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비와 마검
- 감독
- 임원식
- 제작년도
- 1970
- 출연
- 남궁원, 오수미, 고상미, 황해, 이낙훈, 백일섭, 김순철, 사미자, 전숙, 황백, 지방열, 이예성, 박병기, 임해림, 윤일주, 김기범, 박일, 최일, 강동규, 박태훈, 한창열, 이동수, 송도, 김의한, 김용진, 강철원, 송일근, 김승남, 주일몽, 최재호, 손전, 추봉, 김소제, 김지영
임원식 감독의 대표작은 일제감정기에 순교한 주기철 목사에 관한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77)일 것이다. 임원식 감독이 연출, 제작한 작품 중 두 편이 상영중지를 당했는데 그 중 한 편이 이 작품이다. 이 영화는 명보극장 개봉 당일 중앙정보부의 지시로 간판이 내려졌는데 당시 옥중에 있던 사회운동가 문익환 목사를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그는 이에 항의해 중앙정보부 남산 대공분실에 갇히기도 했다. (사진1) 임원식 감독이 대표작으로 뽑은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의 포스터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은 개봉 전 문공부 우수영화로 선정되어 제작사인 합동영화사는 포상으로 외화수입쿼터를 받았다. 임원식 감독은 그 전해에 새마을정신을 구현한 영화 <어머니>(1976)를 연출해 대종상 작품상을 수상한 바 있다. 황해도 월남민 출신인 그는 남한에 대한 첫 인상으로 ‘육탄 10용사’의 용맹함을 꼽을 정도로 애국심 투철한 인물이었음에도 당시 정부의 강박증적인 검열 관행은 피할 수 없었다. 해방정국과 월남, 한국전쟁을 거치며 성장했고 한국영화의 황금기에 감독으로 데뷔해, 70,80년대 검열로 위기를 겪고 파산해서 재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인생은 줄곧 아이러니하고 우연적인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그런 사건들은 때로는 예기치 않은 실패로, 때로는 뜻밖의 행운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임원식 감독은 1932년 생으로 황해도 평산군 세곡면 누천리에서 태어났다. 구한말 의병 출신인 부친 슬하의 3남 2녀 중 막내로 자랐고, 곡창지대의 부농이었던 집안 덕에 일제 강점기는 큰 고통 없이 보낸다. 하지만 해방 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그의 가족은 월남을 결심한다. 먼저 월남한 서북청년단 특공대장인 큰 형님의 도움으로 1946년 12월 24일 38선을 넘어 서울 회현동 적산가옥에 자리 잡는다. 서울에 정착하기 위해 그는 얼마간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의약품을 열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거리에서 장사를 하며 가족의 생계를 도왔고 경제적 안정을 찾을 무렵 서울 성도중학교에 입학한다. (사진2) 1948년 경 서울 성도중학교(현재 용문고등학교) 3학년 시절의 임원식 감독 (사진3) 임원식 감독은 서울 성도중학교 시절 학도호국단 간부로 지냈다. 학도호국단 제복을 입고 있고 찍은 사진 중 오른쪽이 임원식 감독이다. (사진4) 학도호국단 제복을 입고 야외훈련 중인 임원식 감독의 모습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전쟁 초기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해 서울에 잔류하게 된다. 징집연령이었던 그는 집에서 숨어 지내다 배고픔 때문에 결국 인민의용군에 입대한다. 하지만 전선으로 배치되기 직전 탈출해 누나와 함께 전주로 피난한다. 9.28 수복 직후 피난지 전주에서 임호 라는 예명으로 학도의용군에 지원한다. (사진5) 1950년 학도의용군 서북지구대가 전주에 주둔하던 당시 단체사진이다. 아래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임원식 감독이다. (사진6) 1950년 학도의용군 특공위원회 위원장과 함께 찍은 것으로 오른쪽이 당시 특공위원회 특공대장으로 있던 임원식 감독이다. 그리고 학도의용군과 함께 대구로 이동한 후 전선에 배치되기를 기다리다, 대구에서 홀로 국민방위군에 입대한다. (사진7, 8) 1950년 19살의 앳된 나이에 국민방위군 즉 자신보다 나이 많은 민간인으로 구성된 대원 2천명을 인솔해 도보로 경남 사천에서 한산섬으로 이동시키는 임무를 맡았을 때이다. 완장을 차고 있는 이가 임원식 감독이다. 국민방위군에서 그는 대원 2천명을 경남 사천에서 한산도로 도보로 이동시키는 임무를 맡았고 다시 대구에서 벨기에 부대의 보급부대로 종군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240명의 부대원과 240개의 지게를 기차에 싣고 대구를 출발, 고랑포에 도착해 벨기에 부대에 합류한다. (사진9) 1951년 임원식 감독이 한국전쟁 당시 국민방위군 18중대 CTC부대 중대장으로써 함께 종군했던 29영국 여단 벨기에 부대의 군복으로 환복해 입은 모습이다. 이제 그는 국민방위군 18중대 CTC부대 중대장으로 벨기에 부대와 함께 전방에서 종군한다. 