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소시스트 2
- 감독
- 존 부어만
- 제작년도
- 1977
- 출연
- 린다 블레어, 리차드 버튼, 루이스 폴리쳐, 막스 폰 시도우, 키티 윈, 폴 헌레이드, 제임스 얼 존스, 내드 베티, 베린다 베티, 로즈 포트폴리오
할리우드가 언제 태어났는가. 라는 질문은 간단한데 이걸 설명하는 건 영화사를 연구하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서로 다르다. 그건 할리우드가 단순하게 지명이 아니라 복잡하게 서로 성격이 다른 자본이 난마처럼 얽혀있는 산업이며, 동시에 하나의 상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할리우드는 그저 호명을 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여기에 스튜디오가 세워지고 실제로 물적인 자본과 인력이 동원되어 세워진 도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할리우드의 탄생에 관한 학설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영화사의 순간을 건드리려는 것이지 산업의 역사를 쓰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마침내 할리우드가 나타났군요, 라고 말해보고 싶어지는 날. 그러므로 내가 기술하는 순간은 할리우드가 자본의 성격을 물적 형태로 드러낸 그 어느 날이다. 당신이 정치경제학의 관점을 갖고 다른 날을 더 중요하게 여길 수도 있다. 혹은 다른 어느 날이 문화적 사건으로서의 탄생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나는 그 견해를 존중한다. 그걸 염두에 두고 읽어주기 바란다. 로스앤젤리스에서 16킬로미터 떨어진 이곳을 할리우드라고 처음 부르게 된 데에는 ‘믿거나 말거나’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19세기 말 부자인 H. J. 휘트니가 아내와 함께 신혼여행을 왔다. 그때 마차를 타고 가던 휘트니는 나무를 끌고 가던 흑인에게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흑인이 “아이, 할리우드”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사실은 “I, hauliing-wood(나는 아주 힘겹게 나무를 끌고 있어요)”라는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이다. 휘트니는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휘트니는 이 지역의 땅 480에이커(1.942제곱킬로미터)를 사들였다. 그리고 자기가 산 땅 이름을 ‘할리우드(성스러운 나무)’라고 불렀다. 그와 비슷한 몇 가지 이야기가 더 있다. 이 지역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1855년, 할리우드에 최초의 집이 지어졌고, 그 곳에서 금광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여기에 우체국이 들어선 것은 1900년이 되어서이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이 지역은 개발되기 시작했다. 1902년에 호텔이 들어섰고, 커다란 2개의 시장이 세워졌다. <데이비드 W. 그리피스> 여기서 영화를 찍은 최초의 중요한 인물은 데이비드 W. 그리피스이다. 그리피스는 뉴욕의 투자자들의 현장 간섭에 질린 상태였다. 그들은 영화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면서 스타의 얼굴이 좀 더 크고 많이 나오기를 원했고, 그저 액션장면만을 원하면서 종종 현장을 방문했다. 그리피스는 그들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곳에 가서 영화를 찍었다. 뉴욕의 투자자들이 오기에 할리우드는 너무 멀었다. 그때까지 영화 제작의 중심지는 뉴욕, 그 다음은 시카고였다. 1910년 단편영화 <오래된 캘리포니아에서>를 찍었다. 그리피스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늘 날씨가 좋았고 (당연한 이야기이다. 여기는 사막 기후를 가지고 있다) 도시가 가깝게 있는데도 거의 개발되지 않았다. 1911년 10월 26일, 네스토어 픽쳐스 컴퍼니는 여기에 최초의 스튜디오를 세웠다. 그 뒤를 따라서 파라마운드, 워너 브라더즈, RKO, 컬럼비아 영화사가 차례로 스튜디오를 지었다. 그리피스의 영화를 보고 세실 B 데밀도 여기서 영화를 찍었다. 