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양아치들-16화 만찬
- 제작년도
- 2007
< 독수리 >는 올해(2022년) 네마프(Nemaf:서울국제대안영상예술페스티벌)에서 관람했다. 아무 기대 없이 홈페이지 이미지만 보고 선택했는데, 영화가 너무 좋아 그날 본 다른 영화들은 생각이 안 날 정도였다. 그런데 함께 영화를 관람한 멤버의 한 마디가 우리의 마냥 좋음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16mm필름으로 21세기 캐나다 깡시골의 풍경을 담은 영화잖아. 그런데 이게 왜 이렇게 새롭지? 필름 가지고 한 이런 작업들 많잖아. 우리가 너무 매끈한 디지털 작품만 보다 오랜만에 필름작업을 봐서일까.” 영화가 너무 좋은 건 당연한데 어느새 우리는 그 좋음마저 혹시 동시대 기술매체에 대한 염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지 스스로 의심해 볼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를 향한 우리의 반응이 지난 세기에 발명된 매체를 향한 향수에 그칠 수 있어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독수리는 색다른 영상미와 주제의식으로 무장해 우리의 영화적 지식을 충족시켜주는 그저 그런 영화로만 남게 된다. 그런데 이 영화의 잔상이 꽤 오랫동안 우리 곁을 맴돌았고, 어느새 우리는 멤버가 던진 질문을 시작으로 이 영화를 해부해 보았다. <독수리>의 전체 구조는 약 2분 가량의 영상 조각들이 몇 초 간의 공백을 두고 여러 장의 사진처럼 느슨하게 연결돼 있다. 풍경사진 몇 장을 넘겨 보는 듯한 단조로운 구성이지만, 그래서 각 장면의 자연 배경과 동물들의 몸짓에 깊게 몰두하도록 만든다. 내용도 별 다를 게 없다. 목장의 울타리 안에서 소, 말, 돼지, 염소, 닭과 같은 가축들이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있다. 울타리 밖 인간들도 함께 농사를 짓고 풀을 뽑고 가축들을 보살핀다. 그리고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이들의 삶은 계속 될 것이다. 그런데 이 평범해 보이는 농촌의 일상적인 모습을 보고 있다 보면, 영화 자체에 몰두하게 되는 것과는 별개로 묘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목초지 위에서 동물들은 끼리끼리 모이고 흩어지길 반복하며 자유롭게 뛰고 먹고 마시고 쉬길 반복한다. 그러다 커다란 말이 인간에 의해 강제로 울타리 밖으로 끌려 나가는데, 몇 번의 실갱이 끝에 말은 인간의 손을 벗어나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다시 울타리로 돌아온다.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주변의 검은 소들이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 탈출한 말이 뛰자 자기들도 그 뒤를 따라 뛰기 시작한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선 긴장감이, 종이 다른 동물들 간엔 유대감이 생성되는 순간이다. 이미 동물들은 독수리가 그렇듯 서로 싸우지 않고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가운데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동물들을 가두고 통제하려 하는 인간만이 철저한 외부인처럼 울타리 밖에 갇힌 존재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울타리 밖에 있던 인간이 카메라를 들고 안으로 들어오면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해진다. 동물들은 별 거부감 없이 카메라 앞에서 가만히 눈을 껌뻑이는가 하면 편안하게 누워 햇볕을 쬐고 뛰어다닌다. 아마도 촬영은 목장의 울타리 안과 밖, 창문, 경작지 등 정해진 장소에서 꽤 오랫동안 지켜보고 기다리는 가운데 이뤄졌을 거다. 영화의 처음 몇 장면은 필름 촬영을 유추할 수 있을 정도의 노이즈만 존재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미지 위에 굵고 강한 훼손의 흔적이 드러난다. 