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키 3
- 감독
- 실베스터 스탤론
- 제작년도
- 1982
- 출연
- 실베스터 스탤론, 다리아 샤이아, 버드 영, 칼 웨더스, 버게스 메레디스, 토니 버톤, 미스터 티, 헐크 호간, 이언 프라이드, 알 실바니, 월리 테일러
보고 난 다음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이미 불이 켜진 다음이고 화면은 하얀 천을 드러내면서 영화가 끝났음을 내게 알려주었다. 극장은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이미 텅 비어있었다. 그때는 항상 그러했다. 나는 < 나비 품에서 울었다 >를 처음 보았을 때의 어리둥절함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지금 숨은 걸작을 발견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무언가 이건 난처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 족보 >를 만든 다음, 이미 < 짝코 >를 만든 다음, 이미 < 만다라 >를 만든 다음에 < 나비 품에서 울었다 >는 < 안개마을 >과 ‘동시에’ 만들어졌다. 나는 이 말을 단지 연대기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임권택 이 우진필름에서 <나비 품에서 울었다>를 찍을 때 화천공사에서 <안개마을>을 함께 진행하고 있었다. 그냥 ‘충무로 식으로 말하면’ 두 편의 영화는 ‘가께모찌(掛持ち)’로 진행되었다. 한쪽에서는 <안개마을>의 촬영 로케이션 장소에 내려가서 준비를 하고 있었고, 다른 한 쪽에서는 <나비 품에서 울었다>의 시나리오를 써가면서 강원도에서 충청도에 이르는 지역을 돌면서 촬영을 시작하였다. (내가 알기로) 이 두 편의 영화는 임권택의 마지막 ‘가께모찌’ 영화이다. 나는 이 방법에 대해서 공격할 생각이 없다. 이건 상황이다. 한국영화는 오랜 시간 동안 이런 일정에 대해서 익숙해있었고, 많은 영화들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1982년 그해 가을에서 겨울 첫눈이 내릴 때까지의 이야기이다. 내게 말하기를 “<안개마을>은 첫눈이 내릴 때 즈음 촬영이 끝났어요”라고 했다. 그런 다음 임권택은 < 길소뜸 >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 티켓 >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 씨받이 >를 만들 것이다. 종종 임권택을 하나의 직선처럼 설명할 때가 있다. 그저 단순하고 군더더기 없으며 일직선처럼 이어지는 선. 앞의 영화가 뒤의 영화를 설명할 수 있다는 진화론적인 작가주의의 믿음. 그때 의도적으로, 이를테면, <나비 품에서 울었다>(와 같은 영화)를, 슬그머니 셈에서 빼고 지나쳐버린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영화의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무엇이 무엇을 포함하는가, 라는 질문이 있다. 숨어있는 사건. 우리는 선을 따라갈 때 종종 중간에 사라져버린 점을 놓칠지 모른다. 하지만 점이라고 생각한 것이 구멍이 되어 그 안에 예기치 않은 역량들을 숨겨놓았을 때 우리는 결정체의 서사들 속에서 이리저리 빠져나가버린 새로운 감각의 가능성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어떤 가시적인 비정상성. 예기치 않은 구성. 거의 부서져버릴 지도 모를 지경까지 이르러도 할 수 없다는 태도로 일관된 시퀀스들. 영화에서 가끔 그런 순간들과 마주칠 때가 있다. 나는 지금 힛치콕의 <염소자리 아래에서>를 떠올리고 있다. 아슬아슬할 정도로 견디고 있는 화면들. 그런데도 더할 나위 없이 활발하게 활동을 시작하는 감각. 예기치 않은 반응. 그 안에서 지각의 상황과 청각의 조건이 변화하기 시작할 때 거기서 나는 과거의 관습과의 긴장을 해결하는 새로운 기능의 가능성을 바라보게 된다. 가능성의 조건들. 상황을 열어 놓아야 한다. 상투적인 비평들은 <만다라> ‘이후’를 말하면서 임권택의 ‘완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나는 이 말이 게으른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주어진 영화 모두를 경험해야 한다. 그런 다음 매번 영화를 본다는 문제가 그 유일무이한 중간과정의 상황에 던져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야 한다. 작가주의 담론 안에서 헤게모니화 되지 않은 점. 그때 이 점을 파고 들어가 구멍으로 만든 다음 그 안에서 미처 전개되지 않은 가능성에 대해서 밀고 나가볼 용기가 비평에 있어야 한다. 블록을 무너트려야 한다. 펠릭스 가타리가 1965년 메어리 반스의 사례를 본 다음 한 선언. 그런 다음 여백에 무언가를 써 넣어야 한다. 데리다가 필립 솔레르의 소설을 읽고 난 다음 했던 그 작업. 이건 나의 배움이다. 단순하게 말하고 싶다. 나는 지금 임권택의 1980년대 영화들, 그러니까 <만다라>와 <길소뜸> 사이에, <나비 품에서 울었다>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끌어들이려고 한다. 우스꽝스러운 제목에 대한 (다소 도식적인) 가설. < 나비 품에서 울었다 >라는 제목은 누구라도 임권택 의 영화 목록을 정리하다말고 다시 그 이름을 확인하고 싶게 만든다. 나는 이 제목에서 어떤 시적인 기분도 받지 못했다. 게다가 이 영화의 배경은 늦가을에 시작해서 이른 겨울로 향하고 있다. 아마도 영화가 끝나면 이야기의 무대가 되었던 장소들, 이영하와 나영희 두 사람이 그렇게 돌아다녔던 강원도와 충청도의 낯선 공간에는 첫눈이 내릴 것이다. 그리고 그때 임권택은 안성기 와 정윤희 를 데리고 정일성 의 촬영으로 < 안개마을 >을 찍고 있었을 것이다. <나비 품에서 울었다>와 <안개마을>은 두 편 모두 시나리오를 송길한 이 썼다. 이 영화는 봄에 진행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단 한 장면에서도 나비를 볼 수 없다. 혹은 봄을 기다리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비 품에서 울었다>라는 제목은 이 영화의 이야기, 장소, 인물, 에피소드, 미장센, 소도구, 그 어느 것과도 공명현상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나는 <나비 품에서 울었다>가 영화감독 정진우 의 영화사 우진필름에서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잘 알려진 것처럼 정진우는 임권택과 함께 정창화 밑에서 연출부 도제수업을 했으며, 그런 다음 그 둘은 1962년 거의 동시에 첫 번째 영화를 찍었다. 좀 더 정확하게 임권택이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를 찍을 때 “그 영화가 대작이잖아요, 스타들도 많이 나왔고, 내가 첫 영화인데다가 아무래도 아직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없으니 영화사에서 진우한테 좀 도와주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진우가 데뷔할 때 내가 돕는 걸로 이야기를 했죠, 물론 그냥 이야기로 끝났죠, 아무래도 이미 감독이 된 사람이 현장에 와서 있으면 불편하니까요”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정진우는 그 이듬해 < 외아들 >로 데뷔하였다. 그 대신 임권택은 그 후에 제작사를 낸 정진우의 영화사에서 많은 영화를 찍지는 않았지만 지속적으로 영화를 연출했다. (임권택 자신의 말을 빌리면) “가장 안 팔리던 시절”인 1973년 < 장안명기 오백화 >로 시작해서 두 편의 영화 < 연화 >와 < 연화 2 >(1974년), < 맨발의 눈길 >과 < 아내 >(1976년), < 임진왜란과 계월향 >, < 옥례기 >(1977년), < 아벤고 공수군단 >(1982년), 그리고 <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 >(1984년)까지 모두 11편을 만들었다. 