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폴리스
- 감독
- 린 타로
- 제작년도
- 2001
- 출연
- 이노모토 유우카, 코바야시 케이쥬, 오카다 히로키, 사와구치 쥰페이 , 이시다 타로우 , 토미타 코우세이
영화에서 스튜디오의 역사는 그 자체로 그 나라 영화의 역사의 하부 토대이며 동시에 대중영화의 정치경제학이다. 돈의 역사. 아무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 스튜디오의 의미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할리우드이다. 이미 미국에서는 독점자본간의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에서 고몽 파데의 스튜디오가 세워졌다. 그러나 독일에서 세워진 UFA는 다른 설명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베를린에 세워진 UFA(Universum-Film Aktiengesellschaft) 스튜디오는 독일 영화사이기도 할 것이다. 이미 유럽에서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화가 지닌 상품적 성격에 따른 해외배급의 맹렬한 경제적 지역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독일은 군소영화사들이 흩어져있었고 할리우드 영화와 프랑스 영화, 이탈리아 영화들이 독일 영화시장을 거의 점령하다시피 했다. 1913년 독일에 개봉한 독일영화는 13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독일 대중들은 전시 상황에서 구경거리를 원했고 수요는 폭등하고 있었으며, 사회는 전시경제로 불안하기만 했다. 이 상황을 근심한 것은 영화인들이 아니라 루르지방의 중공업자들 대표였던 알프레드 후근베르크였다. 그는 19·16년 독일 소규모 제작사를 중심으로 한 카르텔 형태의 도이치 리히트빌트(Deutsche Lichtbild)를 세웠다. 이것이 하나의 출발이 되었다. 물론 모든 것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만든 연합체는 불공정 거래를 했으며 경쟁 영화사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놓였다. 여기에 개입한 사람은 독일 군(軍)장성이었던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이었다. 전시체제였고, 아직은 바이마르 공화국 전야의 빌헬름 2세가 이끌던 프로이센 왕국의 마지막 황혼기였다. 루덴도르프 장군은 놀랍게도 영화가 지닌 정치적 오락 프로파간다의 성격을 간파했다. 그는 국방부장관에게 편지를 보내서 “조국의 극장을 외국의 영화에 내주어서는 안 되며 외세의 영화들로부터 방어해야 합니다. 영화가 지닌 특별한 힘을 우리는 전시 중에 보았습니다. 이제 대중들을 집중시키고 통제해야 합니다” 아마도 루덴도르프 장군이 염두에 둔 것은 (정확하게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프랑스에서 전시 중에 내내 프랑스 국민들에게 유리하게 편집된 뉴스 릴을 통해서 영화의 프로파간다 홍보 활동을 했던 고몽영화사 ‘주르날 시네마’이었을 것이다. 텔레비전이 아직 등장하기 전인 그 시절 영화보다 더 강력하게 전쟁의 현장을 전달하는 다른 수단은 없었다. 아마도 영화의 정치적 프로파간다는 그렇게 독일의 정치적 전술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치 문화상이었던 괴벨스는 어린 시절 그 영화들을 보면서 자랐을 것이다. 루덴도르프 장군이 나서서 새로운 독일 영화사들의 연합체를 설립하였다. 이 연합체인 UFA는 합병형태(consolidation)로 서로 결합했는데 정확하게 동일한 형식은 아니지만 트러스트의 협약방식을 따랐다. 그들은 트러스트 협약형식처럼 서로간의 경쟁형태를 피하고 서로 간의 수익을 거두기 위하여 독점적 지위를 갖기는 했지만 각자의 독립적 위치를 포기해야했다. UFA의 경제적 협력방식을 규명하는 설명에는 영화학자들 사이에 서로 다른 이견이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을 환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UFA는 처음부터 프로이센 왕국의 군부 산하 명령을 따라야했으며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가 된 다음에는 국방부에서 이 스튜디오를 관리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복잡한 과정을 거쳐 문화부에로 이관되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장점도 있었다. 처음 UFA 스튜디오를 출범할 때 국가가 보증했기 때문에 독일은행인 도이체 방크가 거액의 기금을 내놓았다. 1917년 12월 13일 베를린에서 거의 기습적으로 UFA 출범을 발표하였다.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영화사들이 당황했지만 이 스튜디오를 주관한 사람이 루덴도르프 장군이라는 사실을 앍고 모두 침묵하였다. 군부는 그 당시 독일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집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반대를 표명하는 것은 반국가적인 행위가 되었다. 처음 출범할 때 노르디스크 영화사. PAGU, 메스터 GmbH를 합병하였고, 1921년까지 21개 영화사를 UFA 스튜디오 아래 집결시켰다. 그러면서 바벨스베르크 스튜디오를 대대적으로 수리하면서 오늘날 영화사에서 프릿츠 랑의 <메트로폴리스>, 무르나우의 <최후의 사람>을 보면서 감탄해마지 않는 UFA 스튜디오가 되었다. UFA는 거의 모든 영화를 제작했다. 극영화, 다큐멘터리, 민족지 영화, 그리고 무엇보다 매주 상영되는 뉴스 릴 영화를 중요하게 만들었다. 그 출발이 영화사를 불편하게 만들지만 UFA는 바이마르 문화의 위대한 꽃이 되었다. 여기서 독일 표현주의 영화가 시작되었으며, 그리고 독일 영화감독들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영화인들도 이곳으로 합류하였다. 프릿츠 랑, 빌헬름 프리드리히 무르나우, 조셉 폰 스턴버그, 에른스트 루비치, 빌헬름 디터, 로베르트 시오드마크(훗날 할리우드로 망명한 로버트 시오드마크), 심지어 빌리 빌더(훗날 할리우드에 간 빌리 와일더)도 여기에 합류하였다. 하지만 위대한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프릿츠 랑이 UFA 스튜디오에서 사람들을 최면으로 조종하는 마부제 박사의 이야기 <마부제 박사>를 찍고 있을 때 아돌프 히틀러는 감옥에서 자신의 자서전 <나의 투쟁>을 쓰면서 출감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화와 역사는 얼마나 가까이 있었는가.