작가는 영상의 중반쯤에서 풀을 뽑고 그걸 끓이는 짧은 장면을 제시해 필름의 훼손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이뤄졌는지 대략이나마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영상 끝부분에 필름에 쓰인 재료가 공개되는데, 여러 종류의 꽃과 열매 같은 식물들이 주재료다. (참고로 우리는 식물들을 우려낸 액체에 며칠이건 담근 감독의 필름을 발효 필름이라 부르고 있다.) 실험영화와 사진 매체에서 곰팡이와 먼지 등을 이용해 필름의 물질적인 변형을 가한 작품들이 있다. 필름의 물성을 변화시켜 매체의 시간성과 이미지의 우연성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름이 만들어진 과정의 일부를 보는 동안 어쩐지 인간이 채집하고 끓여서 만든 재료를 필름으로 하여금 소화시켰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비약하자면 이 영화에서 필름은 단순히 훼손되고 실험되지 않는다. 필름이 먹은 풀은 목장의 동물들과 하늘의 새들이 먹는 자연의 풀과 꽃, 열매 등이다. 돼지가 소의 젖을 빨고 있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있다. 돼지가 젖을 빠는 동안 소는 풀을 뜯어 먹고, 그 뒤에서 작은 새들이 들판 위에 떨어진 뭔가를 쪼아먹는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의 맞은 편에 카메라 한 대가 놓여 있다는 걸 유추할 수 있다. 풀과 꽃과 소금 등에 의해 발효된 16mm 필름이 뱃속에서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꽤 오래된 카메라일 것이다. 자연의 재료를 한 차례 소화시킨 카메라 앞에 진수성찬이 펼쳐져 있다. 자연의 풍경과 생명체의 행위, 햇볕과 바람까지 완벽하게 차려진 만찬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멀리서 들리는 트랙터 소리는 인간이 만든 다소 거칠고 소박한 취향의 플레이트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오직 카메라를 든 인간만이 목장의 울타리 안에서 동물들과 공존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목장에 인간이 나타나면 묘한 긴장감이 맴돈다. 목장의 주인인 인간은 먹이와 따뜻한 물을 주지만, 주변에 울타리를 쳐서 동물들을 통제하고, 때때로 고삐를 틀어쥔 채 강제로 끌고 나가기도 한다. 그랬던 인간이 카메라를 들면 아무것도 강제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다. 아마도 감독이 오랫동안 울타리 안에서 촬영하는 동안 동물들은 카메라를 든 인간만큼은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함께 풀 뜯어 먹고 조용히 주변 경치를 바라보는 시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카메라를 든 인간은 경작하는 인간이 아니라 동물들과 다투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카메라를 든 인간 또한 그들과 함께 머무르며 아름다운 풍경을 섭취하고 자연으로부터 채집한 물질을 먹임으로써 그들과 밥상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때문에 이 영화를 단순히 매체의 특성을 이용한 실험영화나 목가적인 영화로만 볼 수 없었다. 식물을 섭취한 필름이 드러내는 건 시간이나 우연과 같은 관념적인 개념이 아니다. 영화가 시작할 때 등장하는 회화작품인 Homer Watson의 The Floodgate는 경작하는 인간과 가축화된 동물의 오랜 관계망을 보여준다. 유일하게 독수리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아이는 동물과 동물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사자는 독수리의 위치를 통해 먹이감을 찾고, 독수리들은 서로 다투지 않는다고 한다. 이건 단순히 아이가 들려준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 속 목장의 동물들 또한 독수리와 사자, 혹은 독수리 무리처럼 먹고 마시며 공생하고 있다. 