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편지
- 감독
- 리슨투더시티
- 제작년도
- 2017
- 출연
- 윤경자, 공기, 홍기탁, 차광호, 박준호, 임경택, 치명타, 전진경, 임재춘, 김경봉, 김우식, 연대자들
지난 6월 21일, 로빈 하디의 < 위커맨 >는 개봉 50주년을 기념하는 4K 복원판이 영국에서 첫 월드 프리미어를 가졌다. 이후 미국 전역을 비롯한 각 국가 개봉에 이어 10월에는 현존하는 본편 3개 버전과 방대한 서플먼트 그리고 폴 지오바니와 밴드 마그넷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을 포함한 5 디스크 DVD 박스세트가 출시되었다. 동시에 <위커맨: 공식 스토리>라는 신간도 함께 출판되면서, <위커맨>은 올해 복원된 고전 중에서 가장 활발한 커리어(!)를 이어가는 히트작이 되었다. 이미 개봉 40주년을 기념한 디지털 복원판이 한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에서 상영되었던 전력을 떠올려보면, 새로운 4K 복원판에 대한 식지 않는 관심은 진정한 컬트 고전으로서 <위커맨>이 가진 위상을 다시 한번 증명해 보인 셈이다. 요란스러운 상찬과 제사에 불구하고, 컬트의 지위를 가진 대부분의 걸작들이 그러하듯 <위커맨>은 시작부터 개봉까지 쉬웠던 순간이 하나도 없었던 고난의 영화였으며, 바로 그런 이유로 말 그대로 복원과 부활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위커맨>은 < 발자국 >(Sleuth, 1972)로 유명한 작가 안소니 샤퍼가 제작사 ‘브리티시 라이언’의 당시 대표를 맡고 있던 제작자 피터 스넬 그리고 해머의 드라큘라 재생산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 배우 크리스토퍼 리와 1967년 출간된 데이빗 피너의 소설 ‘의식(Ritual)’의 영화판권을 공동으로 구입하면서 시작되었다. 개발에 난항을 겪던 프로젝트는 당시만 해도 ‘듣보'였던 로빈 하디가 의기투합하면서 주말동안의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순식간에 하우이 경사를 중심으로 한 제대로 된 시나리오로 전개되었다. 완성된 시나리오에 만족한 스넬은 ‘저예산으로 제작할 것'이라는 조건을 붙이고 비로소 <위커맨>은 1972년 가을 크랭크인에 들어갔다. 촬영은 약 7주 가량 25개 스코틀랜드 지역 곳곳에서 진행되었지만, 정작 로케이션 중에서 진짜 섬은 한곳도 없었다. 로빈 하디는 공간의 통일성을 위해 이곳 저곳에서 찍은 장면들을 패치워크하듯 이어붙이는 작업이 오히려 흥미로웠다는 후일담을 전하기도 했으나, 가을의 스코틀랜드에서 5월 초여름의 풍경을 담아야 한다는 미션과 더불어 로케이션 중간중간 출몰하는 근대와 문명의 흔적을 피하는 촬영은 결코 쉽지 않았다. 예산 부족과 고된 촬영, 추위와 이어지는 과음으로 하우이 역의 에드워드 우드워드는 발가락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고, 윌로우 역의 브릿 에클랜드는 촬영 내내 우울증에 시달린 나머지 이후 완성된 영화를 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에클랜드는 2023년 5월 <위커맨> 50주년 특별행사에 참석하여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100분이 넘는 길이로 영화는 완성되었지만 <위커맨>의 개봉은 요원했다. 20세기 초중엽 에드가 월리스, 알렉산더 코다, 캐롤 리드 등 영국영화의 대표주자들에 의해 전성기를 맞았던 브리티시 라이언은 만성 적자에 시달리며 계속해서 주인이 바뀌던 상황이었는데, <위커맨>이 완성된 시점의 사장인 마이클 딜리는 완성본을 싫어한 나머지 영화의 개봉을 거부했다. 