“물체가 움직이는 효과가 특수효과예요. 그래서 조연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특수효과 이문걸) 1) 영화 특수효과(Special Effect)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그렇다, 마술사이기도 했던 감독 조르주 멜리에스(Georges Melies). 그는 원-쇼트 필름(one-shot film)에서 우연히 ‘스톱 모션(stop motion)’을 발견해 마치 마술에서처럼 영화에서도 특수한 효과인 스톱 액션(stop-action), 이중 노출(double exposure), 원근감 트릭(perspective trick)을 사용해 영화를 만들었다. <신데렐라 Cinderella>(1899)에서는 스톱 액션을 써서 호박이 화려한 마차로 변하고 재투성이 아가씨의 누더기가 파티 드레스로 변하도록, <인디언 고무 머리 Indian Rubber Head>(1902)에서는 부분 마스킹을 이용한 분할화면(spilt-screen)을 활용해 자기 머리가 우스꽝스럽게 폭발하도록 했다.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듯이 <달세계 여행 A Trip to the Moon>(1902)에서는 원근 전환(perspective shift)과 많은 트릭 효과를 사용해서, 총알 우주선이 저 멀리 우주의 달로 발사되고 달세계에서 지구의 우산이 버섯으로 깜짝 변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이렇게 시작된 특수효과는 오늘날의 관객들의 뇌리에는 컴퓨터 그래픽(Computer-generated imagery, CGI)을 사용하여 스펙터클한 화면 시각 효과(Visual effect)를 내는 할리우드식 공상과학 영화를 만드는 최첨단 기술로 떠오르기 마련이다. 1990년대 이후로 본격적으로 특수효과의 영역으로 진입한 컴퓨터 그래픽은 최근 한국영화에서도 <퇴마록>(박광춘, 1998)을 시작으로 <괴물>(봉준호, 2006), <신과 함께-죄와 벌>(김용화, 2017) 등의 판타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강제규, 2004), <웰컴 투 동막골>(박광현, 2009), <명량>(김한민, 2014)처럼 사극과 전쟁 영화, <화산고>(김태균, 2001), <악녀>(정병길, 2017) 같은 액션 영화는 물론 멜로드라마 <뷰티 인사이드>(백종열, 2015)에서도 수준급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시각효과는 대부분 광학효과를 만들어내는 후반작업을 의미하는 것으로 엄격히 말하면 특수효과의 일부분이다. 자연현상인 눈, 비, 안개, 지진부터 건물 파괴, 총격이나 폭발의 장면 등을 기계적 또는 화학적 방법으로 재현하는 것, 고속/저속촬영은 물론 애니메이션이나 미니어처 같은 촬영 방법을 함께 동원해 실감나는 장면을 연출하는 그 모두를 일컫는 것이 바로 특수효과이다. 그래서 특수효과를 담당하는 인력들은 영화 연출에 전반에 대한 미학적 기술적 인식은 물론이고 물리 법칙이나 화학 배합에 대한 지식을 장착해야 한다. (사진1) <5인의 해병>(김기덕, 1961)에서처럼 1960년대 전쟁영화에서는 특수효과랄 것도 없이, 실탄을 장착한 총기를 사용해서 실제 전투 장면을 연출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의 궁금증, 그렇다면 한국영화에서 이러한 특수효과는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상상과 공상의 장면을 구성하고 코믹한 효과를 주기위해 특수효과가 시작된 서구의 영화 제작과는 달리, 한국영화에서의 특수효과는 영화계가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는 1950년대 후반, 일제 강점기나 한국전쟁 등 민족의 수난을 소재와 주제로 한 영화들에서 시작되었다. <5인의 해병>을 연출한 김기덕도 회고한 바 있듯이, 연기자 주변의 땅바닥에 총이 맞아 튀는 효과를 내기 위해 군이나 경찰의 지원과 엄격한 통제 하에 명사수를 데려다 실제로 실탄 사격을 해댔다. 2) 이처럼 전쟁과 첩보, 군사, 액션영화에서 적과의 총격이나 전투 장면에 으레 등장하기 마련인 총격과 폭파 효과를 내던 것이 바로 한국 특수효과의 시초였다. 실제 총에 실탄을 장전해 연기자들이 목숨을 걸고(?) 영화를 찍던 1960년대 초, 중요하지만 또 위험한 소품인 총기나 무기류를 챙겨 관리하는 것이 바로 제작부 소품 담당의 주요 임무였다. 아직은 영화 엔딩 크레딧에 ‘특수효과’라는 명칭으로 오르지도 못한 채, 총기류와 폭약류를 전문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이가 바로 이문걸이다. 1996년 <크레이지 댄스)<박한순>을 마지막으로 약 7백여 편의 극영화, <배달의 기수>등 군 홍보영화와 <전우> 같은 4백여 편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특수효과를 담당했다. ‘보이는 모든 장면을 실감나게 만드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은 이문걸은 특수효과의 불모지에서 수많은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이 분야를 개척한, 명실상부 1980년대까지 한국영화계에 독보적이고도 유일한 특수효과 ‘맨’이었다. 그러므로 한국 특수효과의 역사는 이문걸의 작품연보와 일치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사진2) 군홍보영화 <잃어버린 세월>(설태호, 1990) 촬영현장에서 왼쪽부터 특수효과 감독 이문걸, 감독 설태호, 촬영감독 팽정문 이문걸은 1935년 일본 나가노켄에서 태어나 해방 직후 한국으로 왔다. 1956년에 군에 입대하게 되는데 꼼꼼하고 부지런한 성격 덕분에 상병 계급이던 당시, 오히려 하사를 병기계 보로 두고 병기계 담당을 맡았다. 1960년 한흥영화사의 제작부에 들어가게 된 것은 영화계에서 일하던 동생 이예남의 권유 때문이었다. 