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고 앳 더 웨딩
- 감독
- 노아 바움백
- 제작년도
- 2007
- 출연
- 니콜 키드먼, 제니퍼 제이슨 리, 잭 블랙, 애슈리 앳킨슨, 존 터투로
영화 너머의 포스트-시네마를 가늠하면서, 여전히 남아있는 영화의 흔적도 제시합니다. 필름이 유령처럼 배회하다 떠난 자리를 상속받은 것은 극장이다. 영화가 디지털화되는 과정에서 필름의 쇠퇴는 곧 영화의 죽음이라는 담론이 있었고, 그 서사의 효력이 다하자 극장의 위기론이 부상했다. 오늘날 극장은 베일을 두른 채로 우리 앞에 나타나 지난날의 영광을 추억하면서, 그와 동시에 DVD, 불법 다운로드, 스트리밍 플랫폼에 밀려나고 있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하소연하는 유령과 같다. 어떤 이들은 극장에서의 유일무이한 영화 관람 경험이 사라지면 그때의 영화는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을 거라고 경고한다. 그들은 극장이 영화의 위기와 죽음을 방어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라고 굳게 믿는 듯하다. 하지만 극장의 경험을 포함하는 과거의 영화 경험을 상속하지 않으려는 이들도 있다. 동시대 영화 관람 경험은 모순적이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 이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연속적인 것과 단절적인 것 사이에서 팽팽한 줄다리기가 벌어지는 모양새가 나타나고 있다. 극장에 앉아 스크린에 투사된 이미지를 바라보던 과거의 관람 방식은, 오늘날 노트북, 태블릿 PC, 핸드폰과 같이 이동과 휴대가 편리한 디지털 기기를 활용하여 관객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모니터에 출력된 이미지를 바라보는 관람 방식으로 바뀌었다. 프란체스코 카세티(Francesco Casetti)는 자신의 책 『뤼미에르 은하계 : 도래하는 영화를 위한 일곱 개의 핵심어(The Lumière Galaxy: Seven Key Words for the Cinema to Come)』(2015)에서 이런 변화를 영화의 재배치 (relocation)라고 부른다. 그는 영화가 새로운 환경 속에서 그리고 새로운 기기를 통해서 재활성화 또는 재목적화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 영화를-넘어서는-영화의 경험 ’과 ‘ 영화로-회귀하는-경험 ’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 영화는 여전히 영화적인 것으로 회귀하는 동시에 전혀 영화적이지 않은 것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재배치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미디어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는 관객의 실천 에 있다. 단순히 영화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상태가 아니라 영화가 우리에 의해 구성되는 방식과 그 결과가 중요한 것이다. 영화의 위치가 달라져도 영화에 대한 관객의 감각과 기억이 남아 있고, 이전과는 분명하게 달라진 영화를 기존의 영화처럼 바꾸어 놓기 위한 관객의 실천이 있다면, 여전히 영화는 영화적인 어떤 것으로 존속할 수 있다. 극장에서의 영화 관람 경험도 마찬가지이다. 관객은 극장이 아닌 장소에서도 극장의 경험을 복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디지털 기기로 영화를 관람하면서 모니터의 밝기를 조정하거나 스피커의 볼륨을 조정하여 최대한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와 유사한 관람 환경을 구축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오늘날 관객은 디지털 기기를 활용하여 극장과 같은 곳에서 보장되는 몰입의 환경, 즉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관객을 지킬 수 있는 실존적인 버블(existential bubble)을 스스로 구축할 수 있다. 이처럼 관객은 영화를 둘러싼 달라진 환경을 수리함으로써 본래의 영화적 경험을 복원한다. 카세티에 따르면, “영화는 새로운 환경에 직면했고 새로운 조건을 마주하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를 포기 하지 않았다. 요컨대, 우리로 인하여 영화는 재배치되고 있는 것이다.” 카세티(좌)와 앙드레 고드로, 필립 마리온(우)의 저서 (사진: “ The Lumière Galaxy ”, “ The End of Cinema? ”, Columbia University Press) 극장은 다른 자리에서 다른 경험과 함께 다시 태어나고 있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앙드레 고드로(André Gaudreault)와 필립 마리온(Philippe Marion)이 『영화의 죽음?: 디지털 시대의 위기 속 매체(The End of Cinema?: A Medium in Crisis in the Digital Age)』(2015)에서 제시한 ‘영화의 이중 탄생 (cinema’s double birth)’이라는 개념을 참고하고자 한다. 이 개념에 따르면, 영화는 역사적으로 여러 위기를 거치면서 새롭게 태어나기를 반복했다. 영화의 이중 탄생은 영화가 기술적으로 한번 그리고 제도적으로도 다시 한번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의 탄생이 역사적으로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실제로 영화는 사운드의 도입, 텔레비전의 발명, 비디오 기기의 보급, 디지털화와 같은 기술적 발전 속에서 위기와 변화를 겪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영화의 탄생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넘어서 아직 영화의 탄생이 완료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는 영화의 탄생에 있어서 가장 최신 버전에 해당하는 것일 뿐이다. 극장의 이중 탄생, 즉 극장 문화의 제도적 안착은 영화사 초기 30년 동안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그 과정은 유랑, 정착, 성전의 세 단계로 세분화할 수 있다. 1) 유랑 의 단계: 19세기 말, 카메라와 영사기의 발명과 함께 등장한 영화는 카페, 놀이공원, 박람회, 보드빌, 장터와 같은 곳을 전전하면서 일시적으로 상영되는 문화적 이벤트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2) 정착 의 단계 : 1905년을 전후해서 미국을 중심으로 작은 상점을 개조하여 만든 극장인 니켈로디언(Nickelodeon)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비로소 영화만을 위한 공간이 생겼다. 