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카라
- 감독
- 이훈
- 제작년도
- 1994
- 출연
- 곽재용, 장송미, 김세영, 전성기, 허종수, 이해인, 이재순, 김명수, 천재원, 조은희, 조영옥, 이경민, 최수정, 변미영, 이정란, 박은진, 한중원, 장임현, 표현, 윤태용, 엄기호, 곽찬, 박찬욱, 하지나, 장두이
“한국영화의 얼굴들”이라는 주제로 연재를 재개하게 됐다. 이 연재에선 한국영화에서 얼굴이 된 클로즈업(close-up) 쇼트들을 관찰하고 이야기하려 한다. 클로즈업으로 프레이밍된 인간의 얼굴뿐 아니라 동물, 사물, 풍경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응시(gaze)를 돌려주며 기어이 얼굴이 되는 클로즈업까지 포괄하려 한다. 클로즈업은 영화사 초기부터 어떤 다른 영화 쇼트보다도 영화이론가들을 사로잡아 왔다. 특히 클로즈업은 이전의 시각매체가 보여준 적 없는 시점과 크기를 표현하면서 영화 고유의 매체성을 표현하는 기법으로 평가되곤 했다. 영화학자 매리 앤 도앤은 이러한 매혹에 대해 클로즈업이 양가적 특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좀 더 상세히 말하면 클로즈업은 근접성, 내밀함, 디테일, 부분, 정서, 인칭화된 시점, 닮음, 연속성, 인간화, 주체화, 의미작용의 집중화 공간이면서, 반대로 거대함, 외부성, 총체성, 디제시스로부터의 자율성, 비례에 맞지 않음, 노출, 탈인칭화된 응시, 낯선 기이함, 불연속성, 비인간화, 객체화, 의미화 할 수 없는 잔여의 성격을 갖고 있다. 또한 아이콘으로서의 스타를 표현하는 주된 기법이자 높은 주목도 때문에 쉽게 교환할 수 있는 상품-물신이 될 수 있는 반면, 압도와 경외감을 일으키는 낯선 타자로서 탈약호화된 기호가 될 수도 있다. < 국가의 탄생 >(1915)의 미국감독 D.W. 그리피스와 < 전함 포템킨 >(1925)의 러시아 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쉬쩨인은 두 대립된 관점의 대표적 감독이었다. 그리피스는 친밀감과 정서적 집중을 활용해 멜로드라마적 순간과 영화스타를 창조했고, “롱 쇼트의 코끼리떼보다 클로즈업으로 촬영된 한 마리의 바퀴벌레가 더 무섭게 보인다.”고 피력했던 에이젠쉬쩨인은 일상을 넘어선 낯선 충격으로 계급화된 현실을 깨닫고 혁명의 깃발을 들게 만들었다. 이 연재는 클로즈업의 양가성 중 어느 한쪽을 옹호하기 보다는 이 대립된 잠재성이 교차하면서 혼란과 붕괴를 야기하고 무너져 내린 파편더미들 속에서 영화적 응시가 드러나는 순간들에 더 집중할 것이다. 또한 극장의 거대한 스크린보다는 휴대가능한 스몰 스크린이 지배적인 상영 플랫폼으로 부상하면서 영화의 개념과 범주가 달라지는 가운데 위에 언급한 클로즈업의 잠재성이 여전히 유효한지도 살펴보려 한다. 첫 번째로 다룰 클로즈업은 < 이태원 밤하늘엔 미국달이 뜨는가 >(1991, 이하 <이태원 밤하늘>)의 마지막 쇼트로, 샤니라는 인물의 얼굴이다. <이태원 밤하늘>은 < 고교우량아 >(1977), < 깊은 밤 갑자기 >(1981), < 장군의 아들 >(1990) 등의 영화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윤삼육 감독의 첫 연출작이다. 영화는 1980년대 후반 한국 주류사회에서 밀려나 이태원으로 오게 된 다양한 인간군상을 그린다. 여기서 이태원은 한국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받아주는 포용적 공간이자 미국이라는 제국의 지배를 받는 (탈)식민적 공간이다. 미군에게 성판매를 하는 기지촌 클럽의 ‘양공주’, 클럽댄서로 일하는 트랜스젠더 여성들, 조직폭력배들, 미군과 ‘양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가진 것 없지만 기성세대에 질린 젊은 청춘들이 그곳에 산다. 이 영화는 광주항쟁 마지막 순간에 도청을 탈출해 동두천 기지촌으로 숨어든 대학생이 민중의 삶을 지척에서 경험하고 갈등하는 이야기를 다룬 < 오! 