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선
- 감독
- 김수용
- 제작년도
- 1967
- 출연
- 김승호, 신영균, 박노식, 주증녀, 허장강, 남궁원, 남정임, 변기종, 김칠성, 전영주, 김정옥, 지계순, 송미남, 노강, 윤양하, 박철, 최호운, 석귀녀, 고경애, 김용학, 윤신옥
김수용 감독은 1965년에 아동영화 < 저 하늘에도 슬픔이 >로 그해 방화 흥행 1위를 기록하고, 청룡영화상에서 감독상과 작품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곧 이어 개봉한 < 갯마을 >은 평단의 호평과 함께 흥행도 성공하고, 서울시문화상을 비롯하여 여러 영화상에서 감독상과 작품상을 수상했다. 그 전까지 코미디와 멜로를 주로 만들던 김수용은 1965년 성공에 자신감을 얻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계속해서 시도하게 된다. 일명 ‘문예영화’의 시대는 김수용과 함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당시 문예영화는 예술성이 높고 격조가 있다고 인식된 데에다 소설이나 연극으로 인지도가 높아 관객에게 호소하기가 좋은 장점이 있었다. 김수용이 가장 왕성한 창작열을 보여준 1967년은 문예영화의 해이기도 하다. 이 해에 문예영화는 전체 한국영화 제작편수의 20%에 달했고, 대중에게 예술영화로 유통되었던 문예영화가 대중성도 있다는 것을 <갯마을>로 확인한 김수용은 1967년 한 해에만 10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1966년부터 우수영화를 선정하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외화 쿼터를 지급하는 제도가 문예영화의 붐을 이끈 측면이 있지만, 당시 문예영화 현상에는 수익성이라는 요소도 무시할 수 없다. 한해 10편이라는 한국영화 사상 신화적 기록의 시작은 1967년 1월에 개봉한 < 만선 >이다. 그런데 한해 10편이 그저 그런 작품들의 나열이 아니라는 점이 김수용 신화에서 더욱 놀라운 점이다. < 산불 >, < 빙점 >, < 안개 >, < 까치소리 >로 이어지는 스토리의 완결성에 중점을 둔 김수용 문예영화가 한 해에 만들어졌다. 김수용 영화세계에게 1965년이 전환과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1967년은 방향설정과 완숙기라고 볼 수 있다. <만선>과 <안개>는 그런 점에서 김수용 영화세계의 두 방향타를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바로 농어촌 리얼리즘과 도시 모더니즘, 두 개의 방향이다. <만선>은 천승세 작가가 1964년에 발표한 희곡을 원작으로 한다. 이 작품은 발표 당시 자연과 대결하는 한 어민 가족의 굳건한 의지와 비극적 삶을 사실적으로 그린 자연주의 연극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 <만선>은 어부 곰치가 장남과 막내아들에 이어 딸마저 자살해버리면서 세 자녀를 한꺼번에 잃고, 아내까지 정신이상이 되어가는 것을 마주하고 바다로 사라져 버리는 참담한 가족 비극을 각색하면서 엔딩을 바뀌었다. 영화에서는 딸 슬슬이( 남정임 분)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포문을 열고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 목소리는 일련의 사건 이후 바다를 떠나지 않고 일상으로 되돌아간 심경을 전한다. 이로 인해 숙명과 도전, 집착과 벗어남이라는 큰 주제적 갈등 요소가 모호하게 정의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여러 형태의 대립 요소들을 가지고 인간사회의 상징적 축소판으로서 섬마을을 묘사한다. 박정희정권의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끝나고 민정 2기가 시작되는 시점이 1967년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영화 내부로 가지고 와서 살펴보면, 젊음과 방황이 있는 청춘영화 유행이 서서히 저물고 다시 피해의식과 자기연민에 빠진 신파적 감성으로 무장한 멜로드라마들이 60년대 중후반부터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조국근대화라는 떠들썩한 국가적 이벤트에서 밀려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 느끼는 절망감은 과거로 회귀하는 보다 보수적인 양태를 취했다. 다시 말하면, 계층상승의 길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느끼는 소외감과 박탈감이 대중문화에서 연민과 우울의 형태로 표현되는 신파적 감수성의 전면화로 나타나는 것이다. 