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블릭 에너미
- 감독
- 마이클 만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조니 뎁, 크리스찬 베일
당신이 먹은 것이 무엇인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라고 18세기 프랑스의 법관이자 미식가였던 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은 말했다. 그러나 금정연은 SNS에 음식 사진을 올리지 않는 사람이다. 셀카도 안 올리고 남이 찍어준 자기 사진도 안 올린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는데 관심이 없는 걸까. 금정연이 요즘 업데이트하는 건 자기 블로그 캡쳐 사진인데, 이것도 자기 어필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지속적이거나 유의미한 방식은 아니다(참고로 그는 오디오 전문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다가 석달 만에 그만뒀다. 구독자는 2022년 7월 기준 40명. 가장 최근 올린 영상은 6개월 전의 것으로 GENE의 <I Say A Little Prayer>을 바이닐 판으로 재생한다. 조회수는 96. 댓글은 2개. 댓글 내용은 직접 확인하기 바란다. 참고로 한 사람이 두개의 댓글을 달았는데…) 솔직히 말하면 그의 SNS는 중구난방이다. 트위터에선 트위터의 법을 따르고 인스타그램에선 인스타그램의 법을 조금 따르긴 하지만, (육아 때문인지 마감 때문인지) 대체로 정신이 나가있다고 할 수 있다. 그와 개인적으로 아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의 SNS 자아는 실제와 거의 같다. 샤토브리앙은 이렇게 썼다.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프랑스 작가 중에서 자신의 작품과 비슷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 바꿔 쓰면,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작가 중에서 자신의 SNS와 비슷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금정연이 유일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그가 3년 만에 극장에 가서 < 탑건: 매버릭 >을 보고 < 헤어질 결심 >도 보고 트위터에 소감도 남겼다. 심지어 한영한사 지난 연재에는 탑건에 대한 글도 남겼다. 나는 21세기 한국 영화에 대한 연재에 왠 탑건이냐고 했지만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 R2B >가 있잖아요, <창공>도 있고, 라고 했던가. <창공>이 뭐예요? 내가 묻자 정연씨는 말이 안 통한다는 듯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지돈씨. 왜 저랑 다른 세대인 척 해요? 네? 류시원이랑 김원준 나온 드라마 있잖아요. 류시원이요? 지돈씨도 알죠? 김원준이 류시원 데뷔시켜준 거?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정연씨가 왜 탑건에 대해 썼을까. 비천한 영화에 대한 논의를 지속하기 위해서? 아니면 어쩌다 극장에서 <탑건: 매버릭>을 봤고 마감은 다가왔고 억지로 논리를 맞춰야 해서? 모든 연재가 그런 식 아닌가? 그러나 어디서도 말한 적 없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는 톰 크루즈고 정연씨는 물론 그 사실을 안다. 지친 아저씨 류의 배우를 좋아하는 정연씨는 예순이 되어도 지칠 기색이 없는 톰 크루즈가 이해되지 않는지 내게 종종 묻기도 했다. 지돈씨, 지돈씨는 톰 크루즈가 왜 좋아요? 글쎄, 왜일까. 사실 이번 글에서 이렇게 답할 생각이었다. 톰 크루즈야말로 자본주의적 추상의 현현이라고,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히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죠. 마크 피셔는 말합니다.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한 닐 매콜리야말로 포스트 포드주의의 화신이라고. 닐 매콜리는 “익명의 이름, 가짜 여권의 이름, 역사가 없는 이름이다. … 하나의 스크린, 암호, 깊이를 알 수 없는, 냉정하고 전문가적인, 완벽한 준비.” 닐 매콜리에게 도덕이나 윤리, 역사는 무의미하거나 나중 문제다. 그는 단지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을 한다.” 