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아
- 감독
- 정재서
- 제작년도
- 2023
- 출연
- 조운, 송소연, 김영선
김정민 감독의 < 감자 >는 한편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영화이기 이전에 여러 기괴한 볼거리를 과시적으로 전시하는 쇼에 가깝다.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강원도 어느 감자밭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둘러싼 경찰, 농부, 천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원씬 원컷으로 촬영한 이 단편영화의 매력은 원시성에 있다. 여기서 말하는 원시성이란 영화가 역사적으로 말하기(telling)를 획득하기 이전부터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보여주기(showing)의 역량과 관련이 있다. <감자>는 살인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출동한 경찰, 고구마밭을 감자밭이라고 우기는 농부, 감자밭에서 경찰을 내쫓으려는 천치 사이에서 우발적, 기습적, 충격적으로 발생하는 대사, 몸짓, 사건을 활용해 끊임없이 관객의 흥미를 유발하는 것이 특징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스릴러 장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의 얼개를 가지고 있다. 스릴러 장르의 관습이 그러한 것처럼 <감자>에도 미스터리한 사건과 인물이 있고, 사건을 둘러싸고 쫓고 쫓기는 긴장 관계가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미궁에 빠진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방식으로 서사를 진행하기보다는 핵심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상황과 관련된 다양한 볼거리를 전시한다. 을씨년스러운 강원도 어느 바닷가 근방에 있는 감자밭의 풍경, 배우들의 다소 별난 몸짓, 관객의 예측을 벗어나는 우발적 상황 등이 이 영화의 주요 볼거리이다. 이와 더불어 바닷가가 보이는 어느 밭을 익스트림 롱샷으로 보여주는 오프닝이나 줌인, 패닝, 틸팅 등으로 배우들의 연기를 따라가면서 프레임의 경계를 확장하는 카메라의 움직임 또한 이 영화의 볼거리이다. 시각적으로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에 집중하는 이 영화의 특징은 ‘어트랙션 영화(cinema of attraction)’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영화학자 톰 거닝은 아직 영화라는 매체에 서사가 도입되기 이전에 만들어진 작품의 핵심적인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어트랙션 영화라는 용어를 고안했다. 그는 초기 무성영화가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관음증적인 시선을 유발하기 위해 시각적인 볼거리를 제공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의 이론은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어트랙션 몽타주를 개념적으로 참고했는데, 에이젠슈테인이 말하는 어트랙션은 크게 다음의 두 가지를 염두에 둔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서커스, 보드빌, 놀이공원 등과 같은 근대적인 여가 문화를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그로테스크한 연극에서 나타나는 기괴한 무대, 의상, 연기와 관련이 있다. 에이젠슈테인은 어트랙션이 공격적인 방식으로 관객의 감각, 심리, 지각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어트랙션에 관한 이런 논의에 따르면, 영화에서 쓰이는 어트랙션은 관객이 다양한 볼거리를 바라보면서 작품 속 세계를 온몸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장치에 가깝다. <감자>를 구성하는 여러 기괴한 이미지들은 이 작품을 하나의 슬랩스틱 코미디에 가깝게 만든다. 이 영화의 웃음 코드는 특정 상황에 대한 오인과 그러한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배우들의 기괴한 몸짓에 기초한다. 통상적으로 코미디 영화에서 오인은 특정 상황에 대한 등장인물의 무지로부터 발생한다. 예를 들어, 길거리를 어느 인물이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는 모습이 그러하다. <감자>의 오인은 이야기가 시작하면서부터 발생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유지된다. 영화의 시작 부분은 대략 이러하다. 살인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경찰이 밭에 도착하면, 농부가 경찰을 향해 걸어온다. 경찰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고구마밭의 주인을 찾는데, 농부는 그 밭이 감자밭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누구의 말이 진실일까? 국내의 경우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역사적으로 감자라는 단어는 고구마라는 단어와 구분이 되지 않았다. 18세기에 중국으로부터 감자가 유입되기 전까지 국내에는 고구마라고 불리는 작물만 있었다. 