상설영화관으로서의 니켈로디언은 30석 내외의 좌석을 갖추고, 5센트의 입장료를 책정했고, 주 고객은 노동 계급이었다. 3) 성전화 의 단계 : 1920년대를 기점으로 다양한 인종, 성별, 세대를 수용하기 위해 대규모의 좌석, 화려한 외관과 실내 장식, 주차장과 매점과 같은 편의시설을 갖춘 영화 궁전(movie palace)이 등장한다. 영화학자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Siegfried Kracauer)는 영화 궁전이 오락을 숭배하는 공간이면서 고단한 현실로부터 달아나려는 관객을 위해 마련된 일종의 도피처와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그는 영화 궁전이 정신적으로 거주할 곳을 잃은 자들을 포용하는 성격이 있음을 강조하면서 그곳을 ‘집 없는 자들을 위한 안식처’라고 불렀다. (좌) 1908년부터 1914년까지 5센트의 입장료를 받고 운영되었다고 기록된 캐나다의 “Comique movie theatre” (우) 미국 텍사스 샌 안토니오에 위치한 극장 “Majestic Theatre”. 스페인의 지중해풍 양식을 반영해 1929년에 지어졌다. (사진: “ Front of Comique movie theatre ”, City of Toronto Archives / “ The Venues ”, Majestic & Empire Theaters) 이런 역사적 사실은 크게 두 가지를 시사한다. 하나는 극장이 영화의 유일한 경험이 아니라 여러 가능한 경험 중 하나라는 것을,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극장의 경험은 영화의 역사와 대중의 기억 속 깊은 곳에서 단단한 지층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넌지시 지시한다. 디지털화 이후 영화는 더 이상 극장에 귀속되지 않는다. 이런 변화 속에서 극장은 영화의 경험을 위한 유일한 장소는 아니지만 영화적 경험의 회귀를 발생시킬 수 있는 근원적 장소이자 여러 영화적 경험이 참조하는 하나의 이념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극장의 경험은 어떻게 이루어지며, 그것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이미 여러 비평가와 이론가들이 지적한 것처럼, 극장에서의 영화 관람은 건축적 공간, 각종 기계 장치, 그리고 관객이 결합해서 만들어낸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의 결과물이다. 구체적으로 그 경험은 극장이라는 건축적 공간이 외부의 자극을 차단함으로써 만들어내는 밀폐된 공간, 카메라, 영사기, 스크린으로 구성된 기계적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환영의 세계, 그리고 좌석에 기댄 채 스크린을 응시하는 관객의 욕망이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낸 것이다. 프란체스코 카세티는 자신의 최근 저작인 『스크리닝 공포(Screening Fears)』(2023)에서 영화관 특유의 스크린 경험을 “ 투사/방어 복합체 (projection/protection complex)”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투사/방어 복합체는 기계적, 심리적, 사회적 장치들로 구성된 것으로, 물리적으로 폐쇄된 공간을 통해서 관객을 현실로부터 분리하는 동시에 스크린의 투명한 이미지를 통해서 관객을 다른 세계와 연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투사/방어가 하나의 짝을 이룬다는 것은 영화적인 경험이 현실과의 연결/분리의 모순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과 같다. 이 모순은 관객의 심리적 요구와도 무관하지 않다. 관객은 영화 속 세계와 연결되거나 그 세계에 몰입 하고 싶으면서도 그와 동시에 영화가 제시하는 환영을 거부 하고 자신이 실제 현실에 발을 딛고 있음에 안도감을 느낀다. 관객은 영화를 통해 꿈을 꾸면서 영화에서 깨어나기를 바라는 이중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 카세티는 계보학적인 관점에서 영화가 아닌 것에서도 투사/방어, 즉 관객인 우리를 스크린 속 세계와 연결하면서도 분리하는 이중의 경험이 나타난 역사적 사례가 있음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영화-이전(pre-cinema)의 시기에 해당하는 판타스마고리아는 숨겨진 영사기의 빛을 통해 죽은 자의 이미지를 안전하게 바라보는 경험을 제공한 경우이다. 그리고 영화-이후(post-cinema)의 시기에 해당하는 화상 채팅과 같은 오늘날의 디지털 버블은 타인과의 접촉 없이 실시간으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경험을 제공하는 경우이다. 각각의 매체적 경험은 극장과 스크린을 매개로 여기와 저기의 분리와 연결을 동시에 가능하게 만드는 영화적 경험과 친연성을 갖는다. 카세티는 이러한 계보학적 접근을 통해서 영화의 탄생과 발전이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안식처를 갖길 바라는 대중의 심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재차 강조한다. 그러한 영화적 경험 속에서 극장은 현실의 충격을 방어하기 위한 대피소로, 스크린은 현실에 대한 모의실험을 매개하는 장치로, 영화 이미지는 현실에 대한 예방주사로 존재한다. 만약, 카세티가 말하는 영화적 경험의 기원적, 본질적, 근원적 속성이 관객의 실천과 함께 역사적으로 회귀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오늘날 제기되는 극장의 위기론이 지나친 기우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설령 극장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더라도 극장의 경험은 유령처럼 우리에게 상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극장이 없는 자리에서도 극장은 유령처럼 나타나 관객인 우리의 귀에 대고 다음과 같이 속삭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여전히 영화적이라고. 이도훈(영화평론가) l 대학에서 미디어, 대중문화, 영화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느리게 보고, 느리게 쓰지만, 꾸준히 영화와 관련된 비평과 연구를 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단독 저서 『이방인들의 영화 : 한국 독립영화가 세상과 마주하는 방식』(2023) 집필, 독립영화, 에세이영화, 포스트-시네마 등과 관련된 학술 논문 집필.
