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 통합검색 결과
검색 결과 분류
총 314개
정확도 순 필터
영화정보
수집자료
메모리 런 (2/2)
- 매체규격
- 1inch
- 상영시간
- —
- 자막
- —
- 보관위치
- —
더 히어로 : 메모리 리메인즈
- 매체규격
- DVD
- 상영시간
- —
- 자막
- —
- 보관위치
- —
[cdmanii]삼성 컬러레이저 복합기 CLX-3185WK USB메모리 SD CF TFlash 여러메모리 출력
- 매체규격
- 디지털파일
- 상영시간
- —
- 자막
- —
- 보관위치
- —
메모리 러브 송(MEMORY LOVE SONGS)
- 매체유형
- CCT 콤팩트카세트
- 연주시간
- 52:19
포토제닉 메모리(PHOTOGENIC MEMORY)
- 매체유형
- CCT 콤팩트카세트
- 연주시간
- 39:34
고속 기억법 슈퍼 메모리
- 매체유형
- CCT 콤팩트카세트
- 연주시간
- 60:00
메모리 (기브 잇 올 GIVE IT ALL)
- 실물구분
- 디지털파일
- 매체유형
- 보도자료
외국영화심의신청서
- 실물구분
- 아날로그
- 매체유형
- 심의서류
- 보관위치
- —
외국영화수입심의신청서
- 실물구분
- 아날로그
- 매체유형
- 심의서류
- 보관위치
- —
외국영화심의확인서
- 실물구분
- 아날로그
- 매체유형
- 심의서류
- 보관위치
- —
콘텐츠
피어 스트리트 시리즈
올해 리스트에 오른 영화 중 가장 개인적으로 와 닿았던 작품은 홍성은의 < 혼자 사는 사람들 >이다. 단지 내가 본 영화는 감독이 일반 관객들이 본 영화와 조금 다른 작품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무래도 나는 주인공 진아가 누리는 삶의 방식이 교정되어야 할 사회문제라고 느끼지 않았으니까. 올해는 될 수 있는 한 아카데미상 후보들을 리스트에 올리지 않으려 했지만 샤카 킹의 <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 >가 가진 역사의 무게와 원초적인 비극성을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 스파이의 아내 >도 처참한 실제 역사를 담고 있는 작품이지만 고전 멜로드라마와 첩보물을 거쳐 펼치는 정교하고 장르 유희는 다른 의미로 매혹적이었다. 이어지는 세 편은 판타지와 SF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 메모리아 >가 SF, 그 중에서도 말이 되는 부류에 속한다고 하면 많이들 안 믿을 텐데, 사실이다. 여전히 벽의 페인트가 말라가는 걸 지켜보게 강요하는 거 같은 아트하우스영화 특유의 고집이 눈에 뜨이긴 하지만 보편적인 의미에서 재미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셀린 시아마의 < 쁘띠(뜨) 마망 >은 얼핏 보면 소박한 시간여행 판타지처럼 보이는 설정을 통해 삼대에 걸친 여자들의 관계를 새로운 평등성을 통해 다시 들여다 본 독특한 작품으로, 이 리스트에 오른 영화 중 내가 가장 많이 반복해 볼 영화가 될 것 같다. 데이비드 로어리의 < 그린 나이트 >는 아서왕 전설의 A24스러운 재해석으로, 아마 이 리스트의 영화들 중 ‘예술하는’ 것으로 <메모리아>와 경쟁할 수 있는 작품일 텐데, 그렇다고 해서 아서왕 전설의 아이돌을 시치미 뚝 떼고 잔인하게 놀려먹는 사디즘의 즐거움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나머지 영화는 모두 호러다. 단지 앞의 세 편은 장르호러를 의도한 작품은 아니다. 조지 A. 로메로의 < 놀이공원 >은 개신교 계열 단체의 주문을 받아 제작된 교육영화지만, 유명한 동네 사람이라고 해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만든 사람에게 이런 영화를 맡기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 영화가 출구 없는 악몽으로 그리는 노년의 삶은 심지어 좀비떼보다 무섭다. 에마 셀리그먼의 < 시바 베이비 >는 유대계 전통 장례식이라는, 우리에게 낯선 행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막 졸업을 앞둔 여자 대학생의 주변에서 일가친척들이 만들어내는 시공간의 뒤틀림과 이 과정 중 발생하는 폐소공포증은 친숙하기 짝이 없다. 임신 주제의 영화가 바디 호러로 흐르는 건 흔하지만, 남궁선의 < 십개월의 미래 >는 여기에 임산부에 대한 한국사회의 덜떨어진 편견과 억압이 더해져서 <에일리언>보다 서너배는 더 무섭다. 대한민국의 출산율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어대는 인간들은 < 시계태엽 오렌지 >에 나오는 세뇌장치에 묶어놓고 이해가 될 때까지 이 영화를 반복 감상시켜야 한다. 슬프게도 그들 상당수는 시체가 될 때까지 의자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정곡을 찌르는 예술작품이라도 모든 사람들을 이해시키지는 못한다. 이제 한 편 남았다. 사실은 세 편이다. 리 자니악의 < 피어 스트리트: 1666 >은 < 피어 스트리트: 1994 >, < 피어 스트리트: 1978 >로 이어지는 삼부작의 마지막편으로, 이 세 영화를 분리해 감상하는 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넷플릭스는 이 영화들을 일주일에 한 편 간격으로 틀었는데, 그 때문에 이 작품을 보는 행위는 8,90년대에 유행했던 미국 미니시리즈의 ‘텔레비전 이벤트’ 감상과 비슷해졌다. 어차피 극장을 통한 적 없는 작품이니 세 영화를 그냥 한 편의 미니시리즈로 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원래 의도는 한 달 간격으로 개봉되는 극장용 영화 시리즈였다고 하지만. 예고편만 보면 큰 기대가 안 생긴다. 그냥 예쁘장한 틴에이저들과 연쇄살인마를 한군데 모아놓고 다양한 방식으로 죽은 시체들을 쌓는 놀이를 하는 복고풍의 슬래셔 영화인가? 