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아이
- 감독
- 정유미
- 제작년도
- 2009
<Fly To You> 중 '실사'에 드리운 한계를 넘으면 비로소 선명해지는, 영화가 낳은(을) 새로운 감각과 지형을 발견합니다. 영화관 좌석에 앉은 우리는 언제나 안전했다. 스크린에 투영된 타인의 삶을 바라보며 울고 웃었지만, 결코 그 세계에 직접 발을 디딜 필요는 없었다. 이 거리는 영화가 관객에게 선사한 가장 큰 선물이었다. 충분히 가깝지만 위험하지 않고, 몰입할 수 있으면서도 끝내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미묘한 간격. 그러나 VR(Virtual Reality)은 이 오래된 약속을 파기한다. 더 이상 관찰자로서 멀리 떨어져 세계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은 눈앞의 세계를 보다 근접한 위치에서 마주하고 움직이며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어두운 극장 좌석에 고정돼 있던 신체는 풀려나고, 그 자유도와 함께 물리적·심리적 거리도 좁혀진다. 관객은 적극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주체적으로 이야기에 참여한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진보가 아니라 영화 문법 자체의 근본적 재검토를 요구하는 전환이다. 몽타주는 어떻게 가능할까? 클로즈업의 의미는 무엇으로 대체될 수 있을까? 그리고 전통적인 영화적 연출 방식은 VR 공간에서 어떻게 재구성될 수 있을까? VR은 전통 영화가 구축해온 ‘거리’의 미학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게 만든다. 카메라와 피사체, 관객과 세계 사이의 간극은 단순한 물리적 배치가 아니라, 심리적·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장치로 다시 작동한다. 필자가 2020년에 연출한 < Rain Fruits >(2020)는 미얀마 출신 이주노동자 뚜라(Thura)의 글을 각색한 VR 영화다. 그는 엔지니어의 꿈을 품고 한국에 왔지만, 한국의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소외와 좌절을 겪는다. 영화는 그의 작은 방 안에서, 어릴 적 고향 땅의 비과일 [1] 을 떠올리며 한국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이 작업의 핵심은 단순한 이야기의 재현이 아니라, 이방인이라는 조건을 관객이 VR 공간에서 몸으로 체현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좁은 원룸, 단조로운 작업장, 빠르게 흘러가는 도시의 사물들은 포인트 클라우드(Point Cloud)라는 비주얼을 통해 VR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관객은 더 이상 스크린 뒤의 관찰자가 아니라, 인물의 곁에 있지만 결코 중심에 서지 못하는 위치에서 경험을 공유한다. <Rain Fruits> 중 연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고민은 관객의 첫 위치와 시선을 어디에 둘 것인가였다. 위치와 간격의 설계는 곧 인물이 느낀 사회적 거리감과 맞닿는다. 전통적 영화라면 클로즈업이나 몽타주로 처리했을 장면들을, VR에서는 공간 자체를 재편하여 체험하게 했다. VR에서는 관객의 시선이 곧 컷이 되고 카메라가 되기 때문에, 촬영 단계부터 그 위치를 찾는 작업에 공을 들였다. 원룸 장면에서 인물의 공간을 인위적으로 좁게 분리하거나, 먼지처럼 사라지는 공간과 인물의 트랜지션은 단순한 공간의 재현을 넘어 주인공의 심리적 고립감을 시각화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이어서 파편화된 포인트 클라우드 공간과 흰 선으로 절단된 주인공의 신체는, 그가 한국 사회에서 겪는 소외와 이곳에 속하지 못한다는 감각을 드러낸다. 이와 같은 표현을 통해 관객은 자연스레 ‘나는 어디에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뚜라는 결국 원룸에서 어린 시절 고향의 비과일 숲을 꿈꾼다. 