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강녀 곡도 만리장성
- 감독
- 안현철, 요봉반
- 제작년도
- 1969
- 출연
- 탕란화, 하심, 김웅, 전영선, 강계식, 임예심, 장역비, 재량, 대명, 당국사, 왕호
칼럼 원고를 부탁하는 연락을 받았을 때, 사실 몇가지 들려오는 소식들에 분노해있는 상태였다. 애니메이션과 관련된 일을 하다보면 누구나 꼭 듣게 되는 단어가 있다. 바로 ‘OSMU’라는 말이다. 그럴듯해 보이는 이 말은 ‘원소스 멀티유즈’의 줄임말로, 문화콘텐츠산업의 핵심적인 키워드처럼 이야기되어지고는 한다. 꽤 멋들어져 보이지만, 쉽게 생각해보면, 적은 비용으로 큰 부가가치를 창출해내겠다는 자본주의 사회의 명제 그대로이다. 굳이 영어를 쓰면서 말할 새로운 것도 아니다. 그래서 묻고 싶다. 정말 지긋지긋하게 듣는 이 단어의 실체는 무엇이냐고. 애니메이션 산업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끔 안보이는 무언가가 허공을 헤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때가 많다. 네이버 검색란에 ‘OSMU’라고 치면, < 해리 포터 > 작가 조안 롤링의 사례가 나온다. 가난했던 그녀가 소설로 일약 갑부에 오르게 되는 스토리가 감동적으로 쓰여져 있다. 이 글을 보는 순간 생각했다. ‘아, OSMU는 일확천금을 얻어 갑부가 되는 거구나’라고. 언제부터인가 문화콘텐츠 산업은 ‘로또대박’의 꿈과 비슷한 수준이 되어버린게 아닐까? 대박의 꿈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하룻밤만 있어도 만리장성을 쌓고 있다. 그것은 꿈이지만, 꿈도 아니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게, 이 사회에서 뭐 그리 대단한 꿈이겠는가. 누구나 한번쯤 생각하는 흔한 일일 뿐, 아무튼 새롭지 않다. 문화산업이란 용어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처음 사용하였다. 그들이 보기에 문화산업이란 문화의 퇴보를 의미하는 말이었으며, 그 산업화 방식이 인간의 소외를 유발시키는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산업이란 말은, 미국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의 새로운 부가가치 창출의 통로로 주목받으면서, ‘문화정책’의 핵심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부딪히게 되는 현실은, 그들의 우려가 사실이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유행처럼 떠도는 ‘글로벌’이란 말이 있다. 애니메이션 지원 사업에 ‘글로벌 애니메이션’이란 말조차 등장했다. 한때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란 말도 있었지만, 지금의 ‘글로벌’의 핵심은 한국의 시장은 좁기 때문에, 해외로 나가야한다는 철저히 시장논리에 입각해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한국에서 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타겟이 외국으로 되어 있어, 심지어 더빙조차 영어로 되어 있는 경우를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결국, 한국의 관객들은 시장이 작다는 이유만으로 작품을 향유하고, 즐길 수 있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것이다. 영화제에서 더 많은 관객을 바라는 것은 누구나 바라마지않는 일이다. 영화제를 지원해주는 사람들만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 감독도, 영화제 스탭도, 심지어 관객들도 더 많은 관객을 진심으로 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영화제에서 OSMU 콘텐츠와 킬러 콘텐츠-먼저 이게 과거형인지, 현재형인지, 미래형인지 묻고 싶지만- 를 상영할 필요가 있는가? 예를 들어 영화제에서 뽀로로나 로보카 폴리를 틀고, 디즈니나 픽사의 신작을 틀어야하는가? 만약 위와 같은 이유만으로 이 작품이 영화제에서 상영된다면, 필자의 대답은 ‘No’다. 