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마더
- 감독
- 크난 워사메
- 제작년도
- 2024
- 출연
- 만 유수프 아메드, 하산 나집, 엘미 라시드 엘미, 우바 에갈
한국영상자료원은 2006년 2월 2일,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를 오픈했다. 그리고 오늘 2026년 2월 2일. KMDb는 20주년을 맞이한다. 우리는 KMDb를 기획·구축하며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한참 고민했다. 누군가 ‘무비씨’라는 이름을 제안한 적이 있다는 것은 기억나고, 그러나 아무래도 어딘가를 따라 한 것 같지만 그 이상의 이름은 없다고 판단해 KMDb로 지었다. 그리고 한국영상자료원은 kmdb.or.kr 도메인을 구매했다. KMDb에는 20년간 생겼다 없어진 콘텐츠와 기능이 많다. 초기에는 사용자가 직접 정보를 입력하는 기능도 상당했으나 생각보다 양질의 정보가 들어오지 않았고 무엇보다 관리가 어려워 하나둘 폐기하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과 독립영화 전용 KMDb를 따로 만들었을 때도 있었다. 지금은 모두 통합된 상태에서 최대한 간결한 기능과 콘텐츠로 운영하는 중이다. KMDb를 준비하며 호기롭게 “풀 크레딧을 가지고 갑시다!”라는 (제안을 내가 한 것 같고 그래서) 고생문이 활짝 열린 정책을 시작하며 힘들기도 하고, 하지만 그로 인해 어디에도 없는 데이터를 보유하게 된 KMDb는 영화·영화인 DB 서비스뿐 아니라 VOD로 한국고전영화 스트리밍을 시작했고, 영화글로 다양한 필자의 글을 소개했으며 리스트와 컬렉션이 순차적으로 오픈해 지금에 이르렀다. 2006년 2월 1일. 오픈 전날 디지털정보화팀의 담당 세 명은 그제야 동명이인에 대한 이슈를 발견하는 사고를 친다. 비슷비슷한 나이의 정유미 배우가 하나가 아니고 무려 세 명이래! 라는 비명을 한밤중에 지르며 당시만 해도 30대 초반이었던 그들은 할 수 있는 데까지 인물을 분리하며 밤을 지새다 퇴근해 다음 날 오픈시켰다. 그리고 그 동명이인 이슈는 지금까지도 완전하지 않다. 완전할 수가 없다. IMDb도 어쩔 수 없다며 고개를 젓는 이슈를 KMDb 라고 별수 있겠는가. IMDb 매니저는 이름이 짧은 한국 인명으로 동명이인에 대한 고충이 더 심하겠다며 나를 위로했다. 성명이 “정유미”인 배우 3인에 대한 KMDb 영화인 정보 KMDb는 영화·영화인 데이터의 완벽함을 사수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며, 이제는 영화인이 자신의 필모를 증빙하기 위한 웹사이트로 그 공신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그러다 보니 문득 KMDb에 쌓인 데이터가 어떤 모양새인지 궁금해졌다. 혹시 사용자들도 궁금해할까? KMDb 20주년 이벤트를 근사하게 할 수는 없겠지만, 데이터로 가득한 사이트의 20년 묵은 통계를 소개하는 것이 가장 어울리는 축하가 아닐까 생각했다. 별다른 코멘트 없이 지난 20년의 통계 10선을 소개한다. 1. KMDb에 등록된 한국영화(극·비극) 의 수: 50,787편 2. KMDb에 등록된 한국영화인 의 수: 83,279명 3. 가장 많이 접근된 영화인 페이지 정윤희(1위), 임권택(2위), 신성일(3위) / 사진: 전승열, 정기성 1위 | 정윤희 2위 | 임권택 3위 | 신성일 4위 | 김기영 5위 | 이상사 6위 | 김지미 7위 | 박노식 8위 | 김진규 9위 | 신상옥 10위 | 안성기 4. 