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주
- 감독
- 주재훈
- 제작년도
- 2018
- 출연
- 김진순, 최금숙
홀로코스트 영화는 윤리적 재현과 관련해 오랫동안 아방가르드의 위치를 점해왔다. 미학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던져졌고 홀로코스트 영화들은 이에 자의적, 타의적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절멸이라는 끔찍한 폭력을 구체적으로 시청각화 하는 것은 어떠한 효과를 낳는가, 인과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폭력을 서사화할 수 있는가, 목격자가 없거나 말하기 힘든 경우 (예를 들면, 가스실) 증언과 기억은 어떻게 기록될 수 있는가, 과거는 어떻게 현재와 대화를 나누고 기억을 상속할 수 있는가, 트라우마의 고통 속에 놓인 생존자들의 증언은 어떠한 형식으로 가능한가, 관객들의 동일시와 공감은 어떤 강도로 이끌어 내는 것이 적절한가, 피해자·가해자·조력자·제삼의 목격자 들 중 어떤 시점을 선택할 것인가 등. < 밤과 안개 >(알랭 레네, 1955), <카포>(질로 폰테코르보, 1960), < 소피의 선택 >(알란 J. 파큘라, 1982), < 쇼아 >(클로드 란츠만, 1985), < 쉰들러 리스트 >(스티븐 스필버그, 1993), < 인생은 아름다워 >(로베르토 베니니, 1997), < 사울의 아들 >(라즐로 네메스, 2015), < 조조 래빗 >(타이카 와이티티, 2019) 같은 대표적 작품들을 거쳐 오며 각 질문과 관련해 새로운 미학적 선택이 쟁점화 되었고 역사적으로 홀로코스트 영화는 이전 영화와의 비교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무언가 새로운 영화적이고 윤리적인 미학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이 홀로코스트 영화들에는 있을 수밖에 없다. 관객들 또한 이전 영화와 관련된 쟁점을 인식하고 그에 근거해 영화를 보게 된다. 따라서 모든 홀로코스트 영화는 내외적으로 이전의 영화들을 적극적으로 매개하고 참조하는 미디어 고고학적 상태에 놓인다. 마틴 에이미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조나선 글레이저가 감독한 < 존 오브 인터레스트 >(2023) 역시 그러한 강박 속에 놓여있다. 영화는 새로운 위치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것을, 시각화 한다. 이제까지의 홀로코스트 영화가 수용소 및 피해자를 다양한 방식으로 가시화하는 선택을 했다면(평화로운 전원의 풍경과 다를 바 없는 기념관이 된 전후의 수용소를 보여준 <밤과 안개>, 방관자였던 폴란드 주민들의 변명을 듣고 있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화면에 담는 <쇼아>, 흐릿한 포커스 아웃과 좁은 주관적 시야의 제한적인 시각을 통해 목격의 의지를 영화화 했던 <사울의 아들> 모두를 포함할 수 있다), 글레이저 감독은 수용소가 아닌, 수용소 소장의 사택과 가정생활을 탐색한다. 아우슈비츠강제수용소 소장인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앙 프리에델)는 가족들과 함께 수용소 높은 담장 밖 바로 옆에 위치한 빌라에 거주하고 있다. 루돌프 회스는 아내인 헤트비히 회스(산드라 휠러) 그리고 다섯 아이들과 함께 단란한 가족을 꾸리고 있는 다정다감한 가장이다. 루돌프는 큰 아들에게 직접 승마를 가르쳐주고 잠 못 들고 집안을 돌아다니는 막내딸에겐 <헨델과 그레텔> 동화를 읽어준다. 그는 아내에겐 책임감 있고 유머러스한 남편이기도 하다. 헤트비히 역시 집안을 건사하고 정원을 아름답게 꾸미며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데 열정적이다. 전쟁 기간 동안 계급적 상승을 이뤄낸 회스 부부는 열심히 ‘일’한 대가로 얻어낸 것에 큰 자부심과 애착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수용소가 아닌 사택과 그 주변의 목가적인 풍경만을 집요하게 보여준다. 물론 그렇다고 담장 너머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 화장터 굴뚝의 연기와 냄새, 강물을 따라 흘러들어오는 재를 막을 수는 없다. 영화의 제목인 ‘관심/이익 지역’은 나치에 의해 몰수된 수용소 주변 토지를 일컫는다. 이들은 이 지역을 사택으로 사용하는 등 경제적 이익(interest)을 취했다. 이 영화에서 수영장과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한껏 꾸며진 사택은 그 경제적 이득, 시각적 관심이 된다. 어떤 이미지의 관심 혹은 이익은 다른 이미지의 무관심/피해를 대가로 한다. 회스 부부는 바깥과 타자를 절멸시킨다. 가해자 가족의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은 수용소에 대한 철저하고 적극적이며 의식적인 무관심 혹은 비가시성과 교환된다. 이것이야말로 이미지의 정치경제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가해자 일인이 아닌 그의 가족생활을 다루는 실내극이라는 점에서 이전에 가해자들을 주인공으로 했던 다른 영화들과도 변별된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이 영화는 젠더의 정치학이 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아우슈비츠강제수용소에서 유태인 절멸 계획을 짜고 지휘한 루돌프 회스 만큼이나 그의 아내 헤트비히 회스를 주인공의 자리에 놓고 그녀의 선택과 행동을 상세하게 묘사한다. 그러면서 영화는 멜로드라마의 가족극, 혹은 < 잔느 딜망 >(샹탈 아커만, 1976) 같은 페미니스트 예술영화들이 실내 건축학을 통해 가족의 정치경제학을 영화적으로 전경화 했던 것처럼 집안과 그에 딸린 목가적 풍경, 그리고 그 안의 사람들의 동선이 끊임없이 시각적이고 경제적인 관심/이익의 교환체계에 놓여있음을 각인시킨다. 헤트비히는 루돌프에게 수동적으로 딸려 있는 부수적 이해관계자가 아니다. 