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바
- 감독
- 도미니크 아벨, 피오나 고든, 브루노 로미
- 제작년도
- 2008
- 출연
- 도미니크 아벨, 피오나 고든, 브루노 로미
경성은 식민지 조선의 최대 도시이자, 가장 많은 극장이 ‘밀집’된 곳이었다. 오늘날과 견주어 보면 ‘밀집’이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전국적인 극장의 분포 정도를 살펴보면, 식민지 시기 내내 경성은 극장의 도시였다. 1930년대 전쟁이니 불황이니 해도 경성의 영화 인구는 계속 늘었고, 그럴수록 경성과 지방 사이의 격차는 벌어졌다. 부산이나 평양 정도의 도시에는 규모가 있는 영화상설관들이 꽤 있었고 필름의 순환도 제법 빠른 편이었지만, 경성과의 물리적 거리가 일종의 ‘문화 지연’ 감각으로 전환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일본에서 본 영화를 경성에서 다시 보며 ‘지금 여기’에 묘한 회상의 감각을 덮어보는 엘리트 관객의 시간 감각만큼이나, 경성에서 본 영화를 지방 어느 극장에서 다시 보는 영화팬의 속내 또한 복잡했을 것이다. 카프(KAPF)의 직속 극단 ‘신건설(新建設)’ 창단을 주도했던 신고송은 1932년에 이른바 ‘『우리 동무』 배포 사건’으로 검거되었다가 석방된 후 교사인 아내의 근무지였던 김해군 김해읍으로 이주했다. 김해에 살면서 1936년 『조선영화』 창간호에 「항구에서 보는 영화들」을 기고하는데, 이 글은 경성의 지인에게 보내는 서간문 형식을 취했다. 『조선영화』에는 한때 그와 함께 했던 ‘형들’―송영, 나웅, 최일숙, 고경흠 등―이 글을 싣고 있었는데, 그중 나웅이 이 글의 수신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진2. 신고송, 「항구에서 보는 영화들」 중에서 신고송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읍내 극장에 영화나 연극이 ‘올’ 때마다 극장에 갔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극장에서 <암로(강호, 1929)>와 <혼가(김유영, 1929)>, <바다와 싸우는 사람들(양철, 1930)> 등 자신의 과거 어느 시절을 추억하게 하는 영화들을 보았다고 한다. 김유영이 연출하고 임화가 주연했던 영화 <혼가>는 엉뚱하게도 ‘나웅’ 주연의 영화 ‘어두운 거리’라고 광고되기도 했는데, “서울 사는 형들의 생각에는 어느 집 창고에 먼지에 파묻혀 있으리라고 할” 이런 영화들에서 임화의 맵시를 보고, ‘형들’의 얼굴을 보는 것이 자신에게는 위락이 된다고도 적었다. 경성의 영화팬들은 기억도 못할 수년 전의 무성영화가 그가 사는 곳에서는 신작처럼 상영되는 것이다. 김해는 부산에서 가까워 갓 일본에서 들여온 ‘신작’들도 구경할 수 있었는데, 어떤 영화들은 경성의 ‘형들’보다도 신고송이 먼저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발성영화 <벤갈의 창기병(The Lives of a Bengal Lancer, 1935)>을 무성영화 영사기로 상영하는 낙후된 극장 시설은 ‘경향의 시차’를 더욱 뚜렷하게 각인시킨다. 비슷한 무렵, 시인 이상은 평안남도 성천에서의 영화 경험을 기록해 놓았다. 1935년 9월의 어느 저녁, ‘공기는 수정처럼 맑고, 별빛만으로도 누가복음을 읽을 수 있을 듯한’ 평안남도 성천에 요양 차 머무르던 그는 금융조합 주최의 선전활동사진회 구경을 갔다. “마당에 멍석을 펴고 전설 같은 시민들”이 모여든 밤, 자동차 헤드라이트 외에 전등이라곤 본 적 없는 성천 사람들에게 움직이는 영상은 “홍모(紅毛) 오랑캐의 요술”에 비할 것이며, 영화를 보기 위해 학교 마당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축음기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북극 ‘펭귄’ 새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때문이 아니라 축음기 그 자체가 신기해서 모여드는 펭귄처럼, 성천 사람들은 영화의 내용을 알거나 이해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영화 장치 그 자체에 매혹되어 모여든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액션이 화려한 극영화도 아니고, 부산 잔교, 모란봉, 압록강 철교 등 그저 조선의 실경(實景)을 담은 필름의 영사가 끝난 것인데도, 성천 사람들은 마치 서양 명감독의 영화를 접한 듯 우레와 같은 박수를 쏟아냈다. 