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 투쟁의 날
- 제작년도
- 1997
- 출연
- 줄리어스 피셔, 헤더 니콜라스, 테리 케네디, 윈스턴 업쉘
(사진: “ Häxan ”, IMDb)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반드시, 라고 단언하고 싶은데, 자신을 시네필이라고 자처하는 이라면 누구라도 일시적으로 이상한 영화를 찾아보느라고 시간을 보낸다. 누군가는 재빨리 빠져나오고 다른 누군가는 여기에 머문다. 그 영화들이 ‘불법적인’ 대상이 아니라면 (이를테면 스너프 필름, 아동성애 영화, 기타 등등) 각자의 취향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이 영화들을 ‘이상한 영화’의 수호성인 아모스 보겔은 ‘전복적인 예술영화(subversive art film)’라고 불렀다. 아모스 보겔을 이야기할 자리는 1974년까지 기다려주길 바란다. 여기서 질문은 영화사의 순간들에서 ‘이상한 영화’라고 부르는 영화가 언제 나타났느냐는 것이다. 물론 방점을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 다른 계보를 열거하게 될 것이다. 다른 예술들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사회적 위반, 법적 금지의 경계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했고, 할 수만 있다면 그 선을 넘고 싶어 했다. 누군가는 한계를 부수길 원했고, 다른 누군가는 돈을 원했다. 누군가는 예술적인 실험을 하고 싶어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거기서 쾌락을 향유했다. 여러 영화 제목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여기서 시작해보겠다고 결심했다. 세계영화사의 순간들은 그렇게 가끔 하나의 선처럼 느껴지는 앞과 뒤를 따라가다가 갑자기 옆으로 빠져나올 것이다. 내가 ‘이상한 영화’의 계보를 따라 올라가다가 가장 멀리서 마주친 영화는 벤야민 크리스텐센의 스웨덴 영화 < 헥산 >(1922)이다. “Häxan”은 번역하면 ‘마녀’라는 뜻이다. 벤야민 크리스텐센은 19세기인 1879년에 태어났다. 처음에는 배우가 되기를 원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18년부터 ‘흑마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고서점을 뒤지던 벤야민은 독일 베를린 서점에서 『마녀의 망치(Malleus Maleficarum)』 사본을 구하게 되었다. 이 책은 1486년 독일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하인리히 크라메르가 쓴 마녀 처단에 관한 책이다. 주술을 이단으로 규정하면서 마녀로 규정된 여자의 마법의 악을 ‘끝내기 위해서’ 자백을 끌어내는 고문 기술을 상세하게 기술했다. 이 책이 출간될 무렵에 유럽에서는 마녀로 내몰린 여자들이 산채로 화형당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하인리히 크라메르는 마녀의 존재를 신학적으로 증명된 것처럼 주장하고, 더 나아가 마녀사냥을 제도화하는 데 기여하고, 심지어 이 책은 마녀재판의 법전이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 소설에서 사용된 장면들, 마녀들은 악마와 계약을 맺어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얻게 된다는 이야기들이 여기 실려 있다. 교회 내부에서도 이 책은 논쟁이 되었으며, 오히려 그래서 많은 독자를 얻게 되었다. 1519년에 야콥 스프렝게르가 이 책에 새로운 저자로 나서서 마치 개정 증보판처럼 추가해서 1533년에 출간하였다. 손에 손을 거쳐 이 책은 마녀를 자백시키는 안내서가 되었고, 잔인한 고문 기술자들은 상상으로 쓰인 이 책의 내용을 감옥에서 불행한 여자들에게 실행하였다. 『마녀의 망치』는 일시적으로 판금 되었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왕실 궁정에서 공공연하게 읽히는 금서가 되었으며, 16세기 이후에 마녀재판에서 더 잔인한 기술을 정당화시켜 주었다. 『마녀의 망치』 표지와 <헥산> 포스터 (사진: “ Häxan ”, IMDb) 벤야민 크리스텐센이 구한 사본 『마녀의 망치』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여러 개의 판본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본이 15세기라는 것을 셈에 포함해주길 바란다. 1부에서는 먼저 마녀의 존재와 악행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2부에서는 마녀들이 저지른다고 여겨지는 다양한 범죄와 악마와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리고 3부에서 마녀재판의 실제 절차와 고문을 통한 자백 유도 방법을 자세하게 소개한다. 