하지만 그들은 산발적인 작업이었고, 좀 더 본격적인 작업을 위해서는 더 큰 스튜디오가 필요했다. 좀 복잡한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 영화산업은 뉴욕을 중심으로 재빨리 자본들 사이에서 일종의 트러스트 방식으로 결합하면서 독점자본화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투자자들은 새로운 자본이 이 시장에 들어오기를 원치 않았다. 이 배타적 자본의 방어에 대해서 반(反) 트러스트의 입장을 취한 자본가들이 나타났고 그 중에서 유니버설 매뉴펙처링 코퍼레이션의 대표 칼 럼리는 기존 영화 트러스트들과 싸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다른 지역에서 영화 사업을 다시 시작해야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아마도 20세기 초라서 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오해하면 안 된다. 칼 럼리는 독점자본의 트러스트에 반대한 것이지 영화예술의 융성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영화에서 자본의 집약이라는 방식을 도입하였다. 칼 럼리는 남부 캘리포니아 산 페르난도 협곡을 사들였다. 230 에이커를 사들였고, 여기서 영화 제작과 배급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한 장소로 모아놓고, 영화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노동 집약, 기술 집약. 자본집약의 고전적인 토대를 만들어냈다. 칼 럼리는 1915년 3월 21일 유니버셜 스튜디오 개막식 행사를 치렀다. 사막 위에 지구상에서 가장 큰 스튜디오가 세워지는 날이었다. 17살에 미국으로 이민 온 이 독일소년은 미국에서 자신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 소망이라고 종종 말했다. 어쩌면 이 날 칼 럼리는 진정한 소원을 이룬 것일지도 모른다. 칼 럼리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지만 할리우드는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전 세계 곳곳을 남김없이 지배하는 가장 커다란 영토를 가진 왕국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날 스튜디오 개막식을 구경하기 위해서 2만 명이나 모였다고 한다. 하지만 칼 럼리는 철두철미한 실용주의자였던 것 같다. 칼 럼리는 개막식 연설을 생략했다.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래도 모여든 사람들은 행진을 하면서 미국 성조가를 불렀다고 한다.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스타였던 폴린 부쉬, J. 워렌 커리건, 그레이스 커나드, 프랜시스 포드, 론 채니, 윌리엄 클리포드, 거르투르드 셀비와 차례로 계약했다. 그들은 서명을 하자마자 뉴욕을 정리하고 반대편에 자리한 로스앤젤리스로 옮겼다. 변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세워지자 할리우드 영화는 새로운 차원의 제작 시스템을 발명해나갔다. 데이빗 보드웰은 할리우드의 영화사는 스타나 감독이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도 유례없는 시스템의 역사라고 단언했다. 할리우드는 이제 은행자본을 중심으로 한 뉴욕과 제작을 중심으로 한 할리우드로 이원화되었고, 영화는 마치 공장과도 같은 하나의 시스템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 날은 또 하나의 역사가 시작한 날이 될 것이다.
이제 뻔한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늘어놓는 일은 그만하고, 진짜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 속 먹방 장면이나 감상해보자. 사실 애니메이션 속 먹방은 그 가짓수가 일만 오천육십 개까지나 되니(세어 보진 않았지만 하여튼 엄청 많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밀가루’에 관련된 먹방만 감상해보겠다. 첫 번째 이야기해 볼 애니메이션은 바로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들이다. 나는 사석에서 지브리 스튜디오를 ‘셰프 지브리’라고 부르곤 한다. 마치 감각 있는 셰프가 그날 날씨와 제철재료들을 고려하여 선보이는 ‘오늘의 추천 요리’ 메뉴처럼, 지브리 애니메이션 속의 먹방에서는 작 중 분위기와 상황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요리 메뉴를 선보인다. 