영화는 어촌마을을 배경으로 아무리 고생해봤자 평생 빚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이를 숙명으로 받아들인 곰치( 김승호 분)가 다시 바다로 나갔다가 아들 도삼( 남궁원 분)을 잃어버리고, 연쇄적으로 비극을 맞이하는 곰치 가족 구성원의 욕망과 좌절을 그린다. 만선으로 돌아와도 선주( 변기종 분)는 과거의 빚을 이유로 몫을 나눠주지 않는다. 곰치의 딸 슬슬이는 어부를 천직으로 알고 성실히 살아가는 연철( 신영균 분)과 사랑하는 사이인데, 여기에 뭍으로 나가 큰돈을 벌어 온 범쇠( 박노식 분)가 끼어든다. 출산한지 얼마 되지 않은 곰치 아내 구포댁( 주증녀 분)은 늘 육지로 나가길 간청했지만 남편의 고집 때문에 물러섰다. 그녀는 장남이 사망하자 아직 갓난아기인 막내아들을 배에 띄워 뭍으로 보내려고 하고, 곰치는 아기를 구하려다가 바다에 빠지고 만다. 아버지와 두 형제,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어머니마저 미쳐버린 상황에서 어촌마을을 지키는 자는 슬슬이뿐이다. 하지만 가난한 어촌마을에서 이런 비극을 마주하는 이는 슬슬이만이 아닐 것이다. 이겨낼 수 없는 좌절의 연속에서도 인물들에게 다시 살아갈 희망이 있을까. 어머니의 품처럼 다시 고요해진 바다를 칭송하는 슬슬이의 목소리에는 체념이 가득하다. 아들들이 사라진 어촌마을에 남은 어머니와 딸, 그리고 인간이 자연에 맞설 수 없음을 경고하는 무당의 모습이 프레임에 채워지는데, 일상으로 다시 복귀한 이들의 광경은 숭고함을 전하며 진한 여운을 남긴다. 인간과 자연의 대결, 빈부간의 갈등, 숙명을 받아들이려는 자와 이겨내려는 자의 갈등 등 묵직한 갈등들이 극단적인 사건들과 함께 펼쳐지다가 서둘러 평화로운 엔딩으로 향하는 것은 조금 갑작스럽게 느껴지지만, 당대의 박탈감과 절망감을 생각하자면 이해가 된다. 바다의 생명력을 자양분으로 다시 일어서는 것 말고 이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사랑이 가득한 어머니에서 두 아들을 잃고 미쳐버린 여인을 연기한 주증녀는 이 영화로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그리고 김수용의 또 다른 걸작인 <산불>로 청룡상 여우주연상을 한 해에 수상했다. 영화는 바다를 벗어날 수도,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던 이들의 서글픈 기록이다. 그리고 이들의 고단한 순간의 풍경은 조국 근대화라는 절체절명의 대의 아래 숨죽이고 있어야 했던 수많은 민초들에게 보내는 연민의 그림이다. >> 만선 고화질 VOD 보러가기 <<
부산에는 1900년 이전부터 극장이 존재했다. 1900년대~1910년대에는 행좌, 송정좌, 변천좌, 부산좌, 동양좌(이후 대흑좌[大黑座]), 질자좌, 욱관, 보래관, 초량좌, 행관, 상생관 등 여러 곳에 극장이 난립하기도 했다. 1920년대 이후 활동사진관을 중심으로 극장이 정리, 재편되었다. 해방 전까지 존속하고 있던 극장을 중심으로 부산지역의 극장과 영화관에 대해서 살펴보자. ① 행좌(幸座), 행관(幸館), 소화관(昭和館) 행좌(幸座)는 부산 남빈정에 있던 극장이다. 1903년 발행된 「부산항시가 및 부근 지도」에 송정좌(松井座)와 더불어 그 위치가 표기되어 부산 지역의 가장 오랜 극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1904년, 부산에서 최초의 활동사진을 상영한 이 극장은 1910년대 들어 활동사진이 큰 인기를 끌면서 활동사진 전용관으로 신축되는데 그 이름을 행관(幸館)이라 했다. 이를 주도한 인물이 부산의 일본인 실력자 하사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였다. 1915년 12월 개관한 행관은 비슷한 시기 활동사진전용관으로 전환한 보래관이나 상생관에 밀려 고전했다. 하지만 1917년 하야가와연예부가 직영하고 이어 1919년부터 나가사키에 근거지를 둔 만카츠(萬活)에서 직영하면서 부산 흥행계에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만카츠 특파원으로 부산으로 건너왔다가 이후 행관을 운영하게 된 사쿠라바 후지오(櫻庭藤夫)는 행관을 중심으로 일본의 중소프로덕션의 영화를 배급하면서 조선흥행계에 큰 주목받았다. 하지만 행관은 개관 15년 만인 1930년 11월 10일, 영화 상영 중 발생한 화재로 전소된다. 큰 피해를 입은 사쿠라바 후지오는 자본금 10만원의 주식회사 사쿠라바상사를 세우고 지상 3층 규모의 최신 영화관인 소화관(昭和館)을 지어 사업을 확장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사쿠라바 후지오, 지배인은 사쿠라바 토시오(櫻庭敏雄)이며 1,05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직후 그 이름을 조선극장으로 바꾸었다. ② 부산좌(釜山座) 1907년 7월 15일 부평정에 만들어진 극장이다. 부산의 대표적 실력자인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를 중심으로 일본인 유지들이 만든 부산연극합명회사에서 설립했다. 