『마녀의 망치』에 만족하지 않고 벤야민은 1919년부터 거의 2년 동안 마녀사냥과 재판에 관한 상세한 규정들, 사례, 실제로 실행하는 집행과정을 담은 삽화들, 여기에 더해 각종 문건을 모았다.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벤야민은 1920년까지 발표된 마녀들에 관한 소설과 희곡도 모았다. 그런 다음 자료들을 바탕으로 영화제작을 결심하였다. 벤야민이 준비한 것은 단지 마녀에 관한 시나리오가 아니었다. 준비한 <헥산>은 유럽 중세로부터 400년에 걸친 마녀사냥과 재판에 관한 백과사전이었다. 벤야민은 제작자들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자신이 구한 도판들을 그 앞에서 전시하다시피 했고, 상상하기 힘든 끔찍한 재판기록과 집행을 낭송하기도 했다. 이 기괴하지만, 분명히 야심적인 프로젝트에 스웨덴 필름 인더스트리가 관심을 보였다. 벤야민과 촬영 감독 요한 안케르스트예르네는 덴마크에 오직 <헥산> 촬영을 위한 영화 스튜디오를 사들였다. 그런 다음 야외는 중세를 재연하였고, 실내는 모두 밀폐시킨 다음 어두운 그림자와 빛으로만 이루어진 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해 해가 떨어진 다음에만 촬영을 시작해서 새벽이 오면 멈추었다.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헥산>은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연장이라기보다는 중세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제단화를 스크린 위에 펼쳐놓은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가장 비싼 무성영화가 되었다. <헥산>은 1921년 2월에 촬영을 시작해서 그해 10월까지 이어졌다. 빛과 그림자 간 대조가 두드러지는 장면 / 우주를 둘러싼 천사 합창단의 모습 (사진: “Häxan( 1 , 2 )”, IMDb) 영화 <헥산>은 7개의 연대기로 나누어져서 진행된다. 첫 번째 시작은 마치 학술 발표를 위한 도판 설명처럼 이어진다.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있고, 주변에 공기와 불이 둘러싸고 별들이 주변을 떠돌면서 천사 합창단이 보인다. 그런 다음 악마와 마녀의 조각상, 목판화, 삽화를 차례로 소개한다. 이 화면자료들이 펼쳐지면 IMAX 스크린으로 벽화처럼 보고 싶을 것이다. 사탄이 나타나서 부부가 잠든 침대에서 아내를 유혹하고, 질식시키고, 살해하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사랑의 묘약을 구하는 여인, 성에 눈뜨는 여인, 그 여인이 몰래 먹이는 묘약에 흥분하는 승정(僧正), 게걸스러운 폭식, 들린 자들(the possessed)이 사탄의 북소리에 맞춰 한밤중에 불을 피우고 춤을 추는 축제, 벤야민 크리스텐센은 이 장면들을 종종 멜리에스 영화에서 본 특수효과를 이용해서 펼쳐 보인다. 하지만 이 장면들이 우스꽝스럽기는커녕 오싹해지는 것은 만들고 있는 쪽에서 지금 이걸 진심으로 믿고 있구나, 라는 설득을 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민담과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들처럼 보였지만 여기에 교회가 개입하면서 고문이 등장한다. 벤야민 크리스텐센은 그 과정의 세부를 묘사하는데 망설임이 없다. 여기서 이 영화가 그런 이야기들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시기에 만들어졌단 생각을 해야 한다. 게다가 신성모독 장면을 재연하는데 망설임이 없다. 그래서 <헥산>을 보고 있으면 이래도 괜찮은 것일까, 라는 장면들과 마주치게 된다. (상) 마녀와 악마에 관한 삽화 / (하) 사탄의 북소리에 맞춰 춤추는 들린 자들(the possessed) (사진: “Häxan( 1 , 2 )", IMDb) 벤야민 크리스텐센이 1921년에 이 영화를 만들면서 프로이트의 저술을 읽었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알지 못한다. 프로이트는 아직 살아있었고, 『쾌락원칙을 넘어서』를 발표한 직후이다. <헥산>의 마지막 연대기는 동시대에 이른다. 중산층 가정의 평범한 여성은 몽유병에 시달린다. 그리고 그녀는 몇 가지 과정을 거쳐서 정신병원으로 보내진다. 그 당시 정신병원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미셀 푸코의 책에 잘 설명되어 있다. 고문 장면뿐만 아니라 성상 모독, 마녀에 관한 찬양, 중세 교회에 대한 적나라한 재판 장면과 함께 여성의 누드, 신체 훼손, 시체 손상에 이르는 장면들이 등장하면서 개봉 당시 스웨덴과 덴마크의 검열은 통과했지만, 독일과 프랑스, 특히 미국에서는 검열에서 문제가 되어 개봉을 위해 재편집이 불가피했고 상당 부분이 삭제되어 국가별로 여러 판본이 남아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여러 판본이 만들어졌다. (내가 보지 못했지만) 가장 흥미로운 판본은 1968년 메트로 픽쳐스 코퍼레이션이 <헥산; 옛날 옛적부터의 마녀들(Häxan; Witchcrafts through the ages)>이다. 