꿈의 나라 >(이은, 장동홍, 장윤현, 1989)가 취했던 반제국주의 관점과 1980년대 상업영화의 에로티시즘 경향을 절묘하게 섞는다. 실제로 영화의 오프닝씬은 “미국 UPI 영화 직배저지투쟁에 앞장서온 모든 영화인에 바친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당시는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1988년 미국 할리우드 영화 직배가 허용되고 한국영화 점유율이 10%대로 떨어지는 가운데 한국영화 스크린쿼터를 사수하는 투쟁이 영화계에서 거세게 일고 있었다. ‘한국영화 위기’의 감각은 이 영화에서 민족-국가 및 이성애중심의 ‘정상’가족 위기와 남성성 재건의 욕망으로 전이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샤니가 있다. 다수의 인물이 주인공인 영화이지만 클럽댄서이자 트랜스젠더 여성이고 레즈비언으로서 애인 금자(임주연)와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샤니는 마지막까지 영화의 주제를 운반하는 동시에 비트는 인물이다. <이태원 밤하늘>이 제작된 시기는 사회 진보운동이 통일, 계급, 민주화 운동에서 인권운동으로 확장되어가던 시기였다. 현실과 스크린 모두에서 성소수자, 특히 트랜스젠더 여성은 사회적 차별을 당하는 민중 또는 시민으로 소환되기 시작한다. 일부 용어나 관점이 문제적이지만 트랜스젠더와 관련된 제도적 문제들을 인권적 관점에서 조명했던 <PD수첩>의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들-‘게이’들의 삶」(1995.5.9.)이라는 에피소드가 방영되고, < 개 같은 날의 오후 >(이민용, 1995)는 가정폭력에 항의하며 옥상에 올라가게 된 여성들 중 트랜스젠더를 포함시켜 시스젠더(cisgender, 사회에서 지정받은 성별과 본인이 정체화한 성별이 일치한다고 인지하는 사람) 중심의 여성범주를 해체했으며, <이태원 밤하늘>과 < 마스카라 >(이훈, 1994)는 트랜스젠더 여성 캐릭터에 각각 오윤희와 하지나라는 트랜스젠더 당사자 배우를 캐스팅했다. 샤니는 애인 금자의 만류에도 둘의 미래를 위해 미군을 상대로 성판매를 한다. 그러던 중 금자가 샤니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오래전부터 여성으로 정체화하고 호르몬치료를 받아온 샤니는 금자의 임신을 믿을 수 없다. 금자의 임신은 자신의 여성성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이태원의 트랜스젠더 선배는 호르몬 치료에도 불구하고 간혹 “어떤 자극에 의해” “죽어있던 남성이 살아나는” 경우가 있다고 증언한다. 하지만 그 자극이 무엇인지는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그저 민족-국가의 미래가 있으려면 반드시 이성애 부부에 의한 생물학적 친자가 있어야 한다는 목적론적 암시로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샤니가 남자의 모습으로 살아달라는 금자의 청을 거절하자, 금자는 홀로 자신의 시골 고향집으로 떠난다. 결국 샤니는 고민 끝에 남장을 하고 금자를 만나러가는 고통스러운 결정을 내린다. 이 영화에는 샤니와 금자 외에도 아이가 있는 또 다른 대안 가족이 등장한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클럽의 다른 ‘양공주’ 여성들과 달리 젊은 커플인 유진(최진영)과 상희(전세영)는 동생을 학대하는 엄마와 청년들을 착취하는 조폭 두목 아버지 장포 모두로부터 탈출한다. 그러나 이 셋은 “대안을 찾아 떠나겠다”는 분명한 선언에도 친자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민족-국가를 맡길 수 있는 이상적 가족으로 선택되지 못한다. 영화는 오히려 샤니에게서 제국인 미국에서 해방된 민족-국가의 미래 서사를 찾는다. 