개관 당시 가장 크고 호화로운 극장으로, 회전무대를 갖춘 최신의 설비를 갖추었으며 다양한 공연은 물론 활동사진도 상영되었다. 1923년 3월 22일 화재로 소실되어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③ 보래관(寶來館) 1914년 무렵 부산부 행정에 개관한 극장이다. 개관 초기에는 라쿠고(落語)와 같은 연희를 공연하는 요세(寄席)로 활용되었으며 흥행일수도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15년 1월 운영자가 고노(小野)에서 호소미(細見)로 바뀌면서 연중무휴의 흥행을 천명했고, 그해 3월 경성의 황금관을 운영하던 하야가와연예부로부터 텐카츠회사의 필름을 공급받으며 본격적인 활동사진관으로 이용되었다. 1916년 12월 27일 활동사진상설관으로 신축되었고 오사카에 근거지를 둔 스기모토(杉木)상회가 직영하게 된다. 1924년 무렵에는 오카모토(岡本松造)가 운영자로 이름을 올렸다. 1930년 10월 8일에는 영화상영 도중 필름에 불이 붙어 화재가 일어나기도 했다. 1937년 상생관과 함께 건물이 화재에 취약하다는 이유로 당국으로부터 신축을 명령받고 1938년 10월 다시 신축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이와사키 다케지(岩崎武二), 지배인은 이와사키 모모타로(岩崎桃二郞)이다. 객석수는 총 952석이었다. 해방 후 국제영화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④ 변천좌(辨天座), 상생관(相生舘) 변천좌는 1912년 무렵 부산부 본정에 들어선 요세(寄席)이다. 1914년 무렵 좌주는 교야마(京山花丸)였다. 활동사진의 인기가 비등하면서 변천좌는 활동사진관으로 개축을 꾀한다. 1916년 11월 1일 활동사진관 개업을 하면서 이름을 상생관으로 바꾸었다. 개관 초기 닛카츠영화를 상영하던 상생관은 1922년부터는 쇼치쿠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했으며 1925년 쇼치쿠와 공동경영을 시작하며 쇼치쿠 만선(滿鮮) 봉절장이 되었다. 이에 맞춰 당시 관주인 아라이(新井幸吉)는 극장 개축을 추진하여 2개월의 공사 끝에 1925년 11월 15일 새롭게 개관하게 된다. 1933년 11월 무렵 상생관의 관주는 미쯔오 미네지로오(滿生峯次郞)이었으며 1943년 현재 흥행주 역시 미쯔오 미네지로오(滿生峯次郞), 지배인은 미쯔오 타다오(滿生忠雄)이었다. 좌석수는 총 805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사진] 변천좌에서 이름을 바꾼 상생관 ⑤ 국제관(國際館) 부산부 안본정(岸本町)에 위치했던 영화관이다. 1920년 8월 22일 자본금 20만원, 불입금 13만원의 주식회사 국제관에서 설립했다. 대표는 기노시타 모도지로(木下元次郞)이다. 설립 당시 부산지역의 가장 호화로운 극장이었기에 영화상영 외에도 연극장으로 활용되었으며 부산에서 조선영화가 주로 상영되던 곳이다. 1929년 2월 27일 발생한 화재로 전소되었고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⑥ 유락관(遊樂館) 부산부 좌천정에 있었던 극장이다. 자본금 15만원, 불입금 37,500원 규모로, 부산흥산주식회사가 1921년 12월 11일 세웠다. 대표는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였다. 1932년 1월 2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후 재건되지 못했다. ⑦ 태평관(太平館) 부산부 행정 1정목에 있었던 극장으로 1922년 설립되었다. 1923년 부산좌가 소실된 이후 부산의 대표적인 연극전용극장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937년 11월 20일 개축되었으나 1943년 11월 19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사진] 부산 태평관 사진 ⑧ 수좌(壽座) 부산부 목도(牧之島, 지금의 영도)에 있던 극장이다. 1924년 목도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극장설립을 추진하여 1924년 3월 6일 덴도(田頭孝一)를 조합장으로 하는 수좌경영조합이 설립했다. 1926년 행관을 경영하던 사쿠라바 후지오(櫻庭藤夫)가 임대하여 제2행관(第二幸館)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했다. 1932년 다시 수좌라는 이름으로 복귀 했으며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토미가(富賀四郞)이며 객석은 총 341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⑨ 중앙극장(中央劇場), 대생좌(大生座) 부산부 초량정에 있었던 영화관이다. 1929년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와 가나모리 신기치(金森新吉)가 출원하여 1만 4천3백여원의 공사비를 들여 2층 규모로 만들었다. 