웨스 앤더슨의 스타일에 관하여 웨스 앤더슨(이후 앤더슨)의 영화에 관한 주된 불평은 강박적이고 화려한 이미지의 형식적 아름다움에 비해 내러티브의 밀도가 낮다는 것이다. 영화의 서사가 지닌 명확한 목표가 있음에도 주인공의 감정과 주된 갈등에 집중하기보다 산만하게 여러 인물과 주변 사건을 나열하듯 펼치며, 이야기 자체보다 이야기를 표현하는 시청각적 형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느끼기 때문이다. 또한, 영화 속 인물들은 그럴듯한 가상의 세계 안에 살아가는 실제 인간이라기보다 인형극 속 인형처럼 존재하며, 배경이 되는 공간도 로케이션과 세트장의 구분 없이 무대화된 허구적 공간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앤더슨 영화의 특성은 누군가에게는 불평을 넘어 시각적 스타일 외에는 말할 것 없는 텅 빈 영화라는 비판에 이르게 한다. 텅 비었다는 가치 판단을 제외하고, 강박적으로 통제된 시각적 이미지에 반해 내러티브가 온전히 제어되지 않고 산만하게 구성되어 형식과 내용 사이에 연결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바라보면, 강박적으로 통제된 이미지를 통해 영화의 허구성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서사에서도 그럴듯한 극적 이야기에 이르는 고전적 구조가 아니라 산만한 구성을 통해 몰입을 방해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는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영화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예컨대 앤더슨 세계의 스타일이 완전히 자리 잡기 전인 데뷔작 < 바틀 로켓 >(1996)을 보자. 영화의 핵심 사건을 이끌어가는 인물인 디그넌(오언 윌슨)은 서점과 공장을 터는 행위를 범죄 영화의 한 장면을 모방하듯 실행한다. 하지만 그의 모든 작전은 장르 영화처럼 흘러가지 않고, 모방임이 드러난 방식으로 엉성하고 우스꽝스럽게 작전이 진행되거나 실패에 이른다. 그럼에도 디그넌의 계획들은 그가 추구했던 일상적인 삶 바깥의 일탈적 범죄에 도달하며 그 스스로도 만족한다. 법적 처벌을 받고 감옥에 갇혔다는 암울한 상황과 그 과정이 그럴듯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에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은 몽상가를 필요로 한다”라는 디그넌을 은유하는 영화의 핵심 대사 속에 꿈이란 고전적인 극적 구조로서의 환영이 아니라 그것을 모방함이 드러난 아마추어 같은, 어딘가 부족한 반쪽짜리 환영이다. 디그넌이 그랬던 것처럼, 앤더슨 세계의 꿈 혹은 영화적 꿈이란 두 가지 상반된 가치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꿈이 주는 일탈적 즐거움, 비현실적인 아름다움과 그것이 결국에는 허구일 뿐이라는 무력감, 애상적 감정이다. 그것을 계획하고 통제하는 방식에서 앤더슨은 기묘한 전략을 구사한다. 먼저 시각적으로는 강박적으로 계산된 이미지의 아름다움을 가시화한 프레임과 과도하게 장식적인 이미지로 인해 가짜임이 드러난 형식으로 보여준다. 환영적이면서 일면 자기 반영적(self-reflexivity)이기도 한 모순된 시각화 방식이다. 그것을 가장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만든 <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 >(2009)와 < 개들의 섬 >(2018)이라는 두 편의 애니메이션과 다른 영화 간의 비교이다. 이 두 편의 영화는, 완전한 가상인 그림이나 CG가 아니라 현실의 인형과 물질을 활용한 스톱모션으로 제작되어 애니메이션이라는 허구의 세계가 하나의 사실적 이미지이기도 함을 이중으로 드러낸다. 이는 현실의 인간들과 공간을 촬영한 영화를 정반대로 비현실적으로 연출하고 미니어처 애니메이션처럼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 이미지를 다루는 앤더슨의 의도를 짐작하게 한다. 가상의 것은 사실적으로, 사실인 것은 비현실적으로 그리며 ‘영화’라는 사실을 기록했지만, 이미지에 불과한 매체의 양면성이 빚는 감각을 극대화하여 활용하는 것이다. 앤더슨적인 스타일을 대표하는, 강박적 대칭 구도를 생각해보자. 오른쪽과 왼쪽이 데칼코마니처럼 같아 안정적 아름다움에서 오는 미적 즐거움과 그러한 구도가 극단적으로 반복되어 작위성이 드러나는 일종의 거리 두기 효과를 동시에 획득한다. 마찬가지로 수평과 수직 트래킹 쇼트는 인물에게 다가가는 몰입의 효과도 있지만, 주요인물에게서 멀어지거나 관객들이 몰입하고 있는 프레임을 벗어나 공간이 확장되는 효과를 주면서, 우리가 몰입하고 있는 이야기 바깥에도 다른 세계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다만 이러한 프레임 밖을 비추며 나타나는 효과가 다른 사실주의 영화들처럼 이야기 바깥에 존재하고 있는, 통제 불가능한 세계의 잠재성을 확인시키는 열린 프레임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앤더슨의 영화에서는 완전히 통제된 허구의 세계 바깥에도 통제된 다른 허구적 무대가 계속 이어져 있는 열려있지만 닫혀있기도 한 기이한 프레임의 성질을 나타내고 있다. 