트랜스젠더인 샤니를 강제로 여성에서 남성으로 재성전환 하는 혹은 드랙킹(drag king) 수행을 하게 만드는 과정은 ‘식민화되고 여성화되었던’ 민족-국가의 재건/재남성화로 은유화 된다. 이성애 부모와 친자라는 생물학적 관계로 맺어진 규범적 가족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산부인과 의사의 증언처럼 죽은 줄 알았던 민족적 자존심인 ‘남성’이 ‘건강하게’ 살아있어야 하는 것이다. 샤니를 통해 효과적으로 이분법적 대립과 위계화가 형성된다. ‘근대/도시/여성/비규범적 트랜스젠더 신체/동성애/(탈)식민화된 공간/오염/헤테로토피아’인 이태원과 ‘전근대/자연/남성/규범적 시스젠더 신체/이성애/주권적 민족-국가/순수/유토피아’인 고향으로 이원화되고,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동이 성장서사처럼 진행된다. 샤니는 심신이 찢겨나가는 고통을 느끼며 화장을 지우고, 머리를 자르고, 깨진 거울을 응시하고, 양복을 입으며 남장을 한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핸드헬드 카메라와 사각앵글로 이뤄진 짧은 쇼트들이 몽타주씬으로 구성되며 그야말로 존재가 뿌리부터 흔들리는 엄청난 폭력과 고통을 가시화한다. 이것은 단순히 샤니에게 보존되어 있던 남성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다. 남성으로의 강제된 (재)성전환이자 강압적인 이성애로의 교정이다. 또한 거칠게 이어 붙어진 몽타주는 그 자체로 프랑켄슈타인의 몸처럼 남성성의 편집이 된다. 남성성이 편집된 자국과 인공성은 사라지지 않고 드랙킹 공연처럼 샤니 혹은 오윤희 배우의 신체의 표면에서 이질적으로 겉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몽타주씬 이후 쓸쓸하고 황폐해 보이는 이태원 낮의 거리를 걷던 중 샤니는 남자 행인에게 부딪혀 욕을 먹는다. 남자는 “야 임마! 똑바로 보고 다녀, 이새끼야!”라고 소리친다. 순간 샤니는 자신이 남성으로 패싱(passing,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겉보기 성별)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샤니는 옅은 미소를 띤다. 이중의 성전환 속에서 분명히 정체성과 존재가 파괴되고 분열되는 고통을 겪지만 또한 그녀의 (재)성전환 혹은 드랙이 제대로 통했다는 복잡한 트랜스젠더의 쾌감을 보여준다. 품이 커서 어색해 보이는 남자 양복을 입은 샤니는 산으로 둘러싸인 금자의 시골 고향에 도착한다. 화려한 도시의 네온사인과 비교되는 새소리가 들리는 자연풍경 속에서 놓인 샤니를 카메라는 핸드헬드로 뒤쫓는다. 금자는 전통적인 초가집 가옥에서 가슴을 드러내고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다. 금자의 신체는 샤니가 트랜스 여성으로서 동일시하는 여성 신체인 동시에 레즈비언으로서 성적 욕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결말에서 원초적으로 보이는 그 젖가슴은 오직 가부장제-이성애 중심적인 재생산만을 위해 거리를 두고 타자화해야 할 자연적 신체로 묘사된다. 재생산이 가능한 모성성으로 환원된 시스젠더 여성의 신체는 트랜스젠더 여성은 근접할 수 없는 원본의 환상을 만든다.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가슴의 줌인 클로즈업으로 신체화된 금자와 대비되게 카메라는 역쇼트로 손을 허리에 얹고 우뚝 서며 역광을 받고 있는 샤니를 로우앵글을 시각화하며 남성성을 강조한다. 다시 한 번 로우앵글의 줌인 클로즈업으로 잡힌 샤니 얼굴 뒤로 병풍처럼 둘러싸인 높은 산봉우리가 보이고 전통음악이 깔린다. 샤니의 얼굴은 모성적 자연 풍경에 빨려 들어가며 고향으로 돌아온 탕아이자 남성적 민족-국가의 얼굴로 이론의 여지없이 알레고리화 된다. 여기서 샤니의 여성 정체성과 퀴어한 섹슈얼리티는 폭력적으로 부정되고 제거되며 남장을 한 샤니는 한국영화와 민족국가를 위기로 몰아넣었다가 다시 구원해내고 동질화하는 얼굴이 된다. 