그는 고지에서 전투 중인 벨기에군에게 총탄을 조달하기 위해 지게에 총탄을 싣고 고지를 오르내리는 민간인 보급부대를 이끌었다. (사진10) 1951년 한국전쟁기 벨기에 부대 군복에 파이프를 물고 있는 임원식 감독의 모습이다. 10대 후반의 앳된 얼굴이다. (사진11) 벨기에 부대와 배구를 하던 네트 너머로 천막으로 된 막사가 보인다. 오른쪽이 임원식 감독이고 왼쪽은 함께 종군한 국민방위군 18중대 취사병이다. 국민방위군은 벨기에군이 제공하는 부식과 벨기에 군인들이 주는 팁이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전쟁은 길어지고 전투도 생활이 되어가자 국민방위군은 주둔지 주변의 주저 않은 집터를 뒤져 주인 잃은 쓸 만한 물건들을 내다 팔고 때로는 피난민들이 버리고 간 농작물을 거두어 팔아가며 생존을 이어갔다. 위험을 무릅쓰고 군인으로 위장한 뒤 외인부대가 있는 전방까지 들어온 양공주들 또한 그가 목격한 전쟁의 참혹한 일상이다. 전방에서 목숨을 걸고 외인부대와 함께 종군하는 국민방위군 부대원들은 적절한 대우와 보수가 주어지지 않자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원들의 불만에 공감한 중대장 임원식은 대구로 내려와 국민방위군 본부, 육군본부를 다니며 국민방위군의 권리와 보상에 대해 묻고 따졌지만 어느 하나 시원한 답을 주지 않았다. 소득 없이 부대로 복귀하기 직전 우연히 대구의 우체국에서 연락이 두절되었던 아버지를 만나 가족의 소재를 알게 된다. 그는 10대 후반의 어린나이에 겪은 전쟁을 통해 성장해갔다.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다양한 생존의 형태들을 목격하며, 요령 있게 살아 나가는 방법을 배우며 성숙해갔다. 그리고 감악산 전투 등 치열한 고지전을 치르고 난 뒤 국민방위군이 해체되는 시기에 가족들이 피난 중이던 제주도로 내려간다. 제주도로 내려온 그는 오현고등학교에 입학해 평범한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돌아간다. (사진12) 1952년 제주도 피난 시기, 오현고등학교 재학 중 교복을 입고 제주도의 돌담위에 올라가 있는 임원식 감독이다. (사진13) 제주도 피난 시기, 오현고등학교 재학 중 부산으로 수학여행 가 찍은 사진으로 평범한 고등학생의 생활을 보여준다. (사진14) 제주도 오현고등학교에서도 임원식 감독은 자연스럽게 학도호국단 간부로 활동했다. 학도호국단 대대장 복장을 한 임원식 감독으로 배경으로 보이는 초가지붕들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이때 그는 제주도 육군훈련소 군예대로 내려와 있던 문화예술인들이 주체가 되어 학생들을 대상으로 벌인 연극경연대회에 참여하며 연극에 눈을 뜨게 된다. (사진15, 16) 한국전쟁기 제주도에 주둔했던 군예대가 주최한 학생연극경연대회에서 남자 학교에 배당되었던 <붉은 기 땅에 떨어지다>라는 연극의 한 장면이다. 임원식 감독은 제주도의 오현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상경해 고등학교 시절의 연극경험을 살려 서라벌예술대학 2학년으로 편입한다. (사진17) 1954년 남산 후암동 교사 시절 서라벌예술대학 본관 앞에서 찍은 연극영화과 학생들의 단체사진이다. 두 번째 줄에 서 있는 인물 중 왼쪽에서 두 번째가 임원식 감독이고, 앉아있는 인물 중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연출가 김규대, 두 번째 줄에 서 있는 인물 중 왼쪽에서 세 번째가 무용가 은방초, 앉아있는 인물 중 왼쪽에서 첫 번째가 촬영감독 전조명이다. (사진18) 8.15 해방 기념 시가행진에 참여한 서라벌예술대학 사진으로 임원식 감독은 이때도 서라벌예대 학도호국단 대대장이었다. 서라벌예술대학 시절에는 대학연극경연대회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연출가 김규대 선생을 필두로 학생들과 함께 실험극단 창조극회, 원방각, 청협을 만들어 활동했다. (사진19, 20)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 재학 시절 대학연극경연대회 참여 작 유치진의 <통곡>에 출연한 임원식 감독의 모습이다. (사진21) 1960년 극단 원방각의 연극 입센의 <유령> 공연모습이다. (사진22) 학생들이 주축이었던 젊은 극단인 창조극회의 멤버들이다. 아랫줄 왼쪽부터 임원식 감독, 황용하 감독, 성우 남성우, 연극배우 조광일, 윗줄 왼쪽부터 촬영감독 전조명, 연극배우 김광도, 연극연출가 장순환, 사진에는 없는 배우 김보애까지 더해져 창조극회가 탄생했다. 그러나 창조극회를 기성극단 청협으로 만들려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서라벌예대 재학시절 제주도 출신 여성과 이미 결혼했던 임원식 감독은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HLKY 기독교방송에서 성우와 연출자로 활동했고 이광래 선생의 추천으로 육군본부 정훈감실로 옮겨가 대북방송을 하기도 했다. 이 시기 극단과 방송에서는 임무황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국방부 정훈국에서 제작한 김수용 감독의 군영화인 <윤 일등병>(1957)에 출연하기도 했다. (사진23) 김수용 감독의 <윤 일등병>(1957)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임원식 감독(미개봉 추정) 영화계로의 진출을 꾀하던 그는 일본 교포 출신인 유진식 감독의 <불멸의 성좌>(1959)와 <대원군과 민비>(1959)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하게 된다. 