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이야기 3: 화성에서 온 소녀
- 감독
- 백승빈, 김선, 김곡, 민규동
- 제작년도
- 2016
- 출연
- 경수진, 임슬옹, 박정민, 홍은희, 민주홍, 로몬
<히어> 중 '실사'에 드리운 한계를 넘으면 비로소 선명해지는, 영화가 낳은(을) 새로운 감각과 지형을 발견합니다. 애니메이션은 만화영화인가? 엄밀히 따지자면,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누군가는 이런 우유부단한 답변이 엄밀한 것이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만화’와 ‘영화’라는 여타의 매체들과 복합적으로 엮여 있는 것이 애니메이션의 분명한 현실이니 말이다. ‘만화영화’란 말이 애니메이션의 고유성 내지 자율성을 해칠 수 있다는 반론도 있을 것이다. (요즈음에 만화영화라는 호칭이 잘 쓰이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그러나 고유성 내지 자율성이 위협받는 지점에서 그 매체의 성질이 잘 드러나기도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런 반론은 오히려 애니메이션이 겪는 고유한 문제를 묵과한 결과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런 거친 단언들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 매체사적 관점에서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서둘러 훑어봐야만 하겠다. 그런데 애니메이션이 무엇인가? 여기서는 저 위대한 애니메이터 노먼 맥라렌의 (1950년대 조지 시피아노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쓰인) 정의를 일단 따르기로 하자. “애니메이션은 움직이는 그림의 예술이 아니라 그려진 움직임의 예술이다. 각 프레임 사이에 무엇이 발생했는가는 각각의 프레임상에 무엇이 존재하느냐보다 중요하다. 그러므로 애니메이션은 프레임들 사이의 속임수로 눈에 보이지 않는 틈새를 교묘하게 조작하는 예술이다.” 즉 우리네 세계에 존재하는 물질들의 운동성을 (기록하는 대신) 만들어내고 나아가 시간의 흐름을 생성하기 위한 프레임 바이 프레임의 작업이 요구되는 미적 결과물 일체를 맥라렌은 애니메이션으로 정의한 것이다. 애니메이션의 특성을 기초적이면서도 광범위하게 짚는 이 정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아니 오늘날이라서 더욱 탁월하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어째서 만화와 영화의 조합어가 특정 매체를 표현하는 말이 된 걸까? 아무래도 ‘만화’는 그려진 가상의 세계를 표현한다는 점, 그리고 이를 과장하여 초현실적인 묘사를 왕왕 보여준다는 점이 같기 때문에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시간(의 흐름)과 운동(성)으로써 작용한다는 점, 그리고 이 작용의 주 형식이 프레임과 숏이라는 점 때문에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물론 동아시아에서의 번역된 명칭만으로 너무 많은 걸 해석하려는 건 아닌가 싶을 수도 있을 테다. 하나 만화영화라는 명칭은 사실 동아시아만의 것이 아닌데, 만화를 이르는 말 중 하나인 카툰(Cartoon)은 미국에서 만화영화와 비슷한 용법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당장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전문 TV 방영사인 카툰 네트워크를 떠올려 보시라. 카툰 네트워크 스튜디오 그 태동기인 1910년대에 (< 리틀 네모 >의) 윈저 맥케이나 (< 고양이 펠릭스 >의) 오토 메스머 같은 위대한 만화가들의 세례를 받으면서 (셀-)애니메이션과 카툰은 창작에 있어서든 산업에 있어서든 깊이 뒤섞이고 혼용되기 시작했으며, 이 때문에 애니메이션학자 찰스 솔로몬이 『마법의 드로잉: 애니메이션의 역사(Enchanted Drawings: The History of Animation)』에서 말했듯 “애니메이션은 역사의 대부분에 걸쳐서 그려진 카툰의 동의어”가 되었다. 다시 한 번 “그려진 가상의 세계를 표현한다는 점, 그리고 이를 과장하여 초현실적인 묘사를 왕왕 보여준다는 점”을 곱씹어 보자. 하지만 당연하게도, 21세기의 우리들은 애니메이션의 세부적이고 다양한 갈래를 ‘만화’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노먼 맥라렌의 추상 애니메이션, 이리 트른카의 퍼핏 애니메이션, 그리고 < 터미네이터 2 >(제임스 카메론, 1991)와 < 쥬라기 공원 >(스티븐 스필버그, 1993) 이후 컴퓨터 그래픽스의 영화적 활용을 순전히 만화와의 상관만으로 논할 수 있을까? 혹은 스탠 브래키지, 존 휘트니, 바술카 부부 등의 작업들처럼 분명 애니메이션의 성립 요건을 충족하는 것으로 보이나 (후대에 나온 3D 애니메이션과 달리) 애니메이션사 서술에서 주로 누락되고 실험영화사나 영상미술사에만 등장하는 경우는 또 어떤가? 