그러니까 마이클 만이 21세기 초에 찍은 영화가 뭡니까. 바로 < 콜래트럴 >이죠. 포스트포드주의적 가치관으로 무장한 탈역사적 회색 킬러와 낭만주의적이고 포드주의적이며 아메리칸 드림의 신봉자인 택시기사의 대결. 그 킬러가 바로 톰 크루즈죠. 떠올려보세요, <탑건: 매버릭>에서 적의 존재를. 헐리웃 영화 역사상 가장 추상적인 적군이 나오는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이 애국주의적 영화는 그러나 생각해보면 대체 어느 나라에 충성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데(나라가 있다면 그건 톰 크루국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건 톰 크루즈와 <탑건: 매버릭>의 감독인 조셉 코진스키가 함께 했던 2013년작 < 오블리비언 >에서 예고된 거나 다름없습니다. <오블리비언>의 외계인은 외계+인도 아니고 사실상 유기체인지도 알 수 없는 존재로, 표면적으로는 인간을 복제해서 내세우는 추상적 도형(원, 세모, 네모)의 형상을 한 추상 그 자체인데 이 추상적 존재에 의해 끝없이 복제되는 톰 크루즈의 적은 다름 아닌 톰 크루즈입니다. 영화를 보면 어떤 내용인지 아시겠지만 물론 정연씨가 이 영화를 볼 리는 없겠죠. 하지만 < 엣지 오브 투모로우 >를 떠올려보세요. 여기서 톰 크루즈는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는, 불사의 리셋-존재로 현현합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걸까요? 영화니까 그런 거라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정말 단지 그 이유일까요. 제 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아는 탑 배우 중에 내면이 없는 사람은 톰 크루즈 하나라고요. 그러므로 “하나의 스크린, 깊이를 알 수 없는”은 비유가 아니라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톰 크루즈가 복제 가능하고 복제될수록 (존 말코비치처럼) 거북해지는 게 아니라 매력이 더하는 이유는 그에게 내면이나 깊이, 모순 따위가 없기 때문이죠. 그는 사실상 아무것에도 충성하지 않고(이단 헌트는 가족도 없고, 직책도 없고 상급자도, 국가도 안중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충성하고 적과의 싸움만 반복하는데, 그것은 그가 표면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추상성을 재현하는 일은 디지털 이미지도 포스트 시네마틱한 확장 영화도 아닌 복제 톰 크루즈가 하고 있다고, 마블 영화가 자본주의의 변명으로서 자본주의를 지속시킨다면 톰 크루즈의 영화는(사실상 지금의 헐리웃 영화는 이 둘로 나뉩니다) “서사를 포기한 채 충격과 스릴, 흥분이라는 감각적 경험에 모든 것을 내거는 것처럼 보인다” 1) 고 나는 정연씨에게 답하려고 했지만 우선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것보다는 엔데믹 이후 다시 원래의 자리를 복귀한 것처럼 보이는 영화에 대해서, SNS에 줄을 잇고 있는 영화 인증에 대해서 묻기로 했다. 그러니까 왜 내 주변에는 < 헤어질 결심 >과 < 애프터 양 >과 하마구치 류스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것인지, 이렇게 난리가 났는데도 왜 “헤결”은 손익분기점을 겨우 넘은 건지(한 신문 기사에 의하면 “헤결” 각본집은 7월 18일 예약 판매 시작후 하루만에 6,000만부 이상이 팔렸다고 한다 2) …), 왜 어떤 사람들은 <탑건: 매버릭>은 보고 “헤결"은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지, 왜 < 토르: 러브앤썬더 >를 본 사람은 한명도 없는지에 대해 묻기로 했다. 선호하는 작품이 다르고 같은 작품에 대해서도 평가가 다른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정연씨는 지금도 그러한 사실에 깜짝 깜짝 놀란다고 말했다. 역사의 불의를 처음 마주한 마르크스처럼 말이다. 똑같이 훌륭한 시민인데 어떻게 같은 영화에 대해서 이렇게 정반대의 말을 할 수 있는가. 문학에선 그런 일이 흔치 않다. 기본적으로 같은 문학 작품을 읽은 경우가 드물고 읽었다면 이미 그들은 합의의 공동체 또는 장에 속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문학은 끝났고 영화는 아직 가능성이 있다고 임재철 평론가가 말했던 것 같다고 정연씨는 말했다. 