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테의 연가
- 감독
- 장길수
- 제작년도
- 1987
- 출연
- 윤석화, 신성일, 길용우, 박영규, 서갑숙, 김성찬, 김애경, 전숙, 김길호, 오영화, 이영호, 최성관, 김지영, 조경래, 안진수, 추봉, 정영국, 유하연, 이연옥, 양정숙, 박정아, 박수진, 김미경, 이미연, 김수경, 백수정, 정혜정, 김대영, 서동준, 안효남, 유화선, 장옥기
2002년 | 기획시대 감독: 김동원 | 각본: 김은화 | 각색: 김동원 노진수 연미정 | 제작: 유인택 | 촬영: 전조명 | 미술: 김희정 장춘섭 | 음악: 조성우 CAST 해적: 이정진 | 봉팔: 임창정 | 성기: 양동근 | 봉자: 한채영 | 큰형님: 이대근 | 봉팔 부: 김인문 | 해적 모: 김영애 | 성기 모: 김선화 | 배 사장: 안석환 | 제비: 정은표 | 2000년대 초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기가 열리면서 새로운 현상이 하나 생깁니다. 젊은 감독들의 등장이죠. <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줘 >(2002)의 모지은 감독이나 < 일단뛰어 >(2002)의 조의석 감독 등은 모두 20대에 데뷔를 했는데요, < 해적, 디스코왕 되다 >의 김동원 감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도제 시스템을 거의 거치지 않고 단편 작업을 통해 인정을 받아 20대에 첫 장편을 만들 수 있었죠. <해적, 디스코왕 되다>도 마찬가지입니다. 1999년에 만든 단편 < 81, 해적 디스코왕이 되다 >를 토대로 김동원 감독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1980년대가 배경인 이 영화의 현장 공개는 화곡동의 한국관 나이트에서 이뤄졌습니다. 디스코 경연 대회 장면은 <해적, 디스코왕 되다>의 클라이맥스였는데요, 그 중심에 바로 ‘해적’이라 불리는 사나이 이정진이 있었습니다. 알록달록한 분홍 블라우스에 ‘쫄바지’를 입은 그의 모습은 제대로 복고였죠. < 해변으로 가다 >( 김인수 , 2000)에 이은 두 번째 영화 출연작에서 처음으로 원 톱 주연을 맡았습니다. 어색하면서도 나름의 스타일로 춤을 추는 해적. 나중엔 관객의 관심을 끌기 위해 옷까지 벗어 던집니다. 중동 간 아버지와 춤바람 난 어머니 밑에서 바르게(?) 자란 청년 성기 역의 양동근입니다. 성기는 친구 봉팔(임창정)의 동생인 봉자(한채영)을 구하기 위해, 해적을 도와 춤 선생을 자처하죠. 이정진과는 <해변으로 가다>에 이어 두 번째 함께 하는 작품입니다. 한편 양동근이 처음 관심 있었던 역할은 엉뚱하게도 안석환이 맡은 ‘배 사장’ 역할이었다고 하네요. 봉자 역의 한채영입니다. 첫눈에 해적을 홀려버린 그녀는 돈을 벌어 집안을 구하겠다는 일념에 룸살롱에 나가고, 그런 그녀를 구하기 위해 해적은 경연대회 우승을 노립니다. 한채영은 < 찍히면 죽는다 >( 김기훈 , 2000)에 이어 두 번째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모니터 앞에 모여 있는 배우들과 감독의 모습이 자못 심각하다면, 촬영 중간중간엔 박장대소를 하며 담소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현장 분위기의 중심인 봉팔 역의 임창정이 있었는데요, 자신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봉팔이는 아이큐가 92 정도 되는 아이에요. 바보는 아닌데 기억력이 너무 짧아 뭔가를 자꾸 잊어버리는 아이.” 한편 독특한 헤어스타일은 자신의 초등학교 졸업식 사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합니다. 사실 해적 역으로 먼저 캐스팅 뉴스가 나갔던 배우는 아이돌 그룹 ‘신화’의 전진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정진이 맡게 되었죠. 김동원 감독은 “처음엔 전진이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니에요. 정진이가 너무 열심히 잘해줬어요”라고 말합니다. 