이렇듯 오늘날 광대해진 애니메이션에 있어 ‘만화’의 특권성이란 어딘가 불충분한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어떨까. 영화학자 톰 거닝이 「순간을 애니메이션화하기: 애니메이션과 사진의 은밀한 대칭성(Animating the Instant: The Secret Symmetry between Animation and Photography)」을 비롯한 여러 연구에서 말했듯, 실사 영화의 역사와 전통적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단지 애니메이션이 좁은 의미에서 영화사의 일부인 것을 넘어) 서로 깊이 얽혀 있을뿐더러 순전히 기술의 계보로만 따지면 애니메이션이 실사 영화에 앞서서 우리네 세계에 출몰했다. 더군다나 요즈음 대부분의 대중적 실사 영화는 실사 이미지와 그래픽 이미지 사이의 디지털 합성으로 이루어진, 사실상의 부분적/비가시적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애니메이션학자 수잰 부캔은 이를 ‘편재하는 애니메이션(pervasive animation)’이란 용어로 표현한 바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디지털 이후 영화는 근본적으로 애니메이션의 특수한 일종이 되었다’라는, 미디어학자 션 커빗과 레프 마노비치의 따로 또 같은 주장은 그 도발성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논리적인 결론이라 할 만한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영화(사 서술)에 있어 렌즈 기반의 사진적 이미지가 지닌 특권성은 애니메이션을 주변화하거나 보조화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은폐된 기원이자 기둥으로서 애니메이션. (상) 원작 『여기서』(리처드 맥과이어, 2014) 중 / (하) 실사 영화 <히어> 중 (사진: " Here, 2014 ", Richard McGuire) 요컨대 애니메이션이란 범주는 ‘만화영화’로서의 요소를 강하게 지닌 동시에 이를 완전히 초과하는, 근원적인 ‘혼동과 분산(발터 벤야민)’에 처해있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은 만화영화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흥미롭게 볼 만한 작품이 있다면, 아무래도 로버트 저메키스의 근작 < 히어 >(2024)이지 않을까? 리처드 맥과이어의 급진적인 반(反)만화 『여기서』를 영화화한다는 난제를 수행하면서, 저메키스는 원작의 (드라마적 서사와 정돈된 타임라인 없이 펼쳐지는) 초월적 고정 시점과 다중 프레임 구조에 적당한 인간적 중력을 부여하려 애쓴다. 그런데 어떻게? (마구 혼재된 타임라인을 관통하기 위한) 모션 캡처와 3D 애니메이션 기술을 적극 활용해 작품을 부분적인 가족 드라마로 변형시킴으로써. 그럼에도, 혹은 그렇기에, 영화는 불안정하고 과포화된 시각적 구도와 지나치게 매끈한 사물 이미지 등 그 외양에 있어 동시대 연극 같기도 하고, 제프 월이나 그레고리 크루드슨의 사진 같기도 하며, (저메키스 자신이 지난 2000년대에 천착했던) 모션 캡처 CG 애니메이션 같기도 한, 지극히 비(非)영화적인 형태를 띠게 된다. 달리 말해 반만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비영화 <히어>에는 애니메이션이 활용된다는 것을 숨기거나 완화하려는 노력의 흔적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를 그저 작품의 실패라고 쉽게 치부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저메키스에게는 ‘애니메이션다움’을 부상시키는 것 자체가 목표는 아니었을까? 우리가 지식으론 알고 있는 ‘편재하는 애니메이션’의 비가시적인 사실을 과도하리만큼 가시화하는 것 말이다. 고정된 위치에서 인간사와 자연사를 번잡하게 조망할 수 있는 초월적 시선이란 (적어도 영화 내적으로는) 애니메이션 기술을 통해서만 구현 가능하다. 이런 당연한 사실을, 저메키스는 그러한 시선으로 보는 세계는 인간적 지각(의 기준)과 닮기보다는 퍽 애니메이션적일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믿음으로 치환하여 밀어 붙여본 것이다. 이는 반만화적인 구상과 비영화적인 구성을 지탱하고 구축하는 것이 애니메이션 기술이란 사실과도 겹치며, 우리를 마지막 장면으로 끌고 간다. 기억을 더듬는 노년의 부부를 무심히 바라보다 마침내 거대하고 유려하게 움직이는 ‘영화적’ 시선. 그것의 감동은 애니메이션적인 것과 영화적인 것 사이의 내재적인 혼융이 양자의 전환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근사하게 제시한다는 데에서 온다. 