이 판본에서는 『네이키드 런치』의 윌리엄 버로스가 영어 나레이션을 한다(고 한다). 이 무렵 윌리엄 버로스는 마약중독 상태에서 장 주네를 둘러싼 친구들과 친교를 맺던 시기였다. 어떻게 궁금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정작 이 판본의 복원 소식은 들리지 않고 1976년부터 1922년 판본을 원본에 가깝게 몇 차례에 걸쳐 복원하고 있다. 물론 원본을 복원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윌리엄 버로스의 판본이 궁금하다. 아마 언젠가는 될 것이다. 나는 기다릴 수 있다.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
<묵시록의 4기수> 중 (사진: “ The Four Horsemen of the Apocalypse ”, IMDb)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루돌프 발렌티노(Rudolf Valentino, 1895~1926)가 할리우드 무성영화 시대 첫 번째 스타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최고의 인기를 누린 스타도 아니었다. 만일 그렇다면 이 자리에 더글러스 페어뱅크스나 메리 픽포드, 펄 화이트, 테다 바라, 월러스 레이드, 윌리엄 S. 하트, 기쉬 자매, 존 길버트, 클라라 보우, 하여튼 먼저 호명해야 할 정말 많은 이름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 일정 기간 사랑에 빠지곤 했다) 물론 세계 영화사의 순간(들)을 뒤져나가면서 계속해서 이 자리에 스타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그들은 분명히 위대한 영화 작가들, 시네아스트들, 제작자들, 끝없는 테크놀로지의 발명만큼 이 순간을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루돌프 발렌티노가 단지 호명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설명이 필요한 이름이 되었는가. 스크린에 루돌프 발렌티노가 등장해서 탱고를 추는 순간 영화를 보던 여성 관객들 사이에서 기절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현상을 이미 설명한 사람이 있다. 『적과 흑』(1830), 『파르므의 승원』(1839)을 쓴 프랑스 소설가 스탕달은 1871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산타크로체 성당을 방문해서 미술품들을 감상하다가 감정적 충만함과 희열을 견디지 못하고 기절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감정을 다스리는 데 한 달이나 걸렸다고 한다. 스탕달만 이걸 경험한 것이 아니라, 산타크로체 성당을 방문한 수많은 관광객이 미술품을 본 다음 심장의 두근거림, 정신의 혼미한 상태, 어지러움, 우울증, 현기증, 위경련, 심지어 전신마비를 경험하였다. 그래서 이 증세를 ‘스탕달 신드롬(Stendhal Syndrome)’이라고 부른다. 두 현상이 정확하게 같은 정신적 반응인지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하여튼’ 스크린 앞에서 같은 일이 벌어졌다. 스타라는 자리는 단지 인기가 많은 배우, 만으로는 갈 수 없는 별자리이다. 그 자리에 가려면 배우와 관객 사이에서 마법이 발생해야 한다. 내 말이 아니라 스타, 라는 현상을 처음 주목한 사회학자 에드가 모랭의 지적이다. 이 말에 영감을 얻어 문학평론가 롤랑 바르트는 몇 편의 스타에 관한 글을 썼다. 그러면서 스타를 ‘현대의 신화’를 구성하는 하나의 콤플렉스. 하나의 트라우마, 하나의 현상, 하나의 담론, 하나의 이데올로기라고 불렀다. 내가 여기서 주목하는 단어는 ‘마법’이다. 대중과의 관계를 놓고 장황한 사회학 이론과 정신분석의 개념들로 이 단어 주변을 장식할 수 있지만, 사후약방문처럼 정리되면서 무언가 결정적인 핵심은 매번 놓치고 있다는 의심을 떨칠 수 없다. 단 한 마디로 영화사의 신비로운 순간들. 나는 그걸 AI가 대신할 수 없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루돌프 발렌티노 (사진: “ Forgotten Hollywood: Rudolph Valentino – ‘The Great Lover’ ”, Golden Globe Awards) 1895년 5월 6일 이탈리아 남부의 작은 마을 카스텔라네타에서 이탈리아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네 명의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루돌프 발렌티노에게 아들만큼 이름이 긴 아버지는 루돌프 피에트로 필리베르토 라파엘로 주그렐미 디 발렌티나 단톤게라(Rudolf Pietro Filiberto Raffaello Guglelmi di Valentina d’Antonguella)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하지만 이 이름을 전부 부르는 사람은 없다. 