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 태자
- 감독
- 전창근
- 제작년도
- 1956
- 출연
- 이향, 주선태, 유계선, 석금성, 김신재, 이민자, 고선애, 윤일봉, 최남현, 이룡, 송억, 나소운, 이성일, 김숙일, 신영식, 노강, 박성근, 정성숙, 채훈, 김칠성, 이일선, 조해원, 박성대, 송재관, 김도일, 백송, 김호연
얼마 전 한국영상자료원의 창립 40주년 기념 공연작 < 이국정원 >을 볼 기회가 있었다. 무대에 1958년 한홍합작 영화 <이국정원>의 화면이 보이고 배우들이 이 화면에 맞춰 더빙하는 모습을 재연하는 공연이었다. 재치로 좌중을 쥐락펴락하는 배우들의 목소리 연기와 노래도 탁월했고 연주자들의 유려한 음악도 근사했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현장에서 영화 속 소리들을 만들어내는 폴리디렉터의 활약이었다. 후시녹음이 일반적이던 시기, 성우와 음향효과맨이 스크린을 보며 녹음하던 심야의 녹음실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물론 배우의 입 모양조차 잘 보이지 않는 너덜해진 러시필름도 아니고 밤샘 녹음 중 피워대던 담배로 연기 자욱한 공간은 아니지만, 말로만 듣던 영화의 마지막 공정을 대면하는 일은 근사했다. 심재훈 음향감독의 2009년 구술 내용을 실감할 수 있는 현장이었다. 무대에서 스크린으로, 음향감독의 길로 들어서다 심재훈 선생은 연극으로 시작해 영화, 방송을 넘나들며 활동한 음향감독이다. 1928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고 경성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7년 육촌인 유치진 선생의 다급한 부탁으로 극협의 연극 <자명고>의 음향을 맡으며 그의 음향 인생이 시작되었다. <마의 태자>(유치진), <뇌우>(유치진), <햄릿>(이해랑), <처용의 노래>(유치진) 등에 참여하며 1950년대 후반까지 극협(신협)의 음향감독으로 활동했다. 공연한 작품들, 피난지 대구에서 셰익스피어의 번역극으로 대성공을 거둔 이야기, 동인제로 수입을 배분하던 운영 방식 등 극협(신협)의 역사 또한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영화음향으로 활동의 폭을 넓힌 때는 1950년대 중후반 영화 제작 편수가 늘기 시작할 무렵이다. 영화음향 일 또한 신상옥 감독의 추천과 이강천 감독의 부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첫 영화는 < 격퇴(우리는 이렇게 싸웠다) >(이강천, 1956)로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전투 장면이 많은 작품이었다. 총소리를 종류별로 나눈 뒤 각각의 숫자를 세고 그 숫자만큼의 소리를 녹음하고, 고개 숙이는 군인들 위로 떨어지는 모래 소리까지 세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믹싱 과정에서 모래 소리는 잘려 나갔다. 포탄 때문에 떨어지는 모래를 피하는 군인의 행동이라는 인과관계를 설명해주는 소리였지만 아쉽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때로는 감독의 과욕이 좋지 않은 결과를 낳기도 했다. < 초설 >( 김기영, 1958)에는 불도저가 판자촌을 부수고 사람들이 울부짖는 장면이 있는데, 그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꼼꼼한 성격의 김기영 감독은 화면에 보이는 모든 장면의 소리를 만들어 넣기를 원했다. 결국 여러 소리가 겹쳐져 대사를 알아들을 수 없는 혼란스러운 장면이 만들어지고 말았다. 열악한 환경에서 쌓아올린 열정의 기록 그는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음향은 현실감을 만들어내는 분석적이고 창조적인 작업이라 피력했다. 1950년대 음향 디스크가 없어 연극에 필요한 폭파음을 내기 위해 마그네슘 전선을 이어 터뜨리다 사고를 당하기도 했고, 녹음실에 마이크가 하나밖에 없어 성우와 같은 마이크를 사용해야 했고, 필름 값이 비싸 사운드필름을 반으로 잘라 쓰며 오직 두 번의 녹음 기회밖에 없는 긴장 속에서 일했다. 