제작자 스넬은 딜리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칸 영화제에 완성본을 들고 가 쇼케이스를 진행하는 동시에 호텔 로비에 거대한 위커맨을 세워 홍보에 열을 올렸지만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이때 <위커맨>을 본 영화 관계자 중에는 로저 코먼도 있었는데, 드라이브 인 상영에 좋겠다고 판단한 코먼은 편집 의견을 전달하기도 했다. 결국 브리티시 라이언은 영화를 87분으로 대폭 가위질해서 먼저 개봉하여 별 재미를 보지 못한 니콜라스 로에그의 < 쳐다 보지 마라 >(Don’t Look Now, 1973)와 동시상영하는 조건으로 영화의 개봉을 허가했다. 크리스토퍼 리는 안면이 있는 모든 평론가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해서 좌석을 빼두는 등 공을 들이기도 했다. 20세기 브리티시 호러의 대표작인 두 편의 영화가 동시상영이라는 비참한 대우를 받았다는 비극인지 아니면 두 편을 동시에 본다는 엄청난 기회였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당시 관객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처참한 박스오피스 결과를 통해 드러났다. 어떻게든 제작비를 환수하려고 애썼던 브리티시 라이언은 로저 코먼을 비롯, 미국 배급을 위해 갖은 애를 썼지만 결국 미국 배급권은 워너 브러더스에게 헐값에 넘어갔다. 워너는 개봉 전 테스트 상영을 했지만, 버라이어티를 비롯 지면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소규모 상영에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덕분에 <위커맨>은 순식간에 시네필 그리고 영화학도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볼 수 없는 걸작'이 되면서 컬트의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6년 할리웃으로 와 각본작업을 하던 로빈 하디는 <위커맨>의 부활(!)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워너 브러더스는 이미 미국 배급권을 단돈 2만불에 아브락사스라는 소규모 회사에 넘겨버린 상태였고, 하디는 아브락사스를 설득해서 난도질당한 <위커맨>의 부활 작업의 허가를 얻었다. 하디는 바로 피터 스넬, 앤드류 샤퍼 그리고 크리스토퍼 리에게 연락을 취했고, ‘위커맨 4인방'은 가위질 이전의 롱 버전 프린트 사냥에 나섰다. 개봉버전과 로저 코먼에게 견본으로 보냈던 오리지널 프린트를 찾아낸 하디는 결국 1977년 가을 미국에서 첫번째 디렉터스 컷이라고 할 수 있는(현재는 ‘미들 버전’이라 불리는 버전으로 4K 복원 상영본인 ‘파이널 컷’의 원형이 된 판본이다) 92분 버전의 <위커맨>이 상영되었고 결과는 큰 성공이었다. 이후 70년대와 80년대를 거쳐 <위커맨>은 숏 버전과 미들 버전이 번갈아가며 TV와 홈비디오 시장을 통해 배급되었지만, 본격적인 복원은 2001년 영화의 세계배급권을 갖게 된 스튜디오카날에 의해 시도되었다. 이 과정에서 처음 완성된 100분이 넘는 오리지널 프린트는 찾지 못했지만 현존하는 프린트와 텔레시네 버전들을 조합한 99분 버전의 ‘디렉터스 컷’이 DVD로 출시되었다. 스튜디오카날은 <위커맨>의 복원을 위해 프린트 사냥을 멈추지 않았는데, 하버드대 필름보관소에서 92분 버전의 필름 4K 버전을 입수하면서 제대로 된 디지털 복원의 신호탄을 쐈다. 로빈 하디는 페이스북에 올린 비디오 메시지를 통해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영화의 디지털 버전을 복원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는데, 복원 과정에서 하디는 섬머아일로 가기 전 경찰서 등 하우이의 일상 장면을 포함, 디렉터스 컷에 삽입되었던 장면들을 제외한 92분 버전의 복원에 동의하고 이 버전은 2013년 크리스토퍼 리가 평생공로상을 수상했던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이 버전이 올해 4K 복원판 상영으로 이어진 이른바 ‘파이널 컷'으로, 국내에서는 지난 7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국내 관객을 처음 만났다. 