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저리와 도둑놈
- 감독
- 남기남
- 제작년도
- 1992
- 출연
- 심형래, 유퉁, 강희영, 이미령, 서권순, 주상호, 박동룡, 양종철, 윤일주, 조학자, 전숙, 김신명, 박용팔, 김창기, 황인조, 이석구, 장정국, 장선
라이브 클럽 ‘그레이하운드’에서 내달 무대에 설 뮤지션의 오디션을 갖는 중이다. 사장으로 보이는 사람은 무대 앞에 여유롭게 앉아 있고, 바텐더이자 덩치로 보이는 남자는 다소 성마른 표정으로 바 너머의 사람들을 관찰한다. 휑뎅그렁한 플로어에는 몇몇 뮤지션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섰다. 그러다 모던락을 연주하는 밴드가 연주를 시작한다. 그들이 떠나고 다시 무대는 조용해진다. 내공을 겨루기 전 실력을 가늠하려는 걸까, 무대 주변은 흡사 고수들이 무협을 겨루는 객잔을 방불케 한다. < 라이브 클럽 그레이하운드 >라는 제목으로 먼저 소개된, <라이브하드>의 ‘겨울 편’의 풍경은 그러하다. ‘머저리클럽’의 두 멤버와 그들의 친구가 이야기의 중심에 놓여 있으나, 영화는 오디션 무대에 선 뮤지션들의 연주에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모던락에 이어 헤비메탈이 무대를 뒤흔들고, 여성 재즈 듀오가 퓨전의 아름다움을 펼치는가 하면, 흑인 블루스 연주자가 기타 연주와 노래로 흑인의 영혼을 전한다. 마침내 등장한 머저리클럽이 펑크를 연주하지만 그들의 무대는 실패의 판정을 받고 만다. 그들의 아픔을 느끼기도 전에, 뒤늦게 나타난 플라밍고 기타 연주자가 의자에 앉는다. 그렇게, 황량했던 무대는 점차 음악의 전시장으로 변한다. 흑백의 이미지 위로 색채를 입히는 것은 음악의 색깔들이다. 어지간한 음악 프로그램보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음악을 듣는 맛이 눈길을 끄는 영화인 셈이다. <라이브하드>의 ‘겨울 편’은 제천영화제에서 단편으로 앞서 소개된 바 있고, 황욱 감독은 앞과 뒤에 ‘늦가을 편’과 ‘봄 편’을 덧붙여 부천영화제의 장편 섹션에 초대받았다. 만들어진 시기가 다른 만큼 오리지널 단편과 새로 추가된 파트는 촬영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어두운 지하의 공간에서 주로 촬영된 겨울 편이 인물 가까이 긴밀하게 접근한다면, 늦가을 편과 봄 편의보다 넓은 앵글은 느슨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오디션과 해프닝의 기록에 가까운 겨울 편과 비교해, 인물의 배경이 추가된 장편 버전이 오밀조밀한 이야기의 구조를 갖춘 것은 물론이다. 덕규(크리스 라이온 분)는 멀리 한국에 와 블루스를 연주하려고 했으나 그에게 요구되는 건 인기 있는 힙합이다. 겉보기에 그는 흑인이기 때문이다. 머저리클럽의 베이스 주자인 철( 이재호 분)은 노래를 부르고 싶지만, 베이스나 잘 치라는 말을 듣는다. 사실 그는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한다. 머저리클럽의 리더인 임재(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자취를 감추었고, 남은 멤버인 철과 섭(갈치 분)은 그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은정( 공민정 분)은 임재를 사랑하는데 그는 매번 다른 여자와 놀아난다. 여자들이 떠나면 그가 언제나 다시 자신의 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그녀는 스스로를 위로한다. 음악에 관한 영화였던 ‘겨울 편’은 ‘가을’과 ‘봄’ 편을 얻으면서 가난하고 쓸쓸한 청춘의 이야기로 화한다. 황욱 감독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가 결합된 스타일의 영화를 만든다. 그가 그것을 의도한 것인지 앞으로도 그런 스타일을 유지할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지금까지 소개한 두 편의 영화 - < 개 >(2015)와 < 라이브하드 >의 스타일은 그러하다. 한국에서 근래 발표된 음악영화들이 대부분 다큐멘터리였던 상황에서 <라이브하드>의 형식은 괜히 낯설다. 두 편의 필모를 가진 감독답지 않게 황욱은 배우들의 연기 연출에 단연 뛰어난 실력을 보인다. 뮤지션인 사람과 뮤지션이 아닌 사람, 배우인 사람과 비전문 배우인 사람이 뒤섞여 있으면 영화가 뒤뚱거리기 마련인데, <라이브하드>는 그런 단점 따위는 없다는 양 자유롭다. 뮤지션들의 연주 부분과 이야기를 맡은 배우들의 부분이 매끄럽게 연결돼 단순한 영화 너머로 일상의 한순간을 완성한다. 전작 <개>가 마치 사건 르포를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듯이, <라이브하드>는 가난한 뮤지션들이 처했음 직한 상황에 세세한 마음을 쓴다. 그것으로 현실감을 득한다. 그게 전부다. 그들을 대변하겠다고 목청을 높이거나 그들을 위로하는 척하는 태도가 없는 점이야말로 이 영화의 위대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라이브하드>는 차가운 현실을 차갑게 그린 영화일까. 차가운 현실을 차갑게 그린 영화는 적지 않다. 