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 특별기획 2부작(아버지의 선물, 죽음, 아름다운 마침표를 위하여)
- 감독
- 전연식
- 제작년도
- 2007
< 부산행 >( 연상호 , 2015)은 (마치 6.25때처럼) 서울을 버리고 남쪽으로, 더 남쪽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서울을 버리고 부산에 다다르기 위한 인간군상의 이야기가 가족을 위한 헌신이라는 마침표로 완성되었다. 부산행으로부터 4년이 지난 시점을 그린 < 반도 >(2020)는 어디로 가는 이야기라기보다는 한반도를 버리는 이야기다. 북한은 38선으로 보호받은 듯 보이기 때문에 한반도라기보다는 대한민국이 소멸하는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중심에 있는 가족 이야기로 따지면 <반도>의 가족은 수차례의 슬로모션을 거치며 천천히 결말을 향해 간다. 코로나19 때문에 극장에 관객이 반도 차지 않기도 했지만, 웃을 법한 장면에서도, 놀랄 만한 대목에서도, 울컥할 만한 신에서도 객석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그 사실이 내내 신경쓰였다. <부산행>이 끝난 뒤, 대한민국은 좀비의 땅이 되었다.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했던 부산마저 좀비에 점령당했다. 가까스로 부산을 출발한 배에 탑승한 군인인 정석( 강동원 )은 누나와 조카를 배 안에서 발생한 감염으로 잃고, 매형인 철민( 김도윤 )과 홍콩에 정착해 살아가는 중이다. 하지만 홍콩에서는 한국말을 쓰면 극심한 차별을 당하는 상황이고, 제대로 된 일을 구하기도 어렵기만 하다. 정석은 홍콩의 범죄조직으로부터 서울에 있는 달러를 가지고 나오면 그 절반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현금을 가득 실은 트럭이 목동 오목교 근처에서 연락이 끊겼다는 것이다. 정석은 철민을 포함한 한국 출신자들과 네 명으로 된 팀을 꾸리고, 그 돈을 가지러 인천항을 통해 서울로 향한다. 인천항에서 목동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아포칼립스 서울의 모습이 드러난다. 웃자란 식물이며 아무렇게나 버려진 차량들 사이로, 소리와 빛에 반응하는 좀비들이 돌아다닌다. 정석 일행은 인천항에서 오목교 왕복이 수월하리라 생각하지만, 차를 발견해 빠져나오려는 순간 조명탄이 그들 앞에서 터진다. 정석은 도움을 제안한 준이( 이레 )와 유진( 이예원 )을 따라 간신히 빠져나온다. <반도>의 서울 풍경에는 한가지 특징이 있는데, 인천항에서 오목교까지, 그리고 시내 곳곳이 ‘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길이 뚫려있다는 것이다. 좀비가 운전을 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생존자들의 존재를 강력히 시사하는 셈이다. 631부대라고 불리는 군인들은 브레인격인 서 대위( 구교환 )와 좀비 대응에 강한 황 중사( 김민재 )를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다. 한편 정석은 생존자인 준이, 유진, 민정( 이정현 ), 김 노인( 권해효 )을 만나 군인들이 가져간 현금차량을 가지고 홍콩으로 가자고 설득한다. <부산행> 세계관의 연장에서 기획된 작품이기 때문에 <반도>는 <부산행>과 비교당하는 일을 피하기 어렵다. 