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꿈꾸는 기적: 인빅터스
- 감독
- 클린트 이스트우드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모건 프리먼, 맷 데이먼
헐리웃 미투 캠페인 지지를 위해 글든글로브 시상식에 블랙드레스를 입고 참석한 배우들 선한 자보다 약한 자가 되어라 - 니체(『선악을 넘어서』) 차이콥스키 내 노트북의 바탕 화면은 대중적으로 비호감인 남자 배우의 사진이다. 내가 이 배우에 대해 개인적으로, 인간적으로 알 리가 있겠는가. 다만 그의 연기와 극 중 캐릭터를 좋아하고, 그가 쓴 글과 인터뷰를 인상 깊게 읽었을 뿐이다(나는 그가 독특한 사람이라고 짐작한다.). ‘바탕 화면 배우’ 말고 좋아하는 배우 두 명이 있는데, 그 두 사람 역시 마초 발언으로 논란이 많다. 여자 배우? 많은 여성 배우들은 위에 언급한 남자 배우들의 나이까지 ‘버티지’ 못한다. 나는 노트북을 켤 때마다 옆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정말, 단 한 번도, 빠짐없이,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었다. “페미니스트가 000을 좋아해?” 혹은 아예, “네가 컴맹이라 다운로드가 잘못되었나보다, 내가 바꿔줄게”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는 (아직은) 성폭행범도 아닌데, 사람들이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정우성 배우를 매우 좋아하지만, 모든 남자 배우가 그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하긴, 이 역시 어불성설일지 모른다. 한국 사회는 난민 인권을 논하는 배우를 더 싫어할까, ‘문란한’ 배우를 더 싫어할까, 병역을 기피한 배우를 더 싫어할까. 모두 뇌관이다. 내 심정은 복잡하다. 일단, 내가 페미니스트인가? 라는 자문만으로도 머리가 아프다. 이 세상에는 내가 동일시하고 싶지 않은 다양한 페미니스트가 존재한다. 그들의 입장을 존중하지만, 그들이 페미니스트라면 나는 ‘아니다’. 마르크스주의, 환경주의, 페미니즘은 모두 내가 추구하는 수많은 정체성 중의 ‘하나’일 뿐, 나는 특별한 정국(政局)을 제외하면, “ ~ 주의자”라고 자칭하지 않는다. “ ~ 주의자”는 선언한다고 획득되는 위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 ~ 주의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책임감과 자기 검열을 잘 알고 있다. 어려운 일상의 연속이다. 예술가로서의 재능과 인간의 품성 사이의 간극에 관심이 많은, 나 같은 관객들은 고민한다. “작품은 좋은데, 그 감독 인간성은 00이라며?”, “난 그 배우 나오는 영화는 무조건 패스야. 배우 이전에 인간이 되어야지”, “네가(나) 어떻게 그런 소설가를 좋아할 수 있니”... 흔한 논쟁거리다. 이것은 ‘타인의 취향’도 ‘정치적 올바름’도 ‘똘레랑스’도 ‘작가와 작품의 분리 논리’로도, 해결할 수 없는 제3의 정치학을 필요로 하는 이슈다. 위에 적은 내용에 비해 덜 논쟁적인 문제도 있다. 단지, 무지와 통념으로 인한 혐오로 발생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다. 어떤 클래식 애호가(?)가 내게 물었다. “차이콥스키가 동성애자라면서요?”, “그런데요?”, “저는 그다음부터 그의 음악을 듣는 것이 께름칙해요”, “그러세요? 그럼 듣지 마세요”. 나는 차이콥스키와 바흐 없이 살 수 없다. 차이콥스키가 동성애자라서 그의 음악을 못 듣겠다면, 그 사람만 손해다. 아니, 음미할 자질조차 없는 거다(참, 세상에 별의별 사람 다 있다). 오스카 와일드, 트루먼 카포티, 안데르센, 소크라테스! < 주노Juno >(제이슨 라이트맨, 2007)와 < 인셉션Inception >(크리스토퍼 놀란, 20010)의 엘렌 페이지, 조디 포스터... 