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간다
- 감독
- 신이수
- 제작년도
- 2012
- 출연
- 임향화, 최용현, 황태동, 손예원, 정재훈
< 지옥만세 >는 십대 소녀 나미(오우리)와 선우(방효린)의 로드무비다. 학교폭력 피해자인 둘은 사는 게 지옥 같다. 가족도 자신들의 고통을 알아주지 않는다. 힘들다고 토로해봤자 약해빠졌다거나 너보다 더 힘든 동생을 배려하라는 말을 들을 뿐이다. 결국 학교 폭력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한 둘은 지옥 같은 현실을 탈출하기 위해 동반자살을 기도한다. 몇 번이나 자살에 실패했던 나미는 선우의 도움을 받고, 선우도 나미의 뒤를 따르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자살기도 중 나미는 따돌림을 주도했던 채린(정이주)이 서울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복수를 위해 선우와 함께 서울로 향한다. 학교폭력, 자살기도, 납치와 그루밍, 사이비 종교집단 등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영화는 반전처럼 경쾌하고 엉뚱하며 발랄한 톤을 갖고 있다. 초성만 쓰면서 가볍게 주고받는 문자, 싸이키델릭한 록 스타일의 음악, 뮤직 비디오 같은 회상 몽타주씬들은 그러한 톤을 뒷받침한다. 그렇다고 앞의 나열된 소재를 표피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나미와 선우의 예상을 엇나가는 반응과 엉뚱한 선택들은 십대 소녀들이 자신의 고통의 기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일관되게 해결책을 찾는 것이 불가능한 현실을 입체적으로 제시한다. 지옥 같은 현실이 압도해 올 때 이성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은 왜 자신들이 따돌림을 당하고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언제 어떻게 이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같은 처지에 있는 서로가 있고, 그렇기에 두 소녀는 지옥에 살면서도 생동감이 넘칠 수 있다. 자살에 성공할 방법을 역동적으로 고민하고 시도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들을 이해해 주는 사람 하나 없는 둘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들이 처한 파국의 풍경은 자살 장소로 대변된다. 나미와 선우가 사는 곳은 온천 관광지로 유명했던 수안보이다. 한때 인산인해를 이루던 관광지는 그 영광을 잃어 점차 쇠락했다. 이제 이곳은 문 닫은 대중목욕탕들로 가득하다. 더 이상 사람들이 찾지 않는 버려진 대중목욕탕은 자살하기에 좋은 장소다. 엄마에게 들켜 자살에 실패하곤 했던 나미는 선우의 도움으로 진짜 자살에 성공하기 직전까지 간다. 하지만 자꾸 자살 도구를 트집 잡고 왕따 주동자인 채린의 소식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미의 태도는 그가 정말로 죽기를 원하는 건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죽을 만큼 괴로워하고 있으며, 이 상황을 해결하고 싶지만 방법을 몰라 무력감에 놓여 있을 뿐이다. 선우에게 유서를 건네며 “그냥 아무 우체통에다 넣어줘. 운명처럼 어디든 닿겠지”라고 말하는 나미 대사는 죽음과 어울리지 않게 낭만적이고 낙관적이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 종로에 도착한 나미와 선우는 어이없을 정도의 우연으로 채린과 마주친다. 무작정 종로를 헤매자던 나미의 전략이 성공에 이르게 된다. 잘나가던 채린의 아버지 사업은 부도가 났고 엄마는 사이비 종교에 빠져 ‘낙원’이라 불리는 해외의 종교 집단 거주지로 떠나버렸다. 홀로 남은 채린은 엄마를 따라가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나미와 선우는 채린의 얼굴에 ‘기스’를 내어 살아있는 지옥을 맞보게 해주기로 결심하지만 채린은 이미 가해자가 아닌 회개자의 얼굴로 그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채린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있다며 나미와 선우에게 용서를 빈다. 