열려있지만 닫혀있고, 몰입시키면서 몰입을 저해하는, 이를테면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2023)에서 등장인물이 직접 소설 지문까지 읽는 형식처럼 앤더슨 영화의 내러티브에서도 환영성과 자기 반영성의 모순적 충돌이 일어난다. 그의 영화 대부분에서 중심인물에는 결핍이 있고 그 결핍은 어머니의 죽음(<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 >), 친구의 죽음(<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 생활 >), 아버지의 죽음(< 다즐링 주식회사 >), 부모님의 부재(< 문라이즈 킹덤 >), 아내의 죽음(< 애스터로이드 시티 >)과 같이 사적 전사(前史)를 이룬다. 보통 영화가 그러하듯 앤더슨의 영화에도 인물의 전사는 거대 서사를 만나 해결되는 고전적인 이야기 형태로 마무리된다. 다만 그 과정이 극적 구조로만 묘사되지 않으며 앞서 언급한 대로 산만하게 서브플롯을 다루거나, 시간 순서를 뒤섞거나, 막을 나누거나, 화면비와 색을 바꾸거나, 시각적 형식 자체가 서사의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서사를 이끌어가는 동력은 고전적이지만 과정이 그렇지 못하다. 이것이 앤더슨 영화의 내러티브가 밀도가 낮다고 느끼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하지만 디그넌이 엉성하고 우스꽝스럽게 범죄를 모방하는 것처럼, 극적 밀도가 낮은 상태 혹은 고전적인 것과 그렇지 못한 과정이 충돌하는 내러티브 방식이 앤더슨의 의도이다. 매혹 시키면서도 부자연스러운 작위성을 나타내는 이미지, 시각 형식의 모호한 감각을 즐기는 것이 앤더슨 영화의 핵심이듯 말이다. <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2014)에 이르면 앤더슨은 그러한 자신의 테마에 더 적절한 이야기 구조를 하나 덧붙인다. 수평 트래킹의 움직임을 따라 화면을 확장하여 우리가 보고 있는 허구적 세계 밖에도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통제된 움직임 아래 보여주었던 것처럼 액자식 구조를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그의 이전 영화처럼 주요인물의 결핍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이야기 속 이야기 안에 제로(토니 레볼로리)가 젊은 시절에 겪은 영화적인 모험이 있고 그 극적인 사건 끝나고 회상 밖으로 나왔을 때 비로소 결핍이 등장한다. 과거의 이야기, 허구적인 모험의 바깥에 전쟁이라는, 파시즘이라는, 독감이라는 재앙의 현실이 있고 더 바깥에는 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작가(주드 로/톰 윌킨슨)의 죽음이라는 시간이 있다. <애스터로이드 시티>(2023)에 시간은 약이 아니라 반창고는 될 수 있다는 대사처럼 제로가 작가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얻을 수 있는 것은, 상처의 회복이 아니라 슬픔과 약간의 위로뿐이다. 오기(제이슨 슈왈츠먼)가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돌아가신 아버지가 4.5광년 떨어진 별나라가 아니라 땅속에 있다고 말했듯, 앤더슨은 고전적 이야기 구조가 온전한 위로를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대신 미니어처처럼 작게 보이는 인간과 세계를 액자식 구조를 통해 가까이서도 멀리서도 바라보며 영화가 할 수 있는 건, 우리의 삶과 비슷하면서 다른 허구의 아름다움에 이입하거나 거리를 두며 나의 현실을 비추는, 낯설고 기묘한 감흥을 줄 수 있을 뿐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말하자면, 앤더슨의 영화적 꿈이란 두 가지 상반된 가치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일탈적 즐거움, 비현실적인 아름다움과 그것이 결국에는 허구일 뿐이라는 크나큰 낙차에서 오는 무력감, 애상적 감정이다. 가상의 공간, 애스터로이드 시티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막 도착한 오기는 자식들에게 아내의 부고를 전하며, 과거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아버지는 별나라에 계신다고 위로했던 일화를 말한다. 그는 그것을 부정하며 시간은 약이 될 수 없고, 반창고 정도는 될 수 있다고 덧붙인다. 이처럼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처음부터 고전적인 이야기의 허구적 위로가 불가능함을 선언하듯 시작한다. 그럼에도 가상의 공간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결핍을 지녔거나 상처를 지닌 캐릭터들이 모여든다. 중심인물인 오기는 아내의 죽음을 겪었고, 밋지(스칼렛 요한슨)는 전 결혼생활에 문제가 있다. 이 두 사람은 1층이지만 전경만 보면 공중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물 창을 통해 이야기를 나눈다. 각자의 과거와 상처를 말하고, 사진을 찍고, 연기 연습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창을 경계로 마주 보는 두 인물의 관계는 각각 카메라와 피사체이자 관객과 배우처럼 느껴진다. 