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메이트
- 감독
- 신시아 슝
- 제작년도
- 2010
- 출연
- 제시아 카반, 월터 빈센트
청주 – 대구 – 케임브리지로 그들 각자의 터전이 분리됨으로 말미암아 스카이프(Skype)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삼총사 정희(김주아), 민영(윤아정), 수산나(손다현)는 이 썰렁한 재회를 통해 그들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저들 사이의 간극은 청주 – 대구 – 케임브리지로 분리된 세 장소의 지리적 거리감만큼이나 벌어져 있다. 여고 시절을 동고동락한 세 친구가 스무 살이 되면서 변화해가는 역동성을 묘사하는 < 성적표의 김민영 >(2022)은 물리적 거리감을 실재적이고 심리적인 차원으로 은유하는 이야기이다.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을 우정이라는 감정을 고요하고 섬세하게 담아내는 이 영화는 ‘김민영’을 평가 대상으로 집중하여 관찰하는 제3자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환상과 추억으로 일상을 확장하는 내러티브의 궤적은 청소년기의 종말에 대한 가볍고 우울한 자화상을 따라간다. 도입부는 임박한 시험을 앞두고 삼행시 동아리를 작파하기로 결정한 세 친구의 마지막 회합을 보여준다. 이날 이후 세 친구의 길은 갈라진다. 몽상가 기질의 정희는 수능을 보던 날 시계를 지참하지 않아 불안해하는 소년 정일(임종민)에게 손목시계를 주고 창밖을 보며 시간을 흘려보냄으로써 경쟁적인 교육 시스템과 작별한다.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도 태평해 보이는 정희는 우연히 정일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청주 나달 테니스클럽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는데 누구도 가치 있다고 말해주지 않는 이상한 상상을 소중히 여기면서 자신의 세계를 쌓아간다. 집과 테니스클럽 사이를 벗어나지 않은 좁은 활동반경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부지런한 모습을 보이며 심지어 테니스클럽 홍보를 위해 자신의 그림 재능을 활용하기도 한다. 한편 여고 시절부터 모임 결성을 즐겼던 민영은 대구의 대학에 진학하여 교내 청자켓 동호회 대표로 바쁜 나날을 보낸다. 아이비리그 중 하나인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수산나는 모두가 탐내는 자리를 확보하여 옛 친구들과 연결되기 어려워진다. 여름방학 동안 민영이 머무는 서울 집을 방문한 정희는 친구를 초대한 뒤 그 자신의 일에만 몰두해있는 민영에게 어색함을 느낀다. 민영의 마음은 서울의 더 나은 대학으로 편입하는데 보탬이 될 성적(학점)에만 집중되어 있다. 성적에 집착하는 대학생이 된 민영과의 재회는 정희에게 명령으로 가득 찬 사회에서의 성공에 대해 조용한 자각을 준다. 뚜렷한 근거 없이 학점 교정을 탄원하는 시시한 대학생이 되어 친구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민영에게 성적표를 남기고 정희는 돌아선다. <성적표의 김민영>은 스무 살을 지나갔거나 곧 지나갈 관객들에게 위로가 되길 바라면서 우정이 서서히 해체되는 과정을 세심히 관찰한다. 느린 서사의 진행은 다소 우울한 분위기를 강조하지만, 곳곳에 뿌려진 건조한 유머는 안도감을 제공하면서 몽상가이자 예술가로서의 정희의 본성을 포착하는 것을 돕는다. 이재은, 임지선 공동감독은 각자의 삶을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려던 두 친구의 나란했던 자리가 조금씩 이지러지는 순간들을 제시하면서 한동안 마음에 남는 애틋한 순간들을 보여준다. 보드게임, 햇반, 배드민턴 라켓이 담긴 캐리어를 끌고 상경한 정희의 재회에 대한 상상은 슬프게도 현실에 부응하지 못한다. 앉은뱅이 책상과 노트북을 떠나지 않는 민영은 정희가 더 나은 교육의 기회를 져버렸다고 비난하지만 그 자신의 소홀했던 학업성취를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보상하려 한다. 