병기계 담당을 하던 군에서의 경력이 인연이 되어 그는 자연스럽게 제작부에서 총기를 관리했다. 그가 제작부로 입사한 한흥영화사는 최관두가 이끌고 있었고 당시 제작부장은 김홍빈이었다. 1959년 창립한 한흥영화사는 정창화의 멜로드라마 <사랑이 가기 전에>(1959)로 영화제작을 시작했지만 주로 활극, 스릴러를 기획, 제작하면서 가히 ‘액션 스펙터클의 총본산’으로 불렸다. 김홍빈의 제작부에서 활동한 이문걸은 <지평선>(1961)의 정창화, <싸우는 사자들>(1962)의 김묵,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의 임권택, <창살 없는 감옥>(1963)의 강범구의 작품을 함께 했다. (사진3) <지평선>(정창화, 1961) 포스터. 이 영화에서 이문걸은 제작부에서 총기 담당을 맡으며 특수효과에 입문했다. (사진4) <싸우는 사자들>(김묵, 1962) 포스터. 이 영화에서 이문걸은 ‘소품’ 담당으로 처음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지평선>에서도 활약을 했지만 이문걸이 처음 크레딧에 이름을 올린 것은 한흥영화사의 10회 기념작 <싸우는 사자들>의 ‘소품’ 담당이었다. 휴전회담이 열리고 있는 한국전쟁 당시 철원지구에 잠입한 유격대의 활약상을 그린 이 작품은 여성 유격대원들의 전투장면과 포로수용소의 대폭파 장면이 압권이었다. ‘7백 여 명의 「엑스트라」 및 약 6백 자루의 권총, 「엠원」 소총, 「칼빙」소총, 자동소총, 다발총 등의 소화기를 동원하였고 TNT 폭탄 2백 「파운드」씩 두 번’을 사용해, 촬영 당시 ‘파편으로 경상을 입은 「엑스트라」가 21명’이나 될 정도로, 당시 한국영화에서는 처음 있는 특수효과를 실험해 전쟁 스펙터클을 구현해 낸 액션 영화였다. 3) (사진5) <두만강아 잘 있거라>(임권택, 1962) 중 독립군과 일본군이 펼치는 설원의 최후 전투 장면 일본군 시설을 파괴하는 학생독립단의 무력 항쟁을 그린 임권택의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는 특수효과 ‘맨’ 이문걸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첫 촬영은 독립투사가 일본군 중대의 공격을 받는 장면이었다. 대관령에서 촬영한 이 장면을 위해 이문걸은 연기자들의 안전을 확보하고 실탄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총격 효과를 내는 특수효과를 실험한다. 마분지를 연필 굵기로 3cm씩 말아서 그 속에 특수 약품을 넣어 가짜 실탄을 만들었다. 그렇게 백여 개를 만들어 하나씩 특수전선을 연결한 후 땅속에 일정한 간격으로 묻어 선에 전기가 흐르도록 합선·폭발하여 흙이 튀면서 실탄이 맞는 특수 효과를 만들어 냈다. 4) 또 이 영화에서 놓칠 수 없는 장면은 만주로 가려는 독립군들의 마지막 격전, 두만강 도하를 목전에 둔 겨울 계곡에서 독립군과 일본군이 벌이는 전투이다. 영화 내내 어두웠던 흑백 시네마스코프의 화면은 눈 쌓인 설원을 활강하는 스키 부대의 활약이 돋보일 뿐만 아니라 엄청난 살상이 벌어지는 총격전은 비장할 만큼 눈부시기도 하다. (사진6) <증언>(임권택, 1973)의 탄착효과가 돋보이는 전투장면 (사진7) <증언>(임권택, 1973)의 한강 다리 미니어처 폭파 장면, 이문걸은 특히 <빨간 마후라>(1964)와 <대괴수 용가리>(1967)의 경험 이후에 다리 폭파를 연출하는 데 있어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임권택과 이문걸이 함께 만든 이러한 액션 미학은 <증언>(1973), <낙동강은 흐르는가>(1976), <임진란과 계월향>(1977), <아벤고공수단>(1982), <개벽>(1991), <장군의 아들3>(1992), <태백산맥>(1994)으로 이어진다. 점차 영화계 내서도 총격 효과를 내는 것, 화약을 다루는 것이 전문적인 영역으로 인식되면서, 이문걸은 자연스럽게 ‘특수효과를 개척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처럼 한흥영화사에서 탄탄하게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이문걸은 1963년 영화사가 폐업하자 <소만국경>(강범구, 1964)에서부터는 본격적으로 ‘특수효과’로 크레딧을 올렸고, 조수 5명을 데리고 독립했다. (사진8) <소만국경>(강범구, 1964) 총격 장면의 화약 효과 ‘제작부’나 소품‘으로 이름을 올리던 그가 특수효과로 독립하면서 시작한 것은 ‘가짜 실탄’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이 ‘가짜 실탄’은 하나하나 말아서 만들어야했던 불편한 ‘마분지 실탄’이나 다소 위험했던 공업용 뇌관을 대신할 수 있는, 보다 간편하고 좀 더 안전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실탄과 선을 직접 맨손으로 합선시켜야만 폭발시킬 수 있던 방법도 개선해서 버튼 하나를 눌러 수백 발의 실탄을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자동 폭발시킬 수 있는 전자식 ‘컨트롤 박스(control box)’도 그의 특수효과 팀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사진9) <빨간 마후라>(신상옥, 1964) 미니어처로 제작한 비행기와 한강 다리 장면 미니어처(miniature)를 제작해 물리적, 화학적 효과를 가미하는 촬영 방법은 데이비드 W. 그리피스의 <인톨러런스>(1916),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1927)에서도 사용했던 영화사 초창기부터 발달해온 오래되었지만 대표적인 특수효과 기법이다. <빨간 마후라>(신상옥, 1964)에서 이문걸은 동생 이예남과 함께 미니어처 작업을 처음 시도했다. 당시 주먹구구식의 미니어처를 만들어 야외에서 촬영해 폭파 장면을 찍었다. 