도회라는 ‘화려한 고향’에서 일상적으로 영화를 경험해온 그에게는 퍽 이질감이 느껴지는 장면이었으리라. 그럼에도 이 상영의 장에서 그 역시 성천의 ‘촌민’들과 더불어 ‘백성’ 혹은 ‘동포’라는 이름의 공동체로 일체화되었던 경험을 짧게 적는다. 사진3. 이상, 「산촌여정 - 성천 기행 중의 몇 절」 중에서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조선에서 경성과 지방, 도시와 농촌 사이의 문화적 격차는 경성을 떠나야 비로소 실감하게 되는 터였다. 영화는 과학 기술이 탄생시킨 복제 미디어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가능하다고 하지만, 사운드 도입 이후에도 조선에서의 영화 이동은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벌, 많아도 겨우 몇 벌의 프린트가 경성에서 지방으로, 도시에서 농촌으로 돌고 도는 식이었다. 더 많은 관객에게 영화 경험을 제공하기 위한 순회 영사는 지역에 따른 경험의 차이도 계속 생성해갔다. 일제가 식민지 주민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문화 선전 활동을 구상할 때, 경향 간 문화 경험의 차이는 더욱 문제가 되었다. 문화 기반 시설이 부족한 농산어촌과 공장 및 광산 지대의 주민에게 영사대를 파견하여 집단적으로 영화를 감상하게 하는 이동영사가 전시체제기에 기획되고 치밀한 조직과 기반을 갖고 있지 못했음에도 단시간 내에 수많은 관객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서울과 지방 혹은 도시와 농촌 사이의 격차가 추동했던 문화 향유에 대한 갈망과도 깊이 관련된다. 이동영사의 관객들은 거의 대부분이 문화적 혜택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던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를 보려면 겨울에도 20~30리 길을 걸어야 상영장에 닿을 수 있었다. 이렇게 기꺼이 먼 길을 걸어 보러 올 만큼 이동영사에 대한 호응이 높았던 것은 선전과 교화 수단으로서 영화를 이용하려는 당국의 의도와 오락과 여가, 문화로서 영화를 경험하는 식민지 주민의 수용 사이에 간극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상단사진1. 평양 순회 영사 관련 기사 출처: 《동아일보》 1934년 7월 29일자 2면 (뉴스라이브러리)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서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1. 신고송, 「항구에서 보는 영화들」, 『조선영화』 제1집(1936년), 118~119쪽. 형! 중앙을 떠난 지도 벌써 오래되니 나의 전문이던 연극에까지도 인연이 멀어진 것 같거든, 하물며 영화와는 더욱 남이 된 것 같소이다. 행(幸)으로 부산에 가까이 있으므로 한 달에 한번이라도 보고 싶은 영화는 보기가 됩니다. 그도 일본영화는 간혹 조선 첫 봉절도 있습니다마는 조선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서양 것들은 다, 형들이 감상하고 난 나머지를 얻어 보는 셈이지요. 형! 그래도 이런 시골에 파묻혀 있으면서도 얼굴이 간지러우며 진땀을 흘리면서도 추억의 거리가 되는 재미나는―중앙에 있는 형들은 못 보는―것을 구경합니다. 이 읍에도 명색 극장이 있어 한 달에 한 번은 영화나 연극이 오는데 이러한 한거(閑居)에서 무위의 날을 보내는 나는 우리집 앞 논둑길로 악대가 불고 지나가는 밤이면 꼭 극장에를 가보는 것입니다. 이 덕택으로 서울 사는 형들의 생각에는 어느 집 창고에 먼지에 파묻혀 있으리라고 할 <암로>와 <혼가>와 또는 <바다와 싸우는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혼가>가 ‘어두운 거리’로도 되어 나오고 주연이 ‘나웅(羅雄)’이라고도 되어 광고됩니다. 그래 웃으면서 구경 갑니다. 가서 강호(姜湖)의 얼굴을 보고 임화(林和)의 맵시를 보고 형의 얼굴을 보는 것이 나에게 한갓 위락이 됩니다. 강호 군은 <암로> 이야기만 내면 아주 미안해하고 싫어합니다만 근 십년 전의 작품이오, 초기의 첫 작품이 그러하다는 것이 왜 강호의 불명예야 되겠습니까. 형! 이러한 시골 극장에서 얻는 에피소드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한번은 <부라커 대학생>이라는 광고로 영화가 상영되기에 나도 무심히 구경을 갔었지요. 그랬더니 ‘부라커’는 정히 저 ‘프라-그’이고 영화는 그 유명한 <프라하의 대학생[Der Student von Prag]>이었습니다. 