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eam Machine
- 감독
- 김경미, 김형국
- 제작년도
- 2003
2019년 대구사회복지영화제 중 상영 전 작품 소개 왜 대구에서 영화글을 쓰나요? 그 소박하면서도 긴 여정 2025년 가을, 대구·경북에서 지난 10여 년간 나온 100여 편의 영화를 소개하는 책을 한 권 출간했다. 그저 몇 년 동안 꾸준히 기록해 온 글 모음일 뿐인데, 이런 유형의 작업은 최초라는 소릴 여기저기에서 듣는 중이다. ‘지역’에서 영화 관련 글을 쓰고 활동한다는 소개를 하면, 대개 접하는 반응은 두 갈래로 나뉘게 마련이다. 1) ‘얼마나 수고(혹은 고생) 많으냐’, 2) ‘거기에서 어떻게 (제대로) 활동하느냐’다. 둘의 온도는 차이가 크지만, 배경은 거의 다르지 않다. ‘지역’에서 영화를 논하기 어렵다는 전제다. 영화 평론집을 내고 ‘작가’란 어색한 호칭을 종종 듣지만, 평론가를 지망한 적은 딱히 없었다. 영화와 무관한 일을 하며 받는 업무 스트레스를 풀고자 영화제에 종종 다니던 게 조금 유별난 점이란 정도? 그러다 조금씩 지역의 독립·예술영화 극장과 소규모 상영회에도 간간이 다니게 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불쑥 상영회를 열어보겠다는 꿈이 생겼다. 그렇게 모든 재앙(?)이 출발한다. 상영회를 열며 소소한 영욕을 쌓아간다. 관련 활동을 이어가니 주변에서 알아차리게 된다. 영화를 매개로 한 교육이나 사업 기획이 생업에 침투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공사 구분이 허물어지자 화근은 종잡을 수 없이 커진다. 마침내 영화제를 열어보자는 제안이 나오고, 실무를 떠맡게 된다. 그렇게 2010년, 대구사회복지영화제가 시작된다. 영화제 자원활동가도 한 번 하지 않고 졸지에 영화제를 책임지게 된 셈이다. 이후 10년간 좌충우돌 행각이 이어졌다. 저서 『경계의 영화: 대구영화라는 낯선 풍경』(2025, 대구경북영화영상사회적협동조합) 소 뒷걸음질 치다 쥐잡기? 어쩌면 필연을 가장한 우연 영화제 관객으로 다녔을 뿐, 실무는 관람과는 차원이 달랐다. 작품을 발굴하고, 상영작을 수급한 다음 행사를 차질 없이 진행하기 위해 온갖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관객의 다양한 수요를 예측하고 대응하는 건 물론, 정산과 평가까지 마쳐야 행사 하나가 끝난다. 온갖 사건 사고를 겪으며 경험과 교훈을 얻었다. 무엇보다 영화를 선별하는 안목이 얼기설기 형성되어갔다. 작지만 내실 있는 영화제를 꾸린다는 건, 실무적으로 경험이 축적되는 것과 함께, 무엇보다 자신만의 선구안이 형성되기에 가능한 일이다. 해당 영화제가 지향하는 가치, 공유하고 싶은 주제가 (영화제가 상정하는) 관객과 접점을 형성하기 위해선, 개별 ‘취향’과는 구별되는 ‘지향’이 필수다. 영화제를 통해 프로그래머의 가치와 덕목을 어렴풋이 깨우쳐 나갔다. (좌) 2019년 대구사회복지영화제 중 단편2 섹션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우) 2018년 전태일 노동영화제 중 < 사수 >(김설해, 정종민, 조영은, 2018)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며칠에 불과한 영화제 동안 소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뻔하다. 여건의 한계로 미처 소개하지 못한 작품이 잔뜩 쌓이게 마련이다. 추가 상영을 향한 갈증은 별도의 상영회로, 사전 제작 지원으로 자연스럽게 향한다. 물론 새로운 도전이니 풀어야 할 과제가 수북하다. 용케 고비를 넘기며 소박한 성과를 이룰 때마다 욕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지역 영화제는 서울과 비교해 너무도 취약한 다양한 영화와, 이를 매개로 한 프로그램에 목마른 지역 관객에게 부족하게나마 극장의 대체재로 기능한다. 그 특성을 깨닫는 순간, 무형의 책임이 어깨에 내려앉는다. 우리 지역에 반드시 그 존재를 알리고 싶어 하는 작품은 무엇일까? 턱없이 부족한 자원과 기회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 우선순위를 정하는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최적화 모델을 찾기 위한 계산과 순수한 열망이 끝없이 충돌하며 개인의 욕망과 지역 영화문화의 공공성이 외줄타기를 거듭했다. 맨땅에 헤딩하기로 얻는 찰나의 행복, 일상의 갈증 지속 가능한 영화제를 내실 있게 꾸리고, 여력 닿는 한 온갖 명목으로 공동체 상영회를 기획하고, 영화제 프로그래머란 직함으로 여기저기 영화를 소개하는 자리에 나가거나 글을 기고하게 된다. 자연스러운 순서다. 이름을 걸고 적합한 작품을 추천해 기대 효과를 충족해야 한다. 다양한 수요가 예상치 못하게 불쑥 제기되더라도 늘 열과 성을 다해 의뢰에 응대할 때만 후일을 기약할 수 있다. 어느새 업계 관계자(!)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그에 걸맞은 책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할 일은 점점 늘었다. 물론 대부분은 누가 강요한 게 아니다. 그래도 하면 좋을 듯하거나 필요할 일이란 생각에 자발적으로 벌인 일이다. 그러니 잘 안 풀려도 하소연하거나 누굴 원망할 수 없다. 그러나 못내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찰나의 보람과 일상의 고민이 쌓여만 갔다. 그러다 2020년 코로나19가 터졌다. 영화제나 상영회를 지속하기가 어려워졌다. 설상가상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오랜 입원 기간 동안 아무것도 할 게 없었다. 외출도 면회도 통제된 가운데, 다행히 와이파이는 잘 터졌다. 노트북을 켜고 영화를 본다. 하지만 허전함은 여전했다. 영화를 소개하고 나누는 재미가 없었던 탓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렇게 본격적으로 영화에 관한 글쓰기를 시작했다. 영화제 일을 하면서 조금씩 글을 쓰긴 했지만, 대개 작품 소개를 위한 한정된 분량과 용도에 그쳤다. 긴 글을 쓸 여력도 없고, 쓴다고 해도 게재할 지면이 지역엔 딱히 없었던 탓이다. 영화를 소개하는 건 글보다는 상영 기획으로, 혹은 종종 들어오는 방송 프로그램으로 수행해 왔다. 외부 조건의 극단적 변화로 그 경로가 변경되어야 할 상황이 닥치자, 자연스레 영화글 쓰기로 중심이 이동된 셈이다. 그러다 보니 그냥 쓰고 싶은 작품에 관한 글쓰기가 아닌, 보다 선택과 집중에 의한 작업을 구상하게 된다. 일단 다양한 영화를 소개해야 하는데, 마침 코로나19로 인해 얼어붙은 극장가엔 역설적으로 저예산-다양성-독립-예술영화 소개가 상대적으로 늘어나던 참이다. 재개봉 붐도 일었다. 다양한 영화가 어려움을 뚫고 극장에 걸리는데, 정작 이런 영화들의 정보를 접하긴 무척 어렵다. 자연히 (재)개봉 독립·예술영화 작품 소개 글을 기고하게 된다. 지역에서 영화 잡상인이 존재할 이유 다음으로 상영 활동을 수행하며 알게 된 지역 영화인과 그들의 작업을 알리고 싶었다. 역시 주기적으로 리뷰를 작성한다. 영화 애호가가 아닌 평범한 이들에게 일상과 영화가 연결되는 접점을 만들고자 예전부터 틈틈이 작성하던 교육 목적 기고도 꾸준히 잇는다. 어느새 해야 할 몫은 감당하기 힘들 만큼 불어났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정체성에 혼란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인정받기 위해 십여 년 넘게 분투해 왔건만, 정작 본업은 지지부진한데 부업이 활발해진 격이라 그렇다. 그렇게 어쩌다 시작한 정기적 집필 작업은 크게 세 경로로 집중되어갔다. 가변적인 글쓰기 실험으로 인스타그램에 영화 단평을 별도로 올렸다. 단평은 정식 기고의 초벌 스케치 역할과 더불어, 지면 게시용으론 애매한 분량이나 비중의 작품도 공개적으로 소개하는 우회로로 상정했다. 