <피어 스트리트: 1666>에서 시리즈의 야심은 심지어 더 커진다. 시리즈 설정의 기원을 파기 위해 북미 대륙 개척시대로 시간여행한 이 영화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는 사실 대충 짐작은 간다. 사회적 소수자인 여자아이가 주인공인 이야기가 17세기 미대륙에서 일어난 마녀 사건과 연결된다면 그 마녀는 역사가 말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고 다른 일을 겪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영화는 디나와 사라 피어의 소수성을 연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미국 건국역사 전체를 재검토한다. 허울좋은 공정의 판타지는 파괴되고 수백년에 걸친 차별의 구조가 드러난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온몸으로 이에 맞서 싸운다. 천진난만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호러 관습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세계 속 이야기라고 해도, 그 안에서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청소년들을 보고 냉소하는 건 유치한 일이다. 그리고 부끄러움 없는 진지함 속에서 영화의 공포, 로맨스, 액션, 드라마는 모두 강렬한 힘을 얻는다. 그 결과물은 놀랄만큼 정통적으로 재미있는 오락물이다. 우리가 할리우드에서 기대하는 게 바로 이런 게 아닌가.
<변신> 올 여름에는 < 변신 >( 김홍선 , 2019)과 < 암전 >( 김진원 , 2018), 한국 공포영화 2편이 개봉했다. 8월 21일 개봉한 <변신>은 29일까지 100만명이 넘는 관객이 들며 좋은 성적을 냈고, 8월 15일 개봉한 <암전>은 10만명의 관객이 아쉽기는 하지만 정통 공포영화로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매년 여름마다 공포영화 2, 3편이 개봉하고 적어도 한 편 정도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호시절이 돌아오는 것일까? 아직 판단은 힘들지만 공포영화가 이전보다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암전> 최근 몇 년간 한국은 물론 해외의 공포영화들이 좋은 흥행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시작은 2013년 제임스 완의 < 컨저링 >이었다. 이후 애너벨 시리즈와 <더 넌> 등으로 확장된 컨저링 유니버스의 출발인 <컨저링>은 한국에서 226만명의 관객이 관람했다. 보통 5백만은 넘어야 히트작이라고 보겠지만 공포영화의 경우는 다르다. 한국에서 공포영화는 한국이나 해외 작품 가리지 않고 마이너 장르다. 한때 < 여고괴담 >( 박기형 , 1998), < 장화, 홍련 >( 김지운 , 2003) 등의 히트작이 나오기는 했지만 지속된 흐름으로 정착되지는 못했다. 4, 5편의 공포영화가 경쟁하던 여름도 있었지만 시류에 맞춰 조잡하게 만들어낸 작품은 관객의 실망으로 이어졌다. 공포영화에 관심이 없고, 좋아하지도 않는 프로듀서와 감독이 저예산으로 관객의 관심을 끌기 위해 급조된 작품이 많았다. 공포영화의 ‘스릴’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정교한 테크닉이 필요할 뿐 아니라 ‘공포’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필요하다. 무서운 분장과 깜짝 효과만으로는 공포영화를 만들 수 없다. <컨저링>이 성공한 후 2014년 < 애나벨 >(존 R. 레오네티)은 92만명, 2016년 < 컨저링 2 >(제임스 완, 2016)는 192만명의 관객이 들었다. 호러영화의 전통적인 스타일을 현대적으로 리메이크한 ‘컨저링 유니버스’는 젊은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리고 2015년에는 장재현 감독의 < 검은 사제들 >이 544만명의 대성공을 거두었다. 사제복을 입은 미남이라는 컨셉을 앞세운 트렌디한 영화였고, 공포의 문법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였다. 장르적 완성도가 높았다. 2017년에는 미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조던 필 감독의 < 겟 아웃 >이 213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해외에서 화제를 끌기는 했지만, 무명 감독 연출에 흑인들이 주연을 맡은 <겟 아웃>의 성공은 놀라운 일이었다. < 애나벨:인형의 주인 >(데이비드 F. 