또 한 번은 <벤갈의 창기병[The Lives of a Bengal Lancer, 1935]>이 왔기로 나는 그것을 전에 볼 기회가 없어 못 보았는지라 가보았더니 사일런트 기계로 무성으로 올리겠지요. 영화로서 효과는 전연 없어졌지마는 영화에 의하여 느끼어진 적이 최근에는 없는 나로서는 느껴지는 것이 있습디다. 어떻게 해서 영국이 토민을 학살하고 그들의 부를 축적했는가, 그것이었습니다. 소위 서부활극이라는 것에 있어서도 아메리칸 인디언을 취급하는 데서도 흔히 보는 것이지만 인종적으로 모욕해서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보니 분개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형! 이래도 부산서 형들이 먼저 보기 전에 서양영화를 첫 봉절에 하나 보았습니다. <춤추는 브로드웨이[Broadway Melody of 1936]>, 그 어이 없이 시끄럽고 날뛰는 영화 말입니다. 늙은이 코 고는 것이 ‘상승음계형’, ‘하강음계형’, ‘권태형’ 등등 수십 종의 형으로 유별(類別)하는 재주에는 경탄했습니다만, 양키들의 끝없이 □□[식별 불가]하는 광조난무(狂躁亂舞)는 아메리카 문화를 경조화(輕燥化)하는 것이 발성영화의 죄일는지요, ‘엘레지 오브 아메리카’의 죄일는지요. <톱 햇[Top Hat, 1935]>, <오페라 해트[Mr. Deeds Goes To Town, 1936]>, <함대를 뒤쫓아서[Follow the Fleet, 1936]> 등등 끝없이 재즈문화는 재즈화해가고 ‘폭스 트로트’는 ‘룸바’에 가지로 증후는 악화해 가는 모양입니다. 아메리카의 영화가 내용적으로 저열해지건, 불란서에서 <마주르카>니 <에키파-쥬>니 우수하다고 하는 영화들이 뒤이어 소개되건, 조선영화의 소조(蕭條)한 비발전(非發展)에는 경탄을 마지않습니다. 그 원인은 허다하겠지요마는 한심한 일입니다. 이곳 극장에서 발성영화 <××전>을 구경했습니다마는 그러한 거액의 돈으로 그것밖에는 만들지 못한 원인은 기술의 부족으로 보아야 옳겠지요. 기술이 있는 이들이 그냥 썩어져 있건마는 기회는 항상 그것을 찾아보지 못하고 그렇지 않은 데서만 방황하니 기회 그놈이 무심타고 하겠습니다. 일본영화가 장족의 발전을 하고 있고 중국의 영화도 최근 훌륭한 것들이 나온다고 하니 어이 남의 일만 같다고 하겠습니까. 이제는 아마 조선영화도 기업적으로 채산이 되는 듯하니 대중의 저속한 취미에만 영합하려는 통속화의 경향을 집어치우고 예술적 양심을 움직여 대중의 영화에 대한 감상안을 높여가야 영화문화의 진전이 있지 않겠나요. 외국영화 더욱이 불국(佛國) 영화를 보면 모든 것에 있어서 화면에 넘치는 여유작작한 것을 얻을 수 있는데 조선영화에 있어서는 시나리오 그것에 그러하고 연기에 그러하고 감독에 그러하여 모두가 여유가 없으니, 이것은 기술의 탈일까요. 저들의 생활에는 여유가 있고 우리의 생활에는 궁박(窮迫) 그것이 모든 것에 반영되어 그럴까요. 형! 지금 나의 경우에는 이것으로 영화에 대한 이야깃거리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형의 건강을 빌고 마지않습니다. 2. 이상, 「산촌여정 - 성천 기행 중의 몇 절 (완)」, 《매일신보》, 1935년 10월 10일 및 11일 자, 조간 1면, 부분 발췌 이 마당[학교 마당]에서 오늘 밤에 금융조합 선전활동사진회가 열립니다. 활동사진? 세기의 총아—온갖 예술 위에 군림하는 ‘넘버’ 제8예술의 승리. 그 고답적이고도 탕아적인 매력을 무엇에다 비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활동사진에 대하여 한낱 동화적인 꿈을 가진 채 있습니다. 그림이 움직일 수 있는 이것은 참 홍모(紅毛) 오랑캐의 요술을 배워가지고 온 것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 동포의 부러운 재간입니다. [...] 밤이 되었습니다. 초열흘 가까운 달이 초저녁이 조금 지나면 나옵니다. 마당에 멍석을 펴고 전설 같은 시민이 모여듭니다. 축음기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북극 ‘펭귄’ 새들이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짧고도 기다란 인생을 적어 내려갈 편전지(便箋紙)—‘스크린’이 박모(薄暮) 속에서 ‘바이오그래피’의 예비 표정입니다. 내가 있는 건너편 객줏집에 든 도회풍 여인도 왔나봅니다. 사투리의 합음(合音)이 마당 안에서 들립니다. 시작입니다. 부산 잔교가 나타납니다. 평양 목단봉입니다. 압록강 철교가 역사적으로 돌아갑니다. 박수와 갈채—태서(泰西)의 명감독이 바야흐로 안색이 없습니다. 