정확히는 맨날 보는 애들만 보면 뭐하냐, 안 볼 사람도 봐야 진짜 예술이지, 라는 식이었던 것이다. 안 볼 사람이 본다는 건 무슨 뜻일까. 그리고 그것들의 인증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영화를 무엇으로 변형시키는 것일까. 영화는 사바랭의 음식이 된 걸까. 며칠 전에 미팅을 진행한 어느 출판사는 사내 행사로 직원들이 다 같이 <헤어질 결심>을 봤다고 했다. 다른 업종의 회사도 “헤결”을 볼까? 아니면 < 범죄도시2 >? 노동자들이 함께 보는 영화는 어떤 의미일까? 케빈 켈리는 <통제 불능>에서 생명과 유사한 특성을 갖는 복잡적응계를 비비시스템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벌이나 개미처럼 개별적으로는 연약하지만 군집이 되면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들이 그 예다. 개별적일 때는 존재하지 않는 특성이 창발하는 것이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픽사의 공동 창업자인 로렌 카펜터는 라스베이거스의 회의장에서 5000명의 군중들과 실험을 했다. 사전 준비 없이 비디오 스크린 화면을 보며 다 같이 하나가 되어 비디오 게임 <퐁>을 하거나 카드섹션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실험의 절정은 비행기 조종 시뮬레이션이었다. 왼쪽에 앉은 사람들은 비행기의 좌우기울기roll을 조종하고 오른쪽 사람들은 상하요동pitch를 조종했다. 대형 스크린 위에 비행기는 떠 있고 조종사는 경험이 전무한 5,000명의 사람이다. 비행기는 분홍 산들 사이의 분홍 계곡에 있는 활주로를 향하고 있었다. 상황은 곧 급박해졌다. 회의장은 고함소리와 비명소리로 가득찼다. 왼쪽! 왼쪽!! 오른쪽~~!!! 오!른!쪽! 군집은 혼란을 일으켰고 비행기는 갈지자를 그리며 추락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어느 순간 5,000명의 조종사는 착륙 시도를 중단하고 고도를 높이고 기수를 돌렸다. 그들이 갑자기 어떻게 합의한 것일까? 지휘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비행기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크게 선회했다. 그러더니 아무런 논의 없이 함께 날개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지평선이 어지럽게 돌아가면서, 비행기는 크고 아름답게 360도 회전을 하며 하늘을 가로질렀다. 케빈 켈리는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철새떼들이 하는 행동, ‘무리지어 날기’를 했다고 썼다. 새들은 그들이 어떤 모양을 만드는지, 규모나 배열, 형태 등에 대한 개념이 없다. 그들은 단지 군집에 감응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패턴을 만들어내고 개별일 때보다 더 놀라운 반응과 움직임을 선보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개별 영화가 새라면, 시네마는 철새떼, 개별 영화가 벌이라면, 시네마는 벌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한편의 영화를 보고 거기에 대해 말하고 반응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영화가 지금과 같이 존재하는 것은 영화가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영화에 대한 사유는 걸작이나 비천한 영화 개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뛰어난 작가-감독이나 명배우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숫자와 그것들의 연결에서 온다. 루이스 부뉴엘은 “노동자들을 좋아하고 존경하며 이들의 노하우가 부럽다”고 말하며, 안제이 바이다의 영화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한 편의 영화에서 다른 영화로,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흘러가는 비밀스러운 연속성 속 무언가가 내게 감동을 준다.” 3) *** 1) 서동진, "시네마 이후의 이미지 : 자본주의적 추상은 재현 가능한가"(2021) 2) 이투데이, "N차 관람→'왜놈 칠 결심' 밈까지...'헤어질 결심'의 조용한 신드롬" 3) 루이스 부뉴엘, 이윤영 옮김 <루이스 부뉴엘>(을유문화사, 2021)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최근 선댄스영화제가 발굴한 재주꾼 중 한 명은 알폰소 고메즈-레존이다. 