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스 페어 : A Celebration of Women in Music
- 제작년도
- 1997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 The Apartment Pictures) 1978년 3월 16일 아침 9시 10분. 이탈리아 총리를 2번이나 역임한 기독교 민주당 대표 알도 모로가 붉은 여단에 의해 납치되었다. 그날은 기독교 민주당이 서구 사회에서는 처음으로 공산당과의 연합정부를 구상하고 신임투표에 들어가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일명 ‘역사적 타협’의 설계자였던 모로는 당 안팎의 우려와 반발에도 불구하고 납치, 살해, 테러, 총격전이 횡행했던 이탈리아의 가장 어두운 시기, 이른바 ‘납의 시대’를 끝내기 위해서는 좌우간의 타협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신이 가장 폭력적인 시대의 희생자 아이콘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모로는 납치 당한 지 55일 만에 시신으로 돌아왔다. 다섯 명의 경호원이 죽고 모로가 납치된 그날로부터 빨간색 르노 자동차 트렁크에서 모로의 시신이 발견되는 날까지, 수백만 명의 시청자가 TV에 붙어 있던 55일 간의 일을 벨로키오는 오랫동안 곱씹었던 것 같다. 그리고 모로 사망 40주기가 되던 해에 그는 국가적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그 55일의 이야기를 다성적이고 기념비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하기로 결정했다. 모두의 간절한 바람과 기도를 저버리고 거대한 비극을 상영했던 (벨로키오의 비유에 따르면) ‘거대한 TV 극장’은 실제 사건으로부터 44년 후에 (이번에는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이탈리아 TV를 통해 다시 한번 송출된다.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 The Apartment Pictures) < 익스테리어, 나잇 >(2022)은 마르코 벨로키오 감독의 첫 시리즈 작품이다. 6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러닝타임 330분에 이르는 이 시리즈는 애초 TV 방영을 위한 프로젝트로 시작되어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자 극장용 영화로 확장되었다. 제작 방식뿐 아니라 작품의 릴리스 방식 또한 무척 이례적이고 예언적이다. 시리즈물로서는 영화제부터 극장, TV, 무료 스트리밍까지 아우르는 광범위한 배급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이례적이고, 이 사례가 예외로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예언적이기도 하다. 사실 시리즈물이 유수 국제영화제의 한 섹션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2022년 칸영화제는 <익스테리어, 나잇>을 칸 프리미어 섹션에 초청했다. OTT 영화에 대한 거부를 공식적으로 표명해온 칸일지라도 83세 이탈리아 거장의 시리즈물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익스테리어, 나잇>은 칸에서의 프리미어 상영 즈음에 두 파트로 나눠 이탈리아 극장에 순차적으로 개봉됐고, 이탈리아 TV에서 방영된 다음 이탈리아 넷플릭스와 무료 플랫폼 라이플레이(RaiPlay)에서 다시 공개되었다. 적어도 이탈리아인이라면 누구나, 언제나, 쉽게, 다양한 통로로 이 영화를 볼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럼 그들은 여기서 무엇을 보았을까? 1978년의 TV 극장에서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무엇을? 벨로키오는 2003년에 모로 사건을 이미 한차례 영화로 만들었다. < 굿모닝, 나잇 >(2003)은 붉은 여단의 관점으로 밀실에 감금된 모로를 열쇠구멍으로 들여다보는 듯한 내부 시선의 영화라면, <익스테리어, 나잇>은 시선을 외부로 전환하고 확장한, 리버스 버전의 영화다. 자연스럽게 여기엔 주인공이 여럿이다. 