우리가 사랑하는 예술가가 동성애자라서 ‘꺼려진다면’ 볼 책도 영화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런 이슈를 문제 삼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뭔데?” 이 말은 사이먼 페그가 나오는 영화의 실제 대사이기도 하다. 그가 뉴욕의 연예 잡지 기자로 성공하기 위해 애쓰다 실패한 이야기인 < 하우 투 루즈 프렌즈How to lose friends & alienate people >(로버트 B. 웨이드, 2008)에 나오는 말이다. 시드니 영(사이먼 페그 扮)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좌충우돌하다가, 뉴욕의 문화계의 거물을 찾아가 한심한 협박을 한다. “(기자인 나한테 뭔가 이득을 주지 않으면) 동성애자 배우, 모델, 감독, 작가들을 모두 아우팅 시킬 거다”. 상대방은 웃으며 말한다. “이 바닥에서는 거의 동성애자 아니면 유대인이야. 매장당할 사람은 당신이야” 가해자보다 더 나쁜 예술 분야뿐 아니라 정치인, 학자, 페미니스트 등 수많은 위인 중에서 인간성과 그의 업적이 일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인간성은 수많은 요소로 이루어진 개념이기 때문이다. 아내를 학대했는지(톨스토이), 남의 업적을 가로챘는지(아인슈타인), 성차별을 일삼았는지(레닌), 자기만 지식인이라고 생각했는지(푸코, 보부아르), 비열한 연애로 상대에게 고통을 주었는지, 권모술수를 부렸는지, 표리부동했는지, 부동산 투기를 일삼았는지... 아니, 거의 대부분의 ‘위대한 서양인’들은 제국주의자들이다. 성폭력범은 너무 흔해서 이 논의에서 제외한다. 그런데, 맷 데이먼. 누가 그를 싫어할까. 그는 왠지 미국인도 제국주의자도, 심지어 ‘남성’도 아닐 것 같은 이미지다. 미투 이전까지, 맷 데이먼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 중 한 사람이었다. 2016년, 영화 < 제이슨 본Jason Bourne >(폴 그린그래스) 홍보를 위해 한국을 찾았던 그는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자신이 맡은 캐릭터 해석과 영화 철학, 정치적 소신을 밝혔다. 설명이 필요 없는 배우다. 18살에 커리어를 시작해 구스 반 산트, 스티븐 스필버그, 클린트 이스트우드, 리들리 스콧 등 거장들과 함께 작업을 하고, 알려졌다시피 글쓰기에도 능하다. ‘바람둥이’, 왕자병’ 스타일도 아니다. 특히, 그는 물 부족 국가의 여성들을 돕기 위한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www.water.org).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은 순전히 작품 자체 때문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검색을 하니, 그의 영화를 다 봤다. 나는 제이슨 본 시리즈에 대해 ‘지구화 시대 국민 정체성’이라는 주제로, 2편인 < 본 슈프리머시The bourne supremacy >(폴 그린그래서, 2004)에 대해서는 「목숨 걸고 사과하기」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상하게 그가 연기한 캐릭터들은 < 리플리The talented Mr. Ripley >(안소니 밍겔라, 1999)마저 순수해 보인다. 알랭 들롱의 ‘리플리’(< 태양은 가득히Purple noon >(르네 클레밍, 1960)에서 주인공)와 다르다. 그의 인간성은 모든 캐릭터를 맷 데이먼으로 환원하여, 선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렇다고 연기를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그가 최근 할리우드의 미투 운동 과정에서 연일 ‘말실수’를 했다. 아니면, ‘본색’일까. 그의 발언을 보자. “엉덩이를 토닥이는 것과 강간, 아동 성추행은 다르다.”, “영화 제작자까지 인종 다양성을 보장할 필요는 없다.”, “성 정체성은 편견을 줄 수 있으니 드러내지 않는 게 낫다”, “성추행을 안 하는 사람이 더 많다.”