연일 계속되는 촬영 속에서 피곤한 양동근이 촬영 사이에 틈을 내 쪽잠을 자고 있습니다. 1974년생인 김동원 감독은 서울예술대학 재학 시절 만든 단편 <81, 해적 디스코왕이 되다>를 통해 첫 장편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 플란다스의 개 >( 봉준호 , 2000) 연출부를 거쳤고요. 성기 엄마(김선화)와 춤 바람 난 댄스 강사 역의 정은표입니다. 일명 ‘제비’라고 할 수 있는데요, 역시 인상적인 헤어 스타일의 소유자입니다. 황제 디스코텍에 봉자를 빼앗긴 후 마음 고생을 하고 있는 배 사장 역의 안석환입니다. 그러나 황제 디스코텍의 사장(이대근)이 만만치 않은 거물인지라, 찍소리도 못하죠. 디스코 경연 대회를 염탐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습니다. 경연 대회 사회자 역할로 개그맨 서승만이 특별 출연을 했습니다. 첫 영화를 마친 김동원 감독은 벌써(!) 두 번째 영화에 대해 말합니다. “잘 모르겠지만, 아마 <우묵배미의 사랑 2> 같은 영화를 하고 있지 않을까요? 전 강남이 싫어요. 서민들 생활을 그리는 게 더 편하죠.” OB 맥주, 써니 텐, 솔 담배…. 1980년대를 드러내는 소품들입니다. 좁은 현장에서 1980년대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카메라를 잡은 사람은 전조명 촬영감독이었습니다. 1959년부터 촬영을 시작하신,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시죠. 1933년생이시니 촬영 당시 70세셨고, 현장에선 모두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큰어른이셨습니다. 주로 김수용 감독님과 호흡을 맞추셨는데요 < 혈맥 >(1963) < 저 하늘에도 슬픔이 >(1965) < 갯마을 >(1965) 등이 전조명 촬영감독의 작품입니다. 대작인 임권택 감독의 < 증언 >(1973)을 비롯, 장길수 감독의 < 레테의 연가 >(1987), 박종원 감독의 < 영원한 제국 >(1994), 이영재 감독의 < 내 마음의 풍금 >(1998), 김유진 감독의 < 약속 >(1998) 등에서도 작업하셨습니다. 그리고 2004년 < 아홉살 인생 >( 윤인호 , 2004)을 마지막으로 은퇴하셨습니다. 촬영뿐만 아니라 감독으로서도 10여 편의 작품을 남기셨습니다.
유신에서 신군부 독재로 이어지는 1970~80년대에 대해 ‘한국영화 암흑기’라는 레이블을 붙이는 건 정설처럼 보인다. 사실이었다. 영화는 TV에 밀리고 있었고, ‘반공’과 ‘새마을 운동’을 내세운 국책 영화에 얽매인 영화계는 점점 뒤틀려 갔으며, 사전 심의와 사후 검열 속에서 크리에이티브는 서서히 증발했다. 산업적 토대의 붕괴, 불합리한 제도, 미학적 고갈이 동시에 진행되었던 이 시대는 몇몇 감독들의 개인기로 돌파하기엔 너무 어두웠다. 시스템이 붕괴될 때 가장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무분별한 트렌드 추종이다. 1980년대는 그 정점이었다. 멜로드라마와 문예 영화와 스타 시스템을 토대로 1960년대에 황금기를 구가했던 한국영화는 1970년대에 서서히 무너졌고 1980년대에 난장판이 되었다. 멜로는 여전히 만들어졌지만 예전 같은 힘을 잃었다(진부한 신파의 클리셰에 빠져 있었다). 그 개념은 조금 모호하지만 ‘양질’의 문학 작품을 스크린에 옮겼던 ‘문예 영화’는 더 이상 영화화할 만한 소스를 구할 수 없었다(대신 1970년대부터 최인호나 조해일 같은 새로운 작가가 등장했다). 과거의 스타들은 일거에 물러났지만 그 공백을 채울 만한 스타는 도착하지 않았다( 안성기 가 유일한 희망이었던 시대였다). 1. 한수산 원작의 <거리의 악사>(정지영, 1987) 2. 이문열 원작의 <레테의 연가>(장길수, 1987) 3. 김홍신 원작의 <인간 시장>(김효천, 1983) 4. 미우라 아야코 원작의 <빙점 81>(고영남, 1981) 가장 심각한 건 ‘소스 부족’이었다. 1960년대엔 근대 단편 소설들이 ‘문예 영화’라는 이름으로 애용되었다(여기엔 ‘우수 영화’에 외화 수입 쿼터가 주어지는 현실적 이해관계도 작용했다). 라디오 연속극도 각광 받았고, 때론 일본 영화 시나리오를 그대로 가져온 경우도 있었다. 1970년대는 서서히 재료가 떨어졌고 1980년대에 오면 바닥을 드러낸다. 새로운 광산이 채굴되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의 하이브리드 현상이 나타난다. 