사실 이 영화가 여타의 환경/자연 영화와 다른 지점은 막연하게 생명체의 공존만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 실제의 공존과 균형은 갈등과 긴장감의 조절을 통해 유지되기도 한다. 영화에서 동물들은 끊임없이 먹는다. 인간은 먹고 살기 위해 경작한다. 아름다운 자연에 취해 있는 동안 영화는 멀리서 들리는 트랙터 소리 같은 사운드 효과로 자꾸 이곳이 누군가가 농사 짓고 가축 키우며 먹고 사는 곳이란 걸 잊지 않게 만든다. 눈앞에 보이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동물이 어우러진 생태계의 균형이 실은 식량과 먹이라는 매우 현실적인 조건 속에서 비로소 가능함을 알 수 있다. 영화의 흐름은 매우 정적인데 그 안의 동물들은 생기있고, 인간들은 쉴 틈 없이 일한다. 정원이 딸린 집과 잘 정돈된 경작지, 나무 울타리와 농기계, 그리고 아이들까지 모두 인간이 만든 것들이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제외한 모든 장면이 운전 중인 트랙터 소리로 뒤덮여 있다. 발효된 필름의 노이즈와 백색소음처럼 깔린 이 농기계 소리로 인해 캐나다의 어느 시골마을의 아름다운 자연 풍경에 대한 환상이 지워진다. 사람이 먹기 위해 내는 소리는 이상하게도 동물들이 먹고 있는 모습에 더욱 집중하게 만든다. 인간은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서도 하루종일 땅을 일궈야 하고, 동물은 인간이 관리하고 통제한 너른 목초지에서 비로소 배를 채울 수 있다. 독수리의 먹이 또한 여기 이 땅 위에 있다. 트랙터 소리는 오늘날 이 땅의 생태계가 어떤 순환을 통해 완성되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이 영화의 모든 실험/시도가 가리키는 곳에 막연한 관념이나 개념은 없다. 오히려 감독은 자신의 신체와 카메라가 놓인 구체적인 삶의 현장, 즉 그가 먹어 삼키고 소화시킬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지금 우리는 각자 어떤 물질적 조건 속에서 얼마나 깊이 숙고하고 관찰하며 실험/시도하며 작업하고 있는가. 영화에서 어린 아이가 독수리는 서로 싸우지 않고 살아간다는 말에 그의 아버지로 보이는 어른이 답한다. “I didn’t know that” 농부이자, 목장주이며, 혹은 카메라를 든 감독일 수도 있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등장한 어른의 목소리다. 기회가 돼서 이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때 아이와 아버지의 대화를 몇 번이나 다시 들었다. 우리가 듣고 싶었던 말이 거기에 있었다. AI가 시를 쓰고 그림도 그리고 심지어 영상도 찍는 시대다. 인간과 기계, 예술에 대한 단정적인 말들이 너무 많이 들리는 시대를 살고 있다. 물론 인간이 일방적으로 무너지고, 좌절하고, 끝났다며 판정패 당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미 누군가가 이전에 모든 걸 다 시도해봤고, 만들었다며 지금에 와서 인간이 자기 손으로 작품을 창조하는 게 무슨 의미냐는 회의적인 말들을 너무 많이 듣고 있다. 이런 말들의 효과는 한없는 무력감과 지나친 강박 외에 아무것도 주지 못한다. 그 단정적인 말들 속에서 남자의 대답은 확실히 다르다. 그의 대답은 동물들 사이에 삼각대를 세우고, 필름에게 먹일 식물을 구하기 위해 목초지를 이리저리 뒤질 수 있게 만든다. 지금 우리는 이미 많은 것들이 이뤄진 상태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I didn’t know that”에서부터 시작되는 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사랑과 영혼 영화감독 H와 김희천의 전시가 있는 북촌의 갤러리에 가기로 했다. 바쁜 일정에 쫓기는 중에 겨우 시간을 내고 약속을 잡았다. 김희천의 2021년 VR 작품 <사랑과 영혼>도 보고 신작도 본다는 생각에 H는 신이 났다. 일전에 그는 김희천의 작품을 보고 “영화는 끝났네요”라고 말했다. 물론 영화는 끝나지 않았다. 나도 그도 그 사실을 알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말을 뱉는 걸 좋아한다. 소설은 끝났네요, 문학은 죽었네요, 종이책은 없어질 거예요, 민주주의는 끝났어요, 지구는 30년 내로 사라질 거예요, 탄소 배출을 줄이지 않으면. 사실 줄여도 이미 늦음. 