정진우 자신도 1960년대에 쉬지 않고 영화를 연출하였다. 임권택과 다른 점은 (아마도) 1967년부터 그는 자신의 영화를 직접 기획하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영화사를 차렸고, 그는 자신의 영화를 거기서 연출하였고 그러면서 다른 감독들의 영화를 제작하였다. 이 영화사의 목록에는 김기영 의 < 화녀 >와 <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가 포함되어 있다. 나는 좀 더 제목을 열거할 수 있다. 김수용 의 < 화조 >. 정소영 의 < 나는 고백한다 >. 그러면서 정진우는 영화감독으로서 자신만의 목록을 만들어나갔다. 그 영화들이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하여튼 자기의 리듬을 가지고 만들어졌다. <나비 품에서 울었다>를 제작할 무렵 정진우는 그 자신이 제작한 일련의 영화들을 마치 연작처럼 제목을 지었다. 1980년에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를 만든 다음 그 이듬해 <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 그리고 <나비 품에서 울었다>를 임권택이 찍고 있을 때 그 자신은 <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 >를 찍었다. (하지만 두 편이 동시에 진행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두 편은 모두 나영희 가 주연이며 동일한 계절이 아니다) 그저 제목만을 생각한다면 <나비 품에서 울었다>는 마치 정진우의 일련의 영화들처럼 보인다. 누군가는 제목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나는 제목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영화 안으로 이끄는 입구와도 같은 것이며, 때로는 영화 전체에 대한 일종의 다이어그램 역할을 하기도 한다. <나비 품에서 울었다>라는 제목은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영화를 (다시) 보고 난 다음에도 그렇다. 나는 여기서 영화와 제목 사이의 상호간의 거리를 좁히려는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을 생각이다. 하지만 내가 < 나비 품에서 울었다 >를 처음 본 다음 느낀 난처함은 단지 그런 이유가 아니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내내 느끼는 것은 위험한 혼합의 가능성이 종종 각자의 방법을 독립된 항목처럼 내세울 때마다 서로 분리되는 것만 같은 형태 안에서 매번의 표현이 매번의 다른 방향에서 제시된다는 데서 오는 기괴한 당혹스러움이었다. 내가 이 영화에서 본 것은 단순히 서로 다른 것들이 함께 있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이상하게도 함께 있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서로 어떤 관계도 갖지 않은 채 기이하게도 서로가 서로에 대한 돌연한 근접이 계속해서 시도되었다. 이때 영화는 위계질서가 중요해진다. 이제 그것을 저것과 연결할 것인가, 아니면 주변에 놓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위 혹은 아래로 옮길 것인가. 영화에서 배치라는 문제. 이때 이것이 저것과 소통하느냐의 문제는 단지 미학적인 질문이 아니다. <나비 품에서 울었다>는 보고 난 다음 무언가를 주저하게 만든다. 이 영화 안에서 무언가는 소멸해가고 다른 무언가는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 아마 나는 끝내 그 무언가를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엔 스쳐 지나갈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나를 붙든다. 다만 나는 여기서 몇 개의 씬들을 설명하는 대신 불규칙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그 안에서, 그 씬의 방법 안에 들어가서, 그것을 배열하는 구성의 원칙을 물어본 다음, 서로의 이질성을 존중하면서 재빨리 빠져나올 생각이다. 나는 이들 사이의 기능보다는 다소 제한적으로 그냥 그 씬이 활동하는 흔적만을 볼 것이다. 그 씬의 방법은 어디서 왔는가, 그런 다음 어디로 가는가. 같은 질문의 다른 판본. 어떻게 바깥은 안에 있는가. 끊임없는 분산. 이때 임권택 은 중심 없는 중심에서 어떻게 그것을 동여매는가. 매듭이라는 방법. 그저 인상적으로만 말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 나비 품에서 울었다 >는 어딘지 모르게 < 만다라 >의 다른 버전 같은 느낌을 줄 때가 있다. 물론 어떤 장면도, 어떤 이미지도, 어떤 줄거리도, 그런 연상을 불러들이지는 않는다. 나는 단지 임권택 이 연출을 하고, (<만다라>의 각색을 한) 송길한 의 시나리오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만다라>는 영화가 시작하면 한 겨울 어느 시골길에서 시외버스가 멈춘 다음 거기서 두 승려가 내리고, 그런 다음 두 번 다시 그 두 사람은 차를 타지 않고 내내 걸으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나비 품에서 울었다>는 영화가 시작하면 늦가을 강원도 어느 호텔 앞에서 여자가 택시에 올라탄 다음 내내 이 택시를 타고 (운전기사와 함께) 돌아다니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때 둘 사이는 단지 걸어간다, 와 차를 탄다, 라는 동사의 차이가 아니다. 우리는 걸어가면서 보는 세상과의 만남의 방식과 차를 타고 달리면서 지나쳐가는 세상과의 관계의 방식의 차이를 생각해야 한다. 이 두 편의 영화는 주제나, 테마나, 소재나, 인물이나, 대사나, (말하자면 그런 방식의 분류에 따르면) 서로 아무 것도 겹치지 않는다. 단지 한 가지. 둘 사이의 진행방식의 지각이라는 점(의 차이)에서만 동일하다. 이때 여기서 문제 제기를 하는 위상은 우리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옮겨가게 만든다. 영화가 세상을 지각하는 두 가지 방법. 신체적 지각과 기계적 지각. 이때 기계적 지각은 우리의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과 운동을 어떻게 연결하느냐, 라는 질문에로 이끈다. 당신은 누구보다도 지가 베르토프가 떠오를 것이다. 그런 다음 요리스 이벤스가 있다. 나는 여기에 장 마리-스트로브와 다니엘 위이예를 더하고 싶다. 당신은 내가 지금 너무 많은 예를 들고 있다고 염려할지 모른다. 나는 이미 말했다. 원칙을 물어본 다음 그 안에서 다이어그램의 계보를 생각해보자고 제안할 생각이다. 먼저 지가 베르토프의 간격. 따로 떨어진 것은 끝내 서로 하나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때 그 둘 사이에서 그 안에 있는 규칙을 따르는 대신 그 둘의 간격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예외적인 특징의 관계를 끌어내야 한다. 영화가 보여준다는 것은 세상의 틈을 드러내는 예외적인 시간의 이미지들이 행동한다는 뜻이다. (고스란히, 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나비 품에서 울었다>는 무엇보다 간격의 영화이다. 거의 일제히, 라고 할 만큼 시퀀스들이 각자의 구성 원칙에 따라서 떨어져 나간다. 임권택은 그걸 이상할 정도로 느슨하게 연결시켜 놓은 다음 그냥 거기서 멈춘다. 심지어 어떤 장면들은 분리가 가능하다고 믿을 수 있을 정도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장면들은 계획 없이 찍혔으며, 많은 쇼트들은 그 장소의 조건에 기꺼이 따르고 있다. 