나미는 채린이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흔들리지만, 선우는 채린이 여전히 종교 집단에서 함께 살며 낙원을 가기 위해 경쟁하는 아이들 안에서 ‘여왕벌’ 노릇을 하며 따돌림을 조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따돌림을 가능하게 해주는 건 겉으로는 다정다감해 보이는 명호(박성훈)다. 명호는 사이비 종교 교주인 목사가 교도소에 수감된 뒤 조직을 이끌어 가고 있다. ‘낙원’으로 가려면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 ‘피해자에게 받는 용서’의 점수가 가장 높기 때문에 채린은 이 점수를 받기 위해 나미와 선우에게 자신을 용서해 구원해달라고 애걸한다. 영화는 어떤 존재와 사건이든 하나의 얼굴만 갖고 있지 않음을 강조한다. 채린은 학교 폭력 가해자이지만 동시에 부모에게 버림받았으며 종교집단의 납치폭력과 그루밍을 당한 피해자이기도 하다. 나미는 가해자 집단의 우두머리였던 채린과의 관계에 있어선 피해자이지만 가해자 무리에 속해 선우를 향한 괴롭힘에 동조하고 외면해왔다는 점에선 가해자이다. 선우는 피해자이고 다른 피해자를 잘 알아차리며 보호하려는 태도를 취하지만 나미에게 복수하기 위해 나미 엄마 식당에 대한 악플을 올렸다는 점에선 가해자이다. 나미와 선우는 피해자이지만 마냥 착하거나 약한 자들은 아니다. 취약한 상황에서 이상한 신념에 빠진 이들과 달리 나미와 선우는 그들의 친절함에 고마워하면서도 경계심을 놓지 않는다. 둘은 채린을 향한 복수의 여정에서 자신들뿐만 아니라 채린을 구해 나올 정도로 용기 있는 이들이다. 또한 나미는 선우와의 관계에서 회개했다는 채린에게 더 동일시하며 그의 위선을 알아채지 못해 선우에게 상처준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할 정도로 자신을 성찰하는 힘을 갖고 있다. 이때서야 영화는 회상 장면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던 피해자와 가해자의 얼굴을 똑바로 보여준다. 영화의 오프닝은 ‘황구라’라고 불리는 아이의 생일을 축하하는 또래 무리들이 촬영한 것 같은 친밀한 카메라를 시뮬레이션 한다. 하지만 생일을 맞은 아이와 함께 즐겁게 장난치는 것처럼 보였던 장면은 곧 지옥으로 변한다. 이 영상이 사실은 학교폭력 피해자를 괴롭히는 영상 푸티지라는 것이 밝혀진다. 피해자인 아이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고 얼굴에 케이크를 맞고 괴로워하는 뒷모습만을 비춘다. 한 아이가 쓰러진 아이를 동정어린 시선으로 보지만 곧 무리의 부름에 그를 버리고 가버린다. 선우가 채린에게 연민을 보이고 공감하는 나미에게 실망할 때 나미의 회상 속에서 이 오프닝 장면이 다시 반복된다. 이번에는 피해자 아이와 동정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배신하고 가버린 아이의 얼굴이 모두 정확히 보인다. 피해자는 선우이고 버리고 가버린 아이는 나미다. 피해자든 가해자든 그 얼굴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더불어 나미는 자신이 선우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외면했음을 깨닫는다. 이 장면은 피해자든 가해자든 다양하고 복잡한 얼굴을 갖고 있다고 해서 한 얼굴이 다른 얼굴로 상쇄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역설한다. 채린이 피해자의 얼굴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가 갖고 있는 가해자의 얼굴이 사라지거나 면죄 받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채린이 가길 바라는 낙원은 이미 지옥이 된지 오래일 것이다. 명호가 돌보고 이끄는 아이들 공동체도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를 돌보는 따뜻한 분위기에 선행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낙원행 티켓을 타기 위한 생존게임에 불과하다. 명호는 친절하고 관대한 젊은 종교 지도자처럼 보이지만 그 스스로 사기공모 범죄자이며 사기 피해자이다. 지옥과 낙원은 동전의 양면이다. 