마찬가지로 당신들이 이제부터 열심히 책을 읽고 극장에 가도 문학과 영화의 필연적인 소멸을 막을 순 없음. 그런 생각이 든다. 왜 우리는 절박하게 믿거나 행동하지도 않으면서 최후를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걸까. 단지 수사라고 하기엔 최후가 너무 많고 임박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최후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우리는 무뎌진다. 이성복이 어느 인터뷰에선가 말한 것처럼 시가 사라진다면 사라지라지, 사라질만하니까 사라지는 것 아닌가, 같은 생각도 들고 무력감도 들고. 때로는 영화는 죽지 않았으며 이제야 진짜로 살기 시작했다! 는 식의 객기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지하게 최후를 믿는 사람도 있다. 베를린에서 공부하는 친구는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세포배양육에 투자하고 비행기를 타지 않는 동료 이야기를 전해줬다. 그의 고향은 텍사스 오스틴으로 대서양을 건너기 위해 뗏목을 제작하고 있단다. 내가 들은 바로 오스틴은 텍사스에서 유일하게 민주당을 지지하는 도시다. 친구의 동료가 기후 정의를 외치는 건 그 때문일까. 동기는 다르지만 네덜란드의 미술가 바스 얀 아더가 떠오른다. 그는 “Ocean wave”라는 13피트짜리 범선을 타고 대서양을 횡단하던 중 길을 잃었다. 삼부작 퍼포먼스의 두번째 작업이었고 제목은 “In search of the miraculous”. 20세기 초반 러시아의 철학자 페테르 우스펜스키의 「기적을 찾아서: 알려지지 않은 가르침들의 파편」이라는 책에서 가져온 제목으로, 이 책에서 우스펜스키는 유물론적 오컬트를 창시한 신비주의 사상가 구르지예프의 교리를 해설한다. 구르지예프는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과 함께 인육을 먹었다고 주장했던 사람이다. 그것이 사후에 도달한 우주와 현생의 우리를 연결하는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란다. 한 아마존 독자는 다음과 같은 리뷰를 남겼다. “이 책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사랑해.” 바스 얀 아더의 범선은 1976년 4월 18일 아일랜드 해안에서 발견됐다. 포르투갈의 아조레스 제도에서 그를봤다는 제보가 있었지만 확인된 바 없으며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비극적인 최후로 미술계의 전설이 되었지만 이는 여러 측면에서 역설적인 일이다. 작품의 제목처럼 기적이 있었다면 최후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우리에게도 기적이 일어날까? 지구의 온도가 상승해도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H와 전시를 보기로 한 날은 일요일이었고 우리는 3시에 만나기로 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갤러리는 휴관이었다. 나는 당일 점심에 지도 앱을 검색하다 그 사실을 알았다. H가 물었다. 휴무일 확인 안 했어요?(참고로 일정은 내가 잡았다) 내가 대답했다. 이상하네요. 제가 확인했을 때까지만해도 월요일이 휴무였는데. 언제 확인했는데요? 이틀 전에요. H가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쯤에서 화를 내거나 내게 깊은 실망을 했을 것이다. 휴무일을 체크 안했다고 솔직히 말하면 될 것을 뻔한 거짓말을 하다니. 그러나 H는 된 사람이었고 타인이 하는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드문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네요. 그렇죠? 제가 미술관에 전화해서 물어볼까요? 왜 갑자기 휴무일을 바꿨는지? H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H는 된 사람이지만 가끔 내버려둬야할 문제를 파고드는 경향이 있다. 반면 나는 모든 문제를 그냥 두는 편이다. 내가 일으킨 문제라면 더욱…. 우리는 전시를 보는 대신 카페에 가기로 했다. 