... 결국 일련의 발언으로, 여성들만을 주인공으로 한 < 오션스 8Ocean's 8 >(게리 로스, 2018)에 카메오로 출연했으나, 2만 명이 넘는 여성들의 거센 항의로 편집 당했다. ‘평균 시민의 교양 미달’이라는 측면에서 실망스럽기는 했지만, 나는 저런 수위의 발언이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게 큰 충격은 그가 (쿠엔틴 타란티노, 벤 애플렉 등과 함께) 지난 20년 동안 하비 와인스타인과 친분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즉 와인스타인의 셀 수도 없는 성폭행 사실을 알고도 묵인했다는 사실이다. 귀네스 팰트로의 전 남자친구 브래드 피트만이, 와인스타인에게 항의했다고 알려졌다. 더 심각한 문제, 아니 더 혐오스러운 데이먼의 범죄 행위는 그가 와인스타인의 성폭력을 보도하려던 전직 뉴욕타임스 기자를 회유했고, 옹호 논리까지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맷 데이먼 자신은 깨끗한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를 이용해 와인스타인 같은 인물을 변호하고 나선 것이다. 이는 성폭력 직접 가해보다 ‘더 질 나쁜’ 행위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마치 살인보다 살인 교사가 더 나쁘고 비리 재벌보다 재벌의 돈을 받고 그들을 위해 일하는 언론사, 회계사, 변호사가 더 역겨운 것처럼 보이는 심리처럼 말이다. 지주보다 마름이 더 ‘추잡’하다고 할까. 이런 나의 생각 역시, 스타의 이미지에 포섭된 미디어 시대 우중의 모습이고, 진짜 가해자인 와인스타인은 아예 제쳐 둔 잘못된 판단일 것이다. 불신, 문화적 억압이라는 또 다른 피해 배우는 힘든 직업이다. 지금도 활동 중인 노년의 배우가 있는데, 그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를 지지하는 TV 연설원이었다. 그가 노태우 후보를 지지한다면서 한 첫 마디는 (내 기억이 맞는다면), “나는요, 왠지 그 양반(노태우)이 좋습디다...”였다. 사실, 나는 그 말을 분명히 기억하고, 그 느낌이 아직도 몸에 남아있다. 배우의 행동은 신중해야 한다. 노태우와 광주 학살 그리고 한국 사회의 군사주의와 군부에 대한 ‘공부’를 한 사람으로서, 나는 그 이후 그 배우가 나오면 채널을 돌린다. 배우나 작가가 모든 면에서 결점이 없을 수 없다. 마피아부터 파시스트까지, 그리고 그들을 스폰서로 둔 사례까지... 문제는 간단하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좋아했던 배우의 영화를 더 이상 볼 ‘비위’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에게 성폭력은 특별한 범죄다. 난 맷 데이먼을 잃었다. 이제 그가 출연한 작품을 볼 수 없을 것 같다. 다음과 같은 일과 비슷하다. 몇 년 전 세계적인 석학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우연히 나는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옆에서 지켜보게 되었다. 안내 업무를 맡은 친구로부터도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후 나는 그녀의 책을 읽지 않는다. <인 더 컷>의 마크 러팔로와 맥 라이언 ‘개념 매력남’인 줄 알았던 맷 데이먼에게 놀라고 나니, 내가 좋아하는 마크 러팔로도 의심이 간다. 게다가 그는 페미니스트로 알려져 있다. 사실이 아니면 어떡하지? ‘더 나쁜 X’이면어떡하지? 사는 게 힘들 때마다 나는, < 인 더 컷In the cut> (제인 캠피온, 2003)의 러팔로 같은 남자가 나타날(?) 것이라는 환상과 < 유 캔 카운트 온 미You can count on me >(케네스 로너건, 2000)에서 러팔로의 빵구 난 러닝셔츠를 생각하면서 웃곤 한다. 