두 번째 장편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로 2015년 선댄스 드라마 부문의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을 수상했던 그는 NYU(뉴욕대)와 AFI(미국영화협회)에서 영화를 공부했고 1990년대 초부터 영화 현장에 뛰어들었다. 세컨드 유니트 디렉터로, 혹은 프로덕션 어시스턴트로, 아니면 연출부의 일원으로 그가 ‘모셨던’ 감독들의 명단은, 혹시 이 사람에게 수집벽이 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히 쟁쟁하다. 마틴 스코시즈,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노라 에프런, 시드니 루멧, 마이클 만…. 최근엔 벤 애플렉 감독의 < 아르고 >(2012) 세컨드 유닛을 이끌기도 했다. 그가 자신의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건 2010년부터였다, 시작은 TV 시리즈였고 < 글리 >(2009~15)나 <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2011~ ) 등에 참여했다. 2014년엔 드디어 첫 장편영화 <일몰이 두려운 마을 The Town That Dreaded Sundown>을 내놓는다. 전형적인 슬래셔 호러 장르에 나름의 스타일과 플롯 비틀기를 가미했지만 큰 주목을 받진 못했다. 하지만 두 번째 작품인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에서 그는 환골탈태한다. 제시 앤드류스의 첫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장르적 전형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스토리텔링 방식과 비주얼을 결합한다는 점에서 <일몰이 두려운 마을>과 유사한 방식의 시도였다. 하지만 드라마의 깊이와 캐릭터의 매력은 전작과 비교할 수 없이 발전했다. 틴에이저 장르 안에서 이토록 유쾌하고 엉뚱하면서도 진지하게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건 작은 기적이다. 제목이 말하듯 이 영화는 ‘나’인 그렉(토머스 만)의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하이스쿨 졸업반이 된 그렉. 그는 8년째 투명인간처럼 학교 생활을 해온, 거의 모든 성향의 집단들과 어울릴 수 있는, 좋게 말하면 친화력 좋고 나쁘게 말하면 아무 색깔 없는 ‘왕따’나 마찬가지인 십대다. 유일한 친구는 얼(알제이 사일러)이다. 유치원 때부터 함께 어울린 둘의 공통점은 고전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 그들은 단순한 마니아를 넘어, 영화사를 아로새긴 걸작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리메이크(라기보다는 패러디)한다. 역사 교사 매커시(존 번탈)의 방에서 빈둥대거나 영화 찍는 것 말곤 특별할 것 없는 일상. 하지만 ‘죽어가는 소녀’ 레이첼(올리비아 쿡)과 만나면서 그들의 인생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할리우드 틴에이저 무비는 겉으로는 얄팍해 보이지만 의외로 성찰적인 장르다. 십 대들의 불안한 삶은 지향점을 알 수 없는 저항으로 치닫고, 헤어나올 수 없는 우울에 빠지고, 세상의 폭력에 그대로 노출되고, 때론 힘겨운 운명의 짐을 지기도 한다. 학교와 가정이라는 한정된 공간과 친구, 연인, 교사, 부모 등의 한정된 캐릭터로 이뤄지지만, 이 제약적인 토대 위에서도 틴에이저 무비는 매우 풍성한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도 마찬가지다. 전반부가 제법 발랄한 톤의 루저 코미디를 통해 십 대들의 냉소적 불안감을 담아낸다면, 후반부로 가면서 영화는 어른스럽고 심각한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한다. 그리고 클라이맥스와 엔딩에 가면, ‘쿨’하게 시작해 점점 온도를 올렸던 영화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로 관객을 빨아들인다. 이런 드라마의 힘은 ‘죽어가는 소녀’ 레이첼과 ‘나’ 그렉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하이스쿨 시절을 마감하고 대학으로 가는 관문인 졸업반 시기. 레이첼은 백혈병에 걸려 항암 치료를 받아야 하고, 그렉은 그 어떤 꿈도 없다. 