영생을 믿는다며 부활을 울부짓었던 하우이의 희생 덕분이었는지, 아이러니하게도 불굴의 4인방의 <위커맨>은 부활에 성공하여 영생을 얻은 셈이다. 영화만큼이나 흥미진진한 영화의 부활 서사때문에라도 <위커맨>은 수많은 관련서와 팬매거진을 거느린 컬트 고전이자 아리 에스터 등 현대의 감독들에게도 영감의 원천이 된 걸작이지만, 역경을 딛고도 부활할 수 있었던 영화의 저력은 전무후무한 전복적 상상력에서 나온다. 지난 10여년 간 글로벌 호러의 지배적인 서브장르로 급부상한 포크 호러 열풍과 더불어, <위커맨>은 < 심판 >(Witchfinder General, 1968), < 사탄의 피부 >(The Blood on Satan’s Claw, 1971)과 포크 호러 장르의 ‘불경한 삼위일체'라는 명성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 중 <위커맨>은 근대 서구 문명의 이성과 기독교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과 완전한 전복을 스크린에 구현했다는 점에서 다른 두 편과 궤를 달리한다. 엄격한 교리와 도덕률 그리고 사법제도의 규칙으로 무장한 채 아버지의 법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근대적 남성주체 하우이는 로완 모리슨의 실종을 추적하는 탐정으로서도, 순결한 총각으로서도, 무엇보다도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도 성공하지 못한 채 예상치 못한 결말을 맞이한다. 섭리라는 말로 수렴될 수 없는 자연의 동학을 긍정하는 섬머아일에서 섹스와 남근, 수확과 재생산은 하우이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타자의 질서를 구성한다. 그 안에서 당혹과 충격 그리고 어이없음과 무력함을 넘나들며 심리적 폐소상태에 놓인 하우이의 클로즈업과 영화의 절정을 향해 치닫는 메이데이의 현기증나는 의식은, 종교적 이성과 원시적 이단이라고 재단된 양립할 수 없는 두 질서 사이의 근본적인 충돌을 만들어낸다. ’이 영화는 한편의 블랙 코미디’라고 너스레를 떠는 로빈 하디의 코멘트에 충분히 고개가 끄덕이면서도 왠지 영화의 강열도를 축소시키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유다.
순전히 당나귀 때문이다. 내가 다른 선택지들을 제치고 < 이니셰린의 밴시 >(마틴 맥도나, 2022)를 보게 된 이유 말이다. 물론 당나귀 때문이라면 < EO >(예지 스콜리모프스키, 2022)를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EO>는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만 동물을 재현해온 관행을 넘어서 당나귀가 인간의 자리에 놓인 실사 영화라는 점에서 궁극의 동물 영화였다. <이니셰린의 밴시>와 비교해도 <EO> 쪽이 옳고 급진적인 태도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당나귀 영화에서 보고 싶었던 건 액션 배우나 로드무비 주인공이 당나귀로 대체된 모습은 아니었다. 고된 여정에 오른 캐릭터를 공동으로 연기한 당나귀 배우들을 보면서 이들에게 평범한 가축으로 남아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 심경이 되었다. 동물의 욕망을 내가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동물을 어떤 방식으로 묘사하든 그것이 명백히 인간의 욕망에 의한 산물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도 당근 메달을 우걱우걱 먹는 모습만은 귀여웠다. 관계에 관한 몇 가지 가정 <이니셰린의 밴시>의 주인공인 두 친구 패드릭(콜린 패럴)과 콤(브렌던 글리슨)은 각각 당나귀와 개를 반려동물로 기른다. 