십분 휴게시간에 조합 이사의 통역부(通譯附)의 연설이 있었습니다. 달은 구름 속에 있습니다. 금연—이라는 느낌입니다. 연설하는 이사 얼굴에 전등의 ‘스포트’도 비쳤습니다. 산천초목이 다 경동할 일입니다. 전등—이곳 촌민들은 XX행 자동차 ‘헤드라이트’ 외에 전등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 눈이 부시게 밝은 광선 속에서 창백한 이사는 강단(降壇)하였습니다. 우매한 백성들은 이 이사의 웅변에 한 사람도 박수치지 않았습니다—물론 나도 그 우매한 백성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었습니다마는—.
영화란 무엇일까? 다시 1년이 지나갔다. 소통할 수 없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 영화는 자꾸 숨 막히는 현실의 탈출구가 되고자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들은 꼭 봐야 할 영화가 되었고, 꼭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들조차 그런 영화로 호명되었다. 비루한 현실은 그렇게 영화를 프로파간다化 했다. 우리는 그런 영화들로 위안을 얻었고, 그렇지 않은 영화들조차 그런 의미가 되어 다가왔다. 그리고 다시 급변하는 정치 환경 속에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 속에서, 영화 속 현실이 영화적 상상이 아니라 현실의 재현이라는 걸, 아니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으며 모두가 분노하고 허탈해했다. 굳이 극장에 가지 않아도 영화보다 더 스펙터클하고 흥미진진한 말과 이미지 속에서 기대와 불안으로 지난 한 해를 마무리했다. 아무리 기억을 되살려 봐도 최근 몇 년간 극장에서 개봉하고,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수없이 많은 영화들을 본 우리들은 한 영화를 두고 치열한 논쟁하지도 않았고, 뭔가 새롭고 흥미로운 논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게 영화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우리들 때문이었을까? 문득, 영화의 죽음이라는 말이 떠올랐던 건, 영화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이 다시 떠올랐던 건 그 때문이었다. 올해의 리스트 사사로운 리스트를 만들기 위해 2016년 한해 본 영화들의 리스트를 뒤적거렸다. 베를린 영화제에 다녀와서 그 결과가 리스트에 반영이 될 거라 생각은 했지만 막상 뽑아보니 생각보다 영향이 컸던 것 같다. 먼저 영화를 보는 순수한 즐거움을 다시 느끼게 해준, 그리고 장르 안에서 예측을 깨뜨리며 이야기를 능수능란하게 가지고 논 영화 두 편.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 비거 스플래쉬 >와 폴 버호벤의 < 엘르 >. 특히 <엘르>는 영화가 가지고 있던, 아니 내가 가지고 있던 강간의 신화를 해머로 내리치듯 깡그리 부숴버리고, 오랜만에 영화가 선사하는 순수한 쾌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리고 윤가은 감독의 < 우리들 >, 호평을 받을 만한 영화가 호평을 받았으므로 더 말을 보탤 필요가 없겠지만, 그래도 한마디 덧붙이자면, 이 영화는 완벽하진 않아도 기존의 제작 시스템의 틈을 비집고 나온 소중한 결과물이라는 걸 기억해 두어야 한다. 그래서 더 반가웠던 영화였다. 그리고 작년에 이어 다시 라브 디아즈, 그는 이제 어떤 경지에 도달한, 아시아에서 거의 유일하게 현재 진행형이면서 전진하는 작가라는 걸 <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 >로 다시 한번 증명했다. 미셸 프랑코의 < 크로닉 >,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영화를 계속 전진시키는 파격적인 엔딩은 현대 영화의 결말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였고, < 다가오는 것들 >을 보면서는 미아 한센 러브의 전진하는 보폭이 커서 이 감독의 차기작은 도대체 어떤 영화일까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2011년 그의 세 번째 장편 <자이언츠>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 해지고는 새까맣게 잊고 있다가, 올해 베를린 영화제 상영작에서 이 감독의 이름을 보고 한걸음에 달려가 보았던 보울리 레너스의 네 번째 장편영화 < 더 퍼스트, 더 라스트 >. 