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스코세이지: 거장의 초상
- 감독
- 레베카 밀러
- 제작년도
- 2025
- 출연
- 마틴 스코세이지, 로버트 드 니로, 다니엘 데이 루이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믹 재거, 로비 로버트슨, 델마 스쿤메이커, 스티븐 스필버그, 샤론 스톤, 조디 포스터, 폴 슈레이더, 마고 로비, 케이트 블란쳇, 제이 콕스, 로드리고 프리에토, 헬렌 모리스
서부에 선 사나이 존 포드의 < 수색자 >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해 보자. 이든(존 웨인)은 왜 끝까지 가야만 했을까? 가족을 무참히 살육한 인디언에 대한 복수는 서사의 표면적인 이유만 될 뿐이다. 영화가 중반에 이르면 그와 함께 추적에 나섰던 마을 사람들도 하나 둘 떠나버리고 그는 철저히 혼자만의 여정을 지속한다. 그 여정 속에서 그는 서부를 횡단하고 때로는 여러 인디언 부족들과 맞닥뜨리지만 정작 이 영화가 목도하는 것은 개인에게 투영된 서부라는 거대한 공간과 19세기 중엽의 미국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붕괴하고 파괴된 한 사나이의 황폐한 내면이다. 그래서 종종 불모한 서부를 포착하는 익스트림롱쇼트들은 객관적 풍경 쇼트로서가 아니라, 그다음에 제시되는 이든의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표정의 클로즈업을 부연하는 심리적 쇼트로 전화한다. 결국 <수색자>는 파괴된 사나이의 황폐한 내면을 그려내는 심리적 스릴러로 다시 읽힐 수 있다. 여기서 이든이 왜 집착적이고 광적으로 복수의 추적을 계속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종종 서부 사나이 특유의 ‘명예율’로 응답된다. 자신의 법과 숙명에 충실한 사나이들. 죽음의 공포 속에서 흔들림 없이 그저 예정된 운명으로 치닫는 단독자들. 세상의 질서와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논리에 충실한 소통불가의 사나이들. 현대 영화에서 이를 가장 흥미롭게 계승했던 캐릭터는 의외로 코엔의 ‘안톤 쉬거’였다.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에서 그는 서사의 초반에 부과됐던 행동 명령(돈 가방을 둘러싼 청부)이 무화된 이후에도 살육을 계속한다. 때로는 그 스스로 자신의 행동이 야기할 결과에 동의할 수 없다 할지라도, 그는 숙명처럼 자신의 명예율, 자신이 내뱉은 언어에 충실하기 위해 끝까지 간다. 이는 흡사 이든과 닮아 있다. 그러나 정작 이 영화에서 코엔 형제의 주제의식을 대변하는 캐릭터는 따로 존재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제목에 가장 충실한 캐릭터로서 토미 리 존스가 연기한 마을 보안관 ‘벨’이다. 은퇴를 앞둔 이 노년의 보안관은 쉬거의 흔적들을 추적한다. 쉬거가 이든처럼 죽음의 상황 속에서도 결코 회피하지 않고 질주하는 단독자였다면, 벨은 그의 흔적들 속에서 두려움과 공포, 삶의 무력함을 읽어내는 존재이다. 흥미로운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벨의 공포와 두려움, 주저와 회피에 대한 욕망은 단순히 나약한 인간의 표상이 아니라 오랜 시간 삶을 지속해 온 노인의 경험과 혜안이 만들어낸 결과로서 그려진다. 토미 리 존스가 연기하는 노년의 보안관 벨은 삶의 불모함과 우발성, 공포와 불안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력함을 아는 인간으로 형상화된다. (이는 이스트우드의 노인-현자의 캐릭터와는 대별된다) 표정의 웨스턴 토미 리 존스는 얼굴의 미장센이 가능한 배우이다. < 수색자 >에서 장엄한 모뉴멘트 벨리보다 중요한 쇼트들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존 웨인의 근심 어린 얼굴-이미지, 클로즈업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 어떤 풍경이나 소품을 동원한 미장센보다도 심연의 깊이를 지닌 얼굴의 불가해 한 이미지들은 때로는 그 자체로 압도적인 미장센을 형성하곤 한다. 이것은 젊고 아름다운 배우들의 클로즈업과는 차원이 다르다. 