같은 해 7월 22일부터 공연을 시작했다. 중앙극장은 당대 유명 사기꾼인 호리가와(堀川辰吉郎)의 사기행각에 말려들어 1934년 경매에 붙여졌으며 상생관 흥행주 미쯔오(滿生峯次郞)가 낙찰 받아 이름을 대생좌(大生座)로 바꾸었다. 이 사건은 원 중앙극장 소유주 가나모리가 소유권 이전 말소 소송에서 승소하며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대생좌라는 이름은 이후에도 계속 사용하였다. 일본인 극장이던 이곳에서는 1939년 5월 극연좌가 공연한 적이 있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스기시타(杉下末次郞)이며 총 498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⑩ 부산극장(釜山劇場) 부산부 서정(西町) 1정목에 있던 극장이다. 1934년 11월 5일 개관했다. 가부키를 공연할 수 있는 대극장으로 건축되었다. 연극전용극장이었지만 가끔씩 영화도 상영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영화관으로 활용되었다. [사진] 부산부 서정 1정목에 위치했던 부산극장 ⑪ 대화극장(大和劇場) 부산부 수정정에 있던 극장이다. 1942년 건립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사이조(西條貞利), 지배인은 고야마(小山秀一)이며 객석은 총 55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⑫ 환서좌(丸西座), 앵관(櫻館) 1910년대 이전부터 마산에 있던 극장으로 각종 연예물과 활동사진이 상연되었다. 1925년 당시 지배인이던 무라카미(村上竹次郞)가 천여원의 비용을 들여 내부와 외부를 수리했다. 1932년 자본금 2만원, 불입금 2만원의 마산연예주식회사가 영화관 신축을 위해 매수하여 1933년 5월 마산 경정 3정목에 앵관이라는 극장을 짓게 된다. 영업은 오오츠카(大塚寅吉)가 맡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스미타(住田春三)이며 객석 수는 79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⑬ 도좌(都座), 마산좌(馬山座), 마산극장(馬山劇場) 마산부 도정에 있던 극장이다. 1910년대 설립된 극장으로 보인다. 1918년 활동사진상설관으로 개수되었다. 1922년 무렵까지 영화 상영내역이 확인된다. 이후 마산좌(馬山座)로 개칭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산좌는 1932년 개축하면서 그 이름을 마산극장으로 바꾸었다. 혼다(本田槌五郞)가 건립하였다. 1941년 극장 일부를 수리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혼다(本田槌五郞), 지배인은 혼다(本田宗弘)이었다. 60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으며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⑭ 수좌(壽座), 공락관(共樂館) 수좌는 구마산 지역의 대표적인 극장이다. 1915년 구마산 지역민들이 극장설립을 추진하였으며 1916년 3천원 예산으로 극장을 세우기 위해 주식을 발행하여 조선인 70여명, 일본인 43명으로 주주를 구성하였고 1917년 10월 구마산 지역의 수정에 극장을 설립하고 이름을 수좌라 지었다. 1917년 10월 20일 개관했다. 조선인과 일본인이 함께 사용하던 극장이었다. 하지만 1932년 9월 마산경찰서에서는 장내의 협착, 설비의 부패 등을 이유로 휴관을 명령하고 새로운 극장의 신축 출원을 받았다. 그 결과 마산극장 주인인 혼다(本田槌五郞)가 출원한 극장 설립안이 인가 받아 1935년 구마산 석정 64번지에 공락관이라는 영화관이 만들어진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혼다(本田槌五郞), 지배인은 혼다(本田宗弘)이었다. 47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으며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⑮ 봉래좌(蓬萊座) 통영읍 대정정에 있던 극장이다. 1914년 쓰야마(陶山美賀藏)를 중심으로 주식을 발행하여 설립했다. 1931년에는 하시모토(橋本米吉)가 운영하며 영화관으로 활용했다. 1938년 이후 낙후한 상태로 폐쇄되었던 봉래좌는 1939년 신축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하시모토(橋本公博)이며 500석 규모의 극장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⑯ 통영좌(統營座) 통영읍 길야정에 있었던 활동사진 상설관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1927년 다케타(竹田應吉)가 조합장을 맡고 있었으며 1936년 주주간의 분규로 문을 닫았다. 1937년 봉래좌의 운영자 하시모토가 운영을 맡으며 정상화 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무라카미(村上善藏)이며 480석 규모의 극장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⑰ 영좌(榮座) 경남 진주의 매립지에 지어진 극장으로 1914년 6월 24일 개관했다. 