심하게 말하면, ‘돈 될 만한’ 건 뭐든지 끌어다 썼던 1980년대였다. 여전히 ‘문학’은 가장 중요한 원천이었다. 1970년대 최인호와 조해일에 이어 1980년대엔 한수산 이외수 이문열 박범신 등이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영화계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1980년대엔 훨씬 더 대중적인 콘셉트가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시장』 시리즈의 김홍신은 대표적이었으며 김성종 유홍종 백시종 김병총 등의 작가들도 가세했다. ‘시대정신’이었던 에로티시즘도 영향을 미쳤다. 외설 시비에 휩싸였던 염재만의 소설 『반노』가 대표적. <빨간 앵두> (박호태, 1982)도 최희숙의 소설이 원작이며, <매춘> (유진선, 1988)은 『매춘: 전국 사창가와 창녀 실태』라는 사회학 서적에서 온 것이었다. 전통의 부활도 있었다. 한동안 맥이 끊어졌던 문예 영화의 흐름은 에로티시즘을 통해 재등장했고 나도향과 김유정이 소환되었다. 일본 소설도 영화화되었다. 미우라 아야코 원작의 <빙점 81>(고영남, 1981)은 큰 흥행을 거두었고 호즈미 타카노부의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이미례, 1984), 하시다 스카코의 <오싱>(이상언, 1985), 나쓰키 시즈코의 <W의 비극>(김수형, 1985형) 그리고 이쿠시마 지로의 <한쪽 날개의 천사>(이성민, 1987) 등이 이어졌다. 1960년대 한국영화가, 당시 문화 교류가 없던 일본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가져가 음성적으로 번안해 영화화했다면 그 원천을 밝혔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모습이다. 미즈키 교코 원작의 만화 『캔디 캔디』도 영화화되었다. 1.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최재성은 최고의 청춘스타가 되었다. 2. <신의 아들>은 최민수의 데뷔작이다. 3. 강철수 원작의 <팔불출> 4. 한희작 원작의 <한희작의 러브러브>. 가장 강력한 소스는 만화였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을 영화화한 <이장호의 외인구단>(이장호, 1986)이 장안을 뒤흔들기 전, 1980년대 초부터 꾸준한 시도가 있었다. 그 시작은 길창덕 화백의 <순악질 여사>(김수형, 1980)였다. 이야기보다는 ‘순악질 여사’라는 캐릭터를 가져온 면이 강하며, 장미희가 주인공을 맡았다. 이후 1980년대에 약 20편가량의 만화 원작 영화가 등장하는데, 스포츠 신문 연재나 만화 가게나 당시 쏟아지던 만화 주간지를 통해 대중적 인지도를 쌓은 터에 흥행성이 꽤 괜찮았다. 이현세를 주로 이야기하지만, 이 시기 만화 원작 영화의 주요 인물은 강철수였다. <팔불출>(고응호, 1980)의 원작자였던 그는 이후 영화 쪽에 큰 관심을 보이며 <사랑의 낙서>(심재석, 1988)엔 아트 디렉터로 참여했고, 1989년엔 <발바리의 추억>으로 직접 메가폰을 잡는다. <가루지기>(1988)의 고우영 감독도 만화가에서 영화감독으로 잠시 업종 전환을 한 케이스인데, 1980년대의 만화는 충무로에 원작뿐만 아니라 인력도 공급한 셈이다. 그리고 <이장호의 외인구단>이다. 당시 프로야구 열풍과 이현세의 만화에 대한 컬트적 반응을 힘입은 이 영화는 영화 제목에 ‘공포’가 들어가선 안 된다는 당시의 심의 규율 때문에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개명해야 했는데, 이것이 액땜이 되었는지 서울에서 약 28만 7,000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빅 히트를 기록한다. ‘까치’ 오혜성 역을 맡았던 최재성은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가 되었으며, 동네 전파사마다 정수라가 부른 주제가 ‘난 너에게’(“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가 흘러나왔다. 프로야구의 인기, 이장호 감독의 흥행력 등 이 영화의 성공 원인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핵심은 이야기였다. 