틀린 설명은 아니다. 그리고 첫 편의 도입부를 보면 좋지 않은 의미로 어리둥절해진다. 잘 만들긴 했는데, 굳이 저렇게까지 성실하게 웨스 크레이븐의 < 스크림 > 도입부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을까? 심지어 <스크림>은 이미 메타 호러인데 여기에 새 레이어를 얹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설정과 맥락을 설명해보자. <피어 스트리트> 시리즈의 원작은 어린이 대상 호러물인 <구스범스> 시리즈의 R.L. 스타인이 청소년 대상으로 쓴 동명 호러 시리즈다. 셰이드사이드라는 가상의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주인공들은 책마다 바뀌며 폭력의 강도는 <구스범스>보다 높다고 한다. 자니악의 시리즈는 셰이드사이드라는 마을, 피어와 구드라는 가문명을 가져왔지만 이야기 자체는 오리지널이다. 셰이드사이드에 대응하는 부촌인 서니베일 역시 시리즈의 창작이다. 서니베일은 <버피> 시리즈의 무대인 서니데일을 연상시키는 이름인데, <버피> 역시 <스크림>만큼이나 이 시리즈에 뚜렷한 발톱자국을 남긴 작품이다. 둘 다 기존장르를 재해석하고 비트는 메타 호러에 속해있기도 하고. 시리즈의 주인공인 디나는 <스크림>보다는 <버피>에 가까운 인물이다. 셰이드사이드 고등학교의 밴드 멤버이고 동성애자, 흑백혼혈이다. 당연히 자신도, 도시전설에 미친 동생 조시도, 마약쟁이인 불량청소년 친구들도 모두 아웃사이더다. 여자친구 샘이 재혼한 엄마를 따라 부촌인 서니베일로 갔기 때문에 디나의 삶은 더 끔찍해졌다. 그런데 전설의 마녀 사라 피어의 저주에 걸린 것처럼 보이는 평범한 사람들이 살인마로 변신하고, 디나 일당은 이들에게 쫓기게 된다. 일단 <피어 스트리트 파트: 1994>를 다 보면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도입부는 여전히 <스크림>을 지나치게 흉내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통적으로 보이는 슬래셔의 스토리를 따라가는 동안에도 이 영화가 어떤 게임을 하고 있는지 완전히 감이 오지 않는다. 영화가 삼부작을 염두에 두고 구성되어 있어서 독립된 영화의 무게중심이 관객들의 예상과는 다른 위치에 놓여있고 그 때문에 늘 기대와는 어긋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다. 폭력의 정도와 살생부의 선정도 예측하기 어렵다. 다음 편의 예고도 예측에 별 도움을 주지 않는다. 영화들이 계속 과거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피어 스트리트: 1978>로 시리즈가 이어지면서 영화의 계산이 드러난다. <피어 스트리트>는 ‘진지하다’. 이 영화가 모델로 삼은 <스크림>과 7,80년대 슬래셔 장르의 관계를 보자. <스크림>의 영화광들에게 슬래셔 영화의 살인은 게으른 창작자들이 반복되는 클리셰들을 갖고 만든 어처구니 없고 대충 공허한 이야기의 일부로, 이들을 모방한 영화 속 연쇄살인 역시 잔인무도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얄팍한 게임이다. 하지만 자니악은 비슷한 구성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는 시리즈 영화를 만들면서 이 허구와 현실 사이의 벽을 치워버린다. <피어 스트리트: 1994>에서 일어난 사건 일부를 설명하는 <피어 스트리트: 1978>의 사건은 여름 캠프와 연쇄살인마가 나오는 익숙한 슬래셔 영화의 공식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피어 스트리트: 1994>의 우주에서 실제로 일어났다. 그리고 우리가 <피어 스트리트: 1994>를 통해 이미 연쇄살인마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신디는 극중 내내 놀랄만큼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물로 존재한다. <피어 스트리트> 시리즈를 구성하는 재료들은 대부분 호러 관습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는 주인공들의 진지함과 입체성을 막지는 못한다. <피어 스트리트: 1666>에서 시리즈의 야심은 심지어 더 커진다. 시리즈 설정의 기원을 파기 위해 북미 대륙 개척시대로 시간여행한 이 영화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는 사실 대충 짐작은 간다. 사회적 소수자인 여자아이가 주인공인 이야기가 17세기 미대륙에서 일어난 마녀 사건과 연결된다면 그 마녀는 역사가 말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고 다른 일을 겪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영화는 디나와 사라 피어의 소수성을 연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미국 건국역사 전체를 재검토한다. 허울좋은 공정의 판타지는 파괴되고 수백년에 걸친 차별의 구조가 드러난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온몸으로 이에 맞서 싸운다. 천진난만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호러 관습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세계 속 이야기라고 해도, 그 안에서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청소년들을 보고 냉소하는 건 유치한 일이다. 그리고 부끄러움 없는 진지함 속에서 영화의 공포, 로맨스, 액션, 드라마는 모두 강렬한 힘을 얻는다. 그 결과물은 놀랄만큼 정통적으로 재미있는 오락물이다. 우리가 할리우드에서 기대하는 게 바로 이런 게 아닌가.
