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취
- 감독
- 김석영
- 제작년도
- 2011
- 출연
- 백성주, 박명신, 박세진, 임형국, 조윤미, 방혜영, 임형국, 진달래, 김영섭, 조경현, 형영섭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나는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영화 감상을 즐기기 시작했으며, 2010년대 후반 즈음해서 비평에 보다 진지하게 몰두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비평을 쓰는 일이 내 정체성의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2010년대까지는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비평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이란 내 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가장 주요한 요소의 하나였다. 그리고 정확히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시점에서 반추해보건대, 내가 20대를 통과하며 겪어온 삶의 주요한 분기점들이 내가 영화와 비평을 대하는 관점, 그리고 그 관점의 변화와 불가분한 방식으로 얽혀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고 느낀다. 나뿐만 아니라 다수에게도 그렇겠지만, 내게 있어 비평이란 언제나 삶을 바라보는 시각과 밀접한 활동이었다. 많은 비평가들은 본인의 작업과 글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는 걸 민망해하기에 이런 말을 하는 걸 꺼리곤 하지만, 나는 내가 과거에 썼던 글들을 다시 읽어보는 걸 즐기곤 한다. 글의 문체와 내용, 그리고 그것들이 문자로 새겨졌던 순간의 어룽거리던 공기를 떠올리며, 나는 글을 썼을 당시의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누구와 만나거나 멀어져 가며 걸어왔는지 하나 둘 반추해보곤 했다. 때때로 흔적으로나마 내 안에 남아 희미하게 가물거리고 있거나, 아니면 사라져버려 다시 돌아올 수 없다고 느끼는 시절의 잔재를 감촉하며, 그 시절의 감각이 어떤 식으로든 내가 써온 글 안에 박물학적으로 새겨져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자각하면서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나의 글뿐만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하는 말, 그가 써온 글에 투영된 시대의 감각에 관해 생각해보곤 했다. 한국영화 몇 편에 대한 생각과 함께, 국내 비평계에 대한 소견을 밝혀야 하는 이 지면에서 이런 이야기로 말을 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코로나 뉴노멀을 기점으로 영화 이후의 미디어가 급격하게 확산해가는 국면에 서 있는 지금의 영화계와 비평계를 떠올려볼 때, 그 공동체가 맞이한 급격한 변화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 중 하나가, 나와 주변의 사람들이 말하거나 쓰는 방식의 변화를 통해 은밀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때때로 우리 시대의 영화 속 대화가 변화하는 양상과도 상통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글에 대한 청탁을 받은 직후, 나는 즉각적으로 내가 몇 년 전 경험했던 그러한 대화의 유형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내가 최근의 비평계는 물론 일부 문화예술계가 처한 상황을 직간접적으로 반영하는 에피소드일지 모른다고 느끼며 곱씹었던 그 대화는 몇 년 전, 내가 한 영화제에서 짧게 일했을 당시에 발생했다. 영화제가 진행되던 어느 날, 스태프 한 분이 갑자기 불미스러운 상황이 생겨 긴급한 공지를 하겠다고 말씀하시며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기이한 점은 그분이 사람을 불러 모아놓고도 자꾸 미적거리며 본론으로 단도직입하지를 않는다는 점이었다. 잠시 “음… 어…” 와 같은 말이10초간 이어진 이후에 결과적으로 내가 들은 말은 이랬다. “아, 그…… 여러분 이게 제가 직접 말씀을 드리기는 좀 뭐한데…… 혹시 얼마 전에 약간 논란이 된 적 있는 그거 아시죠?” ……? 나는 이게 당최 무슨 모호하기 그지없는 말인가 싶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더 놀라웠던 것은 이 말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3분의 1 정도가 맥락을 전부 다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아, 네네~! 그럼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자리를 떠나갔다는 것이다. 그러자 스태프분은 이렇게 말을 이으셨다. “아아… 아시는 분들도 있으시구나! 그럼… 최근에 어떤 분이 그 일이랑 관련해서 약간 문제제기를 하셨었는데 혹시 그건 아시는 분도 있으신 거죠~” 나를 포함한 몇몇은 이게 대체 무슨 화법인가 싶어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또 몇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떠났다. “그러니까 별 건 아니지만, ‘그거’만 좀 신경 써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걸 더 이상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듯 자리를 박차려고 하셨다. 이에 나를 포함한 몇 분이 당황해서 방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신 건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부연 설명을 요청해서 겨우 내막을 듣게 됐다. 이야기인즉슨 이랬다. 영화제가 개최되는 장소와 관련해서 최근에 SNS에 문제를 제기한 포스트가 올라왔으니 영화제 차원에서 공식적인 대처를 하기 전에는 가급적 관객들 앞에서 ‘그거’에 관해 입을 담지 않도록 신중해달라는 말이었다. 당시에 SNS를 하지 않던 나, 그리고 평소에 영화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지 않던 여타의 스태프들이 대화의 맥락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대체 그분은 그런 얘기를 왜 그냥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으셨던 걸까? 이미 내가 말한 이야기에 그 답이 암시돼 있다는 점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구체적으로 설명 같은 걸 늘어놓지 않아도 알아들을 사람은 대강 알아들을 것이라는 기대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거”, “저거”라고만 말해도 대강 맥락을 파악할 정도로 그 기대를 충족시키는 사람이 ‘실제로’ 다수이기 때문에, 어떤 사안에 관해 구체적인 설명을 시도하거나 요청할 필요성 자체가 사멸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만큼 예술계나 비평계에서 오가는 소식이라는 게 알만한 사정을 공유하는 내부자들에게(만) 다 알려져 있어 별도의 대화나 인식론적 합의를 거칠 필요도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전제가 다수에게 묵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접하는 알고리즘에 따라 세계에 대한 인식을 외주화하는 것이 문제적이라고 생각해왔던 시대를 지나, 이제 애초에 그런 인식에 합의하지 않은 이가 본인의 내집단에 존재하리라고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된 시대. 그래서 “타인의 취향에 대한 호기심과 자신의 취향을 정당화하려는 의지가 동반사멸”( 이광호 )한 시대. 온라인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그…… 어…… 음… ‘거기’(비평계)에서 이런 경향이 더 만연해졌다는 점을 새삼스럽게 부연할 필요가 있을까. 체감상 이런 경향성이 본격적으로 심화된 기점이 2018년에서 2020년 사이라고 느낀다. 그 시기는 내 친구와 지인들을 포함한 다수의 사람들이 페이스북에서 인스타그램으로 SNS 계정을 옮겨가던 시기였으며, 무엇보다도 현재까지도 예후적인 여파를 남기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발발하며 스마트폰이 일상적 시민의 사회적 관계를 보다 미시적이고 근본적인 수준에서 재편하던 시기였다. 특별히 그 시기 즈음해서 내가 경험한 영화제 일화를 언급한 이유는, 그 스태프 분께서 구사하시던 화법이 어느 순간부터 전혀 예외가 아니게 됐다는 점을 블로그나 각종 SNS의 공론장에서 느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내가 영화비평에 처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2010년대 초중반 무렵의 블로그·페이스북 문화와 이 시기 블로그·인스타그램에서 유저들이 소통하는 방식을 비교하면 그런 폐쇄적 경향성에 입각한 아주 확연한 차이가 발견되곤 한다. 가령 코로나 전후 블로거는 물론 공식적인 지면에 글을 쓰는 평자들조차 본인의 내집단에서만 통용되는 맥락이 남에게도 당연하게 수용될 거라고 전제하는 것은 물론, 그 내집단 밖에 위치한 이들과 애초에 소통을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고 상정하는 폐쇄적인 화술을 구사하기 때문에 객관화된 언어로 토론을 하는 것은 고사하고 일단 대체 무슨 상황이나 맥락을 지칭하는 건지 알아듣기조차 어려운 상황을 자주 마주하곤 했다. 