설립자는 고야나기(小柳藤介) 등 진주의 유지들이었다. 개관 1년 후 경남지역의 유력자인 하자마(迫間房太郞)의 땅에 타구치(谷口秀楠)가 부산 행좌를 이전하여 극장을 새로 짓게 되자 활동을 멈췄다. 1917년 해체되었다. ⑱ 진주좌(晋州座), 진주극장(晋州劇場), 동보영화극장(晋州東寶映畵劇場) 1922년 진주부 영정에 있던 극장이다. 진주좌조합에서 설립했다. 설립 이후 오랫동안 진주의 유일한 흥행장이었다. 1936년 2월 서종숙(徐宗淑)이 인수하여 낙후한 극장을 최신의 영화관으로 개축했다. 1940년 동보영화사의 직영으로 바뀌어 이름도 진주동보영화극장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1941년 10월 동보측이 손을 떼면서 서종숙 단독으로 극장을 경영하게 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서종숙(창씨명 平山宗淑)이며 60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⑲ 삼포관(三浦館) 진주부 금정에 있던 극장이다. 진주의 실업가 미우라(三浦仁八)가 1936년 7월 4일 건립하였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미요시(三吉範夫)이며 객석수는 515석이었다. 해방 후 이름을 동명극장(東明劇場)으로 바꾸었다. ⑳ 진해좌(鎭海座), 묘락좌(妙樂座) 진해좌는 진해읍 국천정(菊川町)에 있던 극장으로 1915년 이전에 설립되었다. 1930년 3월 진해 창고에서 영화상영 중 발생한 화재로 소학생 백여명이 소사한 사건이 발생하자 낙후한 시설의 진해좌는 영업 중지 상태가 되었다. 진해좌의 소유주 데즈카(手塚松一)는 극장을 신축하기로 하고 1만원의 경비로 활동사진관을 건설하게 된다. 새롭게 건설된 활동사진관의 이름은 묘락좌(妙樂座)였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데즈카이며 42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이후까지 존속했다. 21. 밀양극장(密陽劇場) 밀양 읍내에 있던 극장이다. 1928년 11월 16일 가나모리(金森新吉)가 밀양역 앞에 설립했다. 1929년 밀양 성내에 조일극장(朝日劇場)이 설립되면서 문을 닫은 것으로 보인다. 22. 조일극장(朝日劇場) 밀양 성내에 건축된 극장이다. 밀양성내동지회에서 세웠으며 1929년 2월 4일 개관했다. 1939년 3월 밀양의 육군기념일 행사가 이곳에서 있었다. 1939년 12월 당시 조일극장의 흥행주 미즈카미(水上至海)가 조일극장 옆에 밀양영화극장을 설립하면서 문을 닫은 듯 보인다. 23. 밀양영화극장(密陽映畫劇場) 밀양 성내에 건축된 영화관이다. 1939년 12월 밀양 조일극장의 흥행주 미즈카미(水上至海)가 세웠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미즈카미(水上至海)이며 27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4. 삼천포극장(三千浦劇場) 삼천포 읍내에 있던 극장이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39년 사천군 육군기념일 행사가 이곳에서 열린 것으로 보아 1939년 이전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시라가와(白川晃)이며, 275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5. 구포극장(龜浦劇場) 구포 읍내에 있던 극장이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43년 필름손실방지와 사고방지를 위해 전국의 영사기를 조사했을 당시 한 대의 영사기로 영사하여 배급정지처분을 받았다. 당시 흥행주는 하라구치(原口淸見)였다. 293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6. 김해극장(金海劇場) 김해읍 대화정에 있던 극장이다. 1929년 김무일(金武日)과 배봉을(裵鳳乙)이 약 8천원의 공사비로 제작하였다. 건평 51평 2층 규모로 9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타케시(武伺吉恒)이며 46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옛 창고를 연상하는 낙후된 시설이었다. 27. 거창좌(居昌座) 거창읍에 있었으며 언제, 누가 세웠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전상길(全相吉, 창씨명 酒井相吉)이다. 그는 양조장 등을 거느린 거창지역의 대표적인 실업인이었다. 지배인은 타마야마(玉山榮秀)이며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8. 