작품 리스트(필모그라피) 가 가장 많은 영화인 1위 | 현동춘 | 편집 | 994편 2위 | 김희수 | 편집 | 863편 3위 | 최형래 | 음향효과 | 850편 4위 | 손인호 | 음향효과 | 793편 5위 | 김기범 | 배우 | 753편 6위 | 허장강 | 배우 | 687편 7위 | 임해림 | 배우 | 660편 8위 | 김재경 | 음향효과 | 657편 9위 | 윤일주 | 배우 | 650편 10위 | 최남현 | 배우 | 609편 5. 한 작품(장편영화)에 가장 많은 크레딧 을 올린 영화인 1위 | 노영석 | THE 자연인 (노영석, 2023) | 17개 공동 2위 | 박용철 | 싸이더:애,심 (박용철, 2019) | 16개 공동 2위 | 준오 | 휴게소 (준오, 2016) | 16개 ※ 노영석 감독은 <THE 자연인>에서 감독, 각본, 출연, 프로듀서, 촬영, 조명, 편집, 음악, 미술, 의상, 동시녹음, 사운드(음향), 시각효과, 색보정, 예고편, 포스터, 기타스탭(캘리그라피)을 담당함. 6. 참여 스태프 가 가장 많은 영화 <한산: 용의 출현>(1위) 1위 | 한산: 용의 출현 (김한민, 2022) | 1,665명 2위 | 백두산 (이해준, 김병서, 2019) | 1,612명 3위 | 안시성 (김광식, 2018) | 1,502명 4위 | 미스터 고 (김용화, 2013) | 1,492명 5위 | 신과 함께–죄와 벌 (김용화, 2017) | 1,487명 7. 상 을 가장 많이 받은 영화 1위 | 기생충 (봉준호, 2019) | 58회 2위 |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2) | 45회 3위 | 추격자 (나홍진, 2007) | 41회 4위 | 올드보이 (박찬욱, 2003) | 40회 공동 5위 | 괴물 (봉준호, 2006) | 31회 공동 5위 | 벌새 (김보라, 2018) | 31회 ※ KMDb에서 관리하는 영화제·시상식에 한함 8. 리스트에서 본 영화로 가장 많이 체크된 작품 <올드보이>(1위), <괴물>(2위), <기생충>(3위) / 사진: 디씨어터 1위 | 올드보이 (박찬욱, 2003) | 2,581명 2위 | 괴물 (봉준호, 2006) | 2,355명 3위 | 기생충 (봉준호, 2019) | 2,178명 4위 | 살인의 추억 (봉준호, 2003) | 2,055명 5위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미야자키 하야오, 2001) | 1,672명 6위 | 아가씨 (박찬욱, 2016) | 1,648명 7위 | 공동경비구역 J.S.A. (박찬욱, 2000) | 1,574명 8위 | 마더 (봉준호, 2009) | 1,533명 9위 |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2) | 1,515명 10위 | 8월의 크리스마스 (허진호, 1998) | 1,438명 ※ 박찬욱 감독 작품 4편, 봉준호 감독 작품 4편 9. 리스트에 본 영화 체크를 가장 많이 한 사용자 1위 | bo**** | 2,076편 2위 | ha**** | 1,865편 3위 | gs**** | 1,747편 4위 | ba**** | 1,696편 5위 | in**** | 1,636편 ※ ****는 ID의 글자 수와 일치하지 않음. 10. 가장 많은 조회수의 영화글 1위 | “ [시네필 안내서]서문: 시네필의 세계로 들어서고 싶은 당신에게 ” (영화천국 Vol.48) | 정성일 | 91,634회 사실 진정한 20주년 이벤트라면 올해 KMDb가 전면 개편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득하지만 어찌 됐든 2026년 말 새로운 KMDb가 문을 열 것이다. 오랜 KMDb 관여자로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묻는다면, 20년이 지난 이젠 누구나 KMDb를 KMDb(b를 소문자)로 써주길 바란다는 것 정도. 소박한 바람으로 글을 마친다.