먼저, 밀가루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애니메이션인 < 마녀배달부 키키 >를 감상해보자. <마녀배달부 키키>는 꼬마 마녀 키키가 빵 택배 일을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소소한 소동을 담은 따뜻하고 귀여운 성장 드라마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키키가 화덕에서 파이를 굽는 부분인데, 그 파이의 모양이 적잖이 낯설었다. 생선 모양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청어 파이’였기 때문이다. 이 청어 파이는 모두에게 몹시 충격적인 비주얼이었는지, 지금도 청어파이, 즉 생선 파이는 영국의 괴랄한 미식 문화를 조롱하는 의미로 통한다. 이 애니메이션에서도 셰프 지브리의 탁월한 센스를 엿볼 수가 있다. 생선 파이는 사실 역사가 오래된 영국 전통 요리다. 신선한 생선을 구하기 어려운 영국의 서민층들이 조리해먹은 데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여하튼 영국 서민들의 전통 홈 푸드인데, 현재는 여기저기서 푸대접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마녀배달부 키키>의 청어 파이 역시 마찬가지 신세다. 손녀의 파티에 따뜻한 파이를 보내주고자 했던 할머니가 오븐이 고장 난 상황에서, 오래된 화덕을 수리하는 고생(물론 고생은 키키가 다 하기는 하였지만 어쨌든 키키에게 넉넉한 금전적 보상을 해주었지 않은가?)을 마다하지 않고 정성껏 구워낸 것이지만, 신세대 손녀에게는 문전박대를 당한다. 셰프 지브리의 특기인 ‘상징’이 빛나는 대목이다. 키키의 눈빛을 보면 맛있게 먹겠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지만… 움직이는 성안, 하울의 식사는 어떨까? 베이컨은 미국 서부개척시대에 개척자들의 필수아이템이었다. 여행 작가이자, 개척자인 랜스포드 헤이스팅스는 1845년, 오리건을 향하는 이민자들에게 150파운드(약 68kg)의 베이컨을 필수적으로 챙겨가라고 조언했다. 개척자들은 매일 아침으로 커피와 베이컨을 먹고, 저녁엔 베이컨 기름을 빵이나 비스킷에다 발라 먹었다. 1) 그 유명한 베이컨&달걀의 유행은 사실 하울이 원조가 아니다. 그 역사는 192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다이어트가 필수덕목인 이 시대에야 고열량인 이 조합은 사실 죄책감까지 불러일으키지만, 1920년대에 ‘베이컨&달걀’은 아주 ‘건강하고 가성비 좋은’ 아침식사였다. 그야말로 피로와 긴장에 찌든 여행자들에게 걸맞은 고영양 메뉴인 것이다. 게다가 셰프 지브리는 베이컨 기름으로 모든 조리를 해결한다. 올리브유나 향료같은 많은 부재료들을 챙겨 다니기 어려운 여행자들에게 아주 요긴한 재료다. 다만 계란 후라이를 저렇게 예쁜 ‘써니 사이드 업’으로 만들려면 약불로 인내심있게 구어야 하는데, 저렇게 화력이 센 불에 조리하니 타지는 않을지 걱정되었다. 뭐, 보기 좋기는 했다. 이 부분에서 서론에서 말했던 애니메이션 속 먹방 장면의 장점이 빛을 발한다. 왜 밀가루 이야기를 하다말고, 고지방 고단백 메뉴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하겠지만, 사실 내가 정말로 주목하고 싶었던 것은 베이컨과 달걀과 함께 식탁 위에 나란히 놓여있던 빵, 깜빠뉴다. 절대 사심으로 베이컨&에그를 끼워 맞춘 것이 아닙니다. 사실 약간 그래요. 뭐 어쨌든… 이 고열량, 고단백의 조합의 목 멜 듯한 기분은 탄수화물이 녹여준다. 깜빠뉴는 오래 보관하기 쉽고, 재료가 단순하고 맛이 담백하여 어느 메뉴와도 잘 어울린다. 식사빵이라는 카테고리답게 묵직하고 든든하다. 여러모로 먼 길을 떠날 때 아주 적합한 메뉴다. 사실 ‘베이컨과 에그 게다가 단순 탄수화물인 빵’은 비만 인구 상승에 힘을 실어줄 조합이기는 하지만,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고 막강한 적과 싸워야하는 하울 무리에게는 더없이 걸맞은 메뉴였다. 이번엔 일본을 벗어나, 영국의 훌륭한 스튜디오로 넘어가 보자. 아드만 애니메이션은 <월레스와 그로밋> < 치킨 런 > < 플러쉬 > < 아더 크리스마스 > < 허당 해적단 > < 숀더쉽 > 등 정말 재미있는 클레이 애니메이션을 대거 제작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다. 아드만의 애니메이션들은 진짜로 웃기고, 재밌다. 그리고 먹음직스럽다. 