울산극장(蔚山劇場) 울산읍 성남동에 있던 극장이다. 1920년대 만들어진 낡은 극장이 울산 역전에 있었는데, 당지 유지들인 김재문 외 5인의 발기로 1936년 현대식 건물로 신축이 추진되었다. 군에서는 1만 5천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극장을 공회당의 성격으로 활용하려 했다. 1937년 9월 1일 낙성했으며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시라이(白井叶), 지배인은 니시가와(西川康南)였다. 객석은 70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29. 사천극장(泗川劇塲), 국민좌(國民座) 경상남도 사천읍 내에 있는 극장으로 고바야시(小林齊吉)가 1만원의 예산으로 지었다. 1938년 9월 12일 개관했으며 외관은 2층 양옥 모양이었다. 이곳에서는 1939년 방공영화상영회 등이 열렸다. 1940년대 이름을 국민좌(國民座)로 바꾼 듯 보인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김달오(창씨명 金村達五)이며 객석은 300석이었다. * [사진](상단) 부산부 행정에 위치했던 보래관 [자료] 《매일신보》, 1930.03.01. 중앙극장 신축낙성(洛城), 근일 개관할 터 【부산】 작년 오월 일일 고(故) 대지충조(大池忠助)씨와 밀양 금삼신길(金森新吉)씨가 출원한 부산 초량정 중앙극장은 동년 십일월 이십일일 경비 일만 사천삼백삼십사원으로 공사에 착수하여 신축 중이든 바 일전에 준공되었음으로 당국의 검사가 맛치는데로 근간 개관하리라더라. [자료] 《매일신보》, 1937.07.10. 신축 울산극장, 삼십일경 준공 【울산】 신축 중의 울산극장은 삼십일경 준공케 되야 당일 성대한 낙성식이 잇스리라 한다. [자료] 《매일신보》 1941.03.23. 방어진(方魚津)극장 전소(全燒) 【부산지사전화】 이십이일 오전 일시경 경남 방어진읍(方魚津邑) 방어진극장으로부터 불이 일어나 목조 극장 한 채를 전소하고 동 이시 반에 진화되었다. 손해는 5만원이고 원인은 전날 밤 객석에서 사용한 화롯불 건사를 잘못하야 화로로부터 이러난 것으로 판명되엇다. [자료] 《동아일보》, 1929.03.22. 김해에 극장, 불원간(不遠間) 준공(竣工) 경남 김해군에는 아즉 극장설비가 무(無)하야 매양 차종(此種)의 집회가 유(有)한 시(時)는 곤란을 만히 당하야 옴으로 이에 향의(向意)한 당지 청부업자 배봉을(裵鳳乙)군은 읍내 서문통에다 극장 신축을 벌서 수월 전부터 착수하야 공사에 착착 진행하얏슴으로 금후 일주간이면 준공하야 도당국의 검사(檢査)를 경(經)한 후 일반 사용에 제공하겟다하며 건평은 오십일평임으로 이층 합하면 약 구백명의 수용을 행(行)할지며 총공비(總工費)는 팔천원을 요(要)하얏다더라. 【김해】 [자료] 《동아일보》, 1935.08.19. 구(舊)마산에 극장 【마산】 문제 중에 잇든 구마산의 극장 신축의 건에 대하야 오래전부터 부민의 관심을 끌어오든 바 요지음 와서 부내 도정(都町) 팔번지 본전퇴오랑(本田槌五郞)씨에게 극장 신축 인가가 낫다고 한다. 장소는 석정(石町) 육십사번지 전(前) 마산구락부(俱樂部) 폐터라는 바 건평 백이십평에 방화식 대용(防火式 代用) 콩크리트 이층 총공비 지료 합하여 일만 오천원이라 하며 내부는 역시 일본식으로 다다미를 깔고 이층에는 긱연실(喫煙室)까지 설치하리라는데 공사는 오는 이십일에 착수하여 십일월 하순경에 준공하리라고 한다. [자료] 《동아일보》, 1937.09.07. 울산극장 준공 【울산】 약진하는 울산으로 우금 극장 한 개가 없엇음을 한탄한 당지 유지로 극장조합을 조직하야 금춘 이래 구역전(舊驛前)에다 총공비 이만여원으로 공사에 착수 진행중에 잇던 바 드디어 금번 준공되어 지난 1일 신극장 내에서 관민 다수를 초대하야 성대한 낙성식을 거행하였다는 바 신설된 극장은 내외관 설비가 완전하야 『토-키』 발성기게 등도 대도시 일류 극장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하며 외관에 잇어서도 명랑한 맛이 잇는 모던 건물이라고 한다. (사진은 울산극장) [자료] 《동아일보》, 1937.06.30. 의령(宜寧) 공회당 착공 【의령】 경남 의녕에서는 일정한 공중의 집회장소와 또는 극장 등속이 없음을 일반이 항상 유감으로 생각하고 오든 중 작년 가을부터 임(林) 의녕군수의 주선 하에 유지 이명후, 이태희, 이종덕(李明厚, 李泰羲, 李鍾德) 삼씨의 의연금이 모집되어 공사비 오천원으로 의녕 신시장통에 의령공회당을 건축케 되어 멀지 안흔 시일에 준공이 되리라는데 해 공회당이 준공되면 의녕 발전에 한층 더 이채를 증가하리라 한다. [자료] 《동아일보》, 1930.02.05. 밀양성내(城內) 소화(小火) 【밀양】 밀양군 성내 조일극장(密陽郡 城內 朝日劇場) 압 밀양은행 소유 가옥에 잇는 박경모(朴景某)씨의 소실 장씨(張氏)의 부억에서 지난 초이일 오후 열시경에 불이 나서 집 처마위로 타올라가는 것을 그 이웃에서 풍물을 치고 놀든 사십여명이 달려들어 즉시 진화시키엇다는데 그 원인을 듯건대 어린 아이를 시키어 군불을 ᄯᅢ다가 그와 가티 실화된 것이라 한다.