샌드버그>도 193만명의 관객이 들었다. 전작의 2배가 넘는 흥행이었다. 미국에서 대성공을 거둔, 스티븐 킹 원작의 < 그것 >(앤드레스 무시에티)이 88만명이라는 아쉬운 성적이기는 했지만, 한국에서도 화제성을 가진 공포영화라면 대중성이 있음을 증명했다. 2018년에는 다양한 공포영화가 선보였다. 실화 괴담을 소재로 한 < 곤지암 >( 정범식 )을 267만명의 관객이 봤고, 컨저링 유니버스에 속하는 <더 넌>이 101만명이었다. 공포만이 아니라 예술영화의 범주로도 가능한 < 유전 >(아리 에스터)은 17만명이 들었다. 페이크 다큐 형식으로, 실재했던 곤지암의 폐건물을 찾아가는 내용인 <곤지암>은 한국 공포영화의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평가할 수 있다. 특별한 스타나 화제 없이도 관객들은 흥미로운 공포영화를 선택한다. 또한 공포 장르는 중독성이 높아 한 번 좋아하게 되면 지속적으로 장르를 소비한다. <사바하> 올해는 <검은 사제들>의 장재현 감독의 신작 < 사바하 >가 239만명, < 겟 아웃 >의 조던 필 감독의 신작 < 어스 >가 147만명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애나벨 시리즈 3번째 영화인 < 애나벨 집으로 >(게리 도버먼)도 48만명이 들었다. 모두 관객은 전작보다 줄었지만, 전작보다 약한 화제와 임팩트에도 이 정도의 거둔 것은 평가할 수 있다. 다음 작품의 완성도가 이 감독들의 미래를 결정지을 것이다. 공포영화는 메이저에서 성공을 거두기가 쉽지 않은 장르다. 드라큘라와 프랑켄슈타인, 늑대인간 등이 등장한 유니버설 호러의 성공 후에도 호러는 서브컬처의 영역에 속했고, B급영화로 주로 만들어졌다. 호러가 메이저로 복귀한 것은 윌리엄 프리드킨의 < 엑소시스트 >(1973)가 대성공을 거둔 덕이었다. 그리고 1980년대 <할로윈>, < 13일의 금요일 >, < 나이트메어 > 등 10대 관객이 좋아하는 슬래셔 호러가 인기를 끌었다. 90년대 들어 주춤하던 할리우드 호러는 슬래셔 호러를 변주한 웨스 크레이븐의 < 스크림 >(1996), < 링 >(나카다 히데오, 1998)과 < 주온 >(시미즈 다카시, 2002)이 주도한 J호러가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되면서 잠깐 주목을 받았다. 최근 공포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공포영화가 선전하고 있는 것은, 세계적인 흐름의 영향이기도 하다. 할리우드는 물론 동남아에서도 요즘 공포영화는 약진하고 있다. 제임스 완 감독의 컨저링 유니버스가 대성공을 거두었고, <겟 아웃>과 <유전> 등 예술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 호러영화가 선전했다. 케이블 채널과 넷플릭스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는 9시즌까지 나온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를 비롯하여 넷플릭스의 <힐하우스의 유령>, 스티븐 킹 원작의 <제럴드의 게임> 등 저예산의 공포영화와 드라마가 탄탄한 인기를 과시한다. 또한 동남아인 인도네시아, 베트남, 태국, 대만 등에서 공포영화가 그 해 흥행 1위나 높은 순위에 오르는 등 인기를 끌고 있다. 전통적 호러 강국인 태국에 이어 <사탄의 숭배자>와 <드레드 아웃>의 인도네시아, <마신자> 시리즈와 <카르마>의 대만 그리고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에서도 활발하게 호러영화가 만들어지고 흥행에서도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다. 저예산이 가능하면서 확실한 마니아를 거느리는 호러영화는 다큐멘터리와 함께 21세기 들어 제작편수가 가장 많이 늘어난 장르이며 인기 장르가 되었다.