다시 한 번, 이 무모한 작품은 애니메이션이 만화영화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함을, 그리고 애니메이션이 이 이중구속 속에서 제 역량을 탁월하게 발휘하기도 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렇기에 이 근원적인 ‘혼동과 분산’은 은총에 가깝다. 윤아랑(비평가) l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을 주로 다루며, 주체성과 현실감각을 문제시하는 문화 비평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2022),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2023), 『악인의 서사』(공저, 2023), 『라임 앤 리즌 2호: 오컬트』(공저, 2025) 등이 있다.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를 보고 난 첫 느낌은 그저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빛과 소란과 움직임만으로 이뤄진 온전한 축제를 치른 느낌. 여기엔 장식도 도식도 클리셰도 없다. 계획과 우연, 작위와 즉흥이 일견 무질서하게 조우하는데 어떤 파열도 마찰도 없이 불협화음조차 아름다운 노래가 되는 기적 같은 세계. 장 르누아르와 존 포드와 킹 비더와 자크 베케르와 장 비고의 어떤 영화들에서 우리가 만났던, 생의 송가(頌歌)라고 부르고 싶은 순간들의 파노라마. 영화 속에서 아이들이 만든 어설픈 공포영화를 보고 장(장 피에르 레오)은 “단순하고 아름답다. 영화 만들기의 기쁨이 느껴진다.”고 말하는데,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라는 영화에 고스란히 돌려주고 싶은 말이다. 하지만 이야기도 축제도 삶도 끝을 피할 수 없다. 모든 건 언젠가 막을 내리고 사라져갈 것이다. 장은 “모든 이야기의 끝은 죽음”이라고 말한다. 끝이 없다면 이야기는 아름다울 수 없고 축제의 신명은 없을 것이며 생은 빛날 수 없을 것이다. 소멸과 죽음의 예기는 축제의 오점이 아니라 동반자다.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라는 축제의 영화는 동시에 죽음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노배우 장은 영화 속 영화에서 지금 죽음을 연기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죽음을 연기해야 하는지 모른다며 투덜거린다. 72세의 이 사내는 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의 불안한 눈빛은 관조와 달관이 아닌 생의 집착으로 가득하다. 아마도 죽음에 너무 가까이 있어 죽음을 연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상대역 여배우의 잠적으로 그에게 며칠간의 휴가가 주어진다. 촬영지 가까운 곳에 40여년 전 그가 떠나온 여인의 집이 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그러나 여전히 아름다운 텅 빈 그 집을 그는 찾아간다. 그곳에서 영화를 찍으려는 아이들 무리를 만난다.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는 도처에 죽음이다. 죽음을 연기하려던 노배우는 죽은 옛 연인의 무덤을 다녀온 뒤 ‘죽음의 위험’이라는 조악한 팻말이 붙어있는 폐가에서 그녀의 영혼을 만난다. 아이들은 귀신이 등장하는 영화를 찍으려 하며, 아이들 중 하나인 쥘은 죽은 아버지를 보고 싶어 한다. 죽음에 너무 가까워 굳어가는 노인과 죽음에 너무 멀리 있어 오히려 죽음을 마음껏 유희하는 아이들이 모여 죽음의 영화를 만들고 죽음의 노래를 부른다. 극 중에서 아이들과 노인이 함께 부르는 노래 ‘사자는 오늘밤 죽는다 Le lion est mort ce soir’는 그대로 영화제목이 되었고 일본어 제목도 ‘사자는 오늘밤 죽는다 ライオンは今夜死ぬ’이다. 그 노래는 아프리카 줄루족 출신의 솔로몬 린다가 'Mbube'라는 제목으로 처음 불렀고(그는 정글에서 사자를 만났을 때 겁에 질려 ‘사자야, 가만히 있어’라고 반복적으로 흥얼거렸고 이 흥얼거림이 노래가 되었다), 피트 시거를 비롯한 세상의 수많은 가수들이 다시 불렀다. 영어권에선 <라이언 킹>의 주제곡으로도 사용된 ‘사자는 오늘밤 잠든다 The Lion Sleeps Tonight’로, 불어권에선 ‘사자는 오늘밤 죽는다 Le lion est mort ce soir’로 널리 알려졌다. 불어와 일어 제목의 죽음이 영어와 한국어 제목에선 잠으로 바뀐 셈이다. 잠과 죽음 사이. 죽음을 연기하는 방법을 모르겠다는 노배우 장(장 피에르 레오)에게 극 중 감독은 “죽음은 잠드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장은 “죽음은 조우”라고 말하지만, 무엇과의 조우인가, 라는 아이들의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장은 옛 연인의 집에 자꾸만 잠든다. 우리는 그의 반복된 잠이 죽음에 이르는 노쇠의 증상인지, 죽은 연인과의 재회를 위한 시도인지 식별할 수 없다. 다만 ‘죽음의 위험’이라는 집에서 그는 자꾸 잠들고, 죽은 연인 쥘리엣을 만난다. 