어려운 조건에서 단련된 음향전문가인 그는 연극과 영화뿐 아니라 방송에도 필요한 전문 인력이 되었다. 1960년대 민간 방송사들이 개국할 때 모두들 그에게 러브콜을 보낸 것이다. 1961년 MBC라디오방송국에 들어갔지만 음향에 대한 방송국 측의 인식 부족으로 퇴사하고 신필름 전속으로 서울과 안양의 녹음실을 오가며 일하다 1963년 개국한 동아방송에 입사해 라디오방송의 음향감독으로 활동한다. 물론 입사 뒤에도 안양, 정릉, 만리동, 청맥 등 영화녹음실을 다니며 영화음향 또한 맡아 했다. 영화 더빙은 낮 시간에 방송국에서 일하는 성우들의 스케줄을 고려해 주로 야간에 이뤄졌기에 가능했다. 그간 쌓아온 실력은 동아방송국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영화는 화면이라는 기준이 있고 특히 합작으로 만들어진 홍콩, 대만 무협활극영화의 음향을 넣을 때는 홍콩이나 대만에서 녹음된 소리를 기준으로 작업해야 했기 때문에 구술자의 분석과 판단이 개입될 여지가 적었다. 그는 무협영화에서 무겁고 둔탁한 칼 소리를 넣은 것을 아직까지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라디오방송은 영상이라는 기준 없이 오로지 소리로만 이미지를 만들어내야 하기에 구술자의 능력이 더 많이 발휘될 수 있었다. 그 결과는 바로 동아방송의 다큐멘터리 드라마 <제2차 세계대전>이다. 이 작품으로 그는 1973년 제1회 대한민국방송상 제작지원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1975년부터 2007년 은퇴하기까지 방송음향에만 전념한다. 그의 구술이 독특한 점은 소리를 설명하다보니 다양한 의성어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성어에는 해당 소리에 대한 그의 평가가 포함되어 있다. 그는 1950년대 한국영화에서 “다그덩” 닫히는 문소리를 좀 더 세련된 “찰카닥” 때로는 “통” 하는 소리로 다양화했다. 할리우드 영화의 “찰카닥” 하는 문소리가 “다그덩” 보다 더 세련됐다는 맥락이 언급되지만 구술자가 내는 소리 자체에 이미 소리에 대한 평가가 들어 있다. 1960,70년대 홍콩 대만 활극영화 속의 “자앙 자앙 장” “타앙 타앙 탕” 하는 칼소리에도 이미 대장간 소리라 질색하는 그의 평가가 담겨 있다. 구술에 대한 연구와 채록이 지속될수록 구술채록문 즉 활자를 중심으로 한 재현과 분석의 한계를 언급하는 주장이 제기되는데 소리가 특히 중요한 그의 구술은 이런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듯하다. 음향을 매개로 연극, 영화, 방송이라는 매체의 역사를 넘나드는 그의 구술은 중요한 사적 자료가 될 뿐 아니라 말과 소리라는 구술의 본질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중요하고 흥미롭다.
1. 시대물에서 괴기물까지 50편 연출 권영순 은 1956년 시대물인 < 옥단춘 >으로 감독 데뷔했다. 그는 1981년 < 사향마곡 >이란 영화까지 25년간 50편을 연출했다. 한국적인 영화제작 상황에서 영화감독이 특정 장르를 고집할 수 없기도 하지만 권영순은 통속시대물로 감독 데뷔해서 코미디물, 액션물, 검객물, 반공물, 문예물, 괴기물, 멜로물 등 다양한 장르를 체험하고 선도했다. 그만큼 그는 영화감독으로서 행동 구역이 넓고 시각이 트였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반대로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그러면 권영순은 왜 시대물로 감독 데뷔를 했는가? 나는 시대상을 통해 그 필연성을 찾을 수 있었다. 1956년은 한국영화사적으로 성장기였다. 1953년 한국전쟁은 휴전으로 포성이 멈췄다. 사회가 안정으로 접어들면서 한국영화도 차츰 제작 열기를 더 해갔고 1954년부터 57년까지를 성장기로 부른다. 이 기간 4년 동안 총 100편의 한국영화가 제작되었는데 1956년에 30편이 개봉되었다. 1956년 개봉된 한국영화 30편 둥 절반이 역사물과 통속시대극이었다. 