[칼럼]플랫폼의 확대와 오타쿠의 유저(user)화에 관한 문제
‘IT 기술’의 플랫폼과 ‘교양’의 문제 최근(2017년 12월) 필자의 관심사는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기술(IT)적인 ‘플랫폼’(≒미디어, 매체)이 세계화(글로벌화)되어 발생되는 고전적인 ‘교양’의 ‘해체’라고 불러야 할 상황에 대해 주로 기울어져 있다. 그 때문에 요즘 몇 번 출판계에 기고할 기회가 생길 때마다 마침 이 플랫폼(전자서적이나 웹툰, 웹 소설 등)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되었다. (출판전문지 「기획회의」 2017년 12월 5일 453호 및 곧 출간 예정인 단행본 『한국의 논점 2018』 등.) 인터넷을 통한 각종 ‘플랫폼’은 주로 ‘IT 계열’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기 마련이고 (주요 플랫폼 기업이라고 한다면 아마존, 애플, 구글, 우버, 에어비앤비, 텐센트, 국내에서는 네이버와 카카오를 들 수 있을 텐데 보다시피 대부분 IT 기업으로 출발했다), 그에 따라 종래의 대량생산을 기반으로 했던 대중(mass)의 ‘매체(media)’의 대표 격인 ‘출판’이 가지고 있던 인문학적 속성과는 조금, 문화랄까 습성이랄까 배경에 차이가 있다고 여겨지는 상황이다. 일본의 평론가 오쓰카 에이지는 이런 상황에 대해 설명할 때 주로 ‘구(舊) 교양’이라는 말을 쓰곤 하는데, 말 그대로 출판 시절의 매체는 ‘과거의 교양’을 바탕에 둔 것이었으나 현대 인터넷 기반의 IT 플랫폼은 그렇지 않은 측면이 많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이런 상황이다. 일본을 방문한 트럼프한테 아베 정권이 당당하게 내보였던 일본문화가 트럼프 손녀딸이 좋아한다는 피코타로였고, 하지만 정작 그 손녀딸은 삼자경과 당시(唐詩)를 암송하는 동영상을 시진핑한테 보여주는 모습을 보고, 작년에 카와카미 노부오가 현대 일본의 교양은 이미 『소년 점프』가 되었다는 구태의연한 지적을 했던 것을 다시금 통감했다. 카와카미는(중략) ‘지적(知的)인 웃음’을 표현하고자 할 때 인용되는 것이 더 이상 고전이 아니라 『소년 점프』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하지만, 그러한 서브컬처는 트럼프에게조차도 교양으로 치부되지 못한다. 트럼프조차도, 교양이란 곧 고전이란 사실을, 어리석긴 해도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소년 점프』나 피코타로가 ‘오타쿠 문화’라고 할 수 있는지 ‘서브컬처’라고 해야 할지, 그런 세세한 정의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지만, 아베 마리오 코스프레까지도 포함해서 그것들을 한 묶음으로 하는, 지극히 경솔한 무엇인가를 체현시킨 것이 현 시점의 이 나라에선 문화이자 교양이라고 하는 사실이, 아베 정권에 접어든 이후 계속해서 가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다들 이제 슬슬 느끼고 있지 않은가. 아소 타로의 교양이 ‘만화’였다는 것을 이젠 더 이상 아무도 화제로 삼지 않게 되었고, 이시바 시게루, 마에하라 세이지 등과 같은 차세대 국방족 의원들의 ‘교양’은 프라모델 만들기나 철도 오타쿠라는 것이야말로 이 나라 안전 보장에 있어서 최대의 문제라고 아무도 느끼지 않고 있다. 선거전 종반에 여당 당수가 연설 대상으로 했던 유권자는 아키하바라에 모인 사람들이었지 신주쿠 서쪽 출구의 샐러리맨이 아니었다. 논단에서도 젊은 학자나 논객의 ‘취미’가 아이돌에 관한 논의가 되어 있는 정도로는 ‘서브컬처’든지 ‘오타쿠 문화’이든지의 ‘교양화’는 확실하게 진전되었다. ‘오타쿠 문화’ 그 자체는 이제 와선 무한하게 세분화되었지만, ‘쇼와의 끝 무렵’ 시절에는 대략적으로 히라가나 표기의 ‘오타쿠(おたく)’란 단어 주변에 있던 것들(미야자키 쓰토무의 방에 있던 만화는 ‘모에’ 만화가 아니라 극화지와 『젊은 아내의 속옷』이었고, 수천 편의 비디오 컬렉션은 롤리타 포르노가 아니라 CF와 아이돌, 프로레슬링과 애니메이션에 야구 방송 녹화 등, 헤이세이 시대 이후로는 세분화되어버린 ‘오타쿠의 각 소비 영역’을 얕고 넓게 대강 대충 커버하고 있던, 도저히 ‘컬렉션’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이 이 나라의 중심이라고까지는 말하지 않겠으나, 교양만이 아니라 정치나 경제나 미디어에서도 분명히 그 일각을 점거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오쓰카 에이지, 「아베의 교양과 어디에도 없는 장소의 ‘오타쿠 문화’」, 『최전선』 편집부 블로그, 2017년 12월 7일) 참고로 약간의 해설. 이 글에서 나온 피코타로는 ‘PPAP’란 곡으로 유튜브를 떠들썩하게 했던 일본의 가수이고, 카와카미 노부오는 일본의 동영상 플랫폼 ‘니코니코동화’를 만들었고, 지금은 대형 출판사인 카도카와쇼텐과 합병하여 만들어진 KADOKAWA(카도카와)란 회사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인물이다. 카와카미는 스튜디오 지브리로부터도 인정을 받아 지브리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와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을 보좌해온 베테랑 프로듀서 스즈키 토시오의 ‘제자’로서 미야자키 감독 작품인 < 바람이 분다 >와 타카하타 감독 작품인 < 가구야 공주 이야기 >에 ‘프로듀서 견습생’으로 크레디트되기도 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런 그에 대해서도 오쓰카 에이지는 매번 날카로운 지적을 해왔다. (실제로는 오쓰카 에이지는 카와카미와 친분이 있고, 니코니코동화가 주최하는 이벤트나 방송에도 자주 출연하고 있다.) 