여기엔 한 가지 이상한 규칙이 있다.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옛 연인 쥘리엣은 장의 잠 속에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등장한 직후에 어김없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오자 죽은 옛 연인도 뒤따라온다. 아이들의 소란이 불러일으키는 생의 활력이야말로, 장이 죽음의 의미라고 믿는 조우를 이끄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아이들이 영화 만들기 놀이를 시작하자 비로소 불가능한 조우가 시작된다. 이 영화의 심장은 죽음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 아이들의 놀이다. 스와 노부히로는 지금 죽음을 말하고 있지만 죽음을 찍고 있는 게 아니다. ‘죽음을 연기하는 방법을 모르겠다’는 장의 말은 ‘죽음은 연기될 수 없다’는 말로 들을 수도 있다. 유능한 연기자라면 그가 연기해야 할 모든 감정을 자신의 내부에서 끌어낼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을 어떻게 자신의 내부에서 끌어낼 수 있는가. 그는 죽은 척할 수는 있지만 죽음을 연기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영화는 죽음을 기록할 수 있지만 재현할 수 없다. 장은 죽음을 끝내 연기하려 하지 않고 영화 속 영화 역시 죽음의 촬영에 실패한다. 그 실패가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라는 영화의 처음과 끝에 놓여있다. (영화 속 영화를 찍는 첫 장면에서 죽음을 연기할 줄 모르겠다던 장은 영화 속 영화 촬영이 재개된 마지막 장면에서 ‘죽은 척하기’를 거부하고 눈을 부릅뜬다.) 죽음이 그렇다면 놀이는 어떠한가. 놀이는 자기 자신 외에 다른 목적을 갖지 않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활동이다. “누구든지 마음만 내킨다면 정의, 아름다움, 진리, 선함, 마음, 신 따위의 거의 모든 추상적인 것을 부정할 수 있겠지만 놀이는 결코 부정할 수 없다.”(요한 호이징하) 부정될 수도 한정될 수도 없는, 그 자체로 온전한 놀이는 극영화라는 허구의 세계 안에서 적절한 기능적 자리가 배당된 행위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노는 척할 수는 있으되 놀이를 연기할 수는 없다. 죽음과 마찬가지로 영화는 놀이를 기록할 수 있지만 재현할 수 없다. 달리 말하면 죽음과 놀이는 상연될 수 있되 연기될 수는 없다. 스와 노부히로가 믿는 것은 아이들의 육체이며 아이들의 놀이다. 그는 아이들처럼 놀 수 없고 아이들처럼 영화를 찍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아이들의 놀이를 기록할 수는 있을 것이다. 스와 노부히로는 아이들을 놀게 한 뒤 그것을 자신의 카메라에 담는다. 사랑스럽지만 통제할 수 없는 노인 장 피에르 레오 역시 그에겐 또 다른 아이였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멈춘 적이 없었던 즉흥 연출과 즉흥 연기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늙고 어린 이 아이들의 놀이에서 발견한 것 같다.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는 죽음을 번민하거나 재현하기를 멈추고(장의 대사를 빌자면 지나치게 진지해지기를 멈추고) 아이들의 놀이를 찍기로 결정한 스와 노부히로 자신의 선택에 관한 영화이기도 할 것이다. 프랑스 남부 소도시에서 촬영된 이 영화는 모네의 그림을 보는 듯한 빛의 난장인데, 감독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그중에서 가장 밝은 빛을 발하는 존재는 바로 아이들이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진 아이들의 소란이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다. 아이들과 노인이 호숫가로 소풍을 떠나며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를 함께 부르는 장면보다 아름다운 장면을 2017년의 다른 영화에서 보지 못했다. 이 아름다움에는 해방감에 가까운 자유의 향기가 있다. 일본의 한 평자는 “이 영화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위한 마스터클래스”라고 말했는데 동의할만한 말이다. 스와 노부히로는 마치 영화사를 잊은 것처럼, 그리고 자신의 영화 이력조차 잊은 것처럼 우리에게 영화 만들기의 행복감이 영화 그 자체를 통해서 전염될 수 있음을 믿고 이 영화를 만든 것 같다. 그리고 그 믿음은 오차 없이 이 영화를 보는 103분 동안의 상영 시간 내내 우리를 소란의 축제로 이끌고, 생의 감각을 일깨운다.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는 누벨바그보다 더 누벨바그적인 영화, 누벨바그가 한 시대의 사조가 아니라, 영화의 영원한 출발점이어야 한다는 다짐과도 같은 영화다.