이 장면은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가 겹치는 지점에서, 그가 무대 위의 주인공인지 아니면 스쳐 가는 객체인지 스스로 되묻게 하는 장치다. 나아가 이러한 ‘거리’의 연출은 인물을 더욱 고립시키며, 관객 또한 그의 공간에 함께 있으면서도 무기력하게 머물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이 작업을 통해 VR에서 이야기를 단순화할 필요성을 깨달았다.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진 만큼 시각 정보가 압도적으로 다가왔고, 불필요한 청각 정보는 오히려 몰입을 방해했다. VR에서는 거리와 위치, 그리고 정보량의 균형이 새로운 연출의 핵심이라는 점을 실감했다. <Rain Fruits> 중 2024년에 연출한 <Fly To You>는 이산가족의 이야기를 VR 다큐멘터리로 풀어낸 작업이다. 제목처럼 ‘당신에게 날아가고 싶은’ 열망을 가상 공간 속에서 구현하며, 작품은 하나의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한다. VR에서 관객은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어 현존감을 경험하지만, 동시에 그 이상의 접촉을 허락하지 않는 매체의 한계와 마주한다. 결국, 당신에게 다가갈 수는 있지만 결코 만질 수 없는 존재로서, 주체성을 상실한 체험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이산가족이라는 소재는 물리적인 이동보다 개인적인 그리움과 연결에 대한 근본적 욕망을 의미한다. VR이라는 매체가 갖는 가장 큰 역설, 가상적 연결을 통해 오히려 현실의 고립감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을 탐구하고자 했다. 실제 이산가족 당사자인 ‘강송절(88세)’의 개인적 기억을 더듬으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지금은 결코 닿을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현실 속에서 박제된 듯 머물러 있는 자신의 현재가 대비된다. 이를 위해 입체감이 없는 360도 비디오로 그녀의 박제된 현 상황을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반면 그녀와 멀린 떨어진 고향 땅은 3D 오브젝트로 표현하여 보다 입체적이고 자유로운 존재로 묘사했다. <Fly To You> 중 관객은 두 물리적 공간, 즉 현실의 강송절 할머니가 있는 남한과 과거의 북쪽 고향 땅을 각각 체험하며 심리적인 거리감과 기억의 거리를 경험하게 된다. 관객은 자유로운 비행을 통해 공간적 제약을 극복하지만, 동시에 그 자유로움이 얼마나 허상인지를 깨닫게 된다. 아무리 빠르게, 아무리 멀리 날아가더라도 결국 도달하는 것은 또 다른 가상공간일 뿐이다. 이번 작업에서 특히 주목한 것은, 현실에서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남북의 철책선을 관객이 잠시나마 넘어보는 경험이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VR에서는 NeRF 기술을 통해 그 경계를 건너는 체험을 구현할 수 있었다. 철책선은 360도 카메라로 촬영하고, 그 너머의 보이지 않는 공간은 ‘NeRF Studio’의 AI 기술을 통해 재구성했다. 그 결과 관객은 실제로는 닿을 수 없는 강송절의 바람이 꽃잎으로 흩날리며 철책선을 넘어오는 순간을 함께 경험하게 된다. 이 체험은 ‘너에게 간다’라는 말이 단순히 물리적 경계를 넘는 행위가 아니라, 심리적 그리움의 장벽을 건너는 일이며,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 올려야 하는 마음의 길임을 깨닫게 한다. 관객이 허공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때, 역설적으로 VR 헤드셋에 갇혀 있는 자신의 몸을 의식하게 된다. 이러한 이중적 체험이야말로 VR 매체가 제공할 수 있는 독특한 미학적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철책선을 넘는 순간 관객은 기존의 스크린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고개를 다양한 방향으로 회전하게 된다. 