유진식 감독이 일본으로 돌아가자 그는 김수용 감독의 조감독으로 <연애전선>(1960), <부부독본>(1961)의 작품에 참여했다. 그리고 신필름에서 제작하는 <돌아온 사나이>(김수용, 1960)의 조감독으로 참여하게 된다. <돌아온 사나이>에는 4.19 당시의 거리 장면이 등장하는데, 실제 신상옥 감독이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서 시위하는 군중을 촬영한 장면을 영화에 사용한 것이다. (사진24) <돌아온 사나이>(김수용, 1960) 촬영 당시, 4.19로 인해 촬영이 중단됐을 때 신필름이 있던 광화문 동아빌딩 옥상에서 스태프들이 시위현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장면이다. 오른쪽부터 편집기사 오성환, 그 옆이 임원식 감독, 왼쪽 첫 번째가 배우 정동일이다. <돌아온 사나이>의 조감독이었던 그가 스웨덴 대사의 집에서 촬영한 가든파티 장면 준비를 탁월하게 해내자 신상옥 감독은 그를 스카웃한다. 신필름에 입사하게 된 그는 신상옥 감독을 도와 신필름이 다작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데 일조한다. 신필름에서 여러 번의 감독 데뷔 기회가 있었으나 1965년 개봉한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임원식·나봉한)가 그의 데뷔작이 된다. (사진25)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임원식·나봉한, 1960)의 촬영장소였던 경복궁에서 민비를 연기한 최은희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사실 임원식 감독의 초기 연출작 중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품은 <숙부인>(1966)이다. (사진26) <숙부인>(임원식, 1966) 포스터 당시 신필름의 제휴극장이었던 명보극장에 걸기로 한 영화에 문제가 생겨, 신필름에서는 열하루 만에 누군가가 작품을 완성해야 했다. 이때 임원식 감독이 <숙부인>을 9일 만에 완성시켜 검열을 받고 무사히 개봉 한 것이다. 신필름은 당시 전속 감독의 월급이 15만원이었는데 <숙부인>을 단시간에 무사히 완성하자 보너스로 15만원을 더 받았다고 한다. (사진27) <숙부인> 촬영현장의 임원식 감독 이후 그는 쇼브라더스와 신필름의 합작영화 <대폭군>(1966)의 연출을 위해 홍콩으로 건너간다. <대폭군>의 로케이션 촬영은 한국에서, 세트촬영은 중국에서 이뤄졌다. (사진28) 1966년 <대폭군>의 촬영을 위해 홍콩에 갔던 시기 쇼브라더스가 초대한 식사 자리이다. 서있는 왼쪽 끝 남자는 쇼브라더스의 엄준 감독이고 그 아래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엄준 감독의 부인이자 주연 배우인 리리화이다. 가운데는 묘장왕 역을 한 김승호가 앉아있고 서 있는 남자들은 오른쪽부터 장군역을 맡은 배우 성소민, 임원식 감독, 최경옥 감독이다. 앉아있는 오른쪽 끝 여자는 배우 고선애이다. 나머지는 쇼브라더스의 여배우들이다. (사진29) <대폭군>(1966)의 홍콩 촬영장의 모습으로 감독의자에 앉아 있는 그의 뒤편에 안경을 쓴 이가 홍콩 측 프로듀서 미스터 주이다. 그 옆으로 미첼카메라를 잡고 있는 홍콩촬영감독과 조수가 보인다. 연출자가 신상옥 감독이 아니라는 이유로 홍콩 스태프들의 파업이 있었지만 신상옥 감독이 홍콩에 들려 무마시키고 임원식 감독이 스태프들과의 갈등을 극복하며 <대폭군>을 완성한다. (사진30) <대폭군>(1966)의 홍콩 촬영장에서 홍콩 여배우 리리화와 세트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의 배경에 있는 다리모형은 세트로, 한국의 팔당에서 찍은 강 장면에 이 다리를 합성하기 위해 무척 정교하게 촬영해야만 했다. 촬영현장에서의 갈등도 극복해야 하고, 대규모 촬영에 특수촬영까지 해야 하는 부담 속에서도 비자 갱신을 위해 들른 대만에서 <나는 매국노>(1966)까지 연출한다. 1년여를 홍콩의 쇼브라더스에서 머물며 대규모 합작영화를 연출한 것보다 그에게 의미 있는 것은 쇼브라더스의 라이브러리와 편집실에서 당시 유행하던 일본의 검객 영화들을 보며 연구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국내에 돌아와 <풍랑객>(1968), <영>(1968), <맹수>(1969) 등을 연출하며 검술액션영화의 유행을 이끌게 된다. 독고성을 주인공으로 한 검객 영화 <영>은 사무라이액션과 <장고>(세르지오 코부치, 1966)같은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를 참고해 만든 작품으로 평단에서는 비현실적이고 만화 같다는 혹평을 받았지만 큰 인기를 끌게 된다. (사진31) <영>(1968)에서 요동 실향민 마을에 등장한 주인공 영(독고성)의 모습이다. (사진32) <영>(1968)에서 마적단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마을 주민들의 모습이다. (사진33, 34) <영>(1968)에서 독고성에게 연기지도를 하고 있는 임원식 감독의 모습이다. 