마침 나는 소설가 W와 점심을 먹었고 그에게 H를 만날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W는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참고로 그는 영화인보다 영화를 더 보는 사람이다. W가 내게 말했다. 고다르 살아있다는 소식 들었어요? 네? 죽은 걸로 위장하고 잠적한 거래요. 왜요? 안락사 문제를 이슈화 하려구요. 헐. 미친. 그러나 말을 마친 W는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H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W는 세계를 역설로 만드는 사람이다. 그냥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 W의 픽션적 재능은 훨씬 복합적이다. 그의 거짓말은 특정 이익이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세계를 곤경에 빠뜨리는 것이다. 편의상 H의 방식을 세계-자체world-in-itself 라고 부르고 W의 방식을 세계-역설 world-in-paradox 이라고 부르자. 반면 나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역설로 만들지도 못하는 종류의 사람으로 전형적인 해석만 하는 사람이다. 이것을 세계-바보world-idiot라고 부르자. 갑자기 무슨 세계 타령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이는 미국의 철학자 유진 새커가 「이 행성의 먼지 속에서」라는 책에서 도입한 틀을 가지고 온 것이다. 유진 새커는 철학이 더 이상 사유할 수 없는 가능성의 지평에 부딪히는 순간을 말하기 위해 이와 같은 틀을 도입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사는 세계는 우리에-대한-세계world-for-us이다. 이는 인간에 의해 해석되고 의미부여 된 세계다. 그러나 실재 세계는 인간의 시도에 맞서 종종 반격하고 저항한다. 이해의 수준을 넘어서는 실재의 균열. 이런 세계를 세계-자체라고 부른다. 이때 세계-자체는 가능성의 지평을 구성한다. 가능성의 지평은 사유의 한계 지점, 우리가 사유할 수 있는 마지막 단계다. 그러나 유진 새커는 여기서 한발 더 나가길 제안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없는-세계world-without-us로 이 세계는 세계로부터 인간을 뺀 것이다. 한계 이후, 우리의 사유와 해석, 의미 너머의 세계.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사유할 수 있을까? 그것 자체가 역설 아닌가. 내가 갑자기 유진 새커의 구분을 도입한 이유는, H와 W, 내가 그날 카페에서 한국 영화와 한국 영화의 종말, 그리고 그 이후에 대해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없는-영화cinema-without-Kmovie 또는 영화-없는-한국영화Kmovie-without-cinema. 한국 영화는 세계처럼 우리에 의해 해석되고 의미부여되지만 종종 예상을 뛰어넘어 우리를 습격한다. 하지만 한국 영화의 습격이 “영화” 또는 “한국” 둘 중 하나를 없애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어떨까? 2022년 여름 한국 영화 시장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우리는 서교동의 카페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W와 H는 초면이었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엔 영화라는 공통점이 있었으므로 대화는 막힘없이 이어졌다. < 비상선언 > 봤어요? 아니요. < 외계+인 >봤어요? 아니요. < 헤어질 결심 > 봤어요? 네. 2시간짜리 CF 같더라구요. 저는 좋았는데… < 헌트 > 봤어요? 저는 이번 여름 시장에서 <헌트>가 제일 잘 한 것 같았어요. 저도 봤어요. 무한도전 같더라구요. 황정민이 나왔죠? 아닌가, 그건 < 수리남 >인가. <수리남>에는 조우진이 나오지 않아요? 조우진은 <외계+인>에 나오죠. 아… <수리남> 감독이 이정재인가요? 이정재는 <헌트> 감독. 아. <헌트>에 조우진이 나오죠? 그랬나?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북스토어 리 마빈 나는 정연씨에게 메일을 보냈다. 