이상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구체적이라기보다는 개념적이고, 종종 어떤 장소들이 초현실주의적인 무대처럼 보이며, 때로는 이야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그 상황 때문에 부조리하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이 영화를 말하기 위해서 < 나비 품에서 울었다 >가 진행하는 방식을 고스란히 따라가면서 그대로 그 방법을 복사하듯이 전달할 것이다. 한가로운 첫 장면, 설악산의 늦가을. 호텔 침대에서 막 일어난 여자가 잠시 풍경을 감상한 다음, 한껏 게으르게 그 시간을 누린다. 계절의 기호. 장소의 약속. 이곳에 이 시간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행객들이다. 그러나 이 여자가 이상한 것은 이 장소에 혼자 왔으며, 그녀가(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냥 그녀는 한가하게 풍경을 본 다음 테라스에 앉아서 무언가를 생각한다. 자동적인 약속. 아마도 이 영화는 그 사연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여자의 이름을 한참 뒤에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아는 사람은 이 주변에 없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 것이며. 자기 스스로 자기의 이름을 호명하기 전에는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녀 스스로 자기의 이름을 말하기 전에는 나도 그저 그녀라고 부를 것이다. 체험된 경로를 그대로 따라가기. 아마도 차례로 나타나게 될 장애물. 그리고 거기서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될 것이다. 지식? 그렇다. 우리는 아직 이 영화의 목표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단지 그녀에서 멈추지 않고 동시에 그 경로 자체에 대한 탐색이 될 것이다. 이때 이걸 어느 한 쪽의 이야기라고 섣불리 단정 지을 수 있을까. 나는 좀 더 밀고 나가고 싶다. 이 순간 이 장애물들은 오로지 그녀이기 때문에 미리 결정지어진 장애물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어우얼바하는 매우 흥미로운 가설을 우리에게 제시했다. 집으로 돌아가려는 율리시즈를 방해하는 괴물들, 마녀, 재난, 하여튼 그 모든 장애물들은 오로지 그가 율리시즈이기 때문에 그 앞을 가로 막고 나선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그들은 율리시즈를 설명하는 존재들이다. 집으로 돌아가려 할 때 우리를 막아 나서는 모든 것들은 우리들이 만들어낸 장애물이다. 세상의 일부였던 내가 부분들 사이의 연결의 계기가 될 때 갑자기 세상은 마술적인 질서를 새로이 만들어내기 시작할 것이다. 끊임없이 새로 짜여지는 경우의 수. 무엇이 무엇을 대체한 것일까. 관점의 새로운 이동.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사이의 분리. 아마도 이것을 임권택 은 < 만다라 >에서 가져왔을 것이다. 그는 이 분리를 다시 한 번, 그러나 다른 지각의 간격을 통해서 반복한다. 그저 다짜고짜, 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시작. 그녀가 누구인지, 그녀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 누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지, 혹은 만날 것인지, 누가 그녀와 동행할 것인지, 아니, 그 모든 것보다 먼저 여기가 어디인지, 미처 아무 것도 준비되지도 않았는데 바깥으로 나온 다음 호텔을 나서서 그녀가 학동으로 가자고 했을 때 모두들 이 장소에 가기 힘들 것이라고 말한다. 거절의 제스처. 그때 그 거절은 장소에서 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환기해야 한다. 무언가 끊어진 것을 다시 이으려는 노력. 그런데 무엇이 끊어진 것일까. 그것을 다시 이어놓을 때 그녀에게는 어떤 이익이 돌아오는 것일까. 그녀가 처음 택시를 잡으려 들자 여기가 어딘지 알고 있는 운전기사들은 고개를 가로 저은 다음 그녀 곁을 떠난다. 그녀는 지금 갈 수 없는 곳에 가려는 것이다. 가능하지 않은 장소. 아마도 지금 그녀를 태운 기사는 거기가 어딘지 잘 모르기 때문에 엉겁결에 태웠을 것이다. 택시 엔진에 문제가 생기자 정비소에 잠시 머물렀을 때 여기서 만난 청년은 운전기사에게 거기가 얼마나 먼 곳인지 아느냐고 핀잔을 준 다음 그 택시비로는 어림도 없다고 충고한다. 이때 우리는 이 장소가 이 이야기의 영감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두 번째 등장인물. 그녀의 여행을 위해서 운전하며 함께 목적지까지 가게 될 남자. 택시운전기사는 그녀의 길 안내를 하게 될 것이며, (그러므로 그녀의 동선이 될 것이며), 그녀의 말 상대가 될 것이며, (그러므로 그녀의 상대 쇼트(reverse shot)가 될 것이며), 그녀에 관한 지식의 일부를 공유하게 될 것이다. 이때 운전기사는 처음에는 택시라는 자동차와 거의 동일한 사물처럼 다루어진 다음 다시 자기의 인격을 얻게 될 것이다. 두 가지 단락. 첫 번째, 언제 운전기사는 택시로부터 분리되어 자기의 인격을 갖게 될 것인가. 두 번째, 그런 다음 어떻게 그녀로부터 분리되어 다른 하나의 세계를 갖게 될 것인가. 아마도 그때 그녀는 그와 새로운 관계를 만들게 될 것이다. 혹은 반대로 그녀 아니면 그는 상대방의 세계로부터 나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그녀가 택시에 타자 운전수는 오로지 그녀를 위해 라디오를 튼다. 이때 라디오에서는 영화 < 러브 스토리 >의 사운드 트랙을 편곡한 선율이 흐른다. 하버드 대학교 교수였던 에릭 시걸이 쓴 베스트셀러를 아서 힐러가 1970년에 만든 미국영화. 하버드 법대를 다니던 백만장자의 아들과 프린스턴 대학교 여대생의 ‘러브 스토리’. 그 둘의 사랑은 여자의 불치의 병으로 끝나고, 남자는 눈 내린 센트럴 파크의 공원에서 “바하와 비틀즈와 나를 좋아한 다음 29살에 죽은 여자의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까요”라고 이야기를 시작한 다음 긴 플래시백을 하고 나서 그렇게 거기서 끝난다. < 나비 품에서 울었다 >는 <러브 스토리>로부터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있는 영화이다. 게다가 프란시스 레이의 음악은 이 영화와 거의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영화가 다른 영화에서 이미 들었던 ‘지나간’ 영화 음악을 다시 들을 수는 있다. 그때 이 음악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그렇게 <나비 품에서 울었다>는 라디오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마치 하나의 리듬처럼, 영화 바깥의 음악을 끌어당기고 있다. 이때 이 영화는 라디오에 가깝게 다가간다. 영화가 때로 미디어에 다가간 다음 자신이 그 자체가 되기를 원할 때가 있다. 더 할 나위 없는 예.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 비디오드롬 >. 마치 이 영화는 종종 라디오의 사연처럼 진행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임권택 은 영화를 진행한 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음악과 풍경의 교차. 달리는 자동차. 그녀는 지금 풍경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그녀는 여기에 이미 와 본 적이 있는 것일까.