난 그가 연기한 영화보다 연출한 영화가 더 보고 싶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두 편. 먼저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 잔 프란코 로시의 < 화염의 바다 >, 처음 보고 갸우뚱했다. 이탈리아 시골의 한 가정과 이탈리아에 유입된 난민들의 행렬을 대비시킨 이 다큐멘터리는 축이 되는 두 이야기의 교차 지점의 인과관계가 약해 보였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일 년 내내 마음 한 켠에 껌딱지처럼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또 한 편의 다큐멘터리. 다큐멘터리 작업과 사회운동이 밀착되어 있거나, 대상에 대한 감독의 입장이 명확한 최근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경향 속에서 대상과 카메라의 거리를 지켜내려는 두 감독의 의지로 완성되어 한국 다큐멘터리의 지평을 다시 확장시킨 소중한 결과물, 김일란 , 이혁상 의 < 공동정범 >. 그리고 마지막으로 키들랏 타히믹의 < 발릭바얀#1 - 돌아온 과잉개발의 기억 III >, 이 영화는 올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MMCA필름앤비디오의 기획 프로그램 <이야기의 재건>의 첫 번째 시리즈와 국제무형유산영상축제를 통해 두 번에 걸쳐 한국에서 공개된 바 있는데, 올해에는 사사로운 리스트에 있는 영화들 중 이 영화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소개할까 한다. 키들랏 타히믹 - 고요한 번개. 키들랏 타히믹 감독은 일만 불의 제작비로 만든 데뷔작 <향기어린 악몽 Perfumed Nightmare>(1977)이 베를린 영화제 포럼 창립자이자 당시 포럼 디렉터였던 울리히 그레고르에게 극적으로 발굴되어 상영된 후 엄청난 호평을 받으며 화려하게 국제영화계에 등장했다. 그는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영화사에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가장 중요한 아시아 영화감독 중 한 명이며, 영화뿐 아니라 다양한 예술 장르를 통해 아시아적인 소재와 관점으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온 필리핀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이자 아티스트이다. 1912년 필리핀 바기오 시에서 출생한 키들랏 타히믹은 필리핀 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 필라델피아의 와튼 비즈니스 스쿨에서 MBA를 취득했다. 이후 5년 동안 파리에 위치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다가 OECD를 나와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사업에 실패하고 뮌헨의 예술가 공동체에서 잠시 지내다가 베르너 헤어토크를 만나 그의 영화 <하늘은 스스로 돌보는 자를 돌보지 않는다>(1974)의 배우로 출연하면서 본격적으로 영화에 길을 걷게 된다. 그가 초기에 만든 세 편의 영화는 - <향기어린 악몽>(1977), < 누가 요요를 만들었나? 누가 월면차를 만들었나? >(1979), <투룸바>(1983) - 은 그를 후기 식민주의 제3세계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이 세 영화는, 말하자면 트랜스내셔널 시네마 Transnational Cinema에 속하는데, 사실 영화 이론 쪽에서 이런 개념이 정식으로 사용되기도 전에 영화가 먼저 만들어진 셈이다. 키들랏 타히믹 감독은 지금보다 훨씬 덜 네트워크화된 시대에 정치, 경제, 문화적 세계화 Globalization의 문제를 영화적으로 기록한 영화사의 첫 감독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프레데릭 제임슨이 자신의 이론에 그의 영화를 끌어들인 것도, 수잔 손탁과 오에 겐자부로로부터 환대받은 이유도, 그의 영화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주제의식과 독특한 스타일 때문이었다. 