우리의 연재는 마지막을 향해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고 있고, 그러나 대단원의 막은 대단히 희박한 상황에서 공교롭게도 한국 영화가 먼저 종말을 맞이한다면? 그러나 이것은 산업으로서의 한국 영화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한국 영화는 계속 존재할 것이고 사람들은 영화를 제작하고 극장에 갈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건 특정 시네마 체제라고 말할 무언가로, 2000년대 초반 즈음 시작되어 2022년에 끝난 무언가를 뜻합니다. 노무현에서 시작되어 문재인에서 끝났달까요. 이게 뭘까요, 정연씨. 시네마 자체를 응시하는 영화감독 H는 이런 사변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시네마의 역설을 가지고 노는 W는 이제 영화를 만들어도 되겠다는 신호로 해석합니다. 며칠 전 정연씨와 임재철, 이여로씨를 만난 저녁에서 임재철이 한 얘기가 생각납니다.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의 한 장면이었죠. 젊은 변호사 제임스 스튜어트는 새롭게 부임된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갱단에 걸려 구타를 당합니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갱단의 두목인 리 마빈에게 말하죠. What kind men of are you? 당신 같은 사람은 대체 어떤 종류의 인간이요? 리 마빈은 설명 대신 손에 들고 있던 채찍으로 제임스 스튜어트를 내려칩니다. This Kind! 이런 놈이다, 이 새끼야! 임재철이 이 장면을 묘사했을 때 정연씨가 행복해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저도 정연씨만큼 박장대소했습니다. 미래의 어느 날 임재철 평론가가 운영하는 서점이 떠올라서였을까요? 어느 순수한 씨네필이 서점에 찾아옵니다. 그는 책을 하나 꺼내들고 서점 주인에게 묻겠죠. 이 책은 어떤 종류의 책인가요? 서점 주인은 책을 받아들고 한숨을 쉬더니 책으로 씨네필의 머리를 내려칩니다. 이런 책이다, 이 새끼야! 하지만 실제 영화의 장면은 이와는 조금 다릅니다. 영화에서 리 마빈은 채찍이 아니라 손등으로 제임스 스튜어트를 싸대기를 때립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일은 다음에 일어나죠. 바닥에 쓰러진 제임스 스튜어트에게 리 마빈이 묻습니다. 그러는 너는 어떤 종류의 인간이냐? 제임스 스튜어트는 말합니다. 나는 정식으로 허가받은 변호사요. 당신이 총으로 나를 위협한다면 나는 법으로 당신을 감방에 집어넣겠소! 결과적으로 제임스 스튜어트는 이 말 덕분에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습니다. 리 마빈은 채찍으로 후려치면서 말합니다. 법? 하! 내가 진짜 법을 알려주마. 리 마빈은 사회의 법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인물입니다. 유진 새커가 말한 우리-없는-세계의 핵심은 무관심이죠. 인간에 대한 전적인 무관심. 저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영화는 또는 한국 영화는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는 시네마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 아닐까. 시네마의 종말이니 인류의 멸종이니 하는 건 우리에게나 심각한 문제인 것이지요.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 그때 그사람들 >(2004)은 남자들의 이야기이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의 밤을 소재로 한 이 가상 역사극은 절대권력을 구가하던 늙은 독재자와 그의 충직한 수족들, 저들의 카르텔에서 배제된 험악한 야수들의 쟁투를 블랙코미디의 작풍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남자들의 아귀다툼을 흥미로운 풍자극으로 전환하는 것은 저들의 틈새에 끼어있던 여성들의 몫이다. 