반려동물이 영화의 중심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중요한 방점을 찍는 것은 분명하다. 영화는 패드릭과 콤이 친밀했던 시간을 굳이 재연하지 않는다. 도리어 내내 반목하는 모습만을 보여준다. 관객은 늘 있는 일과처럼 친구의 집을 향해 걸어가는 패드릭의 걸음걸이와 눈썹 양 끝을 최대한 아래로 비스듬히 기울인 패드릭의 순진무구한 표정에서 그의 진실함을 의심하지 않는다. 패드릭과 콤은 늘 붙어 다니며 교류하는 일상을 나눠왔으나 그렇게 이어오던 시간의 관성이 갑자기 중단된다. 펍의 주인은 홀로 나타난 패드릭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인물과 주변인들의 반응을 통해 일상적 관계를 깨뜨리는 사건이 일어났음을 짐작하게 된다. 반면 콤의 태도를 보면 두 사람이 절친했다고는 믿기지 않는다. 나아가 친구라고 하기에는 둘은 대조적이며, 무엇보다 콤이 패드릭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보인다. (실제 두 배우의 나이 차이는 21살이다) 물론 나이를 뛰어넘어 교류하고 친구로 지내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렇게도 말해볼 수 있다. 두 친구는 지금 서로 다른 시간 속에 놓여 있다고 말이다. 패드릭은 나이가 들지 않은 채 특정 시간에 멈춰있고, 콤은 시간의 순리대로 나이가 들어버렸다. 콤은 패드릭이 실제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연기를 하면서 맞춰오고 있었지만, 이제는 한계에 다다라 그와의 교류를 끊기로 작정한다. 패드릭과 콤은 각각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 축을 담당한다. 친구와 우정을 나누던 시간 속에서 여전히 헤매는 패드릭은 과거의 인간이고, 패드릭과의 교류를 중단하고 새로운 관계로 뻗어나가는 콤은 미래의 인간이다. 두 사람의 부딪힘은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 맞붙은 채 벌이는 치열한 다툼과도 같다. 미래에서 온 콤은 말한다. 결국 역사에 기록되고 시간을 뛰어넘는 것은 모종의 위대함이라고. 모차르트를 비롯해 위대한 작곡가의 음악은 현재에도 후대에도 기억된다. 반면 두 친구가 서로를 배려하면서 나눈 다정한 시간은 후대에 기억되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미래의 시선에서 그것은 다 사라져 없어질 것에 불과하다. 반면 과거의 인간 패드릭은 인간적인 선의를 지키며 가족과 이웃에게 다정함을 베푼다. 경찰관인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하는 소년 도미닉(베리 키오건)을 돕고, 동생 시오반(케리 콘돈)과 당나귀 제니를 아낀다. 그가 발휘한 다정함은 다른 무엇으로 대체될 수 없다. 두 친구의 이야기는 미셸 공드리가 < 이터널 선샤인 >(2004)에서 전개한 이야기와 유사한 지점이 있다. <이터널 선샤인>은 특정 기억을 도려내는 것이 가능해진 상황을 그린다. 사랑에 실패한 인물은 연인과의 기억을 통째로 삭제하길 원하지만, 기억을 지우는 여정은 곧 기억을 소생하는 여정이 되어 과거의 시간을 긍정하게 만든다. 기억을 삭제하는 기술을 통해 <이니셰린의 밴시>를 관통하면, 콤만 기억을 삭제한 상황이라 말할 수 있다. <이터널 선샤인>의 인물은 실패의 미래를 알고 있음에도 과거를 반복하기를 선택하지만,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콤은 두 사람의 우정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는 관계를 끝내려 한다. 이를 알지 못하는 패드릭은 교류의 중단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반대로 패드릭이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것이라는 가정도 어느 정도 말이 된다. 