그 순간 타자와의 연결이 더욱 부각되고 관객은 그리움을 체험하며 주인공이 느낀 심리적 소망을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이 역시 순간적이며 역설적이게도 먼지처럼 사라지고 말지만, 그 순간의 경험은 또 다른 마음의 거리를 체험하게 하는 장치로 존재한다. <Fly To You> 중 이 두 작업에서 탐구한 것은 VR이라는 매체에 내재한 ‘거리의 간극’이었다. 물리적으로는 몰입했지만 심리적으로는 멀리 떠 있는 상태, 혹은 그 반대의 순간들. 이러한 간극은 VR의 한계가 아니라 새로운 감정의 가능성이다. 의도적으로 관객의 상호작용을 제한해 역설적으로 자유로워진 VR 공간에서 ‘할 수 없음’이라는 무력감을 드러내고자 했다. 관객은 자유롭다고 느끼지만 결국 정해진 위치와 시선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 제약 속에서 주인공의 소외와 단절을 공감하게 된다. 영화가 스크린을 통해 관객과 세계 사이에 거리를 만들었다면, VR은 그 거리를 해체한다. 하지만 모든 경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른 형태의 경계가 만들어진다. 관객은 자유롭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몸으로, 그리움과 소외의 거리를 체험한다. VR 연출의 모험은 이 새로운 경계들을 창조적으로 활용하는 데 있다. 현실을 모사하는 대신, VR만의 거리와 리듬을 통해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영화는 언제나 기술과 더불어 진화해왔다. VR 역시 그 연속선 위에 있다. 그러나 이번 변화는 단순히 도구가 바뀌는 차원을 넘어, 우리가 ‘영화적’이라 불러왔던 모든 것의 근본적 재검토를 요구한다. 앞으로 더 많은 실험을 통해, VR에서만 피어날 수 있는 고유한 언어를 발견해야 한다. 그 언어는 아마도 ‘거리’를 전혀 새롭게 정의하는 것에서 시작될 것이다. *** [1] 비가 온 뒤 과일 위에 내려앉은 빗방울을 그린 시적 표현으로, 과거 한국문화정책연구원 월간지 《월간 너울》에 뚜라가 게재한 글 「북쪽 섬에서 나를 찾는다」에 나타난다. 송영윤(영화감독) l 이해되지 않는 마음을 붙들며 하루를 살아가는 영상 작업자. 장편 다큐멘터리 < 사막을 건너 호수를 지나 >(2019) 공동 연출, VR 영화 < Rain Fruits >(2020), VR 다큐멘터리 <Fly To You>(2024) 연출.
누군가의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소소한 일상의 흔적과 기억이 담긴 사진첩 속에서 그 누군가는 영화 한 편의 주인공이 됩니다. 사진첩의 주인공은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으로 재미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죠. 그렇다면 한국영상자료원이 소장한 ‘어느 영화인의 사진첩’에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많은 영화인들이 소중하게 간직했던 그 사진첩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경기도 시흥군 동면 안양리(현 안양시), 얼핏 봐도 백 명은 족히 넘어 보일 정도로 인파가 북적이는 이곳.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이리도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일까? 흙먼지 폴폴 날리는 공사장에 말이다. 화기애애한 표정으로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고, 짓고 있는 중으로 보이는 콘크리트 건물 앞에서 멋들어지게 늘어서서 단체 사진은 또 왜 찍고 있는 걸까? 혹시 무언가를 기념하기 위해 모인 것일까? (좌) 홍찬, 현제명 등 / (우) 박계주, 조경희 (좌) 한형모, 허백년, 이진섭 등 / (우) 김학성, 유계선 등 엄청나고 대단한 것이 들어설 것 같은 흥분으로 가득한 이곳은 다름 아닌, 동양 최대 규모의 영화 스튜디오가 될 수도영화사(대표 홍찬 ) 안양촬영소 정초식 및 상량식(이하 정초식) 현장이다.