점차 한국적으로 변해가는 민영의 위선에 비해 정희의 상상의 나래는 실제 우정 장면과 상상의 우정 장면을 하나의 그림으로 엮는다. 홀로 남겨진 정희는 민영의 일기와 개인 영상을 발견하고 민영의 우정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검토하게 된다. 이는 여고 시절의 친우(親友)가 멀어져가는 상황을 받아들이게 하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도록 이끈다. 현대 사회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자아의 희생을 의미하는가? 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서울집에서 두 사람의 차이가 표면화되는 상황의 장면 연출은 탁월하다. 민영이 단 하루로 시한을 한정하였으나 정희의 목적은 옛 시절처럼 민영과 ‘룸메이트’가 되는 것이다. 여고 시절 기숙사 방과 군에 간 민영의 오빠 자취방은 미묘하게 대조된다. 여고 시절 기숙사에서 나란했던 정희와 민영의 침대는 일치된 이상을 향하고 있던 존재의 조건을 묘사한다. 민영은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이라는 정평이 난 도시인 대구가 너무 한국적이어서 지루하기 때문에 서울에 있는 대학에 편입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길을 개척하기로 결정한 친구 정희에게는 냉담하다. 자취방에서 두 사람의 배치와 자세, 카메라 위치는 엇갈리는 두 친구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기술한다. 문과 거울, 방바닥을 어지럽히는 잡동사니들, 신체적 제스처 따위가 교착된 관계를 보여주면서 두 인물을 분리하는 촉매가 된다. 민영의 과업에 동참하여 교수에게 탄원 메일을 작성하는 것을 돕는 정희에겐 나의 친구가 좀 유치해진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마음이 공존한다. 한편, 민영은 정희의 선택을 무시하며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더 현실적이 되어야함을 강조한다. 한국에서 청소년 성장 서사의 상투형은 경쟁적인 입시 제도로부터 비롯되어 성인이 되어서까지 이어지는 학위, 직업, 가족을 형성해야 하는 현실 사이의 괴리이다. 사회적 기준이 제시하는 표준적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인생의 고충은 성장 서사의 단골 레퍼토리이다. 이는 <성적표의 김민영>의 주제이기도 하나 이 영화는 관습적이고 억압적인 사회에 저항하는 상상의 힘을 지지하며 성인이 되기까지의 험난한 길을 묘사하는 무미건조하고 유머러스한 스타일을 창안해냄으로써 통상의 성장담과 다른 길을 간다. 눈치조차 성공의 덕목으로 간주될 수 있는 한국에서 정희는 사회적 관습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는다. 다만 그런 삶을 사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 바쁜 대학 생활을 보내고 있는 민영과의 멀리 떨어진 거리에도 불구하고 공감은 피어날 수 있을까? 두 공동감독은 점차적으로 서로 분리되어가면서 세상을 헤쳐나가는 젊은 여성들의 내면적 삶을 유머와 솔직함, 연민으로 다룬다. 시트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풍으로 상상된 제주 여행 삽화는 진부한 공간을 현실의 기억과 상상의 장면들로 채우는 정희의 기질을 잘 보여준다. 소원과 애정 사이를 오가는 순간들은 섬세한 연출력 덕분에 잘 다루어지고 있으며 스토리를 따라가는 캐릭터의 성장과 변화를 신뢰하게 한다. 정희에게서 우리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관찰할 수 있고, 환상과 오류의 차이를 평가할 수 있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브랜드화하기보다 현실화하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을 만난다. 