클레이 애니메이션이다 보니, 먹방으로써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의 장점들을 고루 갖출 수 있다. 만져질 것처럼 생생하면서도 오버액션도 ok. 멋진 일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월레스와 그로밋>을 살펴보자. 월레스는 발명가이자 빵집사장이다. 그로밋은 그가 기르는 강아지. 하지만 이 강아지 그로밋이 월레스보다 약 두 배가량 현명하다. (하긴 역마살 붙은 것 마냥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동네를 휘젓는 이웃집 개도 집만 잘 찾던데, 10년 산 동네에서 한번 낯선 길로 가보자고 했다가 돌아오는 길을 한참 헤맸던 내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 둘은 아무리 바빠도(사실 별로 바빠 보이지도 않지만) 늘 시간을 내어 치즈&크래커와 홍차를 즐긴다. ‘빵이냐 죽음이냐’ 편에서, 파이엘라는 늘 정시에 티타임을 즐기는 월레스의 습관을 이용하여 살인을 계획할 정도로 그들에게 티타임은 무척 중요한 의식이다. 사실 이런 문화는 영국인이라면 아주 익숙하다. 영국인들의 티타임 사랑은 하루 이틀이 아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도버해협을 건너는 기차 안에서도 전용 도기로 애프터 눈 티를 즐겼다고 하며, 영국의 유명한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환상의 세계에서도 티타임은 빠지지 않는다. 이런 영국인의 홍차사랑에 대한 결실은 현재 티타임에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찻잎들의 이름에서도 드러난다. 찰스 그레이 백작의 이름을 딴 ‘얼그레이’,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같이. 영국이 구움 과자 분야에서는 두각을 나타내는 것도 이 ‘차사랑’에 원인이 있다. 음식문화가 취약하다고 정평이 난 영국도 비스킷, 스콘 등 티타임에 곁들일 메뉴를 개발하는 데에는 꽤나 열정적이었던 모양이다. 역시 인류 최고의 발명가는 사랑이라고 했던가. 월레스와 그로밋이 여기에 곁들이는 비스킷 역시 지극히 영국적인 과자다. 비스킷은 1588년 스페인과 영국이 영불해협에서 맞붙었던 전투에서 영국을 승리로 이끈 숨은 주역이었다. 해전 시 배에 실을 수 있는 식량은 한계가 있어 칼로리가 높지만 가볍고 부피가 작아야 했는데, 비스킷이 그에 딱 걸 맞는 메뉴였다. 영국군은 최대한으로 수분을 없앤 딱딱한 비스킷을 있는 대로 보관해 둔 덕에 굶주릴 일없이 전쟁에 임할 수 있었고,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쟁을 기점으로 세계최강이라 자부하던 스페인 함대는 몰락했고, 영국은 세계 주도권을 가지게 되었다. 2) 어쨌거나 월레스와 그로밋의 티타임은 달로 향하는 우주 비행선 안에서도 계속되었다. 이 용감한 개척자들은 출발하기 직전까지 티타임 도구들을 챙기기 바쁘다. 바삭하고 퍽퍽한 비스킷에 부드러운 치즈를 곁들인 티푸드에 맛있는 홍차, 그리고 오래된 친구와 즐기는 티타임이라니, 우주 한가운데 더없이 영국적인 풍경이다. 위 거론한 예시들 말고도 애니메이션 속 먹방에 대한 이야기는 밤새도록 나누어도 모자람이 없다. 언젠가 또 기회가 닿는다면 < 너의 이름은. >의 팬케이크 이야기나, < 검정고무신 >의 크림빵에는 생크림이 없다는 이야기로 시작되는 크림의 비밀 등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 싶다. 애니메이션 속에도 현실 세계 만큼이나 먹음직스러운 이야기들이 가득 숨어있다. 행복한 이야기다. 먹는 이야기 좋아하는 사람답게 나의 첫 데뷔작도 레진코믹스에서 연재했던 음식 만화(<삶은 토마토>)였다. 주로 음식을 먹으며 나누는 대화나 상황들이 스토리의 전부다. 심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사는 게 별건가 싶다. 우리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밥먹기’를 원하며,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들이 ‘식사자리’에서 거론된다. 나는 애니메이션 속 등장인물들이 먹고 마시는 게 좋다. 등장인물들이 아무리 진중하고 긴박한 상황에서도 허기짐을 느껴, 혹은 기운이 달려 무언가를 먹고 마시는 순간 거리를 두고 감상하던 이야기들이 삶의 차원으로 넘어온다. 게다가 음식 만화를 연재하며 먹는 장면을 그리는 것이 즐겁지만, 번거로운 일임을 뼈저리게 경험했던 사람으로서 스토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빼버려도 상관없는 먹방 장면을 굳이 삽입한 애니메이션 감독에게는 인간적인 애정을 느끼기까지 한다.