헤트비히는 수용소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알고 있지만 적극적으로 모른 척하고 무관심한 채 유태인들의 죽음을 대가로 자신의 가족의 이익을 선택한다. 루돌프가 집안 거실에 앉아 가스실과 화장터 건축과 운영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만들어낼지, 즉 어떻게 사람들을 빠른 시간 내에 가능한 많이 살해할지에 대한 계획을 사업체로부터 듣고 논의할 때, 그리고 지상에서는 담장으로 가로막혀 있지만 지하에는 비밀통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줄 때, 가족의 단란함을 포함해 중상층 가족이라는 계급적 유지가 근본적으로 집단학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끊임없이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가해 행위와 결과로부터 그들 자신을 분리하려 한다. 루돌프의 청결에 대한 강박, 매일 밤 모든 방의 전등을 끄고 문단속을 하는 반복 일상, 외화면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화면 안을 가득 차게 보여주는 정원의 꽃의 클로즈업 쇼트들, 침대에 누워 부부가 함께 회상하는 이탈리아 휴가, 유태인 수용수의 모피코트 주머니 속 립스틱까지 꼼꼼하게 챙기면서 유태인들의 유품이 쌓여있는 장소를 ‘캐나다’로 부르는 철저함, 정원의 꽃 이름, 주변 숲의 새 이름을 자식들에게 알려주고 기억하게 하기 등. 신체, 시각, 언어, 사유의 차원 모두에서 깔끔하게 집단학살을 분리해 내려 한다. 하지만 헤트비히와 카메라의 보지 않으려는 회피, 혹은 적극적 무관심은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음에서 비롯된다. 이 모든 디테일, 안락과 아름다움은 학살에 기반 한다. 화장된 피해자들의 뼛가루로 키워낸 탐스러운 꽃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완벽한 무관심, 외면은 불가능하다. 앎은 단순히 정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앎은 신체적이고 환경적이다. 소리, 빛, 냄새, 물의 흐름을 모두 통제할 수는 없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대사들은 종종 J 또는 L 컷으로 편집된다. 앞 쇼트의 대사는 뒷 쇼트로 흘러넘치고, 뒷 쇼트의 대사는 앞 쇼트에 선재한다. 복도, 창, 문, 하늘, 강은 거부할 수 없는 신체적 앎이 통제를 벗어나 흘러 다니는 통로이다. 헤트비히는 일을 하느라 자신과 독일 장교 부인들의 앞을 지나가고 창 밖에서 일하고 있는 유태인 하녀와 하인들을 무시한다. 이들은 쇼트와 쇼트, 프레임 안과 밖을 사운드와 함께 넘나든다. 독일 장교 부인들이 유태인의 소지품을 어떻게 나눠가졌는지, 그들이 어떻게 끌려갔는지에 대한 농담을 하는 부인들의 대화는 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창과 문 너머로 집 안에서 일하는 유태인들의 몸에 흘러 들어간다. 동시에 수용소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 또한 막지 못한다. 잠시 머물다 간 헤트비히의 엄마, 유태인 하녀들, 그리고 딸까지 모두 그 소리를 듣지만 회스 부부는 적극적으로 듣지 않는다. 관심지역은 적극적 무관심 지역을 통해 만들어 진다. 이 영화는 신체적 앎 그리고 알면서도 행하는 악의 적극성이 어떻게 회스 부부에게서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글레이저 감독이 마지막에 루돌프 회스의 구역질 장면을 넣은 것도 이 신체적 앎에 근거한다. 그들은 알면서도 행한 것이다. 당연히 이 앎은 반성이나 죄책감이 아니라 자기 합리화와 적극적 무관심으로 이른다. 사진: "Jon obeu inteoreseuto", IMDb ( 좌 , 우 ) 홀로코스트 이후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그의 말은 집단학살과 관련된 예술에 있어 주요한 윤리적 테제 중 하나로 언급되어 왔다. 가해 집단이 피해자와 동일한 인간 종에 속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끔찍한 일이 일어난 이후 어떻게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글레이저는 여기서 이 지침을 한번 뒤집는다. 그렇다면 절멸이 일어나고 있는 중에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이란 무엇일까? 혹은 정말로 서정시를 쓰는 건 불가능한 것일까? 헤트비히의 정원에는 꽃 하나하나 벌레 먹지 않고 탐스럽게 피어 있다. 영화의 대부분에서는 카메라가 거리를 두고 건조한 관찰의 태도를 취하지만 헤트비히가 키워낸 꽃만은 마치 자연 다큐멘터리의 관습적 연출을 보듯 탐스럽게 클로즈업으로 정성들여 포착한다. 그것의 즉각적 아름다움에 이의를 제기하긴 어려울 것이다. ‘평화로운’ 집 주변의 목가적 풍경처럼 말이다. 그러나 관객들은 곧 그 클로즈업 바깥에서 꽃의 비료로 쓰이는 것이 소각장에서 태워진 분골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보이지 않는 프레임 바깥과 내부는 끊임없이 교환되고 연결된다. 마찬가지로 루돌프가 다정한 아버지로서 동화책을 읽어주는 바깥에서 시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집단학살의 꼼꼼한 계획, 유태인 여성에 대한 성착취를 행하고 있는 루돌프는 끔찍하게도 가정적인 부성을 동시에 수행한다. 더 정확하게는 그의 부성은 가해 행위 위에 기반해 있다. 그러면 시와 노래는 어디서 가능한가? 글레이저는 수용수들을 돕기 위해 사과를 노역장에 몰래 숨겨놓는 폴란드 소녀를 적외선 카메라로 애써 보여주며 증명하려 한다. 소녀의 이미지를 드러내고 그것을 보려는 태도는 흐릿한 쿠키더미를 찾아가는 작업이다. 