그는 후속작으로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남정임을 협객으로 출연시킨 <풍랑객>을 직접 제작하려고 했으나 신상옥 감독의 설득으로 제작을 양보하게 된다. (사진35) <풍랑객>(1968)에서 남정임에게 연기지도를 하고 있는 모습인데 그는 남정임에게 액션시범을 보이다 다리가 부러져 보름간 촬영이 중단되기도 했다. 충무로에서 액션을 바탕으로 한 장르영화의 연출력을 인정받은 임원식 감독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에는 신필름 파견 감독으로 대양영화사와 세기상사에서 여러 작품을 연출한다. 제작자 한갑진의 요청으로 대양영화사에서 액션영화 <심야의 대결>(1969)과 액션사극 <의적 홍길동>(1969)을 연출했고 세기상사에서는 오수미 주연의 멜로드라마 <벌거벗은 태양>(1970)을 시작으로 검술액션사극 <민비와 마검>(1970), 공포영화 <춘색한녀>(1971), <설야의 여곡성>(1972), 에로틱사극 <대감신랑>(1971), 액션영화 <분노의 세얼굴>(1972) 등을 연출한다. (사진36) <설야의 여곡성>(1972)의 촬영현장으로 분장을 한 신인 여주인공 윤세희의 모습이 보인다. 윤세희는 당시 유명한 워커힐 카지노 딜러 출신으로 세기상사의 국쾌남 사장이 발굴한 배우이다. 1970년대 중반 임원식 감독은 신필름에서 충무로로 나와 프리랜서 감독으로 활동을 시작하는데, 그가 선택한 첫 작품은 삼영필름의 우수영화인 <아리랑>(임원식, 1974)이다. (사진37) <아리랑>(1974)의 촬영현장으로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이가 임원식 감독이다. 제작비 절감을 위해 테크니스코프로 촬영되었다. 그는 나운규 감독의 원작을 동아일보 해직기자인 장윤환과 시나리오 작가 장천호 형제가 야심차게 각색한 각본을 보고 반해 이 작품을 선택했다. 참의원 출신 부호의 아들 영진이 영화 <아리랑>을 보고 감화되어 광화문에서 만세운동을 벌이자 일본 경찰이 그를 박해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원작을 왜곡했고 선동적이라는 이유로 문공부 시나리오 사전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다. 제작기간이 늘어지자 제작사는 원작대로 각본을 수정하도록 권했고 제작비가 들지 않는 방향으로 영화가 만들어지길 바랬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임원식 감독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못한데다 테크니스코프로 촬영되어 그에게 아쉬운 작품으로 남게 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우수영화로 선정되어 삼영필름은 외화수입쿼터를 받게 된다. 임원식 감독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한국교구에서 안수를 받은 장로였다. 어느날 이사례 여사가 찾아와 이기풍 목사의 일대기를 다룬 <순교보>라는 영화의 연출을 그에게 의뢰한다. 그러나 그는 유신 초기, 사회운동을 활발하게 벌이던 기독교계를 예의주시하는 정부의 분위기를 고려해 교회전도용 영화로 만들자 설득해 이 작품을 16미리로 연출한다. 이 영화는 후에 그가 종교영화로 재기하는데 교두보가 된다. 1975년에는 몇몇 영화계 인사들과 함께 새마을연수원 지도자교육을 받는다. 이신명, 변장호, 최하원, 고영남, 임권택 감독 등이 임원식 감독과 함께 새마을연수원에 입소했다. 연수원에서 교육받는 동안은 술, 담배를 끊어야 했기에 고영남과 임권택 감독은 금단현상 때문에 퇴소한다. 새마을연수원의 교육내용에 감동받은 임원식 감독은 정부에서 영화계에 의뢰한 새마을영화의 연출자로 선택된다. 이때 받은 교육을 바탕으로 상이군인에게 시집온 여성이 아이를 키우며 자주적으로 마을을 재건한다는 내용의 영화 <어머니>(1976)를 감독협회 기획, 합동영화 제작으로 연출하게 된다. (사진38) 새마을영화 <어머니>(1976)의 한 장면이다. 상이군인(이순재)에게 시집 온 여성(윤연경)이 아이를 키우며 자주적으로 마을을 재건한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관객수 10만이 넘으면 홈런이라고 여기던 시절 16만이 넘는 관객이 들어 흥행에도 성공하고 15회 대종상에서 최우수작품상을 포함해 3개 부문의 상을 수상한다. 그 후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77)를 합동영화사에서 연출한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순교한 주기철 목사를 다룬 종교영화로 이 작품은 문화공보부의 우수영화로 선정되어 합동영화사는 외화수입쿼터를 받는다. 그러나 개봉 당일 중앙정보부에 의해 상영중지가 내려진다. 상영중지에 항의하는 임원식 감독은 남산 정보부에 갇히는 고초를 겪었지만, <저 높은 곳을 향하여>가 유신시대에 탄압받고 있던 종교지도자를 떠올려 민심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중앙정보부의 설득에 그는 결국 상영중지를 받아들인다. (사진39) 주기철 목사의 순교를 다룬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77)의 촬영 현장이다. 977년 상영중지를 당했으나 1981년 재개봉되어 그해 한국영화 관객동원 3위를 기록한 작품이다. 1981년 이 작품의 해금이 풀려 재개봉되자 20만 1천명의 관객이 들어 그해 한국영화 관객동원 3위를 차지한다. 