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들이 더 먹고 마셨으면 좋겠다. 더 많이, 더 맛있게, 더 오버액션으로 먹어주면 좋겠다. 언젠가 여러분, 제가 엄청나게 맛있게 먹는 애니메이션을 만들 거 거든요? 얼마나 맛있게 먹나 한번 보러와 주세요. 어설픈 글을 읽어줘서 고맙습니다. 어쨌든, 나도 난생처음 칼럼이라는 걸 써본 기념으로 오늘은 맛있는 걸 좀 먹어야겠다. 1)『아침식사의 문화사(Breakfast: A history-Heather)』 (헤더 안트 앤더슨 저, 니케북스, 2016) 참조 2)『양과자 세계사』(요시다 기쿠지로 저, 비앤씨월드, 2011) 참조
켈리 레이차트는 가장 소박한 형식으로 동시대 미국인의 삶을 둘러싼 정치, 사회적인 맥락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있으며, 지역의 고유한 풍광 속에서 삶을 버티다가 무뎌지고 바스러지는 인물의 현재를 세심하게 관찰한다. 그녀의 6번째 장편영화인 < 어떤 여자들 >(2016)은 전작을 관통했던 그만의 인장도 찾을 수 있지만, 이 영화가 스케치한 몬태나의 풍경과 여성들의 삶은 ‘오리건 3부작’보다 쓸쓸하고 스산하며 적막하다. 현재 직면한 문제들과 씨름하던 인물들이 이 영화에서 굳게 입을 다문 채 저 멀리로 시선을 던지거나 묵묵하게 계절을 견뎌가는 숲과 나무, 하늘과 구름이 더 이상 사람들의 삶에 포함되지 않으려는 것처럼 저 멀리 떨어져 존재한다. 그들은 이미 사라진 것들의 흔적으로 남거나 곧 사라질 것처럼 고요하고 삭막하다. 레이차트의 고유함은 로컬, 독립, 여성이라는 키워드로 요약될 수 있지만 그녀의 온화하고도 단호한 시선은 이러한 범주에 갇히지 않는다. ‘오리건 3부작’은 지역의 상황을 통해 미국의 동시대적 문제를 진단하는 통찰력을 지니고 있고, 독립적인 제작형태를 통해 미국인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맥락을 주류의 흐름과 다른 각도에서 접근한다. 그녀는 1960년대의 시대정신인 자유와 해방이라는 가치와 폭력에 대한 저항정신을 잃어버린 중년 남성이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찾는 것이 가능한지, 이미 사라진 세대를 복원하려는 노력이 가치 있는 것인지, 변화하는 세상에서도 온전하게 지켜질 사람 간의 예의가 존재하는지 탐색한다(< 올드 조이 >(2006)). 젊은 여성이 일자리를 찾아 알래스카로 이동하던 중 자동차가 고장 나고 그녀의 개가 사라지는 사건을 겪게 된다. 낯선 공간에 남겨진 그녀는 불안과 대면해야 하며 알래스카에서 맞이하게 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웬디와 루시 >(2008)). 새로운 삶을 찾아 서부로 이동하는 개척민들이 길을 잃고 사막을 통과하게 된다. 황량하고 피폐한 노정에서 그들이 만난 인디언과 폭력적인 길잡이를 통해 서부라는 지형과 남성의 전유물이 된 서부극을 그녀만의 시선으로 탐구한다(< 믹의 지름길 >(2010)). 레이차트는 공간을 통과하는 행위에 주목함으로써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은밀하게 숨겨져 있거나 제한적인 관심사의 바깥에 버티고 선 삶의 풍경을 탐색하고 인물들의 노정을 통해 더 나은 삶의 가능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유하도록 제안한다. 특히 미국인의 꿈과 이상이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좌절되는가라는 질문을 짊어진 여성들이 당면한 문제들은 미국이라는 국가로부터 비롯된 은근하고도 끈질긴 불안을 거쳐 악몽이 되어간다. 그녀의 인물들은 예기치 못한 순간, 낯선 곳에 머물러야 하고 목적지로 향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서 하루하루 버텨내야 한다. 우리는 사소해 보이지만 살기 위해 당장 필요한 것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인물과 마주하고 우회로조차 허용되지 않는 그들의 절박한 현실과 대면하게 된다. 그들이 당면한 삶의 조건은 영화 바깥의 우리와 동일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점점 줄어드는 돈, 일자리를 찾는 것, 먹을 것과 마실 물을 확보하는 것, 안전하게 잠들 장소, 부당한 합의금에 대한 소송처럼 실질적인 문제도 있다. 또 무자비하고 무분별한 자본의 횡포와 실용주의적 사고에 맞서 환경을 구하는 것, 신념과 실천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태도에 대한 질문, 9.11 테러-미국이 벌인 전쟁-2008년의 금융위기와 같은 부시 정권의 악행과 무능함의 폭로에 이른다. 