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영화는 대답하지 않는다. 임권택은 고의적이리만큼 그녀의 마음을 불투명하게 만든다. 여자는 풍경을 쳐다보다 말고 생각났다는 듯이 운전수에게 이 영화를 미국에서 보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칠년 동안 미국에 있다가 막 돌아왔다고 덧붙인다. 이 대답을 듣자마자 어리둥절해졌다. 나는 구태여 셈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만일 <러브 스토리>를 보았다면 이 여자는 한국에서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영화에 거의 관심이 없었거나(이 영화는 한국에서도 크게 성공하였다) 아니면 영화를 볼 수 없었을 만큼 바빴을 것이다. <러브 스토리>는 그 이듬해에, 그러니까 1971년에, 서울 국제극장에서 개봉하였다. 여자는 조금 전에 미국에 칠년 동안 갔다 왔다고 말했다. 지금은 1982년이다. 그녀는 1975년에 한국을 떠났을 것이다. 아직 세상에는 비디오가 없었고, 영화를 다시 볼 수 있는 방법은 극장에 가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한 가지 가설이 더 남아있다. 그녀는 지금 그냥 떠오르는 대로 거짓말을 하는 중이다. 나는 지금 두 가지를 생각하고 있다. 자동차라는 지각. 그것으로 어떻게 건드리고 싶은 것일까. 라디오라는 청각기호. 그것으로 무엇을 끌어당기려는 것일까. 물론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는 그녀가 옛 애인을 찾아가는 것이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잡아 이끄는 것일까. 왜 그렇게 많은 것들이 그녀를 가로 막아 나서는 것일까. 그들은 마치 그녀에게 다가가서는 안 된다고 경고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 각자의 역할. 그들 각자의 은유. 택시가 고갯길을 넘어 학동에 다가가려 할 때 그들을 가로 막아나서는 사람은 그저 태워달라는 큰 짐을 옆에 낀 영감이다. 택시는 그냥 지나치려 하지만 마치 자석이 끌어당기듯이 자동차는 고개에서 뒤로 미끄러지고, 그걸 쳐다보던 영감은 학동까지 가는 지름길을 자기가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과 동행이 된 영감은 여행을 함께 하기에 좋은 동반자가 아니다. 이미 올라탄 영감의 보따리에서 생닭이 푸드덕 거리기 시작할 때 무언가 여기에는 어딘지 불쾌한 초현실주의적 기분이 감돌기 시작한다. 이때 무례한 영감과 그가 들고 탄 생닭은 무언가 그녀의 이 여행에 대한 기대를 깨트리고 있다는 인상을 즉각적으로 불러일으킨다. 무엇이 무엇을 망쳐버리고 있는 것일까. 마치 그녀를 조롱하는 듯한 기분. 그걸 단지 환상 안으로 침입한 실재라고 간단하게 말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여기에는 정반대로 추상적인 미로 안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는 두려움이 먼저 앞선다. 바깥과 안의 비대칭의 탈구. 그녀는 무언가를 음미하고 싶어 하지만, 그러나 정확하게 그 만큼 무언가를 일깨우려고 방해하는 자들의 노력. 그런 다음 듣게 되는 두 번째 음악. 다시 두 사람이 되자 택시운전기사는 그녀에게 말한다. “라디오를 틀어드릴까요?” 라디오를 켜자 그룹 이글스(Eagles)가 부른 <호텔 캘리포니아(Hotel California)>가 흐른다. 1976년의 노래. 나는 두 가지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그 첫 번째. 무언가 이 영화의 선곡에는 동시대라는 느낌이 없다. 마치 여기에는 1970년대의 어디론가 시간적인 추락을 했다는 인상이 있다. 혹은 저 멀리서 다시 거슬러 올라온다. 두 번째. 처음 <러브 스토리>의 선율을 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여기서 음악이 영화에 무드를 제공한다고 얼핏 생각했다. 내가 틀렸다. <호텔 캘리포니아>는 지금 이 영화의 무드와 아무 관계가 없다. 혹은 서사에 어떤 모티브도 제공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이야기의 진행과 대칭이 되는 아무 것도 없다. 그렇다면 <호텔 캘리포니아>는 무엇을 위해서 흐르는 것일까, 혹은 누구를 위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 라디오는 마치 자율적인 행동을 개시한 등장인물처럼 그녀의 마음 따위를 신경 쓰지 않고 자기만의 선곡을 시작한다. < 나비 품에서 울었다 >는 그렇게 자꾸만 사슬에서 영화의 여러 기호들이 풀려나간다. 두 번째 오류 추론. 나는 학동에 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곳에 끝내 도착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처 그렇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택시는 학동에 도착했다. 이미지만을 생각한다면 학동 장면은 < 나비 품에서 울었다 >에서 가장 인상적인 시퀀스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에서 가장 동떨어진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학동(鶴洞)이라는 지명을 들었을 때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고즈넉한 옛 마을의 이미지. 그러나 여기는 탄광촌이다. 이제까지 설악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던 것과 대조적으로 사방이 온통 시커먼 색으로 가득 차 있고, 거기서 살고 있는 가난한 아이들의 무리가 보인다. 그녀는 여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유일한 인물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내내 자신이 떠도는 모든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기표이다. 그녀가 찾는 남자는 여기까지 어떻게 흘러들어온 것일까. 그러나 사무실에 찾아갔을 때 그녀는 그 남자가 불미스러운 일로 파면 당했다, 는 말을 들을 뿐이다. 우리는 불미스러운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끝내 알지 못한다. 그는 자꾸만 그녀로부터 달아나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이미 알고 있는 그의 행방을 멀리서부터 하나씩 다시 찾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가지 더 이상한 점. 학동에 도착했을 때,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는 데도 불구하고, 하여튼 여기서 머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는데도, 그녀가 (이 곳에 단 하나밖에 없다는) 여인숙 앞을 서성거리는 장면만을 찍은 다음, 영화는 더 이상 그 앞에서, 그 안에서, 그 주변에서 진행되지 않는다. 그녀는 그날 밤 그 여인숙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인숙에 머무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그 어떤 상상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마치 거의 피하듯이, 영화는 단 한 쇼트도 이 장소에 할애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날 저녁 그녀는 낮에 헤어진 택시 운전기사를 다시 만난다. 