하지만 여기에는 완전히 의미화 되지 않는 잔여가 남는다. 줌인 클로즈업의 순간 샤니의 얼굴에는 찡그린 미소가 각인된다. 이 미소는 다시 줌아웃하며 풍경 속에 작게 남아있게 되는 샤니와 독립되어 부유한다. 샤니/오윤희 배우의 얼굴은 산으로 병풍 쳐진 자연, 즉 이성애 시스젠더 중심의 민족-국가 이데올로기로부터 뜯겨져 나와 자율성을 갖는다. 어떤 고정된 의미로 해석되지 않고 통합되지도 않는 미소는 샤니가 남장을 하고 패싱된 후 짓는 미소, 오윤희 배우가 느끼는 잘 수행된 드랙킹의 쾌락, 그리고 여성성을 지워내고 남성성을 인공적으로 편집하는 쇼트들의 봉합솔기와 겹쳐진다. 그 미소는 감독이 설정한 엔딩씬의 샤니 캐릭터를 떠나와 이물감을 느끼고 있는 오윤희 배우의 트랜스젠더 신체위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찡그린 미소는 가부장적 민족-국가의 시스젠더 응시 아래 억눌리지만 곧 슬며시 고개를 들며 벌어진 봉합 솔기를 비집고 되돌아오고 마는 트랜스젠더의 응시로 전치된다. 누구의 모습과 수행으로, 어떤 정체성과 섹슈얼리티로, 어떤 마음으로 짓는 미소인지 알 수 없는 여러 얼굴이 레이어된 마지막 클로즈업은 이성애 시스젠더 중심의 민족-국가를 재건하려는 욕망과 끊임없이 오염되고 변용되며 이질적인 장소로서의 트랜스 신체성이 교차하는 마디점(nodal point)이자 영화적 응시가 된다. * 샤니의 남장 혹은 재남성화를 드랙킹으로 보는 아이디어는 김일란 감독과의 대화중에 나온 것임을 밝힌다. * <이태원 밤하늘엔 미국달이 뜨는가>의 해석은 필자의 논문 「헤테로토피아 공간과 트랜스젠더 여성 재현-1990년대 이후 한국영화를 중심으로」(『한민족문화연구』, 2023.3)에서 일부 발췌한 것입니다.
‘B무비’라 불릴 만한 한국영화가 대거 등장하기 시작한 건 아마도 1990년대 후반부터일 것이다. 이전에도 소위 ‘기괴한 영화’가 없지는 않았을 테지만, 이즈음에 감독의 자의식 아래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B무비들이 하나둘씩 선보였다. 대표적인 예가 박찬욱 과 이무영 이다. 각본과 기획을 함께 진행하기도 하던 이들은 각자 메가폰을 잡아 이전에 보지 못한 한국영화를 만들어냈다. 박찬욱이 < 3인조 >(1997)를, 이무영은 < 휴머니스트 >(2001)를 내놓았고, 그 시기에 이훈 의 < 마스카라 >(1995), 김용태 의 < 미지왕 >(1996), 박헌수 의 < 진짜 사나이 >(1996) 같은 영화가 나왔다. 물론 이들 영화는 B무비의 숙명처럼 대중들의 사랑을 얻지 못했다. 단, 일국의 영화산업이나 시장이 발전하기 위한 전제 조건 중 하나는 ‘영화의 풍성함’이다. B무비가 만들어지고 시장에 나온다는 상황 자체가 이후 한국영화의 지형에 어떤 변화가 만들어질 거라는 예감을 낳았다. 그리고 변화는 실제로 일어났다. 그러나 B무비는 저주의 이름이다. 한 번 정도 시도하면 몰라도 계속 그 땅에 머물렀다간 대중들의 미움을 사거나 잊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B무비의 영혼은 비대중, 혹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 반대중의 정서를 지녔기에 다수의 사랑을 받기가 힘들다. 그런 영혼의 작업은, 메이저의 감성에서 멀리 떨어져 반역의 행동을 벌일 수 있는 자만이 지속 가능한 일이다. 이후 방향을 튼 박찬욱이 대중과 친숙해진 반면, 지금까지 B무비의 영혼을 버리지 않은 이무영이 과연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생각해보라. <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 >(2002), < 아버지와 마리와 나 >(2008), < 한강블루스 >(2016)를 발표할 동안 그는 고독한 작가로 남았다. 