숏을 찍는다는 것 “하스미 선생님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사실 최근에 고민이 하나 생겼는데요. 숏을 찍을 때, 한 컷을 찍을 때 어느 정도의 힘을 들이는 게 좋을까 하는 겁니다. (중략) 영화는 숏이 생명이지요. 제가 가진 기술이란 그것밖에 없어요. 그것 외에 제가 잘하는 게 없는 거죠. 그렇지만 숏으로 어디까지 승부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거에요.” “열심히 숏을 찍으려는 노력은 어디까지 전달될까요.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모르는 채로 두는 게 좋은 건지, 억지로라도 알아달라고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은 건지 항상 고민됩니다.” 올해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책 중에 한 권인 『영화 장화』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 책은 일본 영화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와 그의 제자이자 일본 영화계의 작가주의를 대변하는 영화감독 구로사와 기요시 그리고 아오야마 신지가 나누는 긴 대담집이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일본 영화 내 영향력은 대단했다. 70-80년대 그가 대학에 개설해 강의했던 “영화 표현론”은 영화를 분석적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고, 그의 평문들은 젊은 영화광들에게 거의 교본처럼 낭독되었다(심지어 그의 글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다). 당시 이 수업을 통해 구로사와 기요시와 아오야마 신지가 영화계로 입문하였다. (나는 이 두 감독에게 도대체 하스미 시게히코의 강의 방식과 내용이 무엇이었기에,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열광했는지 물은 바 있다. 아오야마 신지는 관념을 구체화시키는 쇼트를 발견하고 그것이 어떻게 영화 속에 구축되는지, 그 구성원리를 발견했던 방식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최근에 만났던 구로사와 기요시 역시 쇼트의 원리에 관해 이야기 했다. 경제적이고 기술적으로 가능한 쇼트를 통해 영화의 의미와 형식을 축적해 나가는 방법들, 그것은 그가 현재 일본 대학에서 영화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영화 장화』에서 이들이 나누는 대담은 때론 당혹스러우리만치 담대하고 솔직하다. 그들이 존경해마지않는 감독과 작품들에 대해서는 찬탄과 동경을 쏟아내지만, 반면 그들이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영화와 감독들에 대해서는 혹독한 비판과 조소를 마다하지 않는다. 영화에 관한 날카로운 시선과 언어들을 가진 이들의 거침없는 이 대화는 오래전, 스승과 제자로 만나 긴 시간을 함께해온 이들이 나눌 수 있는 아주 사적이고 주관적인 취향의 고백이자, 이론과 현장을 넘나들며 체화되고 정립된 영화 존재론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과 고민들, 변화하는 영화의 위상과 환경에 대한 불안과 매혹을 모두 포함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다 불현듯, 가장 겸손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자신의 오랜 스승에게 새삼 진지하고도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 것이다 “쇼트를 만든다는 것.” 무려 사십여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영화를 만들고 고민해왔던 세계적인 거장에게도 영화는 여전히 변화와 질문으로 가득 찬 모호한 대상인 것이다. 숏을 찍을 수 있는 자 하스미 시게히코는 구로사와 기요시를 당연히 ‘숏을 찍을 수 있는 감독’이라고 칭한다. 단순히 이야기를 전개하는 기능적이고 기술적인 컷들이 아니라, 의미와 형식을 갖춘 가장 영화적인 언어를 구축할 수 있는 예술가인 것이다. 구로사와 기요시에게는 분명 그만의 언어와 모드가 존재한다. 설혹 크레딧을 보지 않고 마주하게 된 영상이라 할지라도, 보는 순간 ‘기요시의 영화구나, 내적 불안과 위기를 파고드는 기묘한 세계가 곧 시작되는구나’를 알아보게 하는 그런 영화적인 언어들이 있다. 웨스 크레이븐 감독이 영화관 체험을 어둠과 빛이 교차하며 시작되는 부두교 주술사의 환각적 제의에 비유하듯(영화관에 드리워진 어둠 사이로 스크린에 빛이 투사되는 순간, 부두교 주술사의 제의가 시작될 때 비현실적 사태를 기대하는 참여자의 흥분이 시작되는 것과 흡사하다고 비유하는 것),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는 늘 시작과 함께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알리는 묘한 매혹과 설렘, 긴장과 공포를 수반한다. < 예조, 산책하는 침략자 予兆 散歩する侵略者 劇場版>(2017)의 오프닝도 바로 그렇게 시작된다. 