그런 다음 그에게 남자가 범우사에 가서 스님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건 우리가 사무실에서 들은 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그걸 그녀는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왜 그녀는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하지 않았을까. 그때 나는 이 영화가 지금부터 남자의 자리를 놓고 일종의 수건돌리기와 유사한 게임을 시작한 것처럼 여겨졌다. 처음부터 빈자리. 그런 다음 차례로 그 자리를 메우기 위해서 그 무언가가 동원되기 시작한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거기엔 원래 아무 것도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자리가 비어 있으면 목표는 사라지고 이 여행은 중단될 것이다. 그때 그 자리를 메우는 것은 단지 그녀의 말뿐이라는 것을 당신은 환기해야 한다. 말이 채우는 공백. 말 속의 인물. 역설적으로 그녀와 그녀의 말 사이에서 정작 탈락되는 것은 그 대상으로서의 남자 그 자체이다. 도식적 설명. 환상과 상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 이상한 전도가 보여주는 역설은 이때 그녀는 사실상의 빈자리에 지나지 않는 그 남자의 뒤에 숨어서 자기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진행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무슨 이득을 얻을 수 있을까. 두 번째 날. 그녀와 운전수는 범우사를 가기 위해 강원도를 떠나서 충청도로 옮겨간다. < 나비 품에서 울었다 >에서 지역적 분배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임권택 으로서는 드물게 지리적인 지표들의 모습도 거의 대부분 모습을 감추었다. 그들이 경계를 넘을 때 임권택은 작은 주의도 기울이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이튿날 그녀가 운전수 옆자리에 앉아있는 모습이다. 좀 더 가까워진 거리. 단지 거리만이? 이때 그 자리가 앞과 뒤에서 옆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함께 계산에 넣어야 한다. 평행의 자리. 새로운 관계의 시작. 이날 운전수는 라디오를 틀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그녀와의 이야기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그 어떤 기호도 그 둘 사이의 대화에 개입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듯이, 그는 라디오를 켜지 않는다. 우리는 첫날 라디오를 켠 사람이, 그녀(와 우리)에게 <러브 스토리>의 음악을 들려준 사람이, 운전수였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택시에는 언제나 누군가를 위한 빈자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하지만 항상 예기치 않은 이들이, 그 여행 안으로 끼어든다. 그녀가 뒷좌석을 비우자 마치 그 자리가 비어서는 안 된다는 듯이, 문득 길 위에 선 스님이 그 차를 멈춰 세우고 동승을 부탁한다. 그런 다음 잠시 후에 무례하기 짝이 없는 통기타를 든 청년과 그의 애인이 더불어 남은 자리를 차지한다. 뒷좌석은 가득 차고, 택시는 과밀해진다. 그 안에서 청년은 자기 애인의 바지 안에 손을 넣고 성적인 제스처를 취한다. 이때 나는 그녀를 앞좌석으로 보낸 다음 뒷좌석을 비워놓은 것이 단지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챘다. 이 자리의 핵심은 운전석 앞에 매달려 있는 백미러에 있다. 스님과 통기타 청년과 그 애인이 뒤에 탔을 때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그들을 볼 수 있는 방법은 (구태여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 거울을 통해서 보는 수밖에 없다. 그들은 기능적으로 그녀와 운전수가 더 이상 친밀해지는 것을 그 자리에서 중단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나는 좀 더 밀고 나가고 싶다. 이들은 왜 나타난 것일까. 이 질문이 이상하게 여겨질지 모른다. 우리는 이 여행이 그녀가 자기의 과거를 찾으러가는 여행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질문을 바꿔보자. 그들은 왜 그녀가 과거로 가는 시간 여행 안에 끼어들었는가. 이 질문이 성립된다면 우리는 같은 질문을 반대의 방법으로도 던져볼 수 있다. 왜 그녀는 지금 그들 각자의 여행길을 동시적으로 하나로 묶는 순간을 마련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우연의 계획이라는 네트워크에 대해서 말하는 중이다. 물론 이 계획은 임권택 의 배치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대방향에서 바라보면서 그녀는 범우사에 가기 위해서 가던 길에 스님과 통기타 청년을 만난 것이 아니라 스님과 통기타 청년을 태우기 위해서 범우사에 가고 있었다고 사후적으로 설명하면서 배치에 관한 다른 의미의 네트워크를 건드려볼 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스님과 통기타 청년과 그 애인은 인내심을 갖고 그 자리에서 오늘 여기를 ‘우연히’ 지나가게 될 그녀를 기다렸다고 말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말하자면 순환의 네트워크. 이 순환이 그녀의 과거에로 향하면서 만들어져가는 이야기라는 것을 떠올려야 한다. 그때 그녀가 만난 스님과 그 곁의 통기타 청년과 그 애인은 길 위의 우연이라기보다는, 또는 우연이라 할지라도, 뒷좌석에 앉아있는 그들은 그녀의 그 남자와의 시간 속에서 불러온 과거 안의 미래와 과거의 과거 그 어느 순간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미 그 남자가 불교에 귀의하고 스님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소 서둘러 보자. 그녀가 잠시 후 범우사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단 한 번 그 남자와의 과거를 짧게 플래시백으로 회상한다. 이때 그녀가 떠올리는 시간은 그 남자와 모닥불 캠프에 와서 텐트를 치고 보낸 그날 밤이다. 아마도 통기타 청년과 그 애인의 그 나이, 그 복장. 하지만 영화는 과거의 시간을 향해서 일직선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스님이 먼저 내리고 그 택시를 떠나자, 마치 운이 다하기라도 한 것처럼 택시는 고장 나고, 뒤이어 통기타 청년과 그 애인이 그 차를 떠난 다음, 운전수는 도리 없이 자동차를 수리할 부품을 구하기 위해 여자를 혼자 남겨 놓고 떠난다. 저녁이 찾아오고, 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차 안에서 혼자 기다리는 여자. 깊은 밤이 된 다음 돌아온 운전수는 내일 아침이나 되어야 수리할 정비차가 이곳에 올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이 낯선 곳에 함께 밤을 보내야 한다. < 나비 품에서 울었다 >는 그녀와 운전수에게 서로 더 다가갈 상황을 계속해서 만든 다음 반대로 이 상황을 방해하는 인물을 정확하게 그 순간에 제공한다. 그녀와 운전수가 비를 피해 한 밤중에 낯선 집의 작은 방에 머물 때, 그들 자신만의 시간을 시작하기 위하여 막 저녁을 먹으려고 할 때, 비를 피해 이 방에, 낮에 헤어졌던 통기타 청년과 그 애인이 다시 찾아온다. 망친 시간. 하지만 무엇을? 임권택 은 단지 그 둘 사이의 시간만을 망치지 않는다. 저녁을 먹은 다음 문득 통기타 청년은 기타를 들고 마치 답례라도 하듯이 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가 두 번째 날 듣게 되는 유일한 노래이다. 