‘아프리카를 무대로 펼쳐지는 모험과 로맨스의 대작 오락물’에서 존 포드의 이름을 보게 되는 건 아무래도 어색하다. < 모감보 >는 여러 면에서 예외적인 포드 영화다. 먼저 눈에 띄는 건 배우들이다. 주연을 맡은 당대의 톱스타 클락 게이블, 애바 가드너, 그레이스 켈리는 이 영화 외엔 포드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반면 신부를 맡은 단역 데니스 오데아(Denis O’Dea)를 제외하면 포드 사단에 속한 배우들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아프리카가 공간적 배경인 영화도 <모감보>가 유일하다. 각본을 쓴 존 리 마인(John Lee Mahin)은 이 영화가 포드와의 첫 작업이며 6년 뒤의 < 기병대 The Horse Soldiers >(1959)가 포드와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공동작업이다. 촬영을 맡은 로버트 서티스(Robert Surtees)는 < 솔로몬왕의 보고 King Solomon’s Mines > < 벤허 > 등의 대작을 찍었으며 역시 < 모감보 >가 포드와의 유일한 공동작업이다. 존 포드가 자신의 영화적 고향 모뉴먼트 밸리 혹은 미국도 아니며 가족의 실제 고향 아일랜드도 아닌 머나먼 이국땅에서 낯선 배우들, 낯선 스태프들과 만든 이례적인 영화가 <모감보>다. <솔로몬왕의 보고>(1950), <아프리카의 여왕>(1951), <킬리만자로의 눈>(1952) 개봉 당시에 「뉴욕타임스」의 유명한 평론가 보슬리 크라우더는 이 영화를 “또 하나의 아프리카 사파리 영화”라고 불렀다. 당시 할리우드에는 < 솔로몬왕의 보고 >(캠튼 베넷, 앤드류 마튼 감독/데보라 커, 스튜어트 그랜저 주연, 1950), < 아프리카의 여왕 The African Queen >(존 휴스턴 감독/험프리 보가트, 캐서린 헵번 주연, 1951), < 킬리만자로의 눈 The Snows of Kilimanjaro >(헨리 킹 감독/그레고리 펙, 수잔 헤이워드, 애바 가드너 주연, 1952)과 같은, 빅 스타를 내세우고 미지의 땅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모험과 로맨스를 배합해 관객의 이국 취향을 만족시키는 영화들이 유행했다. 당대의 관객이나 평자들에게 < 모감보 >는 ‘Great White Hunter’ 멜로드라마라고 불리기도 했던 이런 영화들의 아류로 비쳤던 것 같다.(클린트 이스트우드가 1990년에 내놓은 < 추악한 사냥꾼 White Hunter Black Heart >은 <아프리카의 여왕> 촬영 당시 존 휴스턴 감독의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이자, 이 장르의 패러디이다.)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당대의 평론가들은 물론이고, 존 포드 열광자들 중에서도 이 영화를 주목하는 이는 드물다. 린지 앤더슨은 < 모감보 >가 “오락과 도피를 위한 외도이며, 콘셉트도 야심적이지 않고 결과도 신통치 않은 영화”라고 잘라 말한 뒤 어떤 논평도 덧붙이지 않는다(『About John Ford』). 앤드루 새리스 역시 “작가의 영화라기보다는 장인의 영화”이며 “포드의 이름을 들어본 적 없고 그의 개인적 프로젝트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 온 마을의 수다 The Whole Town’s Talking >(1935)와 함께 포드의 가장 즐길만한 영화”라고 적고 있다. 다만 새리스는 “이 도피주의적인 빅 스타 오락물이 (대중영화로서) 흠잡을 데가 거의 없는데도, 대중영화 지향적인 비평가들조차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덧붙인다.(『John Ford Movie Mystery』) 생전의 포드를 만난 진지한 인터뷰어들도 이 영화엔 별다른 관심이 없어, 포드가 이 이례적인 프로젝트를 왜 시작했는지, 어떤 구상으로 촬영했고 결과에 대해 어떤 소회를 가졌는지에 대한 발언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반면 당시 언론의 연예란에는 이 영화가 뜨거운 이슈였는데, 영화 자체 때문이 아니라, 세 주연 배우가 톱스타이자 당대의 바람둥이였고, 촬영현장에서 얽히고설킨 염문을 끝없이 낳았기 때문이다. < 모감보 >는 메이저 스튜디오 밖에서 만들어진 포드의 개인적 영화들(< 도망자 > < 웨건 마스터 > < 태양은 밝게 빛난다 > < 라이징 오브 더 문 >)이 겪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소외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기묘한 소외를 겪은 셈이다. 