당대 한국영화와 비교해볼 때 이 영화가 지닌 극적 요소는 두 배 정도는 셌다. 강한 승부욕, 목숨을 건 순애보. 팽팽한 긴장 관계, 뼈를 깎는 극기 정신…. 떡볶이로 치면 고추장이 아닌 캡사이신 맛이었고, 그 강렬함에 젊은 관객들은 반응했다. 이 영화의 성공으로 일련의 스포츠 원작 영화가 등장하는데, 박봉성의 『신의 아들』, 이현세의 『지옥의 링』, 허영만의 『카멜레온의 시』 등 복싱 소재 만화들이 영화화되었다. 1980년대 ‘복싱’은 여전히 있기 있는 스포츠였고, 여기에 혹독한 트레이닝과 청춘의 고독과 비극적 로맨스가 결합되었다. 안타까운 건 원작을 따라가지 못했던 인기였는데 완성도가 문제였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트렌드는 역시 ‘에로티시즘’이며 스포츠 신문 연재를 통해 성인 만화의 흐름을 이끌었던 한희작과 배금택은 주역이다. <서울 손자병법>(김현명, 1986)이 한희작의 원작이 지닌 지명도에 기대 제목 정도만 가져 왔다면, <한희작의 러브러브>(윤석태 김정진, 1991)은 아예 제목에 작가의 이름을 드러낸다. 당대의 섹시 아이콘인 강리나는 만화 캐릭터를 별 위화감 없이 소화하는데, 이후 배금택 원작의 <변금련>(엄종선, 1991)에서도 캐릭터와의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준다. 하지만 만화 원작 영화의 흐름은 1990년대엔 뜸해진다. 이현세가 직접 연출을 맡은 <아마겟돈>(1996)이나 김수정의 <아기공룡 둘리>(1996) 등 극장용 애니메이션 쪽에서 성과를 냈고, 이현세의 『카론의 새벽』을 옮긴 <테러리스트>(김영빈, 1995)와 허영만 원작의 <비트>(김성수, 1997)가 흥행했지만 1980년대만큼의 양적 성과를 내지 못한다. 다시 그 붐이 일게 된 건 2000년 이후. 여기엔 웹툰의 등장이 큰 역할을 했다. 1. <멋대로 해라>의 혜은이와 김동현. 그들은 이후 부부가 된다. 2. <너무 합니다>의 원작자이자 주인공인 김수희. 3. 박남정 주연의 <새앙쥐 상륙 작전> 4. <담다디>의 이상은과 민규. 최근 한국영화계에서 아이돌 출신 연기자들의 활약이 돋보이긴 하지만, 가요계와 영화계의 크로스오버 현상은 이미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이전 1960년대부터 주제가는 영화 흥행의 중요한 요소였고, 남진이나 나훈아 같은 슈퍼스타들이 은막에 진출하기도 했지만, 1980년대는 남달랐다.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지만, 이 시기엔 당대의 히트곡 제목을 그대로 딴 영화들이 쏟아졌다. 그 노래를 부른 가수가 출연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영화 내용도 노래 가사와 대부분 무관했다. 오로지 노래 제목의 인지도를 이용한 경우들인데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와 ‘비련’, 와일드 캣츠의 ‘마음 약해서’,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 윤시내의 ‘난 모르겠네’와 ‘열애’, 이정희의 ‘참새와 허수아비’, 김현준과 민해경의 ‘내 인생은 나의 것’, 임수정의 ‘연인들의 이야기’, 주현미의 ‘비 내리는 영동교’,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이선희의 ‘J에게’, 최성수의 ‘풀잎 사랑’ 등 수많은 히트곡들이 그 제목을 충무로에 빌려주었다. 물론 가수가 직접 영화에 출연한 경우들도 있었다. 지난 연재에서 이야기했던 전영록이나 송골매, 김형용 같은 청춘 영화의 스타들은 대표적인 경우. 이외에도 <나를 보러 와요>(이유섭, 1980)의 방미, <슬픈 계절에 만나요>(박남수, 1981)의 백영규, <잊혀진 계절>(이형, 1984)의 이용, <담다디>(김응천, 1989)의 이상은, <울고 싶어라>(배해성, 1989)의 이남이, <앗싸! 호랑나비>(원정수, 1989)의 김흥국 등은 노래의 주인공이 직접 카메라 앞에 서는 경우들이었다. <너무 합니다>(남석훈, 1984)은 김수희의 자전적 이야기로, 그녀는 원작자이자 주연 배우로 참여한다. 