나미와 선우의 여행은 어쩌면 고립된 이상향으로서의 낙원은 부재하고 도처에 지옥의 면모가 있기에 지옥탈출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정이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선 지옥 역시 낙원의 일면이 잠재해 있을 수 있다. 고통을 알아봐 준 서로가 있다면 조금은 지옥을 견딜 수도 있을지 모른다. 친절해 보였던 어른들의 광기와 납치폭력에서 탈출하고 명호의 자살을 실제로 목격한 후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꽂혀 있던 ‘낙원’ 엽서는 꽤 직접적인 은유가 된다. 현실은 바뀌지 않은 채 여지없이 돌아오자마자 괴롭힘을 당한다. 이번에는 서로가 있고 더 이상 죽고 싶어 하지 않으며, 가해자들을 무서워하지 않을 용기가 생겼다는 차이가 있다. 극복, 해방, 낙원 이런 것은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방과 낙원은 곧 지옥이 될 것이기에. 죽지 않기 위해선 지옥을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가볍게 인정하며 “오키 오키”라고 답할 수 있는 태도, 적어도 죽지 말고 “지옥을 견뎌내는” 마음이 필요하다. 자기들만의 ‘수학여행’을 마치고 서로의 집으로 향하는 엔딩씬에서 나미는 자전거를 타고 멀어져 가는 선우를 응시한다. 망원렌즈 촬영으로 거리와 초점이 왜곡된 쇼트에서 얼마 안가 선우의 뒷모습은 포커스가 나가 흐릿해지다 못해 빛 속으로 사라질 것처럼 보인다. 나미는 선우의 생존을 확인이라도 해보듯 다급하게 부른다. 가해자들이 별칭으로 부르던 ‘황구라’가 아닌 ‘선우’라고 분명하게 부른다. 포커스가 나가 있기 때문에 선우가 나미의 부름을 들었는지, 그가 되돌아오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선우는 그의 부름에 응답하며 되돌아온다. 드디어 초점이 맞춰져 선명하게 마주하게 된 선우의 얼굴 클로즈업에 나미는 웃으며 “웰컴 백 투 더 헬, X발”이라 말한다. 다시 각자의 집으로 가는 나미와 선우의 얼굴 클로즈업이 교차한다. 오늘은 그의 이름을 불러 지옥을 살아내고 있음을,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전(前) 육군 대령 출신의 사회운동가 지만원은 북한이 보낸 일명 ‘광수’들이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활동을 주도했다는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기하학적 분석에 몰두해 있다. 요지는 인간을 식별하는 표식 중 하나인 지문의 원리와 마찬가지로 얼굴 역시 페이스 라인을 연결한 외곽선의 형태가 일치하면 동일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는 원리이다. 지씨에 따르면, 일베 영상분석가 ‘노숙자담요’가 항쟁을 기록한 사진 한 장에서 발상한 추적은 사진에 기록된 시민군의 페이스 라인, 미간 사이의 거리, 주요 요소들이 배치된 좌표의 연결선 등 얼굴의 기하학적 형태를 추출한 이미지 아카이빙으로 진화하였고 이를 북한 발(發) 이미지들과 대조하여 총 561명의 광수를 찾아내기에 이른다. 얼굴에 대한 기하학적 분석에 동기를 제공한 것은 제1광수라고 명명된 한 시민군 청년의 사진이었고 그는 2010년 평양 노동자회관에서 열린 5.18 30주년 기념식에 참가한 사내, 북한에서 농업상까지 지낸 김창식과 동일인물이라고 지씨는 주장한다. 매서운 눈초리와 어깨 골격의 생김새, 기관총을 다뤄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화기(火器)를 다루는데 있어서의 능숙함 등이 심증으로 제시된다. 지씨의 주장은 “광주 사람들이 시위대를 형성한 적은 없고, 광주에서의 시위는 북한군 600명이 와서 저지른 폭동이며, 광주 사람들은 여기에 부나방처럼 끼어들어 부역을 할 것이다. 따라서 민주화 시위도 없다”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지만원의 주장과 달리, 다큐멘터리 영화 < 김군 >의 도입부 전개에서 사진 속 청년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광주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중년 여인 주옥이 사진을 보고 그의 얼굴을 알아보면서부터 변화가 시작된다. 