플로리안 젤러의 < 더 파더 >(2021)에서 치매 환자인 안소니(안소니 홉킨스)의 시점을 체감하게 만든 것과 유사하게 <이니셰린의 밴시>는 거의 패드릭의 시점으로 영화를 보게 된다. 패드릭은 기억 상실증에 걸려 콤과 절연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 채 계속 콤에게 다가간다. 이를 받아주던 콤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이제까지 해오던 연극을 끝내면서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영화를 두고 이런저런 해석을 덧붙여보게 되는 건 콤의 갑작스런 절연은 패드릭에게도 관객에게도 납득하기 힘든 사건이기 때문이다. 전쟁과 이야기 전쟁은 단지 바다 건너편에서 희미하게 비쳐오는 사건이 아니다. 패드릭과 콤의 절연 역시 전쟁이다. 각각이 기르는 반려동물은 전쟁의 정찰병이다. 콤의 갑작스러운 절교 선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패드릭에게 콤은 만약 자신에게 말을 건다면 그 때마다 자기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이를 망설임 없이 실행한다. 패드릭이 규칙을 어기고 술에 취해 말을 걸어온 다음 날 콤은 집에서 손가락 하나를 잘라 패드릭의 나무문을 향해 던지고는 말없이 떠난다. 잘린 손가락이 문에 부딪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질 때, 잘린 손가락은 광적인 자해만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갈기는 총알처럼 여겨진다. 그 이후에도 패드릭은 무심결에 콤에게 말을 걸고 손가락은 가차 없이 잘리며 콤은 더 이상 바이올린 연주를 할 수 없게 된다. 두 친구의 절교가 초래한 가장 잔혹한 결과는 잘린 손가락을 입에 문 채 당나귀 제니가 죽음을 맞은 사건이다. 영화에서 사람이나 동물의 죽음이 묘사될 때 이것이 주인공의 변화를 위한 도구이거나 하나의 상징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당나귀의 죽음이 패드릭을 각성하게 함에도 그것이 도구이거나 상징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패드릭의 복수 방식에 있다. 패드릭은 더는 콤의 총알(손가락)을 외면하지 않고 콤을 공격하기로 결심한다. 패드릭은 복수를 위해 콤의 반려견을 해치는 식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법칙을 쓰지 않는다. 패드릭은 콤의 반려견이 주인을 구하려다 화마에 휩쓸리지 않도록 따로 보호해준다. 반려동물을 상실하는 슬픔을 똑같이 되돌려주지 않는 것은 거꾸로 반려동물에 대한 패드릭의 사랑을 드러낸다. 패드릭의 복수에는 그가 품어온 다정함이 최소한의 경계선으로 작동한다. 그것은 위대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감정이다. 콤 역시 패드릭의 당나귀가 죽게 된 상황에 충격을 받으며 복수를 담담히 받아들인다. 두 친구가 사는 마을은 커다란 바다와 맞닿아 있고, 바다 건너 본토에는 장기전이 벌어지는 중이다. 역사에 기록되는 것은 음악만이 아니라 전쟁도 있다. 전쟁은 역사에 기록되지만, 전쟁 이후 평화라면 모를까 지속하는 평화는 보통 역사로 기록되거나 회자되지 않는다. 이를 인간관계에 적용하면 인간의 기억에 깊이 각인되는 것은 좋았던 순간보다는 누군가와 갈등하거나 괴로운 순간인 경우가 많다. 콤이 패드릭과 절연한 이유는 패드릭과의 지속하는 일상을 보존하기 위해서 일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뚝 하고 두뇌 회로 하나가 잘린 것처럼 관계를 끊어내지 않는 한 일상은 여간해서는 각인되지 않는다. 전쟁은 역사에 기록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영화의 중요한 소재가 되어 이야기의 세계에도 영향을 준다. 