같은 학교에 다니긴 했지만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두 사람의 ‘불운한 우정’이 시작된 계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레이첼의 백혈병이다. 그렉은 “가서 친구가 되어 주라”는 엄마(코니 브리튼)의 말에 못 이겨 레이첼의 집에 갔고, 어색하게 시작된 그들의 관계는 어느덧 졸업반 내내 이어진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라면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렉은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 모르고, 레이첼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더욱 절박한 상황에 처한 레이첼이 그렉의 삶을 채찍질하고 이끈다는 점이다. 레이첼은 그렉 대신 대학 입학처에 편지를 보내고 그를 격려한다. 하지만 그렉은 오히려 레이첼의 호의와 헌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런 아이러니 속에서 그렉은 조금씩 껍질을 깨나가며 삶의 이치를 깨닫는다. 이러한 성장 영화의 측면이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의 진지한 얼굴이라면, ‘나’ 그렉과 ‘친구’ 얼이 만들어낸 수많은 영화들의 목록은 시네필들이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다. 이 영화엔 수많은 영화들이 언급된다. 그렉과 얼은 역사 선생 방에서 컴퓨터로 베르너 헤어조크의 < 피츠카랄도 >(1982)에 대한 메이킹 다큐멘터리인 < 버든 오브 드림스 >(1982)를 본다. 그렉의 아버지(닉 오퍼맨)도 헤어조크의 팬으로 < 아귀레 신의 분노 >(1982)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렉의 방엔 프랑소와 트뤼포의 < 400번의 구타 >(1959) 포스터가 붙어 있으며, 그는 실의에 빠졌을 때 이 영화를 보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렉이 얼과 함께 만드는 영화들의 제목들 역시 가관이다. 잉마르 베리만의 < 제7의 봉인 The Seventh Seal >(1957)에서 모티브를 얻은 <일곱 마리 물개 The Seven Seals>에선 기사와 죽음의 사자가 황당한 체스를 둔다(‘seal’엔 봉인과 물개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마이클 파웰의 ‘엿보기’에 대한 범죄 영화 < 저주의 카메라 Peeping Tom >(1960)는 <똥싸는 톰 Pooping Tom>으로 바뀌었는데, 주인공은 뚫어뻥의 공격을 받는다. 이외에도 스탠리 큐브릭의 < 시계태엽 오렌지 A Clockwork Orange >(1971)가 <양말장치 오렌지 A Sockwork Orange>가 되고, 데이비드 린치의 < 블루 벨벳 Blue Velvet >(1986)이 <원숭이 맥주 Brew Vervet>가 되고, 루키노 비스콘티의 < 베니스에서의 죽음 Death in Venice >(1971)이 <테니스장에서의 죽음 Death in Tennis>이 된다. 과거 8mm 시대 영화광을 연상시키는 그렉과 얼의 이러한 ‘영화 장난’들은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에 독특한 결을 부여한다. 전작인 <일몰이 두려운 마을>에서도 ‘영화 속 영화’의 컨셉트로 연쇄살인극을 구성했던 고메즈-레존 감독은 두 번째 영화에선 아예 노골적으로 자신의 영화 유희적 본성을 드러내며, 그 기발함과 유머는 자칫하면 느슨해질 수 있는 루저 스타일 틴에이저 무비를 활기 찬 소동극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들의 ‘영화 만들기’라는 행위는 결코 영화의 양념이 아니라, 가장 결정적 순간을 위한 토대가 된다. 그렉과 얼은 태어나 처음으로, 기존에 있는 영화를 비트는 것이 아닌 순수한 창작품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바로 레이첼을 위한 영화다. 그러나 ‘진짜 영화’를 만들겠다는 그들의 야심은 곧 난항을 겪고, 결국 얼이 그만 둔 상태에서 그렉 혼자 영화를 완성한다. 병원에 있는 레이첼과 그렉이 그 영화를 함께 보는 장면은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이루는데… 여기서 말을 아껴야 할 것 같지만, 아무튼 이 장면이 환기시키는 감정의 진폭은 상상 이상이다.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는 현재 할리우드 틴에이저 장르가 다다를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이며 자유로운 작품이다. 