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삭의 몸으로..엄마의 선물
- 제작년도
- 2010
얼마 전 2018 시네마테크KOFA가 주목한 영화 공개되었다. 선정위원이 고른 리스트 에 빠져 아쉬운 한 편은 무엇이였을까? 시네마테크KOFA 기획전 (2019.2.16~28)과 함께 오늘부터 일주일에 한편씩 그 영화 리뷰 연재 [KOFA 10 Best + 1]을 시작합니다. 이광국 감독의 <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 >은 호랑이의 ‘어흥’ 포효처럼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를 담은, 내게는 2018년의 한국영화 중 한 편이다. 제목은 창작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작품의 인상을 단순하고 짧게 전하는 게 보통이다.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은 인상보다는 내용과 형식에 관한 힌트를 개성적으로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영화들의 ‘시장 친화적인’ 태도에 반(反)하는 의지가 충만하다. 진짜 호랑이거나 아니거나 처음 볼 때는 그래도 설마 호랑이가 직접 언급되거나 등장하지는 않겠지, 예상했다. 짐작이 무색하게, 여자 친구 현지( 류현경 ) 집에 군식구로 사는 경유( 이진욱 )가 아침 식사를 하던 중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묻는다. 현지 왈, “뉴스 보니까 호랑이 한 마리가 동물원에서 탈출했대.” 호랑이가 탈출했다고! 근처에서 울음소리까지 들렸다고!! 그런데 경유와 현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일상적인 톤으로 대화를 이어간다. 도대체 왜? 바깥에서 호랑이가 날뛴다고 한들 그보다 무서운 현실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거나, 아니면 경유를 비롯하여 주요 인물의 마음속에 가둬두었던 ‘호랑이’의 마음이 폭발(=탈출)하여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거나, 그러니까, 사실이거나 상징이거나, 아니면 둘 다이거나. 꿈과 현실을 뒤섞고, 극 중 극의 구조를 활용했던 이광국 감독의 전작 < 로맨스 조 >(2011)와 < 꿈보다 해몽 >(2014)을 고려할 때, 호랑이의 의미는 어느 하나에만 기울지는 않을 터다. 현지의 부모님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경유는 아직 결혼하기 힘든 형편(“나 어제 일 잘렸어”)이 부담스러워 집을 나온다. 친구 집에서 신세 좀 질까, 근데 문전박대당하고, 추운 밤 사발면에 의지해 대기하다가 겨우 한 건 잡은 대리운전 고객이, 글을 포기한 자신과 다르게 작가로 등단한 전 여자친구 유정( 고현정 )이고, 그로 인한 패배감을 풀어보려 찾아간 현지는 글쎄 경유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이사를 떠났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질 것 같은, 억세게 풀리는 거 하나 없는 경유에게 차가운 현실이야말로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과 다를 바 없다. “다른 대리 기사 불러줄게”(경유), “아니야 네가 해줘”(유정), “내가?”, “좀 불편한가?”, “아니” 손대면 톡하고 터질 것만 같은 억울한 심정을 어떻게든 참아보려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단답형의 대답으로 애써 마음을 채비하는 경유의 심리 상태는 유정의 차를 몰고 가는 라디오 뉴스 방송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탈출한 호랑이의 행방이 묘연해 시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동물원 관계자들은 호랑이와 마주치게 되면 움직이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죽은 듯 움직이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데요.’ 손님이거나 아니거나 최선을 다해 죽은 듯 하려는 경유의 마음은 대리기사로 손님을 맞이할 때마다 최선의 의미가 무색하리만치 최악으로 향한다. 대리기사 주제에 왜 손님을 기다리게 하느냐는 둥, 처음 탈 때는 멀쩡했는데 잠에서 깨어나 확인하니 왜 차에 흠집이 있냐는 둥, 지갑에 돈이 없다며 잠시 기다리게 한 후 연락을 끊는 둥, 운전 노동을 마친 후 경유가 손에 집어 드는 건 요금 대신 손님들의 경멸 어린 시선과 이에 따른 치욕과 그래서 참을 수 없는 분노다. 어쩌다가 받게 된 돈도 유정의 경우처럼 바닥으로 떨어진 경유의 자존감을 더욱 비참하게 하는 굴욕감의 형태다. 호랑이로 사실과 상징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 영화의 특징은 손님을 경유의 대척점에만 두는 것이 아니라 경유의 또 하나의 정체성으로 기능하도록 한다. 