하스미 시게히코와 구로사와 기요시의 표현대로 ‘숏을 찍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붉은빛의 철제 안전망이 둘러진 공동주택의 현관 앞 계단. 안전망 저편으로는 도시 외곽의 주택들이 보이고, 이내 한 여성이 계단을 올라와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측면으로 비춘다. (문을 열고 들어선다는 것. 기요시 영화에서 ‘문이 열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만지는 행위’(접촉)와 더불어 가장 큰 사건의 추동 행위로 쓰인다) 다음 컷은 현관 입구에 놓인 켤레의 남성 구두, 그리고 조금 전 실내로 들어선 그녀의 발과 다리. 우리는 여전히 여성의 얼굴을 볼 수 없지만, 영화 속 여성은 남성 신발을 통해 집안에 남편이 귀가해 와 있음을 알아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예의 다음 컷. 이 쇼트야 말고 첫 번째 붉은 철제 안전망이 드리워진 현관 밖 전경을 포착한 장면과 더불어 기요시의 영화적 이미지와 카메라 움직임 모든 것을 망라한다. 기요시의 많은 영화에서 그러하듯, 집안 내부는 여러 격자로 구분되어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열린 창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의해 마치 생명을 지닌 듯 텅 빈 공간에서 너울거리는 커튼의 형상. 창밖에서 비추는 부드러운 햇살과는 대조적으로 죽은 듯이 가라앉은 실내 분위기. 이 화면 내 공간 안으로 현관을 통과한 여성이 거실로 들어와 집 안을 살피다 문득 뒤쪽 커튼 너머를 향해 시선을 돌리고 남편을 부른다. 이때 프레임 외부 공간을 향한 그녀의 시선과 몸짓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발견한 듯 잠깐 멈춘 채 지속되고, 이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화면 밖 공간으로 빠져나간다. 이때까지 관객은 그녀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 수 없다. 그녀가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간 뒤,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여 (흡사 유령적 시선처럼) 그녀가 머물러 응시했던 시점으로 관객을 안내한다. 그녀의 시선이 머물렀던 커튼 너머의 공간에는 한 치의 미동도 없이 서 있는 남자가 있다. 매우 천천히 그러나 불길한 기운을 암시하며 움직이는 카메라 워킹을 통해 발견되는 남자의 형상은 빛의 조작으로 만들어진 그림자와 더불어 기괴하고, 그것은 흡사 기요시의 전작 < 회로 >(2001)에서 목격했던 유령의 형상을 연상케 한다.(벽이나 난간에 서 있다 얼룩으로 변하며 유령이 되어갔던 형상들). 잠시 뒤, 멈춰 선 화면 안으로 여성이 다시 들어와 남자의 뒷모습을 길게 바라본다. 유령과도 같은 존재감으로 움직이는 카메라가 운동과 정지, 시선과 응시를 구성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기요시가 시작하는 이 새로운 영화적 세계에서, 저 남자에게 이미 무언가 사건이 도래했으며 여자는 이 짧은 순간에 그 모든 불안을 감지했음을 알게 된다. (기요시의 이러한 쇼트에서 카메라의 시선과 움직임은 할리우드 고전기에 구축된 제도적 재현 양식으로서의 촬영과 편집의 비가시적 메커니즘처럼 인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카메라의 유동적 시선과 위치의 전능성을 가시화하며, 영화적 디제시스와 관객, 그 사이에 초월적으로 존재하며 내레이션을 전개하고 분위기를 형성하는 주체가 된다) 여자가 한참이나 남자를 말없이 응시하고 나서야, 뒤늦은 대답을 하며 뒤돌아서는 남자는 조금 전의 이상한 기운과는 달리 금새 일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와 아내를 맞이한다. 여자는 남편의 응답을 듣고서야 방향을 돌려 현관 옆에 있는 주방으로 건너간다. 카메라는 천천히 그녀의 동선을 쫓아 그녀가 주방에서 물건을 정리하는 모습을 비춘다. 조금 뒤 남편이 그녀 곁을 지나 화면 밖 방안으로 빠져나가면, 조금 전 밝은 테라스와는 대조적인 어둠에 가라앉은 주방 안 그녀 모습 좌측으로 천천히 이 영화의 타이틀 “예조, 산책하는 침략자”가 제시된다. 