그저 많이 보고 능력껏 쓰는 것에서 출발해, 일정한 방향과 목적의식을 갖고 작품을 소개하는 공적 경로를 좌표로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조건반사처럼 끊임없이 지금도 글을 작성하는 중이다. 그 과정이 반복되며 일종의 축적을 낳는다. 기존의 오프라인 상영을 통해 형성해 온 독립·예술영화계 네트워크를 다른 각도로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된 셈이다. 필자가 인스타그램에 게시한 리뷰 피드(< 밸브를 잠근다 >, < 입문반 >) 그런 실용성 말고 이런 글쓰기 활동이 지역 영화 (창작 및 관람) 환경에 어떤 순기능을 수행하고 있을까? 그저 자기만족에 불과한, 혹은 남들이 상대적으로 덜 다루는 희소성에 주목한 데 불과할까? 해당 질문은 지금도 수시로 머릿속을 맴돈다. 혹시 이 고민에 답을 얻기 위해 지역 영화 관련 활동을 계속하는 건 아닐까 싶을 만큼. 그러나 조금씩 몇 년간 꾸준히 수행하던 지역 영화 글쓰기의 쓸모가 발견되기 시작했다. 지난 몇 년간 한국 독립영화에서 ‘지역 영화’는 꾸준히 호명과 소환을 거듭해 왔다. 주요 영화제에서 여러 이름으로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에 주로 포진한 영화학과 중심)에 대비되는 로컬 작품 위주 부문을 신설하고, 지역별 독립영화제에서도 해당 분야 비중이 대폭 늘어났다. 영상 제작 환경의 긍정적인 변화와 교육/지원기관의 증가로 지역에서 제작되는 영화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 안에 무수한 다양성과 가능성이 내재해 있다. 하지만 여전히 유력 영화제에서 호명되고 수상하지 않는 한, 절대다수의 지역 영화는 소리 소문 없이 잊히기 일쑤다. 물론 이는 수도권 지역에도 적용되지만, 바늘귀의 크기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문제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지역 영화생태계’란 수식어가 종종 등장하지만, 정작 제대로 된 심도 있는 논의는 찾기 힘들다. 대개 개별 지역마다 (변화된 창작 환경에 따라 대폭 증가한) 창작자는 꼭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소수나마 복합상영관에 걸리는 상업영화에 만족하지 못하는 관객층, 그들에 의지하며 능력껏 다양한 작품과 기획을 선보이려는 상영 공간 및 집단이 존재한다. 지역 영화제/독립·예술영화관/(근래 확산되는) 상영회 개최그룹 등이다. 이들을 묶어 흔히 생태계로 호칭한다. 지역 영화 창작자와 독립·예술영화 관객이 별개가 아니라면 그 자체로 작은 영화 공동체가 될 수 있으리란 기대가 싹틀 법하다. 그러나 가야 할 길에는 난제가 숱하다. 우선 관객 입장에선 반드시 지역 영화를 관람할 이유랄 게 없다. 세상에 봐야 할 영화가 얼마나 많은데, 정보도 찾기 힘든 낯선 영화까지 챙겨야 한다는 말인가. 그러다 보니 지역에서 만든 영화가 평가받는 거의 유일한 기준은 (외부의 알려진) 영화제 진출과 수상 경력으로 제한된다. 자기 동네에서 만들어진 영화가 돌고 돌아 역수입이 되어야 비로소 인식 대상이 되는 것이다. 지역 영화의 매력이자 개성이라면, 다양한 고유의 소재와 배경, 지역 사회와 문화에 주목한 특유의 색깔일 텐데 정작 그나마 소개될 기회를 얻는 경로는 그 특색과 동떨어지기 쉬운 셈이다. 이런 오류를 보완하는 데 지역 사회 내에 공존하며, 영화생태계 일부로 소속감을 지닌 평론/평론가의 존재는 필수적인 윤활유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2023년 반짝다큐페스티벌 중 섹션4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작은 변화의 가능성과 함께 엄습하는 숙제들 지역에서 왕성히 활동하는 인터넷 대안언론 《뉴스민》에 제안해 ‘무비053’이란 이름의 칼럼을 열었다. 2주마다 꼬박꼬박 대구(경북) 지역 작가와 배경의 영화를 소개하는 코너다. 2022년 3월부터 기고를 개시한 해당 칼럼이 훗날 『경계의 영화: 대구영화라는 낯선 풍경』(2025)의 산파가 된 셈이다. 몇 년 전부터 틈틈이 비정기 기고는 진행했지만, 본격적인 지역 영화글을 집필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하지만 글쓴이에게 일어난 변화는 작지 않다. 지역에서 영화 관련 글을 쓴다는 건 단순히 글쓰기로만 끝나지 않는 일이다. 일단 영화를 찾아봐야만 한다. 대부분 지역에서 제작되는 작품이 단편이다 보니 오프라인 상영을 찾아다녀야 한다. 그나마 대구는 근래 비교적 활발하게 작품 창작이 일어나고 있기에 작품 숫자는 적지 않은 편이나, 지역별 편차에 따라 애초 작품 수급 자체가 힘든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일상적인 상영 공간이 부재하니 한 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볼 기약이 없다. 그런 상황이라면 창작자에게 별도 연락을 취해 과정을 밟아야만 한다. 그런 수소문을 통해 멀찍이 거리를 두던 지역의 영화인들과 대면하고 교섭(?)을 치르게 된다. 해당 과정을 반복하며 정보를 취합하고 평론 글을 게재하면 창작자의 반응을 기다리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작업에 대한 피드백을 거의 경험할 기회가 적다 보니 글쓴이가 기대하던 교류를 얻기란 지극히 드물다. 그저 자신의 작업에 누군가 반응을 남겼다는 사실 자체로 기뻐하거나, 혹은 오탈자 지적이나 창작 의도에 부합하는 글을 암묵적으로 바란다는 확인이 대다수 반응을 이룬다. 이럴 땐 맥이 빠지지만, 결국엔 양측 모두 훈련과 적응이 필요한 사안이긴 하다. 『경계의 영화: 대구영화라는 낯선 풍경』 관련 대화형 행사 (좌) 2025년 부산다큐필름페스티벌 중 토크 포럼 / (우) 2025년 안동중앙아트시네마 내 북콘서트 안면을 트고 인사하게 되면 새롭고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하는데, ‘팔이 안으로 굽지 않느냐는’ 의심이다. 이는 여전히 저울에 올라오는 쟁점이기도 하다. 작품에 대한 상세 정보 취득이 수월해지는 만큼, 그에 비례해 중심 잡기라는 난제가 동시에 닥친다. 지역 영화를 둘러싼 일종의 ‘온정주의’에 관한 입장은 극명하게 나뉜다. 누군가는 당연한 일이라며 여러 제약을 극복해 완성된 지역 작품을 ‘동료’적인 시각에서 다루는 게 틀린 게 아니라 말하지만, 누군가는 그러한 근접성이 공정한 비평과 동떨어진 것이라 비판한다. 정답은 늘 그 중간 어딘가에서 형성된다. 글을 쓸 때마다 성배를 찾는 불가능한 모험을 거듭해야 한다는 뜻이다. 글을 쓰는 행위는 송고했다고 바로 끝나지 않는다. 해당 작품이 웬만큼 외부에서 소개되지 않았다면, 대부분은 필자의 글이 유일한 ‘공식’ 평론으로 남는 경우가 태반이다. 즉, 해당 작품 관련 검색 가능한 ‘정전’이 되는 셈이다. 이는 아주 살짝 보람인 동시에 큰 부담으로 자리한다. 작품이 온당하게 평가받고 소개될 수 있도록, 일종의 A/S 과정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다. 작품이 추가로 상영 기회를 얻게 지원하는 임무도 부여된다. 영화의 의미와 가치, 효용을 글을 쓰면서 포착한 데 기반해 가능한 선에서 추천하고 제안하는 과정이 글을 쓰는 동시에 부가된다. 지역별 영화생태계에서 비평의 자리를 찾기 위해 일련의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일부 작가의 작업을 일종의 ‘작가론’으로 작성하는 경로에 진입한다. 단편 위주로 작업하는 지역 창작자에겐 쉽게 접하기 힘든 기회인 도시에, 평론 관점에서도 창작자의 출발점부터 연속적으로 작업을 관찰하고 포착할 수 있는 드문 계기이기도 하다. 그런 계기를 통해 드물게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서는 창작자를 지켜보는 건 ‘발견’의 기쁨이 되곤 한다. 