학력 중심의 소비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인 평판에 기대지 않고 주체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스무 살의 모습을 본다. 정희는 민영의 우월한 태도에 상처를 받지만 우정을 회복하여 즐거운 하루를 보내기 위해 민영이 그녀를 계속 무시하는 동안에도 온건한 태도를 유지한다. 정희를 혼자 남겨둔 채 떠나는 민영의 일기는 낮은 자존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암시하며, 친구에게 자신의 불안을 투사하는 소녀의 감정을 보여준다. 친절한 태도와 타인에 대한 관대함을 바탕으로 정희는 친구의 더 나은 자질을 칭찬하는 동시에 민영의 위선과 결점을 가감 없이 지적하는 성적표를 작성한다. 정희는 ‘한국인의 삶’에 F를 주면서, 좁은 땅에서 바쁜 일상을 보내며, 남의 눈치를 보면서 안정된 삶을 쫓는 사람들보다 덜 한국적이 되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녀의 불안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사회적으로 억압적인 문화에 대한 온건한 비판을 제시하는 이 사려 깊은 드라마는 일탈적인 공상의 강렬함을 소유한 자유로운 영혼의 정희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한 성숙한 인간이라고 설득한다. 완전했던 세계의 파괴, 우정의 몰락을 형상화하기 위해 용의주도하게 이야기를 쌓아가는 공동 감독은 ‘삼(3)’이라는 숫자를 통해 이를 암시한다. 숫자 삼(3)의 논리는 무엇인가? 수비학(數秘學)에서 지혜와 이해, 창의의 수로 간주되었던 삼(3)은 과거, 현재, 미래로 구획된 시간의 세(3) 축, 탄생, 삶, 죽음으로 이어지는 생의 삼(3) 주기로 약호화된다. ‘조화’와 ‘일체감’, ‘통일성’을 상징하는 삼(3)은 세(3) 개의 꼭짓점을 연결한 삼(3)각형처럼 삼위일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인생에서 호재와 악재는 세(3) 단계를 거쳐 온다고 하며, 가장 이상적인 스토리의 구성은 삼(3)막의 행위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되곤 한다. 내쳐 <성적표의 김민영>은 삼(3)의 해체, 몰락에 관한 스토리라고 할 수도 있다. 삼(3)행시 짓기 동아리로 하나가 되었던 세(3) 친구의 분리는 삼(3)행시 모임을 중단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삼(3)행시는 단어를 이루는 세(3) 음절을 모체로 하나의 문리(文理)를 조형해내는 행위인 바, 그 결과는 단어의 본래적 의미를 벗어나 새로운 문맥을 창조하게 된다. 문학적 깊이마저 지니게 되는 저들의 삼행시는 그저 말을 지어내는 놀이를 넘어 진짜 ‘시’를 닮게 된다. 하나로 뭉쳐 삼(3)행시를 짓던 세(3) 친구는 세(3) 도시로 흩어지며 셋(3)으로 난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생은 따라야 할 목록, 결의안의 지침처럼 간단하다. 문제는 그렇게 살기로 결정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정희가 관리하는 테니스 코트의 경기로 환원하자면 이재은, 임지선 감독은 완강한 완력으로 라인을 타고 공을 보내기 위해 공격적으로 라켓을 휘두르는 대신 담장 바깥에서 담장 안 가까운 곳으로 보내야 하는 테니스공들처럼 스핀이 많이 걸린 스트로크를 구사한다. 겸손하고 소박한 <성적표의 김민영>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다가 점진적으로 그 깊이를 체감하게 하는 감정을 드러내면서 조금씩 스며드는 환멸을 묘사한다. 감춰진 감정들이 많은 이 영화는 이별은 감상적일 수 없으며 매우 가혹하지만 필요하다는, 희소성 있는 주제를 다룬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런 곳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깊고 그윽한 숲속 어딘가, 정희가 그린 곳에서 살고 싶었던 마음처럼, 우리들의 친구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그곳에 혼자 있으리라는 사실만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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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컬트 영화에는 익숙한 인물 유형이 존재한다. 