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아들 코리
- 감독
- 양관우
- 제작년도
- 1993
- 출연
- 한인숙, 김순원, 장광, 한상덕, 유해무
플로리다 프로젝트란 1965년 디즈니가 테마파크 건설을 위한 플로리다주 올랜도 부동산 매입계획에 붙인 가칭이다. 그렇게 지어진 디즈니월드는 여전히 성업 중이지만 가족 단위 투숙객을 겨냥한 인근 저렴한 모텔들은 2008년 경기침체 이후 극빈층의 임시거주지로 용도가 변경됐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형편이라 안정된 주거를 확보하지 못하고 남의 집에 얹혀살거나, 차에서 먹고 자거나, 모텔에 주 단위로 투숙하는 소위 ‘숨은 홈리스’(Hidden Homeless) 현상이다. 숀 베이커 감독의 < 플로리다 프로젝트 >는 192번 국도 주변 퇴락한 모텔 매직 캐슬을 로케이션으로 삼아, 디즈니 월드 지척에 살면서도 디즈니 월드와 가장 멀리 떨어진 세계에 속하는 여섯 살 소녀 무니(브루클린 프린스)와 친구들의 여름을 지켜본다. 아직 10대 티를 벗지 못한 엄마 핼리(브리아 비네트)는 하루 38달러의 방값과 다음 끼니가 어디서 나올지 모르는 처지다. 그러나 말썽쟁이 무니에게 알록달록한 모텔 동네와 기념품 가게들은 신나는 놀이터고 교육의 부재는 무한한 자유다. 소녀는 관광객에게 잔돈을 얻어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일이 하나도 슬프지 않다. 엄마끼리 친구인 아래층 스쿠티(크리스토퍼 리베라), 이웃 퓨처랜드 모텔에 새로 이사 온 잰시(발레리아 코토)와 삼총사를 이룬 무니는 어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부류의 꼬마다. 자동차 창에 침 뱉기 게임을 하고,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구역에 들어가 두꺼비 집을 내리고, 일광욕하는 아줌마를 놀리며 뛰어논다. 말할 나위 없이 한 발 떨어져 보면 아이들의 일상은 위험투성이다. 국도에는 자동차가 질주하고, 수풀에서는 악어가 나올지도 모르고, 공사가 중단된 주택단지에선 뭐가 떨어질지 모른다. 수상한 취향의 뜨내기 아저씨가 노는 아이들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도 한다. 무니의 매일은 여름 캠프처럼 즐겁지만, 엄마 핼리는 생계를 점점 위험한 방법에 의지하게 되고 이는 여름의 파국으로 이어진다. 보호자들이 돈을 버는 사이 본의 아니게 모텔 아이들의 안위를 챙기는 역할을 맡은 사람은 매직 캐슬의 관리인 바비(윌렘 데포)다. 관광 모텔이 빈민 레지던스로 변하면서 모텔 매니저인 그는 업무 내역에도 없는 ‘생활주임’ 노릇을 한다. 투숙객들은 그에게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의지한다. 숀 베이커 감독은 이 사내를 가부장적 시혜자로 만들지 않는다. 모텔 주인의 피고용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명백히 인식하면서도 무니 모녀가 최악의 상태에 떨어질까 반사적으로 경계하는 바비는 수호천사도 선한 사마리아인도 아니고 그저 다른 인간의 곤경에 감응하는 인간이다. 모녀를 염려하지만 도울 길이 무망하다는 점에서 그는 관객의 대리자이기도 하다. < 플로리다 프로젝트 >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 중 하나는 부산한 일과를 마친 그가 어스름을 바라보며 담배에 불을 붙일 때 찾아온다. 바비가 첫 연기를 작은 한숨처럼 내쉬자 모텔 복도 외부 등이 일제히 들어오는 순간은, 이 남자가 ‘매직 캐슬’을 지키는 소박한 마법사임을 말하는 매직 아워다. 바비는 관객의 대리자일 뿐 아니라, 사회 주변부에서 겨우 생존을 이어가는 인물들을 이야기하는 영화에서 감독이 택한 윤리적 포지션도 암시한다. 우선 미국 영화에서 거의 재현되지 않는 극빈층 아웃사이더의 삶과 그들의 생활공간, 그들이 매일의 빵을 얻는 지하경제는 숀 베이커 감독이 줄곧 이끌리는 소재다. 2012년 작 < 스탈렛 >은 샌 페르난도 밸리의 백인 포르노 배우가 노년의 여성과 맺는 우정 이야기였고 바로 전작 < 탠저린 >은 매춘으로 먹고사는 트랜스우먼 친구 둘의 크리스마스이브를 그렸다. 