이런 장면의 연출은 감독과 긴밀하게 소통해야하는 것은 물론, 폭파되어 전소될 건물을 짓기 위해 미술 담당 스태프에게 톱밥을 섞은 연한 석고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을 하고 여러 번 실험해 촬영 스태프와 합을 맞추는 과정을 거쳐야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이때부터 그는 영화에서 여러 번 한강 다리를 폭파시키는 경험을 했는데, 다리 폭파(?)의 전문가가 되었다. (사진 10)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 중 칠흑 같은 우주에서 별 사이를 비행하는 우주선 장면 (사진 11)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 중 스크린 프로세스를 이용해 용가리가 서울 시내의 건물을 파괴하는 장면 (사진 12)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 중 용가리와 대치하는 군의 포격 장면 (사진 13)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 중 용가리가 한강 다리를 파괴하는 미니어처 장면 이문걸이 본격적으로 미니어처와 결합한 특수효과를 몸에 익힌 것은 김기덕의 한국형 공상과학 영화이자 괴수물 <대괴수 용가리>(1967)에서였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철사에 모형 비행기를 매달아서 자연스럽게 움직이도록 하는 공중전을 연출했고, 떨어지는 유성은 물론 반짝이는 별 사이를 비행하는 우주선을 영상화했다. 또 특수전선을 늘어놓고 순간적으로 전류를 흐르게 하여 번개가 치게 하고 미니어처로 만든 한강 다리가 폭파되는 장면을 거뜬히 해냈다. 이 영화에서 이문걸은 괴수물에 능숙한 일본의 특수효과 전문인력들에게 연화(煙花, 불꽃놀이 폭죽으로 사용되는 화약)로 영화 촬영용 폭약을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미니어처이다 보니 축소해 만든 건물이나 다리를 폭파하면 폭파 시간이 너무 짧은 것은 물론 눈으로 보기에도 작은 폭발로 보인다. 이를 스크린 상에서 용가리가 야기한 거대하고 웅장한 재난의 현장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특수카메라를 이용한 고속 촬영은 물론 스크린 프로세스를 이해한 특수효과 팀의 폭파 기술이 유기적으로 접목되어야 한다는 방법론을 체화했다. 그가 이때 연마한 미니어처 폭파 기술은 이후 <증언>에서의 한강 다리 폭파 장면은 물론, 1980년대를 풍미했던 <조선왕조 오백년>같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임진왜란의 해전을 재현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사진14) <갯마을>(김수용, 1965)에서 이문걸이 만들어 낸 새벽의 안개 장면 하지만 총기나 폭약으로 특수한 효과를 만들어내는 기술자로만 이문걸을 설명해서는 안 된다. ‘눈으로 보이는 모든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특수효과 담당자가 맡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프레임 속에서 바람이 불고, 눈비가 오고, 지진이 나게 하고, 물 위에 살얼음이 뜨게 만들었다. 연기자의 몸에서 피가 날 수 있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훨훨 공중을 날 수 있게 만들어야 했다. 우선 김수용의 <갯마을>(1965)에서의 안개 낀 바닷가 소나무밭 장면을 보자. 시동생 성칠(이낙훈)과 시어머니(황정순)은 마을 사람들이 잠든 안개 낀 새벽을 틈 타 주인공 혜순(고은아)이 상수(신영균)이 마을을 떠나보낸다. 부산 기장에서 촬영한 이 장면에서 감독은 ‘바다 전체에 안개(스모그)를 깔아 달라’는 불가능에 가까운 주문했다고 한다. 하지만 혹여 안개가 낀 바다를 연출하기 위해 바다 전체에 연기를 까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바람이 불 수 있는 야외공간을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당시 스모그를 만들어내는 담당 스태프를 ‘쪼다통’이라 불렀다. 피우라는 시점에 해당 공간에 스모그를 채운다고 해도 바람이 불어 버리면 담당 스태프는 변명의 여지없이 ‘쪼다’ 소리를 듣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제안으로 이 장면은 바람이 거의 없는 기압이 낮은 새벽에 배를 타고 바다 위에서 숨을 참아가며 연막통을 터뜨려 만들어낸 것이었다. (사진15) <결사대작전>(고영남, 1969)에서 인천상륙작전을 경험한 이문걸을 이후 <오, 인천!>(1981)의 특수효과에서 눈부신 활약을 한다. (사진16) <들국화는 피었는데>(이만희, 1974) 포스터 (사진17) <의사 안중근>(주동진, 1972) 포스터 흑백 시네마스코프가 표준이던 시기 특수효과를 시작했던 이문걸은 영화를 촬영하기 이전에 연기자들과 동선을 맞춰보고 촬영지에 가서는 수차례 시험 폭파를 했다. 연기자의 안전을 위한 이유가 첫 번째였기는 하지만 필름 값이 너무 비쌌기 때문에 제한된 예산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완벽한 폭파 시험뿐이었다. 1960년대 후반 컬러 시네마스코프가 점차 표준이 되어 가자 감독들은 특수효과에서 더 많은 폭파 불꽃을 시각화하기를 원했고, 총탄을 맞자마자 피가 나는 자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싶어 했다. <의사 안중근>(주동진, 1972) 같은 영화에서 안중근(김진규) 의사가 이등박문(박노식)에게 총격을 가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이를 위해서 이문걸은 피가 범벅된 화약과 함께 솜을 긴 대롱에 넣고, 에어스프레이(Air-spray)로 쏘아주는 방식을 사용했다. 