여기까지 언급하면 한국 독립영화의 ‘블루 오션’으로 간주할 만하지만, 실제로 지역 영화 글쓰기는 외롭고 험난한 길이다. 우선 공개 지면이 거의 부재하다. 물론 서울 등 수도권에서 활동하는 평론 영역에서도 지면 축소는 공통된 화두겠지만, 지역은 몇 곱절 더 심각하다. 일단 영화 평론을 전문적으로 실어주는 매체 자체가 드물다. 일간지나 공중파 방송 역시 전문 코너가 부재한 데다, 온라인 미디어 또한 전문 지면을 유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글쓴이 역시 라디오 프로그램에 간헐적으로 출연하는 것 외엔 안정적인 미디어 지면을 확보하는 데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었다. 사실상 자기가 글을 올릴 지면을 새로 만들어야만 가능한 셈이다. (좌) 2019년 대구MBC 프로그램 <문화극장 조조할인> 중 코너 ‘작은 영화관’ 녹화 현장 (우) 2023년 KBS2 라디오 프로그램 <음악과 음악 사이> 중 코너 ‘이 영화 어때요’ 생방송 현장 물론 없던 지면을 창조하다시피 하니, 중앙 미디어에 비교하면 노력과 봉사의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다. 지면을 유지하는 것도 감사한 일인 경우가 허다한 탓이다. ‘박리다매’로 승부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고료를 받고 평론을 싣는다는 기준을 설득하는 자체부터 쉽지 않다. ‘무료’로는 원고를 싣지 않는다는 원칙을 꺼내며 욕먹을 각오를 해야 할 판이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글을 쓸 수도 없다. 하지만 제대로 쓰고 싶은 만큼 전문성을 추구하는 데에도 한계가 뚜렷하다. 해당 매체 독자층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보다 좀 더 핵심적인 화두가 있는데, 애초 지역을 기반으로 영화 평론을 수행하는 동업자 겸 경쟁자 집단이 부재한 데 기인하는 문제다. 원래 고민하던 목적의식, 지역 영화에 대한 다양한 비평을 통한 ‘기대 효과’가 온전히 구현될 수 없다는 구조적 한계는 대구·경북은 물론 거의 모든 ‘지역’에서 공통된 난제다. 동료를 만들고 싶어도 찾기란 쉽지 않다. 아무래도 협업이 당연한 영화 창작 과정이나 상영 활동과 달리, 기본적으로 개인 작업인 특성 때문이다. 아울러 관심사와 여타 조건이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공동 작업은 더욱 고난도로 변한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일단 지역에서 전문화된 글쓰기를 상시 과제로 삼는 필자 찾기가 1차 관문, 지역 영화에 관심을 가진 이가 희소한 게 2차 관문, 조건 다 맞아도 일감이 없는 지역에서 해당 활동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게 3차 관문이다. 그야말로 ‘좁은 문’이다. 그룹을 구성해 ‘선의의 경쟁’을 일상에서 수행하지 않는다면 지역에 절실한 다양한 결의 비평 문화 조성은 암초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생태계 순환 과정에서 창작 집단에 자극을 주고 긴장을 유지하려면 넘어야 할 벽이기도 하다. (좌) 2022년 안동중앙아트시네마 내 영화비평 강좌 ‘영화 보기의 미학’ 프로그램 소개 (우) 2022년 인디플러스 포항 내 강의 ‘독립영화의 감상과 비평’ 지역 영화 예산 복원을 넘어서 지속 가능한 생태계 형성까지 2023년, 몇 년간 조금씩 조성해 왔던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역 영화 창작 및 영화문화 관련 예산이 전액 삭감된 후, 현재까지 관련 예산은 복원되지 못한 상태다. 자연스럽게 지역 영화 관련 지원 및 정책 초점은 해당 사안으로 귀결되는 실정이다. 물론 (개별 지역이 아닌 전체) 총액 12억이란 별것 아니게 보이는 지원 예산을 참 알뜰하게 써가며 여러 항목에 골고루 종잣돈이 되온 게 증명되기에, 본 예산은 복구를 넘어 대폭 확대되더라도 전혀 낭비가 아니다. 문제는 몇 년째 이 문제로 지역 영화에 대한 모든 담론이 환원된다는 점이다. 일단 ‘지역 영화(창작과 문화)’ 정책 수립의 초점과 방향이 확립되어야 한다. 현재 정부의 영화정책은 여전히 20세기에 형성된 ‘수출산업’에 방점이 찍혀 있다. 한국 독립·예술영화는 그런 시각 아래 철저하게 상업영화의 ‘(산업)예비군’으로만 사고해 온 게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 관점에서 언젠가부터 독립영화와 창작자마저 마치 국가대표팀 선발하듯 국내외 주요 영화제 진출과 수상 중심으로 서열화되는 실정이다. 그런 일방적 기준에 의한다면, 지역 영화는 2군도 아닌 3군 이하로 취급될 뿐이다. 당연히 관심을 호소해봐야 헛수고일 따름이다. 이런 난맥상을 돌파하려면 발상의 전환이 필수다. ‘산업’ 중심주의를 돌파하지 않으면 결국엔 지역 영화는 유령처럼 떠돌 뿐, 실체를 갖출 수 없다. 지역의 인재는 재능을 꽃피우기 위해 서울로 향하면 되고, 지역의 관객은 복합상영관 객석을 채우는 머릿수로만 족할 뿐인데 지역 영화에 유의미한 관심이 향할 리 없다. 기껏 기존 예산이 복구된다 해도 그저 시혜적인 상징에 불과할 테다. 지역 영화(창작과 문화)를 진흥하려면 우선 서울을 제외한 지역 공통 현황과 함께 차별화된 지역별 특징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순히 영화문화 측면을 뛰어넘어 한국사회 고질병인 ‘서울 공화국’ 문제와 직결된다. 즉 지역 균형발전, 지방분권 쟁점과 같은 궤로 놓고 접근해야 할 사안이다. 그렇게 발상을 전환한다면, 독립·예술영화 접근 기회의 균등은 곧 비수도권 주민들의 문화복지 권리 일부가 된다. 물론 그저 최신 상업영화 대작 관람 기회를 넘어, 다양한 영화문화 접근권으로 향해야 유의미할 것이다. 지역 영화에 관한 글쓰기는 그저 개별 창작물에 관한 평론으로 그치지 않는다. 해당 작품이 꼭 영화제를 거쳐 인정받지 않더라도 지역 내에서 충분한 함의와 가치를 갖는다면 이를 포착해 소개하는 기능을 통해 지역 영화문화 형성의 일부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글을 쓰는 데 그치지 않고, 상영 활동 등 2차, 3차 소개 기회를 넓히는 파급력을 상정하며 글을 쓰게 된다는 의미이다. 얼핏 피곤하거나 과도한 확장으로 받아들여질 주장이다. 그러나 지역 영화를 평론한다는 건 글쓰기로만 국한하기에 애초에 불가능한 과제다. 일종의 능동적 ‘수용’ 활동이자 순환계 내에서 끝없는 운동을 거듭하되 ‘미토콘드리아’처럼 일정 간격을 유지해야 한다. 그렇게 ‘지역화’한 영화 평론은 예산과 지원 대책에만 갇히지 않는 지역 영화문화 형성의 일부로 역할을 얻는다. 물론 ‘가지 않은 길’이기에 정답은 누구도 모른다. 다만 기존 독립·예술영화 비평 모델과 비교하면 보다 사회학적 접근, 현장 참여에 주목하는 형태를 지니리라 예상해 본다. 일단 떠나지 않고 지역 사회 쟁점과 배경을 숙지한 상태로 작품의 의미를 해석하고 발굴해 접속하는 과제를 수행하는 수밖에 없다. 개인을 넘어 집단으로, 생산자와 소비자의 이분법을 넘어 공생하는 영화생태계로 접근하는 과정에서 지역 영화 글쓰기는 고유의 형상과 임무를 찾게 될 테다. 지금은 일단 씨를 뿌리며 경작에 나설 시간이다. 2019년 대구MBC 프로그램 <문화극장 조조할인> 중 코너 ‘작은 영화관’ 녹화 현장 * 사진 전체: 필자 본인 제공 김상목(스크리닝 메이커) l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영화제와 상영회 기획부터 매체 기고, 라디오, 텔레비전, 교육 강연 등 들어오는 일 마다하지 않고 즐겁게 지역에서 다양한 영화를 소개하며 활동 중. 저서 『경계의 영화: 대구영화라는 낯선 풍경』(2025), 공저 『이것은 카메라입니다』(2022) 집필.