관객이 <반도>를 보기로 결정하는 단계에서부터 <부산행>에 대한 호의가 보답받기를 기대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반도>의 주요 인적구성은 <부산행>때와 비슷한 데가 있다. 요즘 유행하는 식으로 표현하면 군인들을 제하면 ‘그림체가 같은’ 인물구성이 눈에 띈다. 중심에 있는 공유와 강동원, 정유미와 이정현, 김수안과 이예원이 그렇다.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가족 이야기로 마무리된다는 것 역시 그렇다. 인물을 중심으로 한 정서의 흐름은 두 작품이 놀랍도록 비슷하다. 그러다보니 가장 차별화되는 공간과 인물 구성은 바로 631부대다. 서 대위와 황 중사는 군인들의 구심점에 있으나 서로 불화하고 있으며, 서 대위가 군인들을 지배하는 방식은 식료품의 배급과 잡아온 생존자들과 좀비를 싸우게 해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군인들의 생존력이 어떻게 다듬어졌는지는 잘 보여지는데, 민정이 이끄는 두 소녀와 치매 노인 쪽은 무슨 수로 살아남았는지 영화 속 정보로는 파악이 어렵다. 문제는 슬로모션이 수시로 등장하는 후반부다. 정서의 흐름이라는 면에서 이미 <부산행>으로 학습을 마친 관객은, 반복되는 슬로모션으로 지연되는 결말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게 된다. 긴장감있는 에피소드와 액션이 인간과 좀비 사이에서 쉬지 않고 이어지니 지루할 틈은 없다. 하지만, 감정은 학습한 대로 흐르고 심지어 슬로모션으로 자꾸 지연된다. 재미있지만 동시에 시큰둥한 것은 후반부로 갈수록 예상한 감정을 체험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것은 아닐까.
< 동경특파원 >( 김수용 , 1968)은 첩보 스릴러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첩보 영화 특유의 극 중 정보량 배분 및 지연 등을 통한 관객과의 밀당에 주력하지는 않는다. 스파이와 스파이의 표적 대상과 스파이의 적 등이 등장하여 서로 간의 정체를 의심하고, 관객들도 이들 간의 관계와 속셈을 계산하며 기대를 충족시키거나 배반하면서 극적 재미를 만드는 것이 첩보영화의 관건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이 서스펜스, 즉 관객이 등장인물보다 많은 정보를 알고 있어서, 등장인물에게 닥칠 상황에 대해 긴장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는 등장인물 A보다는 관객이 많은 걸 알고 있었지만, 등장인물 B보다는 적게 알고 있기 때문에 A와 B가 함께 등장하는 장면에서 관객이 추측과 기대와 그 기대의 반전 등을 마주하게 되는 재미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앞서 얘기했듯이 <동경특파원>은 등장인물 간 그리고 인물과 관객 간 정보 제공량의 편차 및 조합을 적절하게 운용하기보다는, 대체로 건너뛰거나 생략하기 때문에 의혹과 추리 사이에서 긴장을 태우며 집중해야할 지점이 흐려진다. 이 작품이 소재로 삼은‘재일조선인 북송사업’은 상업적으로 영화화하기에는 힘겨운 역사적 현실이었을 것이다. 1959부터 1984년까지 재일조선인과 그 가족들(일본 배우자 포함) 약 9만 여명이 북한으로 향했다. 한국은 북송 반대 입장이었지만 일본과 한국의 수교는 1965년에야 이루어졌고, 실질적으로 일본에 있는 동포들의 한국행을 추진하지는 못했다. 