그 덕에 1982년에 그는 영화인협회에서 흥행영화 감독들에게 주는 할리우드 연수여행 포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77년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의 개봉이 중지되고 고초를 겪다보니 그의 작품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합동영화사에 들어가 전무이사 겸 기획실장으로 5편의 작품을 기획했고, 2년 뒤에는 화풍흥업의 기획실장으로 4편의 작품을 기획하며 영화계활동을 이어갔다. 1980년에는 김태수 대표의 제안으로 태창흥업의 사장에 취임하게 된다. 외화는 김태수 대표가 맡고 한국영화는 임원식 감독이 책임지는 구조였다. 중견영화사인 태창흥업의 사장으로 처음 제작한 영화는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였던 조용필을 주인공으로 한 <그 사랑 한이 되어>(이형표, 1980)이다. (사진40) 임원식 감독이 태창흥업 사장으로 취임한 뒤 처음으로 제작한 작품 <그 사랑 한이 되어>(이형표, 1980)의 포스터이다. 일류 배우의 개런티가 2백만 원이던 시절 그는 조용필에게 5백만 원의 출연료와 추가로 2백만 원의 작곡료를 주고 캐스팅해 화제가 되었다. 그는 과도한 개런티로 영화인들의 빈축을 사 영화인협회에서 제명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작 전에 이미 제작비의 두 배가 넘는 지방 투자자들의 투자금이 몰려들었고 완성 후 흥행에도 성공해 큰 수익을 가져다 준 작품이다. 두 번째 제작 작품은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이다. 첫 제작 작품의 상업적 성공 이후 인권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그는 『기름밥』이라는 논픽션 단편에서 영감을 받아 버스안내양의 실상에 대한 각본을 작가 김승옥에게 맡긴다. 무사히 잘 완성되고 문공부 우수영화로 선정되었으나 이 작품은 개봉 후 위기를 맞게 된다. (사진41) 임원식 감독이 태창흥업에서 두 번째로 제작한 작품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의 한 장면이다. 자동차노조와 한국노총의 상영중지 요청이 제기된 것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삥땅검사, 알몸수색, 운전기사와 안내양의 부적절한 관계, 노조를 어용화해 묘사한 점 등이 운수노동자들의 인격을 모독했다는 이유였다. 결국 이 작품은 상영 7일 만에 자진해서 간판을 내리게 된다. 영화계에는 이 사건에 대해 노동부와 문공부가 노동자들의 상영중지 여론을 종용했다는 의혹이 떠돌았고 영화인들은 소재선택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4군데 장면을 자르고 1군데 장면을 재촬영해 공연윤리위원회의 검열을 다시 받은 후 1982년 6월에 재개봉을 했지만 흥행은 요원했다. 결국 임원식 감독은 지방 흥행사들의 이어진 손해배상 소송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고 재기불능 상태로 제주도로 낙향하게 된다. 제주도에서 영화계와는 거리를 두고 지내던 중, 그는 교계에서 만든 종교영화제작소로부터 선교영화 연출을 제안 받는다. 그가 연출한 선교영화는 곧 교인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게 되고 그 즈음 비디오문화가 확산되어 그가 제작한 종교영화 비디오테이프 판매 또한 급증했다. 1990년대 중반 케이블텔레비전이 등장하던 때에는, 기독교방송국의 초대 전무이사 겸 방송본부장을 역임하게 된다. 그리고 방송국을 퇴직하고 난 뒤 1999년부터 8년 동안 20대, 21대 영화감독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춘사영화제를 재개하고 스크린쿼터 투쟁을 벌이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갔고 이러한 활동을 인정받아 2001년에는 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사진42) 1999년부터 8년간 한국영화감독협회 제20, 21대 회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의 임원식 감독 모습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제주도에서 지내며 제주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을 지냈고 제주 4.3항쟁에 관한 현기영의 소설을 영화화 하는 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 임원식 감독의 구술은 어린시절 고향인 사리원의 풍경, 청소년기 월남민으로 한국사회에 적응해갔던 경험, 한국전쟁기 국민방위군으로 종군한 경험, 학창시절 학도호국단 활동 등 한국현대사의 다양한 면을 살필 수 있는 경험들로 가득하다. 또한 영화계에 입문한 뒤에는 거대 영화 기업 신필름의 체계와 쇠락, 한홍합작영화 경험, 유신시기 영화검열의 폐해 등에 관해 의미 있는 증언이 확인할 수 있다.