나는 점점 <인 더 컷>의 맥 라이언처럼 편집증 환자가 되어갈 판이다. 차라리 스파이크 리처럼 대놓고 마초인 남자가 나을까.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영화의 캐릭터)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미투 이후 이런 이야기를 나누기 힘들어졌다. 예술가의 인성과 작품 수준의 관계는 끝없는 논쟁거리지만, 나는 이에 대한 나름의 입장이 있다. 좋은 인간과 좋은 예술가는 모순되지 않는다는 확신이다. 예술은 사회 바깥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선(善)의 기준은 대단히 넓고, 다면적이고, 맥락적이며, 인간은 일관되고 합리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의외로 간단하다. 선악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나쁜 사람의 작품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의 작품에는 반드시 나쁜 작품이 있다는 사실이다. 혹은 위대한 작품에 대한 기준 자체가 달라질 것이다. 세상은 변한다. 그러므로 생각보다 이 문제는 논쟁거리가 아닐 수 있다. 예를 들어, 장애인이나 어린이를 학대하는 예술가가 있다면 얘기는 훨씬 쉬워질 것이다. 이런 사람의 작품은 논쟁을 넘어 논쟁의 가치조차 없다. 혹은 스티븐 스필버그를 보라. 그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조금이라도 올바르지 않은 태도를 가진 배우, 감독, 스태프 하고는 일하지 않는다(해고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스필버그에 대해 토를 달지 않고, 억울하다고 울고불고 하는 가해자는 없다. 그런데 왜 사회는 여성에 대한 폭력에 대해서만 논쟁이 분분할까. 이 자체가 젠더 폭력에 대해 관대하다는 얘기다. 성폭력은 그 어떤 잘못보다 엄격히 다루어져야 한다. “두 번째 기회(second chance)를 주지 않는다”, “무죄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남성들의 반발은 전혀 현실성이 없다. 남성 사회는 스스로, 혹은 (피해) 여성 집단에 두 번째 기회를 줄 기회를, 주지 않는다. 부정하고 은폐하고, 가해자는 여전히 열심히 살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두 번째 기회가 웬 말인가. 맷 데이먼. 다시는 그의 영화를 보고 싶지 않아서 속상하지는 않다. 하지만 평범한 씨네필의 영화 사랑을 망친 그에게 분노한다. 내가 신뢰하는 어느 영화평론가는 이런 경험을 말한 적이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 아무도 모른다Nobody knows >(2004) 월드 프리미어 참석한 그는 서구 기자들에게 ‘치여’ 제대로 입장도 못하고 곤란한 처지에 있었는데, 관람권을 미리 확보가 ‘기득권 평론가’가 영화가 상영되자마자 코를 골며 잤다는 것이다. 극장 밖에는 입장하지 못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고레에다의 영화를 보면서 코를 골고 잔단 말인가, 그것도 다른 이들의 관람 기회를 박탈해가면서) 솔직히 살의를 느꼈다.”. 내가 맷 데이먼에게 느끼는 감정이 그렇다.
영화와 자동차에 관해 글을 써보겠다고 달려들긴 했는데 우습게도 나는 운전면허가 없다. 다소 황당한 무면허(?) 칼럼 연재를 감행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방에 뒹굴고 있는 수백 대의 자동차 모형 장난감 때문이다. < 고스트버스터즈 > < 배트맨 > < 빽 투 더 퓨처 > 등의 1980년대 할리우드 영화들을 나이 들어 다시 보면서 그 영화의 감동을 소유(?)할 수 있는 캐릭터 피규어나 장난감 구매에 지갑을 열기 시작했다. 