타이틀이 사라지면 여자는 문득 하던 동작을 멈춘 채 의심 어린 시선으로 남편 쪽을 바라보다 천천히 테라스로 발길을 옮긴다. 그리곤 남편이 서 있던 자리에서 그가 바라보고 있었을 무언가를 응시하는 그녀의 모습을 카메라는 길게 비춘다. 이때 시작되는 그녀의 내레이션, “그것은 정말 사소한 위화감으로 시작되었다” 기요시의 전형적인 롱테이크 쇼트라 할 수 있는 이 세 번째 컷은 아파트 실내 공간을 좌우와 전후경으로 구분하는 카메라 워킹, 테라스의 밝은 빛과 주방과 복도의 어두움, 등장인물의 생명력 있는 움직임과 죽은 듯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정지된 순간의 대비. 아파트 외부 공간에서 들려오는 각종 소음들(외화면 소리, 그러나 논리적 근거가 없는 소리들까지 망라하는 기괴함. 기요시는 외화면 공간의 소리 활용에 대해 질문하자 인과론적 출처가 없는 소리들을 영화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즐긴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가령 현장의 스텝들이 실수로 자아내는 소리들, 엔지 사운드, 건물 밖에서 영문 모르게 들려오는 기계음 같은 소리들을 그는 녹음하여 보관하고 영화에 삽입하며 재창조하는 것이다)과 내화면 사운드를 조율하며 그로테스크하고 언캐니(uncanny 두려운 낯설음)한 기요시 특유의 영화적 세계를 안내한다. 예조와 산보 발터 벤야민의 근대적 주체, ‘산보자’ 개념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공연된 바 있는 미에카와 모토히로의 동명 작품 < 산책하는 침략자 散歩する侵略者>(2017)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개념을 상실하는 인간을 통해, 인간의 본질, 불안과 해방에 관한 은유와 풍자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의 기본 설정은 구로사와 기요시 작품과도 잘 맞닿아 있다. 그러나 원작을 각색하기보다는 스스로 시나리오를 써왔던 그의 작품 성향대로 기요시의 <산책하는 침략자> 시리즈는 오롯이 그만의 작가주의적 세계 안으로 흡수되어 재창조되었다. 특히 전작 <산책하는 침략자>가 외계인들의 개념 수집과 살상, 침략과 그 후의 과정까지 묘사된다면, <예조, 산책하는 침략자>는 전작에 등장하지 않았던 다른 인물들을 중심으로 침략의 예조(징조)와 과정, 그리고 침략 직전까지의 과정을 이면화처럼 제시한다. 전작이 침략자를 전면에 내세웠다면 <예조>는 발생하지 않은 사건, 혹은 드러나지 않은 실체를 직감적으로 감지하고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 능력을 가진 지구 여성의 관점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따라서 전작은 타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인간 존재에 대한 개념적 이해 과정이라면, <예조>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회피하거나 방어하자고 하는 인간 내부의 불안과 공포, 윤리적 갈등에 좀 더 초점을 맞춘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작품은 큰 틀에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영화이다. ‘언어’라는 외부적 질서를 통해 자아를 인식하고 주체성을 학습하며, 동물적인 생존 본능으로 위기에 반응하는 인간들은 때로는 소멸해도 무방할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존재이며, 또 때로는 치명적인 자기 결함과 트라우마, 불안과 공포로 점철된 나약한 존재이고, 또 때로는 외계의 타자조차 감화시켜내는 사랑과 공존의 존재이자, 윤리적 존재이기도 하다. 언어와 주체성, 자아와 타자, 의식과 무의식 등 정신분석학과 구조주의 기호학의 기본 개념을 영화적인 사건으로 묘사한 듯한 이 작품에서 외계인들이 수집하는 기본 개념이 가족, 소유, 자아, 노동, 과거, 미래, 공포 그리고 사랑으로 시작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언어게임을 통해 주체 혹은 인간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기요시 영화에서 이미 낯설지 않다. 그의 걸작인 1997년작 < 큐어 CURE, Kyua >에서 우리는 이미 언어와 목소리라는 권력을 통해 타인을 지배하고 공포와 욕망, 불안과 적대를 끄집어내며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했던 기요시의 테마를 본 적이 있다. 