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털도사
- 감독
- 염우태
- 제작년도
- 1989
- 출연
- 안정현, 황일청, 김기현, 손원일, 성유진
어른 모두 좋아할 수 있는 장르가 활극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홍길동이 만들어 지고 40여년이 지난 지금 상업애니메이션은 어떻게 변화하였는가. 2011년 한국의 박스 오피스를 강타하고 있는 작품은 드림웍스의 < 쿵푸팬더 2 > 이다. 이 영리한 블록버스터는 1편과 마찬가지로 화려한 액션과 코믹한 스토리 라인, 그리고 아주 쉬운 코드의 감동을 가지고 있다. < 쿵푸팬더 >1,2 가 전 세계의 박스 오피스를 강타하자 한국의 투자자들은 한국의 <쿵푸팬더>를 만들기 위해 외국의 시나리오 작가, 기술자, 연출자를 데려오기 바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아는 한 시대를 넘어서 한국의 자체적인 힘으로 만들어진... 그리고 <쿵푸팬더> 보다도 더 훌륭하면서도 시대를 앞서간 한편의 한국 애니메이션을 소개하려 한다. 바로 < 머털도사 >다. < 머털도사 >는 1989년 만화계의 거장 이두호의 원작만화를 염우태 감독이 애니메이션화한 TV스폐셜 용 애니메이션이다. 지금 다시 기억을 더듬어 보면 20년 전의 이 작품이 얼마나 위대한 엔터테이먼트였는지 알 수 있다. 도술을 부리는 도사들의 액션물이면서 기존의 우리가 막연한 상상력으로 떠올리는 권위 있는 도사의 모습이 아닌 오히려 못생기고 어리석어 보이는 주인공 < 머털도사 >를 앞세운 점도 외국의 쿵푸 히어로 팬더를 몇 십 년 전에 넘어선 설정이었다. 게다가 그런 모자란 캐릭터를 통해 보여주는 코믹한 에피소드들 역시 작품의 재미를 더한다. 단순히 엔터테이먼트의 역할 뿐 아니라 무소유를 기본으로 하는 누덕도사와 탐욕으로 가득한 왕질악 도사의 대결. 그리고 그런 탐욕까지 빼닮은 왕질악 도사의 제자 꺾꿀이의 배신과 같은 의미 깊은 스토리 라인은 액션에 놀라고 개그에 웃는 동안 깊은 메시지를 시청자에게 전달한다. 어디 그 뿐인가 주인공인 < 머털도사 >의 도술의 방법은 자기 몸의 일부인 머리털을 뽑아 상대방을 변화시킨다. 아마 마법을 다룬 환타지 계열의 이야기에서 이정도의 파격적인 설정이 있었던 건 오승은의 <서유기>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원작 자체가 이렇게 뛰어난 작품이었다면 이 작품을 애니메이션 화 한 염우태 감독의 연출도 이 작품을 걸작으로 만드는데 엄청난 역할을 했다. 누덕산과 질악산 그리고 그 마을을 원씬 원컷으로 지나가며 연출된 오프닝(3D도 아닌 2D 작화로!)은 감독이 이 작품에 얼마나 심열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꺾꿀이와 머털도사의 도술 대결에 쓰인 변신술 장면은 당시 애니메이션에서 흔치 않은 몰핑 기법으로 연출되었다.(그것도 2D로!) 지금 봐도 화려하고 웃기고 재미있는 영화 엔터테이먼트인 < 머털도사 >를 < 쿵푸팬더 >가 나오기 20년 전에 만든 예술가 집단이 한국에 존재했다. 그리고 사라졌다. <쿵푸팬더> 같은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떼돈을 벌고 싶어 하는 투자자와 제작자들은 이 점에 대해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TV애니메이션 < 달려라 하니 >의 의의 < 달려라 하니 >는 1988년 8월 15일부터 약 3개월간 KBS-2TV에서 매주 일요일 저녁 5시 15분에 방영된(첫 화만 공휴일인 8월 15일 월요일에 방영) 전 13화의 국산 TV애니메이션이다. 당시 높은 인기를 모으던 아동∼소년층 대상의 만화잡지 「보물섬」에서 1985년 1월호부터 1987년 6월호까지 인기리에 연재된 후 애니메이션화되어, 국산 TV애니메이션의 초창기를 장식했던 작품이다. 애니메이션으로서도 화제를 모아 두 번째 `하니` 시리즈로 <천방지축 하니>(전 13화, 내용은 <달려라 하니>와 직접 이어지지 않는다)가 제작되기도 하고, 1990년대에도 여러 번 재방영되는 등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 달려라 하니 >가 방영되었던 1988년은 한국 TV애니메이션이 막 개화하던 시기였다. 1987년 5월 5일 KBS TV의 < 떠돌이 까치 >와 MBC TV의 < 달려라 호돌이 >가 방영되면서 시작된 한국 TV애니메이션 역사는, 1988년에 접어들면서 <달려라 하니>의 등장으로 본격적인 연속극 형태로 진화하였다. <떠돌이 까치>가 1화 완결의 단막극 형식이었고, <달려라 호돌이>는 매주 방영물이었지만 10분 정도의 짧은 단편이었으며 <동화나라 ABC> 등은 옴니버스 