노년의 배우들, 영화의 역사 속에 자신의 삶을 오롯이 새긴 배우들의 역사, 그들 얼굴의 주름과 표정이 겹쳐질 때, 그 얼굴 이미지들은 영화의 주제를 응축하는 쇼트가 되기도 한다. < 용서받지 못한자 >(혹은 < 스페이스 카우보이 >)에서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얼굴이 그랬고, < 웨이 백 >에서 에드 해리스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혹한의 시베리아 풍경의 잔혹함보다 에드 해리스의 얼굴 이미지 한 컷이 더 많은 삶의 공포와 고난을 설명한다.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에서 토미 리 존스는 삶이 두렵고 불가해 하지만, 비록 주저할지언정 회피할 수 없음을 아는 노인이다. 그래서 그는 한발 늦더라도 그 자리(서사의 자리, 사건의 자리, 숙명의 자리)에 끝까지 가야만 했던 인물이다. 그 자리들은 언제나 죽음을 둘러싼 자리이다. 이미 죽어버린 시체들의 형상, 혹은 죽음이 벌어지는 결정의 순간, 또 혹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는 숙명의 순간들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토미 리 존스의 필모그라피에서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다. 배우-캐릭터의 역사에서도 그렇지만, 이는 이후 자신이 연출하게 되는 일련의 영화 속 죽음과 캐릭터와도 닮았기 때문이다. 과거로의 횡단 토미 리 존스가 연출한 첫 번째 영화는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 멜키아데스의 세 번의 장례식 >(2005)이었다. 멕시코 국경 지역에 사는 미국 농장주 피트 퍼킨스(토미 리 존스)는 자신이 고용한 불법 이주노동자 멜키아데스 에스트라다가 의문의 살해를 당하자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경찰 당국은 멕시코 불법 이민자인 그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처리하고 묘비명도 없는 곳에 묻어버린다. 이에 피트는 홀로 범인을 잡아선 멜키아데스의 시체를 파낸 뒤, 멜키아데스가 고향이라고 말했던 미지의 공간으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한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와 닮았다. 시간적 배경은 현재지만, 미국과 멕시코의 접경으로 설정된 이 풍경 쇼트들은 흡사 19세기 중엽을 배경으로 하는 황폐한 웨스턴의 풍경처럼 보인다. 국경을 가르는 경계들, 인종적 갈등들, 국가의 논리와 개인의 논리가 충돌하는 이 영화적 공간은 오롯이 현재의 미국에서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정복의 논리, 살육의 논리, 탈주의 논리를 반영한다. 범인이자 백인 국경수비대원인 남자를 불법으로 납치한 피트는 헬기와 자동차로 추격해오는 경찰 당국의 추적을 따돌리며, 서부 사나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멜키아데스의 시신을 실은 말을 타고 멕시코로 넘어간다. 그러나 흡사 과거(서부시대)로의 횡단처럼 보이는 이 영화가 서부극과 달라지는 지점은 피트의 여정이 무엇에 의해 추동되는지 납득할 만큼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적어도 < 수색자 >에서 이든은 자신의 명예율과 숙명에 의해 끝까지 가야만 했다. 그리고 그 여정과 결과(조카를 되찾아 마을 공동체에 되돌려 놓는 것)는 공동체가 수긍할만한 최소한의 명분이나마 획득한다. 그러나 피트의 기이한 여정은 다르다. 간혹 제시되는 플래시백들은 피트와 멜키아데스가 과거 단순한 고용주-고용인 관계가 아니라 우정 이상을 쌓은 친구였음을 제시한다. 하지만 영화의 리듬과 에피소드들, 그리고 종종 희극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연기들, 특히 죽어버린 시체를 산 사람처럼 여행의 동반자로 삼은 뒤, 시체의 썩어가는 얼굴까지 닦아가며 애정을 쏟아 붓는 행위는 흡사 시체애호증이거나 자신만의 제의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로드무비 혹은 웨스턴과 닮아 있는 이 영화는 여정의 끝에 기존 장르가 충족해주는 결과를 제시하지 않는다. 여정은 피트를 더욱 곤경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을 치유하지도, 새로운 삶을 약속해주지도 않았다. 