그리고 ‘아베 마리오’ 코스프레는 일본의 아베 총리가 2016년 리우 올림픽 폐막식에서 2020년 도쿄 올림픽을 홍보하기 위해 슈퍼 마리오 코스프레를 하고 등장했던 것을 가리키는, 일본 매스컴의 유행어(?)이다. 아소 타로는 일본의 전직 총리이자 현재에는 재무대신, 부총리 등을 역임하며 아베 정권의 일각을 담당하고 있다. 이시바 시게루는 자민당 간사장을 맡으며 아베파의 일각이었으나 현재는 거리가 멀어지면서 당내의 라이벌처럼 된 정치인이고, 마에하라 세이지는 야당인 민주당 당수였다가 그 뒤를 이은 민진당의 대표를 맡았다가 야당을 깨버리고 상당히 우익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 일본 야권의 유력 정치인이다. ‘아키하바라에 모인 사람들’이란 표현은 젊은 오타쿠층(2010년대 일본의 젊은 층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보수·우익적이다), 즉 ‘프리터’(프리랜서나 아르바이트 정도를 하고 있는, 사실상 무직인 층)라든지 니트(NEET), ‘넷우익’과 친화성이 강한 층을 지칭하는 것이고, ‘신주쿠 서쪽 출구의 샐러리맨’이라 함은 한국에서 말하자면 ‘여의도나 명동의 회사원들’이란 식으로, 좀 더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회사원층을 뜻한다. (이 회사원들이 보수파가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다. 보수나 진보와 무관하게 그냥 말 그대로의 ‘일반인들’을 지칭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쇼와 시대는 1989년에 끝났으므로 ‘쇼와의 끝 무렵’이라 함은 1980년대 중후반을 가리킬 것이고, 미야자키 쓰토무는 1989년에 도쿄·사이타마 연속 유아 유괴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집행된 인물이다. 그가 당시에 ‘오타쿠’를 대표하는 것처럼 매스컴에서 보도되는 바람에, 그 당시에 코믹마켓 등에 동인지를 내거나 애니메이션을 대량으로 시청하는 소위 ‘오타쿠’ 계층에 대한 일본 사회의 ‘왕따’와도 같은 분위기가 돌았던 적이 있었다. 그때 미야자키 쓰토무를 ‘오타쿠’라고 보도했던 주된 원인은 그의 방에 수천 개의 비디오테이프가 있었고 만화잡지를 포함한 책들도 꽤 있었다는 이유였는데, 실제 그 비디오테이프 중에는 불법적인 포르노도 없었고(일본에선 정상적으로 발매되었던 성인용 비디오는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유아 대상의 롤리타 계열도 아니었고 전부 ‘합법적인’ 성인물이었음) 대부분은 CF나 아이돌이 출연한 TV 프로그램과 TV 드라마, 프로레슬링 및 야구 시합의 녹화 비디오였다는 사실이 21세기에 들어 새롭게 주목받은 바 있다. 그 중에 포함되어 있던 애니메이션도 당시 ‘오타쿠’들이 즐기던 작품이라기보다는 < 우주전함 야마토 > <게게게의 키타로> < 요술공주 샐리 > 등 상당히 ‘일반인 취향’의 애니메이션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 드라마 역시도 당시 대중적으로 인기 있던 작품이 많았다. 하지만 역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보다는 오타쿠에 가까웠던’ 그가 1980년대 당시 ‘세분화된 특정 장르’에 치우친 것이 아니라 이처럼 폭넓게 ‘오타쿠 문화 혹은 서브컬처’를 섭렵하고 있었다는 점을, 오쓰카 에이지는 현재의 ‘세분화된 오타쿠 문화 혹은 서브컬처’와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오타쿠 계층에서는 미야자키 사건이 있었던 당시 일본 TV에서 대형 동인지 판매전인 코믹마켓을 배경으로 “여기에 10만 명의 미야자키 쓰토무가 있습니다!”라고 옐로 저널리즘스럽게 보도했다는 것이 마치 정설처럼 오랫동안 이야기되었지만, 실제로는 그런 보도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 올해 밝혀지기도 했다. 참조:「‘10만 명의 미야자키 쓰토무’는 있었는가?」, 야후재팬 뉴스 개인(dragoner/블로거), 2017.09.29) 아무튼, 서브컬처가 ‘교양’이 되어버린 시대에 플랫폼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다시 한번 오쓰카 에이지를 인용해보겠다. ‘오타쿠 문화’, ‘서브컬처’는 카도카와 쓰구히코 등과 같은 인물이 말하는 소위 ‘에코 시스템’(이 사회 속에서 말하는 ‘에코’란 ‘에콜로지’(환경)라기보다 ‘이코노미’(경제) 아니겠는가?), 즉 플랫폼 기업은 사람들이 투고나 2차 창작을 자발적으로 행하도록 만들고 있는데, 동시에 그것을 각자 본인의 의지나 자기표현이라고 만족할 수 있도록 해주는 시스템을 갖춰놓고 있다. (중략) 하지만 이제 와서 거기에 모이는 사람들한테 당신들은 착취당하고 있다고 설명해주어봤자 마르크스주의 등장 이전의 노동자들한테 당신들은 소외당하고 있다고 설명하는 것과 비슷하고, 하물며 아무래도 ‘혁명’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 듯하니 더 이상 설명해줄 기분도 들지 않는다. 2차대전 이후 출생 세대인 구 ‘오타쿠’들은 ‘내용’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차세대인 카와카미 노부오나 히로유키로 대표되는 정보공학계 오타쿠들은 플랫폼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오타쿠 