주씨는 지만원에 의해 북한군 김창식과 동일인물로 지목된 ‘제1광수’가 자신의 집에 수시로 드나들며 교분을 쌓았던 청년 ‘김군’이라고 주장한다. 항쟁 당시 시민군을 지원했던 주옥은 어느 날 어머니와 시민군들의 군용 트럭에 주먹밥을 올려주고 있었는데, 그때 김군과 재회했다고 말한다. 그녀는 “날카롭고 남자답게 생겼다”고 김군에 대한 인상을 전한다. 주옥의 아버지 주대체는 김군이 ‘왕대포 시음장’으로 불렸던 자신의 술집에 자주 왕래하였으며, 광주시 동구에 위치한 원지교 아래에서 천막을 치고 살던 성명불상의 넝마주이 고아였고, 7-8명의 또래 청년들과 그룹을 이뤄 다녔노라고 증언한다. 당시 넝마주이들이 항쟁의 주동이 되었지만 항쟁 이후 사람과 천막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다. 주옥이 이름 없는 청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은 강렬하고 그녀의 기억은 역사에 대한 인식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다. 지만원과 주옥의 추적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김군>은 이 둘을 대비하면서 이미지의 속성과 진실을 담지한 아카이빙 기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연출자 강상우는 지만원의 분석과 주옥의 기억을 진실에 접근하는 것을 두 극점에 두는데 여기서 지만원의 기하학적 분석은 과학에 근거해 있는 것처럼 보이고 주옥의 것은 직관적이다. 김군의 얼굴을 찾아가는 이 로드무비의 여정은 5·18 기록 보관소에 안장된 한 장의 사진에서 우연히 출발하였다. 강상우는 역사적 증거와 증언을 번갈아가며 기록물과 삶의 이야기, 집단 기억과 기억 상실, 이미지의 메커니즘의 복잡한 역학을 서사화한다. 다큐멘터리의 구성 요소 중 생존자들의 인터뷰는 이미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사이의 역학을 탐구하는데 기여한다. 김군의 흔적을 찾기 위해 생존자들을 인터뷰하는 과정의 꼭짓점에 놓인 인물이 최진수이다. 장발에 반곱슬로, 하는 행동이 어리숙했던 청년 최진수의 등장은 미스터리의 영화적 해결방식을 보여준다. 시민군 최영철에 의해 1980년 5월 24일 발생한 송암동 학살사건 관련자로 지목된 최진수는 흑백의 사진으로 구체화하기 시작하여 1989년 2월 22일 제28차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에서 국회의원 김인곤의 질문에 답하는 모습으로 육화된다. 송암동의 그날을 생생히 기억하는 청년 최진수의 시점이 현재의 최진수로 넘어가는 대목에서 카메라는 그의 얼굴이 아닌 손을 클로즈업하고, 이에 상응하는 이미지로 동아일보 기자 최형주의 펜을 쥔 손도 클로즈업한다. 송암동 학살사건에서 죽은 희생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김군을 지목하는 과거의 최진수가 진술을 이어가는 동안 이미지 트랙에서는 현재의 최진수와 최형주 기자의 대화, 흑백의 자료 사진, 어두운 도로를 비추는 자동차 안에서의 쇼트, 운전석에 앉은 최진수의 측면 쇼트, 진상조사위원회에서 지도를 그리는 최진수 - 최형주 기자 앞에서 흰 종이에 지도를 그리는 현재의 최진수 이미지가 몽타주된다. 송암동의 민가에 피신한 시민군을 쫓아 온 공수부대에 의해 “김뭐라고만 알고 있는 동지”가 관자놀이에 총격을 받고 사망했음을 고지하는 증언은 과거의 최진수와 현재의 최진수가 합일되는 순간이다. 이때부터 현재의 최진수에게 음성이 부여되고 과거와 현재는 연속성을 획득하며 영화의 추적도 종착점에 다다랐음을 암시한다. 현재의 최진수를 시각화하는 시퀀스에서 프로필에서 정면으로 이행하는 쇼트의 전개 방식은 역사적 미제에 접근하는 영화의 스타일을 대변한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개의 공명하는 이미지와 맞닥뜨리는데, 최영철이 송암동 사건을 진술할 때 등장한 자동차 앞 유리로 보이는 어둑신한 도로와 주옥이 “원지교 아래에서 쓰레기를 줍는 고아”로 김군을 묘사했을 때 다리 아래를 묘사하는 풍경 쇼트이다. 이 연결은 만난 적이 없는 좌표 상에 놓인 이미지들을 하나로 꿰어 배열한다. 