모형 자동차 역시 내가 소유할 수 있는 영화 굿즈의 품목 중 하나였다. ‘배트모빌’이나 ‘엑토-1’, ‘범블비’ 같은 가상의 자동차들을 보며 모형을 구매할 생각만 했지 면허를 따야겠다는 생각은 미처 못했다. 아무튼 < 007 >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가 몰던 ‘애스턴 마틴 DB-5’나 < 분노의 질주 > 시리즈에 등장하는 브라이언(폴 워커)의 분신 같은 ‘토요타 수프라’ 등의 실제 자동차 모형을 구매하려면 적어도 제조사와 모델명은 알고 있어야 했다. 나의 자동차에 대한 관심은 그렇게 시작됐다. 가상의 캐릭터 자동차를 제외하고 영화에 등장한 수많은 실제 자동차 가운데 가장 먼저 장난감 모형을 찾아보기 시작한 모델은 1968년 작 < 블리트 >의 포드 머스탱이다. 피터 예이츠 감독이 연출하고 스티브 맥퀸이 출연한 이 영화를 보자마자 배우뿐만 아니라 그가 몰았던 자동차에도 푹 빠져들었다. 해외 쇼핑몰을 뒤져 장난감을 구하는 과정에서 그 차가 영화 제작연도 즈음에 포드사에서 만든 머스탱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1967~8년형 머스탱은 뒷좌석 천장이 짧고 경사져 있는 ‘쿠페’식인데 전체적으로는 날렵한 디자인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당히 묵직하고 위협적으로 생겼다. 차체의 전면은 보닛과 범퍼에 잘못 부딪히기라도 하면 그대로 신체 일부분이 뜯겨져 나갈 것 같은 위압감이 흐른다. ‘패스트백’ 형태의 뒤꽁무니에서 부다다다 울리는 시끄러운 배기음은 마치 제멋대로 사건을 추적하는 영화 속 주인공 형사 프랭크 블리트(스티브 맥퀸)의 성격이나 태도와 닮아 보였다. 혹시 류승완 감독의 영화 < 베테랑 > 개봉 당시 일부 관객들이 조태오( 유아인 )가 ‘포드 머스탱 GT’라는 차를 모는 것에 의문을 제기했던 걸 기억하시는가? 영화의 설정상 조태오 정도의 재력가라면 초고가의 스포츠카 ‘맥라렌’이나 ‘부가티’ 정도의 차는 타고 다닐 것 같은데 왜 상대적으로 저렴한 머스탱을 썼는가? 라는 물음이었다. 류승완 감독은 이에 두 가지 뜻이 있었다고 말했다. 첫 번째는 예산 문제 때문에 비싼 차를 섭외할 수 없었던 탓이 크고, 두 번째는 피터 예이츠 감독의 <블리트>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기왕이면 극 중 스티브 맥퀸이 몰았던 자동차와 같은 차로 선택하고 싶었다고. 류승완 감독다운 선택이었다. 그의 선택에 대해서는 뒤에 가서 또 이야기하도록 하자. < 블리트 >의 1968년형 포드 머스탱, 스티브 맥퀸 피터 예이츠 감독의 < 블리트 >는 카체이스 영화의 흐름을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영화다. 카체이스가 이 영화의 주요 소재는 아니지만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카체이스 촬영과 편집, 거기에 스피드광이었던 스티브 맥퀸이 만나 놀라운 장면을 만들어냈다. 요즘 관객들은 < 분노의 질주 > 시리즈 같은 영화에 나올법한 멋진 할리우드식 카체이스 장면에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영화들의 카체이스 장면은 화려하긴 하지만 <블리트>처럼 거칠고 과감한 박력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 제이슨 본 >(2016)에서 본(맷 데이먼)을 뒤쫓던 킬러(뱅상 카셀)가 탱크에 가까운 거대한 차량을 이끌고 라스베이거스 도로를 질주하며 엄청난 양의 차량을 산산 조각내는 장면이 있다. 엄청난 물량 공세에 감탄이 나올 법도 한데 별 맥락도 없이 액션에 힘을 주니 아무런 박력이 느껴지지 않은 실패한 장면이 되어버렸다. 단지 많은 수의 차가 부서지는 것만이 카체이스 액션 영화의 전부가 아니다. 카체이스 장면의 생명은 화려함보다는 박력이고 그 박력의 대부분은 어떤 차를 선택하는지에 따라 좌우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블리트>는 카체이스 영화, 더 깊게는 머슬카의 매력을 처음으로 느끼게 해준 영화였다. 