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 속 여러 장에 걸쳐 발견되는 일련의 사진들에는 수도영화사 사장 홍찬과 현제명 박사, 문학가 박계주 와 조경희, 시나리오 작가 유한철 과 이진섭 , 영화평론가 임영 과 허백년 , 스틸 작가 백영호 , 감독 한형모 , 배우 이민 과 유계선 등의 인물들이 포착되어 있다. 생전 이 사진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던 촬영감독 김학성 의 모습 역시 박혀있다. 그러나 이 행사에는 문화계 인사만 자리한 것이 아니었다. 단신에 가까운 신문 기사와 이승만 대통령의 동정을 따라가는 <대한뉴스>에서 확인되는 이날의 공식 기록은 이러하다. 안양촬영소 정초식은 1956년 10월 17일 오전 11시, 경기도 안양리 공사 현장에서 수도영화사 사장 홍찬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여기서 현제명 박사는 공사 경과를 보고했고, 이승만 대통령과 최규남 문교부 장관의 축사가 이어졌다. *주1 그 밖에도 여기에는 당시 민의원 의장이었던 이기붕과 내무부 장관이었던 이익흥 등의 정부 인사 역시 자리했다. 영화배우 주증녀 가 영화인 대표로서 단상에 올라 대통령에게 꽃다발을 전달했고, 정초식 이후 대통령은 공사 현장을 둘러보고 촬영소 모형도를 살폈다. *주2 이 같은 공식 기록을 놔두고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의 사진들이 유독 눈에 띄는 이유는 그것이 다름 아닌 ‘개인의 기록’이라는 데 있다. 객관적인 사실을 열거하며 대통령의 동정에 초점을 맞춘 공적 보도와 달리, 이 일련의 사진들은 순수하게, 안양촬영소 건립에 들뜬 영화인의 시선으로 기록된 것들이다. <대한뉴스>에서 전달되는 근엄하고 정제된 분위기와 달리, 사진은 어딘가 다소 어수선하고 북적인다. 눈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시각 요소만 담겨 있지만, 그럼에도 왠지 이곳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재잘거리는 대화 소리, 북적이는 인파와 공사장의 소음이 그대로 들리는 것만 같다. 공적 기록과 달리 정제되지 못한 개인의 사진(심지어 이 사진들은 인화되지 못한 채 필름으로 남아 있다)은 이렇게 예상외의 것마저 전달한다. 그렇다면 영화인뿐 아니라 여러 문인과 정부 관계자들이 나서서 모두 축하하고 있는 안양촬영소 건립이란 당시에 어떤 의미였을까? 일제강점기 때부터 국내의 영화인들은 영세한 자본에다 촬영소는 물론이고 변변한 영화 기자재도 없는 현실을 탄식하며 탄탄한 자본력을 가진 영화 기업을 기대했고, 영화 예술을 위해 헌신하는 굴지의 독지가가 나타나길 바라는 비현실적인 꿈을 꾸기도 했다. 해방을 맞이했지만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고 한국전쟁으로 그나마 있는 시설마저 파괴되었으니, 영화인들이 느꼈을 실망과 좌절은 굳이 말하지 않더라고 쉬이 짐작 가능하다. < 춘향전 >(이규환, 1955년 국도극장 개봉) 흥행을 계기로 영화 제작에 숨통이 조금 트였다고는 하지만, 안양촬영소가 개소하기 전까지 국내에 있는 영화촬영소라고는 미국의 아시아재단 원조로 들여온 기자재를 관리하기 위해 설립된 정릉 스튜디오와 < 자유부인 >(한형모, 1956)의 제작사 삼성영화사가 서울 군자동에 설립한 삼성스튜디오 정도였다. 이마저도 모두 안양촬영소가 한창 공사 중이던 1957년의 일이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1956년 10월의 안양촬영소 상량식이 영화계, 나아가 문화계 전반의 큰 행사이자 축제였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실제로 안양촬영소는 대지 면적 32,000평, 건평 5,400평의 규모로, 자타공인 당시 동양 최대 스튜디오였다. 한국영화 1세대 촬영기사이자 테크니션이던 이필우 의 설계를 바탕으로, 3개의 스튜디오(500평, 380평, 150평)와 래보라토리(105평), 녹음실(60평), 소도구 및 대도구 제작실(150평), 분장실(100평), 촬영 장비 저장소(100평) 등을 구비했고, 식당과 샤워실, 총 3,300kW 출력이 가능한 변전실 3개 등의 부대 시설까지 완비했다. 