나 혹은 우리의 관심/이익 영역이 아닌 바깥을 보려는 태도, 효율성이나 성과가 아닌 다른 가치를 돌보려는 태도, 타자의 존재는 교환할 수 없거나 나눌 수 없음을 인지하는 태도, 내장지각에 가까운 신체적 앎을 회피하지 않고 응시하는 태도, 실내와 목가가 얼마나 정치경제적인지를 인식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더 중요하게는 글레이저 감독이 아카데미 수상소감에서도 밝혔듯이 오늘날 시가 가능하려면 이스라엘 혹은 홀로코스트 바깥을 봐야 한다. 가자지구에서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피해자였던 이스라엘이 어떻게 또 다른 민족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집단학살하며 가해자고 되고 있는지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팔레스타인의 이미지가 더 필요하다. 사진: " Jon obeu inteoreseuto ", IMDb 조혜영(영화평론가) l 영화적 순간들을 공유하고자 글을 쓴다. 영상문화 기획연구 단체 ‘프로젝트38’ 연구원, 『원본 없는 판타지』(2020), Mediating Gender in Post-Authoritarian South Korea (2024) 등 공동 집필.
4분할 폐쇄회로 모니터 안에서 지하철 역사(驛舍)들의 이모저모가 보인다. 서울 곳곳의 지하철 플랫폼을 찍은 저화질 흑백 이미지들이 둔탁한 리듬의 편집으로 나열되는 모니터에서는 열차들이 도착한 뒤 통근자들이 타고 내리고 터널 안에서는 다음 열차의 불빛이 빛난다. 서로 다른 지점을 비추는 네 개의 프레임과 한 프레임을 확대한 이미지가 번갈아 배치되다가 체류 외국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트랙으로 내려가고 그의 마지막 순간이 열셋이나 열넷 또는 열다섯 프레임일 수도 있는 착란적인 이미지로 제시된다. 그리고, video off... 어두운 색깔의 점퍼를 입은 남자의 최후를 기록한 이 CCTV 이미지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창생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태양 아래로 카메라가 틸트 다운하면 스모그에 뒤덮인 서울의 빌딩 숲이 드러난다. 곧이어 한 이미지에서 다른 이미지로 건너뛰면서 라디오 채널의 잡다한 목소리들이 겹치고 도시 경관 위로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조언이 흘러나온다. “이번 한 달, 올 한 해를 진정 성공하려면 나의 성과를 냉철하게 보는 지혜의 눈이 필요하겠죠?”, “웃을 일이 있을 때는 소리 내어 즐겁게 웃도록 하십시오. 많이 웃는 사람은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에 걸릴 염려도 없다고 합니다.” 상냥한 충고와 맞물린 이미지들의 전환은 무뚝뚝하고 가차 없다. 교통체증, 지하철역의 승하차객들, 연체동물 형상의 인쇄기, 무표정한 노동자의 얼굴, 펄럭이는 구인광고, 증기를 내뿜는 다리미, 재봉틀과 박카스 따위의 사물과 행위들이 일상과 산업 공간을 흘러 다닌다. 그 즈음 일상적 생활사의 세목들 위로 별안간 건조한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끼어들어 최근 한국인의 사망 원인에 대한 통계자료를 읽어 내려간다. 미세먼지와 황색포도상구균 등의 미생물, 암이나 뇌혈관질환, 심장질환 같은 병증에 이어 고의적 자해로 인한 사망이 4위에 올랐노라고, 내레이터는 말한다. 다시 죽음이라는 의제로 돌아와 이 메마른 통계들의 꺼풀을 벗겨내면 그 아래에서 무엇을 보게 될 것인가? < 파산의 기술 >은 프롤로그에 제시되었던 잊히지 않는 죽음의 내막을 탐사하는 비선형 복합 내러티브 다큐멘터리이다.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의 혼란스러운 지형을 매핑하는 이 영화는 4개 챕터로 구성된 느슨한 플롯을 취하는데, 서로 다른 기원과 출처에서 발췌한 이미지 자료들을 배치하고 이미지들의 좌표와 접촉면을 확장하여 형성된 문맥이 서사의 핵심이 되도록 한다. 형식과 의미 질서의 구속성을 무시하여 일견 두서가 없는 듯 보이는 서사는 디스토피아적인 도시 경관과 경제적 재난, 긴축 위기에 직면한 남녀들의 증언을 통해 1990년대 말부터 한국 사회에서 시작된 파산의 물결이 개인에게 미친 여파를 추적한다. 말과 언어, 이미지, 정보의 충돌을 전개하는 기술 방식은 번영의 뒤에 도사린 위기, 신자유주의 질서 하에서 은폐되는 착취와 고갈, 살인에 대한 총체적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일상적인 확신의 목소리 위에 파산의 풍경들을 대비하는 충돌의 미학을 내세우고 있다. 이를테면 이런 충돌의 이미지들이 앞을 막아선다. 불명료한 카메라의 표면 위에 철문을 두드리는 소음이 얹힌다. 채무 변제를 종용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잦아들면 전원이 켜지고 카메라는 십자가와 단란한 가족사진들이 벽에 걸린 좁은 집을 스캔한다. 젊은 엄마는 어린 딸에게 더 큰 집으로 이사할 거라는 밝은 미래를 약속하지만 웬일인지 딸은 “무섭다”고 말한다. 순간 암전, 강제집행을 고지하는 목소리를 따라 불이 켜지면 압수품에 붙은 붉은 딱지들이 보이지만 집에는 아무도 없다. 저들의 꿈은 어떻게 살해당했는가? 말과 목소리, 이미지의 충돌을 모체로 이어지는 다음 시퀀스에서 다종다기한 노동으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은 일상 업무와 부채의 증가, 직업의 조건 따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 중 일부는 얼굴을 숨기고 붉은 립스틱을 바른 입술 또는 눈두덩이로만 나타난다. ’붉은 입술들‘이 생존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신용과 부채에 의존하는 사정에 대해 말하는 동안 세계경제포럼에서는 말쑥한 비즈니스 맨들이 샴페인을 들고 어슬렁거린다. 한때 아파트 건물이 있던 공간은 크레인으로 철거되고 있으며 부서진 콘크리트 슬라브가 심란하게 흩어져 있다. 붉은 입술들의 대화는 그들의 생존 투쟁에 대해 계속 이야기한다. 