<버닝> 중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해미( 전종서 )는 조금 뜻밖의 말을 한다. 팬터마임으로 눈앞에 없는 귤을 먹던 그는 종수( 유아인 )에게 마임의 원리를 설명한다.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돼.” 이 말은 < 버닝 >(2018)의 초반부에 불쑥 건네지고 나서 영화 전체를 실종과 부재의 미스터리로 물들인다. 해미는 갑작스럽게 사라지지만 종수는 해미가 여기에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못한다. 종수에게 남겨지는 이 말이 뜻밖인 이유는 이창동 영화 속 인물들이 갈구하던 질문과 정반대에 있기 때문이다. < 밀양 >(2007)에서의 신애( 전도연 )의 비명. “신이 어디에 있어요?” < 시 >(2010)에서의 미자( 윤정희 )의 외침. “시상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나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원리를 찾아 헤매던 질문들과 다르게, 해미는 세계를 관통하는 자명한 원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해미의 방에는 있어야 할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껍질 벗겨진 귤이, 함께 사는 고양이가, 마침내 해미 자신마저도 그곳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도 있다. 하루에 한 번 남산타워 전망대 유리에 햇빛이 반사돼서 방 안으로 들어온다. 그곳엔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지만 딱 한 번의 햇빛이 종수의 눈에 보인다. 무언가는 보이지 않고 기억에서 지워진다. 다른 어떤 것은 잊히지 않고 남겨진다. <버닝>이라는 이 거대한 야심의 영화 속 해미의 작은 방이 한국영화 비평을 말하기 위한 실마리일 수 있다면, 비평은 언제나 특정한 좌표 위에 놓인 공간에 거주하는 일이며 그 안에서 잔존하는 것과 지워지는 것들을 오가며 수행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박찬욱 은 정성일 , 허문영 평론가와 나눈 긴 대담에서 < 박쥐 >(박찬욱, 2009)와 <밀양>과 < 마더 >(봉준호, 2009)의 주인공들이 모두 깊은 트라우마를 남기는 사건을 겪은 이후로 망각을 선택한다는 공통점을 지적하는 두 평론가의 말에 “이래서 평론가들이 필요한 거구나!”라고 웃으며 반긴다(언급된 영화의 세 연출자는 10여 년의 시간이 지나 <버닝>과 < 기생충 >과 < 헤어질 결심 >으로 다시 한번 망각과 기억을 둘러싼 공통의 우화를 작성한다). 이 일화엔 영화와 비평, 망각과 기억을 둘러싼 근접조우가 발생한다. 하지만 박찬욱의 농담 섞인 감탄과는 반대로 비평은 망각된 것들을 기억하고 흩어진 기억을 서로 연결하는 일이 아니라 망각 자체에 속하는 일이다. 무언가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행위다. 최근 영화잡지 《씨네21》은 잡지의 30주년을 기념해 1995년에서 2024년까지 국내에서 개봉한 영화를 대상으로 한국영화/해외영화 10편의 베스트 목록을 발표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허한 목록의 재생산이 아니라 눈앞에 존재하는 영화문화에 과도하게 채워져 있는 목록과 관점을 망각하는 것이다. 영화는 조우가 아니라 사라짐의 체험이고 따라서 비평은 그 사라짐에 관한 기술이기 때문이다. <버닝>은 한국영화의 이미지를, 그리고 한국영화를 둘러싼 비평의 관습을 정조준한다. 태양이라는 선명한 광원 아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팬터마임으로. 태양을 바라본다는 행위는 21세기 한국영화가 설정한 특별한 의제이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란 태양에 반응하는 신체의 부작용을 포착해 온 영화적 관찰기의 다른 말이다. 이는 <밀양>과 <버닝>에서 우리가 머무는 세계 안으로 간신히 전해지는 미세한 빛을 프레임에 담아낸 이창동만의 화두는 아니다. 도망칠 수 없는 두 뱀파이어를 태양에 불태워버리는 <박쥐>, 햇빛을 바라보며 시큰거리는 눈에 안약을 넣는 남자의 비극(<헤어질 결심>)과 태양의 과도한 빛을 피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남자의 희극(< 어쩔수가없다 >)을 오가며 끊임없이 태양에 반응하는 신체를 불러들이는 박찬욱의 영화들. 