거의 교육을 받지 못한 발렌티노는 파리에까지 갔지만 빈손으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런 다음 18살에 뉴욕으로 갔다. 좀 이상한 일이지만 루돌프 발렌티노는 할리우드에서 성공을 거둔 다음에도 이민 온 다른 스타들과 달리 미국 시민권을 신청하지 않고 이탈리아 국적을 유지하였다. 아무 경력이 없는 루돌프 발렌티노는 수많은 직업을 전전했고 매번 해고를 당했다. 그렇긴 하지만 그에게는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루돌프 발렌티노는 탱고 춤을 잘 추었다. 잘 춘 정도가 아니라 정말 잘 추었다. 어디서 배운 것도 아니었다. 하늘에서 내려준 재능을 지닌 타고난 탱고 댄서였다. 게다가 춤을 추면서 이상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한마디로 루돌프 발렌티노는 요염했고, 그가 탱고를 추면 홀리는 듯한 손끝과 옷이 몸에 꼭 달라붙어서 발가벗은 듯한 육체의 제스처, 그리고 오직 당신만을 위해서 춤을 춘다는 눈빛이 최면을 걸기라도 하는 것처럼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1914년 무렵 조 파니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사교 댄서이자 작곡가이며 사회 정치적인 활동가였던 조앤 소이어의 상대로 주급 50불로 탱고 파트너가 되었다. 루돌프 발렌티노는 명성을 얻었지만, 치정 살인사건에 휘말리면서 뉴욕을 벗어나 할리우드로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떠났다. (좌) <A Sainted Devil>(1924) 중 (우) <묵시록의 4기수> 중 / 사진: IMDb ( 좌 , 우 ) 하지만 할리우드에 와서 갑자기 명성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엑스트라로 현장을 기웃거렸으며, 조연의 조연의 조연에 해당하는 역할을 전전했다. 루돌프 발렌티노를 알아본 건 아직 MGM 영화사로 합병되기 이전 메트로 영화사의 제작 프로듀서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준 마티스였다. 준 마티스는 무성영화 시대에 가장 눈 밝을 뿐만 아니라, 예술적 직관과 재능을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장황한 설명 대신 증명할 수 있는 간단한 사례를 들려주겠다. 준 마티스는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의 < 탐욕 >(1924) 원작을 각색하고 대사를 쓴 사람이다. 메트로 영화사는 빈센트 블라스코 이바네즈의 소설 『묵시록의 4기사』(1887) 판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소설의 각색을 준 마티스에게 맡겼다. 각색한 다음 렉스 잉그램 감독에게 배역 중에 훌리오 역에 루돌프 발렌티노를 강력하게 추천했다. 렉스 잉그램은 루돌프 발렌티노 캐스팅에 반대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전해지지만, 스튜디오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두 알 수는 없다. 소문에 따르면 루돌프 발렌티노가 게이라서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주장은 전기에도 꾸준히 따라다니는 이야기지만 소문에서 멈추었다. 상황이 복잡하다. 그 당시에 게이라는 소문은 대중들에게 치명적이었고, 아마도 그것이 외부에 알려지면 영화 흥행에 치명적인 결과를 맞을 수도 있는 시대였다. 게다가 렉스 잉그램이 거부감을 가졌다는 말도 있다. 루돌프 발렌티노는 몇 차례 결혼했지만, 그 당시에는 많은 게이가 소문을 진압하기 위해 위장결혼을 했기 때문에 그것으로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렉스 잉그램이 끝까지 반대하기에는 준 마티스가 메트로 영화사에서 강력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묵시록의 4기수> 촬영 중 루돌프 발렌티노 (사진: “ The Four Horsemen of the Apocalypse ”, IMDb) 촬영 현장은 순조롭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준 마티스가 옳았다. < 묵시록의 4기수 >(렉스 잉그램, 1921)는 시사회에서 그리피스의 < 국가의 탄생 >(1915) 이후 할리우드 영화의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1921년 3월 6일 개봉하자마자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루돌프 발렌티노는 이탈리아인이었는데도 이 영화의 배역 때문에 ‘라틴 러버(Latin Lover)’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그리고 이 애칭은 스타의 한 계보를 이루는 용어가 되었다. 