모닝커피, 출근 준비, 통근, 어린이집, 월세, 여가 시간을 즐기는 방법 따위의 생존 루틴들이다. 포크레인의 집게발이 콘크리트 더미 속에서 철근 뭉치를 뽑아내면, ‘붉은 입술들’은 카드 돌려막기로 연명해야 하는 채무의 굴레를 한탄하고, 가족들은 집에서 쫓겨난다. IMF 이후 기업의 파산과 구조 조정이 계약 관행의 조정, 실업, 인플레이션, 대출, 개인 파산으로 이어졌던 고통의 지도가 순식간에 그려진다. 동시에 텔레비전 모니터에서는 선거 승리를 축하하는 운동가들의 감격적인 연설이 흘러나온다. 텔레비전 안에 박제된 이미지를 제외한 주변은 모두 어둡다. <파산의 기술>은 리드미컬하고 아이러니한 몽타주, 감독 자신의 무감동한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사회에서 개인을 증발시킬 위기에 처한 파산의 공기를 시적인 게릴라 영상으로 전환한다. 다큐멘터리 형식의 혁신을 기도한 감독 이강현은 행과 불행, 희망과 절망, 승리와 패배에 대한 반성적 시각을 가지고 고단한 노동의 조건과 일상, 거대한 대부 경제의 무게 아래 짓눌린 채무자들의 생존 투쟁, 승리의 확신이 무색한 죽음의 기운들을 능숙하게 대조한다. 승리를 공표하고 환호하는 사람들, 누가 이긴 것인가? 무엇이 우리를 여기로 데리고 왔는가? 사태의 본류와 지류가 분별되지 않는 혼돈의 지도 안에서 생활사의 분주함, 부채의 압력, 웅장한 공공프로젝트의 역사, 노동조합주의의 쟁취, 선거의 승리, 오염된 콘크리트 도시에 대한 느낌들이 스스로 말하도록 함으로써 <파산의 기술>은 진정한 사회적 고통과 불안을 묘사하려 한다. 이 지점에서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우리들의 접하는 이미지의 두께를 이야기한다. 이미지의 표층과 심층에 쌓인 시간의 두께는 서울 영등포 어느 뒷골목 벽에 붙은 너저분한 포스터를 찍은 이미지에 대한 독해로 해설된다. 한몫에 보이지 않는 이 이미지 더미 안에는, 국제결혼을 알선하는 포스터와 사금융 대부업체 전단, 초고속 인터넷 회사의 광고, 룸 가라오케를 선전하는 포스터, 그리고 이 모든 이미지의 뒤에 쌓인 시간의 퇴적층들이 공존한다. 내레이터의 말대로, 우리는 오랜 시간을 가지고 이미지들의 안과 밖을 살펴야 한다. 한 맥락에서 이강현은 재현과 재현의 장치를 동시에 또는 번갈아 보여준다. TV 모니터, 비디오 캠 이미지는 현실과 재현의 구분을 강조한다. TV 모니터 안의 이미지와 바깥의 현실 사이에는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이 있고, 우리들은 이미지 바깥에 서 있다. 영화에 주석을 달고 정리해야 하는 에필로그는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1987년 시민항쟁을 기념하는 집회로 이동한다. 선언과 주장, 추억, 공염불, 낄낄거림이 교차하는 그곳에서 카메라는 연사가 아닌 군중을 비추고 있다.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 웃음을 흘리는 해사한 군중들 사이에서 투쟁가에 고양된 한 남자는 외롭게 주먹을 치켜올린다. 장면이 전환되고 흐린 하늘 아래 복면을 두른 노동자들의 집회를 시발로 하여 아파트에서 누군가의 유품을 정리하는 여인의 비디오 영상이 흐른다. 화면 위에 찍힌 날짜는 2003년 10월 17일이다. 붉은 이불이 둘둘 감겨 있는 사람은 고공 크레인 농성을 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김주익이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프롤로그의 폐쇄회로 영상에서 보았던 남자의 죽음으로 돌아간다. 주검을 향한 통곡과 이어지는 격문, “나의 목숨을 내놓으라 하면 너의 심장을 찔러주겠다.” 승리를 기념하는 사람들의 맞은편에서 죽창을 든 노동자들은 공격을 위한 채비에 나섰다. 우리들은 이미 철거와 퇴거, 쏟아지는 절망, 그리고 지하철에서 생을 마감한 남자를 보았다. 영화의 앞과 뒤에 평행하게 놓인 죽음은 어떻게 서로를 향하는가? 상투적인 인과론의 오류를 넘어 <파산의 기술>은 간단히 정의될 수 없는 사회학적 현상으로 이 죽음들의 지도를 그린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2016년 정지돈과 오한기와 이상우와 나는 <펫 시티>라는 제목의 ‘페이퍼시네마’를 만들었는데, 앨런 튜링의 뇌를 쪼아먹은 앵무새 마부제가 인간을 뛰어넘는 능력을 갖게 되며 조류가 인류를 지배하게 된 세상에서 분투하는 주인공 잭(a.k.a. 짹)과 동료들의 이야기를 그린 일종의 대체역사 SF였다. 벨라 발라즈는 옛날 영화가 우리에게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영화라는 문화가 너무도 빠르게 발달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오래된 예술이 대개의 경우 지나간 시대의 정신을 거기에 합당한 형식에 담아 표현했다면, 영화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 자신과 연관시킬 수 있는 것, 아직 ‘역사’가 아닌 우리의 최근 모습이며 그 어색함이 우리를 웃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이 방금 <펫 시티>의 로그라인을 보며 슬쩍 (비)웃었다면 그 때문이다, 아마도…… 그러니까 문제는 웃음이고, 웃음의 종류다. 그게 처음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정지돈과 내게 ‘우리가 사랑하는 21세기 한국 영화’라는 주제로 한달씩 번갈아가며 연재할 것을 제안했을 때 우리가—적어도 나는—떠올린 것이었다. 사랑하는 영화에 대해 말하는 일은 거의 언제나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소위 영화를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영화라는 우정 운운하면서도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난 모습을 보라. 소문난 영화사랑맨이자 시네마테크의 얼치기 인류학자였던 뤽 물레는 < 알카사르 작전 >에서 자신과 친구들을 한 마디로 묘사한다. 