관객과 대화하듯 진행되는 내레이션, 별나면서도 진정성 있는 캐릭터, 묵직한 드라마와 코미디를 자연스레 결합하는 솜씨 등 이 영화는 많은 영화적 미덕을 지녔다. 그러면서 영화는 어느새 ‘삶과 죽음’에 대해, 아니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묻는다. 피상적으로 “우리에겐 꿈과 희망이 있잖아?”라며 대충 얼버무리며 끝나는 청춘 영화와 비교하면 이 영화의 메시지는 훨씬 더 현실적으로 와 닿는다. 사족 하나. 이 영화의 위트 넘치는 카메라 워크가 궁금해 크레디트를 유심히 살펴봤다면, 우린 의외의 이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Cinematography by Chung-hoon Chung’. 맞다. 이 영화의 촬영감독은 바로 한국의 정정훈이다. 박찬욱 감독과 < 올드보이 >(2003)부터 호흡을 맞추었고, < 스토커 >(2013)로 함께 할리우드에 진출한 정정훈 촬영감독은 미국에서 솜씨를 인정받았고, 로빈 윌리엄스의 유작인 < 블러바드 >(2014)에서 우울하고 정적인 촬영을 선보이더니 세 번째 할리우드 영화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에선 마치 날개를 단 듯 역동적이며 재미있는 화면을 만들어낸다. 그가 만들어낸 비주얼들 역시, 이 영화를 꼭 ‘봐야’하는 이유 중 하나다.
* 이 글에는 < 나이트 크롤러 >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나이트 크롤러 >의 후반부에는 상황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장면이 한군데 있다. 심야의 격렬한 추격전 끝에 경찰들의 차가 전복되고 살인자의 차도 부서져 도로에 나뒹군다. 밤새 일어나는 말초적인 사건사고 현장을 촬영하여 방송국에 넘기고 돈을 버는 주인공 루(제이크 질렌할)와 그의 조수가 살인자의 자동차 곁으로 재빠르게 다가간다. 루가 먼저 다가가지만 그는 이내 몇 발짝 거리를 두고 멀어지면서 조수를 향해 어서 빨리 저 사람을 가까이에서 찍으라고 재촉한다. 하지만 조수가 다가가자마자 살인자는 총으로 그를 쏘아 살해하고는 차에서 내린다. 몇 발자국 앞에는 루가 카메라를 들고 그를 찍고 있다. 이때 그 납득되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 살인자는 몇 초간 루를 잠시 노려볼 뿐 발포하지 않고 뒤돌아선다. 그리고는 잠시 후 뒤 따라 오는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사망한다. 왜 그런 것일까.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어느 관계도 없다. 주인공의 목숨이 부지되는 그 흔한 장면에서처럼 상대방의 총알이 떨어졌기 때문도 아니다. 살인자가 곧 이어질 경찰들과의 총격전을 위해 총알을 아껴야 한다고 찰나에 판단한 것이리라 추정하는 건 그의 냉철함을 너무 높게 평가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는 눈앞에 있는 루의 조수를 당장에 쏘아 죽인 사람이 아닌가. 그는 냉철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그는 왜 자신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는 루를 쏘지 않고 얌전히 뒤돌아섰는가. 이 장면의 의문스러운 불투명이 이 영화의 흥미로움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 나이트 크롤러 >는 루에 관한 영화다. 그는 심야의 유혈 낭자한 사건 사고들을 하이에나처럼 쫓아다니며 찍어서 방송국의 아침 뉴스 프로그램에 넘기고 돈을 챙긴다. 장물이나 훔쳐 팔던 중이었는데 우연히 사고 장면 촬영분이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이다. 그걸 두고 루는 사업을 시작했다고 꽤 근사하고 자부심 넘치게 표현한다. 우린 그의 과거를 전혀 모르거니와 그가 혼자 사는 반미치광이라는 사실 외에는 현재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거의 없다. 미치광이 루 역할을 맡아 열연한 배우 제이크 질렌할의 연기를 칭송하는 평가들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섬세한 연기를 선보였고 독창적인 캐릭터를 창조해 냈다. 다만 < 나이트 크롤러 >가 배우의 열연과 캐릭터의 완성 측면으로만 접근될 영화는 아닌 것 같다. 예컨대 <나이트 크롤러>는 같은 L.A.의 밤을 배경으로 했던 한 편의 액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마이클 만의 < 콜래트럴 >이다. 