머슬카는 8기통(VB) 엔진과 같은 강력한 성능을 자랑하는 고성능 자동차를 일컫는 말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유행하던 경주에 적합한 고성능 엔진을 장착한 자동차 모델로 페라리, 람보르기니 등의 유럽형 슈퍼카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머슬카는 가격 면에서 대중적인 차는 아니었다. 당시 미국 자동차 회사 포드사의 부사장이었던 아이아코카는 1960년대 초에 미국 자동차 시장 경제를 주도하던 베이비붐 세대를 겨냥해서 ‘포드 팔콘’이란 차를 새로운 스타일로 재창조하는 작업에 돌입한다. 그렇게 당시 급변했던 소비자 구미에 맞는 차를 만들어 대성공을 거두는데 그 차가 바로 포드 머스탱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활약했던 전투기 ‘P-51 머스탱’의 이름과 야생마라는 의미가 담긴 로고를 박고 등장한 포드 머스탱은 1964년 첫 모델을 본격적으로 출시한다. 웬만한 자동차 애호가는 다 알만한 개념이겠지만, 포니카라는 용어가 있다. 일반 소비자들이 접근할 수 있는 머슬카 즉 작은 차체에도 고성능 배기량을 가진 차를 뜻하는데 포드 머스탱은 시장 변화를 제대로 내다본 아이아코카가 만들어낸 작은 머슬카, 포니카였다. 이른바 ‘포니카’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 블리트 >에 등장하는 1968년형 포드 머스탱은 여러 머스탱 시리즈 중에서 성능보다는 디자인을 중요시했던 머스탱 라인의 초창기 1세대 모델이다. 피터 예이츠 감독은 머스탱의 매력을 영화에 담기 위해서 10분이 넘는 카체이스 장면에 엔진과 타이어 소리 외에는 어떤 음악도 삽입하지 않았다. 당시로써는 무모한 카체이싱 장면에 도전한 것인데 일단 이 장면 자체가 대본에도 없이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장면이었다. 대본의 도시 배경은 로스앤젤레스였으나 갑자기 배경이 샌프란시스코로 바뀌면서 주택가 언덕 추격 장면을 찍을 여건이 마련된 것. 예이츠 감독은 또 스티브 맥퀸이 평소 ‘과속 촬영(운전)’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는 촬영을 밀어붙였다. 영화에 등장하는 스티브 맥퀸의 모든 운전 장면은 배우 자신이 직접 운전했다. 예이츠 감독에 따르면 그는 예전부터 운전할 때는 대역을 쓰지 않는다는 연기 철칙을 가지고 있었다고. 참고로 극 중 블리트 형사(스티브 맥퀸)의 머스탱과 경쟁하듯 질주하다 전소되고 마는 ‘닷지 차저’를 운전한 배우는 빌 힉맨이란 사람인데 그는 당시 카체이스 전문 스턴트맨이기도 했다. 스티브 맥퀸과 함께 빌 힉맨의 멋진 스턴트 주행이 없었다면 <블리트>는 만들어질 수 없었다. < 블리트 >의 카체이싱 당시에는 또 이런 카체이싱 촬영을 해본 적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장소 대여 관계로 2주라는 짧은 촬영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예이츠 감독은 이 기간 안에 10여 분 넘는 장면을 모두 찍어야 했기 때문에 두 대의 카메라를 뻗쳐놓고 찍는 방법을 고안했다. 이때 현장에서 맥퀸이 탄 머스탱이 언덕 위에서 질주하며 내려오다가 사거리 코너에 설치해놓은 카메라와 부딪쳐 카메라가 박살이 나기도 했는데 해당 장면은 영화에 그대로 삽입됐다. 카메라와 부딪친 이후에 이어서 멈춘 차를 돌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맥퀸이 후진을 하면서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후방을 살핀다. 예이츠 감독에 따르면 맥퀸이 현장에서 촬영을 구경하는 일반인들에게 차를 운전하는 배우가 자신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 일부러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더라는 거다. 