문화가 경제나 문화의 중추로 편입될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그 의미와, 그 결과 초래될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두는 편이 좋다는 것만큼은 경고해두고자 한다. (중략) 어쨌거나 ‘오타쿠’는 이젠 플랫폼 안에 기관의 일부로서 편입되어, 플랫폼 그 자체에 위화감을 느끼지도 않고 회의(懷疑)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 나라 ‘보수’의 기조(基調)라고 할 만한 것이라면, 요즘엔 그런 것들 안에서나 찾아야 할 것이다. (오쓰카 에이지, 위와 동일) 다만 오쓰카 에이지는 이런 식의 구세대 ‘오타쿠 교양’의 붕괴에 대해 “한탄도 찬미도 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일본에서 몇몇 오타쿠 평론가들 사이에 유행했던 ‘오타쿠 세대론’(세대 차이론)을 주장하는 듯이 받아들여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그것은 오쓰카의 다른 최근 책에서도 여러 번, 분명한 사례를 들면서 강조되고 있으니 실제로 진심일 것이다.) 즉 과거의 오타쿠들은 내용(contents)을 만들어내었으니 훌륭하고 요즘 IT 계열 오타쿠들은 플랫폼밖에 만들지 못했으니 뒤떨어진다는 식의 논의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 글에서 오쓰카가 언급한 ‘내용’이란 단어는 영어 단어로 보자면 ‘콘텐츠(contents)’에 해당하는데, 이는 서적에서 ‘차례’를 보통 ‘contents’라고 표기하는 것처럼 바로 ‘서적의 본문 내용’을 가리킨다. 또 플랫폼이라는 것은 종이책에서라면 바로 그 ‘종이’, 제본되어 한 권 한 권 묶여진 책의 본체 그 자체를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콘텐츠)과 종이(플랫폼) 사이에 어떤 ‘우열’이 존재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플랫폼이 없이는 우리가 콘텐츠를 접할 방도가 없으니 말이다. 오쓰카가 문제로 삼는 것은 그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과거에는 ‘콘텐츠’를 만들어냈던 오타쿠들이 (세대는 바뀌었을지언정 결국 똑같은 ‘오타쿠’이니까) 지금은 플랫폼 안에 그 구조물의 부품처럼 편입되어 버렸고 심지어 그 상태를 불편하게 느끼거나 회의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며 안심하고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오타쿠들은 인터넷 시대 이후 PC통신의 채팅실에서, MSN메신저와 네이트온과 카카오톡 같은 인터넷 메신저에서, 블로그에서, 그리고 지금은 트위터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등 SNS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PC통신 시절에는 모두가 글을 쓸 수 있는 ‘게시판’으로 시작했다가 ‘가입’한 회원만이 글을 볼 수 있는 ‘동호회’란 것이 만들어졌고 그 뒤에는 동호회로부터 ‘소모임’이란 것이 생기는 등 갈수록 ‘좁은 문’을 선택했다. 또한 채팅실에서는 ‘강퇴’(강제퇴장)를 시켰으며, 블로그에선 ‘서로이웃만 보기 기능’을, SNS에선 ‘페친’과 ‘블락’과 ‘뮤트’를 통해서 점점 더 ‘자기가 보기 편한 환경’을 계속해서 추구해왔다. 이것이 바로 ‘플랫폼 안에 부품처럼 편입되어 버렸고 심지어 그 상태에 오히려 편안함과 안심감을 느끼는 상태’라는 말이다. 이는 ‘어떤 장르든지, 창작이든 패러디든지, 만화든 소설이든 평론이든 굿즈든’ 어떤 것에든지 개방된 상태에서, 또한 모두가 다 같은 ‘참가자’일 뿐 누구도 ‘주인’이거나 ‘손님’이지 않은 ‘열린 환경’을 추구해왔던 코믹마켓의 이념과는 정반대인 셈이다. 당초에는 인터넷의 이념도 바로 그러한 ‘개방성’에 있었을 텐데, 실제로 그 인터넷상에서 추구되는 것은 ‘끼리끼리 모일 때의 편안함’이 아닌가 하는 말이다. 당초에는 발언의 자유를 위해서 시작되었던 인터넷의 익명성조차도, 실제로는 수많은 ‘딥 웹’ 방식의 ‘초보자나 타인의 참여를 기피하는 익명성 커뮤니티’를 보게 되면 오히려 ‘자유’를 ‘제한’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곤 한다. 실제로 한국의 익명성 커뮤니티에서는 소위 ‘닥눈삼’, 즉 ‘닥치고 눈팅 삼 년’이라 하여 해당 장소의 분위기 파악을 하기 전까지는 상당한 장기간 동안 글을 쓰지 말고 읽기만 하라는 분위기가 유행했고, 일본에서도 익명 기반의 게시판 2ch(2채널)에서는 ‘ROM’(리드 온리 메모리의 약칭)이라 하여 한국과 똑같이 우선은 글을 쓰지 말고 읽기만 하고 있으라는 분위기가 존재했던 것을 보면, 그런 의심이 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일본 인터넷에서 말하는 소위 ‘공기를 읽어라’(분위기 파악을 하라)는 말은 곧 ‘플랫폼에 적응하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플랫폼 안에서 ‘유저’들이 ‘손님’으로서 편안함을 느끼고 싶다는 욕망에 따라서 만들어진 분위기인 것이다. 미국에서 ‘망 중립성’을 폐지한다고 하던 뉴스 역시도, 바로 이런 ‘인터넷 속에서 벌어지는 자유의 제한’의 상징적인 조치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자면, 사회의 방향성이 ‘콘텐츠’에서 ‘플랫폼’으로 변경된 것에서 그다음 단계로, ‘플랫폼’으로부터 더더욱 기술적인 ‘네트워크’로 가버리고 있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 정도이다.) 