최영철이 떠올린 최진수가 김군을 불러내고, 최진수의 호명이 주옥의 김군을 소환하는 것이다. <김군>은 송암동의 희생자(들)가 김군일 것이라고 단정하지 않지만 이 기나긴 탐색의 과정이 스스로 말하게 함으로써 하나의 지도를 완성한다. 2022년 5월, <김군>에 영감을 제공했던 청년이 차복환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차씨는 각종 증거들을 통해 김군으로 지목된 사진 속 청년이 자신임을 입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학살의 후과를 상징하는 인물이 생존해있다는 것이 이미지의 권능을 의심하는 이 영화에 깃든 의미와 가치를 훼손하지는 않는다. <김군>은 다큐멘터리의 재현 양식, 이미지의 신실함에 대한 혼란에 기초한 영화이다. 공개 및 비공개 영상과 문서, 보도사진, 100명 이상의 생존자와의 인터뷰 등 방대한 컬렉션을 토대로 하여 엄밀한 조사 과정을 삽입하였지만 특정 양식이 진실을 생성하지는 않는다는 결론에 다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지만원과 주옥의 관계로 돌아가서, 지만원이 신뢰하는 안면 인식 기술과 주옥이 발동한 기억-감각은 그 간극이 크지만 과학적 탐사와 인간의 기억은 모두 확실한 진실을 제공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의 소명과 관련하여 에롤 모리스(< 가늘고 푸른 선 >(1988), <전쟁의 안개>(2003), < 언노운 노운 >(2013))는 “진실은 스타일이나 표현에 의해 보장되지 않으며 진실보다는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 다큐멘터리가 되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진실은 모호하고 또 알아내기 어렵다는 믿음에 기초한 이 영화의 탐사는 예정된 목표지점에 도달하는 어떤 다큐멘터리와도 다른 길을 갔다. 탐정 이야기와 비선형 배열의 조합은 관객의 판단을 위해 미스터리 속으로 들어가고 실제로 벌어졌던 일을 찾아가는 과정에 무게를 둔다. <김군>은 다큐멘터리 효과를 쟁점으로 하여 도구적 합리성에 대한 반성적 비판을 실천하며 혁신적이고 논쟁적인 방식으로 질문을 던진다.진실 추구의 상대적인 방법론들 사이에 얼마나 많은 옵션이 존재하는가? 현대 다큐멘터리의 주요 의제 중 하나인 역사적 사건에 관한 진실을 발견하는 일 안에 내재한 거짓, 불일치, 모호함을 쟁론화하면서 동시에 기록물, 인터뷰, 아카이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다큐멘터리의 역설을 가리키고 있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순전히 당나귀 때문이다. 내가 다른 선택지들을 제치고 < 이니셰린의 밴시 >(마틴 맥도나, 2022)를 보게 된 이유 말이다. 물론 당나귀 때문이라면 < EO >(예지 스콜리모프스키, 2022)를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EO>는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만 동물을 재현해온 관행을 넘어서 당나귀가 인간의 자리에 놓인 실사 영화라는 점에서 궁극의 동물 영화였다. <이니셰린의 밴시>와 비교해도 <EO> 쪽이 옳고 급진적인 태도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당나귀 영화에서 보고 싶었던 건 액션 배우나 로드무비 주인공이 당나귀로 대체된 모습은 아니었다. 고된 여정에 오른 캐릭터를 공동으로 연기한 당나귀 배우들을 보면서 이들에게 평범한 가축으로 남아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 심경이 되었다. 동물의 욕망을 내가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동물을 어떤 방식으로 묘사하든 그것이 명백히 인간의 욕망에 의한 산물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도 당근 메달을 우걱우걱 먹는 모습만은 귀여웠다. 관계에 관한 몇 가지 가정 <이니셰린의 밴시>의 주인공인 두 친구 패드릭(콜린 패럴)과 콤(브렌던 글리슨)은 각각 당나귀와 개를 반려동물로 기른다. 반려동물이 영화의 중심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중요한 방점을 찍는 것은 분명하다. 영화는 패드릭과 콤이 친밀했던 시간을 굳이 재연하지 않는다. 도리어 내내 반목하는 모습만을 보여준다. 