벨로키오는 정치인, 교황, 가족, 붉은 여단원을 각 에피소드의 주인공 삼아 사건에 얽힌 그들의 내면 풍경을 자꾸만 반복 변주되는 악몽의 사이클로 재현한다. 에피소드 1에서는 기독교 민주당과 공산당의 연립정부를 구상하는 모로의 정치적 이상 뒤에 숨겨진 그의 불면과 연약함, 관용과 사랑을 그린 다음, 에피소드 2에서는 그의 정치적 동지인 내무부 장관 코시가의 죄책감과 정신분열적 망상을, 에피소드 3에서는 모로를 구하기 위해 온갖 방도를 강구하는 교황 바오로 6세의 절박한 무력감을, 에피소드 4에서는 붉은 여단 내부에 번져가는 정치적 의심을, 에피소드 5에서는 모로의 아내 엘레오노라의 고통과 소외를 거쳐 에피소드 6에 이르러 환상과 상상, 꿈으로는 바꿀 도리가 없는, 총체적인 파국으로 맺는다.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 The Apartment Pictures), IMDb (촬영: Anna Carmerlingo) 에피소드마다 불현듯 끼어드는 초현실적이고 그로테스크한 환상과 꿈이 구현하는 것은 대개 알도 모로의 환생이다. 역사적 비극을 다각도로 재고하는 벨로키오의 상상력은 불가역적인 역사의 결말을 그렇게 뒤집는다. 공히 모로 사건을 다룬 <굿모닝, 나잇>과 <익스테리어, 나잇>에 또 하나의 공통분모가 있다면 바로 그 점이다. 역사에 환상과 상상, 그리고 꿈의 이미지를 덧대어 숨겨진 진실의 일단을 들춰 보이는 것. 어쩌면 결론이 바뀔 수도 있었다는 깨달음. 그 환영의 세계에서 모로의 운명은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다. <익스테리어, 나잇>은 그렇게 <굿모닝, 나잇>의 엔딩에서 다시 시작한다. <굿모닝, 나잇>은 감금된 밀실에서 탈출한 모로가 새벽 거리를 비척대며 걸어가는 몽환적인 장면으로 끝나고, <익스테리어, 나잇>은 로마 병실에 누운 모로가 문병 온 동료 정치인들에게 정계은퇴를 선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매우 초현실적이고 거의 신화적이기까지 한 이 오프닝의 환영은 러닝타임 330분을 관통하는 일련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거기서 모로는 코시가의 방음된 밀실 문을 열고 들어오고, 침실 의자에 앉아 불면의 밤을 보내고, 홀로 십자가를 진 채 고난의 길을 걷고, 동료 정치인들과 함께 익사한 시신으로 강물에 떠내려가고, 르노 자동차 트렁크에서 마침내 눈을 뜨고 걸어 나온다. “그 남자는 그리스도처럼 죽어야 했다.” 벨로키오는 감독 노트에 그렇게 적어놓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하나의 수사가 아니라 실제의 이미지로 우리 눈앞에 재현해 보인다. 그는 아무것도 새롭게 밝히지 않으면서도 진실에 한 발짝 더 다가간다. 허구를 통해, 오직 상상력만으로. (좌) <굿모닝, 나잇> 중 / (우) <익스테리어, 나잇> 중 / 사진: IMDb( 1 , 2 )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탈리아가 기묘한 열병을 앓고 있던 시기다. 벨로키오는 그 시대의 풍경을 장대한 프레스코화처럼 펼쳐놓고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걸어 나온 듯한 인물들을 차례로 무대 중앙에 세웠다. 1막이 오르고, 2막이 오르고, 3막에서 또다시……. 그렇게 여섯 개의 장에 330분의 시간이 필요했다. 복잡한 이야기는 아니다. 모로의 정치적 동지와 정부가 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를 죽게 내버려두었다는 사실을 영화는 낮은 톤으로 서늘하고 선명하게 우리에게 일러준다. “이 영화, 아니, 시리즈, 이게 뭐라고 불리든 간에” 벨로키오는 자신의 첫 시리즈물을 만들면서 그걸 무어라 규정하든 그다지 개의치 않는 듯 보인다. ‘이 영화, 아니, 시리즈, 이게 뭐라고 불리든 간에’ <익스테리어, 나잇>은 영화제와 극장 스크린, TV와 OTT 플랫폼을 가로지르며 시네마의 경계가 어디까지 넓어질 수 있는지를 즐겁게 상상하도록 부추긴다. 완전한 몰입의 330분이 지나고 나면, 이걸 뭐라고 부르든 간에 저 멀리 제 길을 가는 시네마의 발걸음을 좇느라 바빠진다. 실은 언제나 그랬던 것 같다. 영화는 매번 시네마의 경계를 탐문하느라 머뭇대는 우리를 저만치 앞질러 간다. 강소원(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l 영화제에서 일한다. 매년 엄청난 편수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다.