이무영은, 그처럼 영화를 만들면 안 되는 어떤 전범 같은 존재가 되었지만, 신기하게도 그와 같은 영혼을 지닌 존재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타났다. 2019년까지 한국영화계에서 그런 이름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신정원 의 < 시실리 2km >(2004), 원신연 의 < 구타유발자들 >(2006), 이하 의 <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2006), 오기현 의 < 손님은 왕이다 >(2006), 박명랑 의 < 분노의 윤리학 >(2012), 우선호 의 < 시체가 돌아왔다 >(2012) 같은 영화들은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 좀비처럼 스크린 위로 계속 찾아왔다. 올해에도 그런 영화를 한 편 보았다. 그 작품은 지난 2월 13일에 개봉한 이민재 의 < 기묘한 가족 >(2018)이다. 이런 영화를 욕하기란, 한편으로 쉽다. 얼핏 보아 못 만든 것 같고, 뒤뚱거리는 전개 방식은 매끈한 내러티브를 찾는 자들에게 좋게 보일 리 없다. 실제로 이 영화에 내린 평자들의 점수는 가혹했다. 그런 상황에서 높은 점수를 줬다가는 십중팔구 영화와 함께 처형당한다. 곧바로 ‘영화 못 보는 인간’으로 낙인찍힌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나는 욕 먹을 각오로 ‘지금까지 이런 좀비영화는 없었다. 단, 취향을 아주 많이 탈 듯’이란 평가와 함께 별 4개를 주었다. 지금까지 후회는 없다. 다시 보아도 <기묘한 가족>은 올해 본 영화 가운데 몇 안 되는 재미있는 영화다. 그 재미를 여기서 풀어놓을 재간은 없다. 재미를 설명하는 게 어디 가능한 일인가. 용케 ‘12세 관람가’ 판정을 받았으나 <기묘한 가족>은 순진한 청소년들이 보기에 질이 그리 좋지 않은 자들이 나오는 영화다. 10년 전, 주유소를 열었다 망한 박씨네 가족은 초라한 행색으로 변했다. 하와이에 가보는 게 꿈인 아버지 만덕은 화투판에서 성질이나 부리고, 큰아들 준걸은 유사 범죄 행위로 근근이 카센터를 운영하고, 며느리 남주는 돈만 밝히는 아낙으로 살고, 딸 해걸은 토끼에 연연하는 우울한 아이로 자랐다. 둘째 아들 민걸이 해고당해 충청도 시골집으로 돌아오던 날, 대기업 제약사의 실험 도중 목숨을 잃은 남자가 죽음에서 깨어나 한마을로 걸어 들어온다. <기묘한 가족>의 전반부는 우울한 가족이 행복을 되찾는 과정을 그린다. 박씨 가족은 좀비에게 ‘쫑비’라는 이름을 붙인 다음 ‘회춘의 묘약’을 팔아 재산을 끌어모은다. 만덕은 하와이로 떠나고, 10년 만에 주유소를 다시 오픈한 가족은 행복한 불빛 아래 저녁을 먹으며 웃는다. 기존의 좀비영화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반부를 마친 영화는 정확하게 중간 지점에서 방향을 완전히 튼다. 행복의 정점을 상징하는 결혼식장에서 일어난 좀비의 창궐은 전반부의 나른한 기억을 박살 낸다. 결혼식장과 시골 장터 배경의 소규모 스펙터클 뒤로 주유소의 클라이맥스가 폭발을 준비한다. 사달을 일으킨 장본인이면서 좀비로부터 안전했던 박씨 가족은 졸지에 마지막 대피처가 된 주유소에서 생존을 건 투쟁을 벌인다. 이민재는 그런 와중에 폭죽이 터지고 디스코 음악이 흘러나오는 발칙한 상상을 한다. 좀비 댄서들이 화려한 조명 아래 춤추는 파티가 외딴 주유소에서 펼쳐진다. 좀비가 들끓는데도 뉴스에 보도조차 되지 않던 시골 마을은 그렇게 해서 그들만의 축제를 알린다. 평온한 전반부를 보다 이게 과연 좀비영화가 맞는지 의문을 품었던 차에, <기묘한 가족>은 생존과 멜로와 댄스가 결합된 전대미문의 장관을 연출한다. <기묘한 가족>은 제목에서부터 김지운 의 < 조용한 가족 >(1998)과 은근히 교류하는 작품이다. 한적한 곳에서 산장을 운영해 돈을 벌어보려던 가족이 예기치 않게 벌어지는 죽음의 행렬로 인해 곤혹스러워진다는 <조용한 가족>의 기괴한 이야기는 <기묘한 가족>에 길을 터준 격이다. <조용한 가족>에서 아버지 역을 맡은 박인환 과 당시 단역으로 나온 정재영 이 나란히 출연해 어떤 기시감을 주기도 한다. 두 영화는 장르의 외피를 빌려 한국인이 행복을 기원하는 방식을 희화화한다. 