관객은 늘 있는 일과처럼 친구의 집을 향해 걸어가는 패드릭의 걸음걸이와 눈썹 양 끝을 최대한 아래로 비스듬히 기울인 패드릭의 순진무구한 표정에서 그의 진실함을 의심하지 않는다. 패드릭과 콤은 늘 붙어 다니며 교류하는 일상을 나눠왔으나 그렇게 이어오던 시간의 관성이 갑자기 중단된다. 펍의 주인은 홀로 나타난 패드릭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인물과 주변인들의 반응을 통해 일상적 관계를 깨뜨리는 사건이 일어났음을 짐작하게 된다. 반면 콤의 태도를 보면 두 사람이 절친했다고는 믿기지 않는다. 나아가 친구라고 하기에는 둘은 대조적이며, 무엇보다 콤이 패드릭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보인다. (실제 두 배우의 나이 차이는 21살이다) 물론 나이를 뛰어넘어 교류하고 친구로 지내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렇게도 말해볼 수 있다. 두 친구는 지금 서로 다른 시간 속에 놓여 있다고 말이다. 패드릭은 나이가 들지 않은 채 특정 시간에 멈춰있고, 콤은 시간의 순리대로 나이가 들어버렸다. 콤은 패드릭이 실제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연기를 하면서 맞춰오고 있었지만, 이제는 한계에 다다라 그와의 교류를 끊기로 작정한다. 패드릭과 콤은 각각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 축을 담당한다. 친구와 우정을 나누던 시간 속에서 여전히 헤매는 패드릭은 과거의 인간이고, 패드릭과의 교류를 중단하고 새로운 관계로 뻗어나가는 콤은 미래의 인간이다. 두 사람의 부딪힘은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 맞붙은 채 벌이는 치열한 다툼과도 같다. 미래에서 온 콤은 말한다. 결국 역사에 기록되고 시간을 뛰어넘는 것은 모종의 위대함이라고. 모차르트를 비롯해 위대한 작곡가의 음악은 현재에도 후대에도 기억된다. 반면 두 친구가 서로를 배려하면서 나눈 다정한 시간은 후대에 기억되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미래의 시선에서 그것은 다 사라져 없어질 것에 불과하다. 반면 과거의 인간 패드릭은 인간적인 선의를 지키며 가족과 이웃에게 다정함을 베푼다. 경찰관인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하는 소년 도미닉(베리 키오건)을 돕고, 동생 시오반(케리 콘돈)과 당나귀 제니를 아낀다. 그가 발휘한 다정함은 다른 무엇으로 대체될 수 없다. 두 친구의 이야기는 미셸 공드리가 < 이터널 선샤인 >(2004)에서 전개한 이야기와 유사한 지점이 있다. <이터널 선샤인>은 특정 기억을 도려내는 것이 가능해진 상황을 그린다. 사랑에 실패한 인물은 연인과의 기억을 통째로 삭제하길 원하지만, 기억을 지우는 여정은 곧 기억을 소생하는 여정이 되어 과거의 시간을 긍정하게 만든다. 기억을 삭제하는 기술을 통해 <이니셰린의 밴시>를 관통하면, 콤만 기억을 삭제한 상황이라 말할 수 있다. <이터널 선샤인>의 인물은 실패의 미래를 알고 있음에도 과거를 반복하기를 선택하지만,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콤은 두 사람의 우정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는 관계를 끝내려 한다. 이를 알지 못하는 패드릭은 교류의 중단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반대로 패드릭이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것이라는 가정도 어느 정도 말이 된다. 플로리안 젤러의 < 더 파더 >(2021)에서 치매 환자인 안소니(안소니 홉킨스)의 시점을 체감하게 만든 것과 유사하게 <이니셰린의 밴시>는 거의 패드릭의 시점으로 영화를 보게 된다. 패드릭은 기억 상실증에 걸려 콤과 절연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 채 계속 콤에게 다가간다. 이를 받아주던 콤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이제까지 해오던 연극을 끝내면서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영화를 두고 이런저런 해석을 덧붙여보게 되는 건 콤의 갑작스런 절연은 패드릭에게도 관객에게도 납득하기 힘든 사건이기 때문이다. 