대리기사일 때 경유는 손님을 받는 입장이지만, 마땅한 거처가 없어 그에게 묵을 곳을 제공하는 이들에게는 손님의 위치다. 후자로서 경유는 그 자신이 경험한 손님들처럼 불편한 존재다. 그렇지 않았으면 현지는 왜 경유 몰래 이사를 한 것이겠으며 친구는 또 왜 문 앞에서 모질게 대하며 경유를 집에 들이려고 하지 않은 걸까. 진실은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사실을 달리하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갈수록 사는 게 힘들어” 경유에게 이 말은 소설가의 꿈을 포기하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은 생존의 개념에 가깝다. 단편 소설을 완성해야 하는 유정에게는 마감일을 훌쩍 넘겼지만, 아직 첫 문장조차 쓰지 못해 머리를 쥐어뜯을 수밖에 없는 창작의 고통을 의미한다. 삶이 자기에게만 불공정하게 느껴진다면, 그래서 혼란하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질서의 양면성을 하나의 입장만 취해 바라본 까닭이다. 갈수록 사는 게 힘들다는 말은 대리운전 중 자살 시도하는 여성(김예은)을 구한 경유에게 경찰(정승길)이 전한 얘기 중 일부다. 경찰은 그러면서 “두 사람을 구했어요” 하자 경유는 그 여성이 만삭의 상태였다는 걸 알고 놀란다. 이의 설정에 관해 이광국 감독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사회적으로 무능력한 경유가 누군가에게는 중요한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요지의 답변을 했다. 나는 그에 더해 이 세상이 품고 있는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질서에 관한 은유라고 말하고 싶다. 이는 이광국 감독이 자신의 영화에서 취하고 있는 형식이 작동하는 원리다. 현실이거나 초현실이거나 우리가 사는 세상이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건 만삭의 여인처럼 이면 혹은 행간을 품고 있어서다. 호랑이의 동물원 탈출 소식을 전하면서도 이 사실을 가지고 경유의 차가운 현실을 은유하는 이 영화의 서술 방식은 바로 그런 세계의 질서를 내재한다. 창작이란 무엇인가, 어떤 면에서 <호랑이보다 차가운 겨울손님>은 창작의 동력을 잃은 경유가 다시금 어떻게 펜을 들어 소설을 쓰게 되는지를 따라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단편소설 작업이 지난한 유정도 이에 해당할 수 있겠다. 물론 경유와는 다른 형태다.) 경유가 글쓰기 작업을 한동안 포기하면서도 유일하게 버리지 못한 소설이 있다. 『노인과 바다』다. 『노인과 바다』는 노인 산티아고가 오랜 기다림 끝에 잡은 청새치를 끝내 뼈대만 남긴 채로 가져온다는 내용으로 유명하다. 소설의 노인처럼 경유도 현재 몸뚱이만 남은 정신적인 뼈대의 상태다. 여자 친구에게 버림받은 것은 차치하고, 유정이 실은 경유가 쓴 과거의 단편을 고쳐 쓸 목적으로 연락한 것을 알자 올라오는 화를 억누를 수가 없다. 짐도 챙기지 못하고 유정의 집에서 나와 추운 거리를 걷자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차원을 넘어 이제는 허무한 상태다. 누군가에게 삶의 허무는 인생의 끝을 의미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더는 떨어질 수 없는 상태가 반동이 되어 새로운 시작의 계기로 작용한다. 경유는 후자의 경우로, 결과는 허무일지라도 이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은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유의미한 삶의 재산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소설을 다시 쓸 노트와 함께 구입한 담배에 불을 붙여 폐로 한 모금 빨아들인 연기는 차가운 현실처럼 쓰리다. 그래도 이를 숙성해 밖으로 내뿜을 때는 부연 연기일지라도 어떤 형태를 띤다는 점에서 창작을 향해 퍼지는 의지이기도 하다. 경유가 구한 여인은 경유 자신의 창작욕을 구원한 일종의 다른 판본이기도 하다. 창작을 남들이 보지 못하는 살점 없는 세계의 질서에 구체적인 살을 부여하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경유에게 남은 건 실체와 마주할 용기다. 그리고 기어코 등장하는 탈출한 호랑이의 정체. 이것은 호랑이인가, 호랑이의 탈을 쓴 인간인가. 당신은 이 장면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나는 현실과 초현실을 하나로 만들어 보이지 않는 세상의 질서를 구체화한 이광국 감독의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 그 이상의 무엇을 보았다. 뻔한 한국 대중영화의 울타리에서 탈출한 대담한 상상력을 말이다.