시네필들이 다 그렇듯이 그는 입냄새가 심했다, 라고…… < 인생은 소설이다 >의 개봉에 맞춰 알랭 레네를 인터뷰하는 자리에서 세르쥬 다네는 < 히로시마, 내 사랑 >이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주었던 충격에 대해 말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다네는 말한다, 내가 말해서는 안 될 그의 어떤 무엇인가를 말했다는 듯이 그는 조금은 쌀쌀한 태도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내게 감사를 표했다. 마치 내가 그의 레인코트를 칭찬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나는 기분이 상했지만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유년기를 응시했던’ 영화들은 공유 불가능하다는 것, 심지어 그 영화들의 작가와도 공유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근데 그게 웃음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지돈씨가 물었다. 아무래도 내가 그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모양이다. —두 종류의 한국 영화가 있습니다. 웃겨서 계속 보고 싶은 한국 영화와 웃겨서 더는 볼 수 없는 한국 영화. 전자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후자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이) 그럼 우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서교동 콜마인에서 만났다. 우리가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친구들’(가제)이라고 이름 붙인 연재를 위한 일종의 기획회의? 작전회의? 나는 약간 복잡한 마음이었다. 오랜만에 둘이 하는 공동작업이 설레기도 했지만, 장 루이 셰페르의 말마따나, 나는 영화에 대해 특별한 이야기를 할 자격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관에 지나치게 자주 가는 지돈씨와 달리 마지막으로 영화관에 갔던 게 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콘 에어>를 본 건 기억나는데…… —정연씨, 제발 니콜라스 케이지는 잊으세요. 지금보다 어리고 민감하던 시절, 나는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연한 < 더 록 >, < 패밀리 맨 >, < 스네이크 아이즈 >, < 비상 근무 >, < 페이스 오프 >, < 시티 오브 엔젤 >, <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 같은 영화들을 보며 생각했다. 왜? 왜 죄다 이 사람이 주인공인 거야? 그건 아직도 내게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고, 사람이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를 좀처럼 잊지 못하는 법이다. 나는 지돈씨에게 내가 가장 최근에 본 한국 영화인 < 남산의 부장들 >에 대해 말했다. 중반까지는 무척 몰입해서 봤다, 중반을 넘어가며 조금은 동어반복적이고 지지부진한 느낌이, 클라이막스 이후에는 뭔가 잘 정리되지 않은 듯한 느낌도 들었지만 전체적으로 재밌었다, 다만 어느 순간 —한국 현대사를 다룬 정치 영화가 아니라 가족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고 할까요. 이병헌이랑 이희준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계속 보다보니까 추석에 삼촌들이 고스톱 치다 싸우는 것 같고, 이성민은 꼰대 아버지고, 유일한 여성 캐릭터인 김소진은 미국에서 로비스트로 일하는, 레비 스트로스적인 의미에서 족외혼을 통해 교환된, 문자 그대로 출가외인이며…… 겉으로는 세련된 척, 젠틀한 척, 서로 존중하는 척하면서 뒤로 은근히 견제하고 돌려서 까고 음모를 꾸며 뒤통수치는 외국의 정치물과 달리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보다 직접적이라는 감상이 남았다. 그리고 그건 내게 아쉬움보다는 한국에서 한국 영화 나온다, 같은 생각이 들게 했다. 이런 이야기다.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평범한 관객으로서 나는 정치라는 공적인 관계까지 가족이라는 사적 프레임을 통해 파악하는 관점이 너무 익숙하다. 혹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관객으로서 내게 한국 영화는 어떤 시대를 다루건 지나치게 가깝게 느껴진다, 마치 가족처럼…… 그래서 우리는 한국 영화를 보고 한국 영화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작품의 매력과는 아무 상관없이 종종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는 걸까? 우리를 둘러싼 시간과 공간이 너무 좁아. 약간의 여유가, 숨을 돌릴 수 있는 거리가 필요해. 늘 그랬던 것처럼 지돈씨는 자신에게 아이디어가 있다고 했다. 무려 세 개나! “봐, 나한테 아이디어가 있어”라고 말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들뢰즈는 묻는다. 이런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듯이 아이디어가 있다는 것은 드물게 일어나는 사건이고 자주 오지 않는 일종의 축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아이디어가 있다는 것은 뭔가 일반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나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다. 가끔은. 