봉준호 의 <마더>는 오후의 도로를 통과하는 관광버스 사이로 들어오는 태양광선을 포착해 그 안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어두운 실루엣으로 덮어버린다. 투명한 유리 사이로 쏟아지는 빛, 어찌할 수 없는 열기. <기생충>은 간신히 빛이 들어오는 반지하의 어둠에서 통유리로 태양을 반사하는 거대한 저택으로 이동한 뒤 더 아래에 있는 어둠으로 내려간다. 한국영화의 불길을 통과한 뒤 경력을 중단한 장선우 가 한국영화 100주년을 기념해 만든 짧은 단편은 이장호의 영화 제목을 빌린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 2019>였다. 그는 한국영화 100년을 기쁨으로 회고하는 대신 검열과 금기라는 역사의 태양을 공격하고 야유한다. 태양 아래 있는 21세기 한국영화는 언제나 한 가지 특별한 장소와 결부되어왔다. 번쩍이는 태양의 가시광선을 피해 시선을 숨길 수 있는 어둠 속의 터널이다. 터널을 지나는 동안 우리는 빛을 피해 숨을 수 있지만 그곳을 통과해 나오는 순간 눈에 날카롭게 베인 듯한 상처를 입는다. 터널 속에서 영화는 눈빛을 숨기고 시선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이곳이 어디인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좌표를 망각한다. 2000년대를 여는 첫 번째 한국영화로 이창동의 < 박하사탕 >(1999)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 영화가 새로운 세기 초입에 새겨둔 터널의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한 편의 영화에서 공간과 시간을 이행하는 데는 어둠을 통과해 바깥으로 나가는 과정이 불가피하다. <박하사탕>의 기차는 무심한 기계장치처럼 역방향으로 터널을 통과해 나간다. 거기엔 숨겨진 빛이 있고 우리는 그 빛을 잊어버린다. 태양이 가려졌으므로, 영화는 세계를 정확히 보는 것에 실패한다. <박하사탕>,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중 (사진: ㈜이스트필름, ㈜싸이더스, 디씨어터) 21세기 한국영화 전성기의 정점으로 회고되는 2003년에 ‘한국영화’의 외형과 속성을 상징적으로 각인한 두 편의 영화에서 솟아난 이미지가 있다면 그것은 너무 깊은 어둠으로 인해 보는 것에 실패하는 터널 이미지다. 봉준호의 < 살인의 추억 >(2003)에선 영화의 마지막에 빈 농수로를 보여준다. 전직 형사 박두만( 송강호 )은 과거 연쇄 살인 사건이 벌어졌던 시골을 찾아 농수로 안을 들여다본다. 그의 눈앞에 있는 텅 빈 공간은 마치 터널처럼 가을의 태양을 가로막는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그가 고개를 숙여 농수로 깊숙한 곳에 놓인 여성의 시체를 쳐다볼 때, 어두운 수로가 제대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근처에 떨어진 유리 조각을 주워 빛을 반사해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저편에 있던 어둠은 우리가 있던 곳을 잠식하고 만다. 그리하여 영화의 결말은 살인 용의자가 어두운 터널 속으로 사라지고, 더 이상 터널을 들여다볼 수 없는, 본다는 것의 실패다. 박두만이 다시 용수로를 찾았을 때, 터널은 어둠으로 닫힌 모든 것이 투명하게 열려 있다. 우리는 그 명확하게 빛나는 어둠 앞에서 무엇도 제대로 볼 수 없다. < 올드보이 >(2003)에서 오늘만 대충 살아간다고 다짐하던 오대수( 최민식 )가 감금된 밀실의 복도는 기나긴 터널처럼 끝없이 이어져 있다. 그곳의 작은 방 한 칸에 갇혀 있던 이 남자가 15년 만에 석방될 때도 그는 조그마한 상자 속에 웅크리고 있다. 실은 풀려나는 시점조차 정확히 통제된 것이므로 제대로 풀려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영원히 시간의 터널 속을 맴돌고 있다. 밀실에 되돌아온 오대수는 장도리를 들고 수많은 적을 넘어서 터널을 통과하지만, 그 어떤 것도 통과한 적이 없다. 이 영화에서 오대수는 시종일관 태양의 빛과 열기를 피하는 검은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있다. 그는 영원히 진실을 마주할 수 없다. 마주하더라도 회피와 망각을 선택하려 든다. 다시 몇 년이 지나고, 한국영화가 직면하고 응답했던 이 치명적인 곤경은 이창동의 <시>(2010)에서 시인의 말을 빌려 울려 퍼진다. “틀렸어요.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사과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우리가 지금 한국영화비평에 대해 말할 것들이 남았다면, 여기에 제도적으로 잘못된 것이 있다는 비판이 아니다. 