휴머니즘의 길을 찾아가는 순례의 여정 < 기쁜 우리 젊은 날 >(1987)에서 영민은 짝사랑하던 혜민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오랜 시간 인내하며 기다림을 견뎌내야 했다. 그리고 같은 해 연말, 크리스마스이브에 개봉한 < 안녕하세요 하나님 >(1987)에서 (마찬가지로 배우 안성기가 연기한) 청년 병태는 경주의 첨성대를 보기 위한 여행길에 나선다. 전자가 오랜 시간의 흐름을 경유한다면, 후자의 서사는 장소와 공간의 이동을 통해 전개된다. 얼핏 보면 상반된 면을 보이는 이 두 영화는 사실 배창호 (裵昶浩: 1953~)라는 감독의 세계관 안에 하나로 수렴되는 동전의 양면들이다. 사뭇 달라 보이긴 하지만 이 두 영화는 시간을 통해서든, 아니면 공간을 통해서든 일종의 긴 탐색의 여정을 다루고 있으며, 이를 통해 인물들은 ‘사랑’이라는 가치에 눈뜨게 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소풍 하루 전날 뇌성마비에 걸려 몸져누운 병태는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기 위해 아버지 몰래 집을 나선다. 그에게 있어 경주행은 유년기에 멈춰버린 인생의 시간을 되찾기 위한 꿈의 여정이다. 그러나 장애의 몸에 홀로 여행을 떠나는 건 쉽지 않다. 단순히 서울역을 찾는데도 버스를 잘못 타고 길을 헤매는 그에게 조력자 역할로 시인 한민우, 무임승차한 열차에서 우연히 만난 춘자가 동행으로 붙는다. 인물의 설정은 다르지만 <안녕하세요 하나님>의 기본적인 이야기 구조는 감독의 성공작 < 고래사냥 >(1984)의 또 다른 변주에 가깝다. 실연의 고통을 달래고자 무작정 길을 나서 방랑하던 병태는 구체적인 목적지를 얻으며, 거지 왕초 민우는 시인으로 바뀌었지만 병태를 돕는다는 점에서는 같으며, 사창굴에 빠져들어 삶의 험난함을 겪었던 춘자는 홀로 만삭의 몸을 끌고 다니는 미혼모로 바뀌어 있다. 여행은 배창호 감독의 필모그래피 전반을 관통하는 중요한 라이트모티프(Leitmotiv)이다. 배창호 영화에서의 인물들은 여행(또는 방랑)을 나서서 고난과 역경을 거친 뒤 성장 내지 각성을 얻고 돌아오는 신화-동화의 서사적 구조 속에서 작동한다. 여행은 <고래사냥>처럼 성장과 성숙의 과정이거나, < 황진이 >(1986), (일견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연상케 하는) <꿈>(1990)처럼 종교적 깨달음의 추구이기도 하며, 때로는 < 적도의 꽃 >(1983)의 미스터 M(한민우와 더불어 이명세 의 < M >(2007)에서 재활용되는 이름)이 선영의 죽음을 겪고, 한국과 멕시코, 미국으로 계속 이동하는 < 깊고 푸른 밤 >(1984)에서 백호민이 끝내 자신이 추구하던 성공이 허망한 것이었음을 깨닫는 바와 같이 냉혹한 현실 인식 내지 자기 성찰에 직면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종국에 맞는 상황이 다를 뿐이지, 배창호가 만든 일련의 영화들은 가치관에 대한 탐색의 과정을 일관되게 추구하고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 <안녕하세요 하나님>은 배창호식 로드 무비 중 가장 낙관적이고 따스한 정감을 지닌 버전이며, 지금에 와서도 눈여겨볼 만 한 보편통시적인 지점을 관통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안녕하세요 하나님>의 주인공들은 사회의 정상성 속에 편입되지 못한 채 주변부를 맴도는 방외인(房外人), 시대의 소수자(minor)들이다. 병태는 뇌성마비 장애를 앓고 있고, 춘자는 처음엔 시댁으로 간다고 했지만, 실은 남자에게 속아 이용당한 뒤 홀몸 아닌 몸으로 버려진 미혼모(그녀가 정표로 간직하던 보석은 전당포에서 보통의 유리 조각으로 판명된다.)였으며, 보헤미안 시인 민우는 원래는 교사 출신으로 합창 대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버스 전복사고로 학생들의 죽음을 겪고는 자취를 감춘 불행한 인물이었음이 드러난다. 상흔(傷痕)을 안고 살아가는 소수자들의 연대. 영화는 이러한 인물들의 사연을 여정이 진행되는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 서서히 드러내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극의 흥미를 잃지 않게 하고, 각 인물의 자아 찾기, 인간성 회복과 깨달음의 여정에 동참하도록 유도한다. 여행 중 일행으로서 가족적 연대의식을 형성한 병태 일행은 각자의 소중한 것을 조금씩 희생하면서 서로를 배려하고자 한다. 