스크린에 나타나 바라보면 그 눈길에 홀리듯이 빠져들게 만드는 남자. 그 자신이 하나의 장르인 스타. 더 간단하게 한 마디로 ‘유혹’ 그 자체. 이 용어를 사용해야 하는 스타는 관객이 자발적으로 날 유혹해주세요, 라고 애원하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고 덧붙인다. 점점 그 힘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존 배리모어, 샤를 보이에, 로버트 테일러. 타이론 파워, 제랄 필립,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이 계보를 이어갔다. 하지만 아무도 루돌프 발렌티노의 자리를 얻지는 못했다. 단숨에 루돌프 발렌티노가 ‘라틴 러버’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러나 그런 다음 자신의 이미지를 더 발전시키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비슷한 역할을 반복했다. 하지만 루돌프 발렌티노의 열광적인 팬들은 같은 노래만 부르는데도 지치지 않고 공연장을 찾는 팬들처럼 영화관을 가득 채웠다. 이렇게 말하는 건 망설여지지만 루돌프 발렌티노는 자신의 인기가 몰락하는 걸 보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1926년 8월 15일 뉴욕 앰배서더 호텔에서 복막염으로 병원에 실려 갔다. 의사들은 낙관적이었지만 23일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장례식에 1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들었고, 백여 명의 경찰이 동원되었다. 신문은 사망 소식에 충격을 받은 팬들의 자살 소식을 전했다. 전설은 또 다른 전설을 낳았다. 매년 기일이 되면 애도의 뜻으로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면사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나타나서 무덤에 장미 한 송이를 놓고 사라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얼마나 유명한 이야기인지 1959년 레프티 프리젤이 ‘검고 긴 면사포(Long black veil)’라는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를 조니 캐쉬, 조앤 바에즈가 다시 불렀다. 그런 다음에도 수많은 가수가 루돌프 발렌티노를 자신의 가사에 등장시켰다. 그중에는 밥 딜런, 킹크스, 이기 팝, 데이빗 보위, 프린스, 스키드 로우, 레오 세이어, 퀸, 그리고도 한참 더 있다. 이것이야말로 스타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달리 무엇이겠는가. <Camille>(1921) 중 (사진: “ Camille ”, IMDb)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
영화에서 스튜디오의 역사는 그 자체로 그 나라 영화의 역사의 하부 토대이며 동시에 대중영화의 정치경제학이다. 돈의 역사. 아무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 스튜디오의 의미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할리우드이다. 이미 미국에서는 독점자본간의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에서 고몽 파데의 스튜디오가 세워졌다. 그러나 독일에서 세워진 UFA는 다른 설명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베를린에 세워진 UFA(Universum-Film Aktiengesellschaft) 스튜디오는 독일 영화사이기도 할 것이다. 이미 유럽에서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화가 지닌 상품적 성격에 따른 해외배급의 맹렬한 경제적 지역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독일은 군소영화사들이 흩어져있었고 할리우드 영화와 프랑스 영화, 이탈리아 영화들이 독일 영화시장을 거의 점령하다시피 했다. 1913년 독일에 개봉한 독일영화는 13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독일 대중들은 전시 상황에서 구경거리를 원했고 수요는 폭등하고 있었으며, 사회는 전시경제로 불안하기만 했다. 이 상황을 근심한 것은 영화인들이 아니라 루르지방의 중공업자들 대표였던 알프레드 후근베르크였다. 그는 19·16년 독일 소규모 제작사를 중심으로 한 카르텔 형태의 도이치 리히트빌트(Deutsche Lichtbild)를 세웠다. 