플랫폼과 유저 마인드의 문제 오타쿠층의 ‘현재’가 과거의 ‘교양’ 시대, 즉 콘텐츠를 창출해내고자 했던 모습에서 지금의 플랫폼을 중심으로 한 시대로 움직인 것 아닌가 하는 오쓰카의 이 지적은 흥미롭다. 실제로 과거의 오타쿠들은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시대의 차이는 있을지언정(일본에서의 ‘1세대 오타쿠’와 한국에서의 ‘1세대 오타쿠’의 시기가 달랐던 것처럼) 초기에는 미야자키 쓰토무와 같이 ‘얕고 넓게’ 다방면의 ‘오타쿠 장르’를 섭렵하던 모습이었는데, 점점 갈수록 자기 자신만의 취향에 기울어져 세분화되어 왔다. 이 ‘세분화’를 나는 ‘파편화’라고 불렀는데, 말하자면 과거엔 오타쿠라면 TV에서 일본애니메이션도 보고 극장에서 디즈니 애니메이션도 보고 LD나 비디오로 일본의 OVA도 보았다. 새로운 게임이 나오면 관심을 가졌고 주브나일과 판타지 소설에서 유래한 ‘라이트노벨’이란 것이 인기를 끌게 되면 소설도 읽었다. 또 남자라도 TV에서 『들장미소녀 캔디』를 보았고 동호회에서 화제가 되는 작품이라면 (여성 취향의) CLAMP 만화나 『나의 지구를 지켜줘』나 『그 남자! 그 여자!』(카레카노)도 읽었다. 여자들도 『슬램 덩크』를 열심히 읽었으며(여성향 동인지 신(scene)에서 항상 최대의 장르였던 것은 『슬램 덩크』나 『테니프리』 『강철연』 『쿠로바스』 등과 같은 소년만화였다), 차세대 게임기가 나오거나 온라인게임의 유행에도 적극적이었다. 남자가 구체관절인형을 사고 여자가 건프라를 사는 모습이 드물지 않았고, 그것이 지금까지도 한국에서 완구 판매의 어떤 한 특징으로서 자리잡고 있다는 분석은 그리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가 콘텐츠에서 플랫폼 쪽으로 ‘메인스트림’의 중심이 옮겨가면서 더 이상 ‘얕고 넓은’ 것은 오타쿠층의 ‘기본 소양’이 아니게 되었다. 바로 그 점을 지적했던 것이 ‘얕고 넓은’ 오타쿠 세대의 대표 주자 중 한 명이었다고 할 수 있을 ‘오타킹’ 오카다 토시오(가이낙스 전 대표)가 2006년부터 말해왔던 ‘오타쿠의 죽음(「오타쿠 이즈 데드」)’의 내용인 것이다. (이와 관련되어 2008년에 『오타쿠는 이미 죽었다』란 제목으로 단행본이 출간되었다. 다만 오카다 토시오는 이에 관해 블로그에서 ‘첫 번째 저작 『우리들의 세뇌사회』 때부터 일관적으로 내 입장은 〈닥쳐오는 시대를 거부하지 않는다〉였다. 나는 지난번 이벤트 때에 한 마디도 “요즘 오타쿠는 안 되겠다”, “요즘 애니메이션은 재미가 없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옛날 같은 오타쿠가 줄어든 것은 당치도 않다”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받아들인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이해의 한계〉인 것이지, 그에 대해서 반발하든 찬동하든 나로선 곤란할 뿐이다’고 답변한 바 있다. [오카다 토시오 블로그 2006.05.27]) 따라서 오쓰카 에이지든 오카다 토시오든, ‘그 좋았던 옛날(벨 에포크 Belle Époque)’에 대한 향수로서 구세대의 오타쿠를 긍정하고 현세대의 오타쿠를 비판하기 위해 이런 말(옛날 오타쿠들은 넓은 분야를 즐겼는데 요즘은 파편화되었다는 지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다만 오타쿠의 세대론과 무관하게, ‘교양이 존재하지 않는(존재할 필요가 없는) 플랫폼’의 등장과 함께 모든 사람들이 그 플랫폼의 ‘유저(손님)’로서 자기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정의하게 되었다는 점을 오쓰카는 지적했던 것이다. 이 부분은 내가 오랫동안 한국 오타쿠층의, 나아가서는 한국 대중의 ‘손님 마인드’에 관해 지적했던 것과도 연결되는 문제의식이다. 내가 손님 마인드라고 부르는 것은, 말하자면 본인을 항상 ‘손님’의 위치에 두고 타인이 자신한테 ‘서비스’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뜻한다. 소위 ‘감정 노동’의 문제도 결국은 이 손님 마인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실제의 업체-고객의 관계에서도 ‘손님 마인드’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손님 마인드를 모든 방면에 적용시키면서, 스스로를 약자, 피해자 입장에 놓고 타인을 공격하고자 하는 태도인 것이다. 예를 들어 직접적으로 지불하는 금액은 없고 기껏해야 ‘트래픽을 통한 광고’를 보아줄 뿐이면서도 스스로를 ‘손님으로 대접받아야 하는 입장’에 놓고서 연예인이나 웹툰 작가 등한테 심한 악플을 달거나 고자세를 취하는 것이 심각한 사건으로 비화되는 일이 있지 않은가. 물론 돈을 냈더라도 ‘감정 노동’을 하게 되는 종업원 등에 대해 심각할 정도의 안 좋은 태도를 취하는 것도 문제일 테니, 단순히 돈을 내고 안 내고에 달린 문제라고만은 할 수가 없겠지만 그나마 돈을 직접 지불하지도 않은 상황이라면 아무래도 제 3자 입장에서 볼 때에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다. 