전창근 의 < 단종애사 >와 < 마의 태자 >, 윤봉춘 이 < 처녀별 >과 < 논개 >, 이규환 의 < 심청전 >, 김소동 의 <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 >, 정창화 의 < 장화홍련전 >, 김기영 의 < 봉선화 >, 안종화 의 < 천추의 한 >과 < 사도세자 >, 이병일 의 < 시집가는 날 >, 홍일명 의 < 벼락감투 >, 신현호 의 < 숙영낭자전 > 등 13편과 권영순 의 데뷔작 < 옥단춘 >을 합쳐 14편에 달했다. 1956년은 정부가 서울로 환도했지만 전흔의 상처는 그대로 남아있어 멜로물과 청춘물이 자리매김하기 전 관객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르로는 역사물과 통속시대물밖에 없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권영순 도 1956년 < 옥단춘 >으로 감독 데뷔한 것은 이런 영화 흥행의 흐름을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 <옥단춘>은 온갖 유혹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의연히 절개를 지킨 평양기생 옥단춘의 생애를 그렸는데 윤인자 가 타이틀 롤을 맡았고 김진규 , 최봉 이 공연했다. 데뷔 이듬해인 1957년 권영순 은 김광주 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멜로물 < 나는 너를 싫어한다 >와 라이트 코미디인 < 오해마세요 > 두 편을 감독했지만 흥행적으로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1958년 연출한 코미디물 < 오부자 >가 흥행에 대성공을 함으로써 일약 유명감독으로 단숨에 가치를 올렸다. 영화 <오부자>는 화목하게 살아가는 오부자(五父子) 가정의 아들 4형제가 합동결혼식을 올리게 된다는 내용의 코미디물로 출연도 이종철 , 김희갑 , 구봉서 , 양훈 등 코미디언들 일색이었다. 이 영화는 1958년 4월 19일 서울 국도극장에서 개봉되어 흥행바람을 일으키더니 그 여세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제작자 권철휘 는 큰 돈을 거머쥐었고 감독 권영순도 스타덤에 올랐다. < 오부자 >를 감독한 1958년부터 1965년까지는 권영순 으로서는 감독 절정기였다. 감독 활동은 1981년까지 했지만 1958년부터 1965년 가지 이 기간 동안 권영순은 < 흙 > < 표류도 > 같은 문예물에 도전했고 대륙활극 < 정복자 >로 흥행의 줏가를 높였으며 역사물 < 진시 황제와 만리장성 > 에서는 당대의 톱스타 김진규 . 김지미 . 김승호 . 박노식 등을 총출연 시켰으며 흥행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간 동안이야 말로 권영순 의 연출 감각은 최고 궝영순은 영출자로서 상승 곡선을 그었으며 다양항 장르를 체험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2, 폭 넓은 연출세계- 다양한 장르 섭렵 권영순 감독은 세 번째 작품 < 오부자 >가 흥행에 성공 했지만 코미디물이란 한 장르에 집작하지 않고 다양한 장르 섭렵에 들어간다. 그 당시 한국영화 게작계 풍토나 감독 자신의 안전 항해를 위하여 계속해서 몇 작품 코미디물을 연출할만한데 권영순은 안주정착하지 않고 재빨리 방향을 바꾼다. 네 번재 작품으로 멜로물 < 한 많은 청춘 >을 감독한다. 이 영화는 소매치기와 그의 도움을 받는 여대생과의 순정 연애를 담았는데 황해. 김미선이 주연했고 안성기 의 아역배우 데뷔작이기도하다. 이때부터 권영순 감독은 거침없는 다양한 장르 섭렵에 돌진한다. 한국영화 감독 중에서 권영순 만큼 여러 장르의 영화를 연출한 감독도 드물다. 통속시대물로 데뷔해서 코미디물, 멜러물, 문예물, 반공물, 앳션물, 검객물, 역사물에서 말년의 괴기물에 이르기까지 권영순 만큼 다양한 영화 쟝르를 소화한 감독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연출시야가 넓고 감각이 빠르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는 작업이다. 그의 연출 작품을 장르별로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 통속시대물 : < 옥단추 >(56) < 옥난 공주와 활빈당 >(60) < 가야금 >(64) * 코미디물 : < 오부자 >(58) < 오해 마세요 >(57) < 8통8반 여반장 >(64) * 멜러물 : < 나는 너를 싫어한다 >(57) < 한 많은 청춘 >(58)< 언제까지나 그대만을 >(59) < 가는 봄 오는 봄 >(59) < 양지를 찾아서 >(59) < 장미의 곡 >(60) < 그리운 얼굴 >(60) < 정과 정 사이에 >(72) < 모정 >(72) <축배> < 산녀 >(73) < 불꺼진 창 >(76) * 역사물 :< 진시 황제와 만리장성 >(62) < 에밀레종 >(68) * 반공물 : < 국회 푸락치 >(74) * 문예물 : < 흙 >(60) < 표류도 >(60) *액션물 : < 목숨을 걸고 >(62) < 남아 일생 >(65) < 무적자 >(66) < 의리에 산다 >(70) < 6인의 난폭자 >(70) * 검객물 : < 비호 >(69) < 쌍용검 >(69) < 무정검 >(69) < 백면검귀 >(69) < 유정검화 >(70) < 복수의 마검 >(70) < 다섯개의 단검 >(71) * 괴기물 : < 대지옥 >(72) < 반수반인 >(75) < 용사왕 >(76) < 사향마곡 >(81) 권영순 이 연출한 50편의 작품을 살펴보면 기본이고, 반공물에, 액션물, 검객물에다 특히 이광수 원작소설 < 흙 >과 박경리 원작소설 < 표류도 > 2편의 문예물이 눈에 띈다. 그리고 권영순 감독은 말련에 괴기물에 심취하여 여기에 매달린 흔적이 역력하다. 그리고 한 때는 다작 감독이기도 했다. 1960년과 1969년에는 한 해에 5편의 영화를 감독하기도 했다 한해에 최고로 10편의 영화를 연출한 한국 감독이 있기도 하지만 한 해에 5편 연출도 대단한 다작으로 봐야 한다. 권영순 감독의 다작과 1970년 전후해서 낮은 제작비의 검객영화를 빠른 기일 내에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빠른 작업 속도가 큰 몫을 했다. 권영순 감독의 현장 작업속도는 영화계에서 최고로 꼽는 기능인이었다. 그가 빨리 작업을 진행한 날은 하루 주야 120커트를 촬영할 정도였다고 그의 조감독들은 증언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3, 현장의 고집 센 기능주의자 권영순 감독은 촬영현장에서 고집 센 독재자였다. 그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작업 진행속도가 빠른 만큼 감각이 눈부실 정도로 빨랐다고 한다. 그만큼 두뇌의 순발력과 회전이 팍팍 돌아가 촬영 현장은 <레디 고> 소리가 거침이 없었다. 그대신 권영순 감독은 촬영현장에서 스탭들의 조언을 철저히 외면하고 배격하는 고집 센 독재자였다고 한다. 그는 조감독이나 촬영기자, 조명 기자의 조언을 일체 듣지 않고 자지 고집대로 밀고 나갔다고 한다. 성격이 과격하고 신경질이 많은 권영순 감독이었지만 신통하리만큼 현장 촬영에는 한 치의 착오도 없었다고 당시의 조감독들은 증언했다. 그이 현장 고집은 유명해서 조감독이 조언하면 ''너가 감독되면 그렇게 하라''고 일축했다. 하기야 이런 고집과 뚝심이 없었으면 어떻게 하루 주야 120커트를 촬영했겠는가? 따라서 제작자들에게 권영순 감독의 인기는 최고였다. 촬영 속도가 빠른 만큼 제작 기간이 단축되고 제작비가 절감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촬영현장에서 진행속도가 빨라도 배우들의 연기지도는 권 감독ㅇ 몸소 시연을 해보일 만큼 적극적인 연출을 했다. 특히 액션물에서 격투 신은 몸을 아끼지 않고 연기지도를 했다고 한다. 이런 현장에서 열정이 촬영이 끝나면 엄습하는 허탈감을 떨치지 못한 탓인지 촬영장 밖에서는 술을 말술로 마셨다고 한다. 촬영장 안에서는 뜨거운 열정의 고집센 독재자였고 일상에서는 술을 사랑해 말술을 사양하지 않은 권영순 감독은 1992년 5월 23일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1923년 출생이니 69세로 일생을 마감했다. 여운이 남은 아쉬운 죽음이었다. 경북 안동 출생으로 본명은 권영계(權寧桂). 일본대학 문학부 졸업. 유족으로는 부인과 스튜디어스 출신 외동딸이 남아 있다. 김화(영화평론가) / 2002년 <프로필> 1923년 3월 9일 경북 안동 출생 1992년 5월 23일 사망 1956년 < 옥단춘 >데뷔 <작품명> 1956 옥단춘 1957 나는 너를 싫어한다 / 오해마세요 1958 오부자 / 한많은 청춘 1959 언제까지나 그대만을 / 가는 봄 오는 봄 / 양지를 찾아서 1960 흙 / 표류도 1962 진시황제와 만리장성 1965 모녀봉 1966 무적자 1968 풍운의 임난야화 1969 무정검 / 백면검귀 1970 유정검화 / 의리에 산다 / 복수마검 / 육인의 난폭자 1971 다섯개의 단검 1972 정과 정 사이에 / 모정 / 대지옥 1973 산녀 /축배 1974 국회프락치 1975 인사여무 / 태백산맥 1976 불꺼진 창 1988 칠삭동이의 설중매 등 50여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