하지만 감자가 국내에 들어온 이후 그것의 생김새가 고구마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고구마 또한 감자라고 불렸다. 고구마는 19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제 이름으로 불릴 수 있었다. 이런 맥락을 고려하면, <감자>에서 한 농부가 고구마나 감자나 전부 감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마냥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니다. 주목할 부분은 이 작품에서 농부가 감자라고 지칭하는 대상은 정작 감자도 고구마도 아니라는 점에 있다. 오히려 그 농부는 땅속에 묻힌 시체를 가리켜서 감자라고 우긴다. 영화는 감자밭에 파묻혀 있던 시신의 일부가 드러나는 순간부터 농부에 의해서 유지된 오인의 상황에서 웃음기를 거둬들인다. 진실과 거짓의 위계가 무너져 내린 그 상황 속에서 모든 것은 의심의 대상이 된다. 그런 상황에서 경찰이 바라보는 농부는 더 이상 평범한 농부가 아니며 그가 바라보는 천치는 더 이상 인지능력이 부족한 그런 사람이 아니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웃음 코드는 오인과 관련된 상황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상황, 사건, 몸짓과 관련이 있다. 과거 찰리 채플린과 같은 코미디 배우들이 자신들의 신체와 몸짓을 통해서 관객에게 웃음을 제공했던 것처럼, 이 작품 또한 배우들이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거나, 무언가를 피해 달아나거나, 바닥을 기어가는 모습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 몸짓들은 롱테이크의 미학 속에서 사실적인 성격을 갖지만, 그 사실성을 위해 연출자와 배우들은 주변 환경을 이용하는 방법과 배우들 사이의 연기의 합을 수학적으로 미리 계산했을 것이다. 즉, 이 영화의 사실성은 논픽션에서 기대되는 우연적이고 비-연출적인 요소보다는 픽션에서 기대되는 계산적이고 연출적인 요소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이 영화에서 배우들의 기괴한 몸짓 중 일부는 관객의 오인, 즉 특정 장면에 대한 관객의 예측이 실패하는 상황을 유도한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시신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이 그러하다. 죽은 줄 알았던 신체가 살아 움직인다는 설정, 즉 산 주검(living dead)은 과거 어트랙션 영화가 즐겨 활용했던 소재 중 하나였다. <기이한 마차 사고(An Extraordinary Cab Accident)>(1903)의 경우 한 남성이 마차에 치여 숨지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죽은 줄 알았던 그 남성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일어나서 주변 사람들에게 웃음을 짓는 모습으로 끝이 난다. 이러한 작품들은 교통사고, 살인, 죽음 등에 대한 공포를 활용해서 충격과 웃음을 동시에 제공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감자> 또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기괴한 볼거리로 가득한 상황, 사건, 몸짓을 만들어내는 작품들과 가족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시각적인 볼거리를 통해서 관객의 감각을 자극하고 지각에 혼란을 일으키는 이 작품은 영화라는 매체가 가지고 있는 보여주기와 관련하여 두 가지의 성찰을 제공한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영화적 경험,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는 것에 관한 오인과 무지에 기초한 영화적 경험이다. 김정민 감독의 <감자>는 예술이 관객에게 호기심, 쾌락, 관음증을 자극하는 시각적인 볼거리이며, 그러한 바라보기의 경험이 일어나는 동안 관객의 상상력에 의한 판단과 오인이 허구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시험한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보여주기의 충실성이 이야기의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관련글) 1. 우리는 달팽이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 <달팽이>(2020), 2022.04.21. 2. 나와 유령이 함께 하는 시간 - <탈날탈>(2018), 2022.05.31. 3. 타인의 그림자를 집어삼키는 법 - <햄스터 죽이기>(2021), 2022.06.29. 4. 얼굴 없는 영화, 등으로 말하는 영화 - <말투>(2020), 2022.07.27. 5. 사랑의 약속으로 하나가 되는 세계 - <우리의 낮과 밤>(2020), 2022.08.25. 6. 이 몸체의 주인을 찾습니다 - <매미>(2021), 2022.09.23. 7. 이것은 감자인가 아니면 고구마인가? - <감자>(2018), 2022.11.08. 8. 일상을 적시는 시간들 - <햇볕을 볼 시간>(2022), 2022.11.21. 9. 찢김의 고통을 극복할 날을 기다리며 - <자르고 붙이기>(2022), 2022.12.06.