노래와 상관없이, 가수 자체의 인기로 영화계에 진출하는 경우도 많았다. <아낌없이 바쳤는데>(박호태, 1980)의 심수봉, <멋대로 해라>(김정현, 1980)의 혜은이(1970년대부터 배우 활동), <그 사랑 한이 되어>(이형표, 1981)의 조용필, <날마다 허물 벗는 꽃뱀>(강대선, 1982)의 이은하, <흑녀>(강대선, 1982)의 인순이, <졸업 여행>(오성환, 1985)의 김범룡, <새앙쥐 상륙 작전>(김정진, 1989)의 박남정 등이다. 연기력을 인정받진 못 했지만, 당시 이 영화들은 그 화제성으로 이슈가 되었다. 당시 가요계와 영화계의 끈끈한 관계는, 가요 쪽의 붐에서 기인했다. 트로트 중심이었던 한국 대중가요는 1980년대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며 대중문화의 중심이 되었고, 아이돌 문화를 형성했다. 이 시기 침체기를 지나던 영화계는 가요계의 호황을 이용하려는 수많은 기획을 시도했고, 그 결과 수많은 ‘가요적 영화’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영화들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그 흐름은 한국영화가 자생력을 서서히 지니기 시작하는 1990년대가 되면 사라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충무로가 수혈받았던 또 하나의 원천이 있었다면 바로 TV의 코미디언과 개그맨이었다. 이전에도 영화와 방송을 겸하는 수많은 희극인들이 있었고 그 전통은 이주일로 이어졌다. 특히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김수형, 1980) <조용히 살고 싶다>(김수형, 1980)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이형표, 1983) 등의 ‘유행어 영화’는 작은 트렌드를 이뤄 <웬일이니>(김종성, 1983) <난 이렇게 산다우>(남기남, 1985) 등으로 이어졌다. 이것 역시 대중문화의 인기를 영화로 끌어오려는 기획이었다. 새로운 경향은 개그맨들의 진출이었다. ‘아동용 SF 액션’에 대한 지난 연재에서 언급했듯, 1980년대의 수많은 개그맨은 SF 프랜차이즈의 중심이 되었는데, 그들은 아이들 영화를 벗어나 성인용 영화에도 종종 출연했다. 이외에도 서세원 주병진 김명덕 김형곤 김병조 등 당대의 인기 개그맨들은 대부분 영화계와 만났으며 전유성은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비디오 영화를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1.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의 이주일. 2. <회장님, 우리 회장님>(엄종선, 1988)은 개그 프로그램을 영화화했다. 3. 주병진과 이미숙이 주연을 맡은 <가슴 깊게 화끈하게>(김수형, 1981) 4. 리메이크 영화인 <미워도 다시 한번 1980 - 1부>(변장호, 1980). 1980년대는 침체를 벗어나기 위한 강렬한 생존 욕구로 인해 숱한 하이브리드 현상이 일어났던, 용광로 같은 시기였다. 대중 문학계든 가요계든 만화계든 희극계든, 노래 제목이든 유행어든,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요소가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접목시켰으며 그 중엔 적잖은 성공도 있었고 대부분의 실패가 잇따랐다. 수많은 속편 영화들이 있었고 리메이크도 적잖았으며 애교(?) 섞인 표절도 종종 있었다. 아무튼 살기 위해 모든 것을 했던 시절이었다. 새삼 던져보는 질문. 1980년대는 과연 한국영화의 침체기였나? 표면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면을 살짝 엿보면 이 시대만큼 역동적이었던 시대도 드물다. 장르적으로 매우 다양했고, 영화 이외의 분야와 끊임없이 접점을 만들어갔다(그런 점에서 2000년 이후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생존을 위한 분투. 1980년대는 천박한 상업주의와 여기에 저항하는 힘, 과거의 관습을 지속하려는 의지와 돌연변이 같은 존재들이 뒤엉켜 기묘한 연대기를 써 가던 시대였다. 이 시대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어쩌면 이토록 미로처럼 뒤얽힌 상황 때문일 것이다.