가령 “이 얘기를 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이미 지긋지긋할 정도로 말해진 얘기들”이라고 말하며 본인이 염두에 두고 있는 맥락과 그 맥락에 관해 본인과 내집단이 느끼는 감정이 다른 독자에게도 선험적으로 합의돼 있다고 상정하면서도 도통 본인이 말하는 그 얘기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아 공론장에 피로감을 유발하는 서브트위팅과 수동공격적 표현들, 혹은 “이렇게 말하면 분명 누군가는 또 이렇게 말할 텐데", “보나마나 어떤 식으로 반응할 특정한 부류들”과 같은 표현을 통해 본인의 입장에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할지조차 사전에 다 예측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례들이 여기 해당한다. 이후에 부연하겠지만 나는 이런 식의 개별적 발언들을 일일이 비판해야 한다는 단순한 주장을 펼치려는 게 아니며(보다 현명하지 못했던 과거에는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설령 비판한다고 하더라도 발화의 태도만을 문제 삼는 차원을 넘어, 그런 커뮤니케이션의 양상을 배태한 실질적인 원인을 지목해야 한다고 느낀다. 또 개인적으로는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는 차원에서만 글을 끝내고 싶지 않고, 우리가 적어도 영화와 픽션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지금 직면한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여기서는 지면의 제약을 비롯한 여러 한계로 인해 단지 내가 영화와 비평에 관심을 가져온 시기 동안 비평계와 영화계 내부의 커뮤니케이션이 고립되고 있다는 인상만을 중심으로 얘기하고자 한다. 그와 관련해서 다시 말을 잇자면, 최근 몇 년 전부터 나는 예술 비평과 이론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책은 덜 읽고 비평계의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덜 접하는 분야의 텍스트나 1차 사료를 직접 파고들거나, 아니면 직접 예술과 무관한 공동체를 경험하자고 다짐하곤 했다. 이러한 실천은 물론 개인적 필요에 따라 수행했던 사항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다. 하나는 블로그나 트위터 같은 각종 SNS 등지에서 전술한 것처럼 직간접적인 공격성을 함유한 언행을 발설하는 유저 혹은 평자들이 너무 증가한 상황으로부터 유발되는 피로감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런 분위기와 아울러 점차 폐쇄적으로 표준화되는 비평 글들의 관성에 저항하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었다. 이 또한 새삼스러운 얘기일지 모르지만 나는 언제부턴가 엇비슷한 온라인 서점의 추천 알고리즘, 엇비슷한 SNS 계정으로부터 유사한 정보망을 공유하는 시네필 커뮤니티의 일원들이 한정된 반경과 관점의(가령 실증주의적 사료와 경제적 현실감각에 기반한 정치학적 통찰이 결여된 채 현대 프랑스 철학적 형식논리를 다루는 텍스트만 근친상간적으로 편식하기 때문에 현실과 복잡계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통찰이 아연할 정도로 단순해져버리는 경향성으로 대표되는) 글을 제출하는 경향이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때로는 적잖은 평자들이 어디서 무슨 글을 읽고 특정한 문장을 인용했는지조차 투명하게 들여다보일 정도로(그걸 들여다볼 수 있었다는 점은 이전의 나 또한 그런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집단적인 지각의 반경이 수축되고 있다는 점을 체감하곤 했다. 실제로 가령 허문영과 앙드레 바쟁,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와 질베르토 페레스의 글을 탐독한 후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에 관한 아나크로니즘적 애착도를 형성하거나, 유운성 평론가가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리는 소식을 공유하는 다수의 시네필 집단은 종종 영화와 비평에 관한 정보를 얻는 몇 가지 디지털 채널을 일종의 단일 신경망처럼 공유하는 초개체 생물 군집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들은 대개 서로 SNS를 팔로우하고 있으며, 팔로우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여러 인터넷 포스트에 입력된 좋아요 버튼이나 댓글을 통해 서로의 흔적을 암암리에 인지하며 은밀한 친밀감과 경쟁심을 공유하는 내집단의 구성원으로 포집된다(이건 함부로 추측한 바가 아니라 내 주변의 여러 젊은 시네필과 비평가들에게 물어봤을 때 거의 다 동의한다는 답변을 들은 사항이다). 이런 생태는 그 자체로는 부정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친밀감을 생성하는 문화적 요소로 기능하곤 하지만, 동시에 그 친밀감에 기반한 비평계 내부의 공론장이 점점 불가측한 변수를 수용하거나 건전한 합의를 도출하는 역량을 상실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개인은 온전히 정치적이거나 객관적인 자아의 일면만을 간직한 존재가 아니다. 그가 정치적 존재로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객관성의 영역에 노출되지 않는 사적 영역의 안식처가 불가결하게 요청된다. 하지만 그러한 공사 영역 간의 시공간적 구별을 어느정도 유효하게 전제할 수 있었던 전통적 공동체와 달리, 온라인 공간에서 2인칭적 친밀감의 정동은 네트워크 전반에 보다 탈중심적으로 산포되어 안식만이 아닌 통제의 효과를 산출하기도 한다. 바로 온라인 공론장에 소속된 내부자들의 친밀감을 거스르는 객관화된 논의가 발설되는 것을 강력하게 방지하는 검열의 장치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툭 까놓고 말하자면, 나를 포함한 영화계나 인문예술계 네트워크에 속한 평론가들은 본인 이웃들이나 팔로워들 심기를 거스를지도 모르는 논평은 ‘굳이’ 쓰려고 하질 않는다는 얘기다. 비평이란 대개의 경우 상대적 객관성을 염두에 두며 세계를 더 자세하게 해석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반면 아렌트가 “보호받은 존재의 어둠”이라 이른 내밀한 공간은 그런 분석적이고 객관적인 자아와 무관하게 완전한 의존성에 관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안식처로 기능한다(물론 성숙한 사람이라면 친밀한 관계에서도 어느 정도의 선을 지킬 수 있어야 하지만). 그러니 공적 담론장으로 기능하면서도 동시에 전적인 의존성에 관한 요구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SNS 공론장의 유저들은 점점 이웃이나 팔로워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글을 쓰지 않는다. 써봤자 어차피 토론 같은 건 일어나지 않고 그냥 어느샌가 줄어든 팔로워 숫자를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아렌트가 말했듯 개인이 소외를 유발하는 공적인 페르소나를 장착하기 이전에 전적인 의존성을 보장받아야만 한다면, 친밀감과 배치되는 담론과 정서를 배타적으로 받아들이는 네티즌들의 심경도 납득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한국 사회가 가족이나 회사, 또래집단처럼 오프라인에서 안정적인 보살핌의 공동체를 구축하는데 실패한 상황에서, 온라인에서 친밀감을 찾으려는 유저들에게 “온라인에서도 객관적인 태도로 토론만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후기 자본주의의 통치술에 굴복하는 거다!”라는 식으로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은 마찬가지로 신중하지 못한 처사이기 때문이다(사실 나도 예전에는 좀 그랬다. 미안하다). 하지만 이 현상은 애초에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불가능한 양면성을 함유하고 있으므로, 유저들이 친밀감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온라인 공론장에서 객관적 논의를 창출하는 비평의 역량이 기능 부전에 처한다는 점 또한 솔직하게 시인해야만 할 것이다. 실제로 이런 이유에서인지 2010년대 중후반을 건너오면서 블로그의 댓글창 같은 곳에서 토론이 벌어지는 일을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유저들은 점점 좋아요만 누르거나 비밀 댓글만 달곤 한다. 2010년대 중반 즈음의 영화비평 블로그들의 댓글창과 지금의 댓글창을 비교하면 그런 확연한 차이를 체감할 수 있다. 서로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는 평자들도 애당초 건전한 토론이 발생하기 어려운 내집단의 분위기를 잘 알기 때문인지, 종종 논쟁적 사안이 발생해도 서로 상반되는 기조의 포스트를 올리는 식으로 수동공격적인 기싸움만 할뿐 본인이 당최 누구의 무슨 글을 염두에 두고 쓰는지는 절대 말하지 않는 상황을 빈번하게 발견할 수 있다(어차피 이 공론장이란 대충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들을 수 있는 청자만을 선험적으로 상정한 채 발화되는 공간으로 변질됐기 때문에 이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이런 현상은 상기했던 것처럼, 합리적 의미를 공유하는 방식과는 거리가 먼 정동적 소통에 입각한 폐쇄적 화술이 비평계 공동체 내부에 만연해지는 원인이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의식의 층위를 하회하는 신경학적 회로가 이미 통합돼 “그거", “저거”라고만 말해도 서로 다 알아듣는 상황에서 뭐하러 굳이 의미론적 담화를 조직하기 위한 의식적 노력을 기울인단 말인가? 