악마에 씐 소녀(혹은 젊은 여성)와 그의 가족, 퇴마사인 가톨릭 신부 등이다. 이들 중 여성-악마는 가장 중요한 존재이며, 다른 인물들은 과장하자면 여성-악마의 권능을 드러내기 위한 반응체일 뿐이다. 악마에 들린 여성은 선택된 관객인 퇴마사와 가족의 시선 아래 기괴한 얼굴과 뒤틀린 몸의 서늘한 쇼를 선보인다. 로즈 글래스의 데뷔작 < 세인트 모드 >에는 오컬트 영화의 핵심인 ‘여성-악마’라고 명시할만한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에 광적으로 몰두한 여성을 묘사하는 방식이 여성-악마를 묘사해온 방식을 연상시킨다. <세인트 모드>의 주요 등장인물은 모드(모르피드 클락)와 어맨다(제니퍼 엘)다. 이들의 역할을 오컬트 영화의 구도에 놓아보자면, 광신도로서의 젊은 간병인 모드는 일종의 퇴마사이며 투병 중인 유명 댄서이자 안무가 어맨다는 악마에 씐 여성의 자리에 내몰린다. 이들의 가족은 없거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신 어맨다의 지인들이 저택을 방문하곤 한다. 그럴 때면 죽어 가던 저택이 사람의 온기로 살아난다. 어맨다는 듬성듬성한 머리카락을 멋진 모자나 가발로 가리기만 하면 술과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위화감 없이 어울리며 특유의 우아함을 뽐낸다. 영화는 투병이라는 지루한 시간을 전환적으로 묘사하며 관객의 이목을 끈다. 빠른 편집과 어맨다의 개성, 투병과 구원의 중첩 등의 방식으로 이야기는 활기를 얻는다. 더욱 중요하게는 모드가 지닌 외로움의 강도가 투병의 지루함을 압도한다. 모드의 외로움은 어맨다의 사교성과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어맨다는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지만, 그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으며 그 역시 유쾌한 본성을 잃지 않는다. 사람들을 어맨다로부터 떨어뜨려 놓으려는 모드의 욕망은 종교적 광기에 의한 것으로 이해되는 한편, 거기에 질투가 포함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투병과 간병의 뒤집힌 관계는 아니쉬 차간티의 영화 <런>(2020)에서 클로이와 다이앤의 관계를 통해 드러난 바 있다. 다이앤은 딸 클로이가 계속 아픈 상태로 자신의 곁에 남아 있기를 욕망한다. 이를 통해 기존의 환자-보호자의 관계를 재정의하는 데 기여하는 한편, 장애를 지닌 클로이의 상태는 서스펜스를 만드는 주된 요소로 기능하며 영화적인 상태로 고양된다. <런>의 다이앤은 자신이 악인임을 부정하지 않지만, 모드는 다른 사람을 악마로 만든다는 점에서 더욱 악랄하다. 모드는 자극에 반응하는 퇴마사가 아니라 반응하기 위해 자극을 요구하며 심지어는 그 자극을 적극적으로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광적인 연출자다. 물론 누구도 그의 영화에 캐스팅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주된 배역을 스스로 떠맡게 된다. 모드는 고행을 시작한다. 어맨다로부터 ‘당신은 나의 구세주’라는 찬사를 들은 직후부터다. 기도할 때 작은 돌멩이들을 바닥에 뿌리고는 그 위에 무릎을 꿇는다. 열이 오른 스토브에 일부러 손등을 댄다. (그가 추종하는 마리아 막달레나로 추정되는)성인의 얼굴이 인쇄된 종이에 못을 촘촘히 박은 뒤 뒤집어 깔창처럼 깔고는 그대로 신발 위에 올라선다. 술집에서 처음 본 남자와의 섹스마저 고행의 일종처럼 보인다. 고행은 신발 속 못처럼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고 혼자만 향유하는 은밀한 것이다. 은밀한 것이 될수록 보이지 않는 신과의 교감의 정도가 더욱 커진다고 그는 믿는다. 믿는 것을 넘어 신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끊임없이 증명해 주기를 갈구한다. 