정성조 (1946~2014)는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까지 활동했던 대중음악 작곡가이자 영화음악가, 플루트와 색서폰 연주자이다. 서울대 음악대학 출신으로 KBS관현악단장과 서울예술대학 교수를 역임하는 등 ‘엘리트’ 음악인이기도 하다. 지금도 여러 현장에서 현역 재즈 연주자로서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김민기, 양희은 , 한대수 같은 1970년대 포크 음반에 중요한 ‘산파’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대중음악사에서도 중요한 ‘배후’ 인물이었다. ‘ 정성조 쿼텟’ 또는 ‘정성조와 메신저스’를 통해 연주자로 구성된 그룹 활동을 하면서 대중음악에 재즈적 어법의 연주와 편곡을 삽입했다. 그렇지만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재즈 록 어법이 보다 빛을 발할 수 있었던 데에는 영화음악이 주효했다. 1970년대 중반 무렵 < 어제 내린 비 >( 이 장호 , 1974), < 영자의 전성시대 >( 김호선 , 1975), < 겨울 여자 >(김호선, 1977) 등의 영화에는 메신저스와 함께 트럼펫이나 색서폰 등의 브라스 섹션을 위시하여 재즈 록(또는 퓨전 재즈)적인 사운드가 투영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정성조는 ‘청년영화’ 또는 ‘호스테스 멜로드라마’를 위시한 새로운 영화의 개막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상의 음악들은 ‘본격적인’ 의미의 사운드트랙 레코딩 시대를 개막한 작품들이라는 점에서 한국 영화음악사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당시 한 작품을 위한 영화음악 음반이 발매되는 사례는 거의 없었고, 영화음악 음반이라고 해도 단순하게 한두 곡의 주제가만이 해당 가수의 음반이나 컴필레이션 음반에 수록되는 정도에 그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온전한 의미의 사운드트랙 음반이 존재하지 않던 상황에서, 연주 음악과 주제가, 대화 클립 등을 모두 담은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본격적인 사운드트랙 음반이 발매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별들의 고향 >이나 < 바보들의 행진 >처럼 < 어제 내린 비 >나 < 영자의 전성시대 >의 경우 영화와 음악을 위한 상생전략으로서 음반사와의 기획물로 발매되기도 했다. 이전 시기 많은 영화음악가들의 작품이 관현악단의 오케스트라 사운드 위주였던 경향과 달리, 그는 밴드 음악이 주도하는 일렉트릭한(또는 록적인) 어법의 사운드를 구사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영화음악’의 경향을 이끈 선두주자였다. 1970년대 ‘청년영화’로 대변되는 새로운 젊은 영화들의 실험이 ( 강근식 이 속해있던 ‘동방의 빛’과 마찬가지로) 대중음악인의 작품과 조우하면서 화학작용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이처럼 정성조 는 재즈 록 밴드 메신저스와 함께 (당시 대중가요계에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던) ‘모던한’ 사운드를 위한 실험을, 영화 스코어 위에 구현했다. 이는 여러 버전의 변주 트랙을 통해 마련되기도 했고, < 겨울 여자 >처럼 (곡명에 모두 삽입되어 있는 것처럼) ‘겨울’을 소재로 한 컨셉트 음반 형식을 통해 표현되기도 했다. 또한 노래 형식의 각인적인 주제가를 통해 대중적인 접근도 함께 담았다. 이후에도 그는 김호선 과는 < 밤의 찬가 >(1979), < 죽음보다 깊은 잠 >(1979)의 영화(이상은 한 음반으로 발매)를, 이장호 와는 < 이장호의 외인구단 >을 통해 영화음악 작업을 이어갔다. 버클리 음대 유학파 1세대로서 수학하고 돌아온 뒤인 1980년대에도 그는 영화음악계에서 다수의 영화음악을 맡아 왕성한 활동을 했다. < 깊고 푸른 밤 >(1985)을 필두로 < 기쁜 우리 젊은 날 >(1987), < 안녕하세요 하나님 >(1987), < 천국의 계단 >(1991) 등 배창호 감독의 영화의 작품에서 영화음악을 맡았다. 이외에도 < 이혼하지 않는 여자 >( 곽지균 , 1992), < 레테의 연가 >( 장길수 , 1987), < 나의 사랑 나의 신부 >( 이명세 , 1990), < 우리 사랑 이대로 >( 강정수 , 1992) 등에 참여했다. 영화음악의 경향은 보다 다채로와지는데, 정수라가 부른 영화주제가가 크게 히트했던 <이장호의 외인구단>처럼 노래 형식에 몰두된 경우도 있다. <깊고 푸른 밤>에서 ‘제인의 테마’처럼 쓸쓸하고 슬픈 트랙 이외에 불협화적이고 불길한 실험적 음악을 주인공의 절망과 갈등에 매치시킨 반면, <기쁜 우리 젊은 날>이나 <나의 사랑 나의 신부>에서는 경쾌한 스윙감 넘치는 재즈 클립을 통해 낭만적인 청춘영화의 분위기를 돋우기도 했다. < 이장호의 외인구단 >으로 1986년 대종상 영화제에서 음악상을, < 레테의 연가 >로 1987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에서 수여하는 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