주로 비밀 댓글이 게시되곤 하는 영화비평 블로그 댓글창 아마도 최근의 예술계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소수의 평자들의 글이 과잉된 영향력을 행사하며 폐쇄성을 조장하고 있다는 근거를 바탕으로 제도 비판이 이뤄졌던 상황 또한 이런 정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비평계가 폐쇄화하거나 고립된 현상이, 예술계 바깥에서 미디어와 산업적 환경의 변화가 불가항력적인 압력으로 작용하며 생산과 소비의 흐름을 급격하게 수축하거나 표준화한 후과이기도 하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은 채 단순히 예술계 내부에 잔존하는 몇몇 권력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복잡계에 대한 시각을 결락한 표면적 진단이 될 수밖에 없다. 특별히 이 점과 관련해서, 나는 예술계 내부에서 폐쇄적인 태도를 취하는 이들 못지않게, 그 폐쇄성의 원인을 예술계 내부 제도, 혹은 상대적으로 넓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몇몇 평자들의 책임에서만 찾으려고 하는 주장들 또한 마찬가지로 예술계 내부 담론만 소비하는 이들에 특징적인 폐쇄성을 공유한다는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는 말을 덧붙이고자 한다. 가령, 영화비평이 이전보다 훨씬 위기에 처했거나 고립된 상황의 원인이 정성일 평론가의 배타적인 태도나 《씨네21》 평론가들의 역량 부족에서 기인했다는 익숙한 견해들을 참고해보도록 하자. 정성일 평론가가 가끔 왜 저러시나 싶을 정도로 유아론적이고 배타적인 면모를 내보인다거나(가령 최근에 < 희생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1986)이 개봉했을 때 그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숏바이숏과 같은 분석을 불허하는 신비를 내장하고 있기 때문에 정교한 분석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은 다 틀렸다고 말했는데, 이건 틀린 말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숏바이숏이 명백하게 가능한 유형의 작품이다) 《씨네21》에서 생성되는 비평이 종종 불충분하다는 지적이 그 자체로는 타당한 지적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비평계가 수축한 직접적 원인이라고 규정하는 건 기초적인 경제적, 산업적 현실감각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부재하다는 점을 시인하는 처사다. 이 세계가 구조주의나 포스트구조주의처럼 인문예술계에서나 유행하는 담론이 설명하는 권력관계로 축소될 수 있다는 생각은 문약하기 그지없는 젊은 인문예술학도들의 머릿속에서는 사실일지 모르지만, 복잡계가 작동하는 현실의 이치와는 제대로 조응하지 않는다. 중산층이나 인문예술계 바깥에 지인이 몇명만 있어도 당연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만,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정성일 평론가와 《씨네21》이라는 잡지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모른다. 그들을 포함한 다수의 국민이 비평을 덜 읽게 된 이유는 이 나라 정부와 동시대 산업이 직장생활하고 퇴근해서 유튜브 보는 게 편한 생체리듬을 구조화한 영향력이 훨씬 크지, 그들이 피곤함을 무릅쓰고 골치 아픈 영화를 보거나 비평을 읽기로 결심한 다음, 한달에 원고료를 20만원 남짓 받을까 말까한 《씨네21》의 평론가들이 광고에 밀려 잡지 맨 뒷쪽에 있는 A4용지 2페이지짜리 분량의 비평 지면에서 하고 싶은 말 다 잘라내고 짤막하게 써낸 글이 설득력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언어라는 매체만 다루거나 인문예술계 담론에만 익숙해서 바깥 분야에 문외한인 이들은 이 업계가 고사 직전인 이유가 자체의 잘못에서만 유래했다고 오인하곤 하지만, 사실 객관적 관점에서 보면 프리모 레비의 말처럼 책이나 글 같은 건 본질적으로 무기력한 매체다. 그렇기에 유명무실하게 남아있는 잡지나 제도들은 비평의 위기를 촉발한 근본적 원인이 아니라, 이미 외부의 산업적, 경제적 불가항력이 가해진 상황에서 겨우 생존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비평계든 어디든 예술계 내부자들의 폐쇄성을 필요 이상으로 과격하게 비판하는 이들은 그렇게 주장하는 본인조차 마찬가지로 폐쇄적 시각에 빠져드는 나선에 갇히게 된다. 예술계나 비평계에서 실질적인 원인을 초래하지도 않았으며, 그 원인에 관해 책임지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 인식을 외면한 채 상황의 책임을 안쪽으로만 돌리며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는데, 사실 그 윤리적 책임 자체가 환상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지금까지 내가 말한 이런 얘기조차 그렇게까지 새로운 통찰은 아니다. 적당한 현실감각을 가지고 있는 평자들은 다 알고 있지만 내가 위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공격적인 팔로워들 심기를 거스르기 싫어서 방 안의 코끼리를 못 본 척하듯 침묵하고 있을 뿐. 비슷한 맥락에서 버나드 조지건은 인문학계가 기술권력이 지배한 작금의 현실에 대해 파급력을 행사하거나 유의미한 해석을 제출하기 어렵게 되면서부터, 산업적으로 파생된 여러 위기의 근본적 원인을 간과한 채 세계를 구조주의, 포스트 구조주의 등 인문학계 내부에서만 통용되는 담론 간의 사상적 대립으로 축소시키는 현실 인식을 확산해왔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정확히 같은 이유에서 이 글에서는 비평계 공론장이 점차 고립된 상황, 그리고 그게 고립된 원인이 비평계 내부에 있다고 말하며 또 다른 고립이 생성되는 상황의 원인을 몇몇 평자들의 책임으로 환원하지 않을 생각이다. 대신, 그러한 경향성의 근저에 놓여있는 이면의 맥락을 간단하게만 말하고자 한다. 그 후 그 현상이 동시대의 영화에서도 상호연관된 증상을 발현하고 있다는 점을 짚고자 한다. 물론 KMDb 영화글이라는 알만한 사람만 알고 있는 페이지에 게재될 이 글 또한 한정된 유형의 군상에게만 도달할 가능성이 농후하겠지만, 지금 나는 결론을 전제하는 그런 식의 경향을 문제시하는 글을 쓰고 있으므로, 이 문장 이후에는 더 이상 무슨 무슨 반응을 예상할 수 있다는 식의 문장은 불가피한 설명을 위한 경우를 제외하면 자제할 계획이다. 오프라인에 앞서는 온라인의 우위와 선취매개라는 경향성 위에서 내가 언급한 사항을 염두에 둔다면, 나는 내가 처음 영화를 접했을 때 소속되곤 했던 공동체와 작금의 변화한 공동체를 비교해보며 한 가지 대표적 차이를 거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사람들이 영화나 텍스트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는 흐름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향하는 방향이 아니라 그 반대 방향으로 전복되고 있다는 상황이다. 박은하 기자는 언젠가 80년대생과 90년대생이 각각 경험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차이를 변화를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대학에 들어갔더니 학과 선배들이 프리챌 커뮤니티에 가입하라고 했어요. 반면에 지금 세대들은 대학에 가면 “너 오유하니, 아니면 일베하니?”라고 묻겠지요. 즉 과거에는 오프라인을 경유해 온라인으로 들어가는 경험이 많았다면, 지금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정체성을 확인하는 식이지요.” 그가 2010년대 전후의 상황을 염두에 두며 지적한 소통 과정의 역전을 나 또한 지난 10년 동안 체감하곤 했다. 내가 2014년에 영화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오프라인에서 학과 친구나 선배들이 그 당시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던 < 그녀 >(스파이크 존즈, 2013), <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압델라티브 케시시, 2012), <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웨스 앤더슨, 2014)과 같은 영화를 극장에서 같이 보러 가자고 제안해줬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야 나는 각종 영화제 수상작과 걸작 목록을 검색하며 온라인으로 관심사를 확장하곤 했다. 그리고 실제로 나 또한 그렇게 알게 된 영화에 관한 정보를 다양한 지인에게 소개해주는데 적극적이었기 때문에(나는 내 주변에 약 열다섯 명의 영화평론가나 영화기자의 MBTI를 알고 있는데, 그중에 외향형은 나밖에 없다), 원래 영화나 비평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 다크 나이트 >(크리스토퍼 놀란, 2008)처럼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영화를 좋아하던 친구의 취향을, 내가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 엉클 분미 >(2010)나 알랭 기로디의 < 호수의 이방인 >(2013)을 좋아하는 취향으로 바꿔놓은 경험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물론 그때의 우리가 오프라인에서 영화에 관한 정보를 접했던 과정에서도 온라인의 선험성이 끼치는 영향력을 온전히 삭제할 수는 없을 것이고, 내가 예술과 관련된 학과에 다니고 있었다는 특수성을 배제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영화와 예술에 관한 정보를 접하는 흐름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이어지는 벡터를 띠고 있었다. 