그는 세 번째 영화 <투룸바>(1983)를 완성한 후 필리핀 토착민들과 함께 살면서 주로 필리핀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가족에 대한 가치를 바탕으로 한 비디오 에세이 형식의 영화들을 주로 제작해왔다. 요요, 쌀, 지붕, 바학, 가족의 가치, 필리핀의 역사들을 소재로 한 그의 영화들은 필리핀의 역사와 필리핀 고유의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자본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해 분명하고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그는 특정한 영화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선형적인 내러티브 대신 가지가 뻗어 나가듯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입체적인 내러티브를 구축하고, 진지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절대로 유머를 잃지 않는 자신만의 방식을 통해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와 실험영화 사이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해왔다. 그의 영화는 ‘고요한 번개’라는 자신의 이름이 가지고 있는 뜻대로, 고요하면서 날카롭고 지적이면서 유쾌하다. 할리우드 상업영화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꼿꼿이 자신만의 길을 닦아온 키들랏 타히믹과 그의 영화들은 많은 필리핀 감독들에게 존경을 받았고, 젊은 감독들에게 강한 영감을 주기도 했는데, 그 영향력은 브리얀테 멘도사와 제프리 제투리안의 사회적 리얼리즘부터 존 토레스와 라야 마틴의 개인적 에세이, 라브 디아즈와 카븐 데 라 크루스, 쉐라드 안토니 산체스의 영화적 실험에까지 이른다. 특히 자신만의 형식과 스타일로 필리핀의 역사를 영화적으로 재현하며 끊임없이 전진해온 라브 디아즈는 키들랏 타히믹의 영화와 정신을 계승하여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낸 가장 독창적인 계승자라고 할 수 있다. 발릭바얀#1 - 돌아온 과잉개발의 기억 III 2015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첫 공개 되어 호평을 받은 그의 최신작 < 발릭바얀 #1― 돌아온 과잉개발의 기억 Ⅲ >은 1980년에 촬영을 시작하여 30여 년이 지난 2010년에 미완성된 채 공개된 33분짜리 단편영화 < 과잉개발의 기억 Memories of Overdevelopment >의 두 번째 확장판이자 첫 완결판이다. 키들랏 감독은 세계 최초로 세계 일주 항해를 한 인물이 포르투갈 출신의 항해사 페르디난드 마젤란 Ferdinand Magellan이 아니라 실제로는 그의 노예였던 믈라카 Melaka 출신의 엔리케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단편영화에 담으려고 했다. 그러나 아시아인의 관점에서 세계사의 중요한 사건을 재해석하려고 했던 이 야심 찬 시도는 한동안 미완성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키들랏 타히믹 감독은 2010년 이후 이미 1차로 완성된 33분 분량의 단편영화의 이미지와 이야기를 중심에 두고 2013년부터 2015년 사이 감독이 살고 있는 1천 5백 미터의 고지에 위치한 바기오시 이푸가오족 마을에서 촬영한 장면들을 뒤섞고 편집하여 140분 분량의 완전히 새로운 영화를 완성했다. 그의 영화는 프리 프로덕션 과정을 거쳐 촬영하고 편집한 후 하나의 영화를 완성하는 기존의 영화제작방식과는 확실히 다르다. 그는 늘 카메라를 곁에 두고 관심 있는 대상을 촬영한 후 모아두었다가, 이야기가 떠오르면 감독이 의도하는 대로 기존의 영상들을 배치하여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왔다. 따라서 <투룸바> 이후의 그의 모든 영화들은 계획에 따라 ‘이미지를 메이킹’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콜렉팅’ 한다는 점에서 현대 디지털 영화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또한 자본의 힘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기 위해 시간과 돈에 구애받지 않는다. 