무언가 있어야 하는데 존재하지 않는다는 촉구와 반성 역시 아니다. 그 반대다. 해미의 조언처럼 우리는 여기에 무언가 없다는 것을 잊어버려야 한다. 한국영화가 산업적으로 위기에 처했다는 인식을 잊어버리고, 특별한 위치를 점유하는 영화감독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진단을 잊어야 하며, 새로 만들어지는 영화들을 분류하는 영화제와 개봉 체계의 시각이 지극히 제한적이라는 인식을 잊어버려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마치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비평의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전개해야 한다. 이창동과 박찬욱과 봉준호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들이 남긴 걸작들로 비루한 목록을 채우는 대신, 변함없는 명사로 자리 잡은 과거의 기억을 잊어버리고 그들이 직면해야 했던 곤경의 장소를 되돌아보는 것이다. 그들의 곤경을 들여다보는 질문을 통과하지 않고 그저 걸작으로 남아 있는 영화를 숭배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또 다른 모욕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팬데믹이 초래한 대규모 봉쇄의 기억을 뒤로하고 2020년대의 절반을 지나친 지금 시점에 우리는 한국영화의 ‘장소’가 어디에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터널을 지나친 한국영화의 흔적 뒤편에서 우리는 또 어떤 장소를 발명할 수 있을까? 한국영화 비평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한국영화의 질적 수준 하락에 있지도 한국 작가주의의 위기라는 문제에 있지도 한국영화 산업의 붕괴에 있지도 않다. 손쉽게 영화산업 일부분에 기생해버린 비평이 한국영화가 곤경을 투사하고 탈출구를 모색할 수 있는 특정한 장소를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만드는 일을 한밤에 태양을 관측하는 행위에 빗댄 피에르 파울로 파솔리니는 두 가지 종류의 세대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강력한 아버지의 규율과 권력에 맞서 저항하는 세대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도 지시하지 않는 무기력한 아버지를 마주해야 하는 세대다. 90년대 후반에 촉발되어 21세기의 새로운 감수성을 공유한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는 단절된 아버지의 강력한 규율에 저항함으로써 그와 연결되려는 절차였다. 지금껏 언급한 한국영화의 ‘걸작’들은 모두 부모가 되는, 혹은 되지 않으려는 방식에 관한 서로 다른 시도들이고 적잖은 이들이 불필요한 결론이라 비판한 바 있던 <기생충>의 에필로그는 그 연대기의 끝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커다란 뒷모습을 렌즈로 삼아 세계를 인식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 아들들의 아들은 조그마한 렌즈에 눈을 대고 있는 아버지의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지켜볼 뿐이다. 우리에겐 세계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에겐 ‘한국영화’가 보이지 않는다. <기생충> 중 순환어법처럼 들리지만, 한국영화 비평이 성립하기 위해선, 한국영화를 향한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언젠가 특별한 비평의 감각을 자극했던 《씨네21》의 ‘전영객잔’ 코너가 건드린 것은 ‘긴 호흡의 비평이 있어야 한다’라는 하나 마나 한 저널리즘적 진단이 아니라 ‘한국영화에 어떤 질문을 제기할 수 있는가?’라는 특수하고 역사적인 물음이었다. 그 지면에서 다뤄진 것은 넓은 의미의 비평일뿐만 아니라 임권택 , 이만희 , 김기영 , 배창호 , 강우석 , 임상수 , 박찬욱, 홍상수 , 이창동, 봉준호, 그리고 21세기에 새 영화를 만들어낸 한국영화 감독들의 시간에 대한 특수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짧은 호기심과 문답의 시간이 지나고 비평은 너무나 쉬운 관성에 안착해버렸다. 