현실에서 영화 얘기를 하는 사람이 드물어진 오늘날 이 벡터는 근본적인 수준에서 역전된 것처럼 보인다. 이제 시네필 취향이라고 선험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지인이 아닌 이와 서울아트시네마 같은 공간에 동행하는 일은 이전보다 훨씬 어려워졌다. 오프라인 공동체에서 영화에 관한 정보를 접하는 일이 시네필이나 비평가가 되고 싶다는 자의식의 계기로 작용하는 일도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사정은 비슷한지라 누군가가 종사하고 있는 분야에 관한 전문지식을 사전에 섭렵하지 않으면 국적이 똑같더라도 외국인과 다름 없을 정도로 대화가 교통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곤 한다. 데이비드 린치의 < 인랜드 엠파이어 >(2007)에서 어느 미국인과 폴란드인이 각자 자기만의 언어로 떠들어대며 의사소통에 실패하는 장면을 봤을 때, 나는 저 괴상하기 그지없는 장면이 오늘날 나의 현실감각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느끼곤 했다. 부분적으로 이 상황은 단순히 영화를 보는 공동체의 문제인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적 자아와 친밀감조차 고도로 정보화된 사물 인터넷 경제의 선험성에 의존하게 된 현상과 밀접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범세계적 물류 경제와 디지털에 기반한 고부가 가치 산업이 고도로 발달한 세계가 우리의 현실에 나타내는 변화 중 하나는, 이전에는 자본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해방의 공간으로 여겨졌던 일상과 사회적 관계의 물질성에도 보다 많은 지식이 축적된다는 점이다. 브라질에 비가 내리면 스타벅스 주식을 사라는 경제학 서적의 제목이 의아스럽지 않은 것은 물론, 미국 연준의 반응을 참조하지 않으면 부장님의 기분을 이해할 수조차 없는 세계. 그래서 우리의 취향과 일상적 감각조차 대역적 질서와 불가분한 맹약을 맺은 세계. 대학 동아리 같은 현실의 공동체에서 상대적으로 무매개적이었던 우정을 기반으로 성립할 수 있었던 시네필 공동체가 2010년대를 지나오며 점점 사전에 영화와 커뮤니티의 정보망을 공유하지 않으면 대화가 성립하기 어려워지는 현상 또한 이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잠시 동시대 영화의 상황으로 우회를 하자면, 이 변화는 개별적인 영화들 안에서도 의미심장한 징후를 발현하곤 한다. 가령 이제 가령 세르주 다네가 말한 것처럼, 영화 안에서 역사와 사건에 방점을 두는 “지리학의 영화”와 그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자연의 시청각적 물성에 주목하는 “지질학의 영화"라는 이분법적 계열을 구분하는 것은 거의 가능하지 않다. 자연, 그리고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인 감각 자체가 전지구적으로 편재한 비즈니스 모델의 영향으로부터 독립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이를 증거하는 예시로, 최근으로 올수록 비판적 성찰의 도구로 기능하는 고도의 전문지식을 학습하지 않는다면 동시대적인 물질성을 재현하는 예술적 과제조차 점점 어려워지는 현상이 관측되고 있다. 가령 내게 2010년대 이후의 지경학적 환경에 관해 가장 놀라운 감각을 제공해줬던 두 걸작, 노엘 버치와 앨런 세쿨라의 < 잊혀진 공간 >(2010)과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 당나귀 EO >(2022)가 모두 나이가 든 남성 지식인 거장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은 이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두 영화는 모두 초국적 자본주의의 연결망에 지배된 이 세계의 물질성을 경이로울 정도로 감각적으로 도려낸 보고서다. 하지만 여러 국가의 경계를 초월해 주유하는 카메라의 동선은 세계의 지형학을 고도로 객관화한 지성의 산물이므로, 더 이상 역사적, 지리학적 통찰과 분리할 수 있는 지질학적 감수성을 상정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잊혀진 공간>, <당나귀 EO>, <파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 “ The Forgotten Space ”, IMDb) 올해에도 비슷한 경향은 의미심장하게 나타나서 장재현의 < 파묘 >(2024)나 하마구치 류스케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2023)처럼 땅을 주제로 삼는 개봉작에서 토착적 지질과 무관한 고도로 지식인적이고 전문가적인 캐릭터가 등장해 작위적 위화감을 선사하곤 했다(물론 우리가 이미 ‘자연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어진 세계에 실제로 서식하게 된 상황에서 그런 황당한 작위를 전략적으로 도입하는 방식을 기성의 비평적 관점에 따라 비판하는 작업이 과연 얼마나 유의미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 든다). 반면 그런 통찰을 가능하게 하는 권력에의 접근성과 서사적 감각의 숙련을 결여한 채 유튜브 숏츠를 마구자비로 넘기는 듯한 디지털 기기의 마취적 혼돈에 노출된 젊은 창작자들은 점점 자신이 위치한 장소의 물질성조차 오롯이 담아내길 버거워하는 경향이 발견되곤 한다. 여러 장소와 형식을 부단히 오가지만, 그중 어디에도 융화하지 못하는 청년 몽상가의 일상을 다룬 양근영 감독의 < 모르는 이야기 >(2023)는 그런 경향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사례일 것이다. 물론 그 무력감을 촉발한 원인 자체가 기성세대가 빚은 세계의 질서에서 유래했으므로 그 성취도가 미비하다는 점만을 근거로 젊은 창작자들을 비판하는 것만이 온당한 논의는 될 수 없겠지만 말이다. 다시 오프라인이 온라인 공간에서의 정보를 재확인하는 하위적 공간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논점으로 돌아오자. 우리는 일상적 순간의 대화에서조차 유튜브 콘텐츠나 <흑백요리사> 같은 온라인 콘텐츠를 보지 않으면 오프라인 대화에 참여할 수 없는 상황을 종종 직면하곤 한다. 비평계에서도 온라인 공간의 선험성이 발휘하는 영향력은 점점 오프라인 지면의 영향력을 초월하고 있기에, 잘 알려진 잡지의 고정된 지면에서 글을 쓰는 한 평론가 또한 SNS 계정을 만들지 않으면 영향력을 확산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압력을 느낀다고 고백한 바 있다. 지금부터는 이런 종류의 온라인의 선험성에 좀 더 직접적으로 연관된 논의를 떠올려보도록 하자. 리처드 그루신은 언젠가 9.11 테러 이후 미디어에 보편화된 경향을 “선취매개premediation”라는 용어로 명명한 바 있다. 9.11 테러는 글로벌 세계의 지정학적 불화가 선진국 시민의 일상적 생활공간 안에 실질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다는 점을 알린 상징적 사건이었고, 이 사건을 기점으로 미래의 모든 일상적 위협마저 사전에 제어하려는 욕망이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 심화됐다. 잠재적 범죄자를 사전에 제압하려는 경찰력에 관한 영화인 스티븐 스필버그의 < 마이너리티 리포트 >(2002)의 흥행, 그리고 각종 방위 산업과 보험 산업, 제약 업계의 성장은 그러한 제어의 욕망을 상징적으로 반영한 사건들이다. 그루신은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한 핵심적 요소로, 핸드폰이나 노트북과 같은 개인용 디지털 기기의 출현을 거론한다. 영화가 대중에게 이미지를 보급하던 20세기의 과거에 이미지란 롤랑 바르트와 앙드레 바쟁의 말처럼 재현하는 과거의 흔적을 기록하는 매개체였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이미지는 일기예보를 하듯 미래의 주식시장, 미래의 기후위기가 우리에게 끼칠 영향에 관한 정보를 사전에 고지해준다. 그리고 그런 정보의 송신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미래의 위협을 사전에 고지받는 것을 허가한 스마트폰과 노트북과 같은 개인용 디지털 기기들이다. 대중적인 예술작품에도 이 같은 선취매개적 욕망에서 비롯된 시대정신은 은밀하게 투영된다. 그래서 <다크 나이트>의 조커(히스 레저)와 <재벌집 막내아들>(2022)의 진도준( 송중기 ), 그리고 이 분야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도박마: 거짓말 사냥꾼 바쿠>의 마다라메 바쿠처럼 미래에 발생할 변수를 사전에 전부 다 예측하는 비현실적인 수싸움에 능란한 캐릭터들이 동시대 시민의 문화적 자아 이상형으로 출몰하곤 했다. 선취매개의 욕망이 투영된 작품과 인물들_<마이너리티 리포트>, <다크 나이트>의 조커 (사진: " Minority Report ", " Dark Knight ", IMDb) 선취매개라는 개념은 우리가 일상적인 생활공간의 물질성과 사회적 관계를 경험할 때도 사전에 온라인에 집적된 정보를 거쳐가는 현상을 해명하는 데 유용하다. 그리고 그러한 취사선택에 기반한 온라인 공동체들이 점점 고립되는 상황 또한 이런 현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2020년대에도 완전히 유효한 진단이라는 점을 증거하는 대표적 사례는 바로 코로나19가 확산한 이후 MBTI 검사가 폭발적으로 유행한 상황이다. 