그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는 전혀 납득될 수 없는 제의를 완수하고 홀연히 사라질 뿐이다. 그런데 사실 이 영화의 매혹은 그 설명되지 않은 모호함과 끝낼 수 없는 여정의 지속에서 발생한다. 2000년대 이후, 미국의 주요 작가 영화들이 드러내는 상실감, 인과론의 실패, 불안과 공포의 정서들이야말로 고전적 서사의 충족 욕구를 외면하면서 새로운 경향으로서 등장했던 것처럼, 토미 리 존스의 캐릭터들은 행위와 감정의 객관적 설명을 거부한다.(가령 포스트 9.11 이후의 재난 영화, SF 영화들에서 설명되지 않는 사건의 인과론들. 영웅의 부재, 실존 그 자체의 불안 등) 과거의 사나이 그리고 서부의 여성들 토미 리 존스의 두 번째 영화 < 더 홈스맨 >(2014)(이 영화 역시 올해 칸 영화제 경쟁에서 소개됐다)은 흡사 < 멜키아데스의 세 번의 장례식 >의 후속편처럼 이어진다. 그리고 전작의 피트는 이 영화에서 ‘브릭’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정말로 서부 시대에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는 여전히 황폐한 서부를 횡단하고 있으며, 역시나 자신만이 납득할 수 있는 이유로 그 여정을 끝까지 완수해내고, 여정이 끝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정박할 수 없고, 삶 앞에 무력하며, 또 다시 불모의 땅으로 내몰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더 홈스맨 >은 ‘개척의 시대’ 혹은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 유럽 이민자들이 북아메리카 서부 정복을 정당화하는 용어)이라 칭했던 제국의 논리가 지배했던 시대를 횡단하는 영화이다. 영화의 초반을 지배하는 캐릭터는 힐러리 스웽크가 연기하는 ‘메리 비 커비’이다. 삼십 대에 접어든 그녀는 홀로 자신의 땅과 가축, 집을 지키는 강인한 여성, 노동하는 여성, 무엇보다도 ‘결혼하지 못한’ 여성이다. 그러던 중 자신이 속한 마을 공동체 여성 세 명이 고단한 삶에 지쳐 광기로 치달아 버린다. 남편의 학대와 강간 속에서 미쳐버린 여성, 황폐한 서부에서 극도의 빈곤으로 내몰린 여성, 출산한 아이들 모두를 질병으로 한꺼번에 잃어버린 여성. 공동체와 남자들은 이 여자들을 처분(!)하기 위해 치료라는 명목으로 그녀들을 모두 동부의 한 마을로 보낼 것을 결의한다. 그러나 무려 5주나 소요될 그 횡단의 여정을 책임지겠다고 선뜻 나서는 마을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메리 비 커비가 그 여정의 책임자를 자처하고 나선다. 여성을 불신하는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곱지 않지만, 아무도 그것을 대신하고 싶지 않기에 그 모든 고난은 온전히 그녀의 몫이 되고 만다. 이 영화 < 더 홈스맨 >은 명백히 여성들에 관한 영화이다. 올해 칸 영화에 인터뷰에서 토미 리 존스는 이 영화에 페미니즘의 프레임을 적용하는 것에 동의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영화를 많은 기자들이 ‘서부극’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했으며, ‘장르’적 틀로 한정하는 것을 비판했다. 그는 자신의 영화를 “제국주의에 관한 영화, 페미니즘에 관한 영화, 미국 역사에 관한 영화”라는 키워드로 설명하길 원했다. 실제로 이 영화는 장르적 포뮬라나 컨벤션을 철저히 외면한다. 대신 그는 서부극을 우회하며 ‘다시 쓰기’를 시도한다. 고전적 서부극의 공간과 시간, 사건과 인물들을 거부하고 그 결을 거스르며 새로운 19세기 미국의 풍속화를 그려낸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서부극을 탈신화하고 19세기 미 제국주의가 자행했던 그 내부의 민낯을 배치한다. 영화는 고전적 서부극들이 그랬던 것처럼 동부에서 서부로 나아가는 것(팽창과 정복의 논리)이 아니라, 서부에서 동부로 거슬러 횡단한다. 극 중 네브래스카의 황폐한 자연에서 시작된 이 영화는 동부 아이오와의 도시로 향하는 여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필사의 생존을 위한 역주행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 영화는 서부극에서 배제된 여성의 위치를 재정립한다. 