<동두천> 중 '실사'에 드리운 한계를 넘으면 비로소 선명해지는, 영화가 낳은(을) 새로운 감각과 지형을 발견합니다. 김진아(UCLA 영화과 교수, 영화감독) < 두번째 사랑 >(2007), < 파이널 레시피 >(2013) 등 다섯 편의 장편영화와, 미군 위안부 3부작 < 동두천 >(2017), < 소요산 >(2021), < 아메리칸 타운 >(2023) 등을 연출. 미국 UCLA 대학 종신교수로 시각예술의 재현 윤리, 초국가적 영화론을 가르치고 연구한다. 모든 예술매체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방법을 고민한다. 타인의 고통을 느끼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유배가 필요하다. 편안하고 안락한 나의 공간에서 벗어나, 타인의 고통이 존재하는 불편한 세상으로 스스로를 떠밀어야 한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2021)에서, 새를 찾아 사투를 벌이는 주인공의 여정은 너무 고통스러워 한 번에 읽어낼 수 없었다. 눈밭에 굴러 떨어져 혼절하고, 다시 일어나 겨우 도착한 친구의 집에서 죽어 있는 새를 마주하는 그 여정은, 문장마다 숨이 막혀 몇 번이고 책을 덮었다가 다시 펼쳐야만 했다. 그레이스 조의 『전쟁 같은 맛(Tastes Like War)』(2023)에서, 한때 기지촌 여성으로 살아냈고 끝내 조현병으로 생을 마감한 작가 자신의 어머니의 고통 또한 그러하다. 마치 홀린 사람처럼 야생버섯과 블랙베리를 찾아 숲을 헤매는 그녀의 모습은, 책을 덮고 돌아본 방 안의 벽과 창문조차 낯설게 만들었다. 문학은, 이토록 깊은 몰입 끝에, 언어로 짜인 세계를 읽는 이의 의식 속에 스스로 구축하게 만드는 경이로운 예술이다. 영화는 어떤가? 공간예술인 동시에 시간예술이라는 특수성을 지닌 영화는 몰입과 감정이입을 위해 편집과 음악 등 갖가지 방법을 고안해 내었다. 주인공이 겪는 아픔은 눈물방울의 클로즈업으로, 그것으로도 모자라면 처연한 바이올린 소리로 우리에게 주입된다. 얼핏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게 하는 강력한 매체로 보이지만, 그러나 이 공감은 순간적/피상적이고, 고통을 겪는 타자를 철저히 대상화하는 경험이 될 수도 있다. 카메라의 앞에 선 피사체와 뒤에 선 촬영의 주체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있기 때문이다. 관객은 아무리 몰입되어도 이 보이지 않는 선을 절대로 넘을 수 없다. 이 선은 화면 속 세계를 심리적/물리적으로 관객이 위치한 공간과는 다른 차원으로 완벽하게 분리해낸다. 섹스와 폭력은 물론, 빈곤 포르노(Poverty porn)라는 장르가 생길 정도로, 2D 영상매체는 인류 역사상 그 어떤 매체보다 강력하고 공공연하게 타인의 고통을 오락거리로 삼게 되었다. 그 선 덕분이다. 더 큰 문제는 힘의 역학이다. 큰 비용이 들어가는 실사(實寫, live action) 이미지 제작의 특성상, 전통적으로 카메라의 뒤에는 권력을 가진 자가 있어 왔고 카메라 앞에 서는 피사체는 그 권력에 의해 대상화되어 왔다. 식민 지배국, 제1세계의 시민, 남성, 자본을 가진 자는 카메라의 뒤에서 이미지를 통제하는 힘과 발언권을 갖고, 식민 피지배국, 제3세계의 빈민, 여성, 자본을 갖지 못한 자는 카메라의 앞에서 피사체로 전락하여 목소리를 잃는다. 결과적으로 이 보이지 않는 선은 영화를 만드는 감독에게 한 세계를 창조하는 신에 비교되는 전무후무한 권력을 주었다. 우리가 듣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피사체의 목소리는, 실상 카메라 뒤에 선 권력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공감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이, 우리는 실은 타인의 고통을 착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상현실에서는 이 공식들이 교란된다. 카메라의 앞과 뒤를 구분 짓는 그 선이 와해 되기 때문이다. 프레임으로 제한된 세계를 그 세계 밖에서 관망할 수 있는 평면 영화와 달리, 360도 터진 가상현실의 공간은 관객이 그 세계 안에 들어가게 만든다. 앞서 언급한 자발적인 유배 가 장소적 으로 이루어지는 셈이다. *주1 그 세계 안에 내 자신이 던져진다는 것만으로도 2D 평면 영화의 근본적인 심리적 기제인 ‘관음’이 작동하기 어렵다. 더 중요한 유배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일어난다. 시선의 주체(관객)는 가상현실 세계에서 자신의 몸을 잃는다. *주2 시선은 성성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 대처할 물리적 몸이 사라진다는 것은, 당황스럽다 못해 악몽에 가위를 눌리는 것 같은 공포스러운 경험이다. <소요산>(좌)과 <아메리칸 타운>(우) 중 이렇게 주권(agency)과 권력을 잃고 상처 입기 쉬워진(vulnerable) 관객 앞에, 고통받는 타자의 모습은 전혀 다른 차원의 울림을 갖는다. 이는 대상화된 타자의 고통에 대한 반응과는 사뭇 다른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밥상머리 텔레비전 속 평면화면에 등장한 서식지를 잃은 북극곰은 이미 식상해진 이미지일지 모른다. 그러나 VR 기어를 쓰고 북극해의 빙산 위에 선 내 앞에, 해빙으로 작아진 빙산에 필사적으로 올라타려 애쓰는 북극곰이 있다면, 과연 그렇게 무심할 수 있을까. 어차피 내 눈앞의 세계가 실재하는 것도 아닌데 뭐 그리 유난스러울까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두뇌의 입장에서 보자면 눈앞의 세계가 실재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시신경을 통해 접수된 정보는 실재/가상을 떠나 두뇌를 자극하는 똑같은 전기신호일 뿐이다. 눈앞에 나타나는 사람들과 사물들이 실재가 아님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뇌어도, 그 세계 안에서 느껴지는 감각과 감성(affect)은 우리의 심리를 뒤흔든다. 가상현실 세계에서 이렇게 관객은 몸(physical agency)을 잃고 영상 속에 등장하는 피사체와 같은 차원에 서게 된다. 이는 피사체의 대상화, 타자화를 극복한 새로운 공감기제(empathy-schema)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렇듯 촬영 주체와 피사체, 즉 관객과 영화 속 대상이 동일한 차원에 존재하게 되는 가상현실 매체의 속성은 미군 위안부 3부작을 만들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1992년, 주한미군에 의해 처참히 살해당한 기지촌 여성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영화 이상의 매체가 필요했다. 그녀의 죽음을 전하기 위해, 대상화된 피해자를 ‘공감’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착취할 수 있는 매체는 선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두천의 쪽방에서 피를 흘리며 수 시간에 걸쳐 죽어간 그녀가 느꼈을 외로움, 감히 입 밖으로 말해질 수 없는 그 처참한 죽음과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기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1992년의 그날을 잊힌 역사 속 한 문장이 아니라,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간 관객에 의해 매번 새롭게 살아나는 현재의 사건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 이 질문들은 궁극의 답을 찾지 못해 머릿속을 맴돌며 < 동두천 >(2017) *주3 을 완성하게 했고, 이후 8년간 3부작을 VR로 만들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동두천>, <소요산>, <아메리칸 타운> 포스터 많은 평론가가 미군 위안부 3부작을 두고 역사의 은유와 상징, 혹은 화자로 등장하는 유령에 대해 분석해왔다. 일면 타당한 분석이다. 하지만 이 3부작의 진짜 핵심은, 비극이 자행된 공간에서 화자로서의 유령을 ‘보는’ 데 있지 않다. 핵심은 관객, 곧 우리 자신이 몸을 잃은 시점(視點, point of view), 다시 말해 유령이 ‘되는’ 데 있다. 이는 오직 VR 매체를 통해 가능한 존재론적 유배를 통해 실현된다. 