인생은 가까이서 볼 땐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 찰리 채플린 인생은 희극과 비극이 언제나 교체한다는 저 말. 맞다. 비극으로만 점철될 것이라 믿었던 군대생활도 통틀어 20분 정도는 재미있었으니까, 아니면 굳이 경험하지 않더라도 공중화장실 변기 위에 삶의 격언처럼 덕지덕지 붙어 있고, 비슷한 맥락으로 우리 동네 백수형도 가끔 나에게 말하곤 할 정도로 저 말은, 그냥-누구나-대충-던질 수-있는 말이다. 그런데도 저 말이 (적어도 나에게는) 빛나는 것은 채플린이 저 말 속에서 영화적인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클로즈업과 롱샷. 클로즈업에서는 비극이며, 롱샷에서는 코미디라는 말. 가만히 채플린의 영화를 떠올려 보면 그의 말이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그는 모든 롱샷에서 코미디를 만들어내었고, 그의 모든 클로즈업은 아려오는 슬픔과 애잔함이 가득하였다. 보통 하나의 프레임이 인물을 잡아낼 때 사용되는 용어인 롱샷과 클로즈업은 일반적으로 카메라와 인물 간의 거리, 또는 대상과 관객의 사회적 거리를 표현하는 가장 근본적인 장치이다. 말하자면, 카메라에 비친 대상에게 일정한 심리적 거리를 두고 보는 것을 롱샷의 거리(distance)이고, 대상과 상당히 개인적으로 친숙한 거리에 두고 보는 것을 클로즈업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롱샷에서는 대상이 되는 인물에게 일정한 거리감을 두면서 개인적 친밀감 보다는 낯선 이로 남게 한다면, 클로즈업에서는 인물과 카메라가 가까워지면서 친밀감을 중시하고, 감정의 거리를 줄여서 심리적 동질성을 가지게 하는 점이다. 채플린이 등장하는 롱샷에서 관객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멀찌감치 앉아서(상대적으로 타자화 되어 있는 상태에서) 넘어지고, 떨어지고, 실수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웃음으로 받아들인다. 즉 카메라와 대상의 거리(롱샷), 이로 인한 사회적 거리는 그것을 구경거리 정도로만 국한시키고 말뿐이다. 하지만 인간의 얼굴이나 대상을 클로즈업으로 촬영하게 되면 관객을 더 이상 구경꾼이 되지 못한다. 대상에 가까워지면 우리는 거리감을 지우고, 개인적인 거리 상태에 돌입하기 때문이다. 원근법적 거리를 사라지게 하고, 대상을 촉지적으로 만지게 되는 상황. 정신없이 흔들리는 정동의 상태. 채플린의 클로즈업은 특히 더 그러했다. 정유미 감독의 < 연애놀이 >를 처음 접했을 때의 감정도 그랬다. 클로즈업으로 시작되어서는 요상한 80년대 복장을 한두 명의 연인의 롱샷으로 이어지는 첫 오프닝부터 말이다. 이러한 쇼트 구성은 이후 계속 이어지는데, 놀랍게도 이 작품은 딱 그 두 개의 쇼트, 롱샷과 클로즈업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롱샷(long-shot), 놀이의 프레임 보통 인물의 롱샷의 경우는 설정 쇼트로 알려져 있다.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공간의 설명, 실사영화에서는 마스터 쇼트라고 불리는. < 연애놀이 >의 경우에도 롱샷은 작품의 제목처럼 놀이를 위한 공간설정이다. 바닥에 네모난 금을 긋고, 나란히 신발을 벗고 네모난 공간으로 들어간 두 명의 남녀. 이 작품 전체를 통틀어 변화하지 않는 롱샷의 구도이다. 아예 작품 속에서 모든 롱샷의 레이아웃은 이 장면을 바탕으로 고정되어 있다. 다른 별도의 배경이 없이, 바닥에 별도로 그려진 프레임은 ‘연애놀이’가 일어나는 공간이자, 그들이 벗어나지 않는 공간이다. 놀이라는 속성상 그들은 그 프레임 안에서 다양한 역할극을 하거나, 그곳에서 지켜야 하는 룰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는 그들은 소년, 소녀가 되거나, 젊은 연인이 되거나, 늙은 부부가 되어야 하는 운명이다. 따라서 그들의 놀이에는 금 그어진 공간, 그려진 네모의 공간 외부로는 갈 수 없다. 모든 놀이가 그렇듯이 구별된 공간은 살아온 기억이 되거나, 현재의 갈등이거나, 미래의 다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간의 설정은 그어진 금(밟으면 죽는 그 ‘금’)과 신발(구두)에 의해서 더욱 강화된다. 금의 외부가 일상과 외부의 삶이라면, 금의 내부는 연애와 삶의 공간인 셈일 텐데, 이를 끝없이 재생산하거나 재고하게 하는 것이 금의 외부에 놓인 신발이다. 신발은 외부의 삶에서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옴을 상징하는 역할을 하면서도, 언제든 다시 돌아나갈 수 있는 상징이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연애가 이처럼 위태하지 않았던가? (금을 밟으면 죽는, 경계를 넘나들기 힘든. 실제로 작품에서 여성 캐릭터가 넘어지면서 우연히 금을 밟는 장면이 나오는데, 인과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바로 다음 에피소드에서 그녀는 아픈 설정으로 된다.) 하지만 처음 이 작품을 대할 때의 롱샷들은 그 위태함을 바라보는 두려움보다는 묘한 웃음을 번지게 한다. 그것은 롱샷으로 보이는 인물들의 움직임과 상황 때문인데, < 연애놀이 >에서 롱샷으로 잡힌 인물들은 컷아웃 애니메이션의 그것처럼 묘한 타이밍과 특유의 단축법으로 그려진 신체의 표현으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는 롱샷에서 클로즈업으로 넘어가는 몇몇 재치 넘치는 샷 구성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롱샷 장면에서 보이는 장면들은 공간 설정에 대한 정보로 구성되어 인물들과 카메라, 즉 대상과 관객과의 거리는 멀다. 