창이라는 프레임을 경계로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두 인물의 구도와, 오기가 사진작가이고 밋지가 배우라는 직업적 위치가 그러한 생각을 강화한다. 여기에 왜 자신과 오기가 가까워졌는지 알겠다고 말하는 밋지의 말이 덧붙여진다. 둘은 비슷하므로 가까워졌다. 아픔을 가지고 있고 그 아픔을 숨기고 있다는 유사성 때문에 서로의 눈을 바라보기를 멈추지 못한다. 카메라와 피사체, 관객과 배우는 아픔, 결핍을 매개체로 이어져 있다. 물론 시선을 끌어당기는 볼거리라는 본질적인 이유도 있지만, 대개 관객들은 현실과 닮은 허구의 고통과 갈등에 이입한다. 때문에, 영화의 시작에서 해설자(브라이언 크랜스턴)가 완전한 픽션이라고 선언한 애스터로이드 시티에도 상처를 지닌 인물들이 모여든다. 그렇지만 앤더슨 영화가 늘 그러하듯,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인물들의 전사와 감정에 온전히 집중하기보다 액자식 구성을 오가며 여러 인물의 서브플롯들을 산만하게 비춘다. 외계인이 소행성을 훔쳐 가는 비일상적인 사건 또한, 보통의 고전적 이야기 구조라면 주인공의 결핍이나 상처를 거울처럼 비추는 은유가 되거나 갈등을 해소하는 거대 서사로 기능하지만 오기와 밋지에게는 그렇지 않다. 사건이 발생한 다음 날 밋지는 오기에게 느낌이 다르냐고 묻고 오기는 아무 느낌 없다고 답한다. 그러고 얼마 후 외계인이 나타나 훔쳐 갔던 소행성을 돌려놓는 사건이 발생한다. 외계인은 왜 소행성을 가져갔고 다시 돌려놓았을까? 우드로(제이크 라이언)는 외계인이 소행성을 가져간 후 오기에게 “이제 세상이 변했고, 모든 것이 불확실하며 외계인이 또 올지 오면 무슨 말을 할지 우리는 아는 것이 없고, 어쩌면 저 우주에 뭔가 우리 삶의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외계인이 소행성을 돌려놓고 변한 것은 우습게도 소행성에 적혀진 품목번호뿐이다. 외계인(제프 골드블룸)을 연기하던 배우 또한 외계인 탈을 벗고 자신은 외계인을 하나의 메타포로 이해한다고 말했을 때 오기가 무엇에 관한 메타포냐고 되묻자 대답하지 못하고 모든 것이 모호하다고 답한다. 즉 이 코스믹 한 해프닝은 그저 픽션에 필수 불가결한 비일상적인 사건으로서만 기능적으로 존재한다. 때문에, 오기 역할을 연기하던 존스는 혼자 중얼거린다. “이 연극이 이해가 안 돼” 그는 이 말을 내뱉고 무대 뒤로 연결된 문을 열고 연극 연출자에게 향한다. 허구의 이야기가 상연되는 무대 밖을 벗어나 횡적으로 이어진 여러 공간을 지나쳐 오기는 연출자를 호출한다. 자신이 제대로 연기하고 있는 것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계속 연기를 해야 하는지, 저 우주엔 뭔가 답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물으며 이 연극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호소하는 주연 배우에게 연출자 슈버트(에이드리언 브로디)는 “상관없어 그냥 계속 연기해(Doesn't matter, Just keep telling the story)”라고 말한다. 외계인의 말대로 모든 것이 모호하고, 해설자의 말처럼 현대 연극으로 정의되는 이 이야기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창작과정의 고통을 묘사하는 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아무런 답을 내리지 않는 이 둘의 대화에는 이상한 감동이 있다. 내가 아닌 캐릭터의 상처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는 오기이자 존스의 고민에 연극이라는 하나의 작은 우주를 통제하는 연출자가 삶의 고통 속에서도 그저 계속 연기를 할 수밖에 없다,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전하는 말이 현실 세계를 향한 코스믹(Cosmic) 한 시선의 조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밖에서 안으로 히켄루퍼 박사(틸다 스윈튼)는 우드로를 위로하며 자신의 어머니도 46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공통점으로 서로의 마음에 공감하지만 아주 오래전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어른의 마음과 얼마 전에 일을 겪은 아이의 마음은 같을 수 없다. 다만 46년이라는 시간이 아이를 어른으로 만든다면 그때는 우드로가 박사의 마음을 이해할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외계인이 등장하는 코스믹 한 사건에도 어른들은 시큰둥하고 격리된 상황에 불평만 늘어놓지만, 아이들은 외계인을 향한 끊임없는 호기심을 보이며 통제된 상황을 타개할 작전을 세운다. 이 맹랑한 아이들도, 죽은 딸이 과거에는 손녀들 같았다고 말하는 스탠리(톰 행크스)의 대사처럼, 언젠가 어른이 될 것이다. 당연히 히켄루퍼의 말대로 몇조 킬로미터 떨어진 별의 빛이 우리에게 닿은 시간만큼은 아니겠지만 끝없이 흐르는 우주적 흐름대로 말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액자식 구조의 여러 겹의 세계 속 현실과 허구를 오가며, 스토리텔링 하는 연기자들처럼 우리의 삶도 일면 가상적이라고 말한다.