전쟁 영화에서 총탄을 맞아 가슴에서, 머리에서, 철모에서 피가 흐르는 장면들은 분장과 이런 특수효과의 트릭들을 활용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1970년대는 대만과 홍콩영화와의 합작이 많아지고, ‘으악새 영화 혹은 참바라 영화’로 불리는 액션영화가 국내에서 많이 제작되던 시기, <돌아온 외다리>(이두용, 1974), <소림사의 결투>(채양명, 최현민, 1975), <국제경찰>(고영남, 1976) 같은 영화에서 이문걸은 배우들의 액션과 점프를 도와줄 수 있는 효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다양한 장비를 도입하는 노력을 하기도 했다. (사진18) <오, 인천! Oh, Inchon!>(테렌스 영, 1981) 포스터 이 영화 작업을 통해 이문걸은 할리우드식 영화제작 및 운영시스템과 선진 특수효과를 경험했다. (사진 19) <오, 인천! Oh, Inchon!>(테렌스 영, 1981) 폭격 장면 스틸 특수효과가 주요했던 전쟁영화 <오, 인천! Oh, Inchon!>(테렌스 영, 1981)은 이문걸의 작품연보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마찬가지로 이 영화의 크레딧에서 그가 특수효과를 담당했다는 흔적은 없다. 이 영화에 참여하게 되면서 이문걸은 <오, 인천!> 촬영에 참여해 할리우드식 영화의 제작 및 운영 시스템과 선진 특수효과를 경험하게 되는 값진 계기를 얻었다. 통일교 문선명의 제작으로 인천상륙작전을 다룬 이 작품은 <디어 헌터 Dear Hunter>(마이클 치미노, 1978)에서 특수효과를 담당했던 프레드 크래머(Fred Cramer) 팀이 도맡아 작업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촬영을 위한 무기류의 국내 반입이 쉽지 않았을 뿐더러 할리우드에서 촬영용으로 사용하던 흑폭약이나 화학 약품들을 한국에서 구하는 일이 녹녹치 않았다. 또 특수효과가 대부분인 로케이션 촬영이 상당수이고 계획대로 촬영할 수 있기 위해서 국내 여건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자 이문걸의 특수효과 팀이 합류했다. 실제로 이 영화의 촬영용 폭약은 대부분 이문걸이 직접 공수해 가능한 것이었고, 이문걸 팀은 촬영 상황에 따른 장비 응용력은 할리우드 특수효과 팀에 비해 월등했기 때문에 이 팀에 대한 신뢰는 점점 깊어져갔다. 5)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인천 등대 유리창을 깨어야 했는데 건설부 친구들이 꼭대기에 올라가는 사다리를 제대로 만들지 않아서 산소통을 끌고 갈 수가 없었다. 그러자 도리가 없어서 이문걸 씨가 고무줄에 베아링을 연결지어 쏘아 깰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 한국 측의 이문걸 씨나 박광남 씨도 상당한 실력자들이어서 미국 측도 만만히 볼 수가 없었다.” 6) 실사에 더 유능했던 할리우드 특수효과 팀과 미니어처를 제작해 한강 다리 폭파 장면을 촬영했으나 결국 감독 테렌스 영은 이문걸에게 맡겨 그 장면을 재촬영을 했을 정도로 그의 미니어처 폭파 기술을 인정했다. 또 할리우드 스태프들은 이문걸이 만든 콘트롤 박스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결국 이문걸 팀에게 컨트롤 박스를 얻어갔다. 총탄이 비 오듯 퍼붓고 여기저기서 폭탄이 터지는 아비규환의 전쟁터. 그리고 가슴에 총탄을 맞은 연기자는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이 모든 장면들은 진짜‘처럼’ 보이는 비장한 아름다움을 가져야하고 감독이 ‘컷’을 외칠 때까지 연기자들과 스태프들은 머리털 하나 다쳐서는 안 된다. 이문걸이 일생을 바친 특수효과란 “같은 양의 특수약품이더라도 방향, 습도, 위치에 따라 위력이 다르고 화면도 달라” 7) 지기 때문에 철저한 계산은 물론 수많은 경험치가 필요한, 자신은 물론 스태프의 목숨을 담보로 한 매번 위험천만한 작업이었다. 총기 소지가 힘들 뿐 아니라 탄약과 화약을 민간인에게는 공식적으로 판매하지 않는 한국에서 이문걸은 종종 ‘불법으로’ 일했다. 그는 40여 년 동안 참고할 만한 그 어떤 선례도 없는 가운데 영화 장면을 위해서 총을 개조하고 뇌관을 만들었다. 이문걸은 서늘한 간담을 뜨거운 열정으로 녹이며 임하는 작업 과정 속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경험과 현장 감각으로 한국영화의 명장면들을 만들어 낸 특수효과 ‘맨’이자 스크린의 마법사이다. * 이 글은 필자가 면담자로 참여한 구술, 「이문걸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2』,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이채, 2006를 참고해 재구성하였다. 1) 「이문걸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2』,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이채, 2006 참고. 2) 「김기덕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1』,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이채, 2005 참고. 3) ‘TNT 4백 「파운드」로 쾅!’, 조선일보, 1962년 8월 28일 4면. 4) 오홍근, ‘국내 유일, 그만둘 자유도 없어 영화 특수효과맨 이문걸 씨’, 중앙일보 1981년 2월 17일 6면. 5) 한재수, 오! 인천 그 실록 <2회>, 영화, 영화진흥공사, 1980년 1/2월호, 45~48쪽. 6) 한재수, 오! 인천 그 실록 <3회>, 영화, 영화진흥공사, 1980년 3/4월호, 43쪽. 7) 오홍근, 앞의 기사.