호세 펠리치아노(Jose Montserrate Feliciano Garcia)의 <레인(Rain)>. 청년은 누군가를 위해서 노래를 부른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다소 감동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기의 목소리를 음미한다. 이때 (아마도 이 집의 주인으로 짐작되는) 옆방의 할머니가 문을 열고 나와서 이 노래로부터 아무런 감흥도 받지 못한 표정을 지으면서 “잠 좀 잡시다”라는 말로 이 분위기를 망쳐 놓는다. 임권택은 이 여행에 어떤 무드가 만들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정확하게 그 무드는 그녀가 되찾고 싶어 하는 과거 속의 시간 그 어딘가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억의 어떤 기호들이다. 왜 그걸 망치는 것이 중요해진 것일까. 이상한 장면. 그녀와 통기타 남자와 여자, 운전수는 (지금 열거한 순서대로) 차례로 누워서 불을 끈 다음 잠을 청한다. 상상하기에 따라서 몹시 외설적인 동침. 통기타 청년은 이불 속으로 그의 애인을 노골적으로 만지기 시작하고 그들은 곧 성적인 관계를 가질 것이다. 이때 이 둘이 애무를 시작하자 운전수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가버린다. 이제 통기타 청년과 그의 애인, 두 사람과 그녀 사이에는 아무런 방어막도 없다. 그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성적인 관계를 나누기 시작한다. 두 가지 이상한 점. 첫 번째. 이때 갑자기 이 상황이 비현실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누워있는 얼굴을 보여줄 때 상상선을 넘어간다. 나는 임권택 의 영화를 보면서 상상선이 거의 철의 규칙처럼 지켜져 온 것을 보아왔다. < 나비 품에서 울었다 >는 그의 일흔 여덟 번째 영화이다. 이 데쿠파주는 그녀가 성 관계를 나누는 통기타 청년과 그의 애인을 등지고 있기 때문에 시선을 맞추기 위한 것도 아니다. 기술적으로만 설명하면 이렇게 찍기 위해서 그들을 반대 방향으로 다시 눕혀야 한다. 혹은 그녀가 반대방향으로 다시 누워야 한다. 말하자면 여기서 넘어간 상상선을 일부러 그렇게 찍어서 선의 체계 바깥으로 나간 것이다. 이때 이 넘어간 상상선이 기이하게도 두 남녀의 성적인 행위와 등을 돌린 그녀 사이에 마치 보이지 않는 그 어떤 선을 그어서 저 쪽으로부터 이쪽으로 넘어올 방법이 없다는 듯웰옛錚?방어선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상한 점. <나비 품에서 울었다>에는 (이미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녀가 그 남자를 생각하는 단 한 번의 플래시백이 나온다. 그때 그 남자는 텐트 안에서 무리하게 그녀의 옷을 벗긴 다음 성적인 관계를 갖고 싶어 한다. 그녀는 저항하며 가까스로 팬티만을 입은 채 자신의 젖가슴을 드러내고 텐트 바깥으로 나왔다가 주변 사람들 때문에 다시 돌아 들어간 다음 화가 나서 그에게 거절의 이유를 설명한다. 남자는 그걸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녀가 그 남자에게 떠오르는 (영화 속의 유일한) 기억은 섹스(에 대한 시도의 실패)이다. 그런데 이 순간, 섹스에 관한 광경이 바로 그녀 곁에서 펼쳐지고 있는데도, 그녀는 그걸 떠올리지 않는다. 작동하지 않는 플래시백. 기억의 지연. 그녀가 이걸 떠올리는 건 다음 날 범우사에 가서 한낮에 그 절에 놀러온 젊은 커플들을 보면서이다. 영화에서 작동하지 않는 기억장치. 그렇다면 그때 그녀의 얼굴을 보여주는 클로즈업의 표정 이미지에서 우리들은 무엇을 보아야 하는 것일까. 만일 그 표정에서 시간을 볼 수 없다면 우리가 읽어야 하는 감정의 기호들은 그녀 뒤편의 섹스로부터 무엇을 끌어내고 있는 것일까. 종종 <나비 품에서 울었다>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 지는 분명한데도 무엇을 지칭하는지에 대해서 과도하리만큼 불투명해진다. 세 번째 날. 그녀와 운전수는 범우사로 간다. 그리고 여기서 그녀는 운전수에게 자기가 여기 왔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처음으로 자기 이름이 오현주라고 말해준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갑자기 둘 사이에서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 다음 동일한 상황의 반복. 남자는 이 절을 이미 떠난 다음이고, 오현주는 다시 운전수와 함께 그 남자를 찾아서 이 여행의 선을 계속 연장한다. 이 날도 장소를 이동하는 중에 한 남자를 만나고, 남자는 운전수에게 고장 난 자신의 자동차의 수리를 부탁한다. 잠시만 멈춘 다음 약간의 셈. 세 번의 반복. 매번 오현주(와 운전수)는 자신들을 방해하는 누군가를 길에서 만난다. 매번 그 남자는 거기에 없다. 반본 안의 차이. 오현주는 운전수에게 그만큼 다가가고, 그 만큼 방해를 받는다. 그때 이상한 것은 오현주가 찾으러 다니는 남자의 점에서 우리는 그들 사이를 연결할 수 있는 삶의 선을 거의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현주의 말에 따르면) 폐병을 앓던 그 남자가 왜 갑자기 실종되었다가 탄광촌에 갔는지 우리는 어떤 단서도 거기서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 다음 범우사에 들어가서 스님이 되었다는 것과 탄광촌에서 “불미스러운 일로 쫓겨났다”는 사실 사이에서 느끼는 당황스러운 인상은 그 둘이 전체 안의 부분이라기보다는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되기에 실패한 데서 오는 그 어떤 심연의 자리, 혹은 그 안의 한계와 부딪치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 여행은 앞으로 밀고 나가면 나갈수록 미로 안에 들어간다기보다는 반대로 점점 더 신기루에 의해 채워지는 텅 빈 비일관성과 마주칠 따름이다. 우리는 지금 무엇에 접근하고 있는 것일까. 다른 판본. 같은 말의 무엇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 드는 것일까. 이때 둘 사이의 간극은 오현주의 두 개의 시간에서 오는 엇갈림이다. 잃어버린 시간과 되찾은 시간 사이의 틈새로의 여행. 그 여행을 하나로 묶는 것은 반대로 차례로 현재의 칸막이를 넘어가는 오현주와 운전수 사이의 성적인 이끌림이다. 우리는 이미 둘째 날의 비오는 밤에 (통기타 청년과 그 애인에 의해서) 망쳐진 그들만의 시간을 보았다. 세번째 날 오현주와 운전수는 함게 금정여관에 머물면서 거의 키스하기 직전까지 가지만 갑작스럽게도 검문이 있다는 핑계로 (그들의 안전한 방어막이었던 방문이 열리고) 임검경찰이 이들에게 신분증을 요구하면서 이들의 키스 사이에 끼어들어 그 둘 사이를 (이야기의 차원에서) 찢어놓는다. 나는 이때 이 방문이 반투명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싶다. 아마도 그 남자를 만날 때까지 오현주의 동선과 운전수의 동선은 겹치지 않을 것이다. 아직은 아니다. (불확실한) 의심. 나는 왠지 < 나비 품에서 울었다 >에 원래는 진행할 생각이었다가 중간에 그만 둔 대목이 있다는 상상을 멈출 수 없다. 이상할 정도로 수많은 쇼트들이 거기서 더 나아갈 수 있는 어떤 잠재성을 놓아둔 채 그냥 거기서 머뭇거린다는 인상을 줄 때가 있다. 가능한 사건. 그 안에 담긴 가능한 행위.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가능한 감정. 물론 이런 쇼트를 잘못 건드리면 그때부터 소설이 된다. 나는 그 위험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쇼트는 하나의 증거이다. 오현주와 운전수가 이제 그 남자를 만나러 강 위에 놓여진 다리를 건넌다. 