과거의 오타쿠들은 ‘모두가 똑같은 참가자일 뿐,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 업주-고객 관계는 없다’라는 코믹마켓의 정신을 필두로 하여, ‘내가 좋아하는 장르에 작품이 없다면, 내가 스스로 만들겠다’라는 식의, 말하자면 일종의 ‘참여 의식’이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나를 손님으로 대해달라, 나를 ‘유저(user)’로 대해달라고 하는 마인드가 지금보다는 적었다는 ‘설명’을, 오쓰카를 필두로 한 몇몇 1세대 오타쿠 출신 평론가·연구자들이 지금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유저가 유저 입장에서 ‘유저 마인드’를 갖는다는 것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어쨌든 과거와 달리 오타쿠라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분석 자체는 분명히 의미가 있다고 본다. 특히 전 세계가 글로벌화되고 인터넷으로 연결되면서 대부분의 국가에서 유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 속에, 국내에서도 오타쿠층, 혹은 인터넷 사용자들 사이의 세대 분화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초이스]비너스 전기
대중문화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등장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아니 반사적으로 과거에 있었던 비슷한 원형을 떠올리고, 옛것이 훨씬 더 훌륭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나이를 먹고 꼰대가 되어가는 증거일 테다. 지금 애니메이션 칼럼을 쓰고 있지만 민망하게도, 현대 애니메이션에 대한 식견이 부족한 탓에 늘 먼지 쌓인 추억의 라이브러리만 뒤지는 자괴감의 변명이다. 내게 애니메이션, 특히 ‘일본 아니메’는 언제나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나왔던 작품들에 대한 기억이 모든 개념과 인식의 근간이다. 그 시절의 작품들을 접했던 때의 내가 이형(異形)의 이국(異國) 문화에 심취했던 10대였기 때문이겠지만, 특히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해선 일종의 경외감마저 느꼈던 이유가 있다. 그 시절 아니메는 뭐랄까, 약간 미친 것 같았다. 작품이 다루는 소재와 전하는 테마 이전에 움직이는 그림 자체가 호화찬란했다. 대부분 작품들이 저마다 넋 나갈 수준의 퀄리티였다고 기억한다. < 천공의 성 라퓨타 > < 왕립우주군-오네아미스의 날개 > 한 번 대충 머릿속에 떠올려 보자. 1984년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에서 린 민메이가 부르는 노래로 이 리스트는 시작한다. 85년 린 타로의 <카무이의 검>이, 86년에 지브리가 설립되어 < 천공의 성 라퓨타 >가, 87년 카와지리 요시아키의 < 요수도시 > OVA와 가이낙스의 첫 작품 < 왕립우주군-오네아미스의 날개 >가 나왔고(데자키 오사무의 < 보물섬 > 극장판도 1987년이었다. 물론 이쪽은 1978년에 나온 TV 애니를 극장판으로 재편집한 것이었지만), 이어서 88년에 오토모 가츠히로의 < 아키라 > 극장판이 어떤 정점을 찍고 89년에 <파이브 스타 스토리>와 < 마녀 배달부 키키 >가 나온 다음 90년대로 진입한다. < 수병위인풍첩 > < 신세기 에반게리온 > 1990년에 <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 91년 <사일런트 뫼비우스>, 92년 < 자이언트 로보 >, 93년 < 수병위인풍첩 >과 <기 동경찰 패트레이버 극장판 2 >, 94년 다카하타 이사오의 <헤이세이 폼포코 너구리 전쟁>… 이렇게 가다가 95년에 < 메모리즈 >와 오시이 마모루의 < 공각기동대 >로 또 한 번 아니메 퀄리티의 정점을 찍은 다음, 1996년 안노 히데아키의 < 신세기 에반게리온 >이 그렇게 끝나면서 내가 알던 일본 아니메의 세계는 멸망, 자폭, 리셋, 포맷되었기에 이후의 사정은 어떻게 되건 말 건 아무 의미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내 뇌에서 자동으로 전개 가능한 아니메 연대기다. (이 리스트에서 ‘건담’ 시리즈를 뺀 건 건담은 아니메의 영역과는 따로 구별하여 논의해야 한다는 개인적인 이념 때문이다.) 나는 이 시기 아니메의 퀄리티가 굉장했던 이유를 일본이 버블 경제의 호황기를 누릴 때여서 업계에 들어오는 자본이 넘쳤고, 시장의 수요가 폭발했으며, 온갖 다양한 기회를 잡느라 애니메이터들의 재능 역시 부글부글 끓어 넘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나중에 실상을 알고 보니 아니었다. 그 시절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에 정착되기 시작한 ‘제작위원회’ 방식은 실은 애니메이터들의 육체와 영혼을 뜯어먹고 있었다. 애니메이션은 인력과 노동을 엄청나게 요구하니 애초에 제작비가 높다. 점점 상승하는 제작비 부담과 흥행 실패의 손실 부담을 덜기 위해, 여러 출자사의 공동 투자를 받고 이익은 투자비율에 따라 배분하는 방식이 바로 제작위원회다.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컨소시엄을 이룬 이 임의 단체는 수익 정산이 끝나면 해산한다. 모여서 파이를 만들고, 뜯어 먹고, 헤어진다. 내가 업계의 스승으로부터 들은 말 중에 가장 무겁게, 또 무섭게 받아들인 문장은 “돈은 말을 한다”는 것이다. 돈은 언제나, 반드시 언젠가 그걸 받아 쓴 이에게 말을 하는 법이다. 이 세계에서 눈먼 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며 돈은 말을 한다. 