형태의 작품이었다는 점에서, <달려라 하니>의 의의는 충분히 특기할 만한 부분으로 평가받아왔다. (「동아일보」 1988년 4월 29일 기사 `양 TV 연속극식 만화영화 만든다` 참조) < 달려라 하니 >의 인기 `하니`란 캐릭터는 만화가 이진주씨가 대본소용 만화에서 창작한 이후 자신의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등장시켜 많은 인기를 끌었는데, 그 중에서도 < 달려라 하니 >는 애니메이션화되기 이전부터 이미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화가 되면서부터 각종 관련상품이 출시되어 더 높은 대중적 인지도를 얻게 되었는데, 예를 들어 제일제당에서는 TV애니메이션 방영 직후인 1988년 12월 `백설햄 달려라 하니 소세지`를 출시하여 인기를 끌었고, 샤니에서는 `달려라 하니 스낵`을, 삼립식품에서는 `하니바`라는 빙과류 제품을 출시하였다. 1988년 12월 24일자 「매일경제」의 `만화주인공 판촉활동 잘한다`란 기사를 보면 1988년 8월에 출시된 만화 < 아기공룡 둘리 >의 소시지가 인기를 끌자 제일제당 측에서 경쟁제품으로 < 달려라 하니 > 소시지를 내놓았다고 되어 있다. 또한 샤니의 <달려라 하니> 스낵은 하루 판매물량이 5천상자로 풀가동되고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어, 당시 아동 대상의 상품에 만화 캐릭터 채용이 얼마나 높은 인기를 구가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만화 캐릭터는 그 이전부터도 아동 대상의 상품에선 자주 사용되었으나 < 달려라 하니 >는 특이하게도 카메라 광고에 사용되는 등 청소년이나 성인 대상의 제품 광고에도 본격적으로 사용된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남정밀에서 1988년 만든 올림픽 공식 카메라 `착카`가 '착카 널 갖고 싶어'라는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하니 캐릭터를 TV 및 인쇄광고에 기용했던 것이 그 사례다. 사진의 `백설햄 달려라 하니 소세지`는 각각 1989년 4월, 7월에 구입했던 것 < 달려라 하니 > 스낵 포장지 잡지에 실렸던 빙과류 `달려라 하니바` 광고 1988년 당시 스포츠서울에 실린 `착카` 카메라 광고. < 달려라 하니 > 캐릭터가 신문 지면의 세로 방향으로 크게 사용된 대형 사이즈의 광고였다. 1988년 당시 TV에서 방영된 `착카` 카메라의 < 달려라 하니 > 애니메이션 광고. TV CF용으로 별도로 만든 애니메이션 화면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사진은 TV CF화면을 잡지에 실어놓은 기사를 촬영한 것 (※위 사진은 전부 필자가 1988∼1989년 당시에 직접 수집해놓았던 자료를 촬영한 것으로, 필자가 모은 과거의 만화/애니메이션 자료를 축적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만화&애니메이션 아카이브 사이트 [미르기닷컴]의 DB에서 발췌. 캐릭터 판권은 원작자 이진주씨에게, 상품의 권리는 각 제작사에게 있음.) 그 중에서도 「동아일보」 1989년 1월 17일자 `TV프로그램 수출 크게 늘어`란 기사를 보면, “KBS의 급격한 수출증가는 만화영화 시리즈물 수출에서 비롯됐다. < 까치 > < 아기공룡 둘리 > < 동화나라 ABC > < 달려라 하니 > 등 만화영화 4편이 총 수출액 22만5천2백달러 중 21만8백달러를 차지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달려라 하니> 13편이 요르단 등 5개국에 5만6천50달러에 수출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것이 1989년 KBS와 MBC 양 방송국이 < 천방지축 하니 >를 비롯 < 2020년 우주의 원더키디 >, <한국전래동화>, < 머털도사 > 등 TV애니메이션 제작에 집중하게된 큰 이유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아일보」 1989년 4월 6일자의 `TV 국산만화영화 방영 늘려`란 기사에도 'KBS는 이 3개의 만화영화 시리즈를 국내방영과 함께 외국에 수출할 계획'이라고 밝혀, 이 작품들의 기획에는 전년도의 애니메이션 수출 경험이 큰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1980∼90년대식 ‘미디어믹스’ 전략의 최초 사례 이와 같이 < 달려라 하니 >는 만화잡지 연재시의 높은 인기에 힘입어 TV애니메이션이 제작되고, TV 방영 이후 수출·캐릭터 사업 등 다방면으로 진출하며 국산 애니메이션 산업의 초기에 있어서 < 아기공룡 둘리 >와 함께 가장 성공적인 사례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그 인기는 2000년대에도 여전하여 각종 TV 연예 프로그램이나 개그 프로그램에서 단골 소재로 사용되었고, 2010년 1월 서울시 강동구는 <달려라 하니>의 배경이 되었다는 성내동을 ‘하니 테마 마을’로 조성하기 위해 그 첫 번째로 `성내하니공원`을 만들었다고 발표했다. 