스티브 맥퀸의 여유롭고 허세 섞인 열연에 힘입어 포드 머스탱은 영화의 두 번째 주인공으로서 카체이싱 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어젖히는 데 일조했다. 영화 매체를 통해 미디어 마케팅의 재미를 톡톡히 보게 된 포드사는 바로 이어서 애스턴 마틴 DB5를 상징적으로 몰던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에게도 포드 머스탱을 안겨준다. 1971년 작 < 007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는 악당 블로펠드(찰스 그레이)가 다이아몬드로 무시무시한 무기를 만든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가 잠입해있는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향하는 이야기다. 제임스 본드는 영화의 주요 배경인 라스베이거스에서 본드걸 티파니(질 세인트 존)가 몰던 차를 대신 몰고 다니는데 이 차가 바로 새빨간 색상의 ‘머스탱 마하1’이다. 이 모델은 기존 68년형 머스탱의 성능을 업그레이드시킨 모델이다. 극 중 본드가 경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네 바퀴로 가는 자동차를 옆으로 세워서는 두 바퀴로 달리는 곡예를 선사하는 명장면도 탄생시켰다. 1960년대와 70년대 당시 한국 최고의 스타였던 배우 신성일은 국내 수입차 1세대인데 그가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리무진과 함께 고속도로를 달릴 때 탔던 수입차가 인디언 레드 컬러의 ‘머스탱 마하1’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식스티 세컨드>의 쉘비 GT 500 1960년대 후반 머스탱을 만들어 1년 사이에 60만대가 넘는 차를 팔아 치웠던 포드사는 당시 1세대 모델보다 성능이 더 좋은 스포츠카 형태를 원하는 소비자들의 의견을 수용해 유명 레이서였던 캐럴 쉘비와 협업해서 제품 개발을 진행했다. 이때 1세대 모델에는 없던 8기통(V8) 엔진을 튜닝해서 성능을 업그레이드시킨 ‘쉘비 GT350’, ‘코브라 G.T.500’ 등의 모델이 만들어졌다.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스포츠카 절도단 이야기를 다룬 액션 영화 < 식스티 세컨드 >는 전설적인 머슬카 ‘쉘비 GT 500’을 스포츠카의 끝판왕처럼 묘사한다. 영화 내내 유럽산 슈퍼카들이 쏟아지듯 등장하지만 주인공인 절도단들은 ‘쉘비 GT 500’을 훔치는 것을 자신들의 최종 목표라고 말한다. 미국산 머슬카의 아름다움 혹은 위대함을 널리 알릴 목적이 너무 노골적으로 보였다고 해야 할까. 조지 밀러 감독의 1973년 작 < 매드맥스 >는 또 어떤가. 주인공 맥스(멜 깁슨)의 차는 머슬카의 상징과도 같은 고성능을 탑재한 ‘8기통(V8) 인터셉터’로, 1970년대 초반에 개발된 ‘팔콘 XB GT 쿠페 1973‘가 실제 모델이다. 황량한 허허벌판 대륙을 질주하며 횡단하기에 더할 나의 없이 좋은 성능을 지닌 차들이다. 또 1969년에는 포드사가 머스탱을 업그레이드한 ‘보스’라는 제품을 출시해 모터스포츠 계에서 활약하는데 이 모델은 ‘보스 302’, ‘보스 429’ 등의 모델로 나뉘어 제작된다. 특히 보스 429 엔진은 표기된 출력보다 성능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유명해졌다. 왠지 이름이 낯익은 모델이라고?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 존윅 >에서 동네 건달들의 자존심에 금을 가게 해준 차가 바로 존 윅이 애지중지하던 1969년형 ‘머스탱 보스 429’다. < 존윅 >의 1969년형 머스탱 보스 429 포드 머스탱으로 대표되는 미국산 포니카는 천둥소리 같은 배기음을 쏟아내는 8기통의 박력이 다른 모든 자질구레한 성능의 장단점을 잊게 만든다. 사실 이 머스탱은 한국 실정에 비추어 보면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차다. 