잠시 방향을 돌려 존 포드의 무성영화 시대로 돌아가 보자. 존 포드는 거의 한 세기 전인 1917년, <토네이도 Tornado>(단편, 프린트 소실)로 데뷔한 이래 첫 토키 영화 <블랙 왓치 Black Watch>(1929) 전까지 모두 67편의 장 단편 무성영화를 만들었다. 그중에서 <스트레이트 슈팅 Straight Shooting>(1917, 첫 장편)과 < 철마 The Iron Horse >(1924)는 큰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고, 이 두 편을 포함해 < 우리는 친구 Just Pals >(1920), <샴록 핸디캡 The Shamrock Handicap>(1926), < 3인의 악인 3 Bad Men >(1926), < 사형집행인의 집 Hangman’s House >(1928) 등에서 포드는 뛰어난 장인적 능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필름들에 한정할 때, 무성영화 시대의 존 포드를 당대 최고의 감독 대열에 올리기는 망설여진다.(물론 <켄터키 프라이드 Kentucky Pride>(1925)를 사랑하는 하스미 시게히코나 <형사 라일리 Riley the Cop>(1928)를 절찬하는 태그 갤러거의 견해는 다를 수 있다.) 1894년에는 존 포드를 비롯해 뛰어난 영화감독들이 유난히 많이 태어났는데, 그중에서도 킹 비더, 조셉 폰 스턴버그, 프랭크 보재지 등은 무성영화 시대의 마지막 몇 년 동안 영화사가 추앙하는 기념비적 작품들을 내놓았다. 이들의 걸작 무성영화들에 비해 존 포드의 현존하는 무성영화들은 얼마간 성기고 거칠어 보인다. 무언가 허술해 보이던 존 포드의 무성영화들이 후에 존 포드 월드라고 불리어지게 될 거대한 세계를 향한 치열한 시행착오의 과정이었음을 우리가 알게 되는 건 나중의 일이다. 여기서 다룰 영화는 존 포드가 1928년에 내놓은 < 네 아들 Four Sons >이다. 이 영화는 많은 미국인들을 울린 성공적이고도 감상적인 멜로드라마이고 당대엔 절찬을 받았지만 걸작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앤드루 새리스나 태그 갤러거, 린지 앤더슨과 같은 열렬한 존 포드 지지자들도 훌륭한 작품으로 꼽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하며 포드의 영화 이력에서 중요한 자리에 있다고 생각한다. < 네 아들 >이 탄생한 1928년은 기묘한 해다. 영화사상 첫 토키영화 < 재즈싱어 >가 등장한 것은 1927년이지만 이 해에는 물론이고 1928년에도 대부분의 필름들은 여전히 음성을 담지 않았으며, 토키 영화의 본격적 확산은 1929년에 가서야 이뤄진다. 대신, 마치 무성영화의 마지막 연도를 축복이라도 하려는 듯, 경이로운 무성영화들이 1928년에 쏟아져 나온다. 버스터 키튼은 < 스팀 보트 빌 주니어 >와 함께 그의 마지막 걸작 < 카메라맨 >을, 찰리 채플린은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 서커스 >를, 킹 비더는 그들 사이의 우열을 논하기 힘든 위대한 무성영화 < 군중 >과 <쇼 피플>과 <팻시>를, 스웨덴에서 건너온 빅터 쇠스트롬은 당대의 여신 릴리언 기쉬와 함께 숨 막힐 듯 아름다운 < 바람 >을, 데뷔한 지 3년밖에 되지 않는 조셉 폰 스턴버그는 에밀 야닝스를 기용한 < 마지막 명령 >과 조지 밴크로프트를 기용한 < 뉴욕의 항구 >를, 독일 표현주의를 이끈 또 다른 맹장이지만 무르나우에 가려진 폴 레니는 자신의 할리우드 대표작 <웃는 남자>를 내놓았다. 대서양 건너편에서 칼 드레이어의 < 잔 다르크의 수난 >, 프리츠 랑의 < 스파이 >, 마르셀 레르비에의 <돈>, 장 엡스탱의 < 어셔가의 몰락 >이 태어난 것도 이 해였다. 물론 이 목록은 일부에 불과하다. 이쯤 되면 1928년의 베스트 리스트를 작성하는 것은 거의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평자라도 존 포드의 < 네 아들 >을 1928년의 최고의 10편에 포함시킬 가능성은 낮을 것 같다. 이 해의 영화들에 관해서라면 앞서 언급한 영화들은 물론이고, 차라리 감독 경력 3년 차에 불과했던 하워드 혹스의 간결하고도 아름다운 <항구마다 소녀가 있다>를 더 앞세우게 될지도 모른다. 당대의 쟁쟁한 작품들에 비하면 < 네 아들 >은 왜소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 영화를 주목해야 할 이유가 있다. 포드의 영화들이 대개 그렇듯 이야기는 단순하다. 독일의 작지만 평화로운 마을에서 어머니(베르늘 여사)는 네 아들과 행복하게 살고 있다. 둘째 조셉이 미국으로 이주한 뒤, 전쟁이 터지고 두 아들(프란츠, 요한)은 징집돼 전사한다. 어머니는 곤궁과 비탄의 시간을 보낸다. 이어 막내 안드레아스도 징집되며 미국이 독일의 적국으로 참전하자 조셉도 미군으로 징집된다. 전장에서 조셉은 안드레아스의 죽음을 목격한다. 전쟁이 끝난 뒤, 조셉은 어머니를 미국으로 초청하고 모자는 재회한다. 이야기만으로는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와 함께 존 포드의 대표적인 최루성 가족 멜로드라마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존 포드의 가장 이례적인 작품에 속한다. 그의 영화에 꽤 익숙한 사람이라도 < 네 아들 >에서 포드의 터치를 느끼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즉각 떠오르는 이름은 F. W. 무르나우다. 카메라의 움직임, 인위적인 조명, 심지어 연기 스타일에까지 무르나우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영화를 보고 알기는 힘들지만 촬영 장소가 < 선라이즈 >의 세트이기도 했다.) 