그런데 모드의 기도가 우리 귓가에 울릴 때, 그가 접속하는 이는 신이 아니라 관객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피어난다. 보이스오버로 들려오는 기도는 엄밀히 말해 말로 서술한 일기이며 대화가 아닌 혼잣말이다. 관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의 자리에 불려와 그의 기도를 듣는다.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할 리 없는 관객(혹시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당신은 모드의 진정한 솔메이트다)은 신을 대체하는 동시에 (그 자리에 관객인 내가 있기에) 신의 부재를 증명하게 된다. 모드의 보이스오버는 그것이 들려주는 내용과는 반대로 신이 없다고 지속해서 속삭이는 셈이다. 모드의 고행 역시 의심스럽긴 마찬가지다. 그것은 신성에 다가가기 위한 것이기보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어난 환자 사망 사건의 트라우마에 의한 자해처럼 보인다. 어맨다가 ‘당신은 나의 구세주’라는 메시지를 적어 모드에게 선물한 윌리엄 블레이크에 관한 책은 처음부터 모드의 손에 있었을 뿐, 어맨다가 모드에게 선물하거나 이에 관해 언급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공포 영화에서 인간/비인간 사이 존재의 두려운 외형은 화면 안의 관객과 화면 밖의 관객에게 두루 영향을 미치며 강력한 위용을 드러내 왔다. 하지만 모드의 행위에 반응하는 내부의 관객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아마도 오컬트 영화에 길든 화면 밖의 관객 역시 그에게 시큰둥할 확률이 높다. 영화에는 모드의 고행이 응답을 받는 듯한 순간이 그려지지만, 이는 주인공을 위한 위로도, 믿음의 증거도 아닌 혼자만의 환상일 뿐이다. 홀로 있는 좁은 집에서 모드의 몸이 공중에 떠오르고 그 순간 창밖에는 그를 축복하듯 폭죽이 터진다. 벌레의 모습을 한 신은 모드 집의 누추한 벽에 깃들어 말씀을 전한다. 모드의 몸은 때때로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에 의해 작용하는 듯 뒤틀린다. 이것이 신의 현현인지, 과연 그 신이 좋은 신인지는 미지수다. 재현된 모든 것은 의심의 대상이다. 그것은 모드의 시선에서만 진실일 뿐이다. 기괴한 모습을 드러낸 어맨다는 정말 악마에 씐 건가, 모드의 내면에 돋아난 분노의 반영일 뿐인가. 모드의 등에 돋은 날개는 실제인가 망상인가. 모드가 자신의 몸을 태워 ‘순교’하는 장면에서 사람들은 일순간 성령을 본 듯 무릎을 꿇는데 이것은 모드의 소망인가 실제인가. 실수로 삽입된 프레임처럼 짧은 시간 우리의 눈을 스치고 지나가는, 타오르며 울부짖는 얼굴은 고통받는 성인이 아니라 미디어에서 재현해 온 ‘악마’를 연상시킨다. 아니, 그 숏은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보여준다. 그것만이 부정할 수 없는 실제 같다. 모드의 존재는 오컬트 영화의 악마에 들린 여성마저 축복받은 존재처럼 보이게 하는 착시 효과를 불러온다. 오컬트 영화 속에서 여성은 주변에서 그를 떠나지 않는 가족과 퇴마사의 시선 속에서 얼마나 외롭지 않게 고통받았던가. 능히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불가사의한 힘은 또 어떤가. 모드의 광기는 인간에게 두려움을 전하기보다는 안쓰러움을 불러일으키는 데 그친다. 그와 함께 이 글은 신도, 악마도, 천사도, 성녀도 되지 못한 한 외로운 인간을 위한 추도사가 되어 가는 중이다. 모드의 실패는 평범하게 남고 싶지 않은 외로운 사람들의 소망과 현실 사이의 낙차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종교에 관한 이야기이거나 신과 악마의 이야기가 아닌, 외로움의 이유를 만들고 싶어 한 고독한 인간의 이야기다. 영화가 보여준 ‘끝’의 이미지 뒤에 남는 것이 있다면, 그건 아마 모든 외로운 사람들이 남긴 짙은 그을음일 것이다. 모드가 기획하고 출연한 처절하게 외로운 1인 시스템 극중극과 함께 <세인트 모드>는 가장 ‘독립’적인 오컬트 영화가 되었다.