이 영화의 여성 캐릭터들은 VIP를 위해 일신(一身)을 단장하고 순번을 기다리는 비키니 걸들이거나 거간꾼 노릇을 하는 마담 뚜, 중앙정보부 비밀 연회의 악사로 흥을 돋우는 가수 등 주변적인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사소한 배역과는 별개로 그들의 진가는 텍스트를 운위하는 또 다른 기능에서 찾을 수 있다. <그때 그사람들>의 플롯은 10.26의 시작과 끝을 나레이터(화자)의 목소리에 실어 전달한다. 문학적인 개념으로 치자면 3인칭 화자의 보이스오버 나레이션으로 볼 수 있는 간접 전술이 스토리를 주재한다고 볼 수 있다. 보이스오버 나레이션은 이 영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는 형식적 장치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보이스오버의 통념적인 용례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영화적 담화에서 보이스오버는 일반적으로 친밀감을 주거나 대화나 이미지를 통해 나타낼 수 없는 정보들을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 다른 한편으로 보이스오버는 언어 코드와 시각적 코드의 결합을 통해 복잡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보이스오버는 언어적 의사소통 수준과 시각적 의사소통 수준 사이의 인터페이스를 제공함으로써 시청각 기호들에 대한 더 풍부한 이해를 돕는다. <그때 그사람들>에서 임상수는 스토리의 여러 측면들을 해설함으로써 그 흐름과 전개를 조력하는 보이스오버 나레이션의 일반적인 함의에 도전한다. 이 도전의 토대는 내러티브 안에서 주변부에 머무는 여성들이 서사의 바깥에서 화자 역할을 하도록 함으로써 가능해진다. 한편으로 스토리로부터 여성의 관점을 분리(나레이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표현 전략을 통해 한국인들의 기억 속에 잠재해있는 이 정치적 사변의 직, 간접적 가담자들의 정체성을 투영(작중인물)하는 중첩의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이러한 보이스오버의 활용은 내러티브의 주체와 내레이션의 주체를 이중화한다. 전자는 스토리 사건에 참여하여 그것을 조정하는 반면, 후자는 내러티브를 자율적으로 통제하고 주관하는 더 강력한 저자, 더 큰 주체를 표시한다. 비(非) 동기화된 보이스오버 나레이션은 화면 밖의 스토리텔러에게 내러티브 권위를 부여한다. 그것은 창조주로서 신뢰를 가진 의인화된 영화의 목소리가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보이스오버는 <그때 그사람들>의 의미 맥락을 결정하는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된다. 임상수가 설계한 내러티브에 프레임을 설정하고, 윤리적인 기준을 제공하며, 특유의 씁쓰레한 풍자를 담당하는 목소리는 전적으로 여성들의 것이다. 이렇게 계산된 플로팅 컨셉트에 따라 나레이터의 역할을 떠맡은 것은 김윤아와 윤여정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두 나레이터는 화자이자 작중 인물로 이중적으로 기능한다. 이중적으로 기능한다고 함은, 임상수의 서술 전략이 관객들로 하여금 캐릭터와 스토리텔러라는 양자의 기능을 견주어보도록 부추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밴드 자우림의 보컬이기도 한 김윤아는 프롤로그의 나레이터이자 궁정동 안가 만찬에 초청되어 엔카를 부르는 가수로 등장한다. 프롤로그에 나오는 김윤아의 보이스오버를 들어보자. “박정희, 그가 군사 쿠데타 이후 18년째 정권을 유지해오던 1979년 가을, 부산과 마산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의 뜻밖에 대규모 시위가 있었습니다. 폭압적인 정권에 저항하며 민주화를 요구했지만, 박정희 정권은 군대를 동원해 이를 간단히 진압해 버렸습니다. 질식할 것만 같은 거짓 평온이 흐르고, 시민들은 한껏 웅크리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뜬금없게도, 박정희는 총에 맞습니다.” 김윤아의 음성 해설은 스토리의 배경을 소개한다. 그는 이후 에피소드들에서 자신이 등장한 것을 예고하는 류의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서 나레이션 행위를 통해 스토리의 서막을 연다. 