투박한 비교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지금 영화를 해설하고 의미를 발굴하는 비평은 한국영화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어떤 환경에서 무엇을 구현하고 싶었으며 무엇에 실패하고 어떤 곤경을 직면하고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단지 주어진 업무의 한 부분에서 성실하게 문장을 채우고 완성된 결론을 생산할 뿐이다. 다른 지면에 적었던 이들의 운명을 다시 빌려오자면, “비평이 테러리스트 역할을 자임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고작해야 제작사와 수입사의 홍보문장을 작성하는 대리인이거나 이름 있는 연출자의 의도를 정제된 언어로 세공하는 복화술사거나 제도의 끝자락을 차지하는 것만으로 안심하는 성실한 일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동시대 한국영화에 어떤 곤경의 장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동시대 한국영화 비평이 영화에 드리운 특수한 곤경에 호기심을 기울이지 않고 이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어쩌면 한국영화를 만들고 있는 이들조차 그들 자신이 처한 곤경에 응답하지 않는 걸까?). 영화는 세계를 보이게 하는 역량이다. 하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세계가 카메라 바깥에 있다. 한국영화는 그것들이 동시에 거주하는 장소다. 비평가들이 이미 결정된 한국영화의 외형과 위계와 비평의 문법을 잊어버린 채로 영화와 만나지 않는다면, 한국영화를 향한 질문은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영화’는 만들어지고 상영되고 평가받는 모든 영역에서 빈틈없이 완전하게 구성되어 있다. 한국영화의 위기는 그것이 위태롭고 불완전해서가 아니라 너무나 완전하기 때문에 엄습한다. 끝없이 불타오르는 태양을 마주하는 비평이 눈앞에 있는 무언가를 상상하는 대신 없다는 것을 잊어버릴 수 있을까? 지금 한국영화가 이룩한 제도에서 비평은 존재하는 것을 설명하는 역할에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의 의무는 무언가 부재한 자리를 다시 채우는 것이 아니라 부재를 망각해버리는 것이다. 비평의 역량이 약화되었고, 위대한 작가 감독이 존재하지 않고, 경이로운 영화들이 나오던 한국영화의 전성기가 사라졌다는 자각. 그 사라짐 자체를 망각하는 것이다. 이는 시작점으로 돌아가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어떤 영화를 대상으로 하든 비평의 첫 문장이 작동하기 위해선, 어떤 한 가지 장면과 생각을 영화의 나머지 전체보다 앞서서 서술할 수 있다는 믿음, 다시 말해 영화의 나머지 전체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는 임의적 믿음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영화는 모든 것을 실행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주 작은 일을 실천할 뿐이라는 고다르의 말처럼 영화비평은 더 이상 많은 것을 유효하게 실천할 수 없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기능부전 상태에 빠진 영화비평을 다시 움직이게 하기 위해선 비평이 더 이상 많은 것을 유효하게 실천할 수 없다는 그 부재를 잊어버려야 할 것이다. 김병규(영화평론가) l 2018년 《Filo》 신인평론가에 선정되고 《씨네21》 영화평론상을 수상하며 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만든 영화로 단편 < 늦은 산책 >(2023), < 오후 >(2023)가 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과거에 만난 작품과 그로부터 얻은 영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지질한 인물을 그리는 데에는 정도가 있다. 추악하거나 성질이 더럽거나 못난 부분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타인에게 드러내야 할 때는 일정 부분 미화하거나 정당성을 가지고자 하는 본능적인 자기방어가 함께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지질한 인물은 사랑스러움이 함께 공존한다. 