코로나19와 MBTI는 서로 우연의 일치로 같은 시기에 확산된 사건이 아니다. 코로나 뉴노멀은 미래에 발생할 감염의 확률값을 사전에 통제하려는 욕망으로 인해 일반화된 세계관이었고, 이는 오프라인에서 조우할 인격체의 행동반경을 예측 가능한 범주로 파악하려는 온라인 MBTI 검사의 일상적 용법과 구조적으로 상통한다. 그리고 미래의 불가측한 변수를 제압하고자 하는 두 욕망을 부채질한 요소는 때마침 방역을 목적으로 스마트폰의 활용을 확대한 정책적 차원의 조치였다. 이는 정확히 9.11 테러 이후 핸드폰의 존재가 선취매개라는 미디어적 경향을 보편화했다는 그루신의 논점과 상통하는 현상이다. 물론 미래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그루신이 글을 썼던 시기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으로 암울해지고 확정적으로 변함에 따라, 최근 들어서는 비관적인 미래의 확률값으로부터 눈을 돌린 채 보다 현실적인 순간에 충실하고자 하는 욕구를 투영한 콘텐츠들이 부상하고 있기도 하다. 시민들이 더 이상 기후위기나 정치 뉴스와 관련한 추상적 현안과 거국적 이상주의에 관심을 가지는 대신 <워크맨>의 오해원이나 <솔로지옥2>의 덱스처럼 일상적 순간의 욕망과 책임에 현실적인 방식으로 충실한 캐릭터들의 소박한 정감에 열광하는 현상 또한 그런 정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미래의 불가측한 위협을 제어하려는 선취매개라는 경향 또한 결국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를 둘러싼 위협이 적어도 현실적으로 제어 가능한 수준으로 여겨지는 시기에만 한정적으로 출현하는 현상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자본주의의 오래된 풍요가 마침내 종식을 고하는 시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쩌면 앞으로 선취매개라는 경향이 점점 약화되는 국면을 목도할지 모른다. 사전에 예측하거나 제어할 여력도 없이 밀어닥치는 온갖 위기에 현실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상황에서, 잠재적 위협을 방지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에 매몰돼 있는 것만큼 현실적이지 못한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이런 측면을 감안하면서도 지면의 한계상 선취매개의 영향력이 끼친 파장에 관해서만 취사선택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그것이 적어도 내가 영화와 비평에 관심을 가져온 지난 10년 동안의 온라인 환경에서는 상대적 보편성을 지니고 지속됐던 현상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진적 이미지에서 확률론적 이미지로: 전도된 영화 창작의 과정에 대하여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오프라인에서 상호작용하기보다는 온라인에서 선취매개적 경향에 입각한 커뮤니케이션을 경험해온 우리 세대의 특징이, 오늘날의 영화 안에서도 의미심장한 변화를 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상기했던 것처럼 한때 우리가 오프라인을 중심축으로 데이터와 정보의 수집을 확장하던 시기가 과거의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20세기의 영화사적 진보 또한 대체로 그에 상응하는 변화를 중심으로 전개됐다고 말할 수 있다. 누벨바그와 네오리얼리즘의 작가들이 스튜디오 시스템을 거부한 채 거리로 뛰쳐나가 보다 정제되지 않은 이미지를 포착했듯, 그리고 오토 플레밍거의 < 돌아오지 않는 강 >(1954)에서 뗏목을 타고 계곡을 누비는 장면이 베르너 헤어조크가 아마존에서 직접 찍은 < 아귀레 신의 분노 >(1972)에 이르러 훨씬 야만적인 생동감을 띠게 됐듯, 영화사에서 진보적 실천이란 곧 오프라인 현실로 나아가 보다 확장적인 물질성을 수집하는 방향으로 특징지어지곤 했다. 디지털이 보편화한 이후, 오프라인에서의 경험을 온라인의 선험적 기준에 종속시켜 온 최근의 세대는 이 방향성을 반대로 역전시킨다. 말하자면 현실의 물질성을 접하기에 앞서 온라인에서 ’현실이라고 상정되는 어떠한 상(像)’에 관한 데이터베이스를 선취매개적으로 구성한 뒤, 그 상을 영화적 현실에 역투사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작업의 방향성이 “오, 어제 어디를 갔는데, 예상했던 것과 달리 이런 구체적인 경험을 했어. 그럼 그 고유한 감각을 담아낸 영화를 만들어볼까?”가 아니라, “오, 어제 어떤 영화나 인터넷 게시물을 봤는데 내가 저 정보들이 비추는 현실을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현실이란 아마 ‘대체로’ 저것과 비슷할 것으로 ‘예상’해. 그러므로 나도 내가 본 그 대체적인 상을 영화라는 결과물로 출력해볼까?”라는 식으로 창작의 과정이 역전되는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이미 20세기 후반의 서브컬처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작가들이 현실을 참조하지 않은 채 작품 속 시뮬라크르적 기호를 재생산하는 경향성을 지적한 바 있다. 이를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사례가 바로 츤데레와 같은 캐릭터의 ‘모에’ 요소다. 신죠 카즈마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이 녀석은 분명 그러한 일을 할 거야’라는 확률분포를 여러 겹 겹쳐놓은 것”으로 정의한 모에 요소란 21세기의 시초에 이미 선취매개적 국면이 창작자의 작업 과정으로 스며든다는 점을 알리는 사례였다. 하지만 아즈마 히로키가 애니메이션과 게임 속 추상적 캐릭터들에 한정해 분석을 전개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더 이상 애니메이션과 실사라는 기준 또한 사실적인 것과 허구적인 것을 경계를 획정하는 절대적 준거가 되지 못한다. 이제 우리는 지도 어플에서 검색한 후 맛집을 찾아가는 것처럼, 오프라인에서 직면할 경험을 온라인을 통해 시뮬레이션적으로 정위하는 절차가 일반화된 세계를 살고 있다. 이에 따라 현실 자체도 직접적으로 현전하는 것이라기보다, 이런저런 예상가능한 확률값을 근사치에 가깝게 추상한 존재로 축소되는 경향이 생긴다. 의미심장하게도, 이미 20년도 전에 페드로 코스타는 새로운 세대가 점점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 있어 영화 이외의 것을 참고하거나 경험하지 않는 경향을 문제적으로 지목한 바 있다(물론 이런 주장은 이미 그보다 더 전에 다른 이들도 주장했지만). 어째서일까? 아무리 예술적 창조에서 상호참조나 오마주가 낯설지 않아졌으며 그것들이 그 자체로 부정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기본적으로 좋은 예술작품이란 다른 작품을 보고 ‘뭔가 이런 것’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작가가 세계를 보는 태도와 방법을 배워 나만의 시각으로, 내가 관심 있는 세계를 바라본 주관으로부터 비어져 나오기 때문이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라는 말은 그냥 시네필들이 열광하기 좋은 의미 불명한 수사학일 뿐이며, 예술작품이란 결국 고유한 주관과 세계가 맺는 긴장으로부터 비어져 나온 부수적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근래의 전도된 영화 창작 과정에서 사진적 이미지란 경험적 현실(혹은 구체적 사료)로부터 도려낸 물질적 대상이라기보다, 창작자의 머릿속에 내재된 ‘현실이란 어떠할 것이다’라는 추정치를 근삿값에 가깝게 출력해낸 정보로 나타난다. 그때 사진적 이미지의 물질성이란 지표적 단독성을 보증하는 요소라기보다 이미지의 확률론적 추상성을 은닉하는 날조된 하드웨어로 기능할 뿐이다. 그렇다면 과거에 포착된 현실의 존재를 기록한다는 사진적 이미지의 제작 과정이란 이제 미래에 경험할지 모르는 현실에 대한 확률론적 관념을 사전에 투영한 결과물로 전환되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점에서 나는 2020년대 전후의 영화적 이미지를 ‘사진적 이미지’라기보다 ‘확률론적 이미지’라고 규정하고자 한다. 오늘날에는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표방하는 사진적 이미지조차 확률론적 이미지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면모를 노출하곤 한다. 가령, 필름 시대의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환기하기 위해 시공간적 경계를 무화하는 디지털 미디어의 속성을 의뭉쩍게 누락한 < 패스트 라이브즈 >(셀린 송, 2023)가 이런 사례다. 박동수 평론가는 <패스트 라이브즈>에 관한 예리한 비평에서 극중 노라(그레타 리)가 향수하는 어린 시절의 첫사랑 해성( 유태오 )이 실재하는 인격체라기보다 한국계 미국인인 셀린 송의 머릿속에서 한국에 관한 향수어린 관념을 추상적으로 육화한 존재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 추상성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증거는 해성을 연기한 유태오 배우가 한국인인데도 불구하고 셀린 송에 의해 쓰인 어색하기 그지없는 번역투 대사를 구사한다는 점에 있다. 여기에 더해서 박동수는 해성의 직업과 생활세계의 구체적인 정체성이 탈각됐다는 사실로부터, 그가 실제 한국을 살아가는 개별적 인격체라기보다 셀린 송-노라라는 작가적 자의식이 배태한 인위적 피조물에 가깝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런 기준만으로 한 편의 영화에 내재한 가치를 온전히 폄하할 수는 없겠지만, 동시대의 여러 영화 속 캐릭터들이 구체적인 인격적 속성을 결여한 채 작가가 상상한 어떤 관념의 복화술 인형으로만 제시되는 현상은, 그들이 현실에서 작가들이 직접 경험하고 취재한 존재하기보다 미디어를 통해 접한 정보를 확률론적으로 추상한 결과물이라는 측면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가령 작년에 개봉한 < 너와 나 >(조현철, 2022)에서 기괴하기 그지없는 이물감을 발한 박정민 배우의 배역 또한 이런 사례에 해당한다. 