두 영화의 가족 구성원은 돈을 버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둔다.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그 가치를 지키고자 몸을 던지는 그들을 보면서 웃음과 통증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건 당연하다. 자칫 잘못하면 인물을 조롱하는 인상을 안길 수 있을 터, 두 영화는 투쟁하는 인물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는다. 웃음의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그들의 존재에 상처를 입히지 않는 것, 두 영화는 그것을 해냈다는 점이 중요하다. 또한 조지 로메로의 좀비영화가 그러하듯, <기묘한 가족>은 제작 당시 정치 상황의 은유로 읽어도 좋은 작품이다. 죽음에서의 회복을 보여주는 엔딩은 박수를 치고 싶을 정도로 뛰어나다. 윤종신의 <환생>이 괜히 흘러나오는 게 아니다.
할리우드의 열여섯 살 소녀들에게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2012년 <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 >을 시작으로 3편의 시리즈를 성공시키며 승승장구한 <헝거게임> 시리즈의 여전사 캣니스(제니퍼 로렌스)는 어린 여동생의 이름이 호명되자 동생을 대신해 독재국가 ‘판엠’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든 생존 전쟁 ‘헝거게임’에 참여한다. 군중 속에서 용기 있게 나선 캣니스의 나이가 그때 고작 열여섯 살이었다. 캣니스의 파급력은 제니퍼 로렌스의 인기와 맞물려 급속도로 퍼졌다. 영화 속 전사는 현실에서도 유효했다. 제니퍼 로렌스는 인터뷰에서 “그래, 나 살쪘다. 그렇다고 화면에 잘나오려고 살을 빼지는 않을 거다. 애들이 캣니스처럼 돼야지 하고 밥 안 먹고 생활하는 그런 꼴은 보기 싫다”며 쇼비지니스계의 허상을 똑부러지게 말할 수 있는 ‘똘아이’로 인기를 독식했다. 이렇게 매력덩어리니 안 넘어가고 배길 수 없다. 열여섯 살의 캣니스는 SF 판타지물의 이른바 기준점이 됐다. 디즈니에서 십 대들을 틴에이지 멜로드라마에 활용하느라 열 올리는 동안 패러다임은 바뀌었다. 무장한 전사는 소녀들의 몫이 되었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시작된 영 어덜트 소설은 그리하여 초등학생 대신 체력적으로 파워를 가지고, 정신적으로 고뇌를 막 시작한 사춘기의 소녀들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캣니스로 각광받은 < 다이버전트 >(2014)의 트리스(쉐일린 우드)도 그렇게 탄생했다. ‘핏줄보다 분파’가 중요한 통제된 사회 모든 구성원이 열여섯 살이 되면 평생 살아가게 될 테스트를 치르게 되는데, 트리스는 그 중 어느 분파에도 속하지 않아 금기시되는, 즉 ‘다이버전트’의 운명을 쥐고 태어난 존재다. 시스템의 제어로 통제할 수 없는 강한 의지를 가진 이단아의 나이는, 역시 사춘기를 통과하는 열여섯 살이다.(이 영화의 헤로인 쉐일린 우드는 청춘 멜로 < 안녕, 헤이즐 >(2014)에서도 암 투병 중인 환자이자 민감한 사춘기 연기로 호응을 얻기도 했다.) < 뷰티풀 크리처스 >(2013)의 소녀 리나 역시 강한 힘으로 세상을 끝낼 수도 시작 할 수도 있는 능력자다. 이 엄청난 파워는 열여섯 살 생일이 되면 그 능력이 발휘되는데, 그녀는 선과 악 중 한 가지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다. 소설, 영화, 그리고 각종 머천다이징까지 더해 소비력이 증가한 십 대 팬들을 겨냥한 할리우드의 전략은 알겠다. 하지만 이 거대한 지구의 운명을 이대로 열여섯 살, 순수하고 순진하며 철모르는 소녀들에게 모두 맡겨도 되는지, 좀 불안하기는 하다만. 