한 번쯤은 티셔츠를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운동장에서 자유롭게 뛰놀고 싶은 욕망이 있다. 마치 ‘남자처럼’ 말이다. 그런 나의, 우리의 어릴 적 욕망을 닮은 아이가 있다. 영화 <톰보이>의 주인공 로레다. 짧은 머리를 하고 군살 없이 마른 몸을 가진 로레는 외형만으로는 소녀인지 소년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자신에게 미카엘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그는 스스로를 온전하게 받아들이기에 아직 미숙하고, 사회의 요구와 자신의 욕망이 들어맞지 않아 혼란스럽기만 하다. 로레는 리사와 만나면서 소년 미카엘의 삶을 시작한다. “넌 이름이 뭐니?” 첫 만남에서 리사의 질문에 미카엘이라고 답한 로레는 리사가 소개해준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미카엘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다른 남자아이들처럼 웃통을 벗고 침을 뱉기도 하고, 서툰 가위질로 자신의 수영복을 잘라내 남성용 수영복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남성 성기 모양의 찰흙을 만들어 수영복 안에 집어넣기도 한다. 남자아이들 사이에서도 축구를 잘하는 편이며 주먹도 꽤 쓰는 로레는 리사와 숲속에서 뽀뽀도 나누고 친구들에게 인정을 받으며 완벽히 미카엘로 거듭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로레와의 싸움에서 진 남자아이와 그의 어머니가 집으로 찾아와 부모님에게 거짓말이 들통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가족 안에서의 로레는 사랑받는 딸이자 언니이지만, 여성으로서 존재해야 하는 답답함과 동생을 돌봐야 하는 책임감에 무겁게 짓눌리고 있다. 입을 꾹 다물고 공백의 표정을 지은 로레는 어딘가 억눌린 것처럼 보인다. 그런 로레가 친구들과 어울려 놀 때, 즉 미카엘로 존재할 때는 한결 표정이 가벼워진다. 연신 웃는 얼굴의 자유롭고 즐거운 아이의 모습이다. 여기엔 공간의 힘도 존재한다. 규정이나 사회적 편견이 깃든 학교가 아니라, 속세에서 벗어난 숲은 로레와 친구들에게 자유로움을 선사하고, 아이들은 어느 것에도 구속되지 않은 채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 비록 거짓으로 만들어낸 가면극이지만, 로레는 잠시나마 억압에서 벗어난다. 미카엘로 존재하고픈 욕망은 집에서도 이어진다. 영화에는 거울에 비친 로레의 모습, 즉 로레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모습이 등장하는데, 이때 로레는 미카엘로서 존재한다. 콧수염을 붙이고 남성의 말투를 따라 하거나 웃통을 벗은 모습, 찰흙 성기를 넣은 모습에 만족스러워 한다. 자신이 본 다른 남성의 모습을 모방하며 남성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갈망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숲과 달리 집이나 학교에선 로레가 미카엘로 존재할 수 없고, 가면극은 학교에 갈 시간을 앞두고 집에서 끝이 나버린다. 거짓으로 시작된 존재는 위태롭고, 드러난 진실이 로레에겐 버겁다. 하지만 영화는 흔들리는 로레를 방치하지 않는다. 그를 지탱해주는 가족이 곁에 있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로레는 바람을 만끽하다 운전대를 잡는다. 어린아이는 운전대를 잡는 게 미숙하고, 그 때문에 어디로 나아갈지 알 수 없어 위험하다. 아빠는 그런 아이와 함께 운전대를 잡아준다. 잘못된 길로 들지 않게 그가 갈 방향을 제시해주기도 한다. 로레의 거짓말이 들통난 순간, 엄마는 로레에게 다소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으로 대응한다. 손찌검을 하고, 원피스를 억지로 입힌다. 그러나 이내 로레에게 행동의 이유를 설명하고 그를 차분히 설득한다. 로레도 엄마의 행동이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안다. 친구들 앞에서 여자임이 드러나고 홀로 남은 로레가 상처받은 모습이 그려진 뒤 이어지는 장면은 로레가 평화롭게 가족과 함께 있는 장면이다. 가족 안에 있는 로레는 길을 잃어도 돌아갈 곳이 있으며, 좌절하더라도 나아갈 힘을 얻을 것이다. 