거꾸로, 차가운 현실을 따뜻하게 포장한 영화는 더 많다. <라이브하드>는 좀 이상한 영화다. 차가운 현실을 애써 포장하지 않아 뮤지션의 하루를 절감하게 하면서도 마냥 우울하지는 않다. 차가운 방에 작은 스토브를 켜놓아 온기를 나누는 느낌이랄까. 천사처럼 한 남자가 그들 곁에서 계속 춤을 추며 기운을 북돋우기 때문일까. 세 번째 이 영화를 보면서 어렴풋이 그 답을 알 것 같았다. 영화에서 뮤지션과 친구들은 각자 거울을 바라본다. 헤비메탈 밴드의 리더는 화장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묶는다. 덕규는 정신을 가다듬으려는 듯이 거울 앞에서 얼굴을 씻는다. 철은 현실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거울을 바라보는 습관이 있다. 은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앞에는 그들 자신밖에 없다, 당연히. 그렇다면 <라이브하드>는 그들의 자화상을 그리는 영화일까? 자화상을 그리는 것은 화가들이나 할 짓이다. 뮤지션들은 자화상을 그리는 게 아니라 무대 앞의 관객을 바라보며 연주를 해야 한다. <라이브하드>에서 관객에 해당하는 사람은 클럽 ‘라이브 와이어’의 사장이다. 카메라는 문득, 기타를 들고 포크를 부르는 여자 싱어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포착한다. 그는 분명 무대를 바라보고 있으나 그의 눈길은 어딘가 다른 곳을 응시한다. 홀로 객석을 지키는 남자인 그의 눈길은 현실의 슬픔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 관객은 혼자 남았고, 뮤지션은 그를 보며 슬픔을 연주한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며 슬픔을 위로하는 존재다. 그게 작은 불씨를 만든다. 그 불씨를 간직한 사람이라면 <라이브하드>의 마지막 장면에 초대받을 자격이 있다. <해피투게더 독립영화> 상영작: 2018.9.29.(토) 17:00 시네마테크KOFA 2관(GV)
< 나무들 비탈에 서다 >는 황순원 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문예영화이자 최하원 감독의 데뷔작이다. 또한 이 영화는 1960년대 한국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영화 중 하나이자 가장 데뷔작다운 데뷔작으로 꼽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개봉 당시 기사에 의하면 이 영화는 “네임 밸류만을 존중하는 풍토를 박차고 단역에 이르기까지 기성 영화인들을 완전 배제” 1) 한 것에서부터 주목받았다. 또한 “처녀 연출자답지 않은 뛰어난 재능”과 “전체 연기진의 호연 가운데 그들의 개성미를 부각시킨 흑백화면의 효과” 2) 가 놀랍다는 극찬과 함께 “신인군의 의욕과 저력을 보여준 역작” 3) 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필름이 남아 있지 않아 그 실체를 확인할 길이 없다가, 2015년에 발굴되면서 소문에 값하는 영화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이 영화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 모더니즘 영화로서의 의미, 문예영화로서의 위상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논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전쟁으로 파괴된 개인의 내면을 표현한 본격 염전(厭戰) 영화라는 점이다. 이 영화는 제작 신고 단계에서 ‘염전(厭戰), 반전(反戰)이 드러나지 않게 반공영화로 제작하라’는 권고를 받고 반려된다. 이에 영화의 오프닝에 “이 영화는 전쟁을 도발한 북괴에 대한 고발이다. ……”라는 자막을 명시하고, 역시 황순원 소설 원작인 < 카인의 후예 >와 함께 다시 신고하여 수리된다. 그런데 정작 영화에서 북한군은 나오지 않고 전쟁터에서 비정해져 가는 국군들의 심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게다가 대부분의 내용은 그들이 제대한 이후의 정신상황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작에서는 전반부가 동호의 이야기로, 후반부는 현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해, 영화에서는 제대한 현태를 주인공으로 하여 제대 후 그의 생활을 주로 보여주는 가운데 그의 기억을 통해 전쟁 당시 동호의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영화사에서 전후의 풍경이 나오는 대표적인 영화는 < 오발탄 >( 유현목 , 1961)이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오발탄>은 4.19 덕분에 제작될 수 있었던 행운의 걸작이다. 5.16 이후 한국 사회의 어둡고 부정적인 면을 영화에서 그리는 것은 점점 더 규제되어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유럽에서는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다루는 영화들이 적극적으로 제작되며 전후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했다. 