관객이 자신의 존재의 본질이 바뀌었음을 깨닫는 순간은 예기치 않게 다가온다. 3부작의 첫 번째 작품인 <동두천>에서, 처음 관객은 무고한 방관자로서 기지촌의 풍경을 흥미롭게 관찰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시야의 언저리를 스치는 한 여성의 존재를 느낀다. 지나가는 성 노동자, 미군, 행인들과는 달리 어쩐지 시선을 끄는 그녀를, 관객은 점차 눈으로 좇게 된다. 그러나 발소리만 남긴 채 그녀는 좀처럼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좁디좁은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 마침내 그녀가 관객을 향해 걸어온다. 드디어 그녀를 제대로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대가 들 찰나,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 두 사람이 나란히 지나갈 수 없는 그 좁은 골목에서, 그녀는 관객을 향해 직진해온다. 관객은 자신의 몸이 있어야 할 자리를 그녀가 그대로 통과해서 지나가는 것을 경험한다. 그녀가 유령이라면, 관객 또한 이미 유령이 된 것이다. <동두천> 중 미군 ‘위안부’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인 < 소요산 >(2021) *주4 에서는 피사체가 관객을 바라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관객은 더 나아가, 피사체인 그녀의 목소리를 내보내는 몸, 곧 성대가 된다. 낙검자 수용소 곳곳을 거닐며 감금되었던 여성들의 일상을 따라가던 관객은, 어느새 그녀가 짧은 생을 마감하기 위해 뛰어내린 옥상 끝에 선다. 그녀의 몸도, 나의 몸도 보이지 않지만, 그녀의 가쁜 숨소리는 내 옆에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두 귀 사이에서 울린다. 그녀의 숨소리가 멈추고 옥상에서 보이는 산과 하늘에 서서히 밤이 내린다. 수용소의 복도에는 그녀의 흐느낌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흐느낌은 점차 통곡과 오열로 바뀌고, 관객은 또 한 번 깨닫는다. 그 울음소리가 내 몸 밖의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두 귀 사이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소요산> 중 관객과 피사체가 동일한 차원에 위치하는 가상현실 세계에서, 피사체는 더 이상 관객에게 일방적으로 관람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피사체가 관객을 바라보는 역전이 일어나기도 한다. 3부작의 마지막 작품 < 아메리칸 타운 >(2023) *주5 에서는 관객(보는 자)과 피사체(보이는 자)의 역학관계가 뒤바뀌는 경험을 거울이라는 기호(記號, signifier)를 통해 제시한다. 군산 미 공군기지 주변, 주식회사 형식으로 설립된 기지촌 ‘아메리칸 타운’ 곳곳에는 이 공간의 특수성을 설명하듯, 실내 어디든 시선이 닿는 곳마다 거울이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거울 속, 마땅히 내가 비쳐야 할 자리에 정작 ‘나’는 없다. 밤이 내리고, 그녀의 기척이 과거 타운의 번성했던 소리와 함께 되살아난다. 이윽고 거울 속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그녀가 대신 등장한다. 거울 속 그녀는 미군 위안부 여성으로서 하룻밤의 일과를 담담히 수행하고 있다. 고단한 밤이 끝나고, 햇살이 비치는 마당으로 나오는 여인. 관객은 이제 빨래를 걷는 여인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빨래를 걷던 여인이 관객을 알아본다. 관객에게 다가온 여인이 마침내 말을 건넨다. 피사체가 관객을 알아보고 말을 거는 이 순간, 관객은 존재의 도치(倒置, inversion), 궁극의 유배를 경험한다. <아메리칸 타운> 중 2D 영화가 갖는 넘을 수 없는 한계, 즉 대상화의 문제는 이렇게 가상현실이라는 매체 안에서 전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미학적/상징적으로나마 답을 얻는다. 이렇게 보면, 가상현실 영화에서 관람(viewing) 행위를 ‘체험’이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 깨닫게 된다. 몸을 잃음으로써, 비로소 타자의 고통을 ‘몸소’ 체험(體驗)하게 된다는 역설. 신체성(physicality)을 포기하고 유령(幽靈)—즉, 실체 없는 영혼—이 된 관객은, 더 이상 편안하고 익숙했던 자신의 세계에 머무를 수 없다. 관객은 유배된다. 그러나 일단 자아의 물리적 경계인 몸을 잃고 나면,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사물과 세계의 ‘---되기(becoming)’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몸을 잃고, 오로지 시선과 의식만 남은 가상의 세계 안에서, 나는 당신이, 풀이, 나무가, 고양이가, 바위가, 파도가, 지구가 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해빙으로 작아진 빙산 위에 위태롭게 선 북극곰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넘어(장소적 유배), 심지어 내가 그 북극곰이 된다면(존재론적 유배)? 주인을 잃고 눈폭풍에 홀로 갇힌 작은 새를 구하러 가는 『작별하지 않는다』의 화자가 나라면? 새를 포기할 수 없어 눈보라를 헤치고 걷다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해야 한다면? 아니, 춥고 어두운 새장에 갇혀 그녀가 구하러 오는 줄도 모르고 차갑게 식어가는 작은 새가 바로 ‘나’라면? 이렇게 내장 깊숙이 파고드는(visceral) 강렬한 감각으로, VR 매체는 타자의 고통을 존재의 유배로 ‘체험’하게 한다. *주6 그래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당연하지만, 중요한 것은 가상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VR 기어를 벗고 돌아온 실재의 세계다. 가상의 공간에서 당신은 그들이 되어, 그들의 고통을 듣고, 보고, 느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어를 벗은 당신에게는 목소리가, 몸이 있다. 이제 당신이 나설 차례다. *** 주1. VR 실사(實寫, live action) 영화가 평면 영상물과 달리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360도 전체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에 ‘의도가 배제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는 어불성설이다. 드넓은 세계 속에 VR 카메라로 특정 장소 하나를 선택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연출자의 명확한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 사실, VR뿐만 아니라 카메라를 활용하는 모든 매체에서 ‘중립적 시선’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Heisenberg Uncertainty Principle)처럼, 관찰자와 대상은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완벽히 중립적이고 간섭 없는 관찰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관찰이 이루어지는 순간, 그 세계는 이미 관찰자의 개입에 의해 변화하기 때문이다. 주2. 본고에서 논하는 VR 매체의 특성은 실사 촬영 기반의 3D 360 영화적 VR 환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실사(實寫, live action) 가상현실 영화에서는 카메라의 위치가 곧 관객의 시점(point of view)이 되며, 360도로 펼쳐진 세계의 중심이 된다. 현재의 기술력으로는, 3D 360 영화적 가상현실 공간 안에서 관객에게 남는 것은 시선뿐이다. 일부 작품에서 관객에게 아바타 형태로 몸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그 아바타의 행동 범위는 극히 제한적이다. 주3. 동두천 , 360 3D 시네마틱 VR, 12분, 2017 주4. 소요산 , 360 3D 시네마틱 VR, 12분, 2021 주5. 