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처럼 가까운 이의 죽음이, 삶의 고통이, 우주인의 등장과 같은 허무맹랑한 사건이 등장하더라도 결국, 이야기의 처음에 보여주었던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황량한 일상으로 돌아오는 우주의 순환적 시간 아래 그러하다. 대신 이러한 무기력함, 허무함 속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잠을 자는 것이라 덧붙인다. 언젠가 죽음의 시간이 찾아오면 오기의 말대로 땅으로 돌아가 영원한 잠을 자게 되겠지만, 살아가는 동안 자는 잠에는 꿈이 존재한다. 연기 학교의 선생님 솔츠버그(윌렘 데포)가 말한 것처럼 말이다. “자는 건 죽는 것이 아니다. 숨 쉬고 심장이 뛰고 생각도 한다. 죽은 엄마를 만날 수 있고, 전처나 전남편과 잘 수도 있고, 마테호른에 오를 수도 있다. 그게 스토리가 될까? 되지, 밖에서 안으로 씬을 구성해보자고” 밖에서 안으로 씬을 구성한다. 이는 꿈에서 이야기로, 이야기에서 현실로 삶을 구성한다는 말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안에서 도저히 이 연극을, 이 삶을 이해할 수 없던 오기는 밖으로 나간다. 그 밖이란 무대를 넘어 연극이 상연 중인 건물 외부까지 향한다. 이때 그는 연극에서 잘린 배우를 만나게 된다. 오기의 아내 역할을 했던 배우(마고 로비)와 삭제된 장면의 대사를 나누는 이 장면은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동적이고 아름답다. 은유적인 의미에서 오기의 죽은 아내와 대화를 나누는 씬이지만,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극적 상황이 아닌 일상적 위치에서, 두 인물이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고, 삭제된 대본을 아내 역할의 배우가 혼자 상대의 대사와 지문까지 읊고 있는 자기 반영적 상태이기 때문이다. 두 배우에게 이 대본 리딩은 감정적인 몰입의 순간이 아니라 쉬는 시간에 겪은 작은 대화처럼 지나가며, 좋은 회상인데 왜 잘랐는지 서로 의문을 표하며 가볍게 헤어진다. 정작, 이 장면 속에서 별나라에 있는 오기의 엄마를 만난 것처럼, 죽은 아내와 조우하게 되는 것은 스크린 밖 우리 관객들이다. 측면에서 두 인물을 약간 멀리서 비추는 쇼트들이 지나가고, 대사의 감정이 극에 달했을 때 정면 바스트 쇼트에서 클로즈업 쇼트로 인물을 비추면, 그 쇼트들이 만드는 환영적 효과는 관객들에게 약은 아니지만, 반창고와 같은 작은 위로의 감동을 선사한다. 또한, 우리가 오기의 죽은 아내를 보지 못했지만 본 것처럼 느끼듯, 배우인 존스가 대본에서 삭제된 부분을 상대역을 통해 듣는 것일 뿐 오기라는 연극 속 캐릭터가 겪은 경험이 아님에도, 오기가 꾸는 꿈처럼 느끼게 한다. 이는 밋지와 창을 통해 나누었던 장면의 구성과도 공명하면서 이해할 수 없던 연극의 의미를 부여하며, 무대의 안과 밖, 스크린의 안과 밖의 경계를 어지럽게 뒤섞으며 환영성과 자기 반영성의 충돌이 만들어내는 소용돌이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리고 “난 돌아올 수 없어 오기”라는 아내의 슬픈 대사와 함께 존재의 부재증명이라 할 수 있는 그녀의 사진을 냉정하지만 일면 따뜻하게 마주하게 한다. 결국,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오기가 무대를 탈주하며 이어지는 이 장면들을 통해 꿈이, 허구가, 이야기가 주는 일탈적 즐거움, 비현실적인 아름다움과 그것이 결국에는 허구일 뿐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무력감, 애상적 감정이 뒤섞인 앤더슨 세계의 모호한 매혹을 잘 드러내는 최상의 것으로 남는다.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다 이 탁월한 시퀀스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연극의 극작가 콘래드(에드워드 노튼)의 죽음을 알리며 모든 연기자가 다 같이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다”라는 대사를 외치는 씬으로 이어진다. 콘래드가 연극의 주제가 무엇이냐는 배우의 질문에 “무한함? 나머지는 잘 모르겠어”라고 말한 것처럼, 앞과 뒤를 알 수 없이 순환하고 있는 이 문장은 앤더슨식 세계를 더없이 적절히 요약한다. 이제 영화의 엔딩에서 우리는 잠에서 깬 오기의 모습을 보며 지금까지 나왔던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극작가가 신비한 우주적 체험을 공유한 모든 등장인물이 몽환적인 잠 속으로 제각기 빠져드는 씬을 구상 중이라고 했던 것을 떠올리면, 여전히 연극 속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이것이 안인지 밖인지 헷갈릴 때쯤, 영화는 죽은 엄마를 향해 기도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무신론자의 시선으로 끝을 맺는다. “나는 돌아올 수 없다”라는 삭제된 꿈 장면의 슬프지만 차갑기도 한 대사처럼, 신을, 꿈을, 허구를 믿지 않지만, 반창고 같은 위로를 기대하며 그렇게 영화라는 잠에 빠지고 꿈에서 깨어난다.