[사진] 영화 <물망초>에서 주증녀 남편 유지 이은 <조국의 어머니> 주증녀는 1950년대를 눈앞에 둔 1949년 3월 윤대룡 감독의 <조국의 어머니>로 스크린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 독립운동을 하던 남편이 일본 헌병에 체포돼 모진 고문으로 죽자 아내가 그 유지를 이어 싸우다가 광복을 맞게 되는, 이른바 이 시기의 특징인 항일 영화이다. 잇따라 황정순, 주선태, 황해, 최남현, 이민 등 신인이 몇 달 사이에 쏟아져 나온다. 이렇게 이름을 알린 주증녀는 16밀리로 찍은 최초의 천연색 극영화 <여성일기>(홍성기, 1949)에 이어 <여인애사>(신경균, 1950), <흥부와 놀부><이경선, 1950) 두 편에 출연한다. [사진] <여성일기> 현장 사진(앞열 왼쪽이 주증녀, 오른쪽이 황정순) 하지만 6.25 전란 후 주증녀가 다시 활동을 재개한 것은 전쟁으로 헤어졌던 연인이 재회하는 김성민 감독의 <애원(哀怨)의 향토>(1954)부터였다. 잇따라 <자유전선>(김홍, 1955), <인생역마차>(김성민, 1956), <애인>(홍성기, 1956), <처와 애인>(김성민, 1957), <실낙원의 별>(홍성기, 1957), <청실홍실>(정일택, 1957), <인생화보>(이창근, 1957), <별아 내가슴에>(홍성기, 1958), <실낙원의 별 후편)(홍성기, 1958), <모녀>(최훈, 1958), <별만이 아는 비밀>(이선경, 1958), <마도의 향불>(신경균, 1958) 등 11편에 기용된다. 대부분이 당시 작고한 김내성의 「애인」, 「실낙원의 별」 류의 인기 통속소설과 방송극을 원작으로 한 것이었다. [사진] <실낙원의 별> 스틸 사진(중앙이 노경희, 우측이 김동원) ‘국산 갱스터 ’(「영화주평」. 『한국일보』, 1956.09.16) 를 지향한 <인생역마차>는 신문기자와 암흑가의 두목(이향, 1인2역) 사이에서 사랑을 선택해야 하는 비운의 여성을 보여 주는가 하면, <처와 애인>에서는 월남한 남편의 외면 속에 참고 견뎌야 하는 실향민의 비애를, <실낙원의 별>과 <실낙원의 별 후편>에서는 애독자(노경희)와 사랑에 빠진 인기 작가 아내(옥영)의 좌절과 반전의 삶을, <청실홍실>과 <별만이 아는 비밀>에서는 전쟁미망인과 딸의 행복을 위해 참고 견디는 애틋한 모성애를 각기 표출해 낸다. 주증녀는 특히 <실낙원의 별>의 호연으로 보다 더 좋은 의미의 대중성을 갖게 되었다. (유동준, 「영화로 보는 실낙원의 별」, 『경향신문』, 1957.09.28.). [사진] <청실홍실>의 한 장면, 좌측은 영화배우 엄앵란(사진제공 김종원) 그 이후 <낭만열차>(박상호, 1959), <그 여자는 행복했던가>(송국, 1959), <아내>(김묵, 1959) 등 주로 여성 멜로물에 출연했으나 자신이 제작한 <그 여자는 행복했던가>(기획 허영)의 흥행 실패와 잇따른 언론계 종사자와의 스캔들로 인해 이미지에 타격을 입게 된다. 그러나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 <고려장>(1963)에 이어 김수용 감독의 <만선>(1967)과 <산불>(1967) 등 1960년대의 출연작에 이르면서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상투적인 내용과 도식적인 인물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작품 선택에 변화가 온 것이다. 재봉틀 일로 가계를 도우며 두 자녀와 가정부의 유혹에 빠진 남편(김진규)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하녀>의 아내, 잘못된 효행의 악습에 따라 산채로 버려져야할 운명에 처한 <고려장>의 할머니, 바다에 나간 두 아들을 잃고, 실성해버린 <만선>의 어머니(곰치 아내), 마을에 숨어들어온 인민군 탈영자를 사이에 두고 다른 과부와 성적 비밀을 공유해야 하는 <산불>의 과부 점례 등 다양한 캐릭터가 그런 예이다. 