대중에게 수용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외적 특징을 가진다거나, 혹은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을 주기 위한 장치로서 캐릭터가 존재하고 있다거나 하는 식이다. 하지만 이 영화 속 주인공은 정도가 없이 등장한다. 커다란 등짝을 비추며 시작하는 카메라는 단지 등짝을 비추려는 게 아니다. 삐져나온 뱃살과 함께 무료한 듯 등을 긁는 주인공의 모습은 관리되지 않은 인물이 등장함을 알린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칼과 구부정한 어깨, 뭐가 어떻게 되든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한 무기력한 눈빛으로 세상을 보는 인물에게는 나를 투영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게 시작한다. 영화 속 인물은 더는 미래가 없는 이 세상을 대변하듯 존재한다. 별것 아닌 다툼에 쉽게 폭발하고 밥상을 엎어버린다. 동생과 몸싸움을 벌일 때도 큰 소리 한번 내지 않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내재되어 있는 깊은 분노와 좌절감이 느껴진다. 자전거는 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어슬렁거리며, 그 위에 올라탄 인물 역시 속도와 방향을 모두 잃은 듯이 삐걱댄다. 주인공은 영화가 절반 이상이 흐르는 내내 자신의 이러한 모습을 시종일관 유지하며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정도가 없으나 일면 뻔한 캐릭터다. 다만 이 영화가 다르게 다가오는 이유는 주인공이 < 백엔의 사랑 >(2014) 속 이치코(안도 사쿠라)라는 점에 있다. 나는 이 정도로 ‘정도를 모르는’ 여자 캐릭터를 별로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의 서사와 캐릭터는 보통 남성에게 부여되어왔다. 세상과 단절된 채 무기력한 모습으로 등장한 인물이 어떤 사건을 거치며 세상과 감응하게 되는 이야기. 여성 캐릭터는 비록 지질하고 못났더라도 그 못난 모습에서조차 매력적으로 보일 것을 요구받기 때문에 여자 배우가 이런 역할을 맡을 때에는 훨씬 많은 용기가 필요하기도 하다. 이 시나리오를 처음 받아들었을 배우를 생각한다. 살집을 분장하는 대신에 실제로 살을 찌우고 부스스한 머리를 유지하는 일. 화장기가 전혀 없는 얼굴로 우스꽝스럽게 길거리에서 넘어지는 일. 몸에 맞지 않는 이상한 속옷을 입고서 거울 앞에 서는 일. 세상의 기준에서 ‘아름다운’ 몸매와는 동떨어진 몸을 드러내는 일이 과연 쉬운 일이었을지 생각해본다. 판타지 속의 인물이 아닌 지극히 현실에 발붙인 이야기를 대변하여 존재할 때는 더더욱이 그렇다. <백엔의 사랑> 중 이치코 (사진: ART INSIGHT ) 여전히 아름다움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이른바 ‘외모’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여성으로서의 ‘상품성’을 내려놓아야 하는 선택은 오로지 시나리오의 완성도만을 염두에 두고 이뤄지기는 어렵다. 물론 화제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주로 남성이 맡아왔던 캐릭터를 여성이 연기할 때면 더 화제가 되기도 하니까. 이미 익숙했던 장르와 플롯이 여성 캐릭터의 등장으로 특별해진다는 건 이성애 로맨스 플롯이 퀴어 서사에서 특별해지는 원리와 같다. 쓰러져 있던 여성 캐릭터가 두 발로 세상을 딛는 걸 보게 될 때 훨씬 큰 울림을 줄 수 있다는 건, 아직도 이런 서사와 캐릭터에는 편견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된다. 세상에서 실패한 지질한 모습이 남성 캐릭터라면 어느 정도 익숙한 상태로 시작하는 것이기에 관객으로서의 저항감이 덜하다는 점에서, 여성이 맡은 캐릭터에는 훨씬 많은 설명이 필요해진다. 결국, 이런 캐릭터를 선택한다는 건 감독과 함께 하는 모험에 뛰어드느냐의 선택이 될 것이다. 섬세한 설계가 필요해지는 순간이다. 관객은 주로 자신과 닮은 주인공에게 스스로를 대입하며 이야기에 빠져든다. 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대입하고자 하는 성별, 비슷한 연령대나 직업 등에서 공통점을 찾아내어 그 인물의 서사를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인물이 너무 수동적이면 그런 인물과는 거리를 두고 싶어질 수밖에 없어서, 캐릭터가 미진한 반응으로 비호감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을 땐 이 캐릭터의 선택들을 납득할 수 있는 서사나 후에 캐릭터가 가지고 있던 비호감을 상쇄시켜줄 장치가 필요하다. 