1. 1970년대 변두리 극장을 선회하던 액션영화에 홍콩식 권격영화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협객물이라고 불렸던 이 영화들은 전지구적 유통망 속을 흘러가던 권격영화들의 한편에서 자국 관객들에 대한 강력한 어필로 70년대 한국의 액션영화 시장을 양분하였다. 이 ‘내수용’ 영화들이 지극히 흥미로워지는 것은 이 영화들이 그 어떤 장르영화보다도 명료하게 대한민국이라는 정치체를 구성하는 적대의 선을 말 그대로 물리적인 방식으로 반복 재현해내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실재하는 하나의 이름을 끌어옴으로써 가능해졌는데, 일찍이 독립전쟁을 수행한 ‘장군의 아들’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내걸었던 이 고유명은 1930년대 중반 식민지 조선인들의 상업거주 지역인 종로통의 ‘주먹’으로 부상한 이래 해방 정국의 백색 테러리스트로서 ‘빨갱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고, 1960년대 부정부패한 정치인들을 응징하는 정치 ‘협객’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미 당신도 짐작하다시피, 이 이름은 김두한이다. 이 이름이 그토록 오랫동안 (적어도 200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한국 남성 대중문화의 강력한 원천으로 작동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반일과 반공으로 성립된 대한민국의 고유한 두 적을 탁월한 폭력으로 능히 제압해내는 그는 그럼으로써 이 국가가 소망하는 강력한 남성성을 온몸으로 체현해내고 있는 자라고 할만하다. 게다가 이 이야기에는 통한의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이곳의 아들들이 상상할 수 있었던 가장 이상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식민지 남성들이 겪어야 했던 저 강렬한 고아의식과 전후의 비루한 아버지의 형상들을 떠올린다면 거리의 고아 소년이 독립운동가 ‘장군’의 위대한 혈통을 잇는 자라는 것이 밝혀지는 이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는 얼마나 매혹적인 것인가. 1) 2. 이런 류의 영화들의 기억할만한 첫 시작은 1969년 1월에 개봉한 < 팔도 사나이 >로부터 비롯되었다. 이 영화가 만들어지던 당시 김두한은 막 정치판에서 자취를 감춘 직후였으나, 부정부패한 정치인들에게 똥물을 퍼부었던 정치 협객 김두한의 인기는 절정에 달해 있었고 이제 곧 그것은 한국 대중문화의 매력적인 자원이 될 터이다. 2) 비록 김두한이라는 실명은 피하고 있지만 <팔도 사나이>는 ‘김두한 스토리’의 첫 번째 버전이라고 할만하다. 고아인 어린 소년 호(虎)는 자신을 길러준 노인으로부터 실은 그의 아버지가 유명한 독립투사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어른이 된 호는 주먹으로 종로를 평정하고, 그런 그에게 평양 박달이부터 광주 용팔이까지 팔도의 사나이들이 차례로 도전장을 내민다. 호는 이 싸움에서 거듭 승리를 거두고, 도전자들은 그를 ‘형님’으로 모신다. 이제 조선 주먹을 대표하게 된 호는 종로를 넘보는 일본 야쿠자와 한판 승부를 벌인다. 이 놀랍도록 전형적인 이야기는 한편으로 ‘김두한 스토리’의 원형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팔도’가 환기시키는 1960년대 후반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토’의 현현이라는 감각을 과시한다. ‘종로’의 주인 호가 도전을 받아들이고 굴복시키고 형제의 따뜻한 연을 맺는 일련의 과정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위계화를 완성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내부를 계서적 형제관계로 마름질한 그는 외부의 적 과 맞서 싸워 통쾌한 승리를 거둬낸다. 3. <팔도 사나이>는 10만 7천명의 관객동원을 기록하였다. 1967년 기록적인 관람률을 보여주었던 국책영화 < 팔도강산 >의 성공 여파로 우후죽순처럼 쏟아져나온 수많은 ‘팔도’ 영화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이 영화 이후 감독 김효천과 시나리오 작가 편거영은 각자의 방식대로 이 성공을 이어가고자 했다. 같은 해 < 속 팔도 사나이 >, < 돌아온 팔도 사나이 >의 각본/연출을 맡기 시작한 편거영은 < 한국 제일의 사나이 >(1970), < 원한의 팔도 사나이 >(1970), < 예비군 팔도 사나이 >(1971), < 바보같은 사나이 >(1971)를 만들었고, 김효천은 < 명동출신 >(1969), < 명동노신사 >(1970), < 명동백작 >(1970), < 명동에 흐르는 세월 >(1971), < 명동을 떠나면서 >(1973) 등의 ‘명동’ 시리즈를 만들었다. 이 영화들은 적을 규정함으로써 어떻게 정치공동체가 형성되는가를 가장 노골적인 방식으로 전시하고 있는 한국영화일 것이다. 이를테면 해방 직후를 배경으로 한 <명동노신사>는 남한 사회가 누구를 동지로 삼고 있으며, 누구를 적으로 하여 형성되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강룡(장동휘)과 덕팔은 해방 전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형제 같은’ 사이이다. 남조선노동당의 앞잡이가 된 덕팔은 강룡을 포섭하려고 하나 그의 완강한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강룡의 노모와 누이를 살해하고 빨치산이 되어 산에 들어간다. 