일본에서 가난과 차별에 힘들어하던 이들은 다른 삶을 꿈꾸며 북송선에 올랐으나 돌아올 수 있는 배편은 없었다. 그리하여 북송사업 이후 재일동포들에게는 북한과 일본 사이의 이산가족이 생겨났다. 재일조선인 소녀 안나( 여수진 역)는 일본 니가타 항에서 북송선에 오른 어머니와 헤어지고, 배를 탔는지 안탔는지 행방이 묘연한 오빠를 찾기 위해 한국 기자( 윤양하 역)와 동행한다. 기자는 북송 문제를 취재한 자료들을 도난당한 후, 정체불명의 차에 치여 사망한다. 한편 도쿄에 있는 기자의 아내 지숙( 윤정희 역)이 운전하던 차에 누군가 뛰어들어 교통사고가 나는데, 최완배( 김성옥 역)라는 자가 나타나서 부상자를 병원으로 옮겼다더니 이내 죽었다고 한다. 최는 사후 처리를 도맡는다며 지숙에게 계속 접근하고, 자수를 원하던 지숙은 점차 최와 함께 사건을 은닉한 처지가 되어 한 패가 된다. 여기에 안나와 지숙이 함께 살게 되는 한편, 지숙과 최를 협박하며 안나와의 데이트와 돈을 요구하는 남자( 신성일 역)가 나타난다. 그리하여 지숙, 최, 안나는 묘한 운명공동체가 되어, 남자의 협박에 대응하느라 돈을 주고 억지로 데이트에 응해주다가 일본을 떠나 한국으로 간다. 이들은 지숙의 아버지인 남 교수( 김동원 역) 댁에서 가족처럼 지내지만 밤중에 최와 안나는 몰래 나가 아지트 건물로 향한다. 안나는 오빠의 소식을 안다는 최로부터 어떤 지시를 받고 있는 듯하다. 결혼 준비를 하게 된 지숙과 최에게 남자가 또다시 나타나 협박하고, 최의 뒤를 밟던 남자는 아지트에서 폭행·감금당한다. 마침 최로부터 오빠가 평양에 있다는 미덥잖은 말을 듣고 실의에 빠진 안나가 남자를 풀어주고, 남자는 남 교수에게 예비 사위인 최가 사실은 남 교수가 월남할 때 신의주에 두고 온 아들 남지완이라는 사실을 익명으로 알린다. 이 사실을 모르는 최가 남 교수에게 총을 겨누며 납치를 꾀하자 남 교수는 자신이 아버지임을 밝히고 자수를 권하지만 최는 듣지 않는다. 인천에서는 최의 간첩 일행이 남 교수와 안나를 배에 태워 납북하고자 하는데, 위기를 알리려던 안나가 간첩의 총에 맞고 남 교수 부인도 아들인 최를 붙잡고 오열하다가 총에 맞는다. 이에 최는 총부리를 돌려 간첩에 맞서고, 그때 국군들이 나타나 간첩 일행을 일망타진한다. 남자는 군 정보원으로서 동경특파원이었던 것이 밝혀지고, 병상 치료 중인 최를 비롯한 남 교수 가족은 가족 상봉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최의 대사대로‘죄 없는 안나의 죽음’이 이 영화를 해피엔딩으로 만들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은 남자(동경특파원)가 안나의 묘에 참배하며, 안나의 죽음을 잊지 않겠다는 나레이션으로 마무리된다. 영화 속에서 지숙도 간첩도 국군도 모두 각자의 목적으로 안나를 이용했지만 끝내 누구도 안나에게 제대로 사과하지 못했다. 또한 안나의 죽음을 계기로 주인공의 남북 이산가족이 상봉하고 재결합했지만 안나의 가족 상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재일조선인을 방출하고 싶었던 일본과 그들의 경제력과 노동력이 필요했던 북한 그리고 그들의 귀환은 추진하지 못하면서도 체제 경쟁 하에 북송 저지를 펼쳤던 남한, 이들 사이에서 기만당하고 외면당했던 재일조선인들의 역사를 반공첩보영화로 소화할 수 있을까? <동경특파원>은 이 질문의 답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엔딩을 부감으로 멀어지면서 화면 정중앙에 무덤이 자리하는 원경으로 끝낸다. 즉 일본에서 이방인으로 자라나 어머니를 북으로 떠나보내고 오빠는 찾지 못한 채, 남한 땅에 묻힌‘안나의 죽음’으로 큰 마침표를 찍는다. <동경특파원> VOD 보러가기