레이차트는 미국인들을 위협하는 정치적 상황과 경제적 위기에 대한 비판을 이어가면서도 개인의 내밀한 삶을 작동시키는 동력을 꾸준히 모색한다. 그녀의 영화는 지역의 풍광 속에 새겨진 당대 삶의 구체적인 문제들과 더불어 세밀한 삶의 순간으로 인해 아름다움과 풍부함을 선사한다. 처음으로 친구가 생길지 모른다고 생각한 소녀의 빛나는 눈동자, 사랑하는 개를 낯선 곳에 떼어놓을 수밖에 없던 웬디의 절망스런 손짓, 낯선 곳에서 만난 경비업체 직원이 건네준 꼬깃거리는 지폐, 깊은 밤 적막한 소도시를 유유히 활보하는 말의 우아하고도 힘찬 발걸음, 개척시대 학교 건물에서 떨어져 나온 사암 더미, 특별하거나 진지하지 않은 하루를 담은 편지, 목동을 따라 뛰어다니는 사냥개의 활기찬 모습은 일상 속에 감춰진 비범하고 고귀한 순간들이기 때문이다. 레이차트의 영화가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건네는 것은 겸허함과 친밀함을 바탕으로 한 관계의 풍요로움(< 올드 조이 >의 두 친구, < 웬디와 루시 >의 두 존재, < 믹의 지름길 >의 강직한 신념을 지닌 부부)도 있지만 한편으로 실패한 여정과 균열되는 관계(오랜 친구인 중년 남성들이 온천여행을 떠나지만 그들의 삶은 잃어버린 지난날에 대한 향수조차 허용되지 않을 만큼 불안정하고, 일자리를 찾아 알래스카로 가던 중 사랑하는 루시를 잃어버리고 깊은 절망과 두려움에 빠진 웬디는 유일한 이동수단인 차마저 잃게 된다. 믹과 인디언이라는 두 길잡이를 동원해서 신앙공동체를 세울 약속의 땅을 찾아가는 순례자 가족에게 닥친 공포와 두려움의 확산은 서부라는 공간이 배태한 이주와 정착이라는 근원적인 두려움을 바라본다. <어둠 속에서>(2013)는 환경을 위해 댐을 폭파시키려다 실패한 젊은 운동가들의 회의와 좌절을 통해 머릿속에서 생산되는 신념과 육체를 통해 실천되는 행위에 대해 질문한다. 하지만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은 희박하기만 하다.)에서 파생된 곤경도 존재한다. 무엇보다 풍경과 인물에 대해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는 레이차트의 완고한 태도가 중심에 놓여 있다. 그렇기에 그녀의 인물들은 타인과의 관계가 회복되거나 당면한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라는 불가능한 꿈에 대해 전력을 다해 거부한다. 불안과 절망을 이겨낼 수 없을지라도 삶은 이어질 것이며, 삭막한 여정에서 친밀한 존재와 교감하거나 이별할지 모르고, 그리하여 인간의 삶이 사막의 모래알갱이처럼 바람에 흩어져 흔적으로 남게 된다는 사실 앞에 그들은 솔직하고 겸허하다. 오랜 시간 묵묵히 존재하는 풍경과 대면한 인간의 유한성을 수용하고, 미완의 삶을 살고 있는 존재가 당도하고자 애쓰는 노정을 끈질기게 응시하는 레이차트의 카메라를 통해 동시대 서부의 풍광과 세밀한 삶의 기록이 조우한다. < 어떤 여자들 >은 네 여성의 이야기가 느슨하게 연결되기 때문에 그녀들이 어떤 삶을 꾸려나가고 어떤 태도로 살아가고 있는지,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불화를 어떻게 대하는지, 서부라는 풍경이 그들을 어떻게 품고 있는지에 집중한다. < 믹의 지름길 >이 서부의 횡단기라면, 이 영화는 서부를 맴도는 인물이 그들을 에워싼 풍경을 응시하거나 회피하는 시선으로 건네받는 풍경과 역사에 대한 사색이다. 그런데 응시의 연결망이 너무 쓸쓸하고 음울해서 서부라는 풍경과 그 시대에 대한 종언처럼 느껴진다. 개척기 서부를 통과했던 이주민과 오랜 시간 땅의 주인이었던 인디언이 사라진 곳에 사암 덩어리나 황야를 달리는 철길, 드문드문 남아 있는 목장이 서부임을 드러낸다. 정착지를 향해 걷는 고된 행렬, 카우보이와 악당들이 허다하게 뿜어내던 총성, 달리는 말들의 격렬한 운동과 추격은 차갑고 어두운 겨울이라는 계절, 마을을 에워싼 산, 고립된 목장, 길게 뻗은 도로에 흡수된 것처럼 보인다. 레이차트는 퇴적물이 되어버린 서부, 이미 죽어버려 생동하는 힘이 사라진 서부를 사색하기 위해 풍경을 기억하고 자신의 삶으로 기입하는 자들(노인과 인디언 소녀), 풍경과 무관하게 살아가거나(리빙스턴에 거주하는 중년의 변호사와 법대생), 서부를 소유하려는 자(집을 지으려는 여성)를 등장시킨다. 그렇기에 <어떤 여자들>은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는 겨울의 황량한 풍경을 관찰함으로써 경관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모습을 응시하도록 인도한다. 그리고 풍경에 기입된 서부의 원초적인 기억과 사라진 존재들을 불러들인다. 