구연동화의 도입부를 암송하는 것 같은 어조는 이 이야기의 역사적 지위, 박정희의 생애를 먼 옛날의 신화적 서사로 기억하고 있는 한국인들의 의식을 반영한다. 따라서 김윤아가 화자이자 등장인물로서 스토리의 안과 바깥의 경계에 있는 특권적인 나레이터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디제시스 안의 사건에 참여하기 때문에 다른 등장인물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권위에 있어서 제약을 받는 것처럼 보인다. 즉, 김윤아는 사태의 전말에 대해 초월적인 지위를 갖지 않는다. 김윤아보다 높은 자리에서 이야기의 핵심을 관통하면서 그 위상을 결정하는 인물은 윤여정이다. 윤여정은 김윤아와 마찬가지로 1인 2역을 맡았다. 그는 모든 사태를 관망하는 자이다. 프롤로그에서 윤여정은 여성 편력이 극심한 어르신(박정희)에게 자신의 딸을 맡겼으나 단물만 빨리고 용도폐기당한 상황에 항의하는 어느 연예인의 모친을 연기한다. 색정광 권력자의 방탕을 은근히 조롱하는 이 철없는 엄마는 중앙정보부의 채홍사 노릇을 하는 주 과장(한석규)에게 육두문자를 섞은 모욕을 당하고 12차선 도로 한복판에 나뒹군다. 뇌리에서 사라진 윤여정의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되는 것은 영화가 끝나기 10여 분 전이다. 국가 원수 암살이라는 중대한 사건이 우스꽝스러운 소동극으로 마무리된 뒤 이 계획에 가담한 사람들의 후일담을 소개하는 서술 화자로 윤여정의 목소리가 나온다. 절대권력의 서슬 앞에서 입을 놀리다 굴욕을 당한 프롤로그의 철없는 엄마와 다르게 에필로그의 나레이터에게서는 이 모든 사태를 관장하는 전지적 화자의 위엄이 있다. 서사와 주제, 태도, 세계관을 아우르는 그녀의 초월적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관객들은 비로소 심수봉의 노래에서 빌어 온 ‘그때 그사람들’이라는 표제의 뉘앙스를 분명히 짐작할 수 있다. 그 일부를 옮겨보자. 검은색 가림 유리막이 처진 중앙정보부의 밀실 너머에서 김 부장(백윤식)이 치도곤을 당하는 꼴을 바라보면서 검은 선글라스의 국군 장교(전두환으로 추정된다)가 내뱉는 대사에 이어 윤여정의 나레이션이 갑자기 끼어든다. “어때요, 저 사람. 혁명적 민주투사로 보입니까? 아니면 과대망상에 빠진 돈키호테였을까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담은 저 사내의 법정 최후진술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는 설이 있습니다. 글쎄, 관심 있으신 분은 찾아서 읽어보시도록.” 이 나레이션에서 화자의 존재와 시각은 분명해진다. 어리석은 사내들의 난장극을 목격하고 종국적으로 살아남아 이를 증거하는 것은 여성들의 몫이다. 저개발 시대의 국가주의를 논평하는 화자로서 윤여정은 권력의 무망함과 덧없음을 조롱하는 자의 위치로 이동한다. <그때 그사람들>은 암살자의 심리를 파고드는 드라마가 아니요, 독재자의 죽음을 묵상하는 성찰극은 더더욱 아니다. 1979년 10월 26일의 궁정동 스토리에는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일갈한 용자(勇者)도 있었으나 도대체 무슨 일이 진행되는지도 알지 못한 채 상사의 지시에 따라 좌표를 잃고 우왕좌왕하였던 경호원들, 권력투쟁의 뒤안길에서 소모품처럼 쓰인 필부들, 역사의 현장을 목격한 뒤 기나긴 침묵에 빠진 커튼 뒤의 사람들, 그리고 이 모든 사정에 눈이 멀었던 다수의 대중도 있었다. 여성들의 보이스오버는 대사 외적 수준에 대한 그녀들의 관점을 중심으로 쓰였다. 그들은 말하는 사람이며 하나의 사태 주변에 모인 여러 개의 역사적 관점들을 나레이션 아래로 통합하는 초월적 자아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말의 스타일이다. 저들은 경어체를 쓰고, 보이지 않는 청중들을 앞에 두고 이야기하듯이 말한다. 여성의 목소리는 회심의 거사라는 계획이 무색하리만치 밤의 만찬장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남자들의 딱한 처지를 조소하는 주체의 위치를 설정하고 있다. 동시에 나레이션의 요구에 따라 역사를 재구성해야 하는 상상적 관객으로서 우리들이 있어야 할 자리도 바로 그곳이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