엄마와 창녀라는 이분법으로 재단됐던 고전적 서부극의 존재감 없던 여성들은 이 영화 속에서 어떻게 남성 지배와 착취의 논리, 혹은 위선적인 종교의 논리 속에서 사멸해 갔는가에 집중한다. 이 영화의 초반 미니멀하게 촬영된 영화적 쇼트들은 혹독한 자연과 남성들 질서 속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학대당하는지를 몹시 처연하면서도 섬뜩하게 그려낸다. < 멜키아데스의 세 번의 장례식 >이 크리스 멩게스(켄 로치의 오랜 촬영 감독)의 카메라에 의해 멕시코 접경 미국의 풍경을 황폐하고 파괴적인 것으로 그려냈다면, 이 영화 < 더 홈스맨 >은 오히려 사건의 처연함과 공포를 어루만지고 위로하듯 아름다운 이미지 수사학으로 배치한다. 로드리고 프리에토(주로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영화를 촬영했던 감독)의 프레임은 토미 리 존스와의 협의하에 조셉 알버스(Josef Albers), 도달드 주드(Donald Judd)의 미니멀리즘 미학을 영화로 재현했다. 가혹한 현실의 풍경들, 현실과 환영의 기이한 공존 속에 속박당한 여성들. 잔혹하지만 처연한 아름다움을 가진 그녀들의 존재. 그 속에 오로지 홀로 존재하는 개척자들의 빈곤한 집 혹은 인간 군상. 광포한 폭력과 비참한 여성들의 아름다움은 기이한 몽타주를 형성한다. 토미 리 존스의 캐릭터 조지 브릭은 이때 등장한다. 무단으로 한 집을 점유하다가 마을 남자들에 의해 처형당할 뻔 한 그를 커비가 우연히 발견해선 구해주는 대가로 이 여정의 수행원이 될 것을 명령한 것이다. 얼핏 야비하고 희극적으로 행동하지만, 그는 충분히 탈주할 수 있는 무수한 순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험난한 여정 동안 커비의 옆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여성들을 보살핀다. < 멜키아데스의 세 번의 장례식 >에서 시체를 목적지에 끝까지 가져가야만 했던 피트처럼 이 영화 속 브릭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자신의 의지로 역시나 끝까지 간다. 죽음과 장례식, 그리고 무덤들 < 멜키아데스의 세 번의 장례식 >은 제목에서부터 세 번의 장례, 즉 매장 행위에 대해 이야기한다. 멜키아데스는 단 한 번 죽었지만, 제의는 진정한 애도가 종결될 때까지 피트에 의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비록 여정의 마지막 순간, 피트는 진심이라 믿었던 멜키아데스의 가족과 고향에 대한 이야기들이 거짓이었음을 알게 되지만, 포기하지 않고 가상의 고향을 설정한 뒤 장례를 올린다. 그를 움직이는 것 혹은 그의 욕망은 현실적인 질서와 명령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신만이 종결지을 수 있는 애도의 이상적(비현실적)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정, 애도의 제의는 동시에 대단히 정치적인 풍속화이기도 하였다. 국경과 인종, 탈주와 추적, 제국과 식민의 논리 속에서 무수한 폭력과 죽음들이 발생하고 방치된다. < 더 홈스맨 > 역시 그러한 역사적 알레고리를 형상화하는 여정으로 향한다. 제목의 역설, ‘집으로 데려다 주는 남자’가 아니라, 애시당초 이 영화 속 모두는 멜키아데스처럼 집도 고향도 불분명한 존재들이었다. 여성들은 동부로 추방당하는 것이었고, 기병대 탈영병이었던 브릭 역시 그 어디서도 환영받을 수 없는 존재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든과 피트처럼 미션이 완료된 후 또다시 공동체를 떠나야만 하는 숙명의 방랑자들이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 < 더 홈스맨 >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이 영화의 역사적 정치학, 서부의 탈신화, 페미니즘의 역사가 아니라 ‘죽음’의 표식과 그것을 반복적으로 그려내는 토미 리 존스의 제의에 관한 부분이다. < 멜키아데스의 세 번의 장례식 >처럼 이 영화에도 무수한 죽음과 무덤들이 등장한다. 우선 첫 번째 죽음은 영화의 초반부에 무수하고 일상적인 것으로서 제시된다. 혹독한 환경 속에서 여성들이 겪어야만 하는 어린 자식의 죽음, 혹은 광기에 의해 행해진 자식 살해,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끝내 사라지지 않고 그들 곁을 배회하는 죽은 자들의 유령들이 등장한다. <더 홈스맨>은 죽은 자 혹은 죽고자 하는 자들과 함께 시작하는 셈이다. 