전쟁과 이야기 전쟁은 단지 바다 건너편에서 희미하게 비쳐오는 사건이 아니다. 패드릭과 콤의 절연 역시 전쟁이다. 각각이 기르는 반려동물은 전쟁의 정찰병이다. 콤의 갑작스러운 절교 선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패드릭에게 콤은 만약 자신에게 말을 건다면 그 때마다 자기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이를 망설임 없이 실행한다. 패드릭이 규칙을 어기고 술에 취해 말을 걸어온 다음 날 콤은 집에서 손가락 하나를 잘라 패드릭의 나무문을 향해 던지고는 말없이 떠난다. 잘린 손가락이 문에 부딪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질 때, 잘린 손가락은 광적인 자해만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갈기는 총알처럼 여겨진다. 그 이후에도 패드릭은 무심결에 콤에게 말을 걸고 손가락은 가차 없이 잘리며 콤은 더 이상 바이올린 연주를 할 수 없게 된다. 두 친구의 절교가 초래한 가장 잔혹한 결과는 잘린 손가락을 입에 문 채 당나귀 제니가 죽음을 맞은 사건이다. 영화에서 사람이나 동물의 죽음이 묘사될 때 이것이 주인공의 변화를 위한 도구이거나 하나의 상징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당나귀의 죽음이 패드릭을 각성하게 함에도 그것이 도구이거나 상징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패드릭의 복수 방식에 있다. 패드릭은 더는 콤의 총알(손가락)을 외면하지 않고 콤을 공격하기로 결심한다. 패드릭은 복수를 위해 콤의 반려견을 해치는 식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법칙을 쓰지 않는다. 패드릭은 콤의 반려견이 주인을 구하려다 화마에 휩쓸리지 않도록 따로 보호해준다. 반려동물을 상실하는 슬픔을 똑같이 되돌려주지 않는 것은 거꾸로 반려동물에 대한 패드릭의 사랑을 드러낸다. 패드릭의 복수에는 그가 품어온 다정함이 최소한의 경계선으로 작동한다. 그것은 위대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감정이다. 콤 역시 패드릭의 당나귀가 죽게 된 상황에 충격을 받으며 복수를 담담히 받아들인다. 두 친구가 사는 마을은 커다란 바다와 맞닿아 있고, 바다 건너 본토에는 장기전이 벌어지는 중이다. 역사에 기록되는 것은 음악만이 아니라 전쟁도 있다. 전쟁은 역사에 기록되지만, 전쟁 이후 평화라면 모를까 지속하는 평화는 보통 역사로 기록되거나 회자되지 않는다. 이를 인간관계에 적용하면 인간의 기억에 깊이 각인되는 것은 좋았던 순간보다는 누군가와 갈등하거나 괴로운 순간인 경우가 많다. 콤이 패드릭과 절연한 이유는 패드릭과의 지속하는 일상을 보존하기 위해서 일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뚝 하고 두뇌 회로 하나가 잘린 것처럼 관계를 끊어내지 않는 한 일상은 여간해서는 각인되지 않는다. 전쟁은 역사에 기록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영화의 중요한 소재가 되어 이야기의 세계에도 영향을 준다. 실제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만이 아니라 영화의 소재가 평화보다는 충돌과 갈등이 많은 것도 전쟁의 역사가 이야기의 세계에 미친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두 친구의 이야기는 영화화될만한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생각으로 이끈다. <이니셰린의 밴시>의 세계는 켈리 레이카트의 < 퍼스트 카우 >(2019)가 서부극의 세계 속에서 나란히 죽음을 맞은 두 친구의 우정을 그려낸 것과 통한다. <퍼스트 카우>에서 주인공의 우정은 활극으로 기억된 세계 안에 새로운 리듬을 새긴다. <퍼스트 카우>가 보여준 것이 정공법이라면, <이니셰린의 밴시>는 반어법을 쓴다. 영화에서 타인이 타인에게 혹은 타자에게 발휘한 선의가 무가치하다고 말할수록 어쩐지 선의와 일상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리하여 바다를 마주한 채 나란히 선 두 사람의 뒷모습에서 기묘한 결합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