가족들의 사랑이 부재해 엇나갔기 때문에 성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로레의 사랑스러운 동생 잔도 버팀목이 되어준다. 잔은 미카엘을 찾는 리사에게 굳이 로레의 거짓말을 밝혀내지 않고, 끝까지 비밀을 지킨다. 로레를 오빠라고 부르며 오빠여서 더 좋다고 말하기도 한다. 잔은 미카엘을 인지하고 존중하는 존재이며, 가장 편견 없이 로레를 바라본다. 그렇기에 잔의 시선으로 바라본 로레의 모습이 영화의 메인 포스터를 장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잔은 로레와 달리 전형적인 여자아이의 형상이다. 분홍색으로 꾸민 방과 그 안에 채워진 인형들,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발레를 하는 모습이 이를 보여준다. 이러한 잔이 미카엘을 꿈꾸는 로레를 받아들이는 것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건 얼마나 다르건 서로 이해하고 함께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리사 역시 로레의 성장을 돕는 인물이다. 리사는 로레에게 이름을 물어봐 주는 존재다. 영화는 초반부와 엔딩 장면에서 리사가 로레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며 수미쌍관을 완성한다. “넌 이름이 뭐니?” 자신이 누군지 스스로 정의하고 대답할 수 있게 해주는 이 질문은 로레가 정체성을 만들어나가는 계기가 된다. 영화는 내내 사용하는 색상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한다. 타이틀 ‘Tomboy’는 파란색에서 빨간색으로, 다시 파란색과 빨간색이 뒤섞인 색깔로 바뀐다. 이는 기존 성별에 관한 고정관념을 뒤엎겠다는 것을 예고하고, 예고한 대로 영화 안에서 ‘남성의 색’, ‘여성의 색’은 뒤집혀 사용된다. 로레가 자신을 미카엘이라고 처음 소개할 때 입은 바지와 찰흙으로 성기를 만들어 넣었던 수영복의 색깔은 빨간색이고, 반대로 로레가 여자임을 친구들에게 밝힐 때 엄마가 억지로 입힌 원피스나 리사에게 화장을 받을 때 입은 후드는 파란색이다. 사회적 인식을 뒤틀어 사용한 색상은 성 고정관념에 대한 반발이며, 우리 안에 여성성과 남성성이 공존함을 보여준다. <톰보이>는 단순히 여성성, 남성성을 규정하는 사회의 강압적 분위기를 지적하고, 성 소수자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영화는 어린 시절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자신을 찾아가는 로레의 성장 과정을 그려낸다. <보그 이탈리아> 인터뷰에서 셀린 시아마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영화가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모두에게 전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 시기에 옷을 차려입고 다른 누군가가 되려고 하지 않나.” 감독의 말처럼 우리는 성 정체성의 혼란을 겪은 게 아니더라도, 혼자만의 고민을 했고, 어떤 모습을 갈망했고,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로레는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의 어린시절이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영화에서 돋보이는 지점이자 이러한 <톰보이>의 메시지 전달을 더욱 가능하게 하는 것은 감독이 ‘소녀’를 그려내는 방식이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데뷔작 <워터 릴리스>에서도 보여줬듯이 소녀를 욕망의 대상이 아닌 주체로 그리며 소녀라는 이름에 투영된 사회적 인식을 깨부순다. 소녀라는 이름을 되찾아준 것이다. <워터 릴리스>는 플로리안을 향한 마리의 사랑, 키스를 꿈꾸는 안나의 환상, 누군가의 선망과 질시의 대상이던 플로리안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톰보이> 역시 로레가 남성의 모습을 열망하며 정체성 혼란을 겪는 것을 과장되거나 자극적이지 않게 담아낸다. 이들은 모두 순수하고 서툰 욕망을 가진 주체로, 욕망 앞에 솔직하고, 아픔을 겪으며 성장해나간다. 그렇기에 셀린 시아마 감독의 영화에서 그려지는 소녀는 불편함 없이 자연스럽게 다가오고, 어린 시절 우리들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