그리고 이 첫 번째 죽음이 커비와 브릭의 여행을 야기한다. 두 번째 죽음은 여정 중 발견한 인디언의 무덤에서 브릭이 시체를 감싼 모피를 훔쳐내는 장면과 그 사건 이후 바로 이어지는 백인 소녀의 무덤 장면에서 읽을 수 있다. 브릭이 인디언 시체의 옷을 벗겨 가졌던 것처럼 소녀의 무덤 역시 인디언들이 옷을 얻기 위해 파헤친 것이었다. 커비는 여기서 여정을 잠시 중단한다. 곧고 신실한 마음을 가진 그녀는 소녀의 무덤을 제대로 수습해줘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브릭은 기다릴 수 없다며 여자들과 함께 먼저 떠나버린다. 무덤을 수습하고 브릭 일행을 쫓아갈 작정이었지만 사방이 황폐한 지평선에 불과한 그곳에서 커비는 길을 잃는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그녀를 태운 말은 브릭 일행을 뒤쫓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소녀의 무덤과 묘비명 앞으로 되돌아온다. 죽음의 반복강박증.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공포. 그녀가 간신히 브릭 일행을 만나게 됐을 때, 브릭은 처음으로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한다. 인디언을 대량 학살한 기병대원으로서의 과거, 추악한 과거로부터 그는 탈출하는 중이다. 세 번째 죽음은 돌연한 커비의 죽음이다. 강인하지만 결국 심리적으로 붕괴하고만 그녀는 새벽녘 낯선 숲 속 나뭇가지에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된다. 브릭은 처음으로 죽음에 예의를 바쳐 그녀를 매장한다. 세 번째 죽음 즉 커비의 죽음은 그가 이제 미쳐버린 여자들과의 여행을 지속하지 않아도 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그녀들과 함께 동부로의 여행을 지속하는 것을 택한다. 결국 토미 리 존스는 계속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죽음을 둘러싼 불모한 환경과 거역 불가능한 삶의 숙명들, 원초적인 고독과 불안들, 삶의 불가해 한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의 벨로부터 < 더 홈스맨 >의 브릭까지 이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발버둥 치거나 탈주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에게 주어진 숙명의 길을 두려움과 회한 속에서 받아들일 뿐이다. 그들이 탈주하지 않는 것은 이미 그들이 오랜 삶을 살아왔기에 어떤 운명의 길이 펼쳐질지 직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벨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읊조리는 꿈 장면의 어둠 속 행렬과 불안처럼). 다만 토미 리 존스는 여기서, 죽음이 거역 불가능한 것이라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차라리 기억하고자 하는 의지를 피력한다. < 멜키아데스의 세 번의 장례식 > 역시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존재에 대한 필사의 제의이며, < 더 홈스맨 >에서 브릭이 마지막 순간에 가슴에 안고 있었던 커비의 묘비 역시, 흔적 없이 사라질 존재에 대한 기억의 의지이자 애도였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과 의지조차도 어떻게 세상에 의해 쉽게 붕괴되는지 혹은 지워지는지 또한 토미 리 존스는 잘 알고 있다. 만취한 브릭이 커비의 묘비를 가슴에 앉고 새로운 여정을 위해 배에 올랐을 때, 한켠에 내려놓았던 묘비는 누군가의 무심한 발길질에 의해 물속으로 빠져버린다. 그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브릭의 마지막 노래와 춤사위는 그 자신의 고통조차도 감춰버린 채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더 홈스맨>은 그렇게 사위어간 무수한 개인들, 여성들, 이제는 삶에 대해 너무도 잘 알게 된 가련한 노인에 대한 기억과 회한의 영화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