극중에서 하은을 스토킹하다가 적발된 후 하은의 동급생들과 언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어 나 잘생김~ 어 너 못생김~ 어 너 남자친구 없음~”이라는 푼수 같은 대사를 내뱉는 그는 시종 하나의 고유한 역사를 간직한 인격체가 아니라, 적당한 타이밍에 찌질한 스토커를 플롯에 외삽하고 싶다는 감독의 욕구에 따라 인위적으로 구현된 추상적 존재로 나타난다. 물론 모든 캐릭터들은 기본적으로 감독의 욕구에 따라 구현된 존재이므로 진정한 문제는 그가 진짜냐 가짜냐가 아니다. 핵심은 오늘날의 미디어적 조건이 창작자가 현실을 접하는 생활감각을 변형시킴으로써, 캐릭터에 고유하고 독자적인 생명력을 불어넣는 역량을 점점 쇠퇴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냥 각본을 대충 써서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문제를 확률론적 이미지의 패러다임에서 조감한다면 보다 구체적인 해명이 가능하다. 영화적 현실을 구현해 기댓값을 넘어서는 고유한 인식을 창출하는 게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인식을 영화적 현실에 역투사하는 제작과정이, 영화적 이미지를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에 관념적으로 종속시키는 양상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패스트 라이브즈>, <겨울 이야기> 전술했듯이 이 경향이 배태한 대표적 증상은 작가 자신의 생활반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사회적 인격체를 그릴 때 위화감이 들 정도로 생활감과 디테일이 부족해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와 관련해서 말할 수 있는 또 다른 변화 중 하나는 오늘날의 작가들이 점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대화를 쓰는 능력이 결여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 안에서 대화라면 의미로 충만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사실 진정으로 탁월한 작가적 자질은 아무런 의미론적 쓸모가 없는 대사를 얼마나 잘 쓰느냐에 달려있다. 가령 마틴 스콜세지의 < 좋은 친구들 >(1990)에서 토미(조 페시)가 “funny how?”라는 의미 불명한 말을 연발하며 헨리(레이 리오타)를 윽박지르는 장면, 그리고 에릭 로메르의 < 겨울 이야기 >(1992)에서 펠리시(샤를로트 베리)와 막상스(미셸 볼레티)가 느베르의 길가를 산책하며, 아무런 의중도 없이 마주치는 간판과 사물의 명칭을 무심코 중얼거리는 순간들. 이 대화들은 어떤 서사적 효용과 주제의식도 부재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대화를 나누는 존재들이 지금, 이곳에서 어떤 확률론적 추상성으로 흩어질 수 없는 단단한 시공간적 구체성으로 빛난다는 감미로운 잔향을 새기고 간다. 마치 우리의 일상 속에서 어떤 의미론적 환원을 거절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그것이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으로 존재한다는 단독성의 확신을 남기는 절대적 순간처럼 말이다. 한 가지 밝혀두자면 나는 위에서 디지털과 현실의 경계를 이분법적으로 획정한 뒤 전자에는 물질적 속성이 탈각되어 있다는 단순한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마거릿 모스가 텔레비전을 통한 소통에 고유한 물질성과 친밀감이 깃들어있다고 말했던 것처럼, 나도 디지털 기기에 단독적인 소통의 물질성이 종종 스며든다고 생각한다. 가령 나는 메신저를 통해 시공간을 공유하지 않는 지인들과 대화하거나 이모티콘이나 말장난을 주고받는 상황에서 분명 의미론적 제약을 초과하는 반언어적 활력과 친밀감이 발생한다고 느낀다. 또, 이 글만 보면 내가 선취매개적 경향 때문에 MBTI 검사를 뭐 대단히 나쁘게 생각한다고 여겨질지도 모르겠는데, 일상에서 나는 애인이나 친구나 지인들과 MBTI 얘기를 안 하는 날이 없을 지경으로 과몰입하고 있다. 핵심적인 것은 단순히 우리 시대에 고유한 문화적 산물이 그 자체로 쓸모없다고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디지털에 진정한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일체의 단독성과 물질성이 부재한 것이 아니라, 그 디지털 기기의 사용을 익숙하게 받아들인 세대가, 대체로 시공간을 3인칭적으로 조감하는 영화적 현실을 인위적으로 구현하려고 할 때 일종의 작위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사진적 이미지에서 확률론적 이미지로 이행하며 나타나는 변화는 이런 측면에서 파악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어쩌다보니 상황에 대한 비관적이고 익숙한 진단만 늘어놓은 것 같은데 벌써 주어진 지면을 상당히 초월해버렸다. 확률론적 이미지, 그리고 그것의 현존과 공명하는 공론장에서의 ‘확률론적 대화’라고 할 수 있을 법한 커뮤니케이션의 양상은 내가 여기서 간략하게 기술한 것보다 훨씬 복합적이고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나는 이런 국면에서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몇 가지 구체적인 미학적 실천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여유가 된다면 그에 대해서도 쓰고 싶지만, 지금은 이미 웹페이지로 읽기 불편할 정도로 내게 주어진 분량을 너무 많이 초과해버렸으므로,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고자 한다. 김신(영화평론가) l 시각예술, 비평과 저널리즘에 관심이 많다. 진지한 얘기를 가볍게 하고 싶다. 영화주간지 《씨네21》을 비롯한 곳에 종종 영화비평을 기고한다.
그곳에는 어른들이 있었다. *** 이 글에는 영화의 플롯이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미 결말이 알려진 실화에 기반한 이 영화에 이렇다 할 반전은 없다. 오히려 폐쇄공포증이 있거나 2014년과 2022년의 참사의 트라우마로 아파하는 이들은 이 글을 읽고 나서 영화를 볼지 말지 결정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올해 여름, 13 LIVES 를 나는 미국에서 보았다. 나는 이 영화를 비웃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백인 남자 감독이 만든 제3세계의 실화 사건, 심지어 영국 어른들이 태국의 소년들을 구하는 이야기란 말이지… 백인 남성의 자뻑이 가지가지 형태로 부활하고 인종혐오 범죄가 만연하며 낙태가 불법화 되어 세상이 거꾸로 가는 것 같은 미국의 현 시점에서 백인 구원자 서사를 사용한 재난영화라니. 심지어 감독은 론 하워드, 스콜세지도 제임스 그레이도 아닌 론 하워드란 말이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하고 10분도 되지 않아 나는 알았다. 나는 이 영화를 비웃을 수 없음을. 쏟아지는 폭우 속에 갇힌 아이들과, 칠흑같이 어두운 물 속을 헤엄치는 동굴 다이버들을 보는 순간 메이는 목에 몇 번이고 자리를 떴다가 화면 앞으로 돌아와야 함을. 나의 삐딱한 시선은 자연 앞에 작아지고 재난 앞에 무력한 모습으로,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키며 최선을 다하는 어른들의 초라하고 정직한 모습에 바뀌었음을. 2014년과 2022년을 기억하는 대한민국의 성인이, 이 영화를 객관적으로 보기는 어쩌면 처음부터 불가능함을. 2018년 태국의 탐루앙 동굴에서 때이른 장마로 13명의 축구팀 소년들과 코치가 동굴에 고립되었던 것은 뉴스의 ‘세계’ 면을 상습적으로 건너뛰는 사람들에게도 어렴풋이 기억날 큰 사건이었다. 축구 연습을 마치고 코치와 함께 동굴로 놀러간 아이들은 갑작스런 폭우에 침수된 동굴 안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고립되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 태국 정부, 전 세계에서 날아든 자원활동가와 다이버들의 협력으로 코치와 아이들, 이 열세명의 생명은 한 명도 빠짐없이 동굴을 무사히 빠져나왔다. 그러나 어떻게? 아이들이 고립된 지점은 입구에서3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고 구조대원들이 투입되기 시작하였을 때 동굴 내부의 터널은 이미 침수되어 급류가 흐르고 있었다. 심지어 이 미로 같은 터널은 성인의 몸이 겨우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 좁은 데다가 날카로운 종유석이 다이버의 신체와 장비를 위협한다. 때로는 몸을 돌릴 수도 없이 앞으로만 전진할 수 있는 이 좁디 좁은 터널에는 빛도 공기도 없다. 마치 하루키의 소설 속에나 등장할 것 같은 이 터널을 헤엄쳐 아이들을 찾기 위해서는 동굴 다이빙이라는 극도로 특화된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 영국에서 자원하여 날아온 동굴 다이버, 존 볼라텐 John Volanthen (콜린 파렐 분) 과 릭 스탠튼 Rick Stanton (비고 모텐슨 분)은 죽었을 거라고 예상했던 아이들을 극적으로 찾아내지만 그들의 얼굴은 아이들을 발견하고 나서 오히려 더 어두워진다. 아이들이 모여 있는 지점은 동굴 입구의 물을 뽑아내고 가까스로 설치된 구조 캠프에서도 6시간을 쉬지 않고 헤엄쳐야 닿을 수 있는 거리이다. 