「원작만화 연재→애니메이션화(특히 TV애니메이션)→관련상품과 해외 수출」로 이어지는 만화의 ‘선순환 구조’는, 1960∼70년대 일본에서 구축된 이례 1980년대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가 적극적으로 도입하고자 노력했던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이런 구조는 2000년대 이후 허물어졌다. 2000년대 국산 TV애니메이션은 대부분 원작이 없는 오리지널 작품이거나 원작이 있더라도 잡지에 연재된 만화 작품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캐릭터상품이 원작이거나 단행본 작품이 원작인 경우 등이 많았다.) 하물며 이미 만화잡지란 존재가 청소년이나 아동층에서도 더 이상 만화를 보는 주된 접근 방식이 아니게 된 2010년대에는, 「원작만화 연재→애니메이션화(특히 TV애니메이션)→관련상품과 해외 수출」 구조가 다시 재구축되리라는 기대가 더욱 어려워졌다고 보인다. 이미 만화를 보는 주된 구독층은 만화를 잡지가 아닌 단행본, 혹은 웹툰으로 보는 방식이 일반화된 것으로 생각되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애니메이션 업계의 노력만으로 다시금 과거의 시스템으로 돌아가기는 어렵겠지만, 그렇더라도 <르브바하프 왕국 재건설기>(2003년 잡지에 연재된 만화 원작을 2007년 TV애니메이션화)와 같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는 움직임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20년도 더 지난 1980∼90년대와 완전히 동일한 시스템으로 회귀하는 일은 없겠으나, 2010년대에 걸맞는 새로운 만화 원작 TV애니메이션의 방향성 제시는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해보고 싶다.
작년, 그러니까 2009년은 만화가 탄생한 지 100년이라고 한다. 하급문화로 취급받던 만화가 탄생 100년 만에 국립미술관에서 기념전시가 열리고 이에 관한 행사들이 전국적으로 진행되어 그 위상을 널리 알렸다. 여기서 100년은 1909년 6월 2일 대한민보에 처음 게재된 이도영의 그림을 기점으로 한다. 그의 당시 그림에는 신문의 나아갈 바를 표현했던 것이다. 이도영은 1910년 8월31일 `대한민보`가 강제 폐간될 때까지 목판화 만화를 통해 당대의 현실을 풍자하는 그림을 발표했다. (대한민보 1909년 6월 2일, 이도영의 삽화) 이도영의 시사만화는 혼란하던 애국계몽기의 시대적 감수성을 담고 있는 그림으로, 계몽과 풍자의 풍부한 표현을 담은 작품이다. <대한민보>는 시사만화와 논설, 단편소설 등을 통해 일제의 식민지 지배 야욕을 풍자했다. 결국 <대한민보>는 검열로 기사는 물론 시사만화의 내용이 삭제되거나, 삽화가 삭제되고, 신문이 압수되는 탄압을 겪다 1910년 8월 31일 폐간하게 된다. ((위) 십우도의 두 컷이다. 십우도는 마음의 본성을 찾아 수행하는 과정을 소를 찾는 동자의 모습에 비유하여 그린 것으로 그림에는 분명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일련의 연속 그림이다.) 이런 내용을 접하며 과연 우리 만화의 역사가 100년 밖에 안 되었나 하고 의문이 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현재 100주년을 기념하는 만화는 연재하는 형식과 신문이라는 매체의 영향이 크다. 사실 조선 시대에 그려진 십우도만 하더라도 종교의 구도적 내용을 담고 있지만 만화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조선 명종 8년(1553)의 부모은중경언해 화장사판(華藏寺版)을 비롯한 여러 판본에도 내용에 따른 관련 목판화도 만화의 형식을 보여준다. 이런 삽화본 중에는 정조 때 김홍도가 그린 것도 있다. 김홍도의 풍속화적 화풍을 본다면 그것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럼 이 그림들은 왜 만화가 아닐까? 영국의 브리태니커 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만화(漫畵, comic strip)는 신문이나 잡지 또는 책에 수록된, 줄거리를 가진 여러 컷(또는 칸)짜리 그림이다. 