기자재로는 당시 접하기 힘들었던 미첼 NC 카메라 3대와 웨스트렉스 녹음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최신 설비와 시설을 자랑했다. *주3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확인되는 이 같은 모습을 차츰 갖춰가고 있던 1956년 10월, 사진 속의 이날은 그렇기에 더욱 흥분과 경이로 가득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이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근사하게 차려입고 이곳에 모인 많은 이들의 상기된 표정은 안양촬영소가 영화인들에게 와닿는 의의를 설명하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한편 안양촬영소가 여전히 한창 공사 중이던 1957년 3월의 어느 날, 수도영화사 대표 홍찬은 《국제영화》와의 인터뷰에서 촬영과 조명, 소품, 의상, 메이크업 등의 기술 스태프 500여 명을 전속으로 기용할 예정임을 은연중에 밝히기도 했다. *주4 홍찬이 발표한 이 말이 사실이라면, 수도영화사의 안양촬영소 건립은 영화인들에게 또다시 경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속’이라 함은 곧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도영화사가 안양촬영소 건립과 함께 제시한 청사진은 영화인들이 불안정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이기도 했을 것이다. 실제로 수도영화사와 전속 계약을 맺은 스태프가 누구였는지, 정확히 몇 명이었는지는 구체적으로 파악되지 않지만, 위 사진들의 원 소장자 김학성이 수도영화사와 촬영감독 전속 계약을 맺은 사실은 그의 컬렉션을 통해 확인된다. 김학성의 수도영화사 전속 촬영감독 임명장 (한국영화박물관 상설 전시 자료, 우측은 필자의 한글 병기) 수도영화사의 전속 촬영감독으로서, 김학성은 이곳에서 수도영화사 안양촬영소 창립 작품 < 생명 >(이강천, 1958)의 촬영을 담당했다. 그 과정에서 그에게도 수도영화사 전속 촬영감독으로서의 자부심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안양촬영소 상량식 사진들 못지않게,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에는 그가 <생명>을 촬영할 당시에 찍은 사진들이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도영화사 사무실에서 촬영된 필름을 검토하고 있는 모습부터 <생명> 고사 현장, 한강 로케이션 촬영 현장과 안양촬영소 세트장에 이르기까지, 사진 자료만도 89점에 달한다. 이는 그가 참여한 작품에 관한 컬렉션 사진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인들의 환대를 받으며 성대하게 지어진 수도영화사 안양촬영소의 수명은 안타깝게도 그리 길지 못했다. 수도영화사는 창립 작품 <생명>에 이어 < 낭만열차 >(박상호, 1959)를 제작했지만, 두 작품의 잇따른 흥행 부진으로 수십억 부채를 떠안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안양촬영소는 1959년 4월 부도 처리되며 상업은행의 관리로 넘어갔다. 이후 선민영화사와 홍성기 감독, 범아영화사가 잠시 운영을 맡기도 했지만, 한동안 방치되었고 1966년,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에 인수돼 안양필름(1967~1968), 안양영화제작주식회사(1970~1973) 등의 스튜디오로 활용되었다. *주5 *** 주1. “안양촬영소 정초식 성대”, 《조선일보》 1956. 10. 18., (석)3면. 주2. “ 대통령 각하, 안양촬영소 정초식에 임석 ”, <대한뉴스> 제94호, 1956. 10. 주3. 안재석, 「 안양촬영소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주4. “[신춘대담 no.3] 현란한 문화기업의 개화전: 영화산업의 왕자 ‘수도’의 구상”, 《국제영화》 1957년 4월호(15호), 93쪽. 주5. 안재석, 앞의 글; 조준형, 『영화제국 신필름』, 한국영상자료원, 2009.