영화제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콘텐츠들의 쇼케이스장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미 그러한 역할은 기존의 극장과 상업적인 공간에서 충분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제는 오히려 평소 접할 수 없었던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문화적 토양을 보다 풍요롭게 하는 기반이 되어야 한다. 영화제조차 이러한 역할을 게을리 한다면, 그 사회는 천편일률적인 작품만을 선택의 여지없이 소비하게 됨으로써 문화적으로 퇴보하게 되고 말 것이다. 물론, 그들이 바라마지 않는 새로운 ‘뽀로로’역시 나올 수 없을 것이다. 문화산업이란 말도 문화 없이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린 지금 너무나 커다란 시험 문제에 주관식으로 답변해야하는 상황이다. 그것은 필자가 어릴적 시험문제로 ‘새로 산 청소기가 고장이 났을 때, 대처하는 가장 소극적인 방법’처럼 정답이 있을 수 없는 문제를 받아든 것만 같다. 이제, 공중에 날아다니고 있는 허깨비만을쫓기 이전에 모두가 튼튼하게 두 발을 딛고 설 수 있는 튼튼하고 비옥한 토양을 만드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한다. 허깨비가 망령으로 바뀌기 전에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영화는 산업이자 예술이며, 오락이다. 그것은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상당한 자본과 기술, 사람들이 움직인다는 뜻이다. 특히 한 해에 200편을 넘는 영화가 만들어졌던, 그리하여 적어도 편수로만 놓고 따지자면 세계 5대 영화산업국에 들었다는 1960년대 한국영화계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일선에서 자신의 작품들을 만들었던 감독만큼이나 한 해에 20-30편의 영화를 꾸준히 제작해 낸 제작자들 역시 영화산업에서 중요한 주체들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그토록 많은 한국영화가 만들어졌던 것은 정부가 소수의 독과점 기업체를 메이저기업화하고자 만들어낸 대량생산 유도 정책 때문이었다. 이 회사들은 대개 20개 남짓으로 한정되어 있었는데 그 중 신필름, 세기상사, 합동영화사, 태창영화사, 연방영화사, 극동영화사 등이 꾸준한 작품활동을 보여주었던 소위 메이저 제작사에 속한다. 이 영화사들에는 대개 회사를 창립하고 굳건하게 운영했던 굴지의 제작자들이 대표로 있기 마련인데 연방영화사의 주동진 역시 그 중 하나였다. 주동진 은 1927년 2월 20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한양공대 기계과를 졸업하고 한국시청각 연구원 연출과장을 지냈으며, 한양대학교에 영화과가 신설되자 강의를 맡기도 했다. 1962년 한양대학교의 모체인 한양재단이 영화사를 설립하는데 관여하며 한양영화사의 전무로 재직했다. 당시 전무후무한 5억원이라는 자본금으로 설립된 한양영화사는 < 진시황제와 만리장성 >, < 아편전쟁 >, < 손오공 > 등 대작을 중심으로, < 혈맥 >, < 굴비 > 등을 제작한 굴지의 영화사였다. 1963년 한양영화사로부터 독립한 주동진 은 동서의 돈을 빌어 < 호랑이 꼬리를 밟은 사나이 >를 제작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대명제작을 한 것으로 현재 KMDb에는 동원영화사의 작품으로, 주동진은 기획으로 이름이 올라 있다. 이후 다시 대명으로 제작한 < 아빠 안녕 >이 크게 히트하면서 그는 연방영화사를 설립하게 된다. 1965년 연방영화사 설립한 해 그는 기대치 않은 흥행작을 통해 영화계의 행운아로 등극한다. 바로 김기풍 감독의 < 여자가 더 좋아 >였다. 서영춘 이 주연한 이 슬랩스틱 코메디 영화는 불과 8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제작된 저예산영화였으나 서울에서만 18만명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 그 해 흥행랭킹 2위에 오르는 빅히트를 기록하여 연방영화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는다. 나아가 1966년에는 이광수 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 유정 >이 관객수 30만명이 넘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 성춘향 > 이후 최고의 기록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짧은 시간 내에 한국영화 제작계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유정>의 신인 여배우로 픽업된 여배우 이민자에게 극 중 이름을 따 남정임 이라는 예칭을 붙여준 것도 주동진 이었다고 한다. 