코엔 형제의 옴니버스 서부극 < 카우보이의 노래The ballad of buster scruggs >(2018)를 구성하는 6개의 단편은 모든 죽음으로 끝맺는다. 정확히 말하면,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시신 이미지로 막을 내린다. 폭력의 장르의 원조인 서부극에서 죽음과 시신이 등장하는 건 물론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코엔 형제라는 희대의 영화광-유희자이가, 진지함과 심각함도 종종 우스꽝스러운 제스처로 바꿔놓은 당대 최고의 패러디 작가가, 이야기의 진행 과정에선 갖가지 시각적 언어적 유머를 전시하거나 애틋한 혹은 달콤한 약속을 예비하고도, 끝내 음울한 시신 이미지로 모든 이야기를 닫은 결정이 범상해 보이지는 않는다. 여느 영화를 말할 때처럼, 감독의 세상에 대한 비전이나 서사의 내적 필연성으로부터 <카우보이의 노래>의 죽음을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코엔 형제처럼 서사적 필연성에 무관심한 감독도 드물다. 그들의 영화에서 하나의 영화적 기호는 대개 다른 영화적 기호를 불러내는 전조로 등장하며, 기호들의 연쇄는 서사적 연쇄라기보다 기표적 연쇄의 퍼포먼스에 가깝다. 예측할 수 없이 연쇄하는 기표들의 자유분방한 운동에서, 영화적 기호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겠지만, 자연스러운 이야기의 흐름이라는 서사적 연쇄에 익숙해져 있는 관객에게라면 종잡을 수 없거나 경박하거나 때로 불쾌한 것으로 비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코엔 형제의 재능은 영화적 요소들의 기표적 연쇄로부터 유희적 활력을 이끌어내는 점 자체에 있다기보다, 기표들의 소란스러운 연쇄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 편의 영화를 매우 치밀하고 단단한 육체로 만들어낸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한 편의 코엔 영화를 관람한 뒤, 우리는 대개 한바탕의 놀이 시간을 통과한 것처럼 느끼지만, 돌아보면 그곳엔 무언가 놀이의 퍼포먼스로 환원되지 않는 모종의 견고하고 아득한 실체가 버티고 있다고 간혹 느끼게 된다. <카우보이의 노래>는, 제목은 물론이고 존 포드 서부극의 아이콘인 모뉴먼트 밸리가 등장하는 첫 에피소드의 첫 장면, 그리고 이어서 말을 타고 등장하는 총잡이 카우보이라는 캐릭터에서 자신이 서부극임을 호들갑스럽게 강조한다. 물론 이 서부는 더 이상 고전기 서부극의 서부가 아니다. 서부극에 친숙한 사람이라면, 기괴한 암석봉들이 산재한 이 장소의 형상이 익숙한데도 어딘지 낯선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코엔 형제가 우리를 이끌고 온, 이 서부는 어떤 서부인가. 고전기 서부극의 서부를 ‘그 서부’라 칭한다면, 이 서부는 그 서부의 모조이다. 이것은 이 서부가 촬영된 장소가 실제 모뉴먼트 밸리와 비슷하게 꾸며놓은 야외세트라는 뜻이 아니다. 실제 모뉴먼트 밸리에서 촬영되었다 해도, 이곳은 여전히 야외세트일 뿐이다. < 역마차Stagecoach >(존포드, 1939)에서 처음 등장한 모뉴먼트 밸리의 그 서부는 포드의 서부극에서뿐만 아니라 그때까지의 영화를 통틀어서도 처음 등장한 장소이며, 다른 나라의 관객은 물론 미국 관객들에게조차 완전히 낯선 장소였다. 