글을 함께 쓰는 것이 보통이지만 전혀 없을 때도 있다. 서양에서는 사람이나 동물의 특징을 과장해서 그린 캐리커처(caricature)와 어떤 사건 또는 정치적·사회적인 풍조를 풍자하여 그린 1장짜리 그림인 카툰(cartoon), 줄거리가 있는 만화(comic strip : comic book도 포함)를 구분하기도 하지만, 한국에서는 카툰과 만화가 혼합되어 거의 한 개념으로 통용되고 있다. 이런 정의에 따르면 만화의 본질은 첫째, 재미있거나 사회를 풍자하는 등 비판의 기능이 있어야 한다. 둘째, 이야기가 있는 그림이어야 하고, 신문이나 책 등의 표현매체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서양에서 말하는 만화의 기원은 만화의 정의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15세기 유럽이 될 수도 있고, 심지어는 이집트 상형문자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의 만화 형식 및 `만화`라는 단어 자체가 생겨난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그리고 만화의 정의는 학자들 사이에 매우 의견이 분분하지만, 인쇄 형식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는 한편, 그림과 글의 상호연관성이나 연속성을 강조하는 이도 있다. 또한 만화의 매체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다. 그러나 1985년, 윌 아이스너1)는 만화를 연속예술(sequential art)이라 규정하고 '그림과 단어를 배치하여 이야기를 만들거나 생각을 각색하는 것'이라 정의한 것이 대체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기에 보완적으로 스콧 맥 클루드는 <만화의 이해,1993>에서 아이스너의 연속예술이라는 표현을 만화의 매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하며, 그것을 '정보를 전달하거나 보는 이에게 미적인 반응을 일으킬 목적으로, 그림과 그 밖의 형상들을 의도한 순서로 나란히 늘어놓은 것(juxtaposed pictorial and other images in deliberate sequence, intended to convey information and/or to produce an aesthetic response in the viewer)'으로 정의하고 있다. (1936년 11월 26일 조선일보의 기사로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제작되던 토키만화(애니메이션)의 소식과 주인공의 한 포즈를 소개하고 있다. (위)) 이러한 만화의 정의로도 보자면 한국만화의 역사는 훨씬 더 위로 올라갈 가능성이 다분하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19세기 후반 등장한 만화라는 말에 근거하여 그 이후 그려진 그림에서 만화의 원류를 찾으려는 시도에서 현재의 100년은 나온 듯하다. (위)1962년 제작된 < 진로소주 > 두 번째 CF의 스토리보드(콘티)이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세기상사는 애니메이션 제작을 신동헌 감독에게 의뢰하게 된다. 그러나 만화와 가장 연관이 깊은 애니메이션의 시작은 매우 분명하다. 서양에서는 1892년 에밀 레이노가 프락시노스코프에 그려 영사한 그림에서 비롯된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1936년 김용운 임석기 이 두 분이 <개꿈>이라는 애니메이션을 필름으로 142m 정도 제작하고 있다는 신문기사와 같이 소개된 주인공 캐릭터에서 시작한다. 이후 코주부 김용환 에게 펜화를 배운 문달부 가 제작한 < OB 시날코>라는 음료 CF와 < 럭키치약 >CF 애니메이션이 상영된 기록으로 최초이다. 이후 신동헌 의 < 진로소주 >를 비롯한 수백 편의 CF 애니메이션은 첫 장편 홍길동의 밑거름이 된다. ((위) 1966년 제작하여 1967년 1월21일 개봉한 한국 최초 장편 애니< 홍길동 >의 포스터) 그리고 한국 애니메이션은 만화가 신동헌 과 신동우 형제의 장편 애니메이션 < 홍길동,1967 >을 통해 화려하게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우리나라의 최초 장편 애니메이션이 된 <홍길동>은 여러모로 의미가 깊다. 