지난 회에는 ‘공포’라는 글자가 들어갔지만 별로 공포스럽지 않은 영화를 소개했다. 이번에는 그래도 ‘납량특집’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을만한 영화를 골랐다. 여러분에게 크나큰 공포를 전해줄 영화는 박윤교 감독의 < 망령의 곡 >이다. 우리나라 공포영화는 많은 수가 원한을 다룬 귀신 영화다. 이 한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주로 여성들의 수난에 따른 억울함을 다룬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 공포영화의 클래식들, < 여곡성 >, < 월하의 공동묘지 >, < 살인마 > 등등에서 등장하는 ‘한을 품은 여자 귀신’이라는 초월적 존재는 드라큘라, 강시, 늑대인간 같은 다른 나라의 괴물들처럼 우리나라 고유의 캐릭터였다. 이 귀신은 특히 ‘한’이라는 응축된 억울함을 주된 힘으로 사용하는데 이 한이 깊고 넓을수록 귀신의 파워는 한층 더 세진다고 할 수 있겠다. < 망령의 곡 > 역시 비슷한 설정의 귀신이 등장하는데 다른 귀신 이야기들과는 조금 다른, 독특한 점들이 눈에 띄어 재미있는 영화다. 건설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대부호 김만호의 아들 김태화는 나이 서른을 먹은 5대 독자 노총각이다. 그의 부모님은 신붓감을 찾기 위해 백방을 수소문하는 한편, 조부는 증손자를 보기 전엔 눈을 감을 수 없다며 조급함을 더한다. 그러던 중, 태화의 어머니가 치성을 드리기 위해 드나드는 절 승가사에서 고아로 자란 행자 점례를 발견하게 된다. 예쁘고 성격마저 참한 점례를 급하게 신부로 맞이하게 된 태화네 가족은 그녀에게 모든 편의를 제공하고, 점례는 이 모든 것을 부처님께 감사드리며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그녀가 임신 3개월이 되었을 때 문제가 생기고 만다. 몸에서 난소종양이 발견되어 아이를 낳으면 점례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그녀는 의사를 붙들고 살려달라고 애원하지만, 태화의 가족들은 점례가 어떻게 되든 아이를 낳아야 한다며 버틴다. 이윽고 다가온 출산일. 그때까지 점례는 생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다가 마지막 순간에 남편을 불러 자신이 죽으면 승가사 뒷산의 양지바른 곳에 묻어달라고 당부한다. 사내아이가 태어나고, 기어코 죽어버린 점례. 태화는 부하직원들을 시켜 승가사 뒷산에 아내를 묻어주길 당부한다. 그리고 사무실에서 잠깐 졸던 태화는 “아이, 추워... 아이 추워...” 라는 환청을 듣는다. 아내 점례의 목소리였다. “산모의 목숨이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평범한 귀신영화의 전형적인 스토리이다. 게다가 초반부는 배우들의 연기나 연출이 클리셰의 퍼레이드라 불러도 좋을 만큼 뻔하다. 요새야 드라마에서도 사용하지 않을 표현들이지만 80년대이니 그러려니 하지만 지루함을 참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부분만 지나면, 다른 귀신들은 보여주지 못한 무시무시한 복수에 여러분은 치를 떨 것이다. 라고 거창하게 이야기는 하지만 막 고어씬이 난무하거나 귀신이 너무 무서워서 오줌을 지릴 것 같다거나 하는 종류는 아니다. 다만, 이 점례 귀신이 보여주는 복수의 집요함이 장난이 아니다. 점례는 일단 겁을 준다. 환청과 환영을 통해 남편인 태화의 눈에 나타난다. 그리고 자신을 ‘관이 무거워서 귀찮다’는 이유로 승가사의 뒷산이 아닌 다른 곳에 묻은 부하직원을 처단한다. 자신이 설정해놓은 폭파구역에 들어가 폭사 당하는 안 기사와 모든 사실을 알아버린 남편의 손에 (실수로) 살해당하는 최 기사. 그리고 태화는 부하직원의 죽음들 앞에서 실성해버린다. 다음 타깃은 자신의 죽음을 묵과한 병원 원장이다. 그녀는 간호사에 빙의되어 원장을 위협한다. 원장은 메스를 들고 간호사를 죽이려 하고, 겁에 질린 간호사는 옥상까지 도망갔다가 원장과 함께 사이좋게 추락사하고 만다. 점례의 살생부에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주변인들의 처단 이제 본격적인 김 씨 일가에 대한 복수가 행해져야 하는데, 영화는 갑자기 25년의 시간을 뛰어넘는다. 이 뜬금없는 전개에 여러분은 당황할 것이다. 아무런 언급도 없이 그저 컷 하나 바뀐 걸로 사반세기가 흘러버린 것을 성의 없다거나 어이없다고 말할 수는 있을 테지만, 그러지 말자. 놀라지 말자. 이것은 한을 품은 귀신의 집념을 보여주려는 연출인 것이다. 나 역시 좀 얼떨떨해서 이게 뭔가 하고 갸우뚱했는데, 아주 중요한 힌트를 주어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상황을 풀어낸다. 점례가 사망 당시 낳은 아들 경수가 25살이 되어 이제 장가간다고 들떠있는 것이다. 경수는 아내 영숙과의 신혼여행에서 돌아온다. 이때, 집에는 때마침 손님이 한 사람 와 있다. 그는 점례를 키웠던 승가사의 주지 스님. 스님이 집으로 들어오자 내내 누워있던 경수의 조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25년간 실성해있던 태화는 정신을 차린다. 경수는 아내와 함께 태화에게 인사를 올리고 복덩이 손주며느리가 들어와 이제야 가문이 일어서겠다며 신이 난 할머니와 함께 경수 역시 흥이 오른다. 