제작기한을 정해두지 않으며, 돈이 없으면 작업을 중단하고, 돈이 생기면 작업을 다시 시작한다. ‘기름 한 컵 영화 만들기’라고 불리는 이런 독특한 영화 제작 방식 때문에 그가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하는 기간을 일정하지 않다. 이처럼 가장 독립적인 영화제작방식으로 평가받는 그의 영화제작방식은 영화가 완성된 후에도 계속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가장 독창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 발릭바얀 #1― 돌아온 과잉개발의 기억 Ⅲ >은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뉜다. 약 1시간 40분 정도 분량의 전반부는 구조적으로 보면 크게 두 개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하나는 화자가 과거의 시점으로 들려주는 마젤란의 노예 엔리케의 파란만장한 일생과 마젤란과의 세계 일주 과정을 담은 이야기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야기는 현재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한 젊은이가 바닷가에서 엔리케의 후예로 보이는 한 노인을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그 후 사라진 노인을 쫓던 젊은이가 결국 노인과 다시 만나기까지의 여정을 담는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이 두 이야기가 교차하고 노인을 찾던 젊은이는 결국 노인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의미심장하게도 젊은이의 이름은 엔리케이고, 노인의 이름은 페르난디드 마젤란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미 한 편의 완결된 영화이기도 한 전반부를 보고 있으면 그가 얼마나 위대한 영화감독이자 이야기꾼이고, 자신만의 영화제작방식을 통해 자신의 영화를 오랜 세월에 걸쳐 어떻게 진화시켜 왔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그에 반해 감독 스스로 ‘디렉터스컷’이라고 부르는 약 40분 분량의 후반부는, 전반부에 대한 해설서이자, 감독이 평생에 걸쳐 필리핀인으로 추정되는 엔리케의 삶을 통해 탐구해온 자신의 삶과 생각을 정리한 철학서이자 회고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실천해온 철학적 방법론은 주로 후반부를 통해 다루어진다. 특히 키들랏 감독은 ‘제3세계 영화’의 핵심이기도 한, 불평등의 문제에 주목하는데, 감독이 직접 새로운 언어를 배우다가 스페인 학자 안토니오 데 네브리아의 “언어는 제국의 가장 완벽한 무기다.”라는 문장으로 마무리되는 상징적인 시퀀스는 제국주의의 핵심에 대한 통찰과 함께 탈식민주의의 방법론까지 제시한다. 장난기 많은 동네 할아버지 같던 키들랏 타히믹 감독의 날카롭고 유쾌한 통찰이 다시 한번 번뜩이는 순간이다. < 발릭바얀#1 - 돌아온 과잉개발의 기억 III >은 이렇게 ‘첫 번째 외국인 노동자’를 의미하는 ‘발릭바얀#1’이라는 이 영화의 제목대로 세계사의 중요한 사건 속에 있었던 한 아시아 출신의 첫 외국인 노동자 엔리케의 여정을 통해 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한편 현재 시점으로 만들어진 또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반복되는 역사적 전통과 순환의 문제를 흥미롭게 고찰하고 있다. 또한 과거 식민주의 시대의 기억을 호출하여, 아시아의 관점에서 아시아의 역사를 재해석해 온 35년간의 실천적 과정을 탁월한 통찰력으로 유쾌하게 엮어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키들랏 타히믹 감독의 영화 세계를 집약한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2012년 전주국제영화제를 떠나기 전, 다음 해 디지털 삼인삼색 감독 중 한 명으로 키들랏 타히믹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문득, 그에게 5천만 원의 제작비가 주어졌다면, 그는 < 과잉개발의 기억 >을 어떻게 완성했을까? 여전히 멈추지 않고 진화하고 있는, 올해로 75세가 된 키들랏 타히믹의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떠오른 첫 번째 질문이 바로 이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