가장 현실적으로는 엄청난 연비를 자랑하는 통에 기름값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베테랑 >의 조태오는 왜 포드 머스탱을 몰았을까? 머슬카 특유의 가오 때문이 아니었을까. 명동 한복판 8차선 도로를 꽉 막은 차들 사이로 육중한 차체를 들이밀며 홍해 가르듯 부수고 지나갈 수 있는 힘 좋은 자동차로 포드 머스탱만 한 차가 또 있을까? 설정상 조태오가 벤츠나 아우디를 몰았다면 재벌의 리얼리티 정도는 살려줬을지라도 후반부 명동 카체이스 장면에서의 머스탱 전용 박력은 사라져 버렸을지 모를 일이다. < 베테랑 >의 포드 머스탱 GT, 조태오 최근에 포드 머스탱과 관련한 흥미로운 뉴스가 공개됐다. 얼마 전 포드사가 전 세계 기자들을 말리부 해안가로 불러모아 2018년형 신모델의 시승식을 가졌는데 이때 많은 기자들이 한 가지 사실 때문에 당황했다고 한다. 8기통 5.0L의 가솔린 엔진에 회전 한계를 7500rpm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새롭게 업그레이드된 엔진 성능 때문이 아니라 머스탱 역사상 최초로 반자율주행 기능을 탑재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고. 포드사는 긴급제동 보조 시스템(ASBS), 차선이탈 경고시스템(LDWS), 차선이탈 방지 시스템(LKAS) 등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전을 중시한 모델임을 강조했다. 물론 세계적인 흐름을 따른 당연한 결과이자 반드시 필요한 기능이지만 미국인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머스탱 정신’과는 조금 다른 행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 가지 소식은 지구에서 사라져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던 < 블리트 >의 실제 촬영모델 머스탱을 발견했다는 소식이다. <블리트>에서 스티브 맥퀸이 직접 몰았던 차량 소품 머스탱은 총 2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한 대는 개인 소유 차량이고, 나머지 한 대는 자취를 감춘 채 사라져버려 찾을 수 없었다. 스티브 맥퀸이 죽기 직전까지 평생 동안 이 차를 수소문했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사연은 자동차 애호가 사이에서 유명하다. 멕시코에서 발견된 < 블리트 >의 머스탱(기사 보기) 그런데 최근 멕시코의 바하칼리포르니아주의 어느 폐차장에서 자동차 커스텀이나 복구를 취미로 즐기던 두 남자가 녹슬어 폐차된 머스탱 잔해를 찾아냈다. 그들은 이 잔해를 가지고 < 식스티 세컨드 >의 쉘비 GT 500으로 커스텀 제작을 하려고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들이 남아있던 원본 부품을 포드사에 문의한 결과, 이 망가진 차의 잔해가 실제 < 블리트 > 촬영에 썼던 머스탱임이 밝혀진 것이다. 결국 이들은 <식스티 세컨드> 대신 <블리트>에 등장했던 원래의 모습 그대로 차를 복구하는 데 성공했다. 시대의 흐름에 따르는 최신식 머스탱 모델의 변화 소식과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음을 몸소 보여준 유물 머스탱의 발굴 소식이 기가 막히게 대비된다. 이제 포드 머스탱은 8기통 엔진을 마음껏 돌려도 석유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던 호황기의 유물로서 DVD와 장난감 모형 속에 영원히 갇혀 버렸지만 그 끝내주는 ‘가오’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장난감을 사게 만들 것이다. “우리가 돈이 없어 못 사지, 가오가 없어 못 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