하지만 매번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지돈씨는 어떻게 아직도 매번 아이디어가 샘솟는 거지? 지돈, 유 돈 스탑 네버 스탑? —첫 번째, 22세기의 영화 청년들이 우연히 21세기 초반의 영화를 발견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는 설정이에요. 일종의 SF처럼.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베터 콜 사울>에 나오는 영화과 학생들이었다. 어쩐지 22세기에도 그들은 지금과 똑같은 모습의 영화과 학생으로 남아 있을 것 같았다. 천재 감독이 될 수 있었지만 전공을 잘못 택한 22세기의 사울 굿맨에게 착취 당하며…… —두 번째, 이건 방금 니콜라스 케이지 얘기하다가 떠오른 건데, 재밌게 봤지만 이상우에게는 절대 말할 수 없는 영화들이라는 컨셉인 거죠. 쉽게 말하면 길티 플레져 같은? 그런데 정말 그래도 괜찮을까? 지돈씨와 나는 종종(실은 거의 항상) 글을 쓸때 서로를 등장시켜 할 말 못할 말 모두 하게 만들곤 하는데, 이상우를 등장시킬 때는 어쩐지 조심하게 된다. 상우씨가 특별히 뭐라고 한 적도 없지만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점이에요, 지돈씨가 말했다. 여기서 이상우는 실존인물이 아닙니다. 정연씨와 저의 초자아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인 거죠. —세 번째, 각자 상대를 내세워서 서로가 본 영화에 대해 쓰는, 금정연은 정지돈이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정지돈이 영화를 보고 느낀 걸 기록하고 정지돈은 금정연이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금정연이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하는 거예요. 3인칭 미니 픽션처럼. 물론 가장 내 마음에 든 건 세 번째였다. 22세기의 한국을 살아가는 청년들의 시점에서 21세기 초반의 한국 영화를 보는 게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지만 상상하긴 힘들었고, 이상우에게 절대 말할 수 없는 영화는 이상우에게 절대 말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영화 경험에 대해 짧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각자의 등장인물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신촌에 있던 녹색극장과 이대 앞 영화마당, 서울극장과 단성사와 피카디리와 씨네코아 같은 시내의 극장들에 대해 말했다. 비디오대여점과 극장에서 했던 아르바이트에 대해서도. 좌석들 사이에 떡하니 커다란 기둥이 있어 시야를 가리던 코아아트홀에서 < 버팔로 66 >을 봤다는 이야기를 하자 정지돈은 깜짝 놀라며 어떻게 그걸 극장에서 볼 수 있냐고 물었다. 얼마든지 볼 수 있죠. 내가 대답했다. 충분히 오래 전에 서울에서 태어나기만 했다면…… 정지돈이 영화를 본 곳은 대구극장과 한일극장과 만경관이었다. 그는 중학교 1학년이던 1996년 대구극장에서 < 미션 임파서블 >을 보며 처음 돌비서라운드를 경험했고, 그때부터 브라이언 드 팔마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여기서 질문. 만약 당시로서는 최첨단 음향시설이 설치된 대구극장에서 <미션 임파서블>을 보지 않았다면, 그와 드 팔마의 관계는 지금과 달랐을까? —귀를 중심으로 한 영화 경험은 관객의 자아로 깊숙이 진입한다고 토마스 엘새서가 말하긴 했죠. —그럼 지돈씨 자아 깊숙이 드 팔마가 있는 거예요? 와, 대박. —아니요. 제 자아 깊숙한 곳에는 드 팔마가 없습니다. 정지돈이 단호하게 말했다. —대신 탐 크루즈가 있죠. 귀와 음향은 영화 경험의 공간성을 전면에 부각시킨다, 라고 엘새서는 쓴다. 우리는 모퉁이에서, 그리고 벽 뒤에서, 심지어 우리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완벽한 어둠과 눈부시게 환한 환경에서도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많은 전통적 접근 방식이 영화 관객을, 이성적으로 동기화되고 목적 지향적인 방법으로 관람하며, 객관적인 방법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존재로 간주한 반면, 귀는 균형 감각과 공간적 감수성과 같은 요소로 초점을 옮긴다. 관객은 더 이상 영화 밖에 머무는, 시각 피라미드의 정점에 위치한 이미지의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라 음향적, 공간적, 육체적으로 영화적 조직과 엮여 있는 신체적 존재다…… 이듬해에는 피어스 브로스넌이 주연한 < 단테스 피크 >를 돌비서라운드로 보다가 등 뒤에서 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며 지돈씨는 쓸쓸하게 덧붙였다. —지금은 무엇에도 놀라지 않은지 오래 되었지만요. 정지돈은 또 아버지와 함께 한일극장에서 < 클리프행어 >를 보기 위해 매표소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던 일화를 들려주었는데, 줄이 너무 길어서 아무래도 못 보겠다고 생각하던 참에 아버지가 줄에서 쓱 나가 돌아다니던 암표상을 부르니 형님, 오셨어요? 하며 암표를 주었다고 했다. 어린 그에게 아버지가 비로소 아버지처럼 느껴졌던 몇 안 되는 기억이라고. 비슷한 무렵, 나 역시 아버지와 함께 < 쥬라기 공원 >을 보러 극장에 갔다. 마감에 허덕이는 만화가였던 아버지는 아는 암표상 동생이 있지는 않았고, 허름한 극장에는 사람이 많았던 것 같지도 않지만, 단순히 극장에 데려 갔다는 사실만으로 아버지와 얽힌 기억 중에 몇 안 되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밖의 다른 좋은 기억들은 집에서 비디오로 함께 < 구니스 >를, <레이더스>를, < 8번가의 기적 >을, < 어비스 >를, < 스플래쉬 >를, < 폴리스 아카데미 >를, < 오복성 >을, < 총알탄 사나이 >를, < 로보캅 >을, < 토탈리콜 >을, < 다이하드 >를, < 프레데터 > 같은 영화들을 보던, 보다가 어머니와 싸우기 전까지는 그래도…… 헐리우드파였던 내 아버지와 달리 지돈씨의 아버지는 장 가뱅을 좋아하던 유럽파였다. 