한편 강룡이 과거 덕팔과 함께 모셨던 형님 덕진은 국방경비대 창설의 주역이다. 강룡은 덕진 형님을 찾아가 자신의 부하들로 특별부대를 편성, ‘공산비적’을 소탕하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밝힌다. 팔도에서 온 부하들을 이끈 강룡의 공비소탕전이 펼쳐진다. 부하들은 임무를 완수하고 장렬히 전사해간다. 홀로 살아남은 강룡이 이들을 추모한다. 이 이야기에는 두 개의 결절점이 있다. 첫 번째, 형제애의 수사로 강조되는 하나의 민족. 함께 일본에 대항했던 덕팔과 강룡은 ‘형제 같은’ 사이였다. 두 번째, 그러나 이 ‘형제’는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 서로 총구를 겨눈다. 그리고 홀로 살아남은 전투의 증언자가 우리를 또 하나의 애도의 공동체로 초대한다. 요컨대, 이 영화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이 국가, 대한민국을 형성하기 위해서 누구의 피가 흘려졌는가? 3) 4. 김두한의 실명 사용은 그의 죽음 이후 가능해졌다. 그가 죽은 지 2년 후인 1974년 < 실록 김두한 >을 시작으로 < 협객 김두한 >(1974), < 김두한 속 3부 >(1975), < 김두한 속 4부 >(1975)까지 이어진 ‘김두한’ 시리즈는 신필름의 마지막 흥행작이기도 하였다. 김두한이라는 실명이 사용되고 실존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시리즈는 동시기 일본 야쿠자영화의 주요 경향, 소위 ‘실록 노선’을 창조적으로 벤치마킹해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실록 노선’의 기념비적 시작을 알린 것은 1973년 정월에 개봉해서 일대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후카사쿠 긴지의 < 의리없는 전쟁 >(1973)이었다. 전후 일본을 야쿠자들의 피비린내나는 살육의 항쟁사로 그려내고 있는 이 시리즈가 격렬한 정치적 저항의 시기였던 일본 68이 좌절된 1970년대 일본 사회의 절망과 조응하는 것이었다면, 김두한의 ‘실록’ 시리즈 역시 마찬가지로 한국의 유신과 긴급조치의 시대에 그야말로 적절하게 조응하는 것이었다. 이 시리즈를 기획했던 자의 말처럼, 이 반일(<실록 김두한> <협객 김두한>)과 반공(<<김두한 속 3부>, <김두한 속 4부>)의 물리적 행위자는 “인정사정없이 줘패는” 행위를 통해 “분풀이 할 데 없는” 대중들을 “대리만족 시켜”주었다. 국가적 요구를 반영하는 이 폭력의 전시야말로 아마도 유신시대에 향유가능했던 가장 안전한 쾌락이었을 것이다. *** 1) 물론 반공에 비해서 반일이란 대한민국의 성립과정이 보여주고 있는 바 어느 정도 애매모호한 것일 수밖에 없다. 김두한의 이력 속에서 보자면 그는 1943년 조직된 총독부 협력단체인 반도의용정신대의 주도자였다. 이 단체는 당시 조선총독부의 고등계 형사로 재직중이었던 장명원에 의해 ‘불량청년’들을 규합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위원회는 이 단체의 설립 및 활동에 근거하여 장명원을 기소하지만 이 기소는 반도의용정신대가 ‘표면상 왜 정책에 협력하는 것같이 보이’나 불량청년들을 ‘감화지도하여 선량한 청년을 육성’하였다는 이유로 유예된다. 당시 김두한은 대표적인 극우 테러리스트로 강력한 힘을 행사하고 있었다. 2) 1966년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과 국회의 미온적 대처에 대한 항의로 벌어진 김두한의 국회오물투척사건으로 내각이 총사퇴하고 김두한 자신은 제명론이 비등한 가운데 자진 사퇴, 국회의장 모욕죄와 공무집행방해죄로 구속되었다. 1967년 총선에서 ‘서민층에 호소력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신민당 공천(수원)으로 선거에 나온 그는 “북괴에는 농촌까지 전기가 들어와 있는데 우리 농촌은 헐벗고 있다”는 요지의 연설이 문제가 되어 반공법 위반으로 다시 구속된다. 김두한은 그해 11월 보석으로 출감된 이후 정치계에서 은퇴하였다. 3) 강룡과 덕팔의 이야기는 김두한의 실제 스토리로부터 비롯되었다. 1947년 김두한은 죽마고우 정진용을 그가 좌익 행동대장이라는 이유로 린치, 살해하였다. 이 사건으로 김두한은 미군정에 의해 사형을 언도 받았으나, 1948년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이승만에게 특별사면 받았다. (관련글) 1. 비행기의 시선, 무정한 시선 - 2021.04.30. 2. 액션영화의 한 기원, 안중근과 무협 - 2021.05.31. 3. '외팔이'의 도래, 1960년대 후반의 무협붐 - 2021.06.30. 4. 태권도 영화- 챠리 셀과 바비 김, 이국적 이름들의 행렬에 관하여 - 2021.07.23. 5. 이소룡적 신체 - 2021.08.24. 6. 김두한과 협객물, 유신 시대의 가장 안전한 쾌락 - 2021.10.01. 7. 브루스플로이테이션과 한국영화 - 2021.11.01. 8. 춤추는 괴수, 1967의 '트위스트' 용가리 - 2021.12.02. 9. 우리는 왜 그때... - 2021.12.24. 10. 용팔이, 1970년대의 과잉과 잉여 - 2022.02.24. 11. 1970년대식 섹스와 폭력, 여감방 영화와 <여수 407호> - 2022.03.22. 12. <삼국대협>, '트랜스내셔널한 어떤 고립에 대하여 - 2022.04.20. 13. '빈곤한 이미지'의 여행- <정도>/<당수태권도>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 - 2022.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