그러나 한국영화계에서는 그러한 경향이 거의 나타나지 못했다.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개인의 내면을 다루는 전후소설은 문예영화 전성기에도 몇 편―< 잉여인간 >, < 까치소리 > 등―만 영화화되었을 뿐이다. 심지어 이청준 의 「병신과 머저리」를 영화화한 < 시발점 >( 김수용 , 1969)과 같은 영화에서는 한국전쟁 설정을 굳이 중일전쟁으로 치환하고 있다. 이는 그만큼 냉전으로 인한 분단국가로서 겪은 동족상잔의 상처를 깊이 건드리는 것이 영화의 제재 차원에서나 정치적, 산업적 측면에서나 여러 모로 부담스러운 문제였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1968년을 기점으로 사회 전반에 대한 통제가 한층 강화되며 한국영화에서 우울이나 절망을 그리는 것에 대한 규제 또한 더욱 강화된다. ‘젊은이의 절망은 적을 이롭게 할 수 있으므로 용공(容共)’이라는 논리로 이만희 감독의 < 휴일 >이 상영되지 못한 것도 1968년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 미워도 다시 한 번 > < 속 팔도강산 > < 춘향 > 등의 보수적 장르물이 국산영화 흥행의 수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게오르규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 25시 >(앙리 베르누이, 1967)가 외국영화 흥행 1위에 오르고, 28살의 클로드 를르슈 감독에게 최연소 칸 그랑프리의 영광을 안긴 < 남과 여 >(1966) 같은 영화가 한국영화계에 새로운 영감을 던진다. 그러면서 한국전쟁 이후 유럽 영화를 동경하며 지속적으로 갈구되었던, 참신한 형식으로 현대인의 고뇌를 구현하는 모더니즘 영화가 엘리트 집단에 의해 시도된다. 김승옥 원작의 < 안개 >( 김수용 , 1967), 홍성원 원작의 < 막차로 온 손님들 >( 유현목 , 1967), 이어령 원작의 < 장군의 수염 >( 이성구 , 1968) 등이 그러한 영화들이다. < 나무들 비탈에 서다 >는 그러한 영화들과 동궤에 놓여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영화들이 근대화 드라이브 속에서의 현대인의 피로를 그리면서 현실에 대해서는 은유나 우의로 에두르고 있다면, < 나무들 비탈에 서다 >는 한국전쟁이라는 구체적인 원인과의 관계 속에서 젊은이의 비정과 고민을 묘파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현실과 대면하는 모더니티를 구현한다. 전쟁 중 동호의 결벽성을 혐오하여 그의 순정을 파괴함으로써 그를 자살로 몰아넣은 현태가 제대 후 극도의 자기혐오 속에서 위악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전쟁으로 인한 외상의 병리를 드러낸다. 또한 돈에 집착하며 이익만을 추구하다 사랑하는 여자를 잃는 윤구( 김순철 )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당하기만 하는 석기( 김성옥 )의 모습은 전후(戰後) 증상의 유형을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는 전후 사회의 병리를 보여주는 데 머물지 않고, 숙( 문희 )의 결연한 의지와 현태의 속죄에 의해 증상에 대한 치유의 희망이 담보되며 멜로드라마적 비학으로 봉합된다. “이 일을, 마지막까지 감당해야 한다”는 숙의 결의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맺는 원작보다 더 낙관적인 결말이다. 최하원 감독의 행보로 보건대 이러한 결말에서 나타나는 건전한 윤리와 희망에의 지향은 이후 최하원 영화세계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요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영화보다도 염전(厭戰) 의식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이 영화가 검열을 통과하여 개봉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지향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 이 영화에는 참신한 면모들이 많이 들어 있다. 현태 역을 맡은 이순재 의 연기는 지금 봐도 매우 인상적이며 < 오발탄 >의 김진규 를 잇는 지적 성격배우의 계보에 놓을 만하다. 또한 감각적이면서도 고민이 드러나는 카메라워크는 흑백화면 속에서 오히려 돋보이며, 현태의 심리 묘사에서 사용되는 정묘한 몽타주는 현재의 관점으로 봐도 신선하다. 아울러 지금은 한국의 어머니를 대표하는 배우가 된 손숙 씨가 이 영화로 데뷔했다. 영화 속에서 그녀를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1)《경향신문》, 1968.4.13. 2)《신아일보》, 1968.4.13. 3)《대한매일》, 1968.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