산소탱크가 지탱하기 힘든 이 거리를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터널을 통해 이동하는 것은 전문 다이버에게도 생명을 내걸어야 하는 극한의 위업이다. (구조 작전을 수행하던 태국 다이버 한명은 목숨을 잃었으며 또 다른 구조대원은 상처의 감염으로 사망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을 살려서 밖으로 데리고 나온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목표는, 아이들을 살려서 + 데리고 나온다는 상호충돌적인 두가지 목표로 분리되어 버린다. 영화가 미국에서 출시되었을 때 소수의 평론가들은 실망을 표했다. 헐리우드식 재난 스펙타클을 기대한 평론가들은 이 영화가 드라마와 서스펜스가 부족하며 밋밋한 졸작이라고 평했다. 영화의 주인공은 콜린 파렐과 비고 모텐슨이 연기한 두 리드 다이버 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캐릭터가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도 따랐다. 그러나 이 비판들은 아주 정확하게 영화의 미덕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영화는 주인공 "구원자" 캐릭터에 공감하며 울고 웃는 영화가 아니라, 구조라는 불가능한 미션이 이루어지는 과정과, 그 과정을 수행해 내는 다수의 수행자들을 묵묵히 지켜보아야 하는 영화이기에. 그래서일까, 백인남성의 영웅주의와 구원자 서사에 날 선 비판을 가하는 유색인 여성 (women of color) 비평가들과 외국인 평론가들이 영화에 더 후한 점수를 주었다. 영화의 미덕은 영웅주의의 증발이기 때문이다. 물론 스펙터클과 해피엔딩의 통쾌한 카타르시스도 그와 함께 증발했다. 영화를 보고 난 관객의 마음에는 기껏해야 안도감과 함께 무거운 질문들이 남는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었고,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매우, 매우, 고통스럽다. “The old men found the boys!” 두 영국인 동굴 다이버들이 태국의 해양경찰과 다이버들이 들어가지 못한 junction 9을 지나 소년들을 찾아내어 동굴 밖으로 나오자 관계자들이 소리친다. (숨 쉬기가 어려워 세번이나 쉬면서 영화를 보는 동안 유일하게 빵 터진 장면이다.) “Old men”을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 직역은 물론 “노인들”이 되겠으나 원어 태국어의 뉘앙스를 살린 한국어는 무엇일까? 늙은이들? 어르신들? 아재들? 아무튼 중년을 지나 초로라고 표현해도 무색할 이 두 백인 남성들은 그냥 이렇게 후줄근하게 축소되어 불린다. 작전 회의를 할 때면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은 커녕 노안 안경을 코끝에 걸쳐 써야 하는 두 중년 남자들은 아이들에게 그닥 애틋한 눈길을 보내지도 않는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 순간으로 보여지면 동굴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아피찻퐁 위라세타꾼 감독과의 오랜 협력자이자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으로 셀룰로이드 필름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영화적 노스탤지아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태국 촬영감독 사욤부 묵디프롬 (Sayombhu Mukdeeprom) 역시 그들을 영웅으로 비추지 않는다. 카메라의 묵묵하고 겸허한 시선은 이 두 ‘노인’을 연기한 쟁쟁한 배우들에게 그럴싸한 클로즈업 한 컷을 선물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어른이다. 소강상태에 머물던 폭우가 다시 시작되어 동굴에 차오르는 급류를 보고도 담담히 “서두르자”- 한마디 하고 물 속으로 다시 뛰어들 수 있는. 그리고 그 현장에는 이 다이버들 외에도 너무나 많은 어른들이 있었다. 영화에는 다 나오지 않지만 실제 현장에는 백 여개의 정부기관에서 투입된 수 많은 공무원들, 9백명의 경찰, 2천명의 군인은 물론 구조팀에게 매일 2만끼니의 따뜻한 식사를 제공하기 위해 모인 7천명의 자원 활동가가 있었다. 물론 이 사람들이 모여 일을 할 수 있도록 지휘를 한 책임자들이 있었다. 첫날부터 밤을 새며 현장을 직접 지휘하는 시장은, 다이버 한명이 죽자 동굴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하고,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다시 그 선언을 번복한다. 민간인 수자원 엔지니어는 빗물이 지하수로 변해 동굴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야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물길을 바꾸는 중책을 자진하여 지휘한다. 마을에도 어른들이 있다. 농부들은 자신들의 논을 침수시키며 물길을 열어 동굴 안에 물이 불어나지 않게 시간을 벌고, 물길을 내기 위한 파이프가 부족하자 대나무를 베어 수관을 만든다. 그러나 아이들을 살려서 + 동굴을 데리고 나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어른들은 전혀 다른 무게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 릭과 존, 두 베테랑 다이버들은 아이들을 산채로 데리고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생각해 내고, 동굴 다이버이자 해리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마취과 의사, 리차드 해리스Richard Harris (죠엘 에저튼 분) 를 호출한다. 해리의 의견도 두 사람과 같다. 6시간의 동굴 다이빙 동안 아이들은 반드시 익사할 것이다. 아이들을 살려서 동굴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해리는 두 다이버가 입 밖에 내기조차 힘든 방법을 자신에게 제안하려는 것을 눈치채고 소스라친다. 6시간의 다이빙을 견뎌낼 수 있도록 아이들을 마취시키고 팔다리를 묶어 한 명씩 데리고 나오는 방법이다. 6시간의 다이빙 동안 아이들이 중간에 깨어나 익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반복하여 마취제를 주사해 가며, 공기도 빛도 없는 수중 터널을 통과하는 구출 작전. 동의를 얻지 않는 마취는 엄연히 불법이며 아무도 시도한 적 없는 이 방법이 성공할 확률은 미지수이다. 하지만 때 이른 장마비는 시시각각 불어나는 중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이대로 고립되어 반드시 죽는다. 어른들은 촌각을 다투는 이 상황에서, 어쩌면 비윤리적이며,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는 이 작전을 집행하기로 결정한다. 극비리에 진행하기 위해 언론 보도를 중지하고 심지어 아이들의 부모들에게도 알리지 않는다. 작전 중 아이들이 죽을 확률이 살 확률보다 크다는 것을 인지한 당국은 다이버들에게 사면을 보장하고, 다이버들은 자신들의 목숨 또한 위태로울 것을 알면서 불어난 물 속으로 뛰어든다. 그렇게 그곳에는 자신과 타인의 삶을 송두리채 바꿀 수 있는 무거운 결정을 내리고 책임지는 어른들이 있었다. 이 결정이 옳은 것인지 아닌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한 명도 빠짐없이 구조해 낸 해피엔딩으로 이 결단은 “옳은 결정”이 되었지만 만일 그렇지 않았어도 세상이 그들에게 같은 평가를 내려 줄까. 아마 그렇지 못할 것이다. 아니, 분명 그렇지 못할 것이다. 그 순간 그들이 내릴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이었음이 분명하되, 이 선택이 윤리적으로 완벽한 결정이었을까. 법과 도덕과 의학의 어느 지점을 교차하는 이 무거운 질문에 나는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하겠다. 그러나 나는 안다.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뒤늦게 구조팀에 합류한 다이버 크리스 쥬월 Chris Jewell (톰 베이트먼 분) 이 동굴의 에어 포켓 안에 길을 잃고 바보처럼 떠 있는 모습이다. 실제 다이버들이 커피 속을 헤엄치는 것 같았다고 증언한, 시각이 아니라 물 속에 매어 놓은 줄의 촉각에 의해 통로를 헤엄쳐 나가던 크리스는 동굴에서 줄을 잃고 길을 잃는다. 어두운 물 안에서 패닉하고, 급기야 자신의 심리 상태를 판단해 더 이상 나아가지 않기로 한다. 에어포켓 안에서 아이를 물위로 떠올려 보듬어 안은 채로 동료가 나타날 때까지, 아니 나타나길 바라며 침착하게 기다린다. 침착하게? 아니, 화면 속에는 보이지 않는 그의 떨림이 관객인 내게도 느껴진다. 내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과 그 이상을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부족함이 타인의 생명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 두려운, 나약하고 정직한 인간의 모습. 어른은 무엇인가.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으로 인한 결과를 책임지는 것. 그게 어른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기성세대가 이미 망쳐버린 세상을 표류해야 하는 어린 생명들을 지켜내기 위해서 이 시대에 어른의 의미는 확장되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 책임의 무게가 자신을 평생 짓누르는 트라우마가 될지라도, 올바르다고 생각되는 일을 하는 것. 완벽을 기대할 수 없겠지만, 피하지 않고, 오직 최선을 다해 애를 쓰는 것.