실제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만이 아니라 영화의 소재가 평화보다는 충돌과 갈등이 많은 것도 전쟁의 역사가 이야기의 세계에 미친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두 친구의 이야기는 영화화될만한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생각으로 이끈다. <이니셰린의 밴시>의 세계는 켈리 레이카트의 < 퍼스트 카우 >(2019)가 서부극의 세계 속에서 나란히 죽음을 맞은 두 친구의 우정을 그려낸 것과 통한다. <퍼스트 카우>에서 주인공의 우정은 활극으로 기억된 세계 안에 새로운 리듬을 새긴다. <퍼스트 카우>가 보여준 것이 정공법이라면, <이니셰린의 밴시>는 반어법을 쓴다. 영화에서 타인이 타인에게 혹은 타자에게 발휘한 선의가 무가치하다고 말할수록 어쩐지 선의와 일상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리하여 바다를 마주한 채 나란히 선 두 사람의 뒷모습에서 기묘한 결합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올해 초쯤, 계속되는 팬데믹 속에 적응해 나가는 한국영화 제작사들에 대한 취재를 한 적이 있다. 2020년에는 코로나-19의 기승 덕분에 국내의 한 해 총 관객수가 73.7% 급감했던 터다. 극장 개봉 일정들은 미뤄지거나 아예 취소 되어서 작품들이 OTT 서비스로 직행하는 경우가 속속 나왔다. 그리고 제작사들을 취재하다 보니 원래 극장용 영화로 기획 되던 작품들이 예산을 줄여 작은 화면 OTT용으로 만들 궁리를 하거나 심지어 시리즈물로 변환되는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 영화계 생존을 위한 현실적이고 당연한 처사였다. 유독 외유내강 강혜정 대표와 통화했을 때, OTT에 열려 있기도 하지만 ‘어떻게 하면 더 사람들이 돈 내고 영화관에서 보고 싶게 만들 수 있을까’에 중점을 두고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모두가 어려운 상황에서 현실성과 적응력을 보였지만, 외유내강은 거기에 더해 패기를 보였다. <모가디슈>라는 영화가 그런 제작사에서 나온 것이 놀랍지 않다. 뉴욕 아시안 영화제 조직 위원장 사뮤엘 자미에는 ‘카 체이스 씬 하나만 보려고 극장에 가도 될 만 한 영화다’라고 하면서 올해 개막작으로 상영하기도 했다. 1980년대 말부터 유엔 가입을 먼저 하는 것을 목표로, 남한과 북한이 아프리카 국가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치열한 외교전을 벌였다고 한다. 1990년 말 소말리아 내전이 발발하면서 숙적이던 두 대사관 사람들이 힘을 합쳐 수도 모가디슈를 탈출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어떤 때는 실화가 더 거짓말 같을 때가 있다. 관객들이 못 미더워 할 같아 많은 취재와 고안 끝에 카 체이스 씬도 나온 것이라 류승완 감독은 말한다. 아이들까지 해서 네 대의 차량에 나눠 탄 두 대사관 사람들은 구조 비행기를 마련한 이탈리아 대사관을 향해 간다. 류 감독은 실제로도 처음에는 정부군이 반군으로 오인하면서 사격을 가했고, 탈출 하는데 반군이 또 정부군으로 오인해 사격을 가했다고 한다. 결국 양쪽의 추격과 사격을 받으면서 이탈리아 대사관 50미터 앞까지 가는데 한 사람만 사망한 실화가 너무 기적 같아서 고민했다고 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라 영화로 처음 이것을 접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싶어 조사 하다가 당시 AK 소총이 전화번호부 한 권을 뚫지 못했다던가, 명중률 자체가 낮은 데다가 정부군 조차도 훈련이 잘 안되어 있어서 표적을 잘 못 맞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사관에 있는 책과 문짝, 즉석에서 헌 옷으로 만든 모래 주머니를 박스 테이프로 차에 붙여 임시방편으로 나름의 방탄 차량을 만드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 와중에 아이들 팔에 매직 마커로 크게 혈액형을 적어주는 모습이 잠깐 나온다. 