그 다리를 건너기 직전 <나비 품에서 울었다>로서는 이례적으로 커다란 클로즈업의 쇼트가 나온다. 그 장면이 쇼트이기 때문에 안보고 싶어도 안 볼 수가 없다. 이 남자는 아마도 사진작가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무리들과 함께 이곳을 걸어서 지나가고 있다. 쇼트의 진행은 단순하다. 그러나 이상한 자리에 이상한 순간에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새로운 등장인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상한 자리? 잠시만 거슬러 올라가보자. 오현주는 지금 막 강원도의 경계를 넘은 다음 충청도에 와서 그 남자가 있다는 (태안반도에 있는) 청산까지 왔다. 그리고 그 신문사 앞에서 거의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운전수가 그를 부르러 간 짧은 순간에 오현주는 그 남자를 만나는 상상에 잠긴다. 그 남자의 첫 마디. “오랜만이군” 대답. “그렇군요” “우리 칠년 만인가?” “그래요” 그런 다음 오현주가 질문한다. “결혼은 하셨겠죠?” “아니, 현주는?” “좋도록 생각 하세요” “이렇게 만나다니 꿈만 같군” “저도요” 그러나 우리는 이 장면이 오현주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지나가던 자동차 소리에 문득 깨어나면서 깨닫게 된다. 이때 이 모든 대화가 오현주의 환상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이 대화에서 가장 이상한 부분은 오현주가 그 남자에게 가장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이 그의 결혼 여부라는 것이다. 오현주는 그 남자와 의 결혼을 허락받기위해서 칠년을 기다린 다음 미국에서 여기까지 온 것일까. 그런 다음 더 이상한 반응. 질문에 부정을 하자 오현주는 만족한 표정을 지은 다음 그 남자의 반문에 대해서는 좋도록 생각하세요, 라는 애매모호한 대답을 한다. 잠시의 틈새 사이로 들어온 찰나의 상상. 이때 그녀의 환상이 재구성하기를 바란 상상적인 상황은 누구라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으로 인하여 그 환상의 가장자리에 자리 잡은 요구가 원하는 지위가 무엇인지 그 상황에서 달아나버린다. 왜 오현주는 자기의 환상 안에서조차 자기의 요구에 대한 대답과 타협하지 않는 것일까.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오자. 오현주가 환상에서 깨어나자 그 환상의 자리에 동일한 자세로 뛰어온 운전수는 (그가 왜 동일한 자세로 그 자리에 왔는지를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불길한 표정을 지은 다음 이 곳에 없지만 그 남자가 있는 장소를 알려주었다면서 그 곳에 가기를 망설이는 말을 한다. 내가 지적한 쇼트는 그런 다음 등장한다. 영화가 갑자기 무드를 바꾼 다음 추락의 신호를 보냈을 때 마치 어떤 절단이 거기 있는 것처럼 그 쇼트가 등장했을 때 누구라도 거기서 어떤 방향 전환의 기호를 읽을 것이다. 하지만 그 쇼트는 그런 다음 더 이상 아무런 반응도 일으키지 않는다. 더 이상한 것은 설혹 그 장면을 찍었다 할지라도 편집실에서 그 쇼트는 얼마든지 사라질 수 있었다. 하지만 거의 얼룩처럼 그 쇼트는 그 자리에 그냥 남아있었다. 끝내 설명되어지지 않는 이 클로즈업은 우리에게 무엇의 소재를 알려주기 위한 것일까. <나비 품에서 울었다>는 마치 환상의 얼룩을 그냥 남겨 놓음으로써 영화의 기억을 보존하려는 방법을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자리에 그 쇼트들이 그렇게 머물러 있다. 결국 마지막 시퀀스. 오현주의 환상이 그만 깨져버렸을 때 누구라도 그 남자가 환상 속에 머물러있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물론이다. 우리는 이미 오현주의 여행에서 그 남자의 자리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걸 눈치 챘다. 점점 희박해지는 기억의 자리. 끊임없이 차에 동승하기를 희망하는 인물들은 이미 그걸 경고하기 위하여 그 빈자리를 차지한 다음 도착을 조금이라도 미루도록 지연시킨다. 말하자면 이직 셈이 끝나지 않은 리비도의 경제학이 취하는 부채의 바리케이드. 왜 통행은 제한되는가. 그 남자를, 이제는 비루해져버린 그 남자를 그저 멀리서 보고 아무 말 없이 돌아가는 길에 다시 한 번 라디오가 무언가를 대답한다.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가 1980년에 발표한 음반 <바보 같은 행동 (Foolish behaviour)> 두 번째 실려 있는 노래 <패션(Passion)>. ‘바보 같은 행동’, 그리고 ‘열정’. (어쩌면 ‘수난’?) 하지만 당신은 이 음반의 제목과 노래가 서로 묶이면서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을 설명하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부터 시작될 시간을 경고하는 것인지 서둘러 결정하면 안 된다. 오현주가 이제 미국에 돌아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 운전수는 “미치도록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으면 돌아 오겠냐”고 반문한다. 그게 누구냐고 반문하자 “최순호라는 남자”라고 대답한다. 물론 최순호는 운전수의 이름이다. 이제 두 사람에게 남은 것은 작별밖에 없다. 사실상 영화는 여기서 끝났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갑자기 영화가 이야기 바깥으로 나와 버린다는 느낌을 주기 시작한다. 끝나야 할 데서 끝나지 않을 때 그것은 이후, 가 아니다. 새로운 가정. 말하자면 재구성. S#1 S#2 S#3 S#4 S#5 여기서부터 오현주와 최순호, 그 두 사람이 호텔에서 각자의 방에 머물 때, 마치 이 영화에서 이 시퀀스 전체가 이야기로부터 따로 떨어져 나온 다음 무언가 처음으로 되돌아와서 다시 진행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처음? 그렇다. 이 영화가 막 시작했을 때의 장면으로 돌아간 다음, 미처 그 호텔을 떠나기도 전, 그 남자를 찾으러 가기도 전, 그러니까 오현주가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의 거의 그 순간 언저리 어딘가에서 다시 맴돌기 시작한다. 의미의 위치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먼저 임권택은 둘을 갈라놓는다. 오현주의 방에서 최순호를 내 보낸 다음 (S# 1) 최순호는 자기 방으로 할 수 없이 돌아온다. (S# 2) 다음 쇼트. 오현주의 샤워 장면. (S# 3) 이 변덕스러운 전환. 이때 이 장면이 현실적인 대구인지 아니면 최순호의 방 안에서 그의 뇌 속에서 진행되는 잠재적인 장면인지 이상할 정도로 모호하다. 그런 가정을 끌어내는 카메라의 좀 더 분명한 제스처는 마치 최순호가 그녀를 훔쳐보기라도 하듯이, 그 상상의 시선을 따라가듯이, 쏟아지는 샤워물길을 따라 과도하게 다가간 카메라가 오현주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그 살결 위로 핥듯이 따라 내려온다. 사라진 욕실의 마스터 쇼트. 제 방으로 돌아온 최순호는 망설이다가 방문을 나선 다음 오현주가 머무는 208호실 문 앞까지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S# 4) 이때 작동하는 것은 환상의 안으로의 향유일까, 아니면 그 바깥에로의 접근일까. 이 위험한 움직임. 이 쇼트는 욕실 장면 바로 뒤에 따라오기 때문에 두 가지 양상, 두 가지 회로, 두 가지 선택 사이에 놓이게 된다. 하나는 두 개의 쇼트 사이의 시간적 동시성에 따라 샤워하는 오현주의 방 안으로 거의 유혹에 이끌리듯 빨려 들어가는 최순호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상상하는 장면에 사로잡힌 채 문 저편의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 안에 침입하는 것이다. 