춘자는 만삭의 몸임에도 자신이 굶는 대신 병태와 민우에게 자장면을 먹이고, 병태는 경주에 가서 그림을 그릴 물감을 전당포에 맡겨 일행을 위한 돈을 마련한다. 이러한 자기희생과 배려의 행위는 일행을 배불리 먹이고자 호텔 레스토랑에서 속임수를 쓰는 민우의 행동에서 정점으로 치닫는다. 무임승차로 역에 붙잡혔던 병태 일행이 서로를 부축하고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의 롱테이크, 시골 학교 교실에서 민우의 풍금 연주에 맞춰 정상적인 몸으로 춘자와 춤을 추는 걸 몽상하는 병태의 환상은 불완전한 소수자들이 서로를 돕고 보듬으며 난관을 헤쳐나가는 영화의 인간미 넘치는 감성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장면이다. 민우의 풍금 연주에 맞춰 정상적인 몸으로 춤을 추는 병태와 춘자 이와 같은 인정(人情)의 베풂은 주인공 일행 사이에서만 이뤄지지 않는다. 병태 일행이 여행 중에 만나고 스쳐 지나는 주변 인물들은 때때로 역무원처럼 박정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버스를 잘못한 병태를 챙겨주는 우이동 버스 종점의 기사들과 샌드위치 노점 아저씨, 숙직 중 병태 일행을 맞아 잠자리를 제공하는데 그치지 않고 야식으로 감자를 대접해준 학교 선생님, 일행을 받아들이고 대접해준 환갑 잔칫집(<고래사냥>에처럼 스틸컷으로 전환되는 연출은 훗날 이명세의 <M> 에서도 그 영향을 찾을 수 있다.), 병태의 물감을 받고서 선선히 돈을 내준 전당포 주인, 비 내리는 날의 이삿짐 트럭, 병태와 춘자를 돕고자 일어선 시외버스 안의 승객들에 이르기까지, 이방인을 환대할 줄 알며, 그들의 여정을 도와주고 격려해주는 선량함을 품고 등장한다. 소수자에 가해지는 정상적 사회 일반의 차별과 폭력에 초점을 맞추기 마련인 통속적 피해자 서사와는 사뭇 궤적을 달리하는, 당대의 관객에게 대안적 사회상을 영화적 유토피아로써 제시하고자 하는 배창호식 휴머니즘의 정수를 엿볼 수 있는 대목들이다. 여행 중 길과 사람의 관계성에 주목하는 배창호식 로드무비의 휴머니즘은 경주를 지척에 두고 춘자가 출산하는 헛간 시퀀스에서 종교적 차원으로까지 비약한다. 이 지점에서 경주로 향하던 병태 일행의 여행은 예수 탄생 직전 요셉과 마리아가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기독교 신화의 순례와 치환된다. 예수를 낳은 성모 마리아처럼 헛간에서 아이를 출산하는 춘자의 주위에서 병태와 아이들은 (마치 페데리코 펠리니의 < 카비리아의 밤 >(1957) 엔딩에서 줄리에타 마시나를 둘러싼 광대들처럼) 노래하고 행진한다. 화사한 촛불 조명과 필터 처리로 연출된 병태의 환상과 더불어 이 장면은 유영길 촬영감독의 섬세한 조명 처리를 통해 낭만적이고 상징적인 순간으로 그려진다. 실내의 노란 빛은 차츰 문과 나무 벽 틈 사이를 관통해 안으로 비치는 신비로운 푸르스름한 빛으로 대체되며 일순간 신화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에 이른다. 현실적인 상황으로는 차별받기 십상인 미혼모의 아기는 구세주의 탄생과 동일시되며 축복받는 것이다. 이 아기는 병태 일행과 그들을 도와준 사람들 모두의 인정이 한땀 한땀 모여 빚어낸 사회적 사랑의 결실이다. 아이가 구원을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아이가 바로 구원의 산물이자 징표이며, 그것으로 세상은 이미 구원받은 것이다. 신화적 분위기의 춘자의 출산 장면 <안녕하세요 하나님>의 여행은 서울과 경주라는 출발점과 종착점을 갖는다. 그러나 목적지에 도착하는 여행은 실상 실패한 여행이다. 목적지를 향한 여행은 진행되면서 여행자의 신체와 의식, 삶을 변화시키며, 종국에는 목적지가 아닌 과정 자체가 중요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토록 선망하던 첨성대에 도착했음에도 (배창호 영화의 트레이드마크 중 하나인 벤치에 앉은 채) 침울해 보이는 병태의 표정은 이러한 여행의 역설을 잘 보여준다. 정작 중요했던 건 첨성대가 아니라 그에 도달하기까지 겪었던 다양한 사건들, 다양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 춘자와 병태는 일행을 떠났던 민우와 다시금 경주에서 재회한다. 지저분한 머리와 수염을 깔끔히 정리하고 다시금 교사로서 풍금을 연주하는 민우의 모습은 “경주에는 왜? 거긴 폐허와 무덤뿐인데”하던 극 초반의 모습과 대비를 이루며 그가 여행의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본연의 자아와 인간미를 회복했음을 보여준다. 이때 유아기적 순수성을 은유하던 병태의 노란색 모자는 견학을 온 유치원생들 모자의 노란색과 포개지며 봄날의 개나리꽃과 같은 화사한 분위기를 빚어낸다. 