의외로 <콜래트럴>의 빈센트(톰 크루즈)와 <나이트 크롤러>의 루는 여러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다. 물론 빈센트가 L.A.라는 거대 도시에 무지한 이방인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두 인물이 이 도시의 밤을 밤새 헤매고 다닌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들의 활동 시간은 전적으로 밤의 시간이다. L.A.의 밤이라는 배경을 <콜래트럴> 이후에 이렇게 실제적으로 차갑고 적막하며 정신질환적인 정서로 그려낸 영화는 흔치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콜래트럴>의 빈센트, <나이트 크롤러>의 루 두 인물 사이의 더 흥미로운 유사성은 이들이 완벽하게 흥정의 달인이며 요설가라는 점이고 그것이 종종 그들의 내재된 광기를 번뜩이게 한다는 점이다. 흥정은 대개 자부심으로 가득한 요설에 의해 그들 쪽으로 유리하게 성사된다. 빈센트가 흑인 재즈 뮤지션을 살해할 때 그가 펼치는 내기의 흥정(빈센트는 자신이 내는 재즈에 관한 문제를 맞히면 살려주겠다고 흑인 뮤지션을 꼬드긴다)은 루가 사람들을 상대할 때마다 발휘하는 그 비열한 사업수완으로서의 흥정과 요설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상 루는 조수가 총에 맞아 죽도록 고의적으로 일을 꾸민 것인데, 그 이유가 바로 ‘자신이 가르쳐 준 흥정의 기술로 도리어 자신에게 (급료를 올려 달라는) 흥정을 걸어 왔다’는 점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둘 다 각자의 사업 때문에 밤을 헤매고 있는 것이지만 그 사업의 형태가 사실은 둘 다 청부업이라는 점이다. 빈센트는 살인 청부업을 하고 루는 촬영 청부업을 한다. 다르게 표현할 때 둘의 사업의 연관성은 더 확실해진다. 둘의 사업은 어원적으로는 같은 일이다. 빈센트는 밤새 사람들을 쏘고(shoot) 다니고 루는 밤새 사람들을 찍고(shoot) 다닌다(그리고 이 어원의 동일성은 우리가 제기한 후반부의 그 의문스러운 장면에서 정확히 어떤 효과를 발휘하고 만다). 빈센트가 지나간 자리에는 루가 오게 되어 있다. 이들이 바로 잔인한 도시의 밤을 완성하는 부패한 가상의 짝패일 것이다. 그런데 결정적인 차이가 한 가지 있다. 결국 빈센트는 L.A.의 지하철 안에서 쓸쓸하게 싸늘한 시체로 죽어 갔고 그는 밝고 따뜻한 햇볕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반면에 루는 수사관의 엄포에도 끄떡하지 않았고 이야기를 거짓으로 꿰맞췄으며 밝은 대낮에 제 발로 경찰서를 나와 사업을 번창시킨다. 하지만 이 차이는 귀결의 차이에 해당할 뿐이다. 두 인물의 다른 귀결은 왜 일어나게 된 것인가 재차 물을 때 다음과 같은 점이 핵심이 될 것이다. 자신의 세계와 대상에 대한 지배력 혹은 통제력을 지닌 것인가 그렇지 못한 것인가. 빈센트는 상실했으나 루는 성취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빈센트의 사업은 맥스라는 운전기사를 지배하고 통제하지 못하는 순간부터 균열을 맞는다. 루는 완전히 반대된다. 조수가 반기를 일으키자 그 즉시 살인을 꾸민다. 루는 처음에 어떠한 지배력도 통제력도 지닌 바 없었지만 그것을 무섭게 성취해간다. 그런데 어떻게 성취해갔느냐가 정작 중요하다. 그가 다루는 세계와 대상 즉 사건사고의 현장에 대한 연출력을 총동원하면서다. 의외로 < 나이트 크롤러 >의 서사적 핵심은 루는 얼마나 본질적으로 사악하고 끔찍한 괴물인가 하는 것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루는 어떻게 현장에서의 조작적인 연출력을 증대해 가는가에 있다. 그 연출력 증대의 궤적을 따라 그의 악함은 저절로 강조되는 것이다. 이 연출력에의 강조야말로 이 영화의 흥미로운 지점이다. 루가 사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 그가 발휘할 수 있는 최선의 연출력이란 기껏해야 사소한 거짓말에 불과하다. 현장의 경찰들이 윽박지를 때 그는 자신의 촬영이 허가받은 것이라고 거짓말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화의 초반부에 루가 젊은 부부의 집에 잠입해 들어갔을 때를 보자. 그는 벌써 대담해진다. 부부가 경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루는 냉장고의 외관에 붙어 있는 사진들의 배열을, 시청자가 상상적 서사를 알아서 일으키도록, 보기 좋게 조작한다. 현장의 사물을 연출하는 것이다. 동시에 집 마당에 서 있는 부부를 적절한 극적 앵글로 포착하기도 한다. 