이와 같은 소재에 접근하면서 숀 베이커 감독은 외부자로서 취하기 쉬운 분노나 동정의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내려다보지 않고 옆자리를 지키며 그들의 삶에 내재한 아름다움과 어두움을 그대로 파악하고자 한다. 궁핍한 삶에서 방점은 궁핍이 아니라 궁핍이라는 조건을 수반한 삶에 있어야 한다고 숀 베이커의 영화는 믿는다. 예컨대 < 플로리다 프로젝트 >의 도입부에는 무니가 침을 뱉은 차의 주인이 따지러 오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내키지 않는 투로 무니의 손목을 끌고 간 엄마 핼리는 피해자 아주머니와 벌 받는 아이들을 구경하다가 아주머니도 처지가 딱해진 딸 대신 손자를 키우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담배를 나눠 피는 두 여자 사이에는 어느새 미묘한 유대감이 형성된다. < 플로리다 프로젝트 >는 “이 아이들을 보라!”는 계고의 메시지와 거리가 멀다. 숀 베이커의 시나리오와 카메라는 가난한 어린이의 가난에 집중하는 대신, 아이를 아이답게 만드는 환희와 활력을 놓치지 않는다. 동시에 그들의 객관적 궁지도 직시한다. 이 과정에서 어떤 극 중 개인도 천사와 악마로 만들지 않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선한 의도와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절망을 착취하는 수많은 영화들이 입증한 바 있다. 핼리는 누가 봐도 훌륭한 엄마가 아니다. 부분적으로 무책임하며, 어리석은 선택도 한다. 관광객들에게 물건을 팔려고 어린 딸과 함께 호객하고, 매춘을 위한 프로필 사진 촬영을 딸과의 놀이로 만들어버리는 핼리의 행동은 충분히 우려스럽다. 그녀가 딸에게 선물하는 사치는, 좀 더 고급스런 모텔의 아침 뷔페에서 누리는 도둑 포식이다. 숀 베이커 감독은 핼리를 변호하지 않으나 이 캐릭터를 판정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핼리를 한심해 하면서도, 이 어린 엄마가 무니에게 최고의 친구이며 무니를 온 세상과도 바꾸지 않으리라는 점을 확신할 수 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이 왔을 때 우리는 사필귀정이라는 안도감과 모녀가 헤어지는 일은 옳지 않다는 감정 사이에서 흔들린다. 영화의 최선은 때로 관객 안에 진정한 갈등을 심는 것이다. 전작 < 탠저린 >을 아이폰 5S로 스크린에 손색없이 아름답게 촬영해 화제를 모았던 숀 베이커는 ‘아이폰 감독’으로 세상에 기억되는 일을 방지라도 하듯 < 플로리다 프로젝트 >를 35밀리 필름으로 찍었다. 카를로스 레이가다스 감독의 < 사일런트 라이트 > < 포스트 테네브라스 럭스 >를 촬영한 알렉시스 사베가 카메라를 담당했다. 실제 로케이션에서 촬영된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프레임은 연보라와 오렌지, 플로리다의 환한 푸른색으로 가득하다. 혹자는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시각적 아름다움을 현실의 어둠과 배치되는 컬러의 역설에서 찾겠으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숀 베이커는 그의 인물들이 살아가는 장소의 공기를 주민의 눈으로 포착할 줄 안다. 저예산 영화 다섯 편을 만들며 세트 없이 인물의 생활공간에서 영화적 긴장을 발견해 온 경험은 그의 커다란 자산이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많은 숏은 성인의 허리께에 오는 아이들의 눈높이로, 순진한 흥분과 거기에 무심한 세상의 압도적 사이즈를 전한다. 그러나 숀 베이커는 특정 스타일에 고착하는 감독은 아니다. 존재감이 엷고 기동성 높은 스마트폰 촬영으로 비전문 배우의 거침없는 연기를 따라잡고 부추겼던 <탠저린>과 대조적으로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주의 깊은 블로킹과 프레이밍이 만들어 낸 숏으로 지지된다. 어린 배우들로부터 의도한 결과를 끌어내는 데에 실용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뇌관인 무니 역 브루클린 프린스의 연기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널리 회자될 터라 여기서는 말을 아끼기로 한다.