춘자, 병태 그리고 유치원생들 동시대 한국영화계는 열린 영화’의 개념을 주창하며 < 성공시대 >(1988)로 풍자적 리얼리즘의 전위에 섰던 장선우 , < 칠수와 만수 >(1988)로 사회적 리얼리즘을 제시한 박광수 의 등장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배창호 감독은 인간에 대한 애정 어린 시각에 입각해 특유의 낭만주의로 자신의 영역을 확고히 정립했다. 때론 이러한 감독의 성향은 진보적 평자들의 시선에서는 몽상적이며 현실의 정치적 문제를 다루지 않고 안전한 지점에 안착한다고 비판받을 소지가 다분하다. 또한 오늘날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안녕하세요 하나님>의 정서는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어떤 점에서는 불가능하다 싶을 정도로 순수하며 인정이 넘친다. (또한 별개의 논의를 요구하는 바이지만, 여성 캐릭터를 남성에 의한 구원을 해야 하는 대상적 존재로서 그리는, 배창호 필모그래피 전반에 걸쳐 일관되는 감독의 여성관은 현대의 관점에서는 다소 걸리는 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는 돌이켜보면 영화를 바라보는 지금의 시대상이 각박해졌다는 방증인 동시에, 한국영화의 사회적 상상력이 더 이상 유토피아적 사회상, 공동체와의 유기체적 관계성을 그려낼 수 없을 만큼 빈곤해지고 황폐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배창호 영화의 낭만주의는 암울한 시대상을 포장하고 뒤덮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로부터 상처 입은 당대 사람들의 내면적 치유를 갈망하고, 더 나아가 인간적 삶이 가능한 대안의 사회, 대안적 공동체의 잠재적 형태를 제시하고자 했다고 보아야 감독의 본의에 더욱 근접한 해석이 될 것이다. 그중에서도 <안녕하세요 하나님>은 장애인(병태), 피해자로 내몰린 여성(춘자), 사회적 트라우마를 겪은 지식인(민우)을 주인공으로 함과 아울러, 언제든지 소수자들을 환대할 준비가 되어있는 유쾌한 동료들, ‘도래할 민중’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30년 넘는 시간의 공백을 뛰어넘어 오늘날의 관객에게 다시 발견되고 재해석될 여지를 남긴다. 세월호 사건의 증후를 겪는 한편, 페미니즘,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의 문제가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지금, 유토피아적 상상력을 봉인 당한 채 피해자 서사와 디스토피아에 주박된 오늘날의 한국영화계에 있어, <안녕하세요 하나님>의 낭만주의, 유토피아적 비전은 차츰 잊혀가고 죽어가던 어떤 가능성을 일깨울 하나의 계기가 되어주지 않을까 싶어지는 것이다. 2018년 9~10월 VOD 기획전 <길 위에서 답을 찾다: 로드무비> 상영작 -> 바로보기
홍길동이 시골 도로에 길을 잃은 채 서 있는 장면을 보며 이것은 확실히 < 짐승의 끝 >(2008)의 상업적 연속면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과거와 현재로부터 미래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애쓰는 주인공이 낯선 사람들과 동행하는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조성희의 데뷔작을 떠올리게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은 확실히 조성희 의 영화고, 지금 한국 영화계에서 조성희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다. 물론 단편 < 남매의 집 >(2008)에 열광했던 당신은 장편 데뷔작 < 짐승의 끝 >(2010)을 보고 길을 잃었거나, < 늑대소년 >(2012)과 <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에 낙담했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조성희 의 영화가 점점 데뷔작의 근사한 악몽을 잃어가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오히려 조성희의 영화가 데뷔작의 악몽을 더욱 본격적으로 풀어나가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그걸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짐승의 끝>을 다시 돌이켜 볼 필요도 있다. < 짐승의 끝 >은 부조리한 SF 재난 영화다. 