한 감독의 영향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존 포드 영화는 <네 아들> 외에 찾기 힘들다. 이 점이 열렬한 존 포드 지지자들조차 이 영화를 평가절하하는 이유다. 무르나우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27년은 < 재즈싱어 >의 해이지만, 동시에 < 선라이즈 >의 해이기도 했다. 포드를 고용하고 있던 윌리엄 폭스는 무르나우의 < 마지막 웃음 >(1924)을 보고 감명을 받아 이 독일 감독을 미국으로 데리고 왔고, 무르나우는 1927년 그의 첫 할리우드 영화 <선라이즈>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흥행에선 실패했지만 할리우드 감독들에게는 중대한 체험이었던 것 같다. 앤드루 새리스는 “의심할 여지 없이 무르나우와 그의 UFA 동료들은 영화적 표현에 대한 할리우드의 사고에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고 적었다. (무르나우의 UFA 동료들이란 무르나우와 같은 시기에 미국으로 건너와 유니버설에서 <고양이와 카나리아> 등 세 편의 호러를 만들고 죽은 폴 레니, < 메트로폴리스 >와 <마지막 웃음>으로 당대 최고의 촬영감독으로 떠올랐고 1929년부터 미국에서 촬영과 연출을 겸한 칼 프로인트 등을 말한다. 프리츠 랑과 오토 프레민저가 할리우드에 도착한 것은 1930년대 중반이었다.) 존 포드도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 선라이즈 >를 보고 난 뒤 포드는 “지금까지의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 아마 앞으로 10년 안에 이보다 더 훌륭한 영화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포드가 이 정도의 찬사를 바친 대상은 D. W. 그리피스, 그리고 역시 1894년생인 장 르누아르 정도다.) 그런데 <선라이즈>의 어떤 점이 존 포드를 사로잡았을까. 더 중요하게는, 무르나우는 존 포드 월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물론 확답은 불가능하다. 다만 < 네 아들 >에서 약간의 힌트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 <네 아들> #2 <마지막 웃음> < 네 아들 >이 무르나우의 노골적인 모방처럼 보이는 점을 먼저 살펴보자. 우선 첫 장면(#1). 우체부 노인이 마을을 가로질러 베르늘 여사 집으로 향한다. 이 노인의 수염과 인상, 체구와 제복, 그리고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는 < 선라이즈 >가 아니라 < 마지막 웃음 >의 첫 장면(#2)에 등장하는 호텔 도어맨(에밀 야닝스)을 고스란히 옮겨온 것처럼 보인다. #3 #4 #5 전사 소식을 전하러 가는 우체부의 쇼트에서 그림자의 과장된 사용(#3), 경계선을 가시화하는 인위적 조명 기법(#4), 어머니가 떠난 네 아들의 환영을 보는 장면(#5) 등은 특정한 유사 사례를 거론할 필요도 없을 만큼 잘 알려진 무르나우와 독일 표현주의 본산인 UFA 스튜디오의 단골 기법들이다. #6 #7 #8 #9 #10 #11 무엇보다 < 네 아들 >의 특별한 점은 카메라워크다. 존 포드는 평균 4번에 1번 정도는 이동 카메라를 썼지만 카메라의 움직임이 느껴지도록 사용한 적은 거의 없다. 하지만 <네 아들>에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볼 수 없는 카메라 워크가 있다. 우체부 노인이 마을을 가로지를 때 핸드 헬드 카메라(#6, 7, 8), 그리고 기차가 도착할 때 아마도 기차의 움직임과 함께 이동하는 카메라(#9, 10, 11)는 자기 과시적으로 보일 만큼 부드럽게 공간을 유영한다. #12 #13 #14 <마지막 웃음> 아무래도 존 포드는 < 선라이즈 >가 아니라 < 마지막 웃음 >을 교본으로 삼은 것 같다. 물론 이 영화에 영향받은 사람이 존 포드만은 아니다. 촬영기술과 그에 연관된 영상기법에 관한 한 <마지막 웃음>은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영화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페이드, 디졸브, 이중인화, 몽타주, 거울의 왜상 등 그때까지 개발되어온 기법들이 총동원되었고, 여기에다 촬영감독 칼 프로인트는 이전의 어떤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자유로운 시점 쇼트를 선보였다. 수평 트래킹은 돌리를 사용했지만, 공간의 안쪽으로 이동하는 수직 트래킹을 위해 프로인트는 무거운 카메라를 가슴에 묶고 움직이며 공간의 질감 자체를 변화시켰다.(#12, 13, 14) <마지막 웃음>은 최초로 본격적인 핸드헬드 카메라를 사용한 영화로 기록된다. 포드는 이전까지 자신의 영화에 사용하지 않았으나 < 마지막 웃음 >에서 사용된 카메라 워크의 거의 모든 것을 < 네 아들 >에서 시도한다. 하지만 무르나우의 영향이 직접적으로 드러난 이 시기의 다른 영화들 < 사형집행인의 집 > <블랙 왓치> 등을 제외하면 이후의 포드 영화에는 <네 아들>의 무르나우적인 카메라워크가 더 이상 눈에 띄게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네 아들>은 그저 일회적인 모방의 실험에 불과한 것일까. #15 #16 #17 #18 #19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 네 아들 >과 포드의 이전 영화를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는 모방될 수 있고 유행될 수 있는 이런저런 표현주의적인 기법이라기보다 공간을 다루는 방식이다. 