그러나 할아버지만이 인상이 좋지 않은데 그는 진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경수의 아내 영숙에게는, 점례가 빙의되어 있었다. 이들이 한 집에 모인 밤부터는 점례의 처절한(?) 복수가 시작된다. 일단 그녀는 영숙의 몸에 빙의되어 시어머니를 살해한다. 그리고 그녀를 죽인 칼을 들고 시아버지의 방에 찾아가는데, 그의 뒤에서 칼을 내려치는 찰나! 주지 스님이 나타나 점례를 타이른다. 하지만 점례는 복수심에 눈이 멀어 스님조차 공격을 하고, 결국 점례보다 더 귀신같은 스님(점례는 발로 뛰며 공격을 하는데 스님은 순간이동을 하신다.)의 퇴마에 의해 승천을 하고 만다. 이제 가족의 평화는 찾아왔을까? 복덩이가 들어온 줄 알았더니... 이 영화의 귀신이 독특한 점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바로 복수하지 않고 주변인만 처단한 후 25년을 기다렸다는 것인데, 이유는 아마도 경수의 아내에 빙의되어 들어가 손주 며느리라는, 본인이 위치했던 같은 자리에서 복수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 증거로 손자 며느리 영숙과 할머니가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점례와 시어머니가 이야기를 나눴던 장면과 똑같이 찍었는데, “찬물에 손 담그지 말고 먹고 싶은 건 마음껏 먹고... 어서 손자를 보아야 한다.” 하는 대사마저 완전히 똑같다. 자신이 피해를 봤던 자리에 다시 들어가기 위해 25년을 참아냈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 자리가 어쨌든 자기 아들의 아내(!)의 자리라는 것이 꽤나 파격적이다. 그녀가 복수에 성공했다면 아들 경수는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글쎄. 장담 못 할 일이다. 25년을 사이에 둔 똑같은 대사 두 번째 특이한 점은, 다른 영화에 등장하는 원한에 사무친 여성 귀신들이 최후에는 복수에는 실패하지만 가해 당사자들의 뉘우침을 듣고 어쨌든 한을 풀고 승천하는 것이 일반적인 반면, 점례는 주지 스님에 의해 ‘퇴치’된다는 점이다. 점례는 사라지는 순간까지 이 가족을 저주한다. 물론 시아버지 만호와 남편 태화는 자신의 비인간적 행태를 반성하고, 또 죗값을 치르기 위해 선행을 지속하며 살 것을 다짐하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이 장면은 점례와 완전히 유리되어 있다. 영화의 전체적인 톤은 ‘인과응보’를 다루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결국 죽는 것은 주변 인물들과 시어머니뿐, 이 가족의 핵심권력인 남자들은 모두 살아남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시어머니도 귀신이 되어 이 집 남자들을 벌하러 돌아와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 영화는 ‘한국 공포영화의 거장’이라 불렸던 박윤교 감독이 말년에 만든 작품이다. 그는 데뷔 초기부터 공포영화를 만들기 시작해 < 백골령의 마검 >으로 흥행감독의 자리에 올랐다고 한다. 이후 < 옥녀의 한 >, < 며느리의 한 >, < 꼬마신랑의 한 > 으로 이어지는 ‘한(恨) 트릴로지’를 만들고 공포영화 전문 감독으로 인정받았다. < 망령의 곡 >은 핍박받는 며느리의 한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영화가 아니라 오히려 끔찍한 상황에서 살해돼 귀신이 되고, 또 귀신이 되어서도 변변한 복수도 못 하고 ‘퇴마’ 당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흥행은 시원치 않았다고 한다. 6~70년대 흥행사로 이름을 날렸던 박윤교 감독이지만 80년대에 들어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는데, 또 한 번 재기를 노렸던 망령 시리즈의 2탄 < 망령의 웨딩드레스 > 역시 흥행에 실패했다. 좀 더 현대적인 배경으로 이야기를 구성했지만 당시의 트렌드를 잘 따르지 못했던 건지, 아니면 ‘망령’ 이라는 이름이 구식으로 보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좀 더 전통적인척하면서 변태스러운 <망령의 곡>이 취향에는 더 잘 맞는 것 같다. 가끔 뻔할 것 같이 생각되는 영화에서 이런 의외의 설정들이 튀어나오는 재미가 결국 B급 영화를 끊지 못하게 하는 이유인 것 같다. 뜨거워지는 여름, 맥주 한 캔씩 들고 여자친구와 함께 <망령의 곡>을 보며 더위를 쫓는 건 어떨까. 여자친구가 “니네 어머니가 저러면 어떡할 거야?”라는 질문을 하면 어쩌냐고? 자. 이제부터 게임을 시작하지... 지미옥 정세혁 박암 감독: 박윤교 각본: 유일수 개봉극장: 대한(서울) 관람인원: 77,819명(서울)