그 서부에서 촬영된 영화의 서사가 비록 제작 시점보다 수십 년 전 과거의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따라서 당대의 시점을 기준으로 삼아도 현행적 장소로 설정된 건 아니긴 했지만, 그 독특하고 기괴한 장소의 형상이 영화에 최초로 새겨졌다는 점에서 그 장소는 1939년의 장소로서의 물질적 시원성이 있다. 그 서부와 이 서부 사이엔 최초와 그 이후의 시간적 서열만 있는 건 물론 아니다. 20세기 중후반, 원거리 통신과 교통수단에서 일어난 혁명은 지구상의 모든 곳을 가시화하고 접근 가능한 장소로 만들었다. 낭만적 상상력을 자극했던 저 너머의 장소가 사라진 뒤로, 그 서부도 사라졌다. 이제 모뉴먼트 밸리는 초월적 잠재성을 잃어버린, 오늘날 우리의 시각장에 갇힌 폐쇄공간이 되었다. 오늘의 서부극의 서부는 켈리 레이차트의 < 믹의 지름길 Meek's cutoff >(켈리 레이차트, 2010)에서처럼 알레고리화된 정신적 공간으로 드러나거나, 코엔의 또 다른 서부극 < 더 브레이브True grit >(2010)에서처럼 확대되고 개방된 무대로 드러나거나 혹은 SF영화의 우주처럼 서부의 가상적 변주공간으로 드러난다. 코엔은 첫 장면에 모뉴먼트 밸리를 등장시키면서 이 서부의 모조성을 위장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짓궂은 방식으로 강조한다. 기타 치며 노래하는 카우보이를 비추던 카메라는 갑자기 기타 내부에서 밖을 바라보는 시점(視點) 숏으로 바뀐다. 또한 카우보이의 노래가 듣는 위치에 따라 소리의 크기와 질감이 바뀌는 청점(聽點) 숏들을 몽타주한다. 이 시점과 청점 숏들은 당연히 특정 인물의 감각에 속할 수 없고(기타 안에는 아무도 없으니까), 그렇다고 객관적 숏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어서, 카메라의 존재와 이 장면의 인공성을 장난스럽게 노정하는 장치로밖에 볼 수 없다. 이곳은 지금 갖가지 촬영 장비가 들어서 있는 꾸며진 공간이며,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가 일종의 유희적 퍼포먼스가 될 것임을 이 숏들은 암시한다. 서사적 필연성에 무관심한 이야기의 중심 소재는 사건이 아니라 사고다. 사건과 사고는 벌어지는 일 자체가 아니라 서사에 맥락화되는 방식에 따라 구분된다. 사건은 내적 필연성을 지닌 것으로 새겨져 사건이 벌어지면 결코 사건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사고는 우연적이고 돌발적인 것으로 제시되며 이전과 이후는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사건의 서사는 대개 불연속적 선형성으로 나타나며, 사고의 서사는 대개 대체에 의한 연속적인 순환구조 혹은 나선구조로 나타난다. 코엔식 기호놀이의 서사가 요청하는 건 당연하게도 기표들이 필연성에 흡수되지 않고 뛰어놀 수 있는 사고의 서사다. 사고의 우연성과 돌발성은 기표들의 활력의 동력원이 될 것이다. 관객을 노골적 모조의 서부에 초대한 코엔 형제는 고전기 서부극의 소재가 된 진중한 사건들을 돌발적이고 황당한 사고로 전환해 패러디의 난장을 상연한다. 이 난장의 활력과 민첩함 그리고 발작적 반전이 다음 장면을 전혀 예상할 수 없게 만들어, 보는 이의 넋을 빼놓는다. <카우보이의 노래>의 여섯 에피소드들은 대부분 잠재적 순환구조를 갖고 있다. 1편의 깝죽대던 카우보이 버스터는 또 다른 총잡이와의 결투로 갑작스레 죽는다. 새로운 총잡이 역시 언젠가 그렇게 죽을 것이다. 