하여간 < 하우 아이 리브: 내가 사는 이유 > 역시 <헝거게임>에서 출발한 이 열 여섯살 소녀가 바라본 아포칼립스의 시대다. < 라스트 킹 >(2006)을 연출한 케빈 맥도널드의 연출로 원작은 3권의 성장 소설로 영 어덜트 소설계에 파란을 일으킨 멕 로소프의 작품. 미국에 있는 소녀 데이지(시얼샤 로넌)가 영국의 시골 마을에 있는 사촌 집에 놀러왔다 겪게 되는 세계 핵전쟁의 살벌한 풍경을 그린다. 제작진은 애초 <헝거게임> 시리즈를 의도했다고 한다. < 한나 >(2011)로 어린 나이부터 액션에 재능을 보인 그 시얼샤 로넌이 제니퍼 로렌스의 역할을 해줄 수 있다고 굳건하게 믿었으며 그 전략에 꼭 맞게 원작의 열다섯 살 데이지를 영화에서는 열여섯 살로 수정했다. 더불어 그녀와 사랑을 나누는 사촌 에디(조지 멕케이)의 나이도 맞춤형으로 원작의 열 여덟 살이 아닌 열여섯 살 동갑이 된다. 핵전쟁이 발발한 후 미국으로 떠나는 대신 사랑하는 에디와 함께 남기로 한 데이지는 그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열일곱 살로 사는 건 어떤 기분인지 알고 싶어. 너와 함께 여기 남고 싶어.”라고. 놀랍게도 < 하우 아이 리브: 내가 사는 이유 >의 장르를 결정해 줄 핵전쟁은 열여섯 살 소녀의 머릿속 오만가지 혼란 중 단 하나의 요소가 된다. 그 나이 때는 세계정세나 핵전쟁 말고도 고민할 것도 너무 많고, 그리고 사랑도 처음 시작할 나이라 복잡한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딸이 영국 사촌 집에 가든 말든, 잘 도착했는지조차 전화 한번 하지 않는 무심한 아버지를 ‘피해’ 온 소녀는 자기 밖의 세상에 우호적이지 않다. 원래 이름대신, 아예 사촌들에게 “데이지라고 불러줘”라며 자신이 원하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한다. 모든 이들에게 까칠하고, 말은 아끼는 데이지가 유일하게 소통하는 것은 세상과 그녀를 단절시켜줄 헤드폰 속 록음악과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는 환청뿐이다. 뱅 헤어와 진한 마스카라, 요즘 스트리트 패션의 일부인 일부러 구멍 낸 스타킹 차림을 한 미국 십 대, 데이지가 화면에 등장할 때는 쾅쾅 울리는 ‘Do It With a Rockstar''같은 음악과 ‘하루에 8잔 이상의 물을 마셔라’ ‘죽었으면 좋겠어’ ‘인생의 목표를 찾아라’같은 온갖 정체성이 뒤범벅된 사운드가 혼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브루클린 거리나 클럽에서 맞닥뜨릴 것 같은 이 불량한 십 대가 도착한 곳이 바로, 제인 오스틴 소설 속에서나 볼법한 영국의 목가적 전원이라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진짜 시작이다. 창밖은 초록이 우거지고, 아침 햇살이 창문을 통해서 살포시 들어오는 이런 환경에서 블랙 마스카라를 짙게, 더 짙게, 가능한 한 더 두껍게 그리고 있는 데이지의 모습은 그래서 초장부터 상당히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삐딱한 데이지는 어떻게 마스카라를 지우고 영국 목가의 풍경과 어우러지게 되었나로 상당 부분 이 영화의 정체성이 확보된다. 열여섯 살 데이지가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게 된 사건이 있는데, 바로 사촌 에디의 존재였다. 매를 다룰 줄 아는 에디는 소 떼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데이지를 위해 동물과 교감을 시도하고 그들을 물러나게 해주는 능력을 발휘한다. 에디가 울타리에 걸려 손에 피가 난 데이지의 피를 빨아주는 순간, 데이지의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동물과 교감할 수 있는 에디는 결정적으로 데이지를 향해 “모든 규칙을 다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해? 내 머릿속의 소음들”이라며, 그녀가 가진 혼란을 읽어 낸다. 