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공개된 후 프린스와 자주 비교되는 대상은 최연소 오스카 여우주연상에 후보 지명됐던 <비스트>(2012)의 크반자네 왈리스인데 왈리스가 아이로서 존재를 그대로 카메라 앞에 드러내는 연기를 했다면 브루클린 프린스의 그것은 타고 난 배우의 철저히 리허설 된 연기다. 이런 영악한 속성이 스스로를 세상의 주인공으로 믿고 화려한 ‘퍼포먼스’를 벌이는 무니라는 소녀의 성격과 조화롭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내내 관객을 이끌고 무니의 세상을 기웃거리고 뛰어다니던 < 플로리다 프로젝트 >는 마지막에 이르러, 마치 지금껏 한 번도 달리지 않았던 것처럼 달려나간다. 질주인지 비상인지 구분하기 힘든 이미지 앞에 떨면서 나는 딱 한 가지만 잊지 않으려고 했다. 예술이 세계를, 예술가가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는 동료 인간을 염려하고 사랑하는 좋은 방법을 아는 영화를 방금 봤다는 사실을.
‘트렁크 소설(trunk novel)’이라는 말이 있다. 작가가 생전에 발표하지 않고 묵혀 두었던 원고를 사후에 책으로 펴내는 경우, 또는 작가가 묵혀두었던 원고를 모종의 사유로 출판사가 요청하여 생전에 책으로 펴내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다. 실존 인물의 명예를 훼손할 우려가 있거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재를 다루었기 때문에 발표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면 대개는 작가의 작품 목록에서 B급으로 여겨지는 작품이다. 그런데 그 작가가 아직 살아서 왕성하게 활동하는(심지어 살아서 이미 전설이 되어 버린) ‘호러의 제왕’ 스티븐 킹이라면 어떨까? 10년 전 기준으로 이미 전 세계에서 3억 부가 넘게 팔린 책들을 써온 작가 스티븐 킹이 무려 33년에 걸쳐 완성한 7부작 판타지 소설이라면? 그가 베스트셀러를 숱하게 발표하는 와중에도 틈만 나면 책상 앞으로 돌아와 마침내 완성한, 그리하여 일생의 역작이라고 자부하는 대하 판타지 시리즈라면? 그렇다면 뭔가 있지 않을까? 그 질문의 답이 바로 이제부터 소개할 ‘다크 타워 The Dark Tower’ 시리즈다. < 석양의 무법자 >(1965)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시리즈의 2부인 「세 개의 문 The Drawing of the Three」에서 스티븐 킹이 밝힌 바에 따르면 다크 타워 시리즈는 로버트 브라우닝의 서사시 「롤랜드 공자 암흑의 탑에 이르다 Childe Roland to the Dark Tower Came」에서 시작됐다. 메인 주립 대학교 영문과 2학년이던 1967년, 킹은 전공 강의에서 그 시를 읽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브라우닝이 쓴 가장 난해한 작품으로 꼽히는 이 시는 롤랜드라는 주인공이 어딘지 알 수 없는 황량한 대지를 지나 암흑의 탑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킹은 암울하고 스산한 상징으로 가득한 이 시를 너무나 감명 깊게 읽은 나머지 주인공 롤랜드의 여정을 언젠가 판타지 소설로 쓰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되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70년, 킹은 우연히 보러 간 영화 한 편에서 주인공 롤랜드의 모델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영화는, 하필이면,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석양의 무법자 Per qualche dollaro in piu>(1965)였다. 영화를 채 절반도 보기 전에 킹은 다음과 같이 깨달았다고 한다.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은 톨킨풍의 원정과 마법을 담은 이야기이되, 배경은 레오네 풍의 터무니없을 만큼 장대한 서부여야만 했다.” 