하늘로 날아오르던 피살자의 영혼이 살해자와 함께 노래하는 장면은 그들의 동일한 운명을 유머러스하게 암시한다. 2편의 실패한 은행 강도는 교수형 당할뻔하다 살아나지만 황당한 계기로 다시 목을 매달린다. 3편의 팔다리 없는 음유시인은 버림받은 뒤 ‘수학하는 닭’으로 대체되지만 명민한 닭 역시 언젠가 음유시인의 운명이 될 것이다. 음유시인과 닭을 끌고 겨울 들판을 통과하던 늙고 초라한 쇼맨 역시 같은 운명을 맞을 것이다. 5편의 젊은 웨건마스터는 한 여인과 맺어져 정착의 새로운 삶을 시작할 뻔했지만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실패한다. 지나치게 과묵한 늙은 웨건마스터의 젊은 시절도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이들의 나선적 순환의 삶의 끝은 모두 죽음이다. 그러니 마지막 에피소드의 좁은 포장마차 안에서 저마다 자신의 삶이 특별하다고 뽐내던 다섯 인물이 결국 공동묘지와도 같은 호텔 안으로 사라져가는 음울한 결말은 적절한 마침표다. 이 에피소드들에서 죽음은 장대하고 비극적인 죽음이 아니라, 우연적 사고에 의한 어처구니없는 죽음이거나, 인물과 서사의 개별성과 관계없이 예정된 죽음이다. 바깥이 사라진 모조 서부는 박제된 유해와 고대의 형상이 보존된 유사박물관과도 같다. <카우보이의 노래>는 이 폐쇄된 유사박물관에서 자기 죽음을 소극(笑劇)으로 재상연하는 유령들의 잔치 혹은 죽은 자들이 부르는 묘지의 발라드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톰 웨이츠가 늙은 금 채굴꾼으로 등장하는 네 번째 에피소드를 잊기 힘들다. 이 에피소드는 예외적이다. 무대는 야트막한 언덕의 나무들과 산에 둘러싸여 있고, 한가운데 냇물이 흐르며 수리부엉이와 사슴과 물고기가 한가롭게 거니는 아름다운 분지다. 노인은 곳곳에 구멍을 파다 마침내 금을 발견한다. 그 순간 비열한 젊은 도둑이 뒤에서 그를 쏘지만, 총알이 급소를 피하는 바람에 반격에 성공해 도둑을 죽인다. 노인은 황금이 나온 구덩이에 젊은 도둑의 시신을 밀어 넣고 유유히 떠난다. 부엉이와 사슴과 물고기도 돌아온다. 여섯 에피소드 중 유일한 승리의 이야기, 축복의 퍼포먼스다. 남다은의 표현대로 “죽음의 기운이 넘실대는 다른 에피소드와 달리... 모든 것들의 생명력을 경애”한다. (『필로』 5호) 이 예외성에는 다른 얼굴도 있는 것 같다. 다른 에피소드의 모조 서부들은 물리적으로 개방되어 있지만, 이 에피소드의 공간만 유일하게 바깥으로부터 구획된 물리적 한정 공간이다. 전자의 서부는 풀 한포기도 드문 황야이지만 이곳은 인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생명체가 광채를 발하는 풍요의 초원이다. 이곳은 어쩌면 폐쇄된 모조 서부가 잃어버린 바깥의 상상적 공간일지도 모르겠다. 그 작은 분지마저 서부의 인간이 침투해 상처 입힌다. 스스로도 상처 입었지만, 노인은 살아서 이 공간을 떠난다. 그가 떠나자 곧바로 아름다운 생명체들이 돌아왔으므로 노인의 채굴과 획득과 살인은 이 아름다운 공간의 균형을 훼손하지 않는, 사건 아닌 사고일 뿐인가. 하지만, 노인과 함께 금을 향한 욕망도 살아나갔다. 그 탐욕은 앞으로도 또 다른 자연의 성지를 파헤칠 것이다. 그렇다면 이 화사한 에피소드는 어쩌면 가장 불길한 예기인가. 물론 코엔은 어느 쪽으로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묘지 가운데 핀 꽃의 위안 혹은 위안을 가장한 묵시록. 코엔의 유희는 즐겁지만 은밀하게 우리를 흔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