죽거나 다칠 가능성이 얼마나 높은지 직시 하며 현실적으로 대비 하는 모습이 긴장감을 한층 높여 준다. 준비 끝에 서커스단 차량처럼 색색가지 물건으로 뒤덮이고 그 무게에 눌려 기우뚱거리는 외교관 차량 네 대의 행렬은 가관이다. 실제로 촬영 중에 이 80년대 자동차들은 세월과 물건들의 무게를 못 이겨 가다가 서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류승완 감독은 ‘스펙타클 보다 서스펜스’를 목표로 연출했다고 말한다. 총알 세례 추격전 중에 네 대의 차량 내부를 관통하는 하나의 샷인 듯한 것으로 모든 이의 공포와 서스펜스를 보여주기도 했다. 창문에 매달린 군인과 싸우는 모습까지 가미해 결국 액션, 서스펜스, 스펙타클 두 마리도 아닌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 <모가디슈> 언론배급시사를 놓치고 광복절 주말 극장에 가서 보고 이틀을 못 참고 다시 보러 간 사람으로서 카 체이스 씬에 더해 하나를 더 꼽는다면, ‘양주 장면’이다. 엄청난 소리와 액션과 위험이 따르는 카 체이스에 반해, 늦은 밤 대사 집무실에서 조용히 벌어지는 장면이지만 서스펜스와 솔솔한 재미가 있는 장면이다. 남한 대사 한신성 역을 맡은 김윤석 배우가 안기부에서 파견된 강대진 참사관 역을 맡은 조인성을 회유하는 장면이다. 양주병을 들고 이야기하면서 술을 따라주려다가 자기 마음을 몰라준다, 섭하다 한숨을 내쉬면서 마치 무의식적으로 양주병을 내려 놓는 한 대사, 시선이 은근히 양주병을 따라가다가 자기 차례 대로 회유에 나서는 강 참사,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도 한국 고유의 풍습 대로 자작은 또 서로 못하게 하는 등 둘의 안무는 큰 화면에서 가히 볼 만 하다. 이런 경우, 연기도 스펙타클이다. 소말리아에서는 계속 되는 내전으로 현지 촬영이 불가능하여 모로코에서 100% 촬영한 영화다. 2019년 11월 11일부터 2020년 2월 18일까지 에사우이라와 케니트라 두 항구 도시에서 찍고, 수개월의 후반작업으로 90년대 초 모가디슈 모습을 완성한 것이다. 그리고 대대적인 오디션 끝에 한국, 케냐, 그리고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배우를 데려와 한국어, 영어, 불어, 스페인어 등 통역도 여러 명 둔 촬영 현장이었다. 그리고 무술팀이 현지에서 임시 액션 스쿨을 만들어 배우들을 훈련 시켰다고 한다. 이 영화, < 블랙 호크 다운 >이 아니다. 역시 소말리아 내전 배경으로 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2001년 영화도 모로코에서 찍은 것이라 비교가 되기도 하는데, 아는 사람이라면 비교가 아니라 대조라 해야 할 것이다. 할리웃 액션영화만큼 잘 만들고 재미있을 지는 몰라도, <모가디슈>에 나타나는 세계관이나 인간에 대한 접근 방식은 다르다. 아프리카 현지인을 ‘우리 주인공들이 그저 넘어서야 할 장애물’ 또는 악당 역으로만 그리는 일반 할리웃 영화와는 달리, <모가디슈>가 소말리아인들을 그리는 방식은 한국인들을 그리는 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 관객이라면 안다. 사실상 멀지 않은 과거의 한국에서도 소말리아와 마찬가지로 부패한 정권에 대한 저항과 독재 타도를 위한 시위, 폭력진압, 그리고 심지어 학살까지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정부 인사가 자녀 학자금 명목으로 뇌물을 요청할 때, 민간인들이 시위를 하고 무참히 밟힐 때, 전쟁통에 시장에서 난리가 날 때, 우리는 한국의 비슷한 상황들을 충분히 떠올릴 수 있다. 피부색은 달라도 사람들의 행동 모습들이 너무 낯익어 기억 속의 영상들과 중첩 될 때가 있다. 