극중 이치코는 반강제적으로 가족을 떠나 독립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보이는 이치코의 괴팍하고 모난 성격이 그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장면이 이어지면서 알 수 있다. 나는 그때 이치코에게 희망을 본다. 자신이 애용하던 백엔샵의 아르바이트 면접을 볼 때, 알고 보니 우울증을 앓고 있던 점장의 멍한 시선을 외면하지 않고서 함께 따라가던 시선, 말이 많은 직원이 옆에서 계속 말을 걸며 방해해도 집중하려 노력하며 서툰 몸짓으로 일을 배우는 장면과, 의외로 근면하게 자신에게 부여된 일을 해내는 모습, 우연히 지나던 길에서 보게 된 권투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 눈빛에는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게 아니라는 희망이 있다. 이치코는 권투장에서 권투를 하던 카노(아라이 히로후미)를 처음 본다. 얼마 뒤 이치코는 카노의 경기를 보러 가게 된다. 그 경기를 바라보던 이치코의 눈에 들어온 게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카노인지, 경기인지. 카노가 마지막 경기를 마친 후 이치코가 그에게 묻는다. “아는 사이에요?” “누구?” “상대 선수요.” “그건 왜?” “서로 어깨를 두드려주길래요.” “시합이 끝나면 원래 그렇게 하는 거야.” 그러자 이치코가 말한다. “멋지네요.” 그러니까 처음 권투장을 지나는 모습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것이 권투인지, 카노인 것인지 알 수 없다. 둘 다여도 상관없다. 그는 연결되고 싶은 것뿐이니까. 나는 그 눈빛에서 비로소 이치코와 함께 이 이야기를 끝까지 함께 할 준비를 한다. 카노와 이치코 / 샌드백을 치는 이치코 (사진: ART INSIGHT , FILM MOVEMENT ) 나의 기대에 부응하듯 이치코가 점점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주저앉는 대신에 상흔을 딛고서 권투를 시작한다. 권투를 하기 위해서는 한껏 구겨져야 하는 법이기에 이치코의 자세는 여전히 구부정하지만, 자신을 숨기기 위해 움츠러드는 것과 가장 효과적인 주먹질을 위해 잠시 몸을 구부리는 건 분명 다르다. 아무런 감정이 없었던 눈빛이 흔들리며 세상과 감응하는 순간을 목격한다. 카노가 언젠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증오하지 않으면 때릴 수도 없어.” 무언의 비명을 지르며 갈 곳 없는 절망을 아무렇게나 표출하던 모습과 권투 글러브를 낀 채 샌드백을 치는 모습이 병치된다. 백엔샵에서 처음 일을 배우던 순간처럼 그의 주먹질은 여전히 서툴지만, 포기하지 않는 몸짓에서 배우가 캐릭터를 대하는 태도가 함께 드러난다. 연민하지 않는 것. 최선을 다해 경기를 준비하는 모습 그 자체. 내내 얻어터지기만 하는 인물을 배우 스스로가 비난하지 않고 존중할 때, 관객 역시 캐릭터를 함부로 동정할 수 없게 된다. 이치코가 포기하지 않았던 순간들이, 링 위에서 쓰러져 있을 때 잔상처럼 스쳐 지나가는 상흔의 순간들을 비로소 과정으로 만든다. 최선을 다해 뻗은 마지막이자 첫 번째 주먹질이 설령 실패로 끝나더라도 그것은 실패가 아니며, 단 한 번이라도 이기고 싶었다는 이치코의 눈물을 바라보는 관객의 마음에 응원과 사랑이 담기게 되는 이유다. 이 영화는 일면 뻔하다. 정처 없이 흔들거리던 캐릭터가 비록 실패할지언정 처음으로 자신의 욕망을 찾아가는 과정. 하지만 내게 이 영화 혹은 캐릭터가 특별하게 남아있는 이유는 영화 속 내내 구부정한 이치코를 보며 역시 구부정한 나를 긍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매끈하게 완벽할 수만은 없는 삶의 과정에서, 눈에 보이는 결과가 중요한 건 아니라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안도 사쿠라의 이치코를 기어코 사랑하게 되었으니, 나의 실패도 언젠가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이런 감각은 작품 안에서 우연히 만난 배우가 종종 내게 주는 선물이었다. (사진: ART INSIGHT ) 손수현(영화배우) l 연기를 하며 종종 글을 쓴다. < 럭키, 아파트 >(2024), < 양치기 >(2024), < 마더 인 로 >(2019) 등에 출연했고, 『새드 투게더』(공저, 2024), 『쓸데없는 짓이 어디 있나요』(2022)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