올해는 13편을 골랐다. 리스트에 오르지 않은 영화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빈 폴 , 사마에게 인데, 이들은 모두 작년 영화라고 한다. 하지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빼면 내 리스트는 허망해질 것이고, 사마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지금 러시아에서 공장생산되는 것처럼 쏟아져 나오는 회고조의 제2차 세계대전 영화들이 걱정되는 관객들은 빈 폴이 이 상황에서 얼마나 강력한 치료제인지 알 것이다. 리스트에 오른 영화들을 보자. 남매의 여름밤 은 벌새 의 뒤를 잇는 올해의 한국 영화이다. 하지만 극장 바깥을 보면 난폭하고 정신없고, 충무로 내부에서는 절대로 만들어질 수 없는 보건교사 안은영 이 질주하고 있다. 인비저블 맨 은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대한 할리우드의 집착이 얼마나 허망한지, 이를 벗어나면 얼마나 다양한 가능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레디 오어 낫 은 호러 영화가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다고 해서 뻔뻔스러운 장르적 즐거움을 포기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걸 보여준다. 소년시절의 너 는 동아시아 교육 시스템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이라면 공감과 공포를 모두 느낄 수밖에 없는 폭탄 같은 멜로드라마다. 월드 오브 투모로우 에피소드 3: 앱센트 데스티네이션스 오브 데이비드 프라임 을 만들면서 돈 허츠펠트는 21세기의 가장 훌륭한 SF 삼부작 영화를 완성했다. 작은 아씨들 을 빼먹고 오래된 고전의 새로운 재해석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없다. 딕 존슨 이즈 데드 에서 영화 만들기의 작업은 감독의 가족사와 아름답고 유쾌한 조화를 이룬다. 퀸스 갬빗 에 대해 말할 것 같으면, 이전엔 아카데미를 노리고 만들어졌던 훌륭한 드라마들이 넷플릭스로 옮겨가고 있는 것 같다. 반쪽의 이야기 를 해보자. 이 작품은 올해 본 영화들 중 가장 개인적인 작품이 될 텐데, 그건 내 어린 시절 덕질과 관련있다. 어렸을 때 나는 요새 중고등학생들이 아이돌을 파듯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를 팠다. 실존 인물을 판 게 아니라 에드몽 로스탕이 자신의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에서 재창조한 코쟁이 시인을 판 것이다. 왜냐고 묻는다면 길게 설명할 수 있지만 그건 좀 무의미한 일이다. 어린 시절은 아무 것에나 심장이 찔리기 마련이고 그 상흔은 꽤 오래간다. 그냥 그랬다고 할 수밖에. 반쪽의 이야기는 내가 본 시라노 각색물과 파생물 중 최고다. 그리고 나는 꽤 많은 작품들을 보았다. 장 폴 라프노가 감독하고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나오는 시라노 는 많이들 결정판으로 여기고 있지만 둔중하고 맥빠진 영화라 영 별로다. 호세 페러가 아카데미 상을 받은 마이클 고든의 할리우드 영화는 그보다 낫지만 좀 녹화된 연극 같다. 프레드 셰피시가 감독하고 스티브 마틴이 코쟁이 소방서장으로 나오는 록산느 가 오히려 괜찮다. 마이클 레만의 고양이와 개에 관한 진실 은 성별을 뒤집은 사랑스러운 영화이다. 시라노 연애조작단 은 잘 만든 로맨틱 코미디지만 편지 대필이라는 설정만 남고 캐릭터가 빠져 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오페라, 뮤지컬, 텔레비전 드라마, 라디오 각색물들이 있고 이들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여기서 멈추기로 하자. 훌륭한 시라노 영화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요약만 읽으면 도저히 납득이 안 가는 구식 설정을 영화의 현대적인 설정 속에서 이치에 맞아 보일 수 있도록 개조하고 그 안에서 세 주인공들을 바보스럽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시라노를 만들어야 한다. 원작은 큰 문제가 없다. 원작이 나왔을 무렵에도 과거였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무대극, 심지어 대사 대부분이 시인 운문극을 보면서 설정의 사실성을 따지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새 시리노 이야기의 배경이 21세기 미국 고등학교라면 사정이 다르다. 사실 반쪽의 이야기에서도 시라노의 설정은 아주 잘 맞지 않는다. 일단 지금은 아무도 종이 편지를 쓰지 않기 때문에. 심지어 이건 영화가 대사를 통해 직접 언급하고 넘어가는 내용이다. 하지만 21세기의 변화한 사회는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설득력 있는 시라노 이야기를 가능하게 한다. 