이것이 하나의 출발이 되었다. 물론 모든 것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만든 연합체는 불공정 거래를 했으며 경쟁 영화사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놓였다. 여기에 개입한 사람은 독일 군(軍)장성이었던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이었다. 전시체제였고, 아직은 바이마르 공화국 전야의 빌헬름 2세가 이끌던 프로이센 왕국의 마지막 황혼기였다. 루덴도르프 장군은 놀랍게도 영화가 지닌 정치적 오락 프로파간다의 성격을 간파했다. 그는 국방부장관에게 편지를 보내서 “조국의 극장을 외국의 영화에 내주어서는 안 되며 외세의 영화들로부터 방어해야 합니다. 영화가 지닌 특별한 힘을 우리는 전시 중에 보았습니다. 이제 대중들을 집중시키고 통제해야 합니다” 아마도 루덴도르프 장군이 염두에 둔 것은 (정확하게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프랑스에서 전시 중에 내내 프랑스 국민들에게 유리하게 편집된 뉴스 릴을 통해서 영화의 프로파간다 홍보 활동을 했던 고몽영화사 ‘주르날 시네마’이었을 것이다. 텔레비전이 아직 등장하기 전인 그 시절 영화보다 더 강력하게 전쟁의 현장을 전달하는 다른 수단은 없었다. 아마도 영화의 정치적 프로파간다는 그렇게 독일의 정치적 전술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치 문화상이었던 괴벨스는 어린 시절 그 영화들을 보면서 자랐을 것이다. 루덴도르프 장군이 나서서 새로운 독일 영화사들의 연합체를 설립하였다. 이 연합체인 UFA는 합병형태(consolidation)로 서로 결합했는데 정확하게 동일한 형식은 아니지만 트러스트의 협약방식을 따랐다. 그들은 트러스트 협약형식처럼 서로간의 경쟁형태를 피하고 서로 간의 수익을 거두기 위하여 독점적 지위를 갖기는 했지만 각자의 독립적 위치를 포기해야했다. UFA의 경제적 협력방식을 규명하는 설명에는 영화학자들 사이에 서로 다른 이견이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을 환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UFA는 처음부터 프로이센 왕국의 군부 산하 명령을 따라야했으며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가 된 다음에는 국방부에서 이 스튜디오를 관리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복잡한 과정을 거쳐 문화부에로 이관되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장점도 있었다. 처음 UFA 스튜디오를 출범할 때 국가가 보증했기 때문에 독일은행인 도이체 방크가 거액의 기금을 내놓았다. 1917년 12월 13일 베를린에서 거의 기습적으로 UFA 출범을 발표하였다.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영화사들이 당황했지만 이 스튜디오를 주관한 사람이 루덴도르프 장군이라는 사실을 앍고 모두 침묵하였다. 군부는 그 당시 독일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집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반대를 표명하는 것은 반국가적인 행위가 되었다. 처음 출범할 때 노르디스크 영화사. PAGU, 메스터 GmbH를 합병하였고, 1921년까지 21개 영화사를 UFA 스튜디오 아래 집결시켰다. 그러면서 바벨스베르크 스튜디오를 대대적으로 수리하면서 오늘날 영화사에서 프릿츠 랑의 <메트로폴리스>, 무르나우의 <최후의 사람>을 보면서 감탄해마지 않는 UFA 스튜디오가 되었다. UFA는 거의 모든 영화를 제작했다. 극영화, 다큐멘터리, 민족지 영화, 그리고 무엇보다 매주 상영되는 뉴스 릴 영화를 중요하게 만들었다. 그 출발이 영화사를 불편하게 만들지만 UFA는 바이마르 문화의 위대한 꽃이 되었다. 여기서 독일 표현주의 영화가 시작되었으며, 그리고 독일 영화감독들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영화인들도 이곳으로 합류하였다. 프릿츠 랑, 빌헬름 프리드리히 무르나우, 조셉 폰 스턴버그, 에른스트 루비치, 빌헬름 디터, 로베르트 시오드마크(훗날 할리우드로 망명한 로버트 시오드마크), 심지어 빌리 빌더(훗날 할리우드에 간 빌리 와일더)도 여기에 합류하였다. 하지만 위대한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프릿츠 랑이 UFA 스튜디오에서 사람들을 최면으로 조종하는 마부제 박사의 이야기 <마부제 박사>를 찍고 있을 때 아돌프 히틀러는 감옥에서 자신의 자서전 <나의 투쟁>을 쓰면서 출감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화와 역사는 얼마나 가까이 있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