아메리칸 타운 , 360 3D 시네마틱 VR, 16분, 2023 주6. 모든 미디어는 가치 중립적이며, 가상현실 매체 또한 마찬가지다. 가상현실이라는 매체 자체가 본질적으로 공감을 이끌어 내거나 인류애를 증폭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매체의 특성을 활용해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서사를 만들어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실제로 ‘VR 원년’이라 불리던 2016년, 가상현실 매체를 상업적으로 활용하려는 시도들 대부분은 공포와 폭력을 피학적 방식으로 변주하는 데 집중했다.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 침대에 누워 있는 상태를 체험하거나, 납치·감금되어 의자에 묶인 채 가해자와 마주하는 설정의 콘텐츠들이 대표적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작품 역시 타자를 향한 폭력과 성을 관음적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 자신을 피해자의 위치에 놓는 피학적 서사라는 사실이다. 시선만 남은 관객은 타인에게 상해를 입히는 능동적 가해자가 되기보다는, 움직일 수 없는 수동적 피해자 혹은 관찰자로 설정되는 것이 이 매체에 더 적합하다. 이런 관객의 위치성은 실사 다큐멘터리 영역에서는 윤리적 미덕으로 환영받았지만, 오락성과 능동적 서사 전개를 중시하는 기존 영화산업에서는 상업적 활용의 한계로 작용했다. 이는 건전한 자본의 유입을 어렵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가상현실 매체의 대중화에 제약을 걸었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 사진 - " 동두천 ", " 소요산 ", " 아메리칸 타운 ", Gina Kim - 필자 제공
홍상수 의 열아홉 번째 영화 < 밤의 해변에서 혼자 >에서 독일 함부르크 해변에 서 있던 영희( 김민희 )를 업고 간 (1부의) 검은 옷의 남자는 그녀를 (2부의) 강릉에 데려다 놓는다. 그곳엔 폐인처럼 지내다 겨우 신작 준비에 들어간 영희의 옛 애인인 감독 상원( 문성근 )도 와 있다. 사실 홍상수에게 강릉은 낯선 곳이 아니다. 그가 영화에서 공간이 아닌 ‘장소’를 선택해왔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 선택은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두 번째 영화 < 강원도의 힘 >의 주인공 지숙( 오윤홍 )도 강릉을 두 번 찾아간다. 지숙의 (첫 번째) 강릉행 여정은 상권( 백종학 )에 의해서 느슨하게 반복된다. 그런데 상권이 지숙과 같은 강릉행 기차를 탔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관객들은 지숙의 이야기(편의상 1부)와 상권의 이야기(편의상 2부)를 포개 놓고 ‘부지런히’ 빈칸을 채워 나가기 시작한다. 지숙 일행이 지나쳤던 여자에게 상권은 ‘인상이 깨끗하다며’ 지분대고, 1부에서 사고사로 알려졌던 여자의 죽음은 2부에서 상권의 신고로 인해 살인 사건으로 밝혀진다. 낙산사를 찾은 지숙이 남긴 기와불사 메시지(‘어머니 건강하세요’) 역시 2부에서 상권이 발견하고, 지숙이 집 앞에서 발견한 낙서(‘조금 더 긴 호흡으로 기다리자’)를 상권이 썼다는 것도 관객들은 나중에 알게 된다. 영화는 1부에서 던진 질문을 2부에서 답하기도 하고, 1부에서 무의미하게 보였던 것들의 의미를 2부에서 채워 주기도 한다. 두 개의 시간이 교차하고 공간이 중첩되면서 만들어낸 (반복과) 차이를 발견하고, 그 공백을 능동적으로 메우는 것은 사실 홍상수 영화를 보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라고, ‘부지런한’ 관객들은 이후 17편의 영화를 거쳐오면서 열심히 학습해 왔다. 실제로 그 과정은 너무나 매혹적이라 관객들은 홍상수가 만들어 놓은 미로에 기꺼이 빠져들곤 했다. 홍상수의 영화들 20편 가까운 영화를 거치면서 홍상수 의 ‘차이와 반복’도 발전(혹은 변주)을 거듭해 왔다. 같은 사건이 서로 다른 인물들에 의해 반복 재현되면서 차이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오! 수정 >) 꿈이나 판타지를 경유하여 반복되기도 하며(< 다른 나라에서 > <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 서로 다른/같은 인물들이 동일한/다른 공간을 반복하면서 차이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강원도의 힘 > < 생활의 발견 > < 잘 알지도 못하면서 > < 하하하 >). 어떨 땐 현실이 영화를 반복하기도 하고(< 극장전 >), 영화만이 가능한 방식으로 ‘시간’이 반복되기도 하며(< 자유의 언덕 > <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 유사한 사건을 모르는 척 서로 다른 인물들이 반복하기도(< 북촌 방향 >), 서로 다른 사건이 같은 인물(배우)에 의해 반복되기도 한다(<극장전> <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 심지어 최근작 두 편(< 밤의 해변에서 혼자 > < 그 후 >)은 홍상수 자신의 현실을 영화가 스스로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차이-반복’의 틈새는 커지기도, 혹은 작아지기도 했다. (이와 같은 영화 ‘내(內)’ 리듬 이외에 홍상수의 필모그래피를 가로지르는 영화 ‘간(間)’ 리듬도 흥미로운 고민거리이지만, 여기에서 논의하는 건 적절치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이때 문제는 ‘차이-반복-틈새’라는 ‘운동’을 학습해온 관객들은 그 관성(慣性)으로 인해 (능동적이다 못해) 무리할 정도로 영화의 틈새를 메우려 든다는 점이다. 그리고 차이와 반복 사이에 남겨진 나머지, 잘 의미화되지 않는 ‘잉여’에 대해서는 슬며시 눈감아 버리고 만다. 홍상수는 날카롭게 (마치 퍼즐을 배치하는 것처럼) 이 점을 파고든다. 산에 오르다 지숙이 발견한 금붕어는 상권이 키우게 된 금붕어 일리 없다. 그리고 지숙이 산 채로 묻었기 때문에 상권의 금붕어가 한 마리밖에 남지 않은 것도 물론 아니다. 하지만 이를 보는 관객들은 두 개의 사건을 지숙과 상권, 그리고 죽은 태아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고 싶어진다. 두 개의 우연한 독립 사건을 ‘차이-반복-틈새’의 운동 안에 슬며시 밀어 넣은 건 홍상수이지만, 그 안에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건 관객들이다. 그러니 홍상수가 영화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매번 ‘관객들이 그렇게 봤다면 그게 맞는 것’이라고 대답해 온 건 그냥 하는 말의 유희가 아니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운동의 관성에 빨려 들어가는 순간, 운동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간과하기 쉬워진다는 점이다. 이건 마치 자전거 바퀴의 반복적인 회전 운동만을 지켜보고 있으면 이 자전거가 어디로 나가는지 절대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것도 홍상수이지만, 핸들을 잡고 있는 것 역시 그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우리는 이제 홍상수의 게임의 규칙, 그 처음으로 돌아가 그의 운동이 어디로 향하는지 따져 물어야 한다. 그것만이 쳇바퀴 도는 것 같은 홍상수 영화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 그의 게임의 규칙의 출발점이기도 한 <강원도의 힘>을 보는 것이 중요한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 강원도의 힘 >에서 지숙과 상권이 교차/반복하는 여정은 첫 번째 강릉행 일 뿐, 지숙의 두 번째 강릉행은 ‘차이-반복’의 패턴에서 벗어나 있다. 게다가 친구들과 함께 ‘우연히’ 결정한 첫 번째 여정과는 달리 두 번째 여정은 지숙이 오롯이 혼자 결정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두 번째 강릉행이 첫 번째 강릉행을 ‘반복’ 하는 걸까? 아니, 그렇지 않다. 말하자면 두 번째 강릉행은 앞서 언급한 홍상수 영화의 ‘잉여’처럼 보인다. 