그리고 물론 주인공 롤랜드는 “물 빠진 리바이스 청바지 같은 연청색 눈, 차갑고, 예리하고,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조준경 같은 폭격수의 눈”을 지닌 클린트 이스트우드여야 했다. 이로써 킹은 세 가지 목표를 설정하고 다크 타워 시리즈를 쓰기 시작하는데, 그 목표란 다음과 같다. 1) <석양의 무법자>처럼 장대한 서부의 풍광을 배경으로 2)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닮은 총잡이를 주인공으로 삼아 3) 그냥 긴 책이 아니라 역사상 가장 긴 대중소설을 쓴다. 1)과 2)는 그렇다 쳐도 어쩌다가 3) 같은 목표를 세울 마음이 들었냐는 물음에 킹은 시리즈의 ‘여는 글’에서 이렇게 답한다. “그때는 그게 좋은 생각 같았거든요.” 3)은 (다행히도)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예 실패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미 한국어판으로 출간된 5부까지의 분량만 해도 200자 원고지로 15,000 쪽이 넘는 데다, 출간을 기다리는 6부와 7부 및 시리즈의 외전 격에 해당하는 「열쇠 구멍으로 부는 바람 The Wind Through the Keyhole」의 분량을 합치면 무려 8,000쪽이 넘기 때문이다(6부와 7부의 한국어판은 내년에 나올 예정이다). 스티븐 킹이 1970년에 타자기로 친 문장 한 줄, 즉 “검은 옷의 남자는 사막을 가로질러 달아났고, 총잡이는 그 뒤를 쫓았다.”에서 시작하여 200자 원고지 24,000매에 이르는 대하 판타지 소설로 완성된 다크 타워 시리즈를 단선적으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중학교 1학년 수학 교과서 ‘순서쌍과 좌표’ 단원의 핵심 개념인 엑스축과 와이축을 이용하여 시리즈 전체의 얼개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크 타워 시리즈 다크 타워 시리즈의 줄거리를 뭉뚱그려 요약하면 ‘가상의 세계에 사는 총잡이 롤랜드가 현실 세계의 인물들을 자기 세계로 끌어들여 파티를 구성한 다음, 모든 세계의 중심축인 암흑의 탑을 파괴하려는 크림슨 킹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때 각각의 인물들이 합류하는 과정을 엑스축이라고 하면, 이 축은 미국 환상 문학의 금자탑인 「오즈의 마법사」의 거울상이라고 할 수 있다.(「오즈의 마법사」와 반대로 현실 세계의 인물들이 가상 세계의 총잡이에게 납치당하다시피 합류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먼저 주인공인 총잡이 롤랜드 디셰인이 어떤 인물인지부터 알아보자. 롤랜드가 사는 세계는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변질된’ 세계다. 폐허가 된 주유소나 수도 펌프, 모노레일 열차 같은 문명의 이기들이 뜨문뜨문 남아 있기는 하지만, 종이가 금처럼 귀하고 총은 그보다 더욱 귀한 세계인 것이다. 이 세계에서 총을 사용하여 질서를 유지하는 총잡이는 아서 왕 이야기의 기사와 같은 존재이고 그런 총잡이를 돕는 것은 마법사들의 일이다. 총잡이 가문의 후계자인 롤랜드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도시국가 길르앗의 군주가 될 운명이었지만, 마법사 마튼이 아버지를 배반하고 반역에 가담하면서 나라를 잃고 떠도는 신세가 된다. 그는 마튼이 변신한 인물로 추정되는 ‘검은 옷의 남자’ 월터를 쫓아 광대한 사막과 산맥을 지나 갖가지 사건에 휘말리면서 서쪽 바닷가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월터와 기나긴 대화를 나눈다(여기까지가 1부 「최후의 총잡이 The Gunslinger」의 내용이다). 독자들은 시리즈의 서장 격인 1부를 읽으면서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를 연발하다가 2부 「세 개의 문」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본격적인 이야기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1부의 결말에서 검은 옷의 남자는 타로 카드로 총잡이의 미래를 점치며 ‘뱃사람’과 ‘사로잡힌 남자’, ‘그늘 속의 여인’, ‘죽음’, ‘탑’이 그려진 카드를 보여준다. 