여세를 몰아 그는 1967년에는 한국영화업자협회의 회장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주동진은 중소영화사들을 규합하여 일시적이나마 당대의 거물 제작자인 신상옥을 회장에서 퇴임시킴으로써 한국영화 제작계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했다(이후 신상옥 이 자신에게 우호적인 회사들을 규합하여 ‘한국영화제작자연합회’를 구축하여 영화 제작계를 반분하고 이후 새로운 한국영화제작가협회의 회장으로 복귀함으로써 이 ‘쿠데타’는 종국적으로는 실패로 돌아간다). 전성기의 연방영화사는 모회사가 없는 개인 회사로 출발한 영화사 중에서 신필름을 제외하고 가장 규모가 큰 영화사 중의 하나였다. KMDb 기준에 따르면 주동진 이 연방영화사의 이름으로 제작한 영화가 거의 150편에 이른다. 또한 그는 1970년 < 사랑하는 마리아 >를 통해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노출과 섹스신으로 당시 영화계의 화제가 되었으며, 1970년 흥행 랭킹 1위에 오르기도 했다. 1976년 그는 부사장이던 최춘지 에게 사업을 물려준 후 갑작스럽게 미국으로의 이민을 택했다. 이민을 택한 원인에 대해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한양영화사 시절부터 그와 함께 했던 양춘 은 그의 형 때문이라 증언한 바 있다. 양춘에 따르면 주동진 의 큰 형 주동인은 1953년 북조선영화촬영소 부장과 1964년 조선작가동맹 상무위원을 역임한 북한 영화계의 거물이었다. 당시 정보기관들은 그의 형 때문에 주동진을 지속적으로 감시하였고, 주동진은 이러한 상황을 견디다 못해 이민을 택했다는 것이다. 미국으로 이주 후 시네마 엠파이어라는 영화의 수출입사를 운영하였다. 1990년에는 남북영화제를 개최하는데 집행위원장의 역을 맡았고, 1996년에는 북한과의 합작영화를 추진하기도 하는 등 남북한의 영화 교류에 힘을 쓰기도 했다. 뉴욕에서 거주 중 2003년 작고했다. 주동진 은 한국영화의 전성기이자 정부에 의해 인위적인 메이저 기업화가 유지되었던 1960년대에서 70년대 사이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제작자였다. 그는 기업적인 배경, 혹은 자산, 심지어 영화업의 특별한 기반도 없이 짧은 시간 내에 영화계의 중심에 진입했던 특출한 인물이었다. 그는 달변가이자 비상한 수완을 가진 인물로 평가되며, 당대 영화계의 브레인으로 인정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공은 단순히 개인의 능력이라 볼 수는 없다. 박정희 정권기 정부의 인위적인 메이저 기업화 정책, 즉 일단 진입하면 특혜를 누릴 수 있는 독과점 시장이라는 상황이 개인의 능력과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보는 것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 글: 조준형(한국영상자료원 연구부장) KMDb 정보 주동진 추천 VOD < 불나비 >(1965) | < 시발점 >(1969)
1. 시대물에서 괴기물까지 50편 연출 권영순 은 1956년 시대물인 < 옥단춘 >으로 감독 데뷔했다. 그는 1981년 < 사향마곡 >이란 영화까지 25년간 50편을 연출했다. 한국적인 영화제작 상황에서 영화감독이 특정 장르를 고집할 수 없기도 하지만 권영순은 통속시대물로 감독 데뷔해서 코미디물, 액션물, 검객물, 반공물, 문예물, 괴기물, 멜로물 등 다양한 장르를 체험하고 선도했다. 그만큼 그는 영화감독으로서 행동 구역이 넓고 시각이 트였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반대로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그러면 권영순은 왜 시대물로 감독 데뷔를 했는가? 나는 시대상을 통해 그 필연성을 찾을 수 있었다. 1956년은 한국영화사적으로 성장기였다. 1953년 한국전쟁은 휴전으로 포성이 멈췄다. 사회가 안정으로 접어들면서 한국영화도 차츰 제작 열기를 더 해갔고 1954년부터 57년까지를 성장기로 부른다. 이 기간 4년 동안 총 100편의 한국영화가 제작되었는데 1956년에 30편이 개봉되었다. 1956년 개봉된 한국영화 30편 둥 절반이 역사물과 통속시대극이었다. 