정신의학을 공부하다 초월적 능력을 지닌 극 중 연쇄살인범 마미야는 빛과 목소리를 통해 타인을 지배하고, 그들 내면의 억압된 적대를 폭력과 살인으로 끄집어낸다. 그와 동시에 윤리적 갈등을 제거한다. (<큐어>에서 최면에 걸린 인간들은 억압된 불만을 끄집어내 살인을 저지르고도 윤리적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큐어>의 명장면 중 하나는 경시청에서 경찰 간부와 마미야가 벌이는 설전이다. 마미야는 자신을 비난하며 취조하는 경찰간부에서 반복적으로 ‘당신은 누구인가?’를 질문한다. 경찰 간부(오스기 렌. 이번 영화<예조>에서는 후생성 간부로 출현해 외계인과 비슷한 심문을 벌인다.)는 그 질문에 자신의 직함과 이름을 대지만, 마미야는 지속적으로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현대 사회에서 누구나 자신을 설명하며 이름과 직함을 대지만, 그것이 과연 인간의 본질적인 자아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인가? <예조>에서 외계인들은 인간의 ‘개념’을 수집하는 방법으로 <큐어>에서의 그것처럼 언어적인 목소리의 권능을 이용한다. 빛과 목소리를 통한 질문들, 그리고 무력하게 응답하고 순응하는 인간. 특정 개념이 상실된 이후 대부분 인간들은 오늘날 인간 사회의 ‘정상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행위와 불안 혹은 해방적 쾌감을 맞보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 보태어, <예조>는 외계인들의 가이드로 활동하는 자들의 윤리적 불안을 역시 중요한 테마로 다룬다. 개념을 빼앗을 대상을 선정할 수 있는 권력. 그러나 그 선택 능력은 이내 타인의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며, 그들의 죄의식이 육체적 통증으로 발현하는 과정을 묘사하는 것이다. 언캐니와 유령 그리고 영화 <예조>의 초반부, 주인공 예츠코의 공장 동료가 그녀에게 불쑥 이상한 이야기를 꺼낸다. 집에 유령이 있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면 안 되는 존재, 그런데 늘 곁에 머무는 존재, 얼핏 아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어 더 공포스러운 존재가 집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상함을 느낀 예츠코는 다음 날 동료의 집을 직접 방문하게 되고, 동료가 유령이라 지칭했던 존재가 그녀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동료는 ‘가족’ 개념을 빼앗긴 이 영화 서사의 첫 번째 희생자이다. 친숙하지만 낯선 존재, 이 언캐니한 공포는 1950년대부터 숱하게 변주되며 만들어진 < 신체 강탈자의 침입 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 >(1956)의 설정으로부터 시작된다. 형상은 같지만 분명 다른 존재, 돈 시겔로부터 시작되는 <신체 강탈자의 침입>에서 외계인에게 가족의 신체를 강탈당한 사람들은 영문 모를 이질감과 친밀감(언캐니. 두려운 낯섬. 분명 같은데 같지 않은 듯한 느낌이 주는 공포) 속에서 존재의 불안과 공포를 훨씬 크게 체감한다. 이러한 설정은 <예조>에서 비슷하게 변주된다. 어딘지 익숙하기 때문에 더 큰 공포. 예츠코의 동료가 ‘유령’이라고 단정한 그것은 기요시 영화의 공포를 연장한 개념이기도 하다. 예전에 진행됐던 기요시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는 유령을 본 적은 없지만, 내가 영화 속에서 유령을 표현할 때는 ‘죽음’이라는 개념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죽음은 현실세계에서 항상 일어나는 일이고 우리 바로 옆에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죽음은 결국 세계의 양면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영화라는 픽션의 양면성을 상징하는 것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본다. 아까 영화란 무엇인가를 질문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가장 현실적이면서 현실에는 없는 것이, 바로 죽음과 영화의 양면성이다. 