이 카드의 상징들이 바로 총잡이가 앞으로 만날 인연들인 것이다. 2부 첫머리에서 가재 괴물 떼에게 습격당해 총잡이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오른손 손가락을 두 개나 잃어버린 롤랜드는 바닷가 백사장에 서 있는 수수께끼의 문을 통해 현실 세계로 건너가고, 뉴욕에 사는 에디 딘과 오데타 홈스를 자기 세계로 데려간다. 3부 「황무지 The Waste Lands」에서는 에디와 오데타, 롤랜드가 힘을 합쳐 뉴욕에 사는 소년 제이크를 불러낸다. 롤랜드와 함께 운명 공동체인 ‘카텟’을 결성한 세 사람의 면면은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와 함께 위대하고 무서운 마법사 오즈를 찾아가는 양철 나무꾼과 겁쟁이 사자와 허수아비만큼이나 범상치 않다. 1980년대의 마약 중독자 에디는 형을 인질로 잡은 마피아에게 협박을 당하여 바하마에서 뉴욕까지 헤로인을 운반하는 와중에 비행기에서 롤랜드를 만난다. 1960년대의 오데타는 흑인 민권 운동에 헌신하는 부유한 지식인 여성이지만, 지하철에 다리가 잘리는 사고를 당한 이후 조현병을 앓으며 ‘데타’라는 난폭한 인격을 숨기고 있다. 1970년대의 제이크는 전형적인 중산층 콩가루 집안의 외아들로 등굣길에 검은 옷의 남자 월터에게 떠밀려 차에 치여 숨을 거두면서 롤랜드의 세계로 건너가는데, 이곳에서 검은 옷의 남자를 쫓으려는 롤랜드의 욕심 때문에 또 한 번 죽음을 맞고(1부) 다시 한번 부활한다(3부).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의 동료들은 두뇌와 마음과 용기를 얻고자 마법사가 있는 에메랄드 시를 찾아 노란 벽돌 길을 따라 희망찬 모험에 나서지만, 「다크 타워」에서 롤랜드의 동료들은 자기가 왜 끌려왔는지도 모르는 세계에서 집에 돌아가기 위해 탑을 찾아 ‘빔(beam)의 길’을 따라 무시무시한 모험을 거듭한다(물론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도로시 일행에 강아지 토토가 있었듯이 롤랜드 카텟에는 개와 너구리를 합친 것처럼 생긴 개너구리 ‘오이’가 함께한다. 스티븐 킹 멀티버스 시리즈의 4부 「마법사와 수정 구슬 Wizard and Glass」까지 거울에 비친 「오즈의 마법사」를 엑스축으로 삼아 진행되던 이야기는 5부 「칼라의 늑대들 Wolves of the Calla」에 이르러 또 하나의 축을 따라 상승 곡선을 그리게 되는데 이 와이축은 다름 아닌 ‘스티븐 킹 멀티버스(multiverse)’, 즉 킹이 쓴 여러 소설의 시공간과 등장인물들로 구성된 ‘다중 우주’다. 사실 스티븐 킹 멀티버스는 시리즈의 4부 「마법사와 수정 구슬」에서 이미 그 모습을 드러낸 바 있다. 폭주 모노레일 블레인을 상대로 수수께끼 대결을 벌여 승리한 롤랜드 카텟은 캔자스주 토피카에 도착하는데, 이곳은 킹의 다른 소설 「스탠드」에서 인류를 절멸의 위기에 몰아넣은 슈퍼 독감이 휩쓸고 지나간 현실 세계의 캔자스였다. 시리즈의 5부 「칼라의 늑대들」에서는 롤랜드 카텟에 새로운 동료가 합류한다. 현실 세계의 미국 뉴욕에서 온 그 동료의 이름은 도널드 캘러핸, 바로 킹의 소설 「살렘스 롯」에서 흡혈귀의 피를 마시고 신앙을 저버린 가톨릭 신부다. 「칼라의 늑대들」의 절반가량은 캘러핸이 살렘스 롯을 떠난 이후 미국 전역을 방랑하던 시절의 이야기로, 우리는 그의 사연을 통해 현실 세계에 수많은 ‘비밀 고속도로’가 있으며 이 길이 여러 다중 우주로 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때 캘러핸의 뒤를 쫓는 크림슨 킹의 부하들은 「내 영혼의 아틀란티스」에 등장하는 ‘노란 코트를 입은 사내들’이다(크림슨 킹이라는 존재 자체는 킹이 1994년에 발표한 「불면증」에 처음 등장한다). 「칼라의 늑대들」의 결말 부분에서 캘러핸은 자신이 「살렘스 롯」이라는 소설 속의 등장인물인 것을 발견하고 경악하는데, 아직 한국어판이 나오지 않은 6부 「수재나의 노래 Song of Susannah」에서는 아예 스티븐 킹 본인이 메인주에 사는 소설가로 작품 속에 직접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메타 픽션의 성격을 띠게 된다. 