그 때문에 연애놀이를 바라보는 관객들은 그들이 하는 놀이(오래되고, 가물가물한, 무덤덤한)가 롱샷으로 펼쳐질 때 재밌는 구경이 된다. 그러나 그 때문에 이 작품이 단순한 희극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아픈 아련함이 있다. 클로즈업(close-up), 대상을 향한 무한한 촉감 < 연애놀이 >에서의 클로즈업은 주로 놀이에 사용되는 사물, 손, 그리고 얼굴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사물은 놀이를 위한 주요한 소도구이며, 손은 놀이를 이어주고, 인물들을 이어주는 도구가 된다. <연애놀이>의 롱샷이 상당히 단순화된 드로잉과 레이아웃으로 구성된 것에 비해, 클로즈업으로 보이는 각각의 대상, 특히 놀이의 사물들은 그것들과는 대조적으로 디테일한 표현을 두고 있다. 이는 감독이 가지는 사물에 대한 애정과도 같은데, 이로 인해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사물들은 더욱 깊은 주의와 의미를 품게 되고, 놀이는 단순한 놀이가 아닌 특별한 은유의 모습을 띠게 된다. 말하자면, 에피소드에서 등장하는 돌, 찻잔, 모래, 과자, 방울, 핸드백, 청진기, 주사기 등등은 실제 삶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갈등이나 희망, 기억, 시간 등으로 환유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작품이 적절한 유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러 복잡한 감정을 떠오르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 때문이다. 이를 더욱 강화시켜주는 또 다른 중요한 지점은 바로 얼굴의 클로즈업이다. 보통 상당히 단순화되어 있는 데생에서 인물의 모습을 클로즈업으로 제시하기는 쉽지 않은데, 그것은 단순화된 이미지 때문에 클로즈업 내부에 등장하는 정보의 양이 너무나 적어서 수용자들이 쉽게 따분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 연애놀이 >에서의 얼굴 클로즈업은 전혀 다른 양상이 된다. 그들의 얼굴은 윤곽선으로 그려진 선들의 끝없는 떨림으로 이야기를 전달하고, 감정을 전달한다. 이때 떨림의 선은 이미 앞서 제시된 애정 어린 사물들과 인물들 간의 손의 연결, 그리고 클로즈업된 얼굴의 이미지로 이어지면서 이것이 그려진 애니메이션이라는 존재적 층위를 알림과 동시에 인물의 얼굴을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치는 공간으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얼굴의 작은 떨림은 그야말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는 선, 그 자체의 존재의 함성인 셈이다. 그리고 우리는 마치 그 선을 만지듯이 바라볼 수 있다. 놀이에서 삶으로 이 작품이 농익은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감독은 각각의 에피소드들의 순서를 구성함에 있어서 상당히 많은 고민을 한 흔적을 찾을 수가 있는데, 각각의 에피소드는 놀이의 순서이면서, 삶의 순서이고, 미묘한 감정의 고리가 연결되는 과정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먼 곳(long-shot) 에서 살펴야 했던 누군가의 놀이가 그들의 내부(close-up)를 드러내면서 (복잡하게 떨리는 사물을 대면하게 함으로) 우리는 비로소 이것이 삶에 닿아 있는 것임을 느끼게 된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80년대 복장을 한 부모세대의 기억을 인터뷰하는 것일 수도 있고, 현재 우리가 느끼는 삶의 재연(reenactment)일 수도 있으며, 누군가가 겪게 될 누군가의 재현(representation)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의 백미라 느끼는 것은 마지막 두 개의 에피소드인 병원놀이와 시체놀이인데, 이 두 에피소드는 앞선 이야기들이 들려주는 단순한 놀이를 삶의 영역으로 옮기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메마른 감정의 얼굴이 슬픔과 비극의 클로즈업으로 변환되고, 놀이의 구경꾼이 어느새 그들의 감정 한가운데로 들어오게 만들어 버린다. 놀이에 불현듯 끼어든 느닷없는 비극. 눈물을 왈칵 쏟아내는 여성 캐릭터의 모습에서는 그야말로 숭고함마저 느껴진다. (짧은 지면상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순 없지만, 그 장면의 배경과 이야기의 내부를 향한 궁금증은 정말 감독에게 묻고 싶을 정도다) 짧은 15분짜리 단편 영화지만, 그만큼 여기에는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있다. 작가는 분명 누군가의 사랑을 사랑하고, 기억을 가다듬고 손질하는 유려한 양식을 가지고 있으며, 따뜻한 유머(humor)와 애정을 가지고 있는 그야말로 애절하고, 사랑스러운 휴머니스트임에 분명하다. 채플린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