이걸 헐리우드에서 헐리우드 나고 유럽에서 유럽 난다고 해야 할지. 정작 우리 부자는 헐리우드에 가본 적도 없지만…… 아무튼 우리는 헐리우드건 유럽이건 아버지들이 우리를 영화의 세계로 이끌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렇다면 한국 영화는 아빠인가? 우리는 한국 영화를 죽여야 하나? —그건 < 화이 >에서 다 끝난 거 아니었어요? 친부 하나에 계부 다섯, 마지막에는 상징적 아버지까지 일곱 명이나 죽이잖아요. —정연씨, < 암살 >을 생각하세요. <화이>에서 친자인 여진구에게 죽었던 이경영은 <암살>에선 친자인 전지현(B) 대신 자기 아버지를 직접 죽이지 못하는 인물들이 모인 살부계의 일원인 하정우에게 죽습니다. 그건 수정주의죠. 영화라는 시간은 선형적이지 않아요. 지돈씨와 나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고 대신 연락을 끊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우리의 기원에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를 영화 쪽으로 이끌었다는—엄밀히 말하면 영화 언저리에서 방목했다는—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세르주 다네는 시네필이 된다는 것, 그것은 단지 학교 수업과 병행해서 행해지는 또 다른 수업이자 지식을 주입하는 과정이었으며 이 수업에서 노란 표지 시기의 <카이에>가 길잡이 역할을 했고 몇 사람의 성인 통행안내인들이 우리의 은밀한 공모자가 되었다고 말했는데, 우리는 시네필이 아니고 한 번도 시네필이었던 적은 없지만, 우리들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최초의 성인 통행안내인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처럼 보인다. 정확히 다네적인 의미에서, 그들은 우리에게 저기 어딘가에 발견해야 할 세계가 있고 ‘그’ 세계가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바로 그 세계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이거다! 그때 갑자기 정지돈이 테이블을 두드리며 외쳤다. —한국의 영화는 일종의 교육-장치입니다. 남자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사적교육체제인 거죠. 로라 멀비는 주류 영화가 남성의 판타지와 쾌락을 제공하며 남성의 응시를 위해 구성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네는 시네필cinéphile을 영화-아들cine-fils라는 이보다 분명할 수 없는 자신만의 조어로 바꿔 말했고요. 아버지에서 아들로 내려오는 가부장적인 사적교육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한국에서 모두 두 곳입니다. 극장 그리고 목욕탕! —그건…… 마치 고대 로마 같은 이야기네요. —그렇죠! 캐롤라인 래빈에 따르면 학교는 열을 지어 정렬한 관객 개념을 고대 극장에서 빌려 왔습니다. 따라서 세 가지 학교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학교, 감옥, 그리고 극장. 레프 마노비치는 스크린의 계보에서 영화 스크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관람객이 자리를 뜨지 않고도 다른 공간을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움직이는 가상의 시선이죠. 하지만 이 가상적 운동성은 새롭게 제도화된 관객의 부동성을 대가로 얻어진 것입니다. 전 세계에 수백만 명의 수감자를 수용하기 위한 대규모 감방, 즉 영화관이 지어진 거죠. 수감자-관객은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 수도 자리를 옮길 수도 없습니다. 바로 그게 제가 극장에서 영화 보는 걸 싫어하는 이유입니다. —싫어하는 것 치고 극장에 너무 자주 가는 거 아니에요? —정연씨,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사는 사람은 없어요.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 수 없는 사람들의 사회, 푸코는 그걸 훈육사회라고 불렀다. 훈육사회는 감옥, 학교, 작업장, 병원 등 감금 환경의 구성으로 규정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극장이 추가되어야 한다. 들뢰즈는 우리가 훈육사회를 넘어—윌리엄 버로스의 표현을 빌려—통제사회로 가고 있다고 지적했는데, 그건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감금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사회다. 들뢰즈는 말한다. 통제는 훈육이 아닙니다, 고속도로로 사람들을 감금하지는 않지만, 고속도로를 통해 통제 수단을 늘릴 수 있게 됩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이것이 고속도로의 유일한 목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전혀 갇혀 있지 않고 무한히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데도 완벽하게 통제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미래입니다! 훈육사회에서 통제사회로. 극장에서 스마트폰으로. 소름…… 하지만 여전히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영화에 대해 말해야 하는 거지? 목욕탕이 배경인 곽경택의 < 억수탕 >? 하지만 그건 20세기 영화인데…… 아니면, 홍상수의 < 극장전 >……? 