아이를 낳기 위해 고향으로 가던 만삭의 여자는 이상한 남자를 만난 뒤 쓰러진다. 일어나보니 세상은 멸망했다. 그녀는 길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모두가 이상하다. 밤은 계속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짐승의 소리가 들려온다. 이것은 한국영화의 부조리극 속에 던져 넣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고,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키워드로 해석할 수 있는 영화다. 그런데 나는 <짐승의 끝>을 보자마자 80년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초창기의 스필버그 사단의 영화들이 강하게 떠올랐다. 사실 70년대 후반에 태어난 한국 감독으로서 80년대 초중반 스필버그 사단과 당대 할리우드가 만들어 낸 상업영화의 영향력을 받지 않았을 도리는 거의 없다. 어린 시절 B급 SF/호러영화들, 그리고 TV 시리즈 < 환상특급 >을 보고 자란 세대의 문화적 결과물에는 어떤 동일한 무의식적 인장이 찍혀있다. 그건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당시 스필버그 사단의 장르 영화들을 다시 꺼내보는 순간 당신은 적잖게 놀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지금 할리우드가 조 단테의 < 그렘린 >처럼 화면 바깥의 피비린내가 자욱한 영화를 PG-13으로 개봉할 수 있을까? 스필버그의 몇몇 영화들(특히 <인디아나 존스 2>)은 거의 소년들의 악몽이다. < 늑대 소년 >에서 조성희 는 적극적으로 팀 버튼의 < 가위손 >, 80년대 늑대인간 장르영화 < 하울링 >과 < 런던의 늑대 인간 >, 그리고 스필버그의 < E.T. >를 끌어온다. 그가 <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의 비밀>에서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와 007 영화에 일종의 오마주를 바치고 있다는 것도 거의 분명하다. 그는 이 영화 속 누아르의 관습과 스타일의 표본으로 <말타의 매>를 자주 언급하고 있는데, 나는 어떤 면에서 조성희가 누아르 전성기의 영화들이 아니라 워렌 비티의 < 딕 트레이시 >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도 생각한다. 그런데 조성희 영화의 재미있는 점은 균열이다. 그는 순진무구해 보이지만 오히려 지금의 블록버스터보다 더 B급으로 음침하고 못된 구석이 있던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관습을 2010년대 충무로 상업영화의 관습과 마구잡이로 버무린다. 그것은 타협처럼 보이지만 타협이 아니다. 균열이다. 그리고 조성희는 두 개의 균열을 지나칠 정도로 매끈하게 이어붙이는 데 강박적인 공은 들이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 늑대소년 >과 <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의 비밀>은 80년대 할리우드 영화도 아니고 2010년대의 충무로 영화도 아닌, 홀로 뚝 떨어진 영화가 됐다. 비평가들이 겨우 2편의 상업적 장편영화를 만든 그를 이야기하며 ‘조성희 월드’라는 단어를 애용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지금 다시 < 짐승의 끝 >을 돌아보는 건 꽤 흥미진진한 경험이다. 당시 그는 < 남매의 집 >의 가능성을 이 첫 번째 장편영화에서 제대로 펼쳐내지 못했다는 비평을 꽤 받았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그런 비평들은 조성희 를 아트하우스 영화의 결계 속에서 해석하려고 시도한 탓일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오히려 <짐승의 끝>은 가장 상업적인 대학 졸업영화를 만들어내려는 오락적 결기가 느껴지는 영화다. 이런 음침하고 즐거운 결기를 나는 아마도 극장판 < 환상특급 >(1983)에서 조 단테가 연출한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봤던 것 같다. 그 에피소드의 제목은 ‘이상한 소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