(사진: " La roue ", IMDb)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미처 1분이 넘지 않은 상영시간으로 시작한 영화의 상영시간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의 예술인 영화에서 상영시간은 현실적이고 상업적인 이유로 무한정 길어질 수 없었다. 대중들이 스크린 앞에 앉아있을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은 제한적이었고, 그걸 허락할 수 있는 영화관의 상영시간은 관객의 노동시간과 휴식 사이에서 사용할 수 있는 오락의 정치경제학 시간 안에서 (영화 산업연구가 존 벨튼의 표현을 빌리면) 문자 그대로 ‘중층결정’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배급과 입장료라는 복잡한 계산이 뒤따라오지만, 이 문제는 나중에 다른 ‘영화사의 순간’에서 다시 대차대조표를 작성할 것이다. 상영시간은 야심적인 영화가 영화라는 제도와 전투를 벌여야 하는 또 다른 전쟁터가 되었다. 아벨 강스는 < 바퀴 >(1923)의 촬영을 이미 일 년 전에 마쳤다. 그리고 네거티브 필름을 들고 편집실로 들어왔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완성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다. 온갖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흉흉한 괴담도 있었다. 1921년이라는 생각을 해주길 바란다. 그래서 편집실을 방문한 이들은 편집본의 일부를 미리 볼 수 있었다. 보고 온 이들은 열광적인 찬사를 전하기 시작했다. 이 소문이 나쁜 상황을 덮으려는 거짓이라는 소문이 다시 돌았다. 아벨 강스는 소문을 진압하기 위해서 아직도 ‘편집중’이라는 발표를 하는 자리를 가져야 했다. 자신이 편집하는 영화의 제목은 <La roue(바퀴)>이고, 촬영장에서 편집실로 가져온 네거티브 필름은 911,624피트라고 밝혔다. 1,000피트가 15분 분량이니 계산해보시기 바란다. 하지만 이 발표를 한 다음에도 아벨 강스는 1년 반을 더 편집실에 머물렀고, 1923년 2월 17일에야 첫 개봉을 하게 되었다. (역시) 전하는 소문에 따르면 아벨 강스의 편집본은 7시간 30분이(라고 한)다. 다른 소문에 따르면 9시간이라는 말도 있다. 모두 32개의 릴로 완성되었다. 하지만 극장상영을 위해서 아벨 강스 자신에 의해서 2시간 30분 ‘단축판’이 완성되었다. 이 판본이 영화사에서 공식 상영본으로 알려졌다가 2008년에 DVD 판본으로 4시간 30분 상영본이 출시되었다. 아쉽지만 <바퀴>의 아벨 강스 편집본은 남아있지 않다. 아벨 강스의 열광적인 탐구자들에 의해 남겨진 필름들을 모아서 아벨 강스의 원래 의도를 복원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2019년 프랑스 뤼미에르 영화제에서 아벨 강스의 편집본에 가장 가까운 7시간 ‘복원판’이 상영되었다. 처음부터 위대한 걸작의 반열에 올랐고, 그런 다음에도 세대를 거치면서 계속해서 열광적인 새로운 지지자들을 낳았다. 나도 그중의 한 명이다. 사진: "La roue"( 좌 , 우 ), IMDb) 만일 영화를 보기 전에 <바퀴>의 줄거리를 먼저 ‘읽는다면’ 그렇게 훌륭할까, 라는 의심보다 먼저 이렇게까지 긴 상영시간을 어떻게 진행 시켰을지 의아할 것이다. 줄거리는 정말 간단하다. 기관차 운전수 시지프는 사고로부터 어린 고아 노르마를 구한다. 그리고 자신의 딸로 입양한다. 시지프에게는 또래 나이의 아들 엘리가 있다. 세월이 흘러 둘 다 어른이 된다. 시지프는 노르마가 자란 모습을 보고 사랑의 감정을 느껴 돈 많은 부자 친구 에르산에게 의논을 하지만 노르마를 보고 욕심이 생겨 자신이 가로챈다. 이때 엘리도 자신이 노르마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몇 가지 우여곡절 끝에 시지프는 시력을 잃고, 엘리와 에르산은 몽블랑 산벼랑에서 대결을 벌여 죽음을 맞는다. 