지분을 쥔 스폰서들이 권리를 갖고 말을 하면, 제작진은 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 제작위원회 안에서 얼마나 그 말들이, 즉 창작에 대한 개입이 많았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배에 사공이 많으면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다 안다. 이런 구조는 작품의 퀄리티를 보장할 수 없고 사실 떨어져야 정상이다. 손실을 각오하고 투자하는 것과 달리 손실 자체를 미리 나눠놓은 것이 제작위원회다. 흥행에 성공해서 수익이 나더라도 실무 제작사 입장에선 인건비와 작업비를 충당하러 이미 돈을 받아 쓴 거라, 남는 건 없고 다만 망하지 않았으니 다음 일을 또 할 수 있다. 남는 건 작품뿐이다. 노동을 이어가기 위한 창작이라고 할까. 넋 나갈 수준의 퀄리티로 만들어진 그 시절 일본 아니메의 이면에는 이번 일을 끝내 작품 한 편을 만들었으니 또 다음 일로 넘어가는 애니메이터들의 고통이 가득했다. 그래서일까, 그 시절 아니메의 퀄리티란 그림과 내용의 질이 그다지 균형적이지가 않았다. 예를 들어 작화가 압도적인 데 반하여 이야기는 별 감흥 없이 그저 그런 경우가 많았다. 위에서 내가 제시한 리스트를 결코 일본 애니메이션 최고 걸작 리스트라고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창작 행위의 그럴듯함, 예술가의 근사함은 여기 없다. 간혹 어딘가 뜻 모른 채 도달하는 기적이 일어날 뿐, 이미 영혼이 탈곡된 채로 엄청난 공력의 그림을 집요하게 그려대는 노동자들만이 존재했다. < 비너스 전기 >(1989)를 다시 본 이유는 바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환상적으로 움직이는 그림 뒤의 현실노동 말이다. 퍼스트 건담의 캐릭터 디자인에서부터 당시 업계 최고의 실력이었으며 가장 잘 나가는 애니메이터였던 야스히코 요시카즈 선생은 본인의 원작 만화를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이 작품 이후 애니메이터 은퇴를 선언하고 애니메이션 일에 손을 뗐다. (수십 년 후에 < 기동전사 건담 THE ORIGIN >으로 복귀하긴 하지만) 그는 살아 움직이는 만화영화를 뒤로하고 정지한 연속 그림의 세계, 만화로 돌아갔다. 그 이유로 남의 작품들을 보고 능력의 한계를 절감했다고 말한 건 아무래도 위장 같다. 흥행 실패도 원인이 아니었을 거다. 선생의 평소 객관과 드높은 성품으로 보아 애초에 그딴 건 관심도 없었을 것 같다. 나는 그가 애니메이션을 관둔 이유를 이른바, ‘학을 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가장 잘 하긴 하지만 계속할 이유가 그다지 없는 노동에서 불과 40대에 손을 놓아버렸다. (그림이야 집에서도 그릴 수 있지 않은가? 자본에 착취당하지 않으면서.) 그리고 그 노동을 온전히 자신만이 해낼 수 있는 만화로 옮겼다. 선생은 만화 작업에 어시스턴트를 따로 두지 않았다. < 모빌 슈트 건담 디 오리진 >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아들을 보조로 썼을 뿐이다. < 비너스 전기 >는 지구의 식민지로 테라포밍된 미래 금성에서 ‘아프로디아’와 ‘이슈탈’ 두 세력이 충돌한 전란의 한가운데, 바이크 레이싱 게임 선수였던 ‘시로’가 무슨 일을 벌이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선생이 전쟁을 다루는 방식은 <왕도의 개>나 <무지갯빛 트로츠키>같이 현실 역사를 배경으로 한 만화 쪽이 훨씬 흥미롭다.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 나면, 시로 말고 반대 세력의 주인공이 한 명 더 있었다는 원작 만화의 내용만 궁금해진다. 감히 말하건대 이 애니메이션에서 볼 건 오직 그림밖에 없다. 그러나 그림이 환상적이다. <아키라>의 작화와 모션이야 굉장하지만 오토모 가쓰히로 특유의 그림체가 어딘가 싫었다면, 짐작해보라. <비너스 전기>는 야스히코 요시카즈 선생이 그린 아름다운 캐릭터들이 < 아키라 > 이상으로 움직여대니까. 시로와 일당들은 전쟁이야 어찌 되건 자신들의 경기장을 점령한 거대전차 ‘타코’가 싫다. 탱크를 경기장에서 몰아내기 위해 그들은 각자 한 손에 대전차 무기를 들고서 원 휠 바이크를 몰고 간다. 일본 아니메를 통틀어 베스트 시퀀스 중 하나로 꼽을 만한 액션이다. 아이들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전쟁에 뛰어든 이유는 어른들의 “힘과 거짓을 보면 부아가 치미는” 애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들에게 “우리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대의가 죽일 뿐”이라고 말하는 어른이 있는가 하면, “살아있으면 언젠간 좋은 일도 있단 말이다!”라며 구하러 달려가는 어른도 있다. < 비너스 전기 >가 마음을 움직이는 지점은 딱 이 정도가 전부다. 관객의 감정을 어딘가 도달시키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지만,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위대한 장인이 한때의 업을 ‘때려치울’ 명분을 제공한 작품으로써 < 비너스 전기 >는 충분히 넘치는 가치가 있다. 아직 하나도 제대로 만들어보지 못한 나는, 최고의 대가가 때려치운 어느 노동 앞에서 부러움과 두려움을 느낀다. 재능조차 없는 나는 사실 이쪽 일을 진작 때려치워야 했지만, 아직 내세울 명분을 만들지 못했기에 지리멸렬한 시간을 보냈던 것이 아닌가 하고. 또 그 시간이 지리멸렬했던 이유는, 실은 진짜 고통스런 노동이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