우리의 새 시라노는 편지를 대신 쓰기도 하지만 모바일 문자를 이용하기도 한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새 시라노를 만들어야 한다. 로스탕의 시라노는 코가 지나치게 컸다. (실존 인물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고 한다). 우린 외모지상주의 사회를 살고 있으니 외모의 핸디캡은 여전히 먹힌다. 하지만 원작이 백년 넘게 써온 소재 안에서 경쟁하기는 쉽지 않다. 반쪽의 이야기가 택한 것은 인종과 성별이다. 이 영화의 시라노는 중국계 동성애자 여성이다. 조금 뒤에 역시 넷플릭스에서 풀린 블라이 저택의 유령과 비교할 만 하다. 모두가 아는 고전 이야기의 주인공을 현대 또는 가까운 과거로 데려와 새로운 핸드캡을 주기 위해 퀴어 설정이 도입된 것이다. 단지 여기서 ‘선택’이라는 단어는 잘못 쓰였다. 이 영화를 쓰고 감독한 앨리스 우는 새로운 시라노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인종과 성별을 선택한 게 아니라 인종과 성별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시라노를 선택한 것이다. 미국에 사는 중국계 퀴어 여성인 감독은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알마나 쉽게 시라노가 되는지 알고 있다. 반쪽의 이야기는 아무도 믿지 못할 어처구니 없는 설정이 자연스러울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개조된 상황을 보자. 엘리 추는 사교성 없는 중국계 학생이다. 동양인은 자신과 아버지밖에 없는 작은 시골 마을에 살고 있다. 모범생인 엘리에게 학교 미식축구 선수인 폴 먼스키가 접근해 온다. 폴은 엘리가 자기 대신 짝사랑하는 애스터 플로레스에게 편지를 써주길 바란다. 엘리는 이전부터 돈을 받고 다른 학생들의 숙제를 대신 해주고 있으니 이건 또다른 아르바이트에 불과하다: 폴이 모르는 건 엘리 역시 애스터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설정을 수정하면서 반쪽의 이야기는 원작에서 몇 걸음 더 나아간다. 시라노는 자신의 아바타로 잘생긴 크리스티앙을 내세웠다. 둘은 모두 백인 남자로 그들의 차이는 당시 생각했던 것만큼 크지 않다. 시라노의 정신과 크리스티앙의 외모의 결합이라는 비유도 자연스러워졌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 엘리는 시라노처럼 ‘자신과 같은 부류지만 더 잘생긴 누군가’를 내세우지 못한다. 반쪽의 이야기는 자신 또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자판으로 ‘나’라고 칠 때 그 ‘나’가 고의적으로 실제 자신을 비껴가는 사람들. 자신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전시하지 못하고 아바타를 빌리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 대신 아바타로 등장하는 건 이성애자 백인남자다. 자신이 아닌 것의 총집합. 이건 굉징히 잔인하고 날카로운 코미디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반쪽의 이야기는 그런 영화가 아니고,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길을 간다. 영화는 나오는 거의 모든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이 이야기에는 어리석은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글도 못쓰고 말도 못하며 생각이 단순한 폴도 어리석지는 않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의 좁은 생각 안에 갇혀 있다. 하지만 폴은 늘 자기 바깥으로 나간다. 처음엔 그냥 대필작가로 머리를 빌리려 했던 엘리와 친구가 되고 결국엔 엘리의 입장을 이해한다. 사기의 희생자로 그려지기 쉬운 록산느 역할의 애스터도 마찬가지다. 후반 설정을 잘 짜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엘리와 애스터의 대화에는 진짜 소울메이트를 만난 사람들의 흥분이 느껴진다. 디지털 시대가 일방적인 시라노의 편지 공격을 완전히 다른 형태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로스탕의 시라노는 백인 남자 예술가의 자뻑 이야기다. 아무리 오랜 덕질 대상이라고 해도 그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시라노의 이야기는 비극적인 예술가자 자의로 감추고 있던 비밀이 죽음 직전에 밝혀지면서, 그 자뻑이 하늘을 찌를 때 끝이 난다. 하지만 남자 예술가의 일방적인 편지가 아닌 세 청소년의 열린 대화를 다룬 반쪽의 이야기는 더 성숙하다. 시라노와는 달리 이들에겐 미래가 열려있다. 그들은 이 소동이 끝난 뒤에도 계속 성장하면서 아직 어디로 흐를 지 알 수 없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 것이다. 그리고 엘리 추는 ‘나’가 자기자신인 글을 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