이 장편이 나오기까지 수백편의 CF 애니메이션이 제작되었고, 그 과정의 기술축적을 통해 가능했으나, 어느 누구에게 제작기술을 배운 것도 아니고, 스스로 기술개발과 시행착오를 거쳐 장편 애니메이션을 탄생시켰다. ( 신동헌 감독이 그린 홍길동 캐릭터 (좌)) (그의 동생 신동우 가 그린 원본 홍길동 만화(우)) 애니메이션 < 홍길동 >의 원작은 만화가 신동우 가 소년조선일보에 연재하여 당대에 큰 인기를 얻었던 <풍운아 홍길동>이다. 만화는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을 모티브로 하여 차돌바위라는 서브 캐릭터를 등장시켰고, 이후 차돌바위는 신동우의 페르소나라고까지 불렸다. 그리고 이를 그의 형 신동헌 이 애니메이션 스토리로 약간의 개작을 하였다. 1965년 가을 기획을 시작하여, 1966년 1년 가까이 시행착오를 거쳐 1967년 1월 21일 서울의 대한극장에서 개봉, 당시 38만 명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흥행에도 성공하였다. ((위)영화의 한 장면으로 곱단이의 아버지를 구한 홍길동과 차돌바위, 그리고 곱단이가 등장한다.) < 홍길동 >의 성공으로 < 호피와 차돌바위 >, < 흥부와 놀부 >, < 황금철인 > 등의 매년 애니메이션이 2편 이상의 제작되어 본격적인 애니메이션의 시대를 열었다. 우리 애니메이션은 초창기 옛 이야기나 만화를 원전으로 하여 제작되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동반 성장하게 된 것은 1987년 < 아기공룡 둘리 >가 TV시리즈 애니메이션을 제작되면서 이후 < 달려라 하니 >, < 머털도사 >, < 날아라 슈퍼보드 > 등의 만화가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로 제작되면서 부터이다. ((위) 신동헌 감독의 동생 신동우 가 그린 < 홍길동 >의 스토리보드)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이런 아름다운 동반자의 관계는 앞으로 지속될 것으로 보이지만 최근의 경향은 게임과 애니메이션이 가까워지고 있다. 게임 속의 주인공이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으로 등장(카트라이더 -> 다오배찌붐힐대소동 )하거나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이 게임의 주인공으로 등장( 하양마음백구 -> 백구게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대해 저급한 문화로 폄하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오히려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즐거운 독서와 시청을 오히려 학습이라는 효과와 목표로 전환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 앞으로 100년,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어떻게 변해갈까? 이는 지금 우리가 즐기는 애정의 척도와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 만화와 애니메이션도 인간 삶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예술 매체임은 부정할 수 없는 시대이다. ----------------- 주 1) 윌 아이스너 미국 브룩클린 출생으로 초기 만화의 선구자이며 만화의 대가이다. 「원더맨 Wonder Man」과 「스피릿 Sprit」의 크리에이터로서, 「신과의 계약 A Contract with God」라는 작품으로 그래픽 노블을 개척했다. 만화업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알려진 '더 아이스너(The Eisners)'상은 그의 이름을 딴 상이다. 「만화와 연속예술」은 그가 여러 해에 걸쳐 스쿨오브비주얼아트(SVA)에서 인기리에 진행했던 강의를 토대로 쓰여 졌으며, 그래픽노블을 실제로 어떻게 그릴 것인가에 대한 그의 생각과 이론, 실제적인 조언, 만화 예술이라는 형식이 어디에 적용될 수 있는가 등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만화 전문가와 만화를 배우고자 하는 학생, 그리고 만화를 가르치는 교사 모두에게 매우 유용한 책이다. 1985년에 처음 출판된 이후로 이 책은 미국은 말할 것도 없이 프랑스나 일본과 같은 나라에서도 번역, 출판되어 폭넓은 호응을 받아오고 있다. 또한 이 책은 많은 대학에서 영화 강의는 물론, 대중문화와 영문학 강좌의 교재로 채택되고 있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