셰익스피어의 『햄릿』에는 햄릿이 연출한 선왕 시해의 비밀이 담긴 극중극 《곤자고의 살인》이 나온다. 햄릿은 공연을 위해 극단원들에게 연기를 지도한다. 햄릿: 부탁하건대 그 대사를 읊을 때 내가 보여줬던 것처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해야 하네. 대부분의 배우들이 그러하듯이 고함에 과장에 야단법석을 떨 바에는 차라리 장사꾼에게 배역을 맡기겠어. 손놀림도 허공을 휘젓지 말고 점잖게 움직여야 해. 폭풍처럼 감정이 소용돌이를 치더라도 평정을 잃어서는 안되네. (…) 그렇다고 너무 단조로워서도 곤란해. 각자 맡은 역할에 신중을 기하고 행동에 어울리는 말을 하고, 말에 적합한 행동을 하게. 자연스러움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면서. 알겠나? 햄릿이 연기에 대해 피력한 견해들은 16세기 영국의 연기법으로 유추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단서들을 담고 있다. 햄릿의 입을 통해, 셰익스피어가 생각한 당시 연기술과 그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 그리고 추구하는 연기술을 집약적으로 담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작품에 작가 자신의 견해를 투영하는 것을 작가의 자기반영적 기법이라고 한다. 몇 가지 예시를 더 살펴보자. 17세기 스페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는 국왕 부부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작가의 모습이 등장한다. 관찰자이므로 화폭에서 모델이 될 수 없는 작가가 자신을 정면으로 표현한 것은 회화 역사상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다. 의사 출신인 러시아의 극작가 안톤 체호프는 작품마다 의사 역을 넣어 자신의 페르소나로 삼았다. 프랑스의 소설가 앙드레 지드는 『위폐범들』에서 주인공 에두아르를 「위폐범들」을 집필하는 소설가로 설정한다. 에두아르는 자신의 일기와 수첩에 「위폐범들」의 창작에 관한 구상을 기록하는데, 여기서 수첩의 내용은 지드의 실제 작품일지를 거의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처럼, 작품 속에 작가가 등장하거나, 페르소나를 통해 작가의 견해를 대변하거나, 작품 속에 작품 제작에 관한 내용을 드러내는 것 모두 자기반영적 기법이다. 이는 작품 밖 작가 차원의 영역을 작품 안에 개입시키면서 작품 스스로 허구임을 드러내고, 관객은 작품 세계와 현실을 오가며 모호한 상태로 작품을 관람하게 된다. 즉, 작품 속에 현실을 현실 속에 작품을 견인해 오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알모도바르 영화에는 감독의 자기반영성이 잘 드러난다. 초창기 영화에는 감독이 직접 카메오로 출연하며 영화 안에 영화 제작자인 자신의 모습을 담았다. <욕망의 법칙>에서 계산원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 내가 뭘 잘못했길래 >에서는 주인공들이 보는 TV속의 배우로 나타나 관객들에게 서프라이즈를 선사한다. 관객은 영화에 몰입하다가 작품에 등장한 감독의 모습을 통해 이것이 영화였다는 사실을 각인하게 된다. 그리고 다수의 작품에 영화감독 역을 등장시킨다. <욕망의 법칙>, < 욕망의 낮과 밤 >(원제: 나를 묶어줘!)에서는 상대에 대한 집착과 욕정을 가진 감독으로, < 나쁜 교육 >에서는 복수를 실현하기 위해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을 그렸다. < 브로큰 임브레이스 >는 감독 역할에 알모도바르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담기 시작한 작품이다. 영화감독 마테오(루이스 호마르 扮)가 시각장애인이 된 다음에 온전히 음성으로만 듣고 편집한 장면을 돌려보는 앤딩의 대사는 마음을 울린다. “중요한 건 영화를 끝내는 거야. 비록 앞이 안 보여도 영화는 끝을 봐야 해.” 2020년 작 < 페인 앤 글로리 >는 알모도바르가 자기반영적 기법을 집약하여 만든 작품이다. 그는 영화를 두고 “나의 70년 인생을 담은 이야기”라고 밝혔다. 영화의 포스터는 주인공 살바도르(안토니오 반데라스 扮)의 그림자를 알모도바르의 그림자로 배치하여 보다 직접적으로 자전적 영화임을 드러낸다. 알모도바르는 배우 반데라스에게 자신의 옷을 입히는가 하면 자신의 집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것처럼 세트를 재현했다. 심지어 미장센으로 사용된 살바도르의 부모님의 사진을 자신의 부모님 사진으로 배치하기까지 했다. 영화에서 나오는 감독의 유년시절의 이야기나 어머니와의 관계, 건강상태 역시 알려진 사실과 많은 부분 일치한다. 1) 2) 1)<페인 앤 글로리> 포스터-살바도르의 그림자는 알모도바르이다. 2)<페인 앤 글로리> 살바도르의 어머니 방에 있는 가족사진은 알바도르의 실제 부모님(안토니오 알모도바르와 프란체스카 카바예로)의 사진이다. 영화는 살바도르의 현재, 어린 시절이 등장하는 꿈, 그리고 첫사랑에 관해 고백하는 연극이라는 세 가지 구조를 통해 전개된다. 현재의 살바도르는 척추 융합 수술 후유증과 어머니의 죽음으로 의지를 상실한 휴직상태의 영화감독이다. 32년 전 개봉한 자신의 영화 <맛>을 리마스터링 한 기념으로 영상자료원에서 상영과 GV를 제안하는 바람에, 영화 이후 인연을 끊은 <맛>의 주연 알베르토(에시어 엑센디아 扮)와 32년 만에 재회하게 된다. 알베르토로 인해 접하게 된 헤로인은 살바도르를 어린시절 고향의 기억으로 인도한다. 어린 시절의 고향은 살바도르에게 영화적 감수성과 어머니에 대한 애절함의 근원으로서 존재한다. 카톨릭 학교는 무신론자가 되게 하는, 미장이 형 에두아르도는 동성애적 성향을 갖게하는 계기가 됨을 유추할 수 있다. 꿈에서의 어린 시절은 현재의 살바도르의 모든 원천이자 심연의 일부인 것이다. 살바도르의 자전적 이야기인 극중극 《중독》은 살바도르의 청년 시절, 동성애인과의 사랑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를 모노로그 형식으로 전하는 연극이다. 살바로드의 집에 방문한 알베르토는 우연히 살바도르가 집필한 《중독》을 읽게 되고 매료되어 연극 무대에 올릴 것을 제안한다. 처음에 살바도르는 자신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고해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거절하나, 결국 알베르토의 뜻대로 대본을 넘겨주며 자신의 대리자가 되는 것을 허락한다. 그러면서 살바도르는 연극 무대와 연기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전한다. 살바도르: 무대는 아무것도 없는 게 좋겠어. 스크린 하나, 의자 하나. 팔다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의자에 앉아. 알베르토: 팔다리 어떻게 해야 할지 정확히 알거든! 살바도르: 수정하고 나서 좀 멜로드라마틱 해졌어. 알베르토: 걱정마, 내 전공이 멜로드라마니까. 멕시코에 있었던 게 도움이 되겠네. 살바도르: 그래서 내가 얘기하는 거야. 감정을 좀 죽여야돼. 감정을 조절해. 울지마 배우들은 울 기회만 있으면 울더라. 잘 하는 배우는 눈물 흘리는 배우가 아니라 눈물을 참으려고 애쓰는 배우니까. 알베르토: 뽀뽀해줘야겠다. (…)이번엔 셰익스피어도, 체호프도, 로르카도 아냐. 너를 연기하는 거야. 살바도르: 이상하게 하면 내 기분이 엉망이 될 거야. 잘 하면 훨씬 더 엉망이겠지. 《중독》에서 자신의 역을 맡은 알베르토에게 원작자로서 지시사항을 전하는 부분이다. 살바도르의 연극에 관한 견해는 곧 알모도바르의 견해이다. 셰익스피어가 햄릿의 입을 통해 자신의 연기관을 피력한 것처럼, 알모바르도는 자전적 영화 <페인 앤 글로리>의 살바도르를 통해 자신의 연기관을 내비치고 있다. 《중독》 무대에는 살바도르의 조언대로 스크린을 하나 놓았는데 그것을 통해 어린 시절 살바도르가 살던 동네, 보던 영화, 연인과 갔던 추억의 장소 등을 사진과 영상을 통해 비춘다. 이는 실제 알모도바르의 장소이기도 하다. 감독은 현재의 살바로드, 꿈속 어린 살바도르, 연극의 알베르토를 통해 자신을 대리하게 한다. 관객은 세 가지 버전의 알모도바르를 중첩시키면서 영화 내내 알모도바르를 상기하게 된다. 영화의 디제시스는 독립적이지 않고 현실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영화의 정수는 앤딩 장면을 통해 구축된다. 수술을 위해 마취를 한 살바도르는 다시 꿈을 꾸고, 영화 초반 등장한 기차역 꿈 장면으로 회귀한다. 그리고 카메라가 줌 아웃 되면 붐 마이크를 들고 있는 스텝과 바닥의 조명판이 드러나고, 살바로드가 컷을 한다. 스텝이 등장해 마지막 슬레이트를 치는데, 슬레이트에 적힌 영화 제목이 <첫 번째 열망>이다. 이 장면은 살바도르가 영화감독으로 제기했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영화에서 두 시간 동안 보여준 모든 내러티브가 촬영의 일부였음을 암시하게 한다. 즉, 영화와 현실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고, 수미상관의 구조를 갖춤으로써 영화 속 세계의 층위가 무한히 순환하고 있는 구성을 취하는 것이다. 알모도바르의 실제를 바탕으로, 영화제작 과정, 영화적 현실, 꿈 그리고 연극이 상호 영향을 미치며 끊임없이 순환한다. 마치 뱀이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형상과 같다. 막이 내려도 관객은 영화의 무한 순환 세계 속에 갇히게 된다. 이처럼, <페인 앤 글로리>는 감독의 자기반영성이 총 망라되어있는 영화다. 현실과 영화, 영화와 현실을 순환시키며 알모도바르는 자신의 유니버스에 관객을 가둔다. 팩트인지 픽션인지 모호한 상태, 그의 영화는 팩션이다. 어머니: 그 이야기꾼 표정하지 마라. 이런 얘기 네 영화에 넣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웃들 이 영화에 나오는 건 싫어. 난 팩션이 싫단다. 살바도르: 팩션에 대해 뭘 아신다고! 어머니: 네 인터뷰에서 들었다. 이웃들도 영화에 나오는 건 싫을 거야. 시골 무지렁이처럼 표현한다고 생각할거다. 살바도르: 말이 왜그래요 엄마. 존경과 정성을 담아서 표현하는데!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엄마 얘길 한다고요. 엄마와 이웃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고요. 전부 그분들 덕택이라고 하는데.. <페인 앤 글로리> 중. 지금까지 영화와 영화를, 영화와 연극을, 그리고 영화와 현실을 연결하며 형성하는 알모도바르 유니버스를 1편 「 알모도바르 영화의 연결된 세계 」, 2편 「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연극 」, 3편 「알모도바르 영화와 현실의 순환」을 통해 알아보았다. 글을 읽고 영화를 다시 관람하고 싶어졌다면 알모도바르 팬으로서 절반은 성공했다 자평하고 싶다. 그리고 알모도바르 영화에 대해 엉켜있던 날실과 씨실이 조금은 풀렸기를... 감상을 통해 알게 된 새로운 시각이 있다면 나눠주시길 바란다. (관련글) 1. 알모도바르 영화의 연결된 세계 - 2021.10.20. 2.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연극 - 2021.10.21. 3. 알모도바르 영화와 현실의 순환 - 2021.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