전후의 존 포드가 개인적 프로젝트(위의 네 편과 < 말없는 사나이 > 등)의 제작비 마련을 위해 스튜디오 납품용으로 당대의 상업적 장르인 서부극을 찍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전형적인 오락물처럼 보이는 < 모감보 > 역시 같은 의도로 만들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오늘의 우리에게 <모감보>가 흥미롭게 보이는 이유는, 스스로는 충분히 의식하지 않았더라도, 포드가 완전히 다른 세팅으로 또 다른 서부극을 찍고 있다는 사실이다. 포드는 자신의 서부극이 서부의 역사를 충실히 기록한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서부극뿐만 아니라 서부극적인 비서부극이 보여주는 바는, 포드의 서부극이 실화에 바탕한 이야기의 충실한 재현이라기보다 바르트적인 의미에서 신화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애바 가드너, 클락 게이블, 그레이스 켈리 줄거리는 이렇다. 케냐의 밀림 지역에 터를 잡은 빅터(클락 게이블)는 두 백인 및 원주민 조력자들과 함께 맹수를 포획해 유럽의 동물원과 서커스단에 파는 백인 사냥꾼(white hunter)이다. 어느 날 밤무대 무희처럼 보이는 켈리(애바 가드너)가 도착해 빅터와 짧은 인연을 맺지만 빅터는 그녀를 부담스러워한다. 곧이어 젊은 영국 인류학자 도날드와 그의 아름다운 아내 린다(그레이스 켈리)가 사파리 여행을 위해 이곳에 온다. 빅터와 린다는 곧 사랑에 빠지지만 이를 숨기고, 네 남녀는 고릴라 거주 지역을 향한 위험한 사파리 여행을 떠난다. #0 거의 지적되지 않는 점이지만 < 모감보 >는 < 역마차 >(1939)와 많은 면에서 흡사하다. 이주민들의 불안정하고 작은 마을, 온갖 위험이 도사린 야생 지역(초원과 밀림/황야)을 차례로 통과하는 여정, 적대적 토착민들(아프리카 원주민과 맹수/인디언)의 위협, 주인공 남녀의 결합이라는 주요 모티프들을 두 영화는 공유한다. 고릴라 지역 원정대는 마치 서부의 평원을 지나는 마차 행렬처럼 찍혀 있다.(#0) 운송수단은 마차에서 지프와 카누로 달라졌지만, 빅터 일행의 지프와 카누가 역마차처럼 두세 곳의 토착민 마을을 경유해 최종목적지에 이르는 구성은 같으며, 승객 캐릭터들도 유사하다. 야생의 삶에 익숙한 유능하고 과묵한 단독자인 주인공(빅터/링고 키드)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프/마차에는 지금 문명화된 지역에서 온 숙녀(린다/루시)와 창녀 혹은 유사 창녀(켈리/댈러스)가 타고 있으며 숙녀는 창녀를 경계한다. 물론 < 모감보 >의 지프와 카누에는 주정뱅이 철학자도 없고(주정뱅이는 있지만 철학자는 아니다), 이상심리의 도박사도 위선적인 절도범도 없다는 점에서 캐릭터 구성은 훨씬 단조롭다. 또한 링고 키드의 여정은 복수를 향한 것인 반면 빅터의 여정은 로맨스(다른 남자의 아내를 얻기 위한)를 향한다는 차이도 있다. 하지만 여정의 끝에 주인공과 창녀의 결합(빅터-켈리/링고 키드-댈러스)이 이뤄진다는 결말은 완전히 같다. <역마차>의 링고 키드 / <모감보>의 빅터 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 역마차 >에는 공동체가 있지만 < 모감보 >에는 공동체가 없다는 점이다. <역마차>의 마을은 문명화의 도정에 있다. 이 불안정한 공동체에는 문명의 완성을 위해 제거되어야 할 외부의 위협(인디언 제로니모)과 내부의 위협(악당 플러머 형제)이 있으며 동시에 문명의 악덕(은행가의 탐욕과 범죄, 창녀와 주정뱅이 철학자를 추방하는 위선의 율법)도 이미 만연해 있다. 링고 키드는 사적인 복수심의 발로라 해도 악당들을 제거해 사실상 공동체의 문명화에 기여했지만, 이젠 살인자가 된 그를 위한 공동체 내부의 자리는 감옥이나 교수대 외에 없다. 그는 떠나야 한다. 문명화의 도정에 있는 서부 공동체의 딜레마는 오늘은 폭력적 영웅이 필요하지만 내일은 그를 추방해야 하는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영웅의 폭력 행사와 (자기)추방은 모두 공동체의 도덕적 요청인 것이다. <역마차>라는 서부극 서사에서 공동체의 도덕은 영웅의 윤리와 긴장하고 대립하는 중심 모티프이다. < 모감보 >에는 빅터가 거주하는 마을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만 그의 윤리와 긴장하는 공동체의 도덕 같은 건 없다. 이 마을은 사실상 빅터가 사장인 비즈니스 조직에 가깝다. 그의 표면적 목적은 더 많은 동물을 잡아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일 뿐이다. 물론 그의 근본적 동기가 돈벌이인지 도피인지는 모호하긴 하지만, 이곳은 온전히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이는 빅터의 소왕국과도 같은 곳이다. <모감보>의 서사가 < 역마차 >에 비해 얇아 보이는 건 캐릭터 구성의 단조로움 때문이라기보다 영웅의 비극적 운명을 요구하는 공동체의 잔혹한 도덕이라는 모티프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다른 차이 하나는, 당연해 보이는 말이긴 하지만, < 모감보 >에는 공동체가 없으므로 공동체의 바깥도 없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서사의 외부 혹은 서사의 초월적 층위라고 부를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 역마차 >의 링고 키드는 댈러스와 함께 지평선 너머를 향해 떠난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멕시코라는 특정 지역이라기보다 공동체의 바깥, 주정뱅이 철학자 닥 분의 표현을 빌리면 ‘문명의 축복을 벗어난’ 미지의 땅이다. < 황야의 결투 >의 와이어트 업, < 수색자 >의 이산 에드워즈도 그곳을 향해 떠났다. < 웨건 마스터 >의 인물들은 평생 그곳을 찾아 떠돌아다닐 것이다. 