주인공들이 드디어 떠날 때 창 밖을 보며 재난이 닥친 그 나라에 남아 있어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부채감을 안고 가는 모습도 그래서 더 와닿을 지도 모른다. 한국 현대사를 모르거나 생각하지 못하는 외국인들이 <모가디슈>가 무조건 할리웃 영화처럼 현지인들을 치부할 것이라 생각하는 걸 보면 답답할 때가 있다. 그런 편견을 깨는 것도 우리 몫일 지 모른다. 그 외에 한국인들에게는 친숙하고 당연하지만 외국인들에게는 그리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라면 먹는 것과 거기에 담긴 의미에 관한 게 있다. 국내에서 많이 회자 된 ‘깻잎 장면’은 남북 대사관 사람들이 서로 긴장된 첫 식사 자리에서 깻잎 반찬이 붙어 북한 사람이 난감해 할 때 남한 사람이 잡아주는 장면이다. 같은 아시아인끼리도 김치나 깻잎 같은 걸 잡아주면 깜짝 놀라서 고마워 하는 경우는 봤지만 이런 행동을 당연 시 하는 사람들은 한국 사람 밖에 없을 지도 모르겠다. 아주 쬐그만 행동이지만 그 자연스러움에서 같은 동포임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북한 대사관 사람들이 습격을 받고 중국 대사관으로 피신하려다가 남한 대사관까지 와서 들여보내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이 있다. 그때까지 서로 온갖 방해 공작에 치열하게 외교전을 벌이던 두 대사관 사람들이다. 한 대사가 들여보내주기를 거부하고 허준호 배우가 맡은 북한 림용수 대사에게 계속 핀잔을 준다. 그러다 같이 나온 꼬맹이들에게 눈길이 가면서 ‘아이들 밥은 먹였소?’ 하는 순간, 우리는 게임이 끝났다는 걸 알 수 있다. 다른 명분은 필요 없다. 애들은 굶기는 게 아니다. 보면서 속 시원했던 것이 하나 있다. 모든 한국인들의 정말 한국적인 영어 사용법이었다. 예전에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기자회견을 하는 걸 처음 봤을 때 깜짝 놀랐던 게 기억난다. 영어 문장은 세련된 고위 관료의 것인데, 발음은 기가 막히게 아니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생각하고 보면 당연하다. 그 시대, 그 세대 외무고시를 보고 외교관 된 사람들은 어디에 중점을 두고 공부했겠는가? 발음 연습과 교정의 기회가 얼마나 됐겠는가? 지금처럼 편리한 인터넷과 DVD나 방송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 안기부 직원이라면 외신 기자에게 담배 한 보루 선물 던져 주면서 “Your favorite cigarette!”을 그냥 (사실 단수가 아닌 복수가 맞는데) 한글로 발음 적어놓은 듯, “유어 패이버릿 시가렛!”을 노래 부르는 어조로 하는 것이 사실상 더 자연스럽다. 대사관에 쳐들어오려는 현지 경찰들을 막으려고 “Listen, you can’t come in here!”라고 해야 되는데 흥분해서 “리슨, 유 캔트 낫 컴 인 히어어”로 (이중 부정의 문장을 만들어 마찬가지로 한국적인 발음으로) 소리치는 서기관의 모습, 그런 모습들이 더 자연스럽고 개연성 있다. 한국 배우가 영화 속 인물에 적절하지도 않은 영어 숙어나 문장 구조와 발음을 구사하면서 연기는 뒷전, 부자연스러운 대사를 얼마나 잘 외웠나, 발음은 얼마나 잘 하나, 무슨 줄타기 곡예 구경하듯 긴장하면서 보는 한국 영화는 이제 많이 없어져서 속 시원하다. 발음이 너무 한국적이어서 해외 배급할 때 자막 깔아야 하면 그냥 깔면 된다. 우리도 북한말 나올 때 한글 자막 까는데 무슨 상관인가? 인물에 맞는 말하기 방식과 발음, 자연스러운 연기가 나올 때 전달 되는 게 더 많다. <모가디슈>에 대한 이야기는 하면 할수록 이것저것 더 할 수 있겠지만, 일단 ‘2021년 사사로운 영화’의 원고는 여기서 이만 줄인다. 다만 이 작품을 보면서 한국 영화가 계속 발전하고 있다는 것, 패기가 넘친다는 것에 기쁨을 표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