또한 시리즈의 대단원인 7부 「암흑의 탑 The Dark Tower」에서는 (역시 올해 영화화되어 개봉을 기다리는) 킹의 소설 「그것」에 나오는 ‘거북이’가 중요한 역할로 등장하여 마침내 다중 우주의 비밀이 밝혀진다. < 다크 타워 >(2017)의 이드리스 엘바 이처럼 스티븐 킹의 작품 세계 전체를 망라하는 판타지 시리즈를 영화계에서 가만둘 리가 없다. 할리우드에서는 오래전부터 다크 타워 시리즈에 눈독을 들였고,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7년에 마침내 감독이자 제작자인 J. J. 에이브럼스와 아키바 골즈먼이 영화화 계획을 발표하여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2008년에 에이브럼스가 손을 뗀다고 발표한 이후 다크 타워 영화화 프로젝트는 한동안 표류했고, 2010년 론 하워드 감독이 유니버설 픽처스에서 다시 추진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하워드 감독은 심지어 영화 3부작과 드라마 2시즌을 함께 제작하여 ‘영화-드라마-영화-드라마-영화’의 순서로 시리즈 전체를 영상화하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포부가 너무 야심 찼던 걸까. 이듬해인 2011년에 유니버설 픽처스는 프로젝트를 포기한다고 공식 발표했고, 영화화 판권은 다시 워너브러더스로 넘어갔다. 워너브러더스는 러셀 크로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해 영화화를 추진했지만 이듬해인 2012년에 역시 프로젝트를 포기했다. 그로부터 한동안 소식이 없었던 영화화 프로젝트를 2015년에 소니 픽처스와 MRC가 다시 재개한다고 발표하더니, 이번에는 정말로 영화로 만들고 말았다. 연출은 < 미결처리반 Q > 시리즈의 각본가 출신으로 < 로얄 어페어 >를 연출하여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린 덴마크의 니콜라이 아셀 감독이 맡았고 주인공 롤랜드 역은 이드리스 엘바가, 검은 옷의 남자 역은 매슈 매코너헤이가 맡았다. 미국에서는 이미 개봉해서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한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서는 8월 23일에 <다크 타워: 희망의 탑>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될 예정이다(영화판 한국어 제목의 부제가 암흑의 탑(dark tower)이 아니라 ‘희망의 탑’이 된 까닭은 아마도 흥행을 간절히 바라는 수입사의 희망이……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모델로 창조한 총잡이 롤랜드 역을 어째서 이드리스 엘바가 맡았을까 하는 의문의 답은 아마도 다음의 한 줄 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그때는 1967년이었고 지금은 2017년이므로.” 우여곡절 끝에 영화화되기는 했지만, 이 한 편으로 다크 타워 시리즈의 전모를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물론 책을 읽으면 자세히 알 수 있다). 이번 영화의 흥행 성적에 따라 후속편의 제작 여부가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3부작 영화와 2시즌 드라마로 예정된 다크 타워 영상화 프로젝트는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스스로의 의지 때문이든 아니든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건드리는 모든 대상을 파괴하며 살아온 주인공이 자신과 세계의 운명을 거머쥔 암흑의 탑에 이르기까지, 그리하여 그 탑의 꼭대기에 무엇이 있을지(또는 없을지) 밝혀지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으로서는 스티븐 킹이 2부 「세 개의 문」의 닫는 글에 적은 한마디를 되뇌며 기다릴 때다. “그리고 탑은 더욱 가까워졌다.”