포드 서부극에서 그 바깥이 서사를 영원한 미결의 여정으로 만든다. 영웅의 떠남이 사실상의 추방 심지어 죽음의 은유라고 해도 그에겐 적어도 떠남의 결정권이 주어졌고 무한한 광야로 시각화된 그 바깥은 감상적 위안마저 안겨주는 낭만적 외부였다. 포드의 서부극에 한정한다면 이 외부가 닫히는 건 1960년대의 두 서부극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와 < 샤이엔의 가을 >에서였다. 두 영화는 이 바깥의 최종적 폐쇄의 확인이라는 목적지에 이르는 길고 고단한 여정이었다. 아프리카라는 공간 < 모감보 >의 장소인 아프리카는 물리적으로는 미국 서부보다 훨씬 광대하고 더 아득한 미지의 땅이다. 하지만 이곳이 < 역마차 >의 서부보다 좁아 보이는 이유는 외부가 없는 달리 말해 초월적 층위의 장소가 상상될 수 없는 동질적 공간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항상 일정한 위험이 일상인 장소이고 그 위험은 관리될 수 있을 뿐 근본적으로 제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더 깊은 정글로 가더라도 마찬가지다. 빅터는 무슨 이유에선지 문명을 떠나 이 외지고 위험한 곳에 정착했고(그의 개인사는 설명되지 않는다), 도시로 나간 적도 거의 없다. 그는 문명 공동체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달리 말하면 빅터는 < 역마차 >의 결말에서 링고 키드가 향해 떠난 곳에 이미 도착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계속 밀림 탐색에 나서겠지만 더 이상 미지의 땅을 향해 떠도는 게 아니라 자신의 소왕국으로 반복해서 돌아올 것이다. 그는 자신이 떠나온 곳으로 돌아갈 생각도 없지만 더 이상 나아갈 곳도 없다. 말하자면 < 모감보 >의 정글은, 다른 층위의 장소를 향해 열린 곳이 아니라, 영웅이 자신을 최종적으로 유폐시킨 폐쇄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모감보>는 <역마차>의 변주이면서 동시에 후일담으로 볼 수도 있다. 혹은 <모감보>를 포스트 서부극이라 말할 수도 있다. < 모감보 >가 ‘또 하나의 아프리카 사파리 영화’가 아니라 포드 서부극의 친족처럼 보이는 다른 이유들도 있다. 존 포드는 메이저 스튜디오가 요구한 아프리카 사파리 장르를 수용하면서도 이 장르의 다른 영화들이 채용한 정글 모험의 일반적인 길을 택하지 않았다. 예컨대 존 휴스턴의 < 아프리카의 여왕 >에서 작은 증기선에 올라탄 험프리 보가트와 캐서린 헵번의 주된 곤경은 끝없는 갈대숲과 진창, 엄청난 수의 모기떼, 강의 가파른 급류, 미친 폭우와 강풍과 같은 아프리카의 가혹한 자연환경이 초래한 것이다. 하지만 <모감보>는, 맹수의 등장을 제외하고는, 아프리카라는 장소를 특별한 공포와 매혹의 스펙터클로 만드는 데 무관심하다. 서부극의 주요 장르적 요소 가운데 하나가 문명과 자연의 대립이라는 설명은 널리 통용되지만, 포드 서부극에서 적대적 자연환경이 주된 모티프로 등장한 경우는 거의 없다. 자연재난 장르인 < 허리케인 >을 제외하면, 성서번안극에 가까운 유사서부극 < 3인의 대부 3 Godfathers >(1948)의 소금사막이 드문 예외다. 포드 서부극에서 자연 풍경은 오히려 깊이 침묵하는 초서사(超敍事) 혹은 비지(非知)의 심연이다. 적대적 자연으로 흔히 오인되는 것은 적대적 인디언이다. 백인의 이주민공동체와 대립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북미 인디언의 토착민공동체인 것이다. 백인 문명이 자연 지배적이고 인디언 문명이 자연 순응적이라고 해도, 이 대립은 분명히 하나의 문명과 또 다른 문명의 대립이며 투쟁이다. 인디언 공동체가 백인 공동체보다 도덕적으로도 지적으로도 더 우월한 것으로 묘사되는 < 아파치 요새 >보다 이를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그가 달빛이 흐르는 강을 사랑하는 건 분명하지만(< 젊은 날의 링컨 > < 모감보 > < 라이징 오브 더 문 >), 감독으로서의 존 포드는 자연을 공포 혹은 신비의 대상으로 드러내는 상투적 방식에 이끌린 적이 거의 없다. < 모감보 >에서 포드는 모험이 아니라 여정을 택한다. 사파리 장르의 강점인 맹폭한 자연 대 분투하는 인간이라는 구도를 활용하는 대신, < 역마차 >의 궤적을 고스란히 떠올리게 하는 여정의 서사 안에서 <역마차>에서처럼 인물들과 그들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이다. 