그날 밤, 책상 앞에 앉아 스포티파이가 추천하는 맞춤 플레이리스트를 듣다가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앨라니스 모리셋의 ‘넌 알아야 해You Oughta Know’를 흥얼거리는데, 등장인물들이 그 노래를 부르던 두 영화의 장면이 떠오른 것이다. 먼저 <투어의 끝>에서 제이슨 세걸이 분한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와 일행들이 차에서 노래를 따라 부르는 장면. 그리고 < 북스마트 >에서 케이틀린 디버가 친구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가라오케 반주에 맞춰 열창하는 장면. 이어지는 것은 < 트립 투 이탈리아 >에서 롭 브라이든과 스티븐 쿠건이 차를 타고 가며 앨라니스 모리셋의 ‘Jagged Little Pill’ 앨범을 두고 토론을 벌이는 장면이다. 티키타카 끝에 둘은 CD를 트는데 “내가 당신을 열받게 하나요?Do I stress you out?”라는 첫소절이 나오자마자 브라이든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한다. “그래Yes, you do.” 그리고 장면은 다시 < 레이디버드 >에서 어린 주인공이 기타를 치며 ‘아이러닉Ironic’을 부르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 다음에 떠오른 것들을 어떤 순서로 적어야 할지 모르겠다. 여러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폭발하듯 튀어올라 하나의 형태를 이루었다. 마치 작은 빅뱅처럼. 한 마디로 그건 들뢰즈가 말하는 “내게 아이디어가 있어”의 순간, 단지 영화적인 것밖에 될 수 없는 아이디어의 순간이었다. 톰 앤더슨, < 타짜 >, 한국, 그리고 노래방이 한데 섞인…… 톰 앤더슨은 로스앤젤레스가 등장하는 영화의 장면들을 이어 붙여 < 로스앤젤레스 자화상 >을 만들었다. < L.A. 컨피덴셜 >, <긴 이별>, < 블레이드 러너 >, <히트>, < 차이나타운 > 같은 헐리우드 영화에서 켄트 맥켄지의 <더 엑사일즈> 같은 독립영화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영화들을 통해 도시의 장소들, 건물들, 거리들, 교통체제, 재개발, 도시의 기원을 둘러싼 신화, 도시를 통제하는 경찰 권력, 인종차별과 계급문제를 모두 아우르는 중층적인 영화-에세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내가 톰 앤더슨의 영화를 본 이후로 언제나 하고 싶었던 일, <담배와 영화>라는 책을 통해 나름 시도했으나 결코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미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지만 나는 지돈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니까 한국 영화 속에 나타나며 한국 영화를 한국 영화로 만드는 한국적인 장면들을 모은 일종의 에세이 영화를 만드는 거죠, 우리가 직접! 이번 연재는 그런 영화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 기획 단계에서부터 포스트 프로덕션까지, 한국 영화에 대한 한국 영화를 만드는 두 사람의 좌충우돌 편력기를 그린 일종의 제작 노트가 되는 거고요! 지돈씨는 동의했고, 나는 검색과 기억에 의지해 노래방이 나오는 영화(25개)와 목욕탕이 나오는 영화(12.5개)의 목록을 정리해서 지돈씨에게 메일로 보냈다. 왜 노래방이냐고? 목욕탕이 극장과 더불어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인 사적교육체제가 이루어지는 장소라면, 노래방(룸싸롱이나 가요주점 등을 포함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장치가 구비된 방을 모두 포괄하는 의미에서)은—정확히 말하면 한국 영화에서 재현되는 노래방은—한국의 남성들이 우애를 다지는 호모소셜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여성 인물들이 함께 노래를 한다고 해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 친구 >에서 유오성이 부르는 ‘마이 웨이’나 < 비열한 거리 >에서 천호진이 부르는 ‘올드 앤 와이즈’와 < 광복절 특사 >에서 송윤아가 부르는 ‘분홍 립스틱’이나 < 너는 내 운명 >에서 전도연이 부르는 ‘오빠’를 비교해보라.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꿀벌 이야기에 꿀이 빠질 수 없는 것처럼, 한국사람 이야기에 노래가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하고…… —그런데 왜 하필 박무석이 곽철용 앞에서 ‘불나비’를 부르는 <타짜>의 장면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거에요? —지돈씨, 그건 말이죠…… (다음 회에 계속) *참고도서 [영화의 이론](벨라 발라즈 지음, 이형식 옮김, 동문선, 2003년) [영화가 보낸 그림엽서](세르쥬 다네 지음, 정락길 옮김, 이모션북스, 2013년)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장 루이 셰페르 지음, 김이석 옮김, 이모션북스, 2020년) ‘창조 행위란 무엇인가?’(질 들뢰즈 지음, [사유 속의 영화], 이윤영 옮기고 엮음, 문학과지성사, 2011년) [영화 이론 – 영화는 육체와 어떤 관계인가?](토마스 앨새서.말테 하게너 지음, 윤종욱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12년) [페미니즘 영화이론](쇼히니 초두리 지음, 노지승 옮김, 앨피, 2012년) [형식들](캐롤라인 레빈 지음, 백준걸.황수경 옮김, 앨피, 2021년) [뉴미디어의 언어](레프 마노비치 지음, 서정신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년)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