이제 우리는 지숙의 두 번째 강릉 행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를 환기하기 위한 조금 자세한 줄거리. 대학생 지숙은 두 명의 친구와 함께 1박 2일 강릉 여행을 떠난다. 민박집을 찾던 지숙 일행은 우연히 경찰관( 김유석 )을 알게 되고 도움도 받는다. 그날 저녁, 일행과 함께 술을 마친 경찰관은 술에 취한 지숙을 초소로 데려가 섹스를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다음 날, 지숙과 친구들은 서울로 돌아온다. 며칠 후 지숙은 경찰을 만나겠다며 다시 강릉으로 떠나고, 그와 하룻밤을 보낸다. 한편, 강릉으로 가던 지숙 일행의 기차엔 그 사실을 알지 못한 대학 강사 상권이 타고 있다. 유부남인 그는 최근까지 이어왔던 지숙과의 연인관계를 정리하고 후배의 권유로 강릉 여행에 나선 것이다. 길을 묻는 낯선 여자에게 한눈을 팔고, 급기야 술집에서 만난 여자와 하룻밤을 보낸 상권도 서울로 돌아온다. 며칠 후 기다렸던 교수 임용 소식을 듣게 된 그는 지숙에게 다시 만나자고 연락한다. 목욕탕의 저울, 낙서 첫 번째 강릉행의 끝, 지숙일행은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온다. 그다음 장면에서 지숙은 공중목욕탕에 가고 탕에 들어갔다가 나와 몸무게를 잰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집 앞에 적힌 (상권의) 낙서를 발견하고 수건을 꺼내 지운다. 다시 숏이 바뀌면 친구의 집에 찾아온 지숙이 다시 강릉에 가기로 했다고 말하며 거짓말을 해 달라고 부탁한다. 걱정스럽다는 친구의 모습을 뒤로하고 지숙은 강릉으로 향한다. 여기서 첫 번째 질문. 지숙은 왜 다시 강릉에 가는 걸까? 가장 쉬운 답. 경찰을 만나기 위해서. 친구에게 한 말에 따르면 강릉에서 돌아온 지숙은 그와 몇 번 통화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술에 취한 자신을 겁탈하려다 실패한, 한 번밖에 만난 적 없는 경찰을 만나러 (지숙의 말에 따르면) 하루 만에 돌아올 수도 없는 길을 떠난다는 건 무리한 해석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이렇게 해석하게 되면 첫 번째 강릉행과 두 번째 강릉행 사이의 두 개의 장면(목욕탕, 낙서)이 의미를 잃고 만다. 잘 알려진 것처럼 홍상수 는 숏을 낭비하는 감독이 아니다. 그러니 이 두 개의 장면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목욕탕 장면. 탕에서 나온 지숙이 체중계에 올라간다. 그리고 자신의 몸무게를 한참을 바라본다. 카메라 역시 그녀를 따라 체중을 바라보다 심지어 그녀가 체중계에 내려선 다음 바늘이 영점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체중계 앞을 한참 지키고 서 있다. 그녀의 몸무게를 보여주는 것이 왜 이토록 필요했던 것일까?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영화의 후반부, 지숙이 상권과 다시 만나는 장면까지 기다려야 한다. 2부의 상권 이야기가 한참 지나간 다음, 상권은 지숙에게 다시 연락한다. 그리고 둘은 (이전에 그래왔던 듯) 모텔로 가 섹스를 시도한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말하며 섹스를 하려는 상권에게 지숙은 ‘애 떼는 수술’을 했다고 말한다. 그제서야 우리는 지숙이 체중계 위에서 보고 있던 것이 자신의 몸무게가 아니라 자신의 체중에서 제거된 아이의 몸무게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지숙은 체중계 위에서 떠나간, 아니 자신이 ‘살해’한 아이의 몸무게를 참혹하게 바라본 것이다. 우리의 눈엔 보이지 않지만 지숙에게는 너무나 명백한 아이의 빈자리를 홍상수 는 이 숏을 통해 보여준 셈이다. 이제 우리는 지숙의 중절수술 시점을 기준으로 첫 번째 강릉행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첫 번째 여정에서 어른거리는 죽음의 그림자에 대해서 비로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와불사, 생매장 다시 처음. 강릉에 도착한 지숙과 친구들은 해변가에 앉아서 노래를 부른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딜 갔느냐” 광산 노동자로 일하던 아버지가 딸을 잃고 슬퍼하며 부르던 노래. ‘영영’ 인지 ‘너는’인지 가사를 놓고 반복하며 노래를 하는 친구들을 두고 지숙은 더 이상 부르기 싫다는 듯 가요집에서 가장 행복하고 신나는 노래를 찾아 선창하기 시작한다. (‘오늘 하루 행복하길...’ ) 하지만 죽음에 대한 생각은 지숙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커피숍에 들어온 지숙은 고3 때 자신을 짝사랑하던 동네 친구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간신히 살았지만 병원에 입원한 후 소식도 알지 못하는 그 아이를 지숙은 문득 강릉에 와서 떠올린 것이다. 온천에 가겠다는 친구들과 헤어져 지숙은 (굳이) 혼자 낙산사로 향한다. 그리고 그 길에서 절에서 방생한 거북이 두 마리를 본다. 방생(放生). 불교 경전, ‘금광명경(金光明經)’에 나오는 유수장자는 늪에서 말라 죽어가는 물고기들을 구해낸다. 마치 영화는, 아니 강릉은 죽음으로 이끌리는 지숙을 삶으로 끌어내려는 것처럼 보인다. 낙산사에 오른 지숙은 불상 앞에서 절을 한 뒤 기와불사를 한다. (1부에서 기와불사를 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2부에서 상권이 지숙의 기와불사의 메시지를 발견한다.) ‘어머니 건강하세요.’ 가족을 향해 남긴 유서와 같은 메시지. 먼저 떠나는 자신 대신 오래 살아남아 달라는 기원. 혹은 죽지 말아 달라는 부탁.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산길에서 발견한 ‘살아 있는’ 물고기를 그대로 매장해버리는 지숙의 단호함에는 어떤 결단의 공기가 서려 있다. 아이를 임신한 지숙은 어쩌면 (아이와 함께 동반) 자살을 하기 위해 강릉을 찾아온 것은 아닐까? 자살이라던 낯선 여자의 죽음은 같이 있던 남자에 의한 살인으로 밝혀진다. 자살과 살인(낙태)의 흐릿한 경계. 지금 지숙을 그 경계에 서서 자신의 죽음을 막으려는 강릉의 ‘힘’과 겨루고 있는 중이다. “미안해” 하루밖에 남지 않은 강릉에서의 마지막 밤, 함께 술을 마시던 친구들은 (마치 지숙의 자살을 방조라도 하듯) 지숙을 ‘상투적’이라며 비난한 다음, 그 자리에 혼자 남겨두고 자리를 떠난다. (강릉역에 도착해 길도 알지 못하는 지숙을 덩그러니 혼자 두고 역에 숨어 그녀가 헤매는 모습을 즐겁게 지켜보던 두 친구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오히려 그녀의 자살을 막는 건 그 자리를 지키는 경찰이다. 술에 취한 그는 지숙을 ‘초소’로 데려간다. 초소(哨所). 경계와 감시를 하는 곳. 혹은 죽음으로부터 지숙을 지키는 장소. 경찰과 함께 (어쩌면 덕분에) 지숙은 그 밤을 무사히 넘긴다. 이렇게 지숙이 죽음을 넘겼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 강원도의 힘 >에서 가장 이상한 장면인 이튿날 아침 민박집 앞에서의 숏이 비로소 이해가 된다. 마치 큰 병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킨 듯 지숙이 민박집 앞 의자에 힘없이 앉아 있다. 어젯밤에 사라진 친구들은 지숙의 흐트러진 머리를 대신 묶어주며 지숙 앞에 와서 미안하다며 사과한다. 무엇이 미안해서? 너를 자살하도록 내버려 두어서 미안해. “사람을 이런 데서 혼자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법이 어딨어요?” 이렇게 돌아온 서울에서 지숙은 함께 죽는 대신 아이만 죽게 하는 선택을 한다. (목욕탕 장면) 하지만 죄책감의 시달리는 지숙 앞에 상권의 메시지가 도착한다. (집 앞 낙서 장면) 지숙이 두 번째 강릉행을 결정하는 건 아마도 살고 싶어서였던 건 아닐까? 아이를 죽이고도 끝나지 않는 굴레, 이 ‘긴 호흡’에서 벗어나는 길은 아마도 죽음밖에 없다고 지숙은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의 죽음(자살)을 (다시 한번) 막기 위해 지숙은 강릉으로 향한다. 이 두 장면이 없었다면 이 영화에서 두 번째로 이상한 장면(지숙이 자신을 늦게 데리러 온 경찰에게 이상할 정도로 심하게 화를 내는 장면)은 성립하지 않는다. 