어쩌면 이 영화는 인물들의 세밀한 표정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보다 잔뜩 흐린 하늘과 낮게 깔린 구름,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들, 바싹 말라버린 목초지, 멀리 보이는 눈 덮인 산이 주인공임을 증명하는 것 같다. 척박한 풍경과 고된 인물의 삶을 드러내는 방식을 살펴보자. 이 영화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미묘하게 어긋나거나 고립되어 있으며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친구라고는 말이나 개가 전부인, 삭막한 겨울을 보내는 인디언 소녀나 골칫덩어리 의뢰인을 설득하지 못하는 중년의 변호사, 대출금을 갚기 위해 왕복 8시간을 운전해야 하는 법대생, 고즈넉한 숲에 집을 짓기 위해 개척시대의 사암이 필요한 일 중독자의 겨울은 반복되는 노동과 고립된 생활, 소원에 대한 과도한 집착, 무기력함과 공허함, 빈곤에 대한 두려움과 피로에 잠식되어 있다. 변호사는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에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 그녀의 관심은 의뢰인의 무리한 요구로부터 벗어나는 것뿐이며, 잠이 부족한 법대생은 밤에만 등장하기 때문에 풍경(과 사람)으로부터 배제되고 고립된다. 숲속에 집을 지으려는 여성이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에도 그녀가 자연을 응시한다기보다 사이가 틀어진 사춘기 딸과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못하는 남편과의 단절이 강조된다. 조깅을 하거나 숲길을 걷고 집이 지어질 장소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그녀조차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집의 미래를 떠올릴 뿐, 현재 그녀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에겐 눈을 감고 있다. 그녀의 관심사는 오직 이웃 노인이 소유한 사암뿐이고, 본고장에서 나는 돌로 집을 짓겠다는 소원조차 소유와 과시, 약탈의 행위로 변질된다. 그녀는 노인이 애틋하게 집과 땅의 역사에 대해 회고할 때에도 그저 사암을 가져가라는 허락만 요구할 뿐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기어이 사암을 싣고 가던 날, 노인이 집 안에서 물끄러미 바깥을 바라보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뭉클하면서도 절망적인 선언처럼 다가온다. 집의 형태를 갖춘 가족의 텐트/노인 홀로 사는 미완성의 집, 오랜 시간 녹지 않았을 눈이 더께로 앉은 산을 배경 삼아 서부의 무덤처럼 놓인 사암더미/여인의 텐트 근처에 차곡차곡 정리된 사암, 필요에 따른 거래/증여의 행위 끝에 마치 무덤에 갇힌 왕의 미라처럼 보이는 노인의 끈덕진 응시가 놓여 있다. 개척기의 서부, 마을이 처음 만들어질 때 교회보다 먼저 지어진 학교의 흔적만 남은 돌무더기가 치워진 곳은 노인이 거주한 지 50년 넘게 지켜온 터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레이차트의 카메라는 노인의 집을 멀리서 지켜보는데, 마치 개척기의 역사가 스며든 대지와 몬태나의 스산한 풍경이 노인의 응시와 더불어 사라질 것임을 알면서도 제자리를 지키는 예언자 같다. 비록 기억하고 응시하는 행위자가 사라질지언정 레이차트는 인물보다 먼저 시선을 거두지 않는 것만이, 그들의 사라짐까지 목도하는 것이 서부와 그곳에서 살았던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노인이 자신의 죽음과 서부의 소멸을 염려하는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 어떤 여자들 >에서 가장 서부와 닮아 있는 사람은 목장 소녀이다. 그녀는 미국이라는 국가보다 더 오랫동안 서부와 함께 살아온 존재이자 삶의 터전으로써의 서부와 능동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즉 목장, 말, 카우보이로 대표되는 서부를 공유하고 있으며 원주민인 선조들의 삶을 기억함으로 인해 온전히 풍경에 속해 있는 존재가 된다. 소녀는 우연히 학교법 강의에 참석하게 되고 법대생에게 각별한 감정을 느낀다. 마구간과 목장 숙소를 규칙적으로 오가면서 일하는 그녀의 단조로운 삶에 파장이 일기 시작하지만, 피로에 찌들고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봐 두려운 법대생은 인사도 없이 강의를 그만둔다. 