그런데 진짜의 혼란은 데이지의 첫사랑과 함께 시작된 핵전쟁에 있었다. 조그만 소녀 파이퍼가 여름날 하늘에서 떨어지는 낙진을 보며 “눈이 와”하고 소리치는 이 서정적인 장면이, 핵전쟁 발발을 알려주는 신호다. 세상에 이런 전쟁의 시작 장면이라니 좀 반칙이다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첫사랑의 충만함을 알게 된 데이지는 결국 미국 시민의 보호받을 권리를 포기하고, 사랑하는 에드먼드와 남는 걸 택한다. 그들이 처음으로 섹스를 하고 사랑을 나누는 동안, 중요한 건 완벽하게 어른의 존재가 배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데이지의 아버지는 무관심했고, 영국에 있는 데이지의 이모이자 에디의 엄마는 데이지의 도착 이후 ‘평화협정’ 건으로 바쁘게 뛰어다니며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더니, 결국 스위스 바젤 출장 건으로 떠나 완벽하게 아이들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이후 영화 속 잠깐 등장하는 어른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최악이다. 군인들은 데이지와 사촌들을 남자와 여자로 나눠 격리시켜 결국 이들을 헤어지게 만들며, 데이지가 피난의 과정에서 만나는 남자 어른들은 여성들을 겁탈하고 폭행하는 악인으로 묘사된다. 전쟁의 시작과 진행 상황은 TV와 라디오로만 전달되는 정보일 뿐, 원인이나 주체 역시 불분명하다. 에디와 떨어져 파이퍼와 끌려간 데이지는 이제 부역에 동원되며, 방사선에 오염된 물을 마시기 위해 정제약을 타 먹는 생활을 하다가, 죽음의 공포를 피해 에드먼드와 헤어지기 전에 한 ‘다시 집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린 파이퍼를 데리고 탈출을 시도한다. 파이퍼를 독려하며 쉬지 않고 걷고 또 걷고, 파이퍼를 해하려는 어른들을 제압하고, 여우가 시체의 사지를 뜯어먹는 시쳇더미에서 사촌을 찾으려 발버둥 치는 소녀의 모습은, 이미 열여섯 살 순진한 소녀에게서 한발 벗어나 있다. 데이지가 겪는 대재앙, 종말의 참상은 < 투모로우 >(2004) 같은 블록버스터에서 묘사하는 종말의 풍경과 조금 다르다. 소녀에게는 이 종말을 끝낼 파워가 아닌, 안전한 곳으로 묵묵히 달려나갈 의지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분위기는 오히려 종말의 세상, 식량이 바닥난 잿빛 풍경 속에서 필사적으로 남쪽을 향해 가던 아버지(비고 모르텐슨)과 어린 아들(코디 스미스 맥피)의 탈주에 더 가까워 보인다. 데이지는 결국 전쟁 전, 자신을 소모하게 만들었던 마음속의 혼란을 접고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하다. < 하우 아이 리브: 내가 사는 이유 >를 보면서 과연 많은 사람들이 핵전쟁을 묘사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데이지의 첫사랑, 그리고 성장담에 접목된 이야기를 과연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핵전쟁을 묘사한 후반부에 앞서 영화의 전반부를 지배하는 서정적 정서와 표현력은 상당한 수준이다. 더불어 시얼샤 로넌의 활약을 보는 건 이 영화에서 빠뜨릴 수 없는 매력 요소다. 그녀가 이 영화로 제니퍼 로렌스의 영역을 이어받으리라는 제작진의 기대는 너무 과했다 싶지만 CIA 첩보원 아버지에 의해 16살 살인무기 소녀로 길러진 한나(< 한나 >)를 통해 봤던 가능성은 여전히 놓지 않고 싶다. 벌써 몇 년 지난 이야기를 꺼내자면 그녀가 <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의 헤로인 ‘레이’역에 탈락했다는 소식을 들은 기억이 난다. J.J. 에이브럼스가 그 역을 시얼샤 로넌에게 맡겼더라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