아들을 잃은 시지프는 노르마에게 화를 내지만 두 사람은 화해하고 다시 아버지와 딸로 돌아간다. 노르마는 앞이 보이지 않는 시지프를 돌보면서 세월을 보낸다. 마을 축제가 있던 날 시지프는 축제에 춤을 추러 간 노르마를 기다리며 숨을 거둔다. 열광적인 찬미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조언은 <바퀴>에서 줄거리를 거들떠보지 말라는 것이다. 입체파 화가이자 영화를 제작한 페르낭 레제는 그 찬미자 중의 한 명이다. “영화는 극적인 상태, 감정적인 상태, 조형적인 상태가 있다. (...) 아벨 강스는 <바퀴>로 영화를 조형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라고 예찬했다. 그러면서 “시네마토그래픽한 혁명은 우리가 거의 주시하지 않았던 모든 것을 보게 만드는 것”이라면서 바로 그걸 <바퀴>가 성취했다고 말했다. 아벨 강스는 <바퀴>의 네거티브와 함께 편집실에서 긴 시간을 보낼만한 가치가 있었다. <바퀴>를 보면 즉각적으로 당신의 눈앞에서 홀린 듯이, 아니 그 정도 표현으로는 부족한데, 시각기관을 감전시키는 것처럼 압도하는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편집의 리듬이다. 기관차의 속도, 뿜어내는 연기, 이리저리 휘어지면서 이어지는 철도, 철도 옆의 신호판들, 기관차의 바퀴, 달려가는 속도에서 바라보는 풍경, 클로즈업과 롱 쇼트의 거의 무한정한 교차. <바퀴>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배우들이 아니라 기관차다. 이 속도의 리듬감에 홀려서 <바퀴>의 화면 구도가 얼마나 훌륭한지는 두 번째 볼 때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달리는 기관차의 바퀴와 그안에서 밖을 바라본 풍경 인물에 대한 롱 쇼트와 클로즈업 <바퀴>를 보고 열광한 것은 파리의 시네필뿐만이 아니었다. 모스크바의 쿨레쇼프 공장의 학생들, 그중에서도 예이젠슈타인은 < 시월 >(1927)에서 분명히 빠른 교차편집을 (긍정적인 의미로) ‘베꼈다’. 할리우드의 편집실에서도 <바퀴>는 감탄을 자아냈다. 도쿄의 ‘영화광’들은 아낌없이 ‘傑作’이라고 불렀다. 일본 개봉 제목은 <철로의 백장미>였고, 이 제목으로 한국에서도 오랫동안 불렸다. 좀 더 섬세하게 <바퀴>를 지지한 에밀 뷔이에르모즈는 “흑과 백의 교향곡”이라고 부르면서 “석탄 먼지와 기차 연기의 비극적 어둠으로 시작해서 영원히 쌓인 눈의 순수함과 고통을 달래는 조용함으로 끝난다”라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바퀴의 시각적 테마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미국에 그리피스가 있다면 프랑스에는 아벨 강스가 있다고 선언했다. 여기에 <바퀴>를 지지한 명단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장 콕토와 루이 델뤽도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앙드레 바쟁은 「영화언어의 진화」에서 몽타주의 성공적인 예로 삼았다. 프랑수아 트뤼포도 여기에 가세했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포토제닉한 이미지와 몽타주가 운동하는 액션영화라고 불렀다. 내가 <바퀴>를 처음 보았을 때는 너무 어렸다. 그래서 이 영화를 설명할 만한 비평언어를 갖고 있지 않았다. 다만 영화에서 카메라의 이동 쇼트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를 처음 ‘발견’할 수 있었다. 정말 간절하게 아벨 강스가 편집한 <바퀴>의 첫 번째 판본이 보고 싶다. <바퀴> 중 아이비 클로제(좌)와 가브리엘 드 그라본느(우) (사진: " La roue ", IMDb)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