이어지는 다음 사건에서는 차량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남자의 시체를 차 쪽으로 일부러 끌어와 더 참혹한 이미지 구도를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이제 그의 연출의 영역은 단지 소도구의 배치가 아니라 효과적인 프레이밍으로 확장된다. 이즈음 루는 방송국 뉴스 담당자에게 자신이 “프레이밍에 신경을 쓰고 있다”며 그로써 오히려 안팎의 경계를 허물고 시청자들의 시선을 화면에 더 오래 잡아끌 수 있을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루의 연출력은 끔찍할 정도로 과감해진다. 가령 도시 외곽 부유층 백인 저택에서의 일가족 살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루는 인명을 구하려 들기는커녕 현장성 포착이라는 미명하에 죽어 가는 사람들을 방치하고 카메라를 돌린다. 일종의 사건의 방치라는 간접적이지만 치명적인 연출법을 행하기 시작한다. 도주하는 범인들을 일부러 신고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이어서는 더 과감한 연출법이 가해진다. 살인범들이 있는 곳을 경찰에 알려 총격전을 유도하고 미리 기다리다 그것을 찍는 것이다. 간접적인 방치가 아니라 직접적인 유도의 기술이 유용되는 셈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질문했던 장면이야말로 루의 연출력이 최고조에 달한 장면이다. 왜인가. 이 장면은 사건 이후의 순간도 아니고, 사건에의 방치도 아니며, 유도도 아니다. 루, 자신이 몸소 나서서 살인하는 장면을 적극적으로 연출하고 포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의 이 악랄한 연출력을 가장 반기는 것은 역시 루와 거래하는 텔레비전 뉴스 책임자 니나(르네 루소)다. 자신들이 일을 더 잘할 수 있도록 루가 영감을 주는 것 같다며 니나는 결국 감동하여 말한다. 그때 자신들의 일이란 더 자극적이고 더 참혹한 이미지로 가득한 방송, 그녀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목이 잘린 여인이 소리치며 달리는 것”과 같은 이미지의 완성이다. 따라서 우리가 질문했던 장면에 이르러 우린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왜 상대는 그때 루에게 총을 쏘지 않은 것인가. 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쏘지 못하는 것이다. 루의 카메라가 상대방의 총보다 더 과격하고 힘이 세며 상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상황을 만들어 낸 루의 연출력이 상대의 살의보다 더 강력하고 악랄하기 때문이다. 더 센 짐승 앞에서 물러나는 약한 짐승처럼 상대는 돌아선다. 루가 카메라를 든 자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마치 총을 들고 겨누고 있는 것처럼 상대에게 맞서고 있다. 따라서 물러서지도 않고 도망갈 기색도 없다. 마치 그의 손에 들린 카메라로 상대방을 제압하거나 죽일 수도 있으리라는 당당한 표정을 지으면서. 물론 카메라가 당장에 눈앞의 상대를 쓰러뜨리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루의 카메라가 상대방의 총보다 훨씬 더 센 것이다. 총이 카메라를 물리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카메라를 든 자가 총을 든 자를 존재론적으로 제압하고 있는 상황. 이것이 두 악한이 마주하여 일으키는 이 장면의 흥미로움이다. 우리는 총을 쏘는 것과 카메라로 찍는 것이 하나의 단어(shoot)로 계열화될 수 있음을 미리 지적했다. 사람을 쏘고 다니는 남자와 사람을 찍고 다니는 남자가 이 순간 격돌하였을 때, 이 영화에서라면 가치의 면모에 있어서 동일하게 악한 두 인물이 격돌하였을 때, 쏘는 자는 찍는 자에게 결코 대항하지 못한다. 루의 찍는 행위가 연출이라는 전체에 직접적으로 해당한다면 상대의 쏘는 행위란 루의 그 연출 계획안에 들어 있는 일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순간 카메라와 총 사이에 놓인 악의 완력 관계는, 이 영화에서 루가 행하는 카메라의 악이 얼마나 만연해 있는 잔혹함인지 역설하고 있다. 어느 날 아무런 정보도 예고도 없이 그저 좀 대강 보아도 되는 스릴러이겠거니 하고 보게 된 < 나이트 크롤러 >에서 문득 내가 접한 매혹의 지점들이 바로 이상의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