이 같은 질적 성취는 결국 제5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산불)과 제11회 부일영화상 여우주연상(산불), 그리고 제6회 대종상 여우조연상(만선) 등 세 개의 큰 상을 받게 되는 경사로 나타난다. [사진] <하녀>의 한 장면 [사진] <고려장>의 한 장면 여덟 살 연극소녀에서 은막의 유망주로 강렬한 눈매와 우수의 그늘을 드리운 독특한 마스크로 팬들에게 사랑받은 주증녀는 1925년 2월10일 함경남도 영흥군 엄기면 덕하리에서 태어났다. 부농의 무남독녀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함남여고를 졸업하자 동경하던 극단 고협(高協)에 들어갔다. 1943년 열여덟 살 때였다. 그녀가 처음 무대에 선 것은 <무영탑>(연출 유치진)의 단역인 시녀 구슬아기 역이었다. 이후 <청춘의 윤리>, <맹진사댁 경사> 등 연극에 출연하며 연기력을 다졌다. 이 무렵 그녀는 극단 예원좌(藝苑座)에서 고협(高協)으로 옮겨온 배우 허영(許影)과 눈이 맞아 혼인하고, 대건사(大建社)의 직속극단 청탑(1946년 11월23일~)의 첫 연극 <보검>(3막4장)에 김승호, 허영 등과 함께 출연했다. (『자유신문』, 1946.11,09) 조용하고 섬세하면서도 선이 뚜렷한 그녀의 연기는 보는 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이런 그의 재능은 얼마 못가 새 얼굴을 찾는 윤대룡 감독에 의해 발견된다. 허영 외에 손전과 권일천이 공연한 <조국의 어머니>였다. [사진] <만선>의 한 장면(사진제공 김종원) 이렇게 은막에 진출한 주증녀는 1950년대까지 ‘잘 나가는 배우’로, 60년대 이후에는 ‘연기파 배우’로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다. 그 사이 신변에도 변화가 있었다. 허영과 헤어지고 가십에 오르내리던 언론계 종사자 윤호중과 재혼한 것이다. 하지만 70년대 초반부터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정상적인 연기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1974년 검객영화 <철면객>(이형표, 장청천)에 출연할 무렵이었다. 종합 진단 결과 뇌종양이었다. 수술을 포기한 채 스스로 육체를 갉아먹는 고통 속에서 약물 치료만 계속했다. 다만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열일곱 살 큰 딸이 치는 피아노 소리를 듣는 일이었다. “추석이 며칠 안 남았구나. 추석빔을 마련해야 할 텐데…” 유족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주증녀는 1980년 9월18일 동트는 새벽 6시30분 남편과 1남 1녀, 정들여 가꾼 정원의 나무와 마지막 작품 <청색시대>(1976, 정인엽) 등 3백여 편의 영화를 남기고 25년에 이르는 연기생활을 마쳤다. 당시 56세였다. “예술인마을에 정착한지 벌써 5년이 돼간다. 시골도 아닌 서울의 주택가에 무슨 마을이냐고 하겠지만 기실 이 마을이란 어휘에 나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정감과 향수를 느끼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어쩌면 유일한 안식처가 될지도 모르는 이곳 예술인마을- 이름처럼 황토색 짙은 옛날의 마을은 아닐지라도 서울에서 유일한 ‘마을’이라는 희소가치가 있다.” 이는 주증녀가 뇌종양을 앓을 무렵 영화진흥공사 발행 월간 《영화》(1974년 5월호)에 발표한 수필 「예술인마을 우거기(寓居記)」의 한 대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