유령은 죽음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유령이라는 것의 어려운 문제는 그것이 인간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즉 인간이 죽어서 유령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연장으로서 유령이 존재하는 가. 사실 인간이 살아가는 시간은 길지 않다. 죽고 난 유령이야말로 사실은 인간의 본질일 수 있다. 그래서 유령의 모습이 인간의 모습이고 진정한 본질이다. 또 사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 자신을 유령으로 결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과연 인간을 유령으로 상상할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결국 나에게 유령이란, 영화의 존재론이자 인간의 존재론을 고민하게 만들고 출발하게 만드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영화 <로프트> 상영 후 나눈 인터뷰) 그의 이러한 유령적 세계관은 <예조>의 후반부, 외과의사 마카베의 신체를 빌어 존재했던 외계인이 죽음 직전에 하는 대사에서 다시금 드러난다. 이미 타인을 살해하면서 공포와 죽음이 연관되어 있음을 터득한 그는 자신이 죽어가는 순간, “나에게도 죽음이 찾아오는구나,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무서워, 하지만 죽음은 언제든 바로 옆에 있어. 이건 운명이야. 받아들이자”라고 말한다. 구로사와 기요시에게 인간-죽음-유령--영화는 긴밀하게 연결되는 실체이다. <산책하는 침략자>와 <예조, 산책하는 침략자> 모두는 기요기가 최근 가장 다루고 있는 ‘사랑’의 테마를 관철시키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기요시와 러브스토리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그는 확실히 < 해안가로의 여행 岸辺の旅 >(2015)에서부터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인간 존재의 힘으로서 ‘사랑’을 묘사한다. 산책 시리즈 모두 결국 인류를 구원하거나 혹은 죽음 앞에선 개인의 공포를 극복하게 하는 유일한 원천은 사랑이라고 그는 피력한다. 그것은 그저 단순한 감상주의나 낭만이 아니라, 이제는 어른이 되어버린 기요시 감독이 느끼는 책무감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인터뷰에서 했던 어른으로서의 책임감 발언(그가 왜 <밝은 미래> 이후 더 다크한 영화들을 만들어내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정도로 나빠지는 사회에 대한 불안을 언급했다)은 <산책하는 침략자>에서 소유 개념을 빼앗긴 히키코모리 청년과 가이드가 광장으로 나와 사람들에게 하는 연설 내용, 즉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지기 전에 막아야 한다는 장면과 겹쳐진다. 그러나 영화 속 군중들은 이내 그러한 연설을 외면하고 무시한다. 그런 상황 속에서 극 중 캐릭터들 혹은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발견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은 인류의 공존을 위한 사랑일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두 편의 장대한 지구 종말 서사로 구축된 개념적 SF 영화 <산책하는 침략자>와 <예조, 산책하는 침략자>는 개별적 사건을 추적하던 그간의 미시적 스릴러 서사를 넘어, 장구한 인류의 근원과 현재 그리고 미래로 확장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상상하는 모든 것을 디테일하게 시각화하는 디지털 영화의 전능적 시대에, 여전히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상상할 수 있는 것과 재현할 수 없는 것, 영화적인 시간과 공간의 창조능력,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영화의 존재론적인 언어, 쇼트의 개념과 한계를 사유하는 감독의 흥미롭고 실험적인 인류학 에세이는 여전히 흥미롭고 매혹적이며 원숙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