상상적인 전체에 잡아먹힐 것인가, 아니면 육체적인 사건에 사로잡힐 것인가. 최순호는 문 앞에서 저편의 소리를 들으면서 서 있다가 문 열쇠 고리 안으로 그 안을 들여다보려는 듯한 자세를 취한 다음 문이 잠긴 것을 확인하고 되돌아온다. (S# 5) S#6 S#7 S#8 자기 방으로 되돌아온 최순호. 세 가지 기호. 최순호는 자기 방으로 되돌아올 때 자기 방문을 닫지 않는다. 좀 더 정확하게 반쯤 열린 문. 바깥으로 벌어진 방의 틈. 그 누군가를 초대하기 위해 배려한 듯한 통로. 그런 다음 최순호는 침대 위에 엎드려 눕는다. 마치 침대와 섹스를 나누는 듯한 그 자세. 몸이 무언가를 향하여 자기를 쓰고 있다. 상형문자와도 같은 제스처의 문장들. 그러다가 최순호는 수화기를 든 다음 교환에게 208호실을 연결시켜 달라고 한다. 그는 더 이상 망설임을 참지 못한다. 만일 그 전화를 받았다면 그는 도대체 무엇을 요구할 수 있었을까. 교환은 금방 그 방에서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일러준다. 세 가지 가정. 오현주는 벌써 잠든 것일까. 그렇다면 침대 곁에 있는 전화를 받지 못할 만큼 깊이 잠들어버린 것일까. 오현주는 아직도 샤워를 마치지 않은 것일까. 마지막 가정. 만일 오현주가 방에 없었기 때문에 그 전화를 받지 못했다면 지금 그녀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대답. (S# 6) 오현주는 지금 최순호의 열린 방문 앞에 서서 그가 자기에게 시선을 돌리길 기다리는 중이다. 이때 내 시선을 끄는 것은 최순호의 침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마치 어떤 입구를 지시하기라도 하듯 매달려 있는 이상하리만큼 불길한 베일이다. 마치 무대와 같은 장치. 만일 이 장면의 고정점이 최순호라면 오현주가 그를 앞지르기 시작한다. 반쯤 열린 이 문 안으로 들어온 다음 그 문을 잠그고 마치 확인이라도 하듯이 이중자물쇠의 열쇠소리를 채우는 클로즈업. 오현주의 손의 활동. (S# 7) 이상한 대사. “여긴 조용해서 좋아요, 살인이 나도 쥐도 새도 모를 거예요” 지금 두 사람은 동반자살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섹스에는 어딘가 모르게 죽음의 그림자가 감돈다. (S# 8) S#9 S#10 S#11 S#12 S#13 S#14 S#15 S#16 그런 다음 마치 장면들은 회상 안에 빠져든 것처럼 연속성 없는 단편들의 씬으로 이어지고 있다. 기억 없는 추억. 이것이 팽창된 환상인지, 반대로 수축한 시간인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사건의 시간들은 지금 어디서 흘러와서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갑작스럽게 두 사람이 야외 벌판에 놓여진 택시에서 섹스를 나누는 장면으로 옮겨간 다음 (S# 9) 전혀 다른 공간인 일본식 적산가옥에서 아침에 일어나 다시 섹스를 나누는 장면으로 이동한다. (S# 10) 이때 의도적으로 임권택 은 이 시간이 아침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까치들의 장면의 인서트한 다음 그걸 오현주가 보게 한다. 다시 한밤중에 호텔에 택시가 들어선 다음 (S# 11) 방 안에서 오현주는 최순호의 신발을 벗긴다. (S# 12) 이 장면을 임권택은 의도적으로 침실로 들어가는 방문 바깥에 카메라를 세워두고 영화의 프레임 안에 프레임을 만든다. 이때 이 프레임은 처음 오현주가 최순호의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우리가 보았던 베일의 반복이다. 더 이상한 것은 그런 다음 우리가 마주치는 검은 페이드이다. (S# 13) 이 갑작스러운 신호. 무엇이 무엇에로? 마치 자기 뒤에 아직 세계가 있는 지 돌아보는 것만 같은 이 이상한 단절. 그런 다음 싸구려 욕실로 보이는 곁에서 시작해서 오현주와 최순호의 섹스가 이어지는 무아지경으로 옮겨간다. 이때 이 이부자리는 명백히 이 장소가 신발을 벗겨주던 그 방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S# 14) 그런 다음 다시 페이드. (S# 15) 나는 이 장면을 순서대로 몇 차례를 보았지만 아직도 이 칸막이의 빗금 친 지층을 넘어가기 힘들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다음 장면. 마치 맨 첫 장면의 호텔로 되돌아온 것만 같은 장면. (S# 16) 원래로 돌아온 영화의 리듬. 처음으로 돌아온 장소. 나는 처음에는 이 장면이 영화 전체가 오현주의 회상을 알리는 출구라고 생각했다. 내 생각은 틀렸다. 깨어난 오현주 저 편의 침대에는 최순호가 아직 잠들고 누워있다. (주의. 약간의 스포일러) 전화하는 오현주를 엿들으면서 우리는 그녀가 유부녀이며, 남편이 잠시 동안 집을 비우자 강원도에 혼자 온 것이며, 그녀가 생각지 않았던 이른 일정으로 남편이 돌아오자 황급히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폭력적인 환상의 연기의 끝. 잠시 동안의 시간의 연출. 미처 우리가 어리둥절해서 기억의 셈을 끝내기도 전에 오현주는 잠든 최순호를 남겨두고 그에게 “고단하게 주무셔서 그냥 갑니다. 즐거웠어요. 안녕”이라고 쓴 다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장소를 떠난다. 사라진 최순호의 자리. 즐거웠어요, 안녕. 작별인사. 두 번 다시 우리는 만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끝난 시제. < 나비 품에서 울었다 >는 이 마지막 장면을 여기서 필요 이상으로 늘려놓을 생각이 없다. 뒤늦게 깨어난 최순호가 택시를 끌고 달려가지만 이미 떠나가는 기차를 그저 먼발치에서 보아야 한다. 돌아가는 길. 어디로? 원래의 그 자신의 삶에로. 옆 자리가 비었지만, 이번에는 오로지 그 자신을 위해서, 최순호는 라디오를 켠다. 청취자 사연을 읽어주는 프로그램. 진행자 중의 한 명은 모두들 고독, 고독, 고독을 말한다면서, 이제 앞으로는 고독이라는 말을 쓰면 사연을 소개하지 않겠다고 까지 말한다. 사라져가는 택시의 라디오에서 마지막으로 듣는 노래는 서바이버(The Survivers)의 <아이 오브 더 타이거>(Eye of the Tiger)>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 록키 3 >의 주제곡. 이 뜬금없는 노래. 이때 이 어처구니없는 노래를 의미로 쫓아간다면 아무런 대답도 얻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나비 품에서 울었다>가 막 개봉할 무렵 이 노래가 히트곡이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와 영화 사이의 동시대성. 라디오에서 흐르는 노래는 최순호의 마음 따위에 아무 관심도 없다. 무기력한 행위에로의 이행. 이때 주인공의 실패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세상이라는 시간의 폭력인 제스처. 당신을 위한 매우 복잡하고 리얼한 심리적인 설명 따위란 없다. 마치 라디오의 음악은 먼 시간의 여행으로 시작해서 바로 지금까지 온 다음 그 시간의 끝에 도착하자마자 최순호를 보잘 것 없는 현실로 되돌려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 자, 무슨 소리인지는 알겠다. 그러나 여기엔 왠지 불현듯 끝나버린 난처함이 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빨리 < 안개마을 >을 찍어야 한다. 이미 쫓기기 시작한 일정. 금방 첫눈이 내릴 것이다. 아마도 그때 임권택은 서둘러 함께 진행되고 있었을 그 현장으로 발길을 돌렸을 것이다. 그리고... (계속) 1983년 83분 컬러 1.85 감독 임권택 제작 우진필름 각본 송길한 촬영 손현채 편집 김희수 음악 이철혁 나영희 이영하 한소룡 윤양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