이 연재의 다른 글에서도 말했지만, 우리는 포드의 프레임에서 종종 동굴을 보는 느낌을 갖게 되는데, 그런 느낌을 주는 첫 영화가 바로 <네 아들>이다. 이 영화는 공간의 깊이를 극단적으로 과장한다. 인물들도 가로축이 아니라 공간의 안쪽에서 바깥쪽으로의 혹은 바깥쪽에서 안쪽으로의 수직축을 따라 혹은 사선 방향으로 이동한다.(#15, 16, 17, 18, 19) 포드의 다른 영화에서는 물론이고 무르나우의 영화에서도 이처럼 공간의 깊이에 거의 강박적으로 몰두한 장면은 거의 없다. 칼 프로인트에게 배웠고 후에 오슨 웰스와 윌리엄 와일러와 함께 과시적인 딥 포커스 화면을 만들어낸 그렉 톨랜드의 작품에서도 이 정도의 심도화면을 찾긴 힘들다. 물론 심도 화면은 이미 뤼미에르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토마스 인스와 그리피스를 거치며 풍성해졌다. 포드의 이전 무성영화들에도 종종 아름다운 심도화면이 등장한다. 하지만 전경 중경 후경을 모두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심도 화면은 < 네 아들 >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은 프로인트의 수직 이동 카메라가 감각케 하는 공간의 아득한 깊이로부터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물론 공간의 깊이 자체가 특별한 미학적 성취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포드는 공간의 깊이를 다루는 과정에서 풍경이라는 문제를 만나게 된 것 같다. 여기서 풍경은 자연 풍경이 아니라 사건에 연루되지 않지만 프레임을 구성하는 물질적 환경을 뜻한다. 말하자면 포드는 공간의 깊이를 추구하다 공간을 구성하는 물질적 이미지들의 특별한 표정과 강인한 침묵을 만나면서, 사건에 연루된 환경으로서의 공간이 아니라 사건을 초과하는 환경으로서의 풍경이라는 차원을 발견하게 된 것 같다. 예컨대 < 철마 >(1924)의 카메라는 인물과 행위에 집중하며 풍경은 사건의 장소라는 객관적인 지표로서만 등장한다. 하지만 < 네 아들 >의 카메라는 공간의 깊이에 몰두하면서 인물과 행위와 사건을 초월하는 풍경의 흔적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20 <마지막 웃음> 이것은 무르나우나 UFA의 작업을 통해 직접 배운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무르나우와 UFA 영화에서 앞서 정의한 의미의 풍경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풍경처럼 보이는 것은 심지어 자연 풍경조차 모두 일종의 무대장치다. 그것은 사건이 벌어지는 객관적 장소가 아니라 인물의 심리가 투영된 주관적 풍경, 혹은 배우의 표정 및 동작과 함께 불안과 히스테리의 정신적 상황을 구성하는 감정 이미지이다. < 마지막 웃음 >에서 남자가 자신을 향해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환상에 빠지는 장면을 떠올려보라.(#20) #21 <애로우스미스> #22 <역마차> #23 <도망자> 독일 표현주의의 미학적 뿌리가 연극 무대였고, 무르나우와 폴 레니, 에른스트 루비치, 오토 프레민저 그리고 배우 에밀 야닝스가 표현주의 연극을 이끈 막스 라인하르트 사단에 속했다는 점을 떠올리면 풍경의 무대장치화 혹은 풍경의 심리화는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들의 공헌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인물과 사건에 비해 부차적이었던 물질적 환경을 강력한 정신적 심리적 이미지로 변형시킨 것이다. 존 포드는 분명히 이것을 배웠고 이후의 영화에서 그 영향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장면들이 종종 등장한다. 앞서 말한 장면 외에도 예컨대 <애로우스미스>(1931)의 한 장면(#21), 혹은 < 역마차 >(1939)나 < 도망자 >(1947)의 한 장면(#22, 23)을 떠올려보자. 하지만 존 포드는 거기서 머물지 않았다. 그는 도리어 풍경이 사건을 부차화하고 사소화하는 초월적 차원까지 밀고 갔다. 비유컨대, 그는 지평선을 발견한 것이었다. 만년의 존 포드가 영화를 찍는 방법을 묻는 어린 스티븐 스필버그에게 “지평선을 프레임의 아래에 둘 건지 중간에 둘 건지 위에 둘 건지 그것만 알면 돼.”라고 대답했을 때 그가 말한 지평선이나, “내 영화의 진정한 스타는 대지”라고 말했을 때 그가 말한 대지는 바로 이 풍경의 다른 차원이었을 것이다. #24 그런 점에서 이 단순하고 감상적인 영화 < 네 아들 >에서 단 하나의 이미지를 꼽으라면 바로 초반의 이 장면이다.(#24) 전경에 나뭇가지가 어른거리고 있고 중경에 어머니는 빨래를 하고 있다. 그리고 후경에는 돌다리 위로 마차가 지나가고 있다. 이 장면은 아름답다. 비극적 사건이 벌어지기 전이므로 더없이 화사하고 밝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장면에는 말하기 힘든 비애의 기운이 있다. 그것은 단지 어머니가 혼자 빨래를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나뭇잎이 어머니 앞에서 무심하게 흔들리고 있으며, 멀리 교각은 미동도 없이 침묵하고 사람들은 아무도 이쪽을 쳐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포드가 심도 화면에 매혹되어 이 장면을 찍었을지라도, 그렇게 찍힌 풍경은 불현듯 인물을 떠나고 있다. 포드의 세계가 이 장면으로부터 새로 시작되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계속)