영화는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났다. 조르주 멜리에스는 뤼미에르 형제에게서 시작한 영화를 다시 한 번 시작하게 하였다. 내가 조금만 이야기를 우회하는 것을 허락해주기 바란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멜리에스의 부친은 그가 신발 사업을 이어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단지 소망이 아니라 에콜 데 보자르 학교를 다니면서 진지하게 수업을 받았다. 그러자 부친은 경제적 지원을 중단했다. 사태는 좀 엉뚱하게 흘러갔다. 멜리에스는 사업을 배우라고 보낸 런던에서 무대 마술사들에게 매혹되었다. 마법 수업을 받았고 자신의 독창적인 레퍼토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마법은 상자 속에 들어간 남자가 목이 잘린 채 계속 수다를 늘어놓는 퍼포먼스였다. 독창적인 마법사, 영화에 뛰어들다 문헌에 따르면 조르주 멜리에스는 독창적인 마법사였다고 한다. 그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계속해서 찾았다. 어떻게 알았는지에 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멜리에스는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공식 상영하기 전날인 1895년 12월 27일 저녁 리허설을 보러 갔다. 아마 새로운 마법에 대한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 신기한 발명품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 그래서 뤼미에르 형제에게 촬영 장비를 1만 프랑(옛 프랑스 화폐 단위)에 사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뤼미에르 형제는 거절했다. 멜리에스는 포기하지 않고 런던까지 가서 에디슨 컴퍼니의 카메라를 구입한 다음 변형하여 1896년 5월부터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석 달 뒤 몽퇴이유에 스튜디오를 차린 멜리에스는 마법사 일을 그만두고 영화 제작에 몰두했다. 처음에는 뤼미에르 형제처럼 (일종의) 다큐멘터리를 찍었지만 멜리에스를 매혹시킨 것은 (사실상 기술적 에러에 가까운) 특수효과가 만들어내는 마법적 효과였다. 그러면서 멜리에스는 자신의 작업에 야심적인 시도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는 영화를 실내로 끌어들였고 촬영을 위한 무대는 점점 스타일을 갖추기 시작했다. 1902년 5월 멜리에스는 쥘 베른의 「지구에서 달까지」와 H. G. 웰즈의 「달의 첫 방문자」를 느슨하게 각색해 <달세계 여행 Le Voyage Dans la Lune>을 촬영했다. 이 촬영을 위해 시나리오를 썼고, 13개의 거대한 무대 디자인을 했으며, 1만 프랑을 들여 이례적으로 석 달 동안 촬영했다. 이 영화의 주연은 조르주 멜리에스 자신이 연기했다. 촬영이 끝난 영화의 필름 길이는 무려 260m에 이르렀다. (상영 시간을 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초당 몇 프레임으로 상영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하게 설명하면 14프레임으로는 16분, 24프레임으로는 9분이 된다.) 무엇보다 <달세계 여행>을 오늘날 다시 보면 이제까지 고정되어 멈춰 있던 카메라가 트래킹 운동을 하는 순간 마침내 영화가 운동을 시작한 순간과 마주한다는 흥분에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쇼크를 준다. 영화 사상 가장 아름다운 총천연색 영화의 탄생 <달세계 여행>은 흑백 판본과 프레임 단위로 일일이 손으로 색칠을 한 컬러 판본이 있다. 그리고 단언컨대 <달세계 여행> 컬러 판본은 영화 사상 가장 아름다운 총천연색 영화 중 한 편이다. 그렇게 영화는 뤼미에르 형제의 계보와 결별하고 또 다른 하나의 시작을 선언했다. 나는 이 두 개의 시작을 좀 더 밀고 나아가고 싶다. 영화사 안에서 멜리에스의 영화에 대해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을 요구한 사람은 장-뤽 고다르다. 그는 <중국 여인 La Chinoise>(1968)에서 장 피에르 레오의 입을 빌려 말한다. “뤼미에르가 화가라면 멜리에스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지. 나는 멜리에스를 브레히트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해.”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가 세기말 풍경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는 판타지라면, 멜리에스는 세기말 관객들의 판타지를 찍은 다큐멘터리라는 고다르의 변증법적 역전은 우리에게 두 개의 시작에 대해 어떤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이 연재는 다시 한 번 시작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