전창근 의 < 단종애사 >와 < 마의 태자 >, 윤봉춘 이 < 처녀별 >과 < 논개 >, 이규환 의 < 심청전 >, 김소동 의 <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 >, 정창화 의 < 장화홍련전 >, 김기영 의 < 봉선화 >, 안종화 의 < 천추의 한 >과 < 사도세자 >, 이병일 의 < 시집가는 날 >, 홍일명 의 < 벼락감투 >, 신현호 의 < 숙영낭자전 > 등 13편과 권영순 의 데뷔작 < 옥단춘 >을 합쳐 14편에 달했다. 1956년은 정부가 서울로 환도했지만 전흔의 상처는 그대로 남아있어 멜로물과 청춘물이 자리매김하기 전 관객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르로는 역사물과 통속시대물밖에 없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권영순 도 1956년 < 옥단춘 >으로 감독 데뷔한 것은 이런 영화 흥행의 흐름을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 <옥단춘>은 온갖 유혹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의연히 절개를 지킨 평양기생 옥단춘의 생애를 그렸는데 윤인자 가 타이틀 롤을 맡았고 김진규 , 최봉 이 공연했다. 데뷔 이듬해인 1957년 권영순 은 김광주 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멜로물 < 나는 너를 싫어한다 >와 라이트 코미디인 < 오해마세요 > 두 편을 감독했지만 흥행적으로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1958년 연출한 코미디물 < 오부자 >가 흥행에 대성공을 함으로써 일약 유명감독으로 단숨에 가치를 올렸다. 영화 <오부자>는 화목하게 살아가는 오부자(五父子) 가정의 아들 4형제가 합동결혼식을 올리게 된다는 내용의 코미디물로 출연도 이종철 , 김희갑 , 구봉서 , 양훈 등 코미디언들 일색이었다. 이 영화는 1958년 4월 19일 서울 국도극장에서 개봉되어 흥행바람을 일으키더니 그 여세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제작자 권철휘 는 큰 돈을 거머쥐었고 감독 권영순도 스타덤에 올랐다. < 오부자 >를 감독한 1958년부터 1965년까지는 권영순 으로서는 감독 절정기였다. 감독 활동은 1981년까지 했지만 1958년부터 1965년 가지 이 기간 동안 권영순은 < 흙 > < 표류도 > 같은 문예물에 도전했고 대륙활극 < 정복자 >로 흥행의 줏가를 높였으며 역사물 < 진시 황제와 만리장성 > 에서는 당대의 톱스타 김진규 . 김지미 . 김승호 . 박노식 등을 총출연 시켰으며 흥행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간 동안이야 말로 권영순 의 연출 감각은 최고 궝영순은 영출자로서 상승 곡선을 그었으며 다양항 장르를 체험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2, 폭 넓은 연출세계- 다양한 장르 섭렵 권영순 감독은 세 번째 작품 < 오부자 >가 흥행에 성공 했지만 코미디물이란 한 장르에 집작하지 않고 다양한 장르 섭렵에 들어간다. 그 당시 한국영화 게작계 풍토나 감독 자신의 안전 항해를 위하여 계속해서 몇 작품 코미디물을 연출할만한데 권영순은 안주정착하지 않고 재빨리 방향을 바꾼다. 네 번재 작품으로 멜로물 < 한 많은 청춘 >을 감독한다. 이 영화는 소매치기와 그의 도움을 받는 여대생과의 순정 연애를 담았는데 황해. 김미선이 주연했고 안성기 의 아역배우 데뷔작이기도하다. 이때부터 권영순 감독은 거침없는 다양한 장르 섭렵에 돌진한다. 한국영화 감독 중에서 권영순 만큼 여러 장르의 영화를 연출한 감독도 드물다. 통속시대물로 데뷔해서 코미디물, 멜러물, 문예물, 반공물, 앳션물, 검객물, 역사물에서 말년의 괴기물에 이르기까지 권영순 만큼 다양한 영화 쟝르를 소화한 감독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연출시야가 넓고 감각이 빠르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는 작업이다. 