적어도 <모감보>의 세계 안에서라면 아프리카의 자연은 빅터라는 유능한 영웅에게 거의 위협이 되지 못한다. 빅터는 공동체와 절연한 단독자이며 그를 망칠 수 있는 건 이제 그 자신밖에 없다. 이런 점들이 <모감보>를 <역마차>의 후일담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 자신이 맹수이며 자기 내부에 모든 위협을 지닌 영웅이라는 점에서 빅터는 모던한 서부사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곳에서 그는 또 다른 맹수로부터 위협받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이 최상위 포식자다. 공동체의 율법도 외부의 위협도 사실상 부재한 곳에서 최상위 포식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일상적 먹이 사냥을 제외하면 짝짓기 말고 달리 무엇이 있을까. 돌려 말할 필요가 없겠다. < 모감보 >는 맹수의 짝짓기 영화다. < 모감보 >의 흥미로운 점 가운데 하나는 위협적인 맹수들이 등장하는 시퀀스들이 최상위 맹수인 빅터의 알레고리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맹수들은 빅터의 분신으로서 그의 정체를 암시하고 그의 위협을 상연하며 그의 불길한 미래를 예기한다는 것이다. #1 #2 #3 #4 이 영화에선 흑표범이 여러 번 등장한다. 첫 시퀀스에서 함정에 빠져 포획된 흑표범은 백인 조수의 실수로 그물을 뚫고 도망간다.(#1) 몇 장면 뒤에 린다는 혼자 산책을 나갔다 같은 함정에 빠지고 흑표범이 그녀를 향해 으르릉거리며 다가온다.(#2, #3) 뒤늦게 쫓아온 빅터는 흑표범을 쏜다.(#4) 여기 세 맹수가 있다. 첫째, 그물을 뚫고 탈출한 맹수. 둘째, 함정에 빠진 미녀에게 다가오는 위협적인 맹수. 셋째, 여인의 육신을 노리다 총을 맞고 쓰러지는 맹수. 첫째는 공동체를 탈주한 빅터의 전사에 해당될 것이며, 둘째는 자기도 모르게 함정에 빠진 린다에게 접근하고 있는 빅터의 현재에 해당될 것이다. 셋째는 결말부에 전개될 빅터의 미래에 해당될 것이다. #5 더 흥미로운 장면은 후반부에 있다. 고릴라 거주지역 부근 텐트에서 혼자 앉아있는 켈리 곁을 치타가 무심하게 지나간다.(#5) 켈리가 뒤늦게 알아차리고 놀라지만 치타는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맹수와 여인이 한 프레임에 담긴 유일한 장면이며, 촬영 현장에서 우연히 발생한 사건을 재연한 장면이지만, 켈리에 대한 빅터의 미지근한 태도뿐만 아니라, 빅터와 켈리가 같은 종의 맹수임이 절묘하게 암시된다. 둘은 모두 문명이 아니라 정글에 속한 존재인 것이다. 린다와의 결합에 실패한 뒤, 빅터는 떠나려는 켈리를 붙잡으며 “함께 있어주면 좋겠소. 당신은 내게 어울리니까.”라고 말한다. 달콤한 구애의 언어를 기대했던 켈리는 “어울린다고?”라며 화를 내고 배에 올라탄다. 하지만 그녀는 곧 배에서 내려 빅터에게 달려온다. 빅터의 말대로 둘은 사랑한다기보다 어울리는 게 맞다. 빅터와 켈리의 결합에는 < 역마차 >의 링고 키드와 댈러스의 결합에서처럼 로맨틱한 감정교환 대신 동류의 존재로서의 확인만 존재한다. 비유컨대 < 모감보 >는 먼저 떠난 링고 키드에게 댈러스가 뒤늦게 찾아온 이야기다. 둘은 맹수로서 앞으로도 공동체로부터 멀리 떨어져 정글에서 살아갈 것이다. 마지막 장면 이 마지막 장면은 해피엔딩처럼 보이지만 아름답다기보다 처연하다. 여기엔 모종의 단념이 있기 때문이다. 린다가 일깨운 문명으로의 복귀 가능성, 로맨스, 열정의 회복이 모두 단념된다. 포드는 단념의 사유를 설명하지 않고 단념의 결정만 제시한다. 마치 단념이 빅터와 켈리의 운명이라는 듯. 이것이 자신을 정글에 유폐한 서부사나이의 삶이다. 그런데 < 모감보 >에는 이 모든 설명을 부질없게 만드는 시퀀스가 있다. 산책 도중 위험에 빠진 린다를 빅터가 구한 뒤에 둘이 돌아온다. 린다는 날렵한 초식 동물처럼 프레임을 재빨리 빠져나가다(#6) 나무 등걸에 기대 그를 바라보며(#7), 빅터라는 맹수를 피하듯 유혹한다. 급작스러운 폭풍우가 몰아치고 빅터가 린다를 안아 올리자 린다는 갑자기 빅터의 몸을 빨아들일 듯 안겨든다.(#8) 그런 다음 이 영화의 가장 유명한 장면이 이어진다. 남편이 잠든 린다의 방 앞에서, 빅터는 린다의 스카프를 벗기고 그녀의 목을 감싼 다음 거칠게 당긴다.(#9) 흔들리는 눈빛의 린다는 다가올 듯하다 돌아서 들어간다.(#10) #6 #7 #8 #9 #10 입맞춤조차 없지만 이 일련의 장면들에는 숨막힐듯한 유혹, 외설적 욕망과 섬뜩한 불안이 숨 가쁘게 교차한다. 이 영화의 드문 지지자인 태그 갤러거의 표현을 다시 옮기자면 여기엔 “절정, 사랑, 이해, 공포, 고통, 모욕, 분노, 두려움, 수치와 같은 수많은 감정들”이 한 장면에 모두 담겨있는 것이다. 이런 장면을 보고 있으면 포드를 무엇보다 위대한 디테일의 작가, 감정 표현의 마술사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사적인 감상으로는, 이 시퀀스 하나만으로도 < 모감보 >를 포드의 걸작 반열에 올리고 싶어진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