강릉에 도착해 경찰의 차에 탄 지숙은 사력을 다해 그에게 화를 낸다. “사람을 이런 데서 혼자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법이 어딨어요? 아무도 아는 사람도 없는데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내가 얼마나 불안했는지 알아요? (...)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내가 가긴 어딜 가?” 히스테리에 가까운 지숙의 분노는 ‘불안한 나를 혼자 죽게 하지 말아요. 제발 나를 살려주세요’라는 절박한 외침처럼 들린다. 그렇게 강릉에 찾아온 지숙을 경찰이 모텔로 데려가 (마치 상권처럼) 섹스를 하려 들 때 지숙은 경찰의 머리를 마구 때리며 거부한다. 머쓱해 진 경찰이 ‘내가 술 깰게’ 라고 말하며 고쳐 앉고, 지숙이 잠깐 화장실에 가자 자살이라도 하려는 듯 베란다로 나가 난간 밖으로 몸을 내민다. 하지만 난간 끝에 매달려 있던 경찰은 이내 다시 주섬주섬 방 안으로 들어온다. 생각해보면 홍상수 의 영화에서 섹스에 실패한 남자가 자살을 떠올리는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아니 차라리 섹스와 죽음이 가깝게 붙어 있다고나 할까? < 극장전 >의 상원( 이기우 )도 영실( 엄지원 )과의 섹스가 잘 되지 않자 깨끗하게 죽고 싶다고 말하고 수면제를 사와 (결국 실패가 예정된) 자살을 시도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건 자살시도 자체가 아니라 이 시도가 모두 실패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실패한 자살의 반복. 경찰이 난간을 다시 기어 올라올 때, 우리는 안도하면서 영화 초반, 지숙이 이야기한 (자살에서 살아 돌아온) 친구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죽음을 생각하며 강릉을 다시 찾은 지숙도 아마 ‘살아’ 돌아갈 것이다.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통곡을 하는 지숙의 울음 속엔 (자신이) 살았다는 안도와 (자신이 살기 위해 결국) 죽어야/죽여야 했던 아이에 대한 애도가 뒤섞여 있다. 그 후 상권이 다시 찾아와 섹스를 하려 들 때, 지숙은 임신시키려는 것이냐며 “나도 좀 살아야겠어요.” 라고 말한다. 다시 강릉 행을 반복하며 죽음을 떠올리지/실행하지 않겠다는 지숙의 다짐은 병원을 나서며 담배를 끊고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동수( 김상경 )(< 극장전 >), 죽음의 문턱에 선 영희를 업어 강릉으로 데려온 검은 옷의 남자(< 밤의 해변에서 혼자 >), 과거의 애인 창숙( 김새벽 )을 반복하지 않고 출판사를 박차고 나와 눈을 맞으며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아름( 김민희 )(< 그 후 >)(아직도 나는 아름이 출판사에 다시 방문하는 에필로그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과 닮아 있다. 차이와 반복의 운동에서 벗어난 ‘잉여’는 차이와 반복의 운동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말하자면 이 ‘잉여’들이 홍상수 의 게임의 규칙의 단단한 힘의 균형에 균열을 가져오는 것이다. 상권은 과거를 반복하지만 그 자리에 지숙은 없다. 교수로 임용된 상권은 속물 같은 동료 교수들과 함께 술을 마시다 옆 테이블에서 인사 온 여학생을 탐욕스럽게 바라본다. 아마도 똑같은 방식으로 상권은 지숙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건 그가 교수가 되든 되지 않든 강원도에서 어떠한 배움도 얻지 못한 상권의 벗어날 수 없는 반복이다. 상권도 지숙처럼 ‘눈물’을 흘리지만 그건 먼지가 만들어낸 ‘인공/가짜’ 눈물일 뿐이다. (“눈에 뭐가 들어갔었나 봐.”) 섹스에 대한 상권의 끊임없는 집착은 (죽음에 이끌리는 지숙과는 달리) 삶에 대한 집착에 다른 말처럼 보인다. ( 홍상수 의 남자들이 섹스에 실패할 때 죽음을 떠올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는 설악산 권금성 정상에서 아슬아슬한 산행을 하는 이들을 보면서 자신과는 다른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라며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영화는 그런 상권의 모습을 횟집 수족관에서 ‘살아 있는’ 물고기와 병치시킨다. 살아 있지만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는 존재. “임신시키려고 그래요?”, 사라진 금붕어 하지만 동시에 섹스는 그들에게 두려운 대상이기도 하다. ‘사랑해’라고 말하며 지숙과 섹스를 하려던 상권은 그녀가 “임신시키려고 그래요?”라고 말하자 멈칫한다. 이후 십 여 편의 영화를 돌아온 우리는 홍상수 의 남자들이 ‘사랑’라고 말할 때 이것이 곧 ‘섹스 하고 싶어’의 다른 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 밤과 낮 >의 성남( 김영호 )을 제외하면 이 말을 부인에게 한 (유부)남은 없었다는 점도 함께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 성남조차 부인의 임신 소식에 불안해한다. (성남의 목욕탕 꿈 장면을 떠올려 보라.) < 극장전 >에서 상원에게 (부인도 여자친구도 아닌) ‘첩’이 되어주겠다는 영실의 말은 섹스는 하지만 부인/가족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여기엔 ‘짝만 찾으면 만사형통’(< 오! 수정 >)이지만, 그 짝이 ‘부인-임신-가족’으로 이어지는 것은 필사적으로 막고 싶어하는 일종의 저항감이 깃들어 있다. 마치 이 저항감을 반영이라도 하는 듯 홍상수의 영화에서 가족은 거의 등장하지 않거나, 등장하더라도 어딘가 한쪽이 비어 있는 형태(<극장전> < 하하하 > < 다른 나라에서 > <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로 나타난다. < 그 후 >에서 창숙과 사랑에 빠져 새벽에 집을 도망치듯 나오던 봉완( 권해효 )은 ‘아빠’라고 부르는 (부인 혹은 딸, 결국은 가족) 소리를 못 들은 척 하고 떠나 버린다. (부인의 임신, 혹은 딸의 등장에) ‘집’으로 돌아온 성남과 봉완이 오래가지 않아 또다시 집을 떠날 것이라는 예감은 근거 없는 상상만은 아닐 것이다. 상권은 아파트 주차장에서 갑작스럽게 후진하는 차에 부인과 아들이 치일 뻔 하자 불같이 화를 낸다. 하지만 아이/부인이 죽을 뻔한 것에 대한 두려움은 오히려 아이/부인이 죽었으면 하는 자신의 은밀한 소망을 깨달은 데서 오는 두려움처럼 보인다. (이 장면에서 상권의 가족은 어디론가 외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결국 이 외출은 주차장에서의 에피소드를 보여주기 위한 장면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상권에게 아이와 부인은 속물에 가까운 교수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이유이자 ‘사랑’하는 여자들과의 섹스를 숨겨야 하는 번거로운 방해물에 불과하다. 강릉에 다녀온 다음, 사라진 한 마리의 금붕어가 어디로 갔는지 상권은 알지 못한다. (아마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지숙은 아마도 다시는 상권을 만나지 않을 것이다. 살기 위해서. 다시는 죽지 않기 위해서. 어쩌면 죽음의 반대편에서 ‘산다’는 건, 탐욕스럽고(교수 임용을 부탁하기 위해 찾아간 노교수는 상권이 잊고 놓고 간 우산을 흡족하게 바라본다.), 속물 스러운(상권은 자신의 심부름을 했던 여직원에게 잔돈을 가지겠냐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대고, 지나가는 개에 물릴까봐 전전긍긍하며, 원했던 교수직을 힘들게 얻은 다음 동료들과 고작 취중 섹스의 쾌감이나 논해야 한다.) 것일지도 모른다, 라고 < 강원도의 힘 >은 말한다. 이 영화 한편으로 홍상수 영화 모두를 아우르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누군가 (홍상수의 ‘베스트’가 아니라) ‘홍상수 영화는 결국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 강원도의 힘 >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20년을 돌아 이제 <강원도의 힘>을 다시 생각해볼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