그의 연출 작품을 장르별로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 통속시대물 : < 옥단추 >(56) < 옥난 공주와 활빈당 >(60) < 가야금 >(64) * 코미디물 : < 오부자 >(58) < 오해 마세요 >(57) < 8통8반 여반장 >(64) * 멜러물 : < 나는 너를 싫어한다 >(57) < 한 많은 청춘 >(58)< 언제까지나 그대만을 >(59) < 가는 봄 오는 봄 >(59) < 양지를 찾아서 >(59) < 장미의 곡 >(60) < 그리운 얼굴 >(60) < 정과 정 사이에 >(72) < 모정 >(72) <축배> < 산녀 >(73) < 불꺼진 창 >(76) * 역사물 :< 진시 황제와 만리장성 >(62) < 에밀레종 >(68) * 반공물 : < 국회 푸락치 >(74) * 문예물 : < 흙 >(60) < 표류도 >(60) *액션물 : < 목숨을 걸고 >(62) < 남아 일생 >(65) < 무적자 >(66) < 의리에 산다 >(70) < 6인의 난폭자 >(70) * 검객물 : < 비호 >(69) < 쌍용검 >(69) < 무정검 >(69) < 백면검귀 >(69) < 유정검화 >(70) < 복수의 마검 >(70) < 다섯개의 단검 >(71) * 괴기물 : < 대지옥 >(72) < 반수반인 >(75) < 용사왕 >(76) < 사향마곡 >(81) 권영순 이 연출한 50편의 작품을 살펴보면 기본이고, 반공물에, 액션물, 검객물에다 특히 이광수 원작소설 < 흙 >과 박경리 원작소설 < 표류도 > 2편의 문예물이 눈에 띈다. 그리고 권영순 감독은 말련에 괴기물에 심취하여 여기에 매달린 흔적이 역력하다. 그리고 한 때는 다작 감독이기도 했다. 1960년과 1969년에는 한 해에 5편의 영화를 감독하기도 했다 한해에 최고로 10편의 영화를 연출한 한국 감독이 있기도 하지만 한 해에 5편 연출도 대단한 다작으로 봐야 한다. 권영순 감독의 다작과 1970년 전후해서 낮은 제작비의 검객영화를 빠른 기일 내에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빠른 작업 속도가 큰 몫을 했다. 권영순 감독의 현장 작업속도는 영화계에서 최고로 꼽는 기능인이었다. 그가 빨리 작업을 진행한 날은 하루 주야 120커트를 촬영할 정도였다고 그의 조감독들은 증언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3, 현장의 고집 센 기능주의자 권영순 감독은 촬영현장에서 고집 센 독재자였다. 그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작업 진행속도가 빠른 만큼 감각이 눈부실 정도로 빨랐다고 한다. 그만큼 두뇌의 순발력과 회전이 팍팍 돌아가 촬영 현장은 <레디 고> 소리가 거침이 없었다. 그대신 권영순 감독은 촬영현장에서 스탭들의 조언을 철저히 외면하고 배격하는 고집 센 독재자였다고 한다. 그는 조감독이나 촬영기자, 조명 기자의 조언을 일체 듣지 않고 자지 고집대로 밀고 나갔다고 한다. 성격이 과격하고 신경질이 많은 권영순 감독이었지만 신통하리만큼 현장 촬영에는 한 치의 착오도 없었다고 당시의 조감독들은 증언했다. 그이 현장 고집은 유명해서 조감독이 조언하면 ''너가 감독되면 그렇게 하라''고 일축했다. 하기야 이런 고집과 뚝심이 없었으면 어떻게 하루 주야 120커트를 촬영했겠는가? 따라서 제작자들에게 권영순 감독의 인기는 최고였다. 촬영 속도가 빠른 만큼 제작 기간이 단축되고 제작비가 절감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촬영현장에서 진행속도가 빨라도 배우들의 연기지도는 권 감독ㅇ 몸소 시연을 해보일 만큼 적극적인 연출을 했다. 특히 액션물에서 격투 신은 몸을 아끼지 않고 연기지도를 했다고 한다. 이런 현장에서 열정이 촬영이 끝나면 엄습하는 허탈감을 떨치지 못한 탓인지 촬영장 밖에서는 술을 말술로 마셨다고 한다. 촬영장 안에서는 뜨거운 열정의 고집센 독재자였고 일상에서는 술을 사랑해 말술을 사양하지 않은 권영순 감독은 1992년 5월 23일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1923년 출생이니 69세로 일생을 마감했다. 여운이 남은 아쉬운 죽음이었다. 경북 안동 출생으로 본명은 권영계(權寧桂). 일본대학 문학부 졸업. 유족으로는 부인과 스튜디어스 출신 외동딸이 남아 있다. 김화(영화평론가) / 2002년 <프로필> 1923년 3월 9일 경북 안동 출생 1992년 5월 23일 사망 1956년 < 옥단춘 >데뷔 <작품명> 1956 옥단춘 1957 나는 너를 싫어한다 / 오해마세요 1958 오부자 / 한많은 청춘 1959 언제까지나 그대만을 / 가는 봄 오는 봄 / 양지를 찾아서 1960 흙 / 표류도 1962 진시황제와 만리장성 1965 모녀봉 1966 무적자 1968 풍운의 임난야화 1969 무정검 / 백면검귀 1970 유정검화 / 의리에 산다 / 복수마검 / 육인의 난폭자 1971 다섯개의 단검 1972 정과 정 사이에 / 모정 / 대지옥 1973 산녀 /축배 1974 국회프락치 1975 인사여무 / 태백산맥 1976 불꺼진 창 1988 칠삭동이의 설중매 등 50여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