2013년을 결산하던 중에 영화 관람 행태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영화 관람 2억 회(‘영화 관객 2억 명’보다 ‘영화 관람 2억 회’가 더 정확한 표현이다)라는 대기록은 이제 한국에선 ‘영화 관람’이 일상적 문화생활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더불어 흥행 영화보다 취향 영화를 선호하는 1인 관객, 즉 ‘나 홀로 관객’이 전체 예매 관객의 17%를 차지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기존의 ‘시즌 공식’을 깨는 슬리퍼히트 영화가 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관람 행태 변화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올해 ‘시즌 공식’을 박살 난 최고의 ‘슬리퍼 히트’를 꼽으라면 단연 제임스 완 감독의 < 컨저링 >이다. 스산한 가을에 조용히 개봉해 상상 이상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던 <컨저링>과 그 뒤를 이어 개봉한 ‘이한치한’ 호러 < 인시디어스: 두 번째 집 >에 대한 호러 관객의 반응도 기대 이상이다. 제임스 완 감독의 호러 영화가 가진 재미는 익숙한 클리셰를 비틀고 뒤섞어 이종집합하는 기발한 발상과 그 아이디어를 밀어붙이는 배포에 있다고 본다. 이 모든 것은 ‘공포의 속성’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제대로 기를 못 펴는 최근의 한국 호러 영화들과 비교하면, 특히 아쉬움이 더 커진다. CG 기술과 특수효과가 제아무리 번듯해도, 공포의 속성과 맞닿지 못하면 소용없다. 매끈하되 무섭지 않은 최근의 공포 영화보다 투박하지만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무서웠던 옛 한국 공포 영화가 그리워지는 이유다. 한국 공포 영화는 ‘소복을 입고 산발한 여인네들의 원맨쇼’라는 오해를 ‘쩍’ 소리 나게 쪼개버린 영화가 있다. 한국 공포 영화의 전통적인 깜짝쇼 레퍼토리에 익숙해졌다고 자만하던 나를 얼어붙게 만든 장면. 도깨비불이 날아다니는 한밤의 공동묘지에서 무덤 하나가 뭉게뭉게 연기로 휩싸이더니, 쩍 하니 갈라지고 시신이 벌떡 일어났다. 압도적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무덤 트라우마를 남겼을 이 작품이 한국 공포 영화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권철휘 감독의 < 월하의 공동묘지 >(1967)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나중 일이다. 어린 시절에 섬뜩한 잔상을 복기하기 위해 <월하의 공동묘지>를 다시 본다면 뜨악할지도 모른다. 기억 속 무서운 장면들은 예상보다 훨씬 코믹하다. 오히려 상상 이상으로 촘촘한 드라마에 놀라게 된다. 때는 일제 말기 표독스러운 아내 난주( 도금봉 )가 전처 명선( 강미애 )의 어린 아들을 독살하려던 찰나 남편 한수( 박노식 )가 들이닥친다. 서로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면 부부싸움을 하는 그들의 사연은 이렇다. 명선은 사랑하는 남자를 먹여 살리기 위해 기생이 되었다가 병을 얻고, 그녀의 병간호를 위해 가정부로 들어온 난주는 재산을 가로채고자 의사 태호( 허장강 )과 짜고 명선을 죽인다. 끝내 한수와 어린 아들마저 없애려다가 무덤을 쪼개고 돌아온 명선의 원혼이 원수를 갚는다는 해피엔딩. 최신 막장 TV 드라마 뺨치는 줄거리를 1960년대 영화에서 만나는 것도 신선하지만, 더 놀라운 건 배포 좋게 섞여 들어간 실험적인 장치들이다. 괴기스러운 몰골의 변사가 등장해 주인공의 사연을 구구절절 읊기도 하고, 자결한 명선의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유서는 산발한 여인들이 ‘창 뮤지컬’로 재연하는 식이다. 보석 같은 ‘퓨전 호러’라 칭하기에 충분하다. < 월하의 공동묘지 >가 탁월함은 ‘과연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에 있다. 자고로 귀신보다 무서운 게 사람이라고 했다. 사실 이 영화의 진짜 공포는 쩍 갈라지는 무덤이나 후반 10분간 공포 영화의 소임을 다하려는 듯 몰아치는 귀신의 깜짝쇼가 아니다.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갓난아이건, 정을 통한 남자건, 음모의 협조자건 ‘뚝딱 죽여 버리면 그만’이라고 여기는 난주의 서늘한 욕망이다. 특히 난주가 죽인 줄로만 알았던 명선의 어린 아들이 살아나자 아이의 목을 덥석 움켜쥐는 장면은 특수효과나 분장의 도움 없이도 등골이 서늘하다. 원조 ‘호러 퀸’ 故 도금봉 여사(1930~2009)가 아니었으면 상상하기 힘들 공포. 그녀는 한국 공포 영화사에서 가장 독보적인 여배우다. < 살인마 >(1965)를 시작으로 < 목 없는 미녀 >(1966) < 생명을 판 사나이 >(1966), <월하의 공동묘지>와 < 이조여인 잔혹사 >(1969) < 백골령의 마검 >(1969) < 악마와 미녀 >(1969)를 통해 원조 호러퀸에 등극했다. 1960년대에 한국 여배우 중 남자 피를 빠는 흡혈 마녀 역할을 누가 소화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뒤져봐도 대안 없는 선택이다. <월하의 공동묘지>는 한국 공포 영화계에 한을 품은 소복 귀신의 이미지를 정착시킨 첫 작품이자, 배우 도금봉의 육신을 빌어 현대적 의미의 욕망의 화신을 배출한 에로틱 스릴러로 재음미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