소녀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리빙스턴으로 향하고 도시의 밤거리를 걸으면서 카우보이모자가 진열된 상점을 구경하고 식당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을 쳐다본다. 결국 법대생을 찾게 되지만, 정작 그녀는 당혹스러워하며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드러낸다. 자신을 기다리는 유일한 존재인 동물들에게로, 자신이 속한 서부로 돌아가던 길에 졸음을 이기지 못한 소녀의 차가 스르륵 미끄러지다가 마른 목초지에 멈춰 선다. 이 움직임은 중년의 변호사가 쇼핑몰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인디언들의 전통춤 공연과 대비를 이룬다. 원주민이었던 인디언들의 삶이 한낱 구경거리가 되면서 도시의 상품으로 전락했고, 그렇게라도 연명해야 하는 삶의 스산함은 쇼윈도에 진열된 모자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하지만 기념품이나 상징에 머물기를 거부하는 소녀는 야생의 삶에 대한 열망과 자신에게 충실하겠다는 의지를 아직 지니고 있기에 존귀하다. 어쩌면 생애 처음으로 도시를 찾았을지 모를 소녀의 방문은 실패한 여정이었어도 깊은 감동을 남긴다. 백인 가족의 단란한 식사를 보면서 미소를 짓거나 우아하고 당당한 자세로 말을 타고 활보하는 모습은 정성껏 말의 갈기를 매만지는 손길과 말과 동일한 리듬으로 움직이는 그녀의 발, 목초지를 가로지르는 생생함과 더불어 그녀의 존엄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레이차트는 오랜 시간 거주했던 선조들의 땅을 떠났다가 씁쓸한 감정을 지닌 채 돌아오는 소녀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그녀의 자동차가 갓길로 빠지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지만 다시 소녀의 얼굴로 시선을 돌리지 않는 것은 여행 이후 소녀의 변화 여부를 확인하는 것보다 중요한 사실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소녀는 아직도 단단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목장에는 그녀와 겨울을 함께 보내는 동물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 그녀의 의지로 말을 길들이거나 돌보는 행위가 그녀를 지탱할 것이며, 그녀를 품고 있는 서부 또한 소녀의 삶을 물끄러미 바라볼 것이기 때문이다. 레이차트는 우리에게 주어진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문제를 고심한다. 일상을 영위하는 표면 아래 숨어 있는 것 같지만, 먹고 마시고 잠을 청하거나 노동하는 매 순간 첨예하게 개입된 정치적 사안은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도는 과정에 놓인 인물들의 제스처와 표정, 불온한 시대에 잠시나마 온기를 더하는 숨결, 인물들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미국의 풍경들 속에 깊이 스며든다. 나아가 < 어떤 여자들 >은 서부의 지형과 지리적인 풍경에서 서부라는 역사와 영화적 기억을 덧대어놓는다. 그것은 서부와 이별했던 남자들, 사막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 사막을 달려 멀리 사라지는 기차와 같은 회고의 대상에 머물기를 거부한다. 위대한 풍경이 된 서부는 적막할지언정 그녀들의 삶을 지켜보고 있으며 사람들은 저마다의 서부를 되살리거나 망각한다. 하지만 사라짐에 대해 무심한 응시가 되었건, 끈질기게 나와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임을 알고 있는 시선이건 서부를 떠돌던 그녀들의 고단하고 피로한 삶을 향하고 있다. ‘개인의 경험과 삶의 감각이 지닌 힘을 믿으며, 작고 사소한 것들로부터 시작되는 삶의 가치를 탐색하는 것이 영화가 해야 하는 일’임을 실천하는 그녀의 영화가 아름답고도 위대한 것은 미완의 시간을 견디면서 목적지에 도달조차 하지 못한 인물들에게 고집스럽게 머물러 있는